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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1 잘못된 선택 (13/83)

Chapter. 11 잘못된 선택

알람 소리에 눈을 떴다. 6시 40분. 5분만 더 자고 싶었다. 반쯤 감긴 눈으로 알람을 재설정하려 하는데 밖이 시끄러웠다. 서진은 결국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났다. 눈가를 비비며 거실로 나왔다. 거실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건너편 서윤의 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무슨 일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채 서윤의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윤은 없었다. 이불도 깔렸지 않고, 엉망인 방 안을 본 서진은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문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윤이었다. 어젯밤 복장 그대로였으나 어딘가 달랐다. 서윤이 벽에 걸린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버, 벌써 일어났어? 금방 밥 차려 줄게…….”

서윤의 눈가가 빨갰다. 서진은 서윤이 울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단순히 운 것에 대한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설마, 서진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서진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닫고, 세수하는 척 물을 틀었다. 화장실 문을 일부러 살짝 열자 물소리와 섞인 서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기욱 씨, 오빠. 대체 어제 어떻게 된……. 그 전화는……. 제발, 아냐. 그런 게 아니구요. 제발… 흐윽… 전화 끊지 말고 얘기해요. 대체 어떤 년이…… 흐으으윽….”

“…….”

서진은 불을 끄지 않은 채로 거실로 나왔다. 서윤은 서진이 나왔다는 사실조차 눈치를 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내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오빠, 아, 제발. 흐으윽…. 휴대폰을 쥔 서윤의 눈에서 눈물이 그치지 않았다. 서윤이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서윤은 화장실 너머에서 물소리가 계속 들리는 것을 눈치챘다. 시간이 얼어붙은 것 같았다. 얼어붙은 시간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진은 도망치듯 방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아 잠깐…!”

서윤이 뒤늦게 서진을 불렀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거실로 나온 서윤은 화장실의 물을 잠갔다. 서진의 방 문고리를 돌렸으나 문고리는 열리지 않았다. 문에 기댄 서진은 별생각이 다 들었다. 단순히 서윤 때문만은 아니었다. 문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그런 거 아냐. 누나 괜찮아. 진짜야. 응?”

서윤이 방 안으로 도망친 서진을 달랬다. 밤새 울어서 쉰 목소리는 믿음이 가지 않았다. 괜찮아. 그 말만 몇 번이나 들었는지 몰랐다. 서진아. 학교 가야지. 서윤의 말에 서진은 마지못해 문을 열었다.

“씻고 와. 아, 누난 진짜 괜찮다니까?”

목소리가 떨려 왔다. 서윤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연결되지 않은 수화음이 들렸다. 휴대폰 너머 번호가 익숙했다. 서진은 다시 화장실로 뛰어들어 갔다. 학교는 가야 했다. 세수하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오자 서윤이 간단하게 아침밥을 차려 줬다. 서진은 말없이 식사했다. 최대한 늦장을 부려 봤으나 소용이 없었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았다. 다녀올게. 서진은 서윤의 떠밀리다시피 해 집을 나왔다. 문자가 와 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휴대폰을 열었다.

「이따 숙제 좀 보여 줘.」 오전 7:00

시헌이었다. 묘한 느낌이 들었다. 시헌의 문자를 본 서진은 뒤늦게 숙제를 한 노트를 책상 위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진이 집으로 몸을 돌렸다. 반지하의 집 문은 잠기지 않은 상태였다. 슬쩍 문을 열고 거실로 들어갔다. 숙제 노트가 있는 방보다 서윤이 더 걱정이었다. 방문 너머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흐흐으윽… 기욱 씨. 제발. 제가 잘못했어요. 오해예요……. 흐윽….”

서진은 도망치듯 방 안으로 숨어들었다. 인기척에 서윤이 고개를 돌렸으나 거실이 조용하자 다시 휴대폰을 붙잡았다. 서윤의 울음소리가 한동안 이어졌다. 가방을 멘 채 귀를 막았다. 서진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흠칫, 놀란 서진이 휴대폰을 열었다. 시헌이다.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서진의 손이 떨려 왔다. 전화를 받으려던 찰나 먼저 전화가 끊겼다. 잠시 뒤 답장이 왔다.

「읽었으면 답장 좀 해.」 오전 7:05

하, 눈에 들어오는 문자에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제가 문자를 확인했는지 하지 않았는지 대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말투. 이럴 때마다 서진은 시헌이 기욱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서진은 거의 기어가다시피 해 책상에 놓인 노트를 가방에 넣은 뒤 답장을 보냈다.

「이따. 알아서 베껴.」 오전 7:06

「고맙다.」 오전 7:06

답장이 왔다. 서진은 양손으로 휴대폰을 쥐었다. 통화기록을 들어가자 저장되지 않은 번호 하나가 나왔다. 서진이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몇 번 걸기 무섭게 연결이 됐다. 서진이 휴대폰을 붙잡았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릴 뿐 말은 없었다. 병원 같았다. 기욱이 금방이라도 전화를 끊을 것만 같았다.

― 시, 시헌이 형님?

― …….

― 누나… 전화 좀 받아 줘요. 제발…….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서진은 알지 못했다. 기욱이 전화를 받지 않는 한 서윤의 상태가 계속 이어질 거라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저, 잠깐 일 분만. 기욱이 근처에 있는 선배 의사에게 양해를 구했다. 시계를 본 남자는 한숨을 쉬었다. 빨리 끝내. 고개를 숙인 기욱이 복도로 나왔다.

― 학교는 얘기했어?

― 학교라니 그게 무슨……. 아.

한동안 말이 없었던 얘기였다. 서진이 곤란하다며 입을 떼지 못했다.

― 끊는다.

― 내, 내일……. 아니. 오, 오늘 얘기할게요. 말할 테니까. 그러니까 저기……. 누나 전화 좀.

문 너머로 기욱을 부르는 다른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욱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 회의 들어가야 돼.

― …….

― 답장 보내고 시간 날 때 전화할게.

― 저기 그…….

― 말했잖아. 좋은 선택이 아니라고.

서진은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일어나려 했지만, 다리가 풀린 탓인지 쉽게 일어나지지 않았다. 서진이 간신히 휴대폰만을 손에 쥐었다. 휴대폰 너머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 잘해.

전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 * *

수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선생님이 뭐라고 말하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머리가 돌아가지 않았다. 서진은 뒤쪽에 앉아 자는 시헌을 몇 번이나 힐끗거렸다. 시헌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다. 점심시간, 시헌은 밥을 먹기 무섭게 교실로 들어갔다.

평소에도 종종 그랬지만 요즘은 그 빈도수가 높아졌다. 은소는 없었다. 지금이라면 얘기할 수 있었다. 시헌에게 다가가려던 찰나 난데없이 현정이 나왔다. 가방을 메고 있었다.

“어디 가?”

“조퇴. 집안 행사가 있어서.”

그런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평소라면 한 번 더 물어볼 법도 했지만, 오늘만큼은 예외였다. 현정이 서진과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는 시헌을 번갈아 바라봤다. 흐음, 볼 근처로 손을 살짝 올린 현정이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헌이한테 할 말이라도 있어?”

“뭐? 내, 내가 왜…….”

“그치만 너 오늘 종일 시헌이만 봤잖아. 혹시 사랑에 빠졌다거나……. 큭큭.”

현정이 장난을 치며 웃었다.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그런 거 아냐. 장난치지 말고 집에나 가.”

“네네. 알겠네요. 내일 보자!”

현정이 손을 흔들며 계단 밑으로 사라졌다. 서진은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은소는 청소 당번이었다. 복도 한쪽 끝에 시헌이 있었다. 그 뒤 기욱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그 침묵이 서진을 더욱 숨 막히게 했다. 서진은 시헌의 앞으로 다가갔다. 시헌이 무슨 일이냐며 서진을 바라봤다. 살짝 심호흡한 뒤 입을 뗐다.

“나 못 할 것 같아.”

가방에서 단어장을 꺼내려던 시헌의 손이 멈췄다. 무슨 말인지 이해를 잘 못 하는 눈치였다. 아니나 다를까 질문이 들어왔다.

“무슨 소리야?”

“저번에 모의면접 할 때 말야. 선생님이랑 상담했는데, 학비가 생각보다 비싸더라고. 누가 일도 이제 막 안정됐는데 솔직히 부담 주고 싶지 않다고 해야 하나…….”

“장학금 받으면 되잖아.”

“그게……. 그렇게…….”

서진은 차마 시헌의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5교시 쉬는 시간에 서진은 이미 교무실에 내려갔다 왔다. 거의 1년을 내리 준비했다. 이제 와 누나 핑계를 대는 스스로가 너무나 초라해졌다. 평소 적당히 놀고, 적당히 수업을 듣던 시헌이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며 자극을 많이 받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째서인지 죄를 지은 느낌이 들었다.

“그…. 미안.”

“그래서 지금 포기하겠다는……!”

서진이 시헌의 말을 잘랐다.

“열심히 준비했는데……. 하하, 미안해. 그리고 나 오늘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야! 강서, 진!”

시헌이 서진을 불렀다. 서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계단을 내려갔다. 굳이 말하자면 돌아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서진을 부르는 시헌의 목소리는 때마침 지나가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묻혔다.

* * *

서진이 주변을 둘러봤다. 건너편에 기욱의 차가 있었다. 선팅이 짙게 되어 있어서 그런지 내부가 보이지 않았다. 차 문이 살짝 열렸다. 문틈 사이로 기욱이 보였다. 서진이 문을 열고 차 안에 탔다. 차가 출발했다. 늘 그렇듯 내비게이터는 꺼져 있었다. 차는 빠르게 동네를 빠져나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과고가 아니어도 대학은 갈 수 있어.”

“형님은 이미 과고잖아요.”

“사실은 나도 별로 가고 싶지 않았거든. 원해서 간 게 아냐.”

갓길에 차가 멈췄다. 연락이 온 건 그날 저녁이었다. 말했냐는 문자에 말했다고 대답한 게 다였다. 그 후 내리 이 주 동안 기욱과 연락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문자를 보낸 이후 누나에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이 주 하고도 삼 일이 지났을 무렵 기욱에게서 일방적으로 연락이 왔다. 딱히 나갈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발이 떨어졌다.

“이, 이제 된 거 아닌가요?”

돈은 돌려줬지만, 기욱이 시키는 대로 과고까지 포기했다. 툭, 뭔가가 서진의 무릎 위로 떨어졌다. 기욱의 휴대폰이었다. 갓길에 있던 차가 천천히 움직여 한적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서진은 기욱의 휴대폰으로 고개를 숙였다. 서윤과의 문자였다. 문자를 본 서진은 기욱과 휴대폰을 번갈아 바라봤다. 서윤의 고백 문자였다. 차를 세운 기욱이 서진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손가락질했다.

“그거.”

“…….”

“아직 답장을 안 했거든.”

차가 멈췄다. 기욱의 휴대폰을 쥔 서진의 손이 떨려 왔다.

“이걸 왜 저, 저한테…….”

기욱이 서진 쪽으로 손을 까닥였다. 다가와 보라는 뜻이었다. 눈치를 보던 서진이 기욱의 앞으로 다가갔다. 더. 기욱이 가까이 오라고 했으나 서진은 일정 거리 이상 기욱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아래로 떨어지는 휴대폰을 재빨리 낚아챈 뒤 허리를 안았다.

“무, 무슨… 읍!”

숨이 막혀 왔다. 온몸에 힘이 풀리는 것 같았다. 기욱의 입술이 서진의 안을 탐했다. 서진이 몇 번이나 놓아 달라고 발악했으나 기욱은 듣지 않았다. 기욱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중학교 3학년, 한두 번 사귄 여자 친구와 키스를 하거나 장난을 친 적은 있었으나 결국 어린아이 장난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경험치가 달랐다. 금방이라도 녹아들 것 같은 진한 키스에 서진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키스 상대가 남자라는 충격 이상으로 서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턱을 돌린 뒤 입안 구석구석을 탐했다. 기욱은 서진과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날카로운 눈빛이 서진을 향하고 있었다. 서진이 팔을 뒤로 해 문고리를 잡아당겼으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서진의 허리가 반쯤 뒤로 넘어갔으나 기욱은 자연스럽게 그런 서진을 붙잡았다. 창문 너머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보이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다. 정작 기욱은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외부에선 아무리 보려 해도 차 안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흐읍… 읍! 하아….”

기욱이 입술을 뗐다. 동시에 서진이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입 주변으로 타액이 묻어났다. 몸을 살짝 웅크린 서진이 물러날 수 있는 만큼 뒤로 물러났다. 차 안은 너무나 좁았다. 기욱이 서진의 위로 살짝 올라탔다. 떨어진 휴대폰을 주운 뒤 답장을 보냈다. 좋다는 답장이었다. 기욱이 휴대폰 액정을 서진 쪽으로 돌렸다. 문자를 본 서진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기욱의 목소리가 서진의 귓가에 울렸다.

“내가.”

“…….”

“왜 시헌이를 택했는지 알려 줄까?”

서진은 기욱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3살 많은 누나, 9살과 10살 차이가 넘는 남동생. 운오가 아닌 시헌인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변하지 않았다. 기욱은 서진의 이해 같은 건 처음부터 안중에도 없다는 듯 멋대로 말을 이어 갔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입술에 닿았다. 아직 마르지 않은 입가의 타액이 기욱의 손가락을 축축하게 적셨다.

“닮았거든. 취향이.”

“그, 그게 무슨…….”

“명색이 형인데. 동생한테 장난감 빼앗기는 건 기분이 좋지 않잖아? 동생이 없는 넌 무슨 말인지 모르려나.”

“지, 지금 무, 무슨 말을…….”

서진은 끝말을 잇지 못했다. 정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었고, 뭐라 물어야 할지 이해도 가지 않았다. 이 상황 자체가 서진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옆으로 쓸어 넘겼다.

카페에서 서진을 본 순간, 그리고 서진과 서윤의 사정을 다른 사람을 통해 들은 순간 짐작했다. 서진은 결코 서윤의 남자가 될 수 없었다. 어린 서진이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서윤이 행복하길 바랄 뿐이었다. 10년 뒤엔. 글쎄? 어떻게 될지 알 수는 없으나 그런 건 기욱이 알 바가 아니었다. 기욱에겐 지금 이 순간이 중요했다.

“누나가.”

“…….”

“좋아했으면 하는 거잖아.”

서진이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이 엄마와 닮았든, 말든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늘 웃었으면 좋겠다. 서윤이 우는 모습, 억지로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다. 끝없이 이어질 것으로 생각했던 어둠 속에서 서진을 구해 준 건 다름 아닌 서윤의 미소였다. 낡은 창고 안에서 서진은 서윤에게 몇 번이나 구원을 받았는지 모른다.

부모님은 없다. 서윤과 서진을 괴롭히던 친척들 또한 이제는 연락하지 않았다. 서윤에게 남은 건 자신밖에 없었다. 서윤이 기욱을 택했다면 거기에 서진이 끼어들 권리는 없었다. 다만 서윤의 결정이 불행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약간 긴 서진의 머리를 쓸어 넘기던 기욱이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그것은 필시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았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겠네.”

서진의 몸 근처에 뭔가가 닿았다. 딱딱한 물체는 아니었다. 기욱이 손을 펼쳤다. 그날, 서진이 기욱에게 돌려줬던 두 장의 수표였다. 기욱은 끝내 가져가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떨 필요 없잖아.”

기욱이 서진을 달랬다. 서진이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어 수표를 잡았다.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아래로 누르며 쓰다듬었다.

“누, 누나랑. 시헌이한테는…….”

“말 안 해.”

기욱은 가볍게 어깨를 털고 운전석에 몸을 기댔다. 차가 다시 골목을 빠져나왔다. 내비게이터를 켰다. 라디오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기욱이 소리를 살짝 줄였다.

“가고 싶은데 있으면 말해.”

서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서진의 손이 의자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서진의 손에 있던 수표가 구겨졌다.

* * *

‘가고 싶은 데 있으면 말해.’

옛날 생각이 났다. 도대체 왜 이 상황에서 그런 생각이 났는지 서진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숨이 막혀 왔다. 등 뒤로 묶인 팔이 아팠다. 그날 이후 모든 일이 한순간의 꿈처럼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나 악몽은 쉬이 깨지 않았다.

끽, 침대 매트가 살짝 흔들렸다. 눈을 돌리자 침대 밑에 깔린 핑크빛 매트에 옷가지들이 늘어져 있었다. 벽을 장식한 진분홍색의 꽃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유흥가의 붉은 조명들은 마치 그날 기욱을 따라갔던 호텔 스위트룸의 분위기를 상상하게 하였다. 당시에는 의미를 알 수 없었던 그 말들이 시간을 지나면서 그 뜻을 찾아갔다.

두 번은 없어.

어린 자신을 두고 했을 기욱의 상상들이 서진을 소름 끼치게 했다. 서진은 기욱의 성적 취향에 문제가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저를 안던 기욱의 나이와 비슷해진 서진이지만 서진은 결코 지나가는 학생들을 보고 욕정을 느끼거나 하지는 않았다.

차 안의 키스 이후, 기욱은 성인이 될 때까지 서진을 건드리지 않았다. 그런 걸 생각하면 단순 성적 취향에 관한 문제가 아닐지도 몰랐다. 벌써 몇 년 전 일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그런데도 서진은 아직도 기욱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이해할 여지조차 주지 않았다.

20살, 성인이 된 서진의 첫해는 지옥이었다. 모처럼의 휴가에 출근해야 하는 누나―서윤을 대신해 기욱과 여행을 간 것이 화근이었다. 거절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방법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일방적인 섹스, 서진의 기억 속 그날은 강간이나 다름없었다. 그 이후였다.

이제 막 의대에 들어간 서진과 달리 기욱은 4년 차 레지던트였다. 인턴이나 초년 차 레지던트 시절보다 어느 정도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서 기욱은 점점 더 일방적으로 서진을 불러냈다. 그리고 마찬가지인 일들이 이어졌다. 한 번의 충격은 쉬이 가시지 않았지만, 충격이 이어지면 무뎌지는 법이었다.

물론, 오늘 같은 날은 좀 예외였다. 제아무리 집안이 좋고, 의대와 레지던트 시절에는 실력이 좋다는 말을 들어 온 기욱이지만 교수가 된 뒤에는 사정이 달랐다. 의대를 다닐 때 기욱이 수업을 들어 왔던 교수님들, 선배, 10년, 20년 차의 경력을 가진 의사들은 이제 막 교수의 직함을 달고 들어온 기욱과 비교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럴 때면 기욱은 마치 갈증이 난 사람처럼 서진을 찾았다.

후우, 기욱의 낮은 숨소리가 모텔 방 안을 울렸다. 서진의 몸이 침대 아래쪽으로 반쯤 흘러내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얇은 커튼이 쳐진 창문 틈 사이로 유행이 지난 노래들이 정신없이 섞여 들렸다.

서진은 몸을 일으킬 기운조차 없었다. 가시지 않은 술기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욱이 서진의 허리를 잡아 침대로 이끌었다. 몸이 틀어지자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찔렀다.

“하으….”

서진의 신음에 기욱이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다며 뒷목을 살짝 긁적였다. 기욱의 남청색 반소매 티셔츠는 땀에 눌어붙어 그 자국이 선명했다. 기욱이 셔츠를 벗어 바닥으로 내던졌다. 그 모습에 서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기욱이 평소에 어떤 섹스를 하는지 서진은 너무나 잘 알았다.

기욱은 섹스를 할 때 옷을 잘 벗는 편이 아니었다. 후에 일이 있어서인 경우가 가장 많았으나 대게의 이유는 그럴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옷을 입고 있다 해서 섹스를 하는 데 지장을 받는 건 아니었다. 그러니 귀찮게 옷을 벗을 이유가 없다는 뜻이었다.

참으로 자기중심적인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서진은 오늘 기욱이 작정하고 왔음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기욱은 서진에게 병원 일을 말하지 않는다. 비록 이제 막 실습을 다니는 처지라 해도 아주 모르는 건 아닐 텐데. 어째서인지 서진을 보는 기욱의 시선은 그날과 달라진 것이 없었다.

기욱의 그런 행동이 서운하면서도 자존심이 상했다. 테이블 데스, 기욱은 다른 무엇보다 수술 중 환자가 사망하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뺨에 올라온 손이 차가웠다. 사람의 손이 아닌 것 같았다. 얼음을 댄 것 같은 느낌임에도 불구하고 따듯함에 눈이 감겨 왔다. 희미하게 끊기는 의식 사이로 목소리가 들렸다.

“…아. 강서진.”

이름을 부르는 다정한 목소리. 기욱이 이름을 부를 때면 마치 저주에 걸린 것처럼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과연 저 목소리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유혹하고, 또 눈물을 흘리게 하였을까 생각하면 가슴이 메었다. 서진은 색색거리며 숨을 쉬었다.

묶인 팔이 여전히 아렸다. 차라리 이 모든 게 꿈이면,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원상태로 돌아가 있기를 바랐다. 허나 기욱의 목소리는 서진의 의식을 심연의 끝에서 끌어냈다.

“눈 떠.”

“무슨… 흐으읍!”

잠시 정신을 반쯤 잃었던 서진이 정신을 차리자 난데없이 키스해 왔다. 동시에 빠져나왔던 기욱의 페니스가 서진의 안을 다시 정신없이 헤집었다. 서진은 뒤늦게 제가 무슨 상황에 부닥쳤는지 깨달았다.

“전화도 안 받고.”

“하윽, 으윽! 파, 팔… 하읏… 읏! 팔… 제발….”

“감히 다른 남자랑 술을 마셔?”

“읏, 으윽, 하윽! 씨… 발… 동기…… 너도 누나… 저, 전화 하윽!”

살이 맞닿는 소리가 났다. 조금 쉬는가 싶으면 기욱은 다시 서진의 안을 탐했다. 이미 쉴 대로 쉰 데다 정신이 없는 서진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기들이었다. 권력 남용으로 번호까지 알아내 전화를 건 기욱이 그 사실을 모를 리 없었다.

전화? 길어야 3번 정도 씹은 게 전부였다. 그것도 일부러 씹은 것도 아니었다. 술에 취하다 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일 아닌가. 자긴 하루 반나절 서윤의 전화를 씹는 주제에 누가 누구에게 할 말인지 참으로 기가 막혔다.

“팔… 팔… 제발… 흐읏… 으읏!”

슬슬 묶인 팔이 아려 왔다. 이젠 팔이 빠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서진의 안에서 페니스를 빼낸 기욱이 정액이 든 콘돔을 바닥으로 내던졌다. 서랍을 뒤졌으나 더 이상의 콘돔은 없었다.

분명 사정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기욱의 페니스는 도무지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꼿꼿하게 선 페니스를 볼 때마다 서진은 미칠 것 같았다. 다리를 오므리려 하자 기욱이 재빨리 서진의 다리를 옆으로 벌렸다. 묶인 팔을 두고 침대 뒤로 물러났다.

페니스 대신 기욱의 기다란 손가락이 서진의 안으로 들어왔다. 기욱은 서진이 좋아할 만한 부분을 계속해서 찔렀다. 서진의 엉덩이가 살짝 들렸다. 앞이 미칠 것 같았다. 정작 팔이 묶여 있으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을 기욱이 모를 리 없었다. 기욱과의 섹스는 최악이지만 섹스를 할 때면 기욱은 늘 서진에게 최고의 쾌락을 선사했다.

마치 저 외에 다른 사람들과의 섹스는 용납할 수 없다는 듯이 시간이 지날수록 서진은 기욱에게 옭아매져 갔다. 팔이 아팠다. 사정도 하고 싶었다. 이 상황을 끝낼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담담하게 활짝 열린 서랍 안을 살피던 기욱이 서랍 안쪽으로 손을 뻗었다.

정신이 없는 서진은 그게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손을 말 수 있는 정도의 바이브였다. 기욱의 손이 스위치를 켜자 윙윙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서진은 기욱의 손에 있는 물체에 대해 눈치를 챘다. 서진의 눈이 커지며 몸이 떨려 왔다. 기욱이 주는 쾌락 때문만은 아니었다.

“걔 말야. 아까.”

“…….”

“술 취한 너를 왜 굳이 쫓아왔을까?”

“읏, 씨발… 무슨 생각을 하는… 하으으읏!”

기욱의 바이브가 서진의 귀두 끝을 건드렸다. 서진의 몸이 경련하듯 떨렸다.

“내가 너랑 키스할 때 대박이던데.”

“그 새낀 그냥 동기… 으읏, 팔, 좀…….”

“팔 아파?”

서진이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길거리에서 키스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일 학교에 퍼질 소문도 모두 관계없었다. 기욱이 제발 팔을 풀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기욱이 서진의 다리를 벌렸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안을 빠져나왔다. 서진의 몸이 축 늘어졌다. 기욱이 바이브를 서진의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생각보다 금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흐으읏! 씨, 씨발 빼… 빼. 빼라고…….”

“장난감은 취미가 아니지만. 있는 걸 마다할 이유는 없지.”

기욱이 버튼을 누르자 서진의 몸이 떨려 왔다. 기욱이 발악하는 서진을 붙잡았다. 하읏, 읏, 안에서 울리는 진동에 서진은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차라리 기절하는 편이 이것보다는 훨씬 나을지도 몰랐다. 움찔거리는 서진을 둔 기욱이 페니스를 서진의 근처로 가져다 댔다.

“흐읏, 읏, 제발… 넣지 마……. 부탁이니까….”

“팔, 아프다며. 풀어 줄까?”

입술을 깨문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의 손가락이 서진의 입안을 헤집었다. 입 근처가 빨갰다. 서진은 종종 입술을 깨무는 습관이 있었다. 기욱의 페니스가 금방이라도 서진의 안에 들어갈 것처럼 닿아 있었다. 기욱의 다른 손가락이 서진의 귀두 끝을 가볍게 튕겼다. 서진의 신음과 함께 묽은 쿠퍼 액이 흘러나왔다.

“팔, 아파?”

“아파. 흐읏… 으읏… 아파!!”

“이거. 참으면 풀어 줄게.”

서진이 배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역시나 이대로 넣을 생각이었다. 만약 이대로 넣었다간 정말 미쳐 죽어 버릴지도 몰랐다. 서진이 할 수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기욱이 그런 서진을 토닥였다.

“할 수 있어.”

“모, 못… 으읏… 못 해. 흐읏… 읏! 싫어….”

“서진아. 강서진. 울지 말고.”

서진은 혼란스러웠다. 그는 왜 이럴 때만 이렇게 친절한 걸까. 기욱의 페이스에 휘말린 서진이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파, 팔만 풀어 준다면…….”

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쾌락과 고통의 끝에 달한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어린아이같이 구는 서진은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수많은 사람과 섹스를 해 왔던 기욱이지만 늘 그렇듯 후회는 없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기욱에게 안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단 한 명, 서진만큼은 아니었다. 누군가에게 집착해 본 적이 없는 기욱을 집착하고, 애달프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기욱의 페니스가 천천히 서진의 안을 탐했다. 서진의 허리가 들리며 활처럼 휘었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신음을 내뱉었다. 억지로 사정을 참는 모습이 눈에 훤했다.

기욱은 어렸을 때부터 남들과 달리 집착이 강했다. 원하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어야 적성이 풀렸다. 물건이든, 사람이든 마찬가지였다. 서진을 제 손에 넣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를 생각하면 기욱은 서진을 놓아줄 수 없었다. 그런데 전화를 무시한 데다 다른 남자와 술을 마셔?

서진은 동기인 데다 술에 취해 그랬다고 변명했지만 그걸 판단하는 건 서진의 몫이 아니었다. 저 말고 다른 사람과 있는 서진을 볼 수 없었다. 서진이 쾌락에 젖은 이 모습은 오직 기욱만의 것이여야만 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기욱의 허리가 점점 빠르게 움직였다. 중간에 못 하겠다며 도망치는 서진의 허리를 붙잡아 몸을 돌렸다. 콘돔을 끼지 않아 질척한 소리가 그대로 났다.

“아읏, 하응, 으읏… 아흐으윽!!”

“하아, 하, 하으으….”

기욱이 낮은 신음을 내며 서진의 안에서 사정했다. 서진이 하지 말라며 힘겹게 발을 움직였으나 듣지 않았다. 안에서 느껴지는 물컹한 느낌에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페니스를 빼낸 뒤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서진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윙윙대는 바이브를 끄자 서진의 몸이 축 늘어졌다. 으흐, 선을 따라 바이브가 서진의 안에서 나왔다. 서진의 몸을 살짝 들어 등 뒤로 묶인 팔을 풀었다.

퍽― 하고 예상치 못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모텔 밖에서 사이렌 소리가 났다. 무슨 사고가 난 모양이었다. 사람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기욱은 서진에게 맞은 뺨을 만지작거렸다. 입안으로 피가 고였다. 있는 힘을 쥐어짜 기욱을 때린 서진은 그대로 기욱의 앞으로 고꾸라지며 쓰러졌다. 기욱이 막 풀린 서진의 팔을 잡아 들어 올렸다. 팔을 따라 서진의 몸 또한 힘없이 들렸다. 기욱은 손등으로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이런 건. 생각지도 못했는데.”

“죽어….”

“…….”

“너 같은… 건, 죽어 버려!”

기욱이 다시 서진의 위로 올라탔다. 서진이 다시 손을 들었으나 힘이 빠질 대로 빠진 서진의 움직임은 별다른 위협이 되지 않았다. 기욱은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생각은 없었는데.

“강서진, 날 이렇게 만든 건 너야.”

―최악의 밤이었다.

* * *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디서부터 정신을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침대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물소리가 끊기더니 샤워실에서 기욱이 나왔다. 가운을 벗은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옷을 갈아입었다. 잘 기억은 나지 않았으나 어젯밤에 입었던 것과는 다른 옷이었다.

서진은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으나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침대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었다. 다리가 굳은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술이 덜 깬 건지 몸이 흔들렸다. 서진과 기욱의 눈이 맞았다. 넥타이를 바로 맨 기욱이 서진의 앞으로 다가왔다.

창문 너머로 이른 아침의 햇빛이 들어왔다. 어젯밤 기욱은 서진을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아붙였다. 서진이 경험한 기욱과의 섹스 중에서 어젯밤은 최악이었다. 마지막에는 어떻게 매달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던 서진은 자신이 기절하고 일어난 지 고작 한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조차 몰랐다. 날밤을 새웠지만, 기욱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기욱이 다가오자 서진이 침대 뒤로 물러났다. 이내 물러날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안 서진은 이불로 몸을 반쯤 가렸다. 기욱의 손이 서진의 이마에 닿았다.

“열 있네.”

서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목이 잠겨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탓도 있었다. 기욱이 한숨을 쉬더니 테이블 의자에 걸어 두었던 코트를 집어 들었다. 기욱의 두꺼운 코트가 서진의 얇은 이불 위로 덮여졌다. 지갑을 꺼낸 기욱이 테이블 위로 카드를 올렸다.

코트를 입지 않은 기욱은 셔츠와 니트 차림이었다. 한겨울, 아무리 생각해도 저 차림으로 밖을 나간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서진은 나가려는 기욱을 붙잡았다. 목이 쉬어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가려는 건…….”

술을 먹다 일방적으로 끌려온 서진은 지갑도, 겉옷도 없었다. 기욱이 한숨을 쉬었다.

“차 있어.”

“…….”

“이따 저녁에 들를게.”

이내 기욱은 방을 빠져나갔다. 서진은 기욱이 두고 간 잠바 위로 얼굴을 묻었다.

* * *

평소보다 차가 막혔다. 불과 몇 시간 전에 근방에 교통사고가 난 탓이었다. 도로는 간신히 뚫렸으나 여기저기 사고의 잔해들이 가득했다. 간신히 병원 안으로 들어선 시헌은 한참을 돌고 난 뒤에서야 간신히 주차할 수 있었다. 조수석에 있는 가방을 챙긴 후 병원으로 들어갔다. 먼저 온 팀 동기들이 손을 흔들었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다. 서진이 없었다. 한참 대화 중인 동기 한 명을 건드려 서진의 안부를 물었다.

“아프다고?”

“뭐, 그렇다고 하던데?”

그는 별일 아니라며 중얼댔다. 6시 5분, 눈치를 본 시헌이 휴대폰을 살짝 꺼내 문자를 보냈다.

「너 아프냐?」 오전 6:06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시헌의 손이 멈췄다. 동기들 사이에서 뜻밖의 대화가 들려왔다.

“이야, 하여튼 어제 그 남자가. 사람들 보는 데서 키스를 딱! 하는데 주변 사람들 다 쳐다보고 대박. 아, 솔직히 그 얼굴에 게이면 인정. 강서진 그 새끼. 능력자야 능력자.”

“그게…. 무슨 소리야? 강서진이 남자랑 뭐, 라고?”

“아, 넌 K대 같은 팀 아니었으니까 모르겠구나. 어제 실습 끝나고 애들이랑 한잔했거든? 서진이 걔가 술에 반쯤 취해서 밖에 나가는데…….”

시헌은 중간부터 그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았다. 휴대폰을 뒤진 시헌이 사진 하나를 내밀었다. 기욱의 사진이었다.

“네가 봤다는 사람. 이렇게 생겼어?”

“어! 맞네. 맞아. 이 사람. 너 어떻게 알았냐?”

시헌이 재빨리 휴대폰을 덮었다. 그가 궁금한 모양인지 계속해서 물어 왔으나 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때마침 실습을 담당하는 의사 한 명이 안으로 들어와 이야기가 끊겼다. 오전 실습을 마치고 병원 식당으로 내려간 시헌은 주변을 둘러봤다. 식당 내에는 사람들이 가득해 앉을 자리도 없었다.

같이 내려온 친구들이 자리를 찾는 사이 시헌은 거침없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가장 안쪽에 있는 긴 테이블, 앉아 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서너 자리 정도가 남아 있었으나 쉽게 옆에 앉으려는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헌이 밥을 먹고 있는 기욱의 테이블 위로 손을 올렸다.

테이블 위에 놓인 식판이 살짝 흔들릴 정도의 충격이 가해졌다. 근처에 있던 몇몇 의사들이 이상한 눈으로 시헌을 보고 있었다. 몸을 살짝 숙이자 시헌의 목에 걸린 실습생 신분증이 흔들렸다. 웅성거리는 식당 안에서 작은 침묵이 흘렀다. 뒤늦게 자리를 잡은 친구 한 명이 멀리 있는 시헌을 발견하고 뛰어왔다.

“야, 박시헌. 너 여기서 뭐 하는……. 아.”

긴 테이블을 반쯤 매운 의사들의 모습에 친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아니나 다를까 주변 의사들이 시헌을 힐끗거리고 있었다. 슬쩍 고개를 들어 앉아 있는 의사들을 살폈다. 교수들이었다. 식당을 빽빽하게 메운 자리에서도 이곳만 유독 비어있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는 잘못 걸려도 단단히 잘못 걸렸다며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그의 인사를 제대로 받아 주는 의사는 거의 없었다.

“야, 안 가?”

고개를 살짝 숙인 친구가 등 뒤로 시헌을 잡아끌었다. 그가 계속 가자며 시헌을 끌어냄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너무 충격이라 얼어붙은 건가? 그는 시헌의 행동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나랑 얘기 좀 하자고.”

시헌을 위아래로 훑은 기욱이 수저를 내려놓았다. 그로써 시헌이 기욱을 부르는 것이 명확해졌다. 그는 기욱의 가슴 주머니에 걸린 신분증을 힐끗거렸다. 신경외과 교수 박기욱. 젠장. 그가 시헌의 발을 밟으며 신경질을 냈다. 다른 의사들 무리도 아니고 교수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서 시비를 털다니 미친 게 분명했다.

“야야, 박시헌. 너 진짜 돌았냐? 아, 죄송합니다. 저희가 H대 실습생인데 오늘 첫날이라……. 잘 몰라서, 친구가 실례한 것 같은…….”

시헌은 억지로 고개를 숙이려 하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이내 당황하는 그를 보더니 짧은 한숨을 쉬었다.

“우리 형이야.”

“뭐?”

동시에 기욱도 쯧, 하고 혀를 찼다. 안쪽에 앉은 교수들을 보던 기욱은 식판을 정리했다.

“동생이 할 말이 있다고 하니.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이따 뵙죠.”

기욱은 동생이라는 말을 유독 강조했다. 그 말에 몇몇 교수들이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이 친구에게 먼저 가라며 눈치를 줬다. 뒤늦게 시헌의 집안과 J대에 대해 생각한 그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피했다. 식판을 정리한 기욱은 식당 입구 한쪽 구석에 몸을 기댔다. 여전히 드나드는 사람들은 많았다. 기욱이 가운을 걷어 시간을 확인했다.

“멀리 못 가.”

시헌은 기욱의 말이 사실이 아니면 혹은 핑계일지도 모른다고 느꼈다. 교수인 기욱이 눈에 띄는 곳에 있어서 좋을 이유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나가는 몇몇 의사들이 기욱을 알아보고 슬쩍 인사를 했다. 시헌을 알아보는 실습생들도 있었다. 자리로 돌아간 그가 벌써 떠든 모양이었다.

“저 사람 교수 아냐?”

“대박. 박시헌 쟤 사고 침?”

“야, 형이래 형. 너 모르냐? 쟤네 아빠 병원 이사장이잖아. 의사 집안.”

팔짱을 낀 기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동시에 시헌은 기욱이 일부러 멀리 가지 않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 상황에서도 장난을 치는 기욱이 시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헌이 소매가 긴 가운 안으로 주먹을 쥐었다.

“형, 적당히 해.”

“내가 뭘.”

기욱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가볍게 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어젯밤, 남자, 아프다고 하는 서진. 기욱이 무슨 짓을 했을지는 않고 봐도 뻔했다. 짜증이 났다.

“말장난할 기분…!!”

“너나 잘해.”

“…….”

“내 건 내가 알아서 해.”

기욱의 말에 시헌은 한동안 멍하니 서 있어야만 했다. 내 거? 하, 다음 날이 뻔히 J대 실습이라는 걸 알면서 밤새도록 서진을 괴롭힌 사람이 할 말은 아니었다. 평소라면 물러났을지도 모르지만, 이번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하, 둘이 사귀는 것도 아닌 주제에. 사람을 물건 취급이나 하고.”

“박시헌.”

기욱이 시헌의 이름을 불렀다. 그 한마디에 얼어붙은 것처럼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시헌은 기욱이 형이지만 가끔 무서울 때가 종종 있었다. 기욱이 잔뜩 긴장한 시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시헌의 어깨가 움찔하고 떨렸다. 기욱이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마법이 풀린 것처럼 시헌의 긴장 또한 누그러졌다. 동시에 시헌은 자신이 기욱에게 놀아났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었다.

“화풀이는 끝?”

“화풀이 아냐.”

“글쎄. 내 귀에는 화풀이로 들리는데.”

기욱이 시간을 확인했다. 식당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건 시헌을 놀려 주려는 의도도 있었으나, 정말 금방 올라가 봐야 하기 때문도 맞았다. 기욱이 팔짱을 풀며 벽에서 몸을 뗐다.

“들었다. 우리 과 온다며. 저녁에 보자.”

“형, 잠깐…!”

시헌이 뒤늦게 기욱을 불렀으나 기욱은 손을 흔들며 재빠르게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때마침 식당을 빠져나오는 의사 무리에 누가 기욱인지 알 수 없게 되어 버리고 말았다.

“씨발.”

짜증이 난 시헌이 욕을 지껄였다. 도무지 밥을 먹을 기분이 나지 않았다. 가운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혹시 서진인가 재빨리 휴대폰을 확인했다. 서진은 아니었다. 뜻밖의 인물이긴 했다. J대에서 간호사를 하고 있는 서진의 누나, 동시에 기욱의 여자 친구이기도 한. 서윤이었다. 후우, 시헌은 심호흡을 한 뒤 최대한 친절하게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서윤 누나. 무슨 일이세요?

― 시헌아. 혹시 오늘 실습 끝나고 괜찮으면…….

* * *

저녁 10시가 넘었다. 근처 골목에 차를 댄 뒤 밖으로 나왔다. 차에 몸을 살짝 기댄 시헌은 낡은 주택가를 둘러봤다. 주로 2층, 3층의 낮은 벽돌 주택이었다. 어렸을 적에는 높아 보였던 담이며 집들이 너무나 낮게 느껴졌다. 많지는 않지만, 주택 곳곳에 사람들이 나간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담배를 피워야 할 것 같았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물었다. 후, 담배 연기가 가로등 불빛 위로 올라갔다. 시헌의 앞으로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지나갔다. 중학교 교복이었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남학생이 고개를 돌리더니 걸음을 빨리했다. 왠지 어렸을 적 생각이 나 괜히 웃음이 나왔다.

고등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기욱이 이사를 했다. 재수하기로 하고 기숙학원에 들어가 1년 정도는 거의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H대 의대에 입학한 뒤에는 자연스럽게 이사한 기욱의 집에서 머물렀다. 그날, 그 일이 있고 난 뒤 도망치듯 동네를 빠져나온 시헌은 이제는 예전 동네에 발을 붙이지 않았다. 돌아올 자신이 없었다.

몇 번인가 장학금을 받긴 했으나 서윤 혼자만으로는 서진의 의대 학비를 감당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서진의 집은 옛날 그대로였다. 어렸을 적 기억보다 대문은 더 낡아진 것 같으나 그 안은 변함이 없었다. 위화감이 들었다.

나는 이렇게 멀어졌는데, 너는 아직도 왜 거기에 있는 걸까? 내가 멀어진 걸까. 아니면 네가 멀어진 걸까. 감이 오지 않았다.

차 안에서 약 봉투를 꺼냈다. 담배를 끄고 낡은 철문을 두드렸다. 잠시 뒤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철컥하고 문이 열렸다. 문틈 사이로 반쯤 엉망이 된 머리로 자다 깬 서진이 서 있었다. 서진을 본 시헌이 약 봉투를 허공으로 들었다. 서윤인 줄 알았던 서진은 재빨리 문을 닫으려 했다.

시헌이 조금 더 빨랐다. 아픈 데다 힘이 없는 서진은 문고리의 주도권을 시헌에게 넘겨야만 했다. 문을 강제로 연 시헌이 멋대로 신발을 벗고 집 안으로 들어왔다. 낮은 천장 하며 눅눅하고 좁은 집이 시헌을 반겼다. 시헌이 열려 있는 서진의 방 안을 힐끗거렸다. 방바닥이며 주변이 두꺼운 의학서적으로 가득했다. 지금 생각하면 저 좁은 곳에서 어떻게 둘이서 잤나 싶기도 했다.

시헌이 약 봉투를 싱크대 위로 올렸다.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오늘부터 J대 실습이었다. 시헌도 같은 조니 아프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예고 없이 찾아올 거란 건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서윤 누나한테 들었어. 아프다고. 병원은?”

서진이 시헌의 눈을 피했다. 시헌은 그런 서진에게 별다른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집안에 의사가 많은 시헌에게 저런 반응은 어색할 것도 없었다. 시헌이 냉장고 안에 있는 물을 컵에 따랐다.

“약 챙겨 왔으니까 먹고 자.”

“자고 일어나면 나아.”

“병원 안 갔다며. 그럼 약이라도 먹어.”

“싫다고 했…!”

시헌이 서진의 앞에 섰다. 기욱과 달리 키가 많이 큰 편은 아니었지만, 아픈 서진에게 위압감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시헌이 손을 뻗으려 하자 서진이 움찔거렸다. 시헌과 기욱은 닮았다.

외모뿐만 아니라 성격이며 사소한 것들이. 예를 들면 지금처럼 뭔가를 강요하거나 의견을 요구할 때 한 손으로 허리를 짚으며 상대방을 내려다본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시헌은 의식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닮음이 서진을 더욱 힘들게 만들었다.

“너. 그러다 훅 간다.”

그렇게 금방이라도 사람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이어 가는 것 또한 닮았다. 서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에 속이 울렁거렸다. 기욱의 동생일 뿐인 시헌에게 죄는 없었다. 서진은 몸도 아픈 데다 짜증을 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 가긴 뭘 가.”

시헌을 지나친 서진은 결국 싱크대로 가 약 봉투를 뒤져 약을 먹었다. 물을 넘기자 목이 따가웠다. 약을 먹은 서진은 이제는 시헌에게 볼일이 없었다. 시헌을 돌려보낼 생각에 몸을 돌렸다. 시헌이 눈앞에까지 와 있었다.

“뭐야? 왜…, 읏.”

시헌이 서진의 팔을 잡아당겼다. 몸이 휘청거리며 금방이라도 닿을 만한 거리에 왔으나 절대 안기지는 않았다. 서진이 시헌의 손 위로 손을 올려 팔목을 가렸으나 소용이 없었다. 서진의 손목 위로 넥타이로 묶은 자국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유심하게 보지 않으면 발견하기 힘든 자국이었다. 자국은 거의 사라졌으나 아픔이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시헌의 손에 힘이 들어가자 서진이 아프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의 아픔을 눈치챈 시헌이 힘을 빼고 손을 놓았다.

“언제부터 그랬어?”

“뭐가.”

“팔. 언제부터 그렇게 당했냐고.”

“네가 신경 쓸 필요……. 하아, 가끔.”

서진은 뒷목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몇 번을 생각하지만, 몸이 아픈 마당에 시헌과 싸울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서진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뭐든 처음이 중요하지, 그 뒤는 무뎌지는 법이었다.

“최근 들어 가끔 그런다고. 병원에서 안 좋은 일 있거나 하면 더 그래.”

서진은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스스로가 참 웃겼다. 처음부터 기욱에게 이런 일을 당한 건 아니었다. 계기는 재수가 없었던 것뿐이었다고 보는 편이 맞았다. 기욱과 서진의 관계는 언제나 일방적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거친 일방적인 관계에 거부한 것이 원인이었다.

그 뒤로 기욱은 서진이 반항하거나 기분이 좋지 않을 때면 종종 그러고는 했다. 아무리 모텔에 있었다고는 하나 장난감을 쓰는 버릇도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았다. 서진은 이런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스스로가 역겨웠다.

“금방 괜찮아질 거야.”

“강서진.”

“…지 마.”

닮았다. 어렸을 때부터 쭉 생각했고, 지금도 생각하지만, 시헌은 기욱과 너무나 닮았다. 기욱을 미워하면 할수록 시헌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았다.

“그만하자.”

“…르지 마.”

“강서진, 서진아. 대체 이렇게까지 당하면서 참는 이유가 뭔데? 서윤 누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

“부르지 마! 닥쳐, 닥쳐. 그만. 그만하라고!! 박시헌!!”

강서진. 서진아. 나긋하게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가 싫었다. 미치도록 싫었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이름을 부를 때면 저도 모르게 마음을 허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자신도 어떻게 할 수 없는 감정이 참으로 저주스러웠다.

기침했다. 목이 아팠다. 서진의 기침에 시헌이 괜찮냐며 다가왔다. 서진이 시헌의 손을 쳐 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몸을 반쯤 숙인 서진의 눈가가 빨갛게 변해 있었다. 서진은 시헌을 노려봤다. 시헌이 살짝 뒤로 물러났다.

누나밖에 없다. 그 사실은 10년 전에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불이 난 아파트에서 소방관에게 방 안에 부모님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고 난 이후부터 세상엔 서윤과 서진 둘뿐이었다.

무엇을 위해 의사의 길을 선택했는가. 의대에 입학하고 첫 수업에서 교수님에게 가장 처음 들은 질문이었다. 돈? 명예? 누군가의 생명을 살린다는 사명감? 봉사 정신? 그런 거창하고 사소한 건 서진과 관계가 없었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이기적이기에 사람이었다.

의사가 되고 싶었던 서윤은 서진을 위해 의사의 길을 포기했다. 그런 서윤을 위해 의대에 들어왔다. 돈도, 명예도, 사명감이니 하는 것도 아니었다.

하하, 웃음이 나왔다. 기욱의 그림자에 묻혀 사는 시헌은 평생 이해하지 못할 게 틀림없었다. 서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이젠 서윤이 행복하다면 이런 대우쯤은 아무렇지 않았다. 서진은 그보다 더한 짓도 할 수 있음을 자신했다. 불이 난 아파트에서 빠져나오면서 그렇게 정해진 삶이었고, 보육원에 있는 서진을 서윤이 찾아낸 순간부터 그렇게 결심한 삶이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가.”

“서진아….”

“씨발, 이름 부르지 말고 제발 그냥 좀!! 가라고!!”

서진이 문 너머를 손가락질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숨이 막혀 미칠 것 같았다. 서진은 시헌의 눈을 피했다. 상처 받은 얼굴의 시헌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싫었다. 기욱도, 기욱과 닮은 시헌도. 그리고 그런 시헌에게 상처를 주고도 끝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자신이 미치도록 싫었다. 차라리 다 죽어버렸으면 좋을 텐데.

“나중에 연락할게.”

시헌은 결국 집을 나갔다. 낡은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 너머로 낯선 차가 서 있었다. 시헌의 차였다. 차는 출발하지 않았으나 서진은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문을 잠그는 것도 잊은 채 이불로 온몸을 뒤집어썼다. 얼마 뒤 차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멀어졌다.

* * *

띠링, 문자 소리에 잠이 깼다. 선잠이었다. 거실이며 집 안의 불이 그대로 켜져 있었다. 팔을 뻗어 책 사이에 있는 체온계를 집어 들었다. 아직도 열은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문자 알림이 뜬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결국,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새벽 2시를 훨씬 넘긴 시간이었다.

「몸은?」 오전 2:45

기욱이었다.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사람을 그렇게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 종일 연락 한 번 없더니 새벽에 달랑 문자 하나 보내는 건 무슨 예의인가 싶었다. 자고 있으면 어쩌려고. 서진은 이 상황에도 마이페이스인 기욱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답장을 보낼까 말까 하는 잠시 고민하던 서진은 휴대폰을 던지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의 연락을 무시해 이 지경까지 왔지만, 어차피 서진은 물러날 곳도 없었다. 제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잤다고 말하는 사람을 건드릴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몇 번인가 전화가 왔지만, 서진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잠은 오지 않았다. 막 잠이 들 무렵 묘하게 익숙한 차 소리가 서진의 귓가를 거슬리게 하였다. 익숙한 차. 서진이 이불을 걷고 몸을 일으켰다. 동시에 휴대폰에서 문자가 왔다. 서진이 재빨리 휴대폰을 집어 문자를 확인했다.

「집 근처야.」 오전 3:10

미친, 서진은 거실로 뛰어나왔다. 문을 잠그지 않은 탓인지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서진이 재빨리 문을 잠갔다. 차 소리가 끊기더니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소리가 가까워짐과 동시에 서진의 심장 소리 또한 점점 빨라졌다. 흐릿한 유리문 너머로 사람의 실루엣이 보였다. 덩치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서윤은 절대 아니었다. 서진은 없는 척 입을 꾹 다물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멋대로 열렸다.

집 안으로 들어온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집 문을 잠갔다. 서진의 눈이 커졌다. 기욱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커다란 차 키 사이로 작은 집 열쇠가 흔들렸다. 서진은 단 한 번도 기욱에게 집 열쇠 같은 걸 준 적이―줄 이유도 없고, 줄 생각 또한 없지만― 없었다. 누나―서윤의 짓이 틀림없었다.

신발을 벗은 기욱은 성큼성큼 거실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거실, 기욱은 서진의 앞에 바로 섰다. 시헌과는 사뭇 다른 위압감이 서진을 덮쳤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서진의 턱을 들어 올려 찬찬히 살폈다. 서진은 손 하나 꿈적할 수 없었다.

“내가 전화 받으라고 했지.”

기욱의 시선이 서진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 닿았다. 서진이 뒤늦게 휴대폰을 뒤로 숨겼다.

“지금 새벽이잖아요.”

“관계없잖아.”

기욱이 앞으로 다가가자 자연스럽게 서진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서진은 방문 너머 벽에 몸이 딱 달라붙었다. 서진은 아직도 어젯밤의 기억들이 가시지 않은 상태였다. 난생처음으로 그런 걸 안에 넣은 데다 그 상태로 하기까지 했다. 그 후 기욱은 서진이 몇 번이나 의식을 잃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목이 쉬어 신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제발 끝내 달라며 기욱의 꼭두각시처럼 허리를 흔들어 댔던 기억들이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 상태로 한 번 더 당한다면 그땐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서진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기욱에게 매달렸다.

“오, 오늘은 봐줘요. 제발…….”

“두 번은 없어.”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에는 마음에 들지 않던 기욱의 태도도 기욱과의 섹스를 피할 수만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기욱이 서진의 턱에서 손을 내려놓았다.

“밥은?”

“아무것도…….”

서진이 기욱의 벽 뒤에 걸린 시계를 힐끗거렸다. 새벽 3시가 넘었는데 밥을 물어보는 기욱도 참 이상했다. 기욱이 엉망인 방 안을 손가락질했다.

“하아, 들어가 있어.”

기욱의 말에 서진은 재빨리 방 안으로 들어갔다. 이불을 뒤집어썼으나 잠은 오지 않았다. 거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었다. 궁금했으나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얼마 뒤 책을 밀고 기욱이 누워 있는 서진의 앞에 앉았다.

이불을 돌돌 말은 서진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 고개를 숙이자 뜻밖의 것이 보였다. 죽이었다. 편의점에서 파는 죽은 아니었다. 가맹점 가게라는 것과 시간을 생각하면 낮에 사 뒀던 것이라는 걸 추측할 수 있었다.

“저녁에 들른다고 했잖아.”

서진은 뒤늦게 그런 말을 듣긴 들었다고 하고 생각했다. 그땐 정신이 없어 그 말이 무슨 말인지조차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욱의 머리는 모자에 눌려 엉망이 되어 있었다. 기욱은 수술이 생각보다 길어진 데다 여러모로 골치 아픈 일이 생겨 늦어진 거라며 변명했다.

새벽 3시, 늦어도 참으로 늦은 시간이었다. 기욱이 덜 데워진 죽을 슬쩍 내밀었다. 눈치를 보던 서진이 결국 그릇에 죽을 조금 덜었다. 뭐라도 먹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나갈 기운이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오후에 죽을 사 놓고, 저녁에 들르겠다며 그 죽을 들고 새벽 3시에 찾아오는 기욱이 서진은 참으로 웃겼다. 심지어 데운다고 데운 죽 또한 덜 데워진 모양인지 덩어리가 졌다. 서진이 죽을 퍽퍽하게 넘기고 있는 모습을 본 기욱이 한숨을 쉬었다.

“전자레인지 좀 사.”

“하, 불만이면 하나 사 주던가요.”

“알았어. 사 줄 테니까 말대답할 기운 있으면 먹어.”

기욱이 귀찮다며 손을 저었다. 죽은 약간 퍽퍽하긴 했으나 그런대로 먹을 만했다. 사실은 아침부터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터라 아무거나 다 좋았다. 서진은 순식간에 죽을 반쯤 먹어 치웠다. 기욱은 피곤해 보였다. 입만 다물고 있으면 인상은 참 좋아 보이는데 말이다.

적당히 그을린 피부, 훤칠한 키에 날카로운 콧대며 눈매, 소매를 말아 올린 셔츠 사이로 보이는 적당한 근육들. 남자라 해도 한 번씩은 시선이 가는데 여자들이 줄을 서는 건 당연했다. 그런 기욱과 달리 서진의 외모는 평범했다.

키가 큰 것도 아니고, 어깨가 넓거나 몸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며 얼굴이 특별하게 잘생긴 것 또한 아니었다. 설령 대상이 남자라 해도 기욱은 마음만 먹으면 서진보다 나은 사람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런 기욱이 왜 하필이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평범한 자신을 택했는지 서진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툭, 죽을 입에 넣으려던 서진의 손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반쯤 졸던 기욱이 서진을 보며 혀를 찼다. 방 안을 둘러보던 기욱이 밖으로 나가 휴지를 가져왔다. 기욱의 휴지를 받아 든 서진이 옷과 바닥에 흐른 죽을 대충 닦아 냈다. 다시 죽을 먹으려 하자 기욱이 서진의 수저를 빼앗았다.

“애도 아니고 원.”

“먹여 달라고 한 적 없는데요.”

“먹어 그냥.”

기욱은 말끝마다 말대꾸하는 서진이 살짝 불쾌했다. 기욱이 서진이 먹으려던 죽을 펐다. 식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잘 퍼지지 않았다. 젠장, 전자레인지. 물로 데운다고 데웠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이런 걸 서진은 용케 잘 먹었구나 싶었다. 기욱이 어쩔 수 없다며 수저를 내밀었다. 서진이 손을 뻗으려 하자 기욱이 손을 살짝 쳐 냈다. 서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기욱을 봤다.

“입만 벌려.”

서진이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기욱이 주는 죽을 말없이 받아먹었다. 분위기가 살짝 누그러졌다.

“병원은요?”

“다시 갈 거야.”

기욱이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세 시 반이 넘었다. 기욱이 다 먹은 죽을 한쪽으로 치웠다.

“자라.”

“형님은요?”

“같이 잘까?”

기욱의 질 나쁜 농담에 서진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이내 지지 않는다며 말대답했다.

“건드리지 않는다면요.”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서진은 달리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죽을 거실로 치운 뒤 물을 떠 가져왔다. 서진은 기욱이 가져온 물을 마셨다. 물을 마시고 나니 조금 살 것 같았다. 기욱이 서진의 물컵을 일방적으로 빼앗았다. 아직 물이 남아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기욱은 고개를 드는 서진의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됐어. 차 안에서 잠깐 자고 갈 거니까.”

기욱이 방의 불을 껐다. 서진이 이불을 얼굴까지 눌러썼다. 틱, 얼마 뒤 거실과 남은 방들의 불이 차례로 꺼지는 소리가 났다. 눈을 감은 서진은 별일도 다 있다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정말로 집에 택배가 왔다.

* * *

차로 돌아온 기욱은 잠바 주머니를 뒤졌다. 담배가 없었다. 뒷좌석과 가방을 뒤졌으나 담배는 나오지 않았다. 젠장,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유독 담배가 피우고 싶었다. 기욱은 결국 차 밖으로 나왔다. 낡은 가로등이 기욱의 머리 위를 비췄다.

새벽의 골목길은 한적했다. 막 첫 번째 골목을 돌던 찰나 기욱은 차 안에 지갑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기욱이 한숨을 쉬며 걸음을 되돌렸다. 골목 안쪽에서 낯선 인기척이 느껴졌다. 기욱의 차와 서진의 집 근처를 힐끗거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우유 배달원쯤 되는 줄 알았으나 차림새와 모습을 보니 그런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이 새벽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기욱이 다가갔다. 기욱이 다가옴을 느낀 남자가 이내 왔던 곳으로 도망쳤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인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다. 돌아온 기욱이 불이 꺼진 서진의 집을 바라봤다. 집 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남자가 두리번거린 차 역시 마찬가지였다. 띠릭, 차 문을 열고 몸을 반쯤 넣었다. 뒷좌석 밑에서 지갑이 나왔다. 지갑을 챙긴 기욱은 다시 차 밖으로 나왔다. 남자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골목을 돌았다.

오 분 정도 걷자 1차선 도로 한편에 편의점이 있었다. 기욱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졸고 있던 남자 알바생이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목이 반쯤 잠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기욱은 카운터 뒤에 있는 담배를 손가락질했다. 어떤 거요? 알바생이 영문을 모르겠다며 기욱과 담배 진열대를 번갈아 봤다.

“말보루 라이트로.”

“아, 네.”

알바생이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꺼내 카운터로 올렸다. 기욱이 잠바 주머니를 뒤졌다. 지갑과 휴대폰, 병원 신분증이 딸려 나왔다. 신용카드를 내민 기욱은 건너편 진열대로 고개를 돌렸다. 문을 열고 맥주를 꺼냈다. 진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런지 미지근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카운터 위로 맥주를 올렸다. 기욱과 카운터를 번갈아 바라본 알바생이 계산했다. 영수증은……. 기욱은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맥주와 담배를 챙겨 편의점을 나왔다. 탁, 맥주 캔을 따 마셨다. 대충 팔에 걸친 뒤 담배를 입에 물었다. 순식간에 담배 연기가 올라왔다.

후우, 조금은 살 것 같았다. 진동이 울렸다. 병원 관계자와 연락을 주고받았다. 연락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자 벽에 기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오전 4시 24분, 앞으로 한두 시간이면 다시 병원에 가야 했다. 잠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편의점 종소리에 기욱이 고개를 돌렸다.

“어…….”

“너….”

기욱이 담배를 끈 뒤 남자를 손가락질했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 아니 쉽게 잊을 수 있는 얼굴은 결코 아니었다. 장병욱. 현재 기욱의 여자 친구로 있는 서윤의 전 남자 친구였다. 병원에 들어가고 난 뒤 의사를 제외한 대부분 친구와는 연락을 끊은 상태였다.

일부러 끊은 것도 있으나, 대게는 병원 일이 바빠서 원치 않게 끊긴 경우였다. 물론, 병욱의 경우에는 전자지만. 기욱은 병욱을 위아래로 훑었다. 낡은 버스 정류장 옆 조명과 편의점 간판 조명이 두 사람을 비췄다. 어둡긴 했지만, 서로를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소매가 반쯤 접히긴 했으나 깔끔하게 다려진 셔츠와 한눈에 봐도 고급스러운 넥타이핀, 팔에 걸쳐진 비싼 넥타이며 시계, 다 마신 맥주 대신 들려 있는 차키는 한눈에 봐도 값이 나가는 차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 기욱에 비해 병욱의 차림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기욱은 새벽인 데다 집 근처라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병욱이 이 근처에 산다는 말은 처음 듣지만.

병욱과 기욱은 서로에게 좋은 기억이 없었다. 서윤의 선택이었다고는 하나 병욱은 기욱에게 여자 친구를 빼앗긴 거나 다름없었다. 뜻밖에 병욱이 먼저 아는 척을 했다.

“이야, 들었어. 요즘 잘나간다며?”

병욱의 시선이 최근 새로 산 기욱의 시계에 닿았다. 기욱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병욱의 띄움에 기분이 좋아서 그런 건 아니었다. 기욱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담배를 새로 피워야 할 것 같았다. 라이터를 꺼내려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주머니에서 엉망으로 엉킨 신분증이 딸려 바닥에 떨어졌다. 기욱과 병욱이 동시에 바닥으로 고개를 숙였다. J대 병원 신경외과과장. 박기욱. 기욱의 병원 신분증을 본 병욱의 눈썹이 살짝 움찔거렸다.

병욱이 기욱의 신분증을 주워 내밀었다. 담배에 불을 붙인 후 병욱이 내민 신분증을 받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확실히 이번에도 병욱은 민망해 보였다. 병욱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교수…. 됐어?”

“최근에.”

“역시 박기욱. 의사 집안이라 역시 틀리긴 틀리네.”

H대 경영학과, 병욱이 아무리 의사에 대해 알지 못해도 전공의 과정을 끝내고 1~2년 만에 단기간으로 교수가 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상식 정도는 알았다. 부교수, 외과 과장. 조교수도 아닌 데다 과장직까지 달았다. 이쯤 되면 잘나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낡은 가죽 잠바를 입은 병욱은 주먹을 꽉 쥐었다. 장병욱, H대 경영을 졸업하고 난 뒤 대기업의 문만 두드리다가 제대로 된 취직을 하지 못한 케이스였다. 간신히 중소기업에 취직했으나 학자금이며 대출에 허덕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재수 없는 새끼. 자존심도 없는 새끼. 서로서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초등학교, 고등학교 내리 경쟁을 한 사이였지만 결국 승자는 기욱이었다. 서윤이 기욱을 택하면서 병욱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는 자존심마저 무너진 셈이었다.

담배 필터가 얇아져 갈 무렵 다시 전화가 왔다. 서윤이었다. 병욱을 슬쩍 본 기욱은 담배를 내던지고 전화를 받았다. 일부러 수화음을 크게 했다. 스피커폰은 아니지만, 서윤의 목소리가 들리기에는 충분한 거리였다. 약간의 술기운과 담배 향에 취한 기욱은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나긋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 왜? 자기야.

병욱의 표정이 다시 한번 일그러졌다. 그 모습에 기욱은 병욱이 자신과 서윤이 아직도 사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확신했다. 휴대폰 너머로 앙칼진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빠, 유 쌤한테 들었어. 서진이한테 갔다면서? 정말이지. 그럴 필요 없다니까 그래.

― 자기 동생인데. 걱정돼서 그랬지.

― 그럴 줄 알고 시헌이 보냈어.

어쩐지. 서윤의 말에 기욱은 싱크대 위에 놓인 약 봉투에 대해 짐작했다. 죽 하나 사러 갈 기운이 없어 집에서 골골거리는 서진이 약을 사러 밖에 나갔다는 건 어디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 다음부턴 말하고 갈게.

― 아, 서진인 괜찮대? 얘는 내 전화도 안 받고.

― 잠들었어.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야.

― 그래? 정말이지. 술 좀 작작 먹으라니까 참.

서윤과 대화를 이어 가던 기욱이 시간을 확인했다. 조금 이르긴 했지만 일찍 출발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 병원 갈게.

― 뭐? 지금? 오빠 자야 되잖아.

― 몇 시간 안 남았잖아. 병원에서 자지 뭐. 울 자기 얼굴도 볼 겸.

― 치, 맨날 보면서. 알았어. 도착하기 전에 연락 줘. 나 올라가 볼게.

탁, 기욱이 전화를 끊었다. 묘한 침묵이 흘렀다. 건너편 차선에서 택시가 빠르게 지나갔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기욱은 병욱을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럼, 볼일이 있어서.”

기욱은 병욱을 지나쳐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멀어지는 기욱을 보며 병욱은 이를 갈았다. 씨발, 씨발 새끼. 그 중얼거림을 기욱이 못 들었을 리 없었다. 기욱은 기욱대로 웃음이 나왔다.

* * *

병원 주차장 안쪽에 차를 댔다. 잠시 뒤 계단을 내려오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간호복을 입은 서윤이 기욱의 차를 발견하고 뛰어왔다. 서윤이 다가오자 기욱은 조수석 쪽 문을 살짝 열었다. 서윤이 재빨리 차 안으로 들어왔다. 어느새 다섯 시가 좀 넘어 있었다. 환자 때문에 늦었다며 서윤이 사과를 했다. 좌석이 살짝 뒤로 젖혀 있었다. 병원에 도착하고 십 분 정도 잔 것 같았다.

“들어가서 자지 그랬어.”

“차 안이 나아.”

“내려와도 돼?”

“허락받았어. 금방 올라가야 돼.”

서윤이 기욱 쪽으로 몸을 숙였다. 기욱이 부드럽게 서윤의 허리를 잡아 끌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입술을 맞췄다. 서윤이 기욱이 있는 쪽으로 몸을 옮기려 했다.

기욱이 그런 서윤의 몸을 살짝 뒤로 밀었다. 서윤이 아쉬운 듯 입가에 묻은 타액을 손등으로 닦았다.

“안 돼.”

“아, 오빠 한 번만 하자.”

“오빠 오늘 바빠. 너도 일해야 되잖아.”

서윤이 입술을 내밀었다. 기욱이 서윤의 머리를 헝클었다.

“조만간 놀러 한번 가자.”

기욱이 가방을 뒤져 다이어리를 꺼냈다. 스케줄을 확인하는 기욱의 모습에 서윤의 눈이 살짝 커졌다. 한 번도 기욱이 이렇게 먼저 나선 적은 없었다. 서윤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짜야?”

“거짓말하는 거 봤어?”

서윤이 고개를 저었다. 연애를 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말을 많이 내뱉는 기욱이었지만 그런 탓인지 약속이나 꺼낸 말만큼은 분명하게 지켰다. 서윤은 벌써부터 어디를 갈지 고민이라며 혼자 중얼거렸다. 기욱은 아직 멀었다며 그런 서윤을 달랬으나 서윤의 흥분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아, 나 올라가 봐야 돼. 그럼 이따 보자.”

“그래.”

차 밖으로 몸을 반쯤 꺼낸 서윤이 손을 흔들었다. 차 문을 닫은 서윤은 왔던 비상계단 쪽으로 재빨리 몸을 돌렸다. 서윤의 발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뒤 기욱은 차창을 살짝 열고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장병욱, 하하. 기욱은 감지 못한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옛날 생각이 났다. 허나 그 기억을 어디서부터 꺼내야 할지는 쉽게 감이 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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