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그들만의 사정
그 일이 있고 몇 년의 삶은 지옥이었다. 무엇이 그렇게 힘들었냐 묻는다면 그건 부모님이 죽었다는 사실도, 친척들이 육아를 포기해 시설에 맡겨졌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늘 보아 왔던 누나를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시설에는 사연 없는 아이들이 없다. 오랜 경험으로 그 사실을 안 보육교사들은 으레 그렇듯 처음 온 나에게 잘해 줬다.
시설의 삶은 기존과 비교하자면 천국이나 다름없었다. 침대 대신 낡은 창고에 숨어 떨지 않아도 됐고, 밥을 먹는 것을 눈치 볼 이유도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새로 전학 간 학교에서 시설 출신이라는 걸 알고 반 아이들이 살짝 불편해했던 걸 제외하면 학교생활도 나름 할 만했다.
한 방에 20명씩 들어가는 시설은 좁았고, 전학 간 학교는 무너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오래된 건물이었지만 그래도 전보다는 나았다. 아니, 모든 것이 전보다 나았다. 그러나 나는 전보다 낫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새로운 삶에는 누나가 없었다. 시설 원장님은 누나가 곧 있으면 온다고 했다. 내가 이곳에서 적응을 잘하면 누나가 올 거라고 했다. 필사적으로 적응했다. 언젠가 누나가 데리러 왔을 때 누나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열심히 했다. 1년, 2년. 3년이 지났을 무렵 원장실에서 대화를 들었다. 우연하지 않은 엿듣기였다.
‘하아, 서진이요. 언제까지 이렇게 거짓말을 쳐야 하는 거죠? 연고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잖아요.’
‘원장 선생님이 친척들이랑 대화는 해 보고 있다는데. 다들 피하는 것 같더라고.’
‘있는 집 사람들이 더한다더니 진짜 그 말이 딱 맞네요. 서진이 누나는 어떻게 된 거래요? 듣자 하니 누나는 친척이 받아 줬다는데.’
‘그게……. 그것도 연락이 안 돼.’
‘걱정이네요. 서진이가 누나 많이 보고 싶어 하던데. 누나가 올 수 있긴 할까요?’
‘친척들 반응으로 봐서는……. 힘들다고…… 서, 서진아! 네가 왜 여기에……! 서진아!!’
나는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선생 한 명이 내 이름을 불렀으나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엄마의 친척 중 그 누구도 나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누나는 이모네 집에서 머물고 있었다. 시설에서는 수도 없이 누나와 이모에게 연락을 취했지만 제대로 연락조차 되지 않았다고 했다.
누나는 오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누나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달라진 모든 것이 싫증이 났다. 모든 것이 낯설어지기 시작했다. 불과 하루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말수가 점점 적어졌고, 어울리던 친구들과도 멀어졌다.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시설에서조차 겉돌았다.
처음에는 신경을 써 주던 선생님들도 새로 들어온 아이들과 스트레스에 치여 손을 놓았다. 차라리 그 집에 있을 때가 더 좋았을지도 몰랐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곳에는 누나가 있었다. 혼자 울고 있으면 엄마 몰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누나는 마치 천사 같았다.
좁은 방 안에서 빛과 함께 들어오는 누나는 내 삶의 전부나 다름없었다. 어린 나이에 누나가 없는 세상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날도 평소와 다를 건 없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난 뒤 방으로 돌아와 으레 저들끼리 떠들고는 했다. 아이들 사이에 끼지 못한 나는 혼자 구석에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때리면 혼자 구석에서 울고는 했던 터라 혼자 있는 건 익숙했다.
10분이 한 시간 같은 지루함에도 이젠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잠이 들었다. 방 안으로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생님인 줄 알았다. 누군가가 내 어깨를 건드렸다.
“서진아. 여기서 뭐 해?”
나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4년. 이제 막 초등학교 5학년이 된 나와 달리 누나는 한층 더 어른스러워졌다. 못 알아볼 뻔했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나는 그녀가 한눈에 누나라는 사실을 알았다.
원장 선생님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누나와 원장 선생님이 대화했지만 뭐라고 하는지 들리지 않았다. 누나가 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렸을 적 엄마에게 맞고 홀로 어두운 방에 갇혀 있을 때 내밀었던 손과 똑같았다. 누나가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서진아. 누나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서진아.”
“…….”
“집에 가자.”
부모님의 장례식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그 한마디에 한이 맺힌 것처럼 쏟아졌다. 얘가. 왜 울고 그래. 누나가 눈물을 훔치며 나를 달랬다. 정작 그렇게 말을 하는 누나 또한 울고 있었다. 울어 본 것은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 * *
사건 당시 인근 사립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던 누나와 달리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나는 집안에 있어서 골칫덩어리였다. 나와 누나에 대한 양육은 엄마의 집안과 아빠의 집안에서 나눠 하기로 했다. 엄마의 집안은 당연히 누나를 택했다.
평소 아빠와 연락을 끊고 살다시피 한 아빠의 집안에서는 그 누구도 나를 맡으려 하지 않았다. 누나가 이모의 집에서 사는 조건은 아빠의 성폭행 사실에 대해 입을 닫는 것이었다. 누나는 내가 아빠의 친척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알고 있던 데다 시설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에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누나는 뒤늦게 내가 시설에 보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모의 집에서도 누나는 기존에 다니던 학교를 계속 다녔다. 집안 체면의 문제라는 것이었다. 엄마의 자리는 자연스럽게 이모가 대신했다. 이모의 집에서 공부를 계속한 덕에 누나는 J대 의대에 합격했다. 그즈음 친척들은 누나가 나를 찾고 다닌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이모가 제안했다.
나를 찾는 걸 포기한다면 앞으로의 의대 학비, 생활비며 모든 것을 대 주겠다고 했다. 열등감에 찌든 엄마와 달리 친척들의 뛰어난 외모와 두뇌를 그대로 물려받은 누나를 엄마의 집안에서는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누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성인이 되기 무섭게 이모의 집을 나왔고 우여곡절 끝에 원장 선생님과 연락이 닿았다.
우리는 사회복지사와 관련 관계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누나와 함께 새로운 집으로 이사했다. 1층 반지하방, 어렸을 적 살던 18층 아파트나 건물 전체를 쓰는 시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좁은 집이었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끝나 갈 무렵 학교를 옮겼다.
1년, 대학을 포기한 누나는 백화점에 있는 한 음식점에 취직했다. 아침부터 저녁이 다 되어야 집에 들어왔다. 종일 누나를 보지 못하는 시간이 더 많았지만 그래도 누나가 올 거라는 걸 알았기에 행복했다. 대학교를 포기하고 취직을 했지만, 누나는 공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평생 궂은일 한 번 해 본 적 없던 탓에 일이 끝나면 온몸이 힘들었지만, 누나는 새벽 늦게까지 공부를 했다.
1년 후, 누나는 다시 시험을 쳤다. 장학금을 목표로 공부했다. 다시 J대 의대에 합격했으나 원하는 장학금을 받을 만한 성적은 아니었다. 집을 나온 지금 수천만 원에 달하는 학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운이 좋은 게 있다면 혹시나 하고 낮춰 넣었던 H대 간호학과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는 사실이었다. 누나는 H대 간호학과에 진학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누나는 처음 대학교에 갈 때도 H대 의대를 가고 싶어 했다. 두 번 다 성적이 부족했다.
대학교에 입학한 누나였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음식점 대신 수업이 끝나고 종일 대학생 과외를 했고, 시간이 날 때면 공부를 했다. 그 와중에 친척들이 몇 번인가 누나를 찾아오는 일도 있었다. 누나는 절대 나를 포기하지 않는다고 했다. 누나는 말했다.
‘나는 몇 번인가 당신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당신들은 나를 거부했고. 멸시했죠.
서진이를 살인자라고 손가락질했지만,
서진이가 없었다면 전 얼마나 더 그곳에 갇혀 살아야 했을까요?’
나에게 그곳이 지옥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곳 또한 누나에게 있어서 지옥이었다. 친척들은 이제는 찾아오지 않았다. 비록 주변 환경은 달라졌지만 누나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4년에 가까운 공백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어렸을 적 그 모습 그대로였다. 늘 밝고, 활기차며 당당한 누나였다. 그런 누나가 좋았다. 부모님이 죽은 것에 대한 죄책감은 없었다. 세상에 누나와 나만 있으면 됐다.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억지웃음이 아닌 진심으로 행복한 미소를 보고 싶었다.
누나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설령 살인이라 할지라도.
그리고 그런 생각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 * *
누나의 이상 증세가 나타난 건 대학교 2학년 무렵이었다. 내가 막 중학교에 들어갔을 때이기도 했다. 엄마를 닮아 비교적 평범한 나와 달리 누나의 외모는 어딜 가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누나 또래의 여자를 봐도 누나만 한 사람은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학창 시절부터 누나는 남자에게 인기가 많았고, 고등학교 때도 몇 번인가 남자를 사귄 적이 있었다. 대학교에 들어가서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누나도 여자고, 성인이니 나 외에 다른 남자를 만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 사실에 대해 기분이 나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의심. 불안.
그것이 누나의 증상이었다. 남자 친구와 떨어져 있거나, 오랫동안 연락이 되지 않으면 누나는 극도로 불안해했다. 그가 나를 버린 건 아닐까? 다른 여자가 생긴 건 아닐까? 온갖 생각들이 누나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불안이 극에 달할 무렵 누나는 남자 친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 매달리고는 했다.
오빠 나 버리는 거 아니지?
내가 잘할 테니까 그러지 마.
처음에는 농담이나 단순한 집착 정도로 받아들였던 행동. 그러나 누나의 행동은 점점 그 수위가 높아져만 갔다. 결국, 남자 쪽에서 헤어짐을 선언하고는 했다. 남자와 헤어지고 난 뒤 약 일주일 동안 누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게 바닥을 경험하는 누나지만 어느새 또 새로운 남자가 생기고는 했다.
농담으로 나는 어떻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누나는 농담하지 말라며 웃어넘겼다. 그 순간 누나는 결코 나를 남자로 보고 있지 않으며, 나는 누나의 남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딱히 누나의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저 누나가 행복하기를 바랐다. 누나의 행복한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누나의 그런 성향 때문인지 남자를 만나는 기간은 날이 갈수록 짧아졌다. 그런데도 누나의 곁에는 늘 남자가 있었다.
누군가가 곁에 있어야 했다.
버림받고 싶지 않다.
누나는 남자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인정받고 싶어 했으며 남자가 자신을 떠나는 것에 대한 극도의 불안함을 보였다.
그것은 죽은 엄마가 아빠에게 보였던 증상이었다. 누나는 성폭행한 아빠와 그걸 묵인한 엄마와 가족들을 혐오했지만, 누나의 몸에는 그들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떠나갈 것을 두려워했던 엄마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던 것처럼, 나 역시 누나가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온몸을 사슬로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의 삶은 지옥을 나와서도 지옥을 벗어나지 못했다.
누나가 카페에서 누나가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줬을 때 나는 속으로 그와 누나가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알았다. 남자 친구의 친구라며 그―기욱이 들어왔을 무렵 나는 그 사실에 확신했다. 이런저런 일을 겪긴 했으나 누나의 삶 자체는 결코 바닥은 아니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학생회장, 중학교 때는 온갖 대회에 나가 상을 휩쓸었으며 좋은 성적으로 외고에 입학했다. 비록 대학 진학을 포기했으나 J대 의대에 붙을 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으며, 1년 동안 직장을 다니면서까지 공부를 해 같은 학교와 H대 간호학과를 수석으로 붙었다.
누나에게 아쉬운 게 있다면 집안과 돈이었다. 누나는 나를 택한 대신 교수 집안과 돈을 포기했지만, 사람의 욕망이라는 건 그리 쉽게 바뀔 수 없는 모순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누나가 배경을 만들 방법은 남자뿐이었다.
아빠가 엄마의 집안을 원했듯이, 누나 또한 본능적으로 아빠와 같았다.
남들보다 조금 성실한 것을 제외하면 평범한 외모에 평범한 집안, H대 경영을 다니고 있으나 학자금 대출이 있는 지금 남자 친구와 그를 비교한다면 누나의 마음이 어디로 갈지는 알 수 있었다. 누나가 합격했던 J대 의대, 명망 있는 의사 집안에 남자 친구와 비교되는 큰 키와 뛰어난 외모 그리고 사귀는 내내 늘 어딘가 무심했던 남자 친구와 달리 다정한 그는 누나의 이상형에 딱 들어맞는 남자였다.
단지 그 남자가 시헌의 형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다.
백화점에서 보여 주었던 그의 태도와 행동들을 보고 누나가 그에게 한눈에 반했다는 걸 알았다. 누나가 그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으나 시헌의 형이라는 걸 생각하면 누나가 그와 사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둘이 사귀냐는 시헌의 말에 아무렇지 않은 척 시치미를 뗀 것은 어쩌면 누나와 그의 관계에 대한 나의 바람일지도 몰랐다.
둘은 결국 사귀었다. 사귄다고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누나의 전 남자 친구는 보이지 않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을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시헌에게 두 사람이 사귄다는 사실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시헌이 알게 되더라도 지금은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싶었다.
박기욱과 있는 누나는 그 어떤 남자를 만날 때보다 행복해 보였다. 그는 유독 나를 자주 불러냈다. 누나의 성화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나가고는 했지만 정작 나를 앞에 둔 두 사람은 서로 떠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대학생인 누나의 신분으로는 감히 올 수도 없는 고급 레스토랑에 앉아 처음 보는 맛의 음료수를 마시며 그를 봤다. 누나와 떠드는 내내 그와 나는 여러 번 눈이 맞았다. 그럴 때면 그는 가볍게 입꼬리를 올리며 누나의 어깨나 허리에 손을 올리며 접촉했다. 그의 그런 행동에 누나는 얼굴이 빨개지며 눈치를 살폈다.
‘기욱 씨, 서진이도 있는데…….’
나의 눈치를 보는 누나지만 표정이 마냥 싫지는 않다는 눈치였다. 누나의 허리를 안은 그가 다른 손으로 물 잔에 입을 댔다. 그리고는 누나의 이름을 불렀다. 커다란 손, 매력적인 목소리로 누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모습은 그 누구라도 빠져들 것만 같았다. 서윤아.
‘내가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지.’
몸을 살짝 돌린 그가 누나의 얇은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두 사람의 얼굴이 맞닿은, 금방이라도 키스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할 정도의 거리였다. 근처를 지나가는 알바들과 몇몇 손님들이 입을 벌리고 신기하다는 듯 쳐다봤으며, 그중 일부는 닭살이라며 비웃기도 했다. 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화끈거렸다. 두 사람의 행동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렇게 얽혀 있으면 지난날 집에서 본 풍경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누나의 입술이 얕게 떨려 왔다.
‘기욱 오빠. 서진이도 있는데 이러는 건……. 좀 그래.’
그는 아무렇지 않은 척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남은 물을 마저 마셨다. 으드득, 물과 함께 섞여 들어간 얼음이 그의 입안에서 씹혔다. 의자 밑으로 주먹을 꽉 쥔 채 애써 고개를 돌렸다. 푸웁, 이내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손끝으로 눈물을 닦아 낸 그는 누나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말했다.
‘흑흑, 미안. 장난이야 장난.’
‘아, 진짜! 머리! 기욱 씨 진짜…….’
누나가 헝클어진 머리를 이리저리 만졌다. 그가 잠시 보자며 누나의 머리를 살폈다.
‘괜찮네.’
‘하나도 안 괜찮거든요?’
‘예뻐.’
그의 말에 누나가 헛기침을 했다. 그와 떠드는 누나는 즐거워 보였다. 몸을 살짝 움직이자 발이 무언가에 부딪혔다. 한 번에 그의 발이라는 걸 알았다.
‘아, 미안.’
먼저 친 건 내 쪽이었지만 그가 아무렇지 않게 사과를 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이 더욱 달아올랐다. 그가 웃는 건 누나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내 앞에서 누나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모습에 당황하는 나를 보는 걸 재미있어했다. 그때도,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장난이 끝날 무렵 이어지는 그의 미묘한 시선은 나를 더욱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그 미묘한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 건지 알게 된 건 조금 더 후의 일이었다.
* * *
평소보다 조금 늦게 학교에서 돌아왔다. 새로 시작한 과고 입시 방과 후 때문이었다. 열쇠를 넣으려 하자 문이 멋대로 먼저 열렸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집 안이 엉망이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좁은 현관에는 누나의 신발이 엉망으로 벗겨져 있었다.
신발을 바로 하고 누나의 방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누나가 보였다. 누나는 내가 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통화하고 있었다. 누나가 방 안에 틀어박혀 휴대폰을 하고 있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지는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지나지 않아 누나의 울음에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 오, 오빠? 왜, 왜 그래? 흐윽… 내가 잘못했어. 제발…… 전화 끊지 말아 줘. 잘못했어. 응? 오빠….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누나는 다시 휴대폰을 붙잡았다. 그래도 그는 좀 나을 거로 생각했건만 착각이었다.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뒤늦게 내가 왔다는 사실을 안 누나가 문틈 사이로 얼굴을 내밀었다. 지워지지 않은 화장은 눈물로 엉망이 되어 있었으며 한껏 차려입은 옷이 그대로 있었다.
“누나, 괜찮은 거야?”
“괜찮아. 괜찮아. 서진아.”
누나는 늘 나에게 말했다.
괜찮아. 아무 일 없어.
누나는 나에게 그 이상의 일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누나와 나의 나이 차이에 대해서 실감하고는 했다. 3살, 5살만 더 많았더라면 좀 더 다르게 생각했을지도 몰랐다. 결국, 나는 그날도 계속해서 괜찮다는 누나의 말에 아무런 반박을 하지 못한 채 방으로 돌아왔다.
가방을 내려놓기 무섭게 잠바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전화가 올 상대도 없거니와 전화를 받을 기분도 아니었다. 금방 끊길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달리 진동은 생각보다 오래갔다.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열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잠시 머뭇대더니 전화를 받았다. 누나에 대한 짜증과 스트레스로 언성이 올라가 있는 상태였다.
― 누구세요?
― 누나는?
― 뭐? 당신 누구…!!
순간 그 짧은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누나의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손이 떨려 오고 심장이 빨라졌다. 죄를 지은 사람처럼 방문 너머를 힐끗거렸다. 이내 양손으로 휴대폰을 붙잡았다.
― 다, 당신……. 박기욱? 분명 시헌이 형…….
한 번도 그를 제대로 불러 본 적이 없는 나는 그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수화기 너머 그가 큭, 하며 웃었다. 누나의 전화를 아무렇지 않게 끊은 사람치고는 너무나 위기감이 없어 화가 났다.
―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내 번호는 또 어떻게 알았는지 모른다. 그의 휴대폰 너머가 시끄러웠다. 옆으로 여자의 소리가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주변이 조용해졌다. 그는 말했다. 물론,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아니었다.
― 내일 8시 J대 병원 앞으로 와.
― 하, 제가 거길 왜 가요?
― 오고 싶지 않으면 안 와도 돼.
편의점 벨 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을 한쪽 어깨에 걸친 그는 담배를 주문했다. 틱, 계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녕히 가세요. 알바생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밖으로 나왔다. 라이터 소리가 들렸다. 편의점 옆 벽에 기대 담배를 물고 있을 그의 모습이 상상이 됐다.
― 난 강요는 안 해.
― 제가 안 가면요?
― 글쎄. 후회하는 건 네 몫이지만.
그는 마치 누나의 상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말투였다. 휴대폰을 고쳐 잡은 그는 말을 이어 갔다.
― 혼자 와.
멀리서 다시 그를 부르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한동안 통화가 끊긴 휴대폰을 가만히 바라봤다. 거실로 나가자 문틈 사이로 여전히 울고 있는 누나가 보였다. 그와 통화를 한 휴대폰을 꽉 쥐었다.
나는…….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었다.
* * *
휴대폰을 든 서진은 병원 근처를 서성거렸다. J대 병원, 기욱이 인턴으로 있는 병원이기도 함과 동시에 졸업한 누나가 일하고 있는 병원이기도 했다. 주변에서 들은 말이 많아 병원 이름 자체는 익숙했으나 병원이라는 건물 자체가 익숙한 건 아니었다.
한참을 돌아 본관에 도착했으나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기욱은 8시까지 J대 병원에 오라고 했지만, 이 넓은 병원 어디에서 기욱을 만나야 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렇다고 다시 연락하기도 뭐했다. 휴대폰 시계가 7시 59분에서 8시로 넘어갔다. 8시가 되기 무섭게 전화가 왔다.
저장되지 않은, 뒷자리가 3으로 시작하는 번호. 기욱이다. 서진은 괜히 죄를 지은 사람처럼 주변 눈치를 살폈다. 때마침 서진 또래의 휠체어를 탄 환자 하나가 보호자와 지나갔으나 서진을 신경 쓰지는 않았다. 진동이 끊겨 갈 무렵 서진이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 지하 주차장으로 와. 2층. 전화 끊지 말고.
기욱의 전화를 받은 서진은 기가 찼다. 기욱은 서진이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았다. 마치 병원 앞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듯한 말투였다. 서진은 기욱이 어디서인가 자기를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돌이킬 수 없다.
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서진의 시선은 지하 주차장을 찾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기욱이 지시했다. 왼쪽에. 거기. 전화가 끊겼다. 평범한 차들 사이에서 기욱의 외제차는 한눈에 띄었다. 차 문을 살짝 열고 몸을 반쯤 꺼낸 기욱이 타라며 손짓했다. 서진이 차에 탔다.
“저기 어디로…….”
“벨트 매.”
서진은 마지못해 앞좌석에서 벨트를 맸다. 대시보드 위에 놓인 휴대폰에서는 계속해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서윤의 이름이었다. 차가 천천히 출발했다. 서진은 전화가 오는 휴대폰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몇 번인가 기욱에게 눈치를 줬지만, 기욱은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
뒤늦게 눈치를 챈 기욱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때마침 전화가 끊겼다. 기욱의 휴대폰 화면에 부재중 표시가 떴다. 기욱이 다시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서윤은 아니었다. 병원 관계자와의 전화였다. 사거리로 나오자 차가 막혔다. 서진은 가로등 사이에 걸려 있는 안내판만 힐끗거렸다.
내비게이터는 켜져 있지 않았다. 도무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집으로 가는 방향은 아니었다. 좌석 시트로 고개를 숙였다. 서진의 발밑으로 뭔가가 채였다. 운전대를 잡고 통화를 하는 기욱을 슬쩍 본 서진은 바닥에 떨어진 작은 봉지를 집어 들었다. 뭔가 들어간다면 비타민 알약보다 조금 큰 크기였다. 약간 뜯어진 봉지를 생각 없이 옆으로 뒤집었다. 콘돔이었다.
― 별거 아닙니다. 아, 네. 그 환자라면 아침에…….
때마침 기욱이 고개를 돌렸다. 서진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봉지를 손안에 숨겼다. 바닥으로 뜯긴 남은 조각이 있었다.
― 야, 박기욱. 대답 안 해? 아침에 어쨌다고?
― 죄송합니다. 잠시 차가 끼어들어서…….
기욱이 다시 전화를 받았다. 알았다. 이따 보자. 남자의 목소리였다. 전화를 끊은 기욱은 들고 있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서윤에게 전화가 오는지, 오지 않는지 더 이상 알 길은 없었다.
서진은 허벅지 밑으로 주먹을 쥐었다. 주먹에는 아직도 버리지 못한 봉지 조각이 들어 있었다. 기욱의 차는 차로 병원에서 10분 정도 떨어진 K호텔에 도착했다. 이 근방에서는 가장 비싸다고 알려진 특급 호텔이었다.
안내를 받으며 바깥 주차장에 차를 댄 뒤 기욱이 먼저 내렸다. 서진은 낯선 호텔을 차창 너머로 힐끗거렸다. 차에 짙은 선탠이 되어 있었다. 먼저 내린 기욱이 서진이 앉아 있는 유리를 두드렸다. 이내 차 문이 열렸다. 내리라며 손짓을 했다.
호텔 로비 안으로 들어간 기욱은 익숙하게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15층, 호텔 중간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벽면이 전부 유리로 되어 있어 호텔 야경과 외부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서윤에게 강제로 불려 왔을 때도 와 본 적 없는 식당이었다.
기욱의 옆으로 직원이 다가왔다. 안내를 받는 기욱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야경이 좋은 창가에서도 가장 안쪽, 비교적 한가한 자리였다. 서진의 테이블에 물을 따라 주던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왔다. 기욱이 서진 쪽으로 손짓했다. 서진의 앞에 한 페이지짜리 메뉴판이 놓였다.
“아무거나 골라.”
서진은 앞에 놓인 메뉴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화려한 그림과 한국어보다는 영어의 크기가 좀 더 큰 메뉴판이었다. 본 적도, 먹어 본 적도 없는 음식을 두고 고르라고 해도 방법이 없었다. 무엇보다 신경이 쓰이는 건 가격이었다. 서진은 처음에 0 하나를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었다.
도대체 뭔데 이렇게 비싼 거지?
“비싼데요.”
“돈은 내가 낼 거니까 신경 쓰지 마.”
서진은 달리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서진은 다시 메뉴를 훑었다. 차라리 기욱이 아무거나 정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은 그런 서진을 답답해하지도, 짜증나 하지도 않았다. 기욱의 메뉴가 먼저 나왔다.
“메뉴 정하셨나요?”
“잠시만요.”
직원의 눈치가 보인 서진은 결국 가장 위쪽에 있는 음식을 손가락질했다. 직원과 기욱의 눈이 맞았다.
“이거 해도 돼요?”
“마음대로 해.”
기욱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직원이 메뉴판을 가져갔다. 본의 아니게 당직을 서고, 반나절을 꼬박 응급실과 중환자실에서 보낸 기욱은 아침부터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한 상태였다. 기욱의 식사가 어느 정도 끝나 갈 무렵 조금 늦게 서진의 음식이 나왔다. 직원이 오자 기욱은 추가로 와인을 시켰다.
서진이 기욱의 와인을 힐끗거렸다. 차를 운전해야 하는데 술을 마셔도 되냐는. 한눈에 알 수 있는 궁금증에 기욱은 웃음이 나왔다. 참으로 어린아이가 신경 쓸 만한 부분이었다. 창문 너머로 건너편 호텔 건물이 보였다. 병원에서 가까우니 뭐하면 하룻밤 자고 가도 상관은 없었다.
서진이 어색하게 나이프질을 하고 있었다. 엉성한 칼질에 고기 끝이 뭉개졌다. 괜히 민망해졌다. 서진은 능숙하게 스테이크를 써는 기욱의 손동작을 살폈다. 그걸 보고 다시 하려고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서진의 접시가 멋대로 움직였다. 기욱의 짓이었다. 서진의 접시를 당긴 기욱이 대신, 고기를 잘라 주었다. 서진은 제가 하겠다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으나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시헌을 볼 때도 종종 느낀 위화감이었지만 기욱을 보니 그 위화감은 더욱 선명해졌다. 서진은 기욱이 시헌의 형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과고 간다고 학교에서 열심히 한다던데.”
서진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기욱이 다 된 접시를 서진 쪽으로 밀었다. 분명 비싼 음식일 텐데 정신이 없어 무슨 맛인지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서진은 말없이 기욱을 올려다봤다. 기욱의 입꼬리가 다시 올라갔다. 서진은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만큼 얼굴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부 드러났다.
정작 본인은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냐는 당혹감 섞인 눈빛, 마치 여자 같은 경계심. 머릿속으로 혼자 고민하고 있을 서진을 생각하면 재미있기 그지없었다. 어디를 가나 시선을 받는 누나와 달리 서진의 외모는 비교적 평범한 편이었다.
눈에 띄게 잘생기지도, 그렇다고 딱 봤을 때 못생겼다고 느낄 정도도 아니었다. 깔끔하며 학교에 간다면 어디에나 있을 법한 성실한 학생 타입이었다. 여자 같기는. 서진의 앞에서 서윤과 스킨십을 할 때마다 그 생각을 얼마나 했는지 몰랐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면서 동시에 귀여웠다. 서진이 자리를 뜨지 못하는 건 서윤 때문도, 기욱 때문도 아니었다. 서진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5년, 기욱의 나이가 적었거나 혹은 서진의 나이가 많았다면 아마 이렇게 하지 않아 평화롭게 식사를 하는 일 따위는 없었을지도 몰랐다. 9살, 빠른 년생이라 학교를 일찍 들어가 병원 인턴을 하는 기욱과 달리 서진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어린애를 상대로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기욱은 서윤과의 사소한 신체 접촉에도 어쩔 줄 모르는 서진이 제가 머릿속으로 무슨 상상을 했을지 안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참으로 궁금했다. 근처에 있는 물을 마신 서진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후유, 물에서 약간의 신맛이 났다.
“누나…, 시헌이가 말한 건가요?”
서진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뻔한 질문은 피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기욱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멋대로 학원을 그만두는 바람에 말야.”
저녁 회의 도중 학원 선생님에게 전화가 오는 탓에 선배에게 혼이 났던 적이 있었다. 시헌이 학원을 나가고 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전부 들통 났다. 그러나 기욱은 결코 시헌을 혼내거나 타박하지 않았다. 안 나가겠다는 시헌의 말에 그 길로 학원 선생님에게 그만두겠다며 말을 전한 것이 전부였다.
다른 학원도 아닌 방과 후에 바로 하는 학원만 그랬다. 뒤늦게 통장을 확인해 보니 학교에서 나간 돈이 찍혀 있었다. 초등학교부터 중학교 내내 단 한 번도 들은 적 없는 방화 후 수업이었다. 그 원인이 서진 때문이라는 걸 눈치채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반면 서진은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시헌이 학원을 그만뒀나요?”
“그래. 갑자기 방과 후에 있는 학원을 관둔대서. 여러모로 곤란해.”
사실은 이미 관뒀지만 그런 사소한 건 아무래도 관계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서진은 뒤늦게 시헌이 학원을 그만둔 원인이 자신과 은소에게 있다는 걸 깨달았다. 평소에는 하지 않던 방과 후 수업, 정작 시헌은 방과 후 수업 시간에도 다른 공부를 하고 있었다.
시헌에게 들어가는 학원비를 대략 알고 있는 서진은 죄를 지은 것 같았다. 정작 시헌은 서진에게 방과 후 때문에 학원을 관뒀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친구라면 그런 말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나. 서진은 가끔 시헌의 무심함에 종종 화가 났다.
“제가 잘 얘기할게요.”
기욱이 마시던 와인을 내려놓은 뒤 서진의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입가에 촉촉이 묻은 붉은 와인이 기욱을 한층 더 매력 있게 만들었다. 서진의 건너편 너머 식사하고 있던 여성과 기욱의 눈이 맞았다. 젊은 여자였다.
가볍게 미소를 짓자 뭐가 그리 부끄러운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서진은 뒷자리를 몇 번인가 힐끗거렸다. 기욱이 냅킨으로 입가에 묻은 와인을 닦았다.
“내가.”
“…….”
“더 쉬운 방법을 알려 줄까?”
서진은 기욱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을 혼내는 거? 아니면 학교 선생님에게 전화한다거나? 서진의 머리로는 그 이상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데다 오랜만에 술을 마셔서 그런지 뺨으로 얕은 술기운이 올라왔다.
조금 더 테이블 앞으로 몸을 붙였다. 서진이 고개를 살짝 숙이면 금방이라도 이마가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테이블에 턱을 괴던 손을 살짝 놓아 펼쳤다. 기욱의 손가락이 천천히 서진을 가리켰다. 서진은 기욱이 말하고자 하는 게 자신이라는 걸 알았다.
“저요?”
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진은 시헌이 학원을 나가게 하는 것과 자신이 무슨 관계인가 싶었다. 이내 뜻밖의 말이 들려왔다.
“포기해. 과고.”
서진은 잘못 들은 건 줄 알았다.
“뭐라구요?”
서진이 다시 물었지만, 기욱은 대답이 없었다. 기욱의 침묵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는 표현이었다. 하, 서진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시헌이 방과 후를 핑계로 학원을 안 간 건 맞지만 그건 시헌이 멋대로 한 행동이었다.
기욱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지 않아 보였다. 서진은 기분이 나빴다. 마치 자신이 시헌을 꼬드겨 학원을 못 나가게 했다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서윤이랑 기욱이랑 만나고 있다 해서 기욱이 자신에게 간섭할 수 있는 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강압적이고 명령적인 태도, 원래 저런 성격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막상 이렇게 들으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기욱이 자신을 불러냈을 때부터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채긴 했으나 이제는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서진은 테이블 밑으로 휴대폰을 열어 시간을 확인했다. 10시가 조금 넘었다. 아직 지하철을 탈 수 있었다. 서진은 일어날 준비를 했다. 의자가 뒤로 살짝 움직이자 동시에 기욱이 인상을 찌푸렸다.
“앉아.”
서진이 의자에서 몸을 반쯤 일으켰다. 하,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주머니를 뒤졌다. 뭘 하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서진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서진은 들으라는 듯 또박또박 대답했다.
“가 보겠습니다. 그리고 학교 갈지 안 갈지는 제가 결정합니다.”
“앉아. 나 두 번 말하게 하지 말고.”
서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이 사람은 시헌과 달랐다. 적어도 시헌은 이렇게 억지로 자기 의견을 남에게 강요하지는 않았다. 서진이 몸을 돌리려 하자 기욱이 뭔가를 꺼냈다. 기욱의 손에 들린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발신자를 확인한 서진의 몸이 얼어붙은 것처럼 멈췄다. 서윤이었다. 기욱이 멀리 있는 직원을 불렀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가는 걸 확인한 직원이 테이블 위 접시를 치웠다.
직원은 가만히 서 있는 서진을 살짝 이상하게 생각했다. 잠시 뒤 디저트가 나왔다. 한 손엔 휴대폰을 든 기욱은 아이스크림을 입안에 넣었다. 파인애플 맛이었다. 진동이 끊기는가 싶으면 계속해서 다시 울렸다. 기욱은 도무지 전화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기욱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흑, 오빠 전화 좀 받아 줘…….
서윤의 말이 채 들리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잠시 진동이 끊겼다. 기욱의 눈치를 보던 서진은 결국 다시 자리에 앉았다. 서진의 앞에 손을 대지 않은 아이스크림이 그대로 있었다. 기욱은 순식간에 아이스크림을 먹은 뒤 남은 와인을 마셨다.
“맨입으로 그만두라고는 말 안 해. 대신 원하는 게 있으면 들어주지. 용돈? 학원?”
서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과고 입시를 관두라고 말한 것 다음으로 큰 충격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거지? 어이가 없다 못해 짜증이 났다. 서윤과 만나는 기욱이 집안의 사정을 아주 모를 리 없었다.
서윤이 학교를 졸업하고 J대 병원에 취직한 이후로는 사정이 조금 나아지긴 했으나 그렇다 할 만큼 눈에 띄는 변화는 아니었다. 어찌 되었건 이제 막 25살인 서윤이 고등학교에 올라가는 동생을 책임지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고. 딱히 미친 듯이 과고에 가고 싶은 건 아니었다.
단지 누나가 힘들게 키우고 있는 동생이 얼마나 열심히 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싶었다. 어딜 가서 자랑스럽게 얘기할 수 있는 동생이 되고 싶었다. 아직 학생의 신분인 서진이 할 수 있는 것은 공부밖에 없었다. 학비가 부담이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다.
서윤에게 과고 입시에 대해 발각이 되었을 때 서윤은 열심히 하라고 했다. 자기가 어떻게든 하겠다고. 공부에 대한 열정이 있었던 서윤이라 서진이 자신 때문에 발목을 잡히는 걸 원하지 않았다. 그저 동생이 학원을 관둬 곤란하다는 이유만으로 포기하라며 요구하는 기욱의 행동은 그런 서진의 마음을 짓밟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기욱은 서진을 힐끗 보더니 말을 이어 갔다. 테이블 위에 있는 휴대폰에서 다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의 진동은 테이블에 손을 올리고 있는 서진에게까지 느껴졌다.
“원한다면 등록금도 괜찮아.”
“당신 진짜 미친 거 아니…!!”
진동이 끊겼다. 화가 남에도 불구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기욱은 디저트를 한 개 더 시켰다. 술을 마셔서 그런지 목이 탔다. 이번에는 딸기 맛이었다. 아이스크림을 한입 넣은 기욱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너네 누나 말야.”
“…….”
“벌써 몇 시간째인 줄 알아?”
기욱이 휴대폰을 열어 배터리를 확인했다. 기욱의 체감으로는 다섯 시간? 여섯 시간이 좀 넘은 것 같았다. 심지어 다른 병동 간호사들에게까지 기욱의 안위를 묻고 다녔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진동은 울리고 있었다.
“병욱이랑 사귈 때도 좀 그랬는데. 솔직히 지금 좀 성가셔지려 하거든.”
기욱이 휴대폰을 뒤로 돌렸다. 배터리를 분리하려 했다. 전화 연결이 되지 않는 거랑 휴대폰의 전원이 끊기는 것은 별개의 얘기였다. 서진이 재빨리 일어나 기욱의 팔을 붙잡았다. 아슬아슬하게 들린 배터리가 간신히 휴대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기욱의 커다란 팔을 붙잡은 서진의 손이 떨려 왔다. 기욱과 대화를 하는 내내 서진은 서윤에 대해 신경을 쓰고 있었다. 한 번 무너지기 시작한 누나는 한동안 제정신이 아니었다.
“저…. 전화. 바, 받아 줘요.”
“내가 왜?”
“누나가……. 형님, 아니. 당신 많이 좋아하는 것 같아요.”
제발. 기욱이 아닌 그 누구라도 마찬가지였다. 서진은 이제는 누나인 서윤이 상처 받는 걸 원하지 않았다. 서윤이 행복할 수 있다면 서진은 뭐든 할 수 있었다. 서진의 팔이 힘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기욱이 서윤의 전화를 받았다.
― 응. 아니야. 알잖아. 바쁜 거. 서윤아. 강서윤. 울지 말고.
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슬슬 마감해야 한다고 했다. 전화를 받는 기욱을 대신해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윤과 무슨 대화를 하는지는 들리지 않았다. 술이 약간 들어간 기욱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욱 매력적이었다.
기욱은 직원을 불러 카드를 대충 건네줬다. 통화하는 기욱은 종일 울며 목이 쉰 서윤을 향해 화를 내거나 짜증을 내지도 않았다. 마치 원래부터 그런 사람이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연기를 했다.
― 내일 출근해야 하니까 뚝 그쳐. 내가 우리 서윤이를 버릴 리가 없잖아. 알지, 네가 나 많이 사랑하는 거. 그럼, 나도 사랑하지. 잘 자고. 아침에 전화할게.
기욱이 전화를 끊은 뒤 서진을 바라봤다. 불과 일 분, 삼십 초 전까지 달달한 연인을 연기하던 기욱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기욱은 슬슬 피곤해지려 했다. 기욱은 말없이 서진을 바라봤다. 만족하냐는 암묵의 질문이었다.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있는 법이었다. 서진이 어렵게 입을 뗐다.
“제, 제가……. 포기하면 되나요?”
“그래.”
기욱은 머리를 살짝 뒤로 쓸어 넘겼다. 직원이 카드와 영수증을 건네줬다. 기욱은 재빨리 영수증을 접어 지갑에 넣었다. 둘이 먹은 음식값이 얼마인지 서진은 알지 못했다. 식당을 나와 로비로 내려왔다. 11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아슬아슬하긴 하지만 막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는 시간이었다. 기욱이 다시 통화했다. 목소리를 들어 서윤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 자? 별건 아니고. 서진이가 오늘 우리 집에서 시헌이랑 잔다고 그러네.
“무슨 말을…!”
쉿. 기욱이 서진의 입가에 손을 올렸다. 기욱이 통화했다.
― 오빠 무슨 소리 나지 않았어?
― 못 들었는데?
― 그래? 아, 알았어.
전화가 끊어졌다. 상의 한마디도 없이 멋대로 구는 기욱이 싫었다. 몸을 돌리자 기욱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서진이 뿌리치려 하자 기욱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몇 번인가 팔을 움직여 본 서진은 기욱의 힘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진이 결국 팔에 힘을 풀었다. 기욱이 프론트 쪽을 손짓했다.
“따라와.”
프런트 직원과 기욱이 잠시 대화를 했다. 잠시 뒤 호텔 카드키를 건네줬다. 엘리베이터가 1층으로 내려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있던 사람들이 내렸다. 관광객이었다. 기욱이 엘리베이터를 잡았다. 활짝 열린 문 앞에서 서진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몸을 엘리베이터 안으로 반쯤 밀어 넣은 기욱은 시계를 확인했다. 시간은 11시에 가까워졌다. 기욱이 서진의 팔을 잡아 엘리베이터 안으로 이끌었다. 기욱에게 붙잡힌 서진의 몸이 힘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156cm, 중학교 남학생치고 마냥 작은 키는 아니었지만 180이 넘는 기욱과 비교한다면 서진의 키는 한없이 작았다. 팔을 둘러 서진을 반쯤 안은 기욱이 닫힘 버튼을 눌렀다. 서진이 나갈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고개를 슬쩍 돌리자 13층에 불이 들어왔다.
언제 누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으니 집에 가고 싶어 했다. 서진이 기욱의 몸을 슬쩍 밀어냈다. 기욱이 몸을 살짝 숙여 서진과 눈을 맞췄다. 기욱의 근처에서 술 냄새가 났다.
“어차피 막차 못 타. 자고 가.”
“택시 타고 갈 거예요.”
“고집 부리지 마.”
차분한 기욱의 말투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띵,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객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기욱에게 이끌린 서진은 마지못해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안쪽 복도 너머로 계단이 보였다. 서진이 계단을 힐끗거리는 걸 눈치챈 기욱이 서진의 몸을 돌렸다. 어깨를 붙잡은 팔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서진아. 강서진.”
기욱이 서진의 이름을 불렀다. 레스토랑에서 서윤의 이름을 부를 때와 비슷한 목소리였다. 어쩌면 그보다 더 매력적일지도 몰랐다. 기욱의 목소리에는 사람을 홀리게 하는 능력이 있음이 틀림없었다. 도망가야 한다. 이대로 기욱과 함께 방에 들어갔다가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서진의 어깨가 잔뜩 움츠러들었다. 기욱이 서진의 어깨에 올린 손에 힘을 빼며 낮은 한숨을 쉬었다.
“아무 짓도 안 해.”
1108호. 손에 들린 카드키를 본 기욱이 안쪽 방으로 몸을 돌렸다. 이내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사실은 무척이나 하고 싶은 기분이지만. 그랬다가는 서진이 도망가 버릴 것 같았다. 단 하룻밤의 만족과 바꾸기에 서진은 아까웠다.
서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정말이냐고 묻는 서진의 모습에 기욱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드키로 방문을 열었다. 기욱이 먼저 들어가라며 몸을 살짝 물러났다. 눈치를 본 서진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불을 켜자 방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방 한가운데 있는 커다란 침대, 분홍색이며 화려한 레이스가 달린 가구들과 방의 분위기는 아무리 봐도 남자 둘이 들어갈 만한 방은 아니었다. 기욱이 재빨리 방문을 닫았다. 스위트룸, 호텔에 와 본 경험이 거의 전혀 없는 서진이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서진이 현관 벽에 몸을 기대 팔짱을 끼고 있는 기욱을 노려봤다. 기욱은 모르는 일이라며 시치미를 뗐다.
“남는 방이 그거밖에 없다던데.”
사실은 거짓말이지만. 아니나 다를까 서진은 쉽사리 의심을 지우지 않았다. 기욱은 소파에 주저앉았다. 이제야 좀 살 것 같았다. 피곤함이 물려 왔다. 넥타이를 반쯤 풀어헤친 뒤 욕실 쪽을 바라봤다. 서진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 있었다.
기욱이 앉으라며 소파를 옆으로 몸을 움직였으나 서진은 고개만 저었다. 상관없나. 기욱은 냉장고 안을 열었다. 잘 정돈된 음료수와 술이 들어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맥주를 꺼내 마셨다. 그 자리에서 500ml 맥주 한 캔을 전부 비웠다. 빈 캔을 든 채 욕실 쪽으로 손목을 흔들었다.
“누가 먼저 씻을까?”
“전 딱히 상관없는…….”
“골라.”
“형님이 편한 대로 하세요.”
“둘이 들어가는 선택지도 있는데.”
빈 캔을 내려놓은 기욱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욱이 다가오자 서진이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아무리 건드리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기욱이 그 약속을 지킬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다.
서진은 기욱이 도대체 자신에게 왜 이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기욱이 손을 뻗자 서진이 흠칫 놀라 몸을 움츠렸다. 이내 기욱이 샤워실 쪽으로 몸을 돌렸다.
“큭큭, 농담이야. 먼저 씻을게.”
기욱이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과 같이 있으면 기가 빨리는 느낌이었다. 서진은 힘없이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잠시 뒤 물소리가 났다. 기욱이 샤워하는 동안 서진은 현관 쪽을 몇 번이나 바라봤다. 지금이라면 도망칠 수 있었다.
서진을 감금한 것도 아니니 도망친다고 해서 기욱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서진은 무엇인가에 홀린 사람처럼 바닥에 주저앉아 움직이지 않았다. 일어나려고 시도를 했으나 다리가 풀린 사람처럼 주저앉았다.
기욱이 도무지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여기서 자신이 도망친다면 기욱이 서윤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서진은 도망칠 수 없었다. 그리고 서진을 두고 홀로 샤워실로 들어간 기욱도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서진이 도망을 고민하는 사이 물소리가 끊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가운을 입은 기욱이 욕실 밖으로 나왔다. 살짝 열린 욕실 문 너머로 옅은 물안개가 새어 나왔다.
욕실 가운 너머로 보이는 다부진 체격과 몸매, 나무랄 곳 없는 키며 외모. 비록 기욱보다 한참 어린 서진이지만 기욱의 그런 모습은 같은 남자로서도 눈이 갈 수밖에 없었다. 기욱 또래의 남자를 데려다 놓는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기욱은 수건으로 머리를 가볍게 털었다. 바닥으로 아직 마르지 않은 물기가 떨어졌다.
“씻고 와.”
기욱이 열린 욕실 쪽을 힐끗거렸다. 서진은 도망치듯 샤워실 안으로 들어가 재빨리 문을 닫았다. 조금 전까지 기욱이 있던 샤워실에는 기욱의 흔적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젠장. 눈치를 보며 머뭇대던 서진은 마지못해 샤워기에 손을 올렸다.
* * *
간신히 샤워를 마친 서진은 뒤늦게 가운과 수건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대로 옷을 입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채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서진이 샤워실 문을 슬쩍 열었다. 문 바로 앞으로 뭔가가 보였다.
가운과 수건이었다. 원래부터 있었는지 기욱이 뒀는지 알 수는 없었다. 서진은 혹시라도 기욱이 볼까 재빨리 가운과 수건을 집어 들고 안으로 숨었다. 가운을 걸친 뒤 허리의 끈을 최대한 동여맸다. 방 안이 조용했다. 침대 근처 옆 소파에 기욱이 몸을 반쯤 뉘이고 있었다.
기욱은 서진이 나왔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다. 뭐지? 조심스럽게 앞쪽으로 돌자 팔짱을 끼며 자는 기욱이 보였다. 조금은 거친. 그렇다고 눈에 거슬릴 정도까지는 아닌 숨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혼자 눕기엔 커다란 침대와 기욱을 번갈아 바라봤다. 아무리 그래도 소파에서 자게 내버려 두는 건 아닌 것 같았다. 서진이 기욱의 어깨 위로 손을 가져다 댔다. 동시에 눈을 뜬 기욱의 손이 서진의 손목을 붙잡았다.
살짝 놀란 서진이 뒤로 물러나려 했으나 기욱의 힘으로 움찔거렸다. 몸을 완전히 일으킨 기욱은 서진의 모습을 살폈다. 서진이 입고 있는 가운은 한눈에 봐도 서진과 맞지 않았다. 가운은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같았다. 억지로 동여맨 끈이 서진의 꼴을 더 우습게 만들고 있었다.
“왜?”
“치, 침대에서…….”
“침대?”
“침대에서 주무세요.”
서진이 기욱의 뒤에 있는 침대를 힐끗거렸다. 그제야 기욱은 제가 깜박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답지 않게 잠이 들다니 어지간히 피곤했던 모양이다. 기욱이 몸을 일으켰다. 기욱은 붙잡은 서진의 팔을 놓아주지 않았다. 팔에 맞닿은 맥박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기욱이 뒤로 살짝 물러나자 서진 또한 살짝 물러났다. 기욱의 가운 끈이 금방이라도 풀릴 것 같이 늘어졌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자 가운 사이로 팬티만 입은 기욱의 아래가 그대로 드러났다. 서진은 도무지 어디에 눈을 둬야 할지 몰랐다. 탁, 뒤로 물러나던 서진의 발이 걸렸다. 침대였다.
“귀엽네.”
“귀… 귀엽….”
“왜? 나쁜 말은 아니잖아.”
“모, 모르겠어요.”
갈 곳이 없는 서진과 달리 기욱의 몸은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다. 서진의 몸이 침대에 반쯤 눕혀졌다.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기욱이 서진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정도로 뺨이 맞닿았다.
서진은 도무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기욱을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다고 느끼는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런 상황을 허락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었다. 서진은 기욱의 행동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자와 섹스를 하면서. 남자도 된다는 뜻인지, 아니면 원래부터 게이인지 알 수가 없었다.
쯧, 기욱은 인상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강제로 하는 것도 싫은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마냥 취향은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기욱은 재빨리 방의 불을 껐다. 순식간에 주변이 어두워졌다. 서진이 침대 안쪽으로 물러났다. 잠시 뒤 침대가 푹, 하고 가라앉았다.
기욱이 올라왔음이 틀림없었다. 무언가가 서진의 허리를 잡아당겼다. 기욱의 손이었다. 손을 살짝 움직이자 기욱의 가슴팍이 닿았다. 기욱의 몸을 가리던 가운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였다. 어둠 속에서 서진은 어쩔 줄 몰라 하며 기욱을 밀어냈다. 머리 위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계속 그렇게 움직이면.”
“…….”
“확 덮쳐 버리는 수가 있다.”
“그, 그게…….”
“난 두 번은 안 봐줘.”
기욱의 품에 안긴 서진이 잔뜩 긴장했다. 후우, 숨을 들이쉰 기욱이 서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기욱은 좀 자고 싶었다.
“괜한 짓 하지 말고 자.”
* * *
기욱은 본능적으로 눈을 떴다. 두꺼운 커튼 사이로 흘러나오는 빛이 기욱의 눈을 부시게 만들었다. 가슴 부근으로 사람의 체온이 느껴졌다. 어젯밤 일이 문득 떠올랐다. 하, 웃음이 나왔다. 고개를 살짝 숙이자 품 안에서 자는 서진이 보였다. 조심스럽게 일어나 소파 앞 유리 테이블에 놓인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6시 20분. 이런. 기욱은 곤란하다며 뒷목을 살짝 긁적였다.
답지 않게 늦잠을 잔 모양이다. 병원까지 차로 10분이니 늦을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냥 여유가 있는 것 또한 아니었다. 기욱이 서둘러 옷을 입었다. 잠들어 있는 서진의 앞에 섰다. 서진의 가운은 여전히 꽉 묶여 있었다. 주머니를 뒤지자 담배가 나왔다. 돗대였다. 서진이 잠결에 몸을 뒤척이며 등을 돌렸다. 고민하던 기욱은 결국 말없이 방을 나갔다.
서진이 잠에서 깬 건 그로부터 4시간이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난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호텔, 커다란 침대. 서진은 조심스럽게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서진의 발밑으로 기욱이 어젯밤 마신 맥주 캔이 차였다. 빈 맥주 캔을 집어 든 서진은 어젯밤 일이 꿈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휴대폰, 서진은 서둘러 휴대폰을 찾았다. 정신이 없어 엉망으로 벗어 놓은 옷가지들 틈에서 휴대폰이 나왔다. 배터리가 없었다. 화장대 사이로 휴대폰 충전기가 꽂혀 있었다. 휴대폰이 켜졌다. 오전 10시 30분. 서진은 뒤늦게 방 안을 둘러봤다.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부재중 전화 한 통과 문자가 와 있었다.
「서진아 누나 출근할 테니까 저녁에 보자!」 오전 5:44
누나에게서였다. 출근할 테니 저녁에 보자는 문자였다. 서진은 알겠다며 답장을 보냈다. 일이 바쁜지 누나에게 답장은 오지 않았다. 상관은 없었다. 어젯밤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도대체 기욱은 왜 그랬던 걸까? 해결되지 않은 의문들이 서진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계속 여기에 있을 수는 없었다. 옷을 입은 서진은 낯선 방 안을 둘러 봤다. 현관 쪽에 카드키가 꽂혀 있었다.
조심스럽게 키를 빼자 방의 불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카드 키를 챙긴 서진은 1층 로비로 내려왔다. 서진의 키와 비슷한 카운터에 직원이 다가왔다.
“어떤 걸 도와 드릴까요?”
“저기 이거…….”
눈치를 본 서진이 카드키를 반납했다. 다행히 직원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가면 되나? 서진이 막 등을 돌리려던 찰나 누군가 서진을 불렀다. 프론트 직원은 아니었다. 뭘 하는 직원인지는 알 수 없으나 정장을 입은 남자는 뭔가를 두고 갔다며 서진에게 내밀었다.
“손님, 이거 두고 가셨어요!”
“네?”
수표였다. 10만 원권 두 장. 서진이 가고 방을 청소하러 들어간 메이드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걸 발견했다고 했다. 서진의 말에 남자 직원도 당황스러워했다. 이내 프런트 직원과 대화를 주고받았다.
“1508호실에서 나오시지 않았나요?”
서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틀림없다고 했다. 기욱이 두고 갔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서진은 수표를 받았다. 집에 돌아온 서진은 빳빳한 새 수표를 만지작거렸다. 어떻게 하지? 이미 점심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 뒤로 기욱에게 연락은 없었다.
기욱이 집에 갔는지, 아니면 병원에 출근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한숨을 쉰 서진이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수화음이 들리기 무섭게 기욱이 전화를 받았다. 이제 막 점심을 먹으려던 기욱은 서진의 전화에 식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입밖에 대지 못한 상태였다. 서진은 주변이 소란스러운 걸 알고 잠시 기다렸다. 몇 초 뒤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서진의 귀를 간지럽히는 낯선 사람들의 대화 소리나 웅성거림은 더 이상 없었다.
― 저기……. 어제 호텔에서 돈 두고…….
― 다음 주 월요일 저녁.
기욱이 서진의 말을 잘랐다. 서진은 기욱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멀리서 기욱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러니까 혹시 돈 두고 간 거…….
― 7시 30분. 집 근처에 공원 있지? 거기로 나와.”
서진은 기욱이 자신의 말을 전혀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 데다 멋대로 약속까지 잡았다. 서진의 의사도 묻지 않은 일방적인 약속이었다. 서진은 화가 났다.
― 저 그날 약속 있어서 못 갑니다.
― 난 강요는 안 해.
또 저런 말투. 서진은 주먹을 쥐었다. 손안에 있는 수표가 구겨졌다. 저 말투의 어디가 강요가 아닌지. 기가 막혔다. 동료 인턴에게 금방 간다며 손을 올린 기욱은 휴대폰을 바로 잡았다. 이내 깜박했다는 투로 말했다.
― 아, 그리고.
― …….
― 돈 두고 간 거 아냐.
― 그게 무슨…!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겼다. 서진이 다시 전화를 걸었으나 기욱은 받지 않았다. 문자 또한 마찬가지였다. 서진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 * *
그 뒤로 몇 번인가 기욱에게 연락을 더 했지만, 기욱은 더 이상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렇다고 서윤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3학년이 되고 하루하루가 빠르게 지나갔다. 쉬는 시간, 서진은 얼떨결에 가지고 온 수표를 주머니에 안에서 만지작거렸다. 벌써 금요일이었다. 역시 아닌 것 같아 다시 문자를 보내려 휴대폰을 열었다.
“너 뭐 해?”
“아! 박시헌! 놀랐잖아!”
서진이 재빨리 휴대폰을 닫았다. 혹시 시헌이 봤을까 눈치를 살폈다. 정작 시헌은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다행히 못 본 것 같았다. 서진은 수표를 주머니 안쪽에 구겨 넣었다. 시헌이 서진의 책상 위에 몸을 살짝 걸쳤다. 덕분에 책상에 있던 수학 문제집이 가려졌다.
“오늘 시간 돼? 학교 끝나고 영화 보자.”
3학년이 된 이후로 늘 학원에 치이던 시헌에게는 뜻밖의 제안이었다. 금요일. 원래라면 방과 후 수업이 있는 날이지만 선생님의 개인 사정 때문에 수업을 하루 쉰다고 했다. 시헌에게 있어는 보기 힘든 자유 시간이었다.
시헌은 평소에도 시간이 나면 종종 영화를 보러 가자고 제안하고는 했다. 중학생 남학생들이 놀러 갈 곳이라고 해 봤자 PC방, 게임방, 영화관 정도가 전부였다. 둘 다 게임을 즐기지 않는 탓에 갈 곳이라고는 영화관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도무지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미안, 오늘은 좀.”
“그래?”
시헌은 약간 아쉬운 표정으로 다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이 약간 쓸쓸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시헌은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왠지 기욱이 떠올랐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은소가 조심스럽게 끼어들었다.
“나, 난 오늘 시간 돼.”
“팝콘 좋아해?”
“어? 팝콘? 상관없는데.”
“그래. 알았어.”
시헌이 자리로 돌아갔다. 은소와 서진이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영화관에 가면 팝콘을 먹긴 하는데 뜬금없이 팝콘을 좋아하냐고 묻는 건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두 사람은 나중에야 시헌이 팝콘 세트 쿠폰이 생겼다는 사실을 알았다.
칠판 위 시계를 본 서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쉬는 시간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바로 옆 화장실 칸막이로 들어가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이 금요일이라 평소보다 더 여유가 없는 걸지도 몰랐다. 두 번의 연결, 그러나 기욱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칸막이 너머로 남학생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서진은 칸막이에 머리를 기댄 채 주머니를 뒤졌다.
10만 원짜리 수표 두 장. 이제 막 일을 시작한 누나와 함께 사는 서진에게는 만져 본 적도 없는 금액이었다. 세 번째 통화, 역시나 연결은 되지 않았다. 휴대폰을 확인하자 쉬는 시간이 끝나 감을 알았다. 문을 열고 나오자 복도에서 시헌과 부딪혔다. 시헌이 넘어지려는 서진을 재빨리 붙잡았다.
“아, 미안.”
“됐어. 그보다 괜찮아?”
시헌이 서진의 상태를 살폈다. 미세하지만 떨고 있는 것이 보였다. 시헌이 손을 내밀자 서진이 시헌의 손을 쳐 냈다. 놀란 시헌이 살짝 뒷걸음질 쳤다. 화장실을 나온 남학생들이 두 사람을 힐끗 쳐다봤다. 서진의 입술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서진이 손등으로 입가를 살짝 닦았다.
옅은 피가 묻어났다. 불안하거나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면 입술을 강하게 깨무는 건 서진의 버릇이었다. 무슨 일인지 묻진 않았으나 오늘 종일 서진의 상태는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니었다. 화장실을 간다고 나갔지만 정작 화장실을 다녀온 것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너 무슨 일 있어?”
“별거 아냐.”
“무슨 일인데. 아픈 거 아냐? 아프면 보건실이라도…….”
“너한테 듣고 싶지 않다고!”
서진이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수업 종이 쳤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서진의 외침을 들은 한 여학생이 뒷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이내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하아, 숨이 빨라졌다. 사실은 화를 낼 만한 일도 아닌데. 시헌의 행동은 기욱을 생각나게 하였다. 서진이 뒷목을 살짝 긁적이며 시헌의 눈치를 살폈다.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미, 미안. 그냥 좀……. 혼자 있고 싶어.”
복도 건너편에서 선생님이 다가왔다. 아직도 교실에 들어가지 않은 둘을 보고 뭐라고 하고 있었다. 시헌은 선생님과 서진을 번갈아 바라봤다.
“선생님한테 말해 줄래?”
“알았어.”
시헌은 교실로 들어갔다. 서진은 그 길로 복도 안쪽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갔다. 보건실은 위층이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계단과 계단 사이에 선 서진은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그날 이후 서진은 몇 번인가 호텔에 다시 전화해 확인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같았다.
그날 저녁 11층 스위트룸에 머문 건 서진과 기욱밖에 없었다. 기욱이 깜박하고 놓고 두고 간 것이 아니라면 대체 이 돈은 뭐란 말인가. 아니나 다를까 기욱은 답장이 없었다. 보건실 선생님에게 아프다는 핑계를 대고 침대에 누웠다. 침대 위에서도 몇 번이나 답장이 오지 않는 휴대폰과 수표를 만지작거렸다.
월요일 7시 반. 서진은 수표를 접어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돌려주는 게 좋을 것 같았다.
* * *
기욱은 공원 옆 1차선 도로 갓길에 차를 대 둔 후 차 문에 몸을 살짝 기댔다. 딱 달라붙는 청바지에 엉망으로 풀어진 흰 셔츠는 팔까지 접혀 있었다. 자동차 창문이 고개를 숙이면 보일 정도의 높이로 열려 있었다. 조수석에는 겉옷과 붉은색 체크무늬 넥타이가 엉망으로 놓여 있었다. 기욱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뒷주머니에 있는 300원짜리 편의점 라이터를 꺼냈다. 툭툭, 점화기 소리가 났으나 불은 붙지 않았다. 고개를 뒤로 해 하늘을 봤다. 겨울이 많이 가신 탓인지 어둡진 않았으나 그렇다고 마냥 밝은 날씨도 아니었다. 바람은 불지 않았다. 불이 붙지 않은 담배 필터를 씹었다. 뒤늦게 휴대폰을 가지고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창문 너머를 힐끗거리자 겉옷 사이로 휴대폰 액정 화면이 보였다.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가 누군지 알 수는 없었다. 문을 열기가 귀찮았다. 전화를 받을까 말까 고민하던 사이 전화가 끊겼다. 기욱이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목소리가 들렸다.
공원을 둘러싼 수풀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기욱이 수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차림새를 보아하니 학생 같아 보이진 않았다. 그렇다고 나이가 많아 보이는 것 또한 아니었다. 기껏해야 대학교 1학년, 이제 막 성인이 된 남자이었다. 쯧, 혀를 찬 기욱은 거침없이 남자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래서 어제…….”
남자 하나가 친구들을 앞에 두고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남자는 기욱이 다가왔다는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했다. 뒤늦게 남자의 앞에 있던 친구들이 등 뒤를 손가락질했다. 남자가 몸을 반쯤 돌렸다. 한 손에 주머니를 넣은 기욱은 입에 물은 담배를 빼냈다.
담배 끝 필터에 옅은 타액이 묻어났다. 때마침 근처에 있던 다른 남자가 담뱃불을 붙이고 있었다. 남자와 기욱의 눈이 맞았다. 주머니에서 손을 뺀 기욱은 다른 손으로 불이 붙지 않은 라이터를 탁탁거렸다. 남자들이 서로 눈치를 살폈다. 이내 가장 가까이 있던 남자 하나가 자신의 라이터를 내밀었다.
“저……. 불 빌려 드릴까요?”
“아, 네.”
기욱이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이 입을 열자 살짝 긴장한 얼굴들이 누그러졌다. 라이터를 받은 기욱이 재빨리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남자들의 담배 연기 사이로 기욱이 내 뱉은 담배 연기가 섞여 들어갔다.
“고마워요.”
“네. 뭐 별걸요.”
기욱은 가볍게 인사를 한 뒤 등을 돌렸다. 차 앞에 선 기욱이 시간을 확인했다. 35분이 조금 넘었다. 돌아가야 하나 기욱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질 무렵 건너편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서진이었다. 검은 잠바 차림에 서진은 기욱을 보더니 슬쩍 고개를 숙였다.
인사를 하는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어색하게 꾸벅대는 모습이 참으로 볼만했다. 기욱이 넘어오라며 손가락질했다. 주변에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한 서진이 기욱 쪽으로 넘어왔다. 뛰어오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걸어오는 것도 아닌 참으로 애매한 걸음이었다.
기욱의 앞에 도착한 서진의 발이 탁, 하고 걸려 넘어졌다. 기욱의 앞에 있던 작은 돌 때문이었다. 서진의 몸이 기욱의 앞으로 쓰러졌다. 기욱은 빠르게 그런 서진을 붙잡았다. 때마침 건너편 차선으로 차가 지나갔다. 기욱이 서진을 바로 일으켰다.
“죄송해요.”
“그래. 다음부턴 조심해.”
기욱의 대답에 서진은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보통 저기선 별거 아니라는 등 적당히 넘어가 주는 게 보통인데. 서진은 왠지 기욱이 자신을 구해 준 것에 대해 생색을 내는 것 같았다. 기욱이 다시 시계를 살폈다. 40분이 넘어 있었다. 차 문을 열었다.
“늦었네.”
“여, 여긴 잘 몰라서요.”
서진이 기욱의 눈을 피했다. 단순한 녀석. 그러니 아직 애는 애였다. 기욱은 서진의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았으나 애써 걸고넘어지지 않았다. 그리 많이 늦은 것도 아닌 데다 오긴 왔으니 그걸로 된 것이었다.
서진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손을 살짝 모으고 있었다.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으로 보아 뭔가를 쥐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그 뭔가도 기욱이 눈치를 챌 만한 것이었다.
“일단 타.”
차 안으로 몸을 반쯤 넣은 기욱은 조수석에 놓인 옷가지들을 뒤쪽으로 내던졌다. 기욱도 차에 타려 하자 서진이 고개를 저었다. 기욱이 다시 차에서 몸을 뺐다.
아까 그 남자들이 공원을 빠져나와 나가고 있었다. 기욱은 팔짱을 꼈다. 걷어 올린 셔츠 위로 찬 바람이 그대로 들어왔다. 기욱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손을 숨기는가 싶던 서진이 이내 기욱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이거 돌려주러 왔어요.”
―지난번 수표였다.
예상한 결과에 기욱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가져.”
기욱의 대답에 서진은 뺨을 살짝 긁적였다. 기욱의 반응을 아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서진이 이렇게 행동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무슨 생각이신진 모르겠지만 전 이런 돈 받을 수 없어요.”
기욱은 서진이 요즘 아이들과 달리 참으로 똑 부러진 구석이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기욱이 그러는 건 단순히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딘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느낌이 있었다. 그사이 서진이 말을 이어 갔다.
“게다가 당신은 그……. 시헌이의……. 형님이시잖아요.”
그 말은 기욱을 웃게 했다. 입을 가린 기욱이 저 혼자 웃었다. 서진은 기욱의 웃음이 부담스러운 모양인지 눈을 피했다. 기욱의 팔이 차 위로 올라왔다. 몸을 살짝 숙이자 밑으로 서진이 보였다. 서진은 주변을 둘러봤다. 평소에도 사람들이 많지 않은 공원에는 기욱과 서진 둘밖에 없었다.
“내가 시헌이 형인 거랑. 그 돈이랑 관계있어?”
“딱히 관계는 없지만……. 그래도…….”
“그럼 받아.”
“그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서진이 끝까지 고개를 저었다. 기욱은 성격상 같은 행동을 여러 번 하는 걸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찮았다. 꼭 서진이 아니더라도 마찬가지였다. 어차피 결과는 정해진 일을. 왜 그렇게 쓸모없이 돌려 말하거나 거절하는지 기욱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어차피 인생은 한 번이다. 그런 인생. 복잡하게 가서 좋을 이유가 없었다. 편하게 가자. 그것이 기욱의 생각이었다. 서진과 거리를 벌린 기욱이 반쯤 열린 차 문을 손가락질했다.
“일단 타.”
때마침 몇몇 학생들이 공원으로 오고 있었다. 근처 학교 교복이라는 걸 알아차린 서진은 어쩔 수 없이 차 안에 탔다. 기욱이 재빨리 차 문을 닫았다. 차가 천천히 공원을 빠져나왔다. 일단 큰 거리로 나오긴 했으나 목적지가 정해진 건 아니었다. 팔을 뻗어 뒷좌석에 두었던 겉옷 안에 휴대폰을 꺼냈다. 부재중이 몇 통 와 있었다. 서윤이었다. 기욱이 문자를 보내기 위해 패드를 누르자 서진이 기욱의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문자를 보내기 무섭게 답장이 왔다. 기욱은 휴대폰을 반쯤 돌려 일부러 서진에게 보여 줬다.
“밥은?”
“아직요.”
“가고 싶은 곳 있어?”
서진에게 질문을 하면서도 기욱은 머릿속으로 갈 만한 곳을 물색했다. 서진은 차가 점점 집과 공원에서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차의 속도가 느려지고 옆으로 인도가 보였다. 지금이라면 걸어서 갈 만한 거리였다. 서진이 좌석의 문고리를 만지작거렸다. 탁, 소리가 나며 문이 저절로 닫혔다. 운전석 쪽을 보자 버튼을 만지고 있는 기욱의 손가락이 있었다. 기욱은 차선을 바꿔 좀 더 안쪽으로 들어왔다. 초록 불에서 차가 잠시 멈췄다. 기욱은 손끝으로 핸들을 툭툭 건드렸다.
“난 말야.”
“…….”
“딱딱하게 구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여자든, 남자든.”
서진이 손안에 있는 수표를 구겼다. 차에 탄 순간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진의 표정에 기욱은 그걸 이제야 알았냐며 입꼬리를 올렸다. 기욱은 다시 차를 돌려 근처를 돌았다. 서진도 기욱이 다른 곳을 가지 않고 근처를 맴돌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디 갈래?”
서진이 이를 살짝 갈았다.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고민이 서진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게 서진의 생각을 바꾸거나 하지는 않았다.
“집이요. 그리고 돈은 돌려 드릴게요.”
서진이 운전을 하는 기욱의 몸 쪽으로 수표를 올렸다. 기욱의 한숨 소리가 적막한 차 안을 맴돌았다. 기욱은 결국 수표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왔던 방향으로 차를 돌렸다.
“그거. 좋은 선택이 아닐 텐데.”
기욱은 다른 손으로 대시보드 위에 있는 휴대폰을 만졌다. 동시에 잠바 안에 있던 서진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욱이 받아 보라며 눈치를 줬다. 서진이 휴대폰을 열었다. 모르는 번호, 그러나 지난번 그 번호 같지는 않았다. 기욱이 또 다른 휴대폰을 허공에 흔들었다. 서진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간 것을 확인한 기욱은 종료 버튼을 눌렀다.
동시에 서진의 손에 들린 휴대폰 진동이 멈췄다. 기욱의 차는 어느새 서진의 집 근처 골목으로 들어와 있었다. 골목 안쪽에서 차가 멈췄다. 탁, 소리가 나더니 잠금장치가 풀렸다. 서진은 재빨리 차 문을 열었다. 바깥 공기가 서진의 뺨을 툭툭 스쳤다. 그제야 조금 살 것 같았다. 서진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기욱이 서진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손가락질했다.
“연락해.”
그럴 일은 절대 없어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서진은 끝내 말을 하지 못했다. 서진은 말없이 집이 있는 방향으로 등을 돌렸다. 기욱의 차가 유유히 골목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들어가자 병원에서 막 돌아온 서윤이 있었다. 막 서진에게 전화를 걸려 했던 서윤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어디 갔다 온 거야! 누나가 걱정했잖아.”
“아, 잠깐 친구랑 얘기 좀 하느라. 요 앞에.”
서진은 살짝 열린 문 너머를 손가락질했다. 저녁 먹었어? 겉옷을 벗어 큰방 안쪽에 걸어 둔 서윤이 물어 왔다. 서진은 고개를 저었다.
“나가서 먹을까?”
“그래도 돼?”
“누나 오늘 월급 탔잖아.”
서윤이 자랑스럽게 브이를 지으며 서진의 어깨에 팔을 올렸다. 아, 누나 하지 말라고! 서진이 말렸으나 서윤은 듣지 않았다. 서진은 서윤의 이런 행동이 아직도 저를 어린아이 취급하는 것 같아 못마땅했다.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잠시만 기다려.”
“응. 아, 저기 누나!”
“어? 왜?”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서윤이 몸을 살짝 돌렸다. 거실에 있는 싸구려 시계 초침 소리가 서진의 머릿속을 울렸다. 입술 끝이 아려 왔다. 서윤을 붙잡은 건,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다.
“벼, 병원에서 별일 없었지?”
“얘도 참. 당연히 없었지.”
서윤이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반쯤 열린 문 사이로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가 병원에서 얼마나 잘 지내는데. 지난번엔 환자가 말이야……. 병원 얘기를 하는 서윤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들떠 보였다. 서윤이 가벼운 옷차림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모습에 서진은 안심이 됐다. 서진은 서윤의 옷자락을 붙잡고 고개를 숙였다. 서윤이 서진의 등을 토닥였다.
“오늘따라 왜 이래?”
“그냥……. 좀 그래서.”
서진은 고개를 들었다. 누나가. 서윤이 행복했으면 좋겠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같은 건 아무래도 좋았다. 서윤이 없는 세상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 만약 지옥이 존재한다면 그건 서윤 없이 세상에 홀로 버려지는 것일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