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9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2)(2권) (11/83)

Chapter. 9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2)

미안. 말하려 했어.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라니…?

너희 누나랑 우리 형. 둘이 사귀어?

차라리 그때 그럴지도 모른다고 대답했어야 했다.

누나 남자 친구가 너네 형 친구야.

그런 말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 * *

내가 중학교 2학년이 됐을 무렵, 누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해 줬다. 대학교 근처 카페에서였다. H대 경영을 다닌다는 남자의 외모는 평범했다. 사귄 지 1년이 좀 넘었다고 했다. 가족이라고는 나밖에 없는 누나를 남자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날, 그―박기욱을 만났다.

박기욱은 누나가 만나는 남자 친구의 중학교 동창이었다. 훤칠한 키에 매력적인 외모, 주변의 시선을 사로잡는 카리스마에 처음 만난 사람들은 제대로 입을 떼기조차 힘들었다. 그는 이 근처를 지나가다 우연히 들렀다고 했다. 그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평범한 집안에서 학창 시절 죽어라 공부해 H대 경영에 들어간 누나의 남자 친구. 남자의 집안은 못사는 정도는 아니지만, 남자의 모든 대학비를 감당할 수 있을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대학에 들어가기 무섭게 남자는 취업 준비다, 학자금 대출이다, 돈에 얽매였다. 남들보다 열심히 공부했지만 결국 장학금은 받지 못했고, 남자는 휴학을 계획 중이었다. 그러나 그―박기욱은 달랐다.

평범한 옷차림에 만 원이 조금 넘는 셔츠와 바지, 큰맘 먹고 산 십여만 원짜리 시계를 차고 다니는 남자와 달리 그의 흰 셔츠는 백화점 안에서도 꽤 고가 브랜드의 셔츠였다. 대학 입학을 축하한다며 친척이 사 준 시계는 남자의 1년 치 대학 등록금을 훨씬 넘긴 금액이었다.

학창 시절을 공부에 쏟으며 동네 학원을 전전한 남자와 달리 그는 학원가의 유명 수업들을 들었다. 남자가 엄마에게 졸라 고3이 되었을 무렵 간신히 했던 대학 과외를 그는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받았다.

지하철 교통비도 아까워 가까운 거리를 걸어 다니는 남자와 달리 그의 지갑 한쪽에는 자동차 키가 걸려 있었다. 아빠가 쓰던 차를 받은 거라고 하지만 외제차 종류였다.

남자와 그가 왜 친구인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누나의 시선은 남자 친구가 아닌 박기욱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살았다. 신도시에 있는 오피스텔에 산다고 했다. 우연이라며 이야기가 나왔다. 그가 내 교복을 힐끗거렸다. 마이 가슴 쪽에 학교의 이름이 작게 적혀 있었다.

“우연이네.”

“뭐가요?”

“내 동생도 같은 학교 다니거든.”

“어머, 동생도 있어요?”

누나가 질문을 했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째서인지 그의 시선이 나는 부담스러웠다. 반면 누나는 그가 꽤 마음에 든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마음에 든 것 이상일지도 모른다고 확신했다. 다리를 꼬며 커피를 마시던 그가 꼬인 다리를 풀며 말했다.

“박시헌이라고 알아?”

상상하지도 못한 이름에 나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동생이 같은 학교. 학교에 있는 누군가의 형일 거란 생각은 했지만 설마 시헌의 형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있자 눈치가 보였던 누나가 내 몸을 살짝 찔렀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친해?”

“네. 같이 다녀요.”

“흐음, 그래.”

그는 더 이상의 말을 하지 않았다. 다시 보니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하고. 그날, 시헌에게 형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저녁 시간이 조금 지났다. 카페를 나와 저녁 얘기가 나왔다. 밥을 어디서 먹을까 고민하던 중 그에게 시선이 닿았다.

“기욱 씨는 시간 되세요?”

“병욱이만 괜찮다면.”

정작 누나의 남자 친구인 병욱의 표정은 잔뜩 구겨져 있었다. 그는 자리를 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가라고 할 수도 없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그와 저녁을 같이했다. 그가 맛있는 곳을 안다고 했다. 백화점 안에 있는 레스토랑에 갔다. 백화점 안에서도 꽤 고가의 레스토랑이었다. 가격도 가격이지만 인기가 많아 하루 이틀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저녁에는 식사하기가 힘들었다. 입구에 배치된 메뉴판을 본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식사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직원의 말이 들려왔다.

“예약하셨나요?”

“아뇨. 아닌데요.”

“저희가 오늘은 예약이 전부 차서. 시간이 좀 걸리실 수 있는데……. 식사를 못 하실 수도 있습니다.”

“아, 그런가요?”

종업원의 태도에 남자 친구는 오히려 잘됐다며 등을 돌렸다. 그가 온 곳은 남자의 돈으로는 부담이 되는 가격이었다.

“자리 없대. 그냥 다른 데 가자.”

그러자 그가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뒤 매니저쯤 되는 사람이 뛰어나왔다.

“잠깐만요. 손님. 혹시 박기욱 손님이 어느 분이십니까?”

정중한 매니저의 말투에 기욱이 주머니에서 손을 빼며 손을 들었다.

“안쪽으로 들어오세요.”

바로 전에까지 없던 자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신기할 뿐이었다.

“와, 어떻게 했어요?”

“이모가, 여기 백화점 MVIP이거든요. 원래 이런 데는 대기석이 있어요. 자주 오기도 했고.”

지금처럼 예상치 못한 손님이 올 경우를 대비한 빈 좌석이 있는 것을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자리에 앉자 관리자급 되는 사람이 한발 늦게 나왔다.

“미리 오시기 전에 연락하시지 그러셨어요.”

“저도 갑작스럽게 오게 된 거라서요. 번거롭게 해 드렸군요.”

“하하, 그럴 리가요. 식사 맛있게 하세요.”

네 사람이서 어딘가 이상한 식사를 했다. 식사가 끝날 무렵 냅킨으로 익숙하게 입 끝에 묻은 소스를 닦은 그가 고개를 들었다. 창밖은 이미 어두워진 지 오래졌다.

“차 있어요?”

누나가 남자 친구의 눈치를 보더니 말 했다.

“하하, 아니요.”

“태워다 줄게요. 아까 말하는 거 보니까 집 근처던데.”

남자는 살짝 머뭇거렸으나 그의 집이 우리 집과 근처라는 것을 못 박는 그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럼 좀 부탁할게.”

굉장히 이상한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남자는 그의 말을 거절하지 못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남자가 어딘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그것은 사소한 시작에 불과했다.

그 일―박기욱과 만난 뒤부터 누나는 남자 친구와 자주 싸웠다. 남자와 싸울수록 누나는 그와 자주 만났다. 그래도 남자 친구가 있는데. 다른 남자와 자주 만나는 건 좋지 않은 것 같다며 조심스럽게 의견을 이야기했다. 누나는 별거 아니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둘이 친구잖아. 괜찮아.”

두 사람이 친구니 문제가 될 게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누나가 내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중학교 2학년, 누나의 연애사에 참견하기에 내 나이는 너무 어렸다.

이건 시헌과 현장이 우리 집에서 자고 간 지 얼마 되지 않은 후의 일이었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학교에 갔다가 집에 들어왔다. 차이가 있다면 선생님이 집안에 일이 있어 종례하지 않은 것 정도였다. 반지하방 집 문이 살짝 열려 있었다.

“뭐야, 무슨 일 있나?”

무슨 일이 있나? 집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갔다. 집 불이 전부 켜져 있었다. 현관으로 낯선 신발이 있었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구두는 집안에 들어온 사람이 도둑이나 단순한 방문객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열린 문틈 사이로 묘한 소리가 들렸다.

‘하읏, 기욱 씨……. 슬슬 서진이 하교 시간인데…….’

잘못 본 줄 알았다. 으응. 귀를 자극하는 목소리는 틀림없는 누나의 목소리였다. 낡은 문이 조금 더 열렸다. 반나체 상태의 두 사람이 엉켜 있었다.

뒷모습뿐이지만 누나의 위에 올라탄 사람은 틀림없이 그였다. 아니, 누나가 부르는 기욱 씨는 그밖에 없었다.

재빨리 문 옆으로 숨었다. 소리가 점점 커졌다. 어떻게 해야 하지? 본능적으로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왜 그랬는지 알 수는 없으나 뭔가를 쥐고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소리가 점점 격해졌다.

신음이 절정에 달할 무렵 벽에 주저앉아 귀를 막고 있었다. 소리가 잠시 잦아들 무렵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밖으로 나가든 말든 어떻게든 해야 할 것 같았다. 누나가 볼까 몰래 방을 지나쳐 가려 했다.

“아응, 읏, 으응….”

또 들리는 누나의 목소리.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방 안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위에 올라타 허리를 흔들고 있는 누나. 그리고 누나의 몸을 감싸 안은 그와 눈이 맞았다. 봤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이내 툭, 하고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떨어졌다. 누나가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돌리려 하자 그는 재빨리 누나에게 진한 키스를 퍼부었다. 그의 키스에 정신이 없는 누나는 조금 전에 났던 소리에 대해서 빠르게 잊었다. 누나에게 키스하는 동안에도 그는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는 이 장면을 일부러 보여 주고 있는 것이었다. 누나의 밑에 있는 그가 허리를 움직였다. 결국 집을 뛰쳐나왔다.

사귀지 말라고 해.

아, 뭐라는 거야. 밥 먹다 말고. 미쳤냐?

어쨌든 형은 안 돼.

시헌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을 때가 종종 있었다. 그날도 그랬다. 시헌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즈음 누나가 남자 친구와 자주 싸우고, 그와 자주 만나고 있었던 건 사실이지만 여전히 남자 친구와는 교제 중이었다. 형에게 그런 말을 하는 시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백화점에서 그를 보는 누나의 시선이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그런데도 시헌에게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누나와 그가 만나는 걸 시헌에게 들키면 안 될 것 같았다. 차라리 조금 더 일찍 얘기했더라면 이렇게는 되지 않았을 텐데.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모든 게 늦은 뒤였다.

* * *

열등감.

그것은 그녀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자 그녀의 삶 전부였다. 아버지, 완벽하게 기억이 나는 건 아니지만, 그는 꽤 유명한 대학교수였다. 모두의 존경을 한 몸에 받으며 대학 강단에 서는 아버지는 여자 편력이 심했다.

평범한 집안에서 서울의 유명한 대학교수가 된 아버지와 달리 그녀의 집안은 이름만 들으면 알 만한 유명한 교수들을 배출한 교수 집안이었다. 그녀 또래의 친척들은 유명 대학교와 엘리트 코스를 달렸다. 그러나 그녀는 그렇지 못했다. 7명의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난 그녀는 위로는 오빠들과 언니, 밑으로는 여동생과 남동생에 치였다.

머리가 좋은 형제들에 엄마는 포함되지 않았다. 엄마가 3번의 시험 끝에 간신히 K대 경제학과에 들어갔을 무렵 그녀의 여동생은 한 번의 시험만으로 H대 경영을 수석으로 합격했다. 여동생이 대학교에 들어가고 친척들과 모여 떠들 때. 축하한다는 주변의 말에 여동생은 별거 아니라고 말했다.

‘사실은 미국에 있는 대학을 준비했었는데 잘 안 됐네요. H대도 그닥 맘에 들진 않은데. 일단 다녀봐야죠.’

그 자리에서 누구 하나 그녀의 K대 합격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없었다.

남자 친구를 처음 동생에게 소개해 주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남자 친구에게 헤어지자는 통보를 받았다. 한 달 뒤 남자 친구가 그녀 몰래 동생과 교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여동생에게 따졌다. 곧 나가 봐야 한다며 화장을 하고 있던 여동생은 고개도 돌리지 않은 채 말했다.

‘야, 너 진짜 미쳤어? 나한테 왜 그러는데?’

‘어머? 웃겨, 걔가 먼저 나한테 들이댄 거거든?’

‘지금 뭐라고…….’

‘있지 언니, 거울 좀 보고 살아. 그렇게 사는 거 쪽팔리지도 않아?’

화장을 마친 여동생이 고개를 돌리며 한심하다는 듯 바라봤다. 그녀가 아무리 잘 차려입어도 여동생의 외모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여동생은 황당한 그녀를 앞에 두고 아무렇지 않게 그녀의 남자 친구와 통화를 했다.

‘응. 오빠, 나 금방 나가.’

뛰어난 외모와 두뇌를 가진 형제들과 달리 그녀는 너무나 평범했다. 그녀는 집안의 안 좋은 유전자는 전부 물려받은 것에 틀림이 없었다.

그녀의 삶은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교수가 되기 위해 유학을 떠나거나 혹은 유명 대기업에 스카우트되어 연구원으로 있는 형제들과 달리 그녀는 평범하게 취업의 문을 두드렸다. 어렵사리 잘나간다는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그날, 그녀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그녀만의 착각이었다. 그녀의 취업 사실에 엄마는 축하의 말 대신 한숨을 쉬었다.

‘일 년 동안 취업 준비해서 고작 K 건설이라니. 누구한테 쪽팔려서 말이나 하겠니? 정민이는 졸업하자마자 N전자에 스카웃 제의 들어왔는데. 넌 그거에 반도 안 되는 연봉으로 결혼은 할 수 있겠어?’

일방적인 비교와 푸념에 그녀의 열등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그녀는 그래도 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집안사람들이 너무 대단해서 그런 거라고. 그녀의 착각이었다. 집안에서도 평범한 그녀는 회사 생활조차 평범했다. 말수도 없고, 사교성도 적은 그녀는 시간이 지날수록 회사에서 겉돌았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결혼을 약속한 남자가 있었다. 과거, 여동생에게 몰래 고백을 한 남자와는 다른. 착실한 사람이었다. 집안에는 비밀로 교제했다. 그가 결혼에 관해 얘기할 무렵 어렵사리 부모님과 자리를 잡았다.

‘어머님이 뭐 하신다고? 집은? 주원대로 근처에 좋은 아파트가 있다던데.’

‘…….’

‘대학교는 어디 졸업했다고? KI대는 외국 대학교니? 물리학과 졸업한 애가 경영을 해?’

‘…….’

‘하아, 그 돈 모아서 결혼식이나 하겠니?’

엄마의 끝없는 말이 이어졌다. 일주일 후 그는 결국 아닌 것 같다며 이별을 통보했다. 그녀는 처음으로 엄마에게 반항했다. 그녀의 친구들이 대학에 가 놀고 있을 무렵, 아무렇지 않게 삼수를 하라고 했을 때도 하지 않은 반항이었다. 그러나 엄마의 벽은 높았다. 사진 한 장을 주었다. 남자의, 아버지의 사진이었다. 선을 보라고 했다.

그녀는 그렇게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반강제에 가까운 결혼이었지만, 뜻밖에도 그 결혼으로 인해 그녀의 삶은 완전히 달라졌다. 늘 그녀를 무시하던 동생들의 태도가 조금씩 바뀌었다. 아는 척도 하지 않던 친척들이 찾아와 축하했다. 그녀는 회사를 그만두고도 사모님 소리를 들었다. 결혼하고 일주일이 지났을 무렵 아버지의 여성 편력에 대해서 알게 됐다. 왜 그러냐는 그녀의 말에 아버지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차피 다 알고 한 거잖아.’

그녀는 지위를 원했고, 평범한 집안인 것이 늘 한이었던 아버지는 배경을 원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혼하기에 그녀가 누린 삶의 지위는 쉽게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마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버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집착.

아버지가 가지고 오는 돈, 지위, 집안과 주변에서의 대우. 아버지를 잃는 순간 그녀의 인생은 나락으로 추락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전의 삶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할 수 없는 두려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집착이 되었다.

열등감이 어렸을 적 그녀의 삶이었다면, 나이가 든 지금 그녀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아버지를 향한 집착이었다. 아버지가 안는 여자들, 젊었을 적 그녀와 비교해도 손색 하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여성들이었다. 평범한 외모에 나이가 든 그녀가 아버지의 여자들을 이길 수는 없었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날이면 엄마는 나에게 화풀이를 했다. 엄마는 이상하다. 어린 나라도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애당초 사랑으로 결혼한 게 아니었던 아빠는 엄마의 학대 사실을 알고도 묵인했다.

‘적당히 해.’

간혹 어머니를 말리는 목소리가 들리긴 했지만, 그조차 자신의 직위와 안위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지 결코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학교수의 부인이 자식을 학대한다는 사실이 발각되는 것 자체가 아버지의 명예에 금이 가는 일이었다. 그런 날이 있고는 하면 엄마는 언제 그랬냐는 듯 나에게 잘해 줬다. 엄마는 그렇게 해서 조금이라도 아버지의 호감을 사고 싶어 했다.

나. 강서진.

그리고 누나 강서윤.

누나는 내가 엄마에게 맞아 밥을 먹지 못하고 창고에서 잠이 들어 있는 밤이면 늘 몰래 밥을 가져다줬다. 늘 폭력이 먼저인 엄마지만 누나만큼은 때리지 않았다. 열성 유전자를 물려받은 엄마이지만 형제들의 탓인지 누나의 외모는 엄마보다는 할머니에 가까웠다.

젊었을 적 모델 제의를 여러 번 받은 할머니. 돌 사진을 찍을 무렵 크면 예쁘게 될 거라는 말 한마디가 엄마를 바꿨다. 나에게 사는 옷 한 벌 값을 아까워하는 엄마지만 누나에게는 또래보다 비싼 옷, 좋은 옷을 입혔다. 누나는 공부도 잘했다.

학교 모임을 가면 엄마는 누나의 부모인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누구 하나 그런 엄마를 부러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없었다. 아파트 근처 평범한 초등학교에 입학한 나와 달리 누나는 사립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으며, 좋은 성적으로 외고에 입학했다. 세상에 우리 아들이 서윤이가 그렇게 좋다고 난리를 치는데. 엄마는 어렸을 적 열등감을 누나를 통해 풀었다.

말수가 적은 나와 달리 누나는 늘 당당했고, 밝았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누나라는 사실이 자랑스러웠다. 집안에서 기댈 곳은 누나밖에 없었다. 엄마의 삶이 아빠에 얽매여 있다면 내 어렸을 적 삶의 전부는 누나였다. 누나가 있었기에 그 모든 폭행과 폭언들을 견딜 수 있었다.

그날도 저녁을 먹지 못한 날이었다. 누나는 평소보다 조금 늦게 집에 들어왔다. 집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밥을 챙겨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터라 정신없이 밥을 먹었다. 평소라면 이것저것 말을 했을 누나가 그날은 유독 조용했다.

‘누나, 무슨 일 있어?’

‘응? 아니야. 아무것도.’

누나는 별일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웃고 있는 누나의 모습에 나는 정말 별일이 아닌 줄 알았다. 학교에서 늦게 왔다는 이유만으로 엄마에게 맞았다. 엄마는 때려도 울지 않는 나를 보며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엄마의 그런 폭언에도 나는 끝까지 울지 않았다.

‘어쩜 눈물 한 방울 안 흘리는 것 좀 봐!’

울면, 그것보다 더한 폭력이 이어질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입을 다물면 엄마는 제 풀에 지쳐 때리는 걸 그만뒀다. 학교 모임이 있다고 했다. 엄마는 아무렇지 않은 척 통화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창고 안에 숨어 오지 않을 내일을 기다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눈을 떴다. 창고 문을 살짝 열어 거실을 살폈다. 혹시 엄마가 아닐까 걱정이 되었다. 한참 동안 거실을 바라봤지만, 엄마는 오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거실로 나왔다. 소리의 근원이 1층 안쪽에 있는 누나의 방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아빠 제발… 하지 마세요.’

누나의 작은 침대 위에 얽혀 있는 남자가 누군지 모를 리가 없었다. 누나와 눈이 맞았다. 이내 작은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쪽을 본 아빠는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방문을 닫았다. 소리는 계속됐다. 오히려 처음보다 격한 소리가 났다.

8살, 그 행위가 무슨 짓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방 너머로 들려오는 살려 달라는 목소리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 하나만큼은 알았다.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은 채 아파트 단지 밖으로 나왔다. 무작정 나왔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관리실로 갔다. 때마침 저녁을 먹고 돌아온 젊은 여자 직원이 무슨 일이냐며 살갑게 물어 왔다.

‘꼬마야 무슨 일이니?’

아빠가……. 누나를…. 때렸나? 그건 아니었다. 나는 그녀에게 뭐라고 설명했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경찰을 불러 달라고 했다.

얼마 뒤 경찰이 왔다. 경찰에게 대략적인 사정을 설명했다. 집으로 올라가자고 했다. 경찰과 함께 집으로 올라갔다. 누나가 죽었으면 어떻게 하지? 엘리베이터 안에서 온갖 생각이 다 들었다. 문을 열자 아빠가 나왔다. 방 안에서 보았던 엉망인 옷차림이 아니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아빠는 경찰이 왔음에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뭐, 애 말로는 아버지가 누나를 어떻게 했다는 말이 있던데…….’

경찰이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아아,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했다.

‘아, 별거 아닙니다. 서윤이가 학교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걸려서 말이죠.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간 것뿐입니다.’

‘그렇습니까? 하아, 체벌은 적당히 하세요.’

경찰이 거실 안쪽을 힐끗거렸다. 누나의 방은 보이지 않았다. 경찰은 내 등을 살짝 밀었다. 떠밀리듯 현관 안으로 들어갔다. 또다시 신고가 온 경찰이 무전을 쳤다.

‘예. 해결됐습니다. 금방 내려가겠습니다.’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누나의 방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침대에 누워 반쯤 옷을 벗고 있는 누나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며칠 후 저녁,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문을 살짝 열어 거실을 살폈다. 엄마와 누나의 목소리였다. 울고 있는 누나에게 엄마는 말했다.

‘아빠가 그럴 수도 있지. 널 너무 사랑해서 그러는 거야.’

‘엄마!! 제발…! 그게 아니라 진짜…!’

‘강서윤! 엄마 말 잘 들어. 그건 아빠가 널 사랑해서 그런 거야.’

아빠를 잃는 순간 엄마의 모든 것이 무너진다. 아빠를 향한 엄마의 집착은 그 정도를 넘어섰다. 망상. 그것이 아빠를 지키는 엄마의 또 다른 방법이었다. 그녀는 아빠가 저를 사랑한다고 믿었다. 몸만 주는 더러운 년들과 자신은 달랐다. 아빠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결혼한 것으로 생각했다.

누나가 아빠에게 처음으로 당했을 무렵, 아빠는 다른 여자를 만나느라 집에 자주 들어오지 않았다. 아빠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적은 종종 있었으나 그날은 평소의 외도와는 차이가 있었다. 늘 젊은 여자만 만나던 아빠가 대신 엄마의 나이대의 또래를 만난 것이었다.

아빠가 만난 여자 또한 엄마 못지않은 교수 집안이었다. 3번의 수능 끝에 K대에 합격한 엄마와 달리 여자는 외국에 있는 유명 대학교를 나와 엘리트 코스를 밟은 여성으로 재벌 2세 남자와 결혼했다. 엄마와 마찬가지로 결혼을 이유로 일을 그만뒀지만, 서윤의 학교 모임이나 동창 모임에 나가는 엄마와 달리 여자는 시간이 날 때마다 꾸준히 공부를 계속했으며 시간 강사로 활동하기도 했다.

여자의 젊은 사진과 엄마의 젊은 사진은 누가 보더라도 달랐다. 어떤 여자가 와도 신경 쓰지 않던 엄마지만 이번만큼은 위험하다고 느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누나의 일이 있고 나서부터 아빠는 여자와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엄마와 아빠가 무슨 얘기를 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나는 그녀가 엄마로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그의 환심을 살 수 있다면 무슨 짓이든지 하는 악마였다.

나를 향한 엄마의 폭력은 달라진 게 없었다. 밥을 가져다주는 누나의 모습은 날이 갈수록 피폐해졌다. 내가 괜찮냐고 물어 오면 누나는 늘 괜찮다며 억지웃음을 지었다. 몇 번인가 더 경찰에 신고했지만, 아빠는 늘 능청스럽게 빠져나갔다. 몇 번의 신고에 경찰은 더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경찰에 신고한 사실을 엄마가 뒤늦게 알아차리는 탓에 더 맞기까지 했다.

아빠가 올 때면 방에서는 이상한 소리가 계속해서 났다. 처음, 엄마가 없는 타이밍만 노렸던 것과 달리 이제 아빠는 엄마가 있다 해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엄마는 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 입을 닫았다.

그들은 부모가 아니었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처음으로 신에게 빌었다.

신이 있다면 제발 우리 부모님을 죽여 달라고.

그날, 저녁. 아파트에 불이 났다.

정확한 화재 경위는 모른다. 그러나 불은 순식간에 번졌고, 연기는 아파트를 빠르게 뒤덮었다. 울다 지쳐 잠이 들었을 무렵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주변은 연기로 자욱했다. 전기는 모두 끊긴 지 오래였으며 곳곳에서 화재 경보가 울렸다. 숨이 막히고 폐가 타들어 갈 것 같은 지독한 공기가 불로 인한 연기라는 사실을 소방대원이 오기 전까지 알지 못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가운데 본능적으로 문고리를 잡았다. 일 초도 버티지 못하고 문고리에서 손을 뗐다. 불에 달궈진 문을 열 수가 없었다. 불이 베란다를 타고 올라왔다. 불 때문인지 문을 열 수가 없었다. 정말 죽는구나 싶었다. 쿵― 하고 요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현관에 있는 철문이 강제로 뜯겨 나가는 소리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필사적으로 문을 두드렸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문이 뒤쪽으로 쓰러졌다. 연기 속에서 빛이 났다. 이내 몸을 안는 커다란 손이 느껴졌다. 소방대원이었다. 나를 구한 그의 품에 있는 무전이 울렸다.

― 야. 너 어디야? 빨리 안 돌아와?

― 생존자 찾았습니다!

― 철수하라고! 위험해!

위험하니 슬슬 철수하라는 무전이었다. 나를 품에 안은 그가 집 안을 둘러보지도 못한 채 돌아서려 했다. 그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집 안을 둘러보고 싶어 했고, 상사는 빨리 내려오라며 무전으로 소리를 질렀다.

일분일초가 아쉬운 상황, 잘못하면 누군가를 구하긴커녕 둘 다 죽을 수도 있는 순간이었다. 막 소방대원이 된 지 이 년이 채 되지 않아 처음 대형 현장에 투입된 남자는 젊은 혈기에 두려움보다는 사명감에 불탔고, 이내 숨을 참은 뒤 쓰고 있던 산소 호흡기를 내 쪽으로 넘겼다.

“집 안에 다른 사람은 없니!!”

숨을 크게 들이쉬자 조금은 살 것 같았다. 그건 질문이라고 하기보다 소리를 지르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남자와의 눈을 피했다. 남자는 그렇게 봤을지도 모르지만, 정확히 따지면 저도 모르게 엄마와 아빠가 있는 방을 바라봤다는 쪽이 맞았다.

아빠가 누나를 건드린 날 저녁, 아빠는 꼭 엄마와 같이 방에 들어갔다. 두 사람이 같은 방에 있을 것이 틀림없다는 걸 생각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집 안 지리를 잘 아는 내 도움을 받고 싶어 했다.

“집 안에 다른 사람은!! 부모님은!!”

― 야! 너 미쳤어? 당장 내려와! 죽고 싶어? 거기가 몇 층인지 알고 그래!!!

그의 목소리를 들은 상사가 미친 짓이라며 소리를 질렀다. 내 대답을 기다리는 데 지친 그가 신경질적으로 무전을 했다.

― 아직 의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사다리까지 몇 층 차이 안 납니다!

15층, 그것이 소방 사다리가 올라갈 수 있는 한계였다. 초고층 아파트에서 불이 났을 경우 제대로 된 구조는 사실상 불가능했다. 혈기 왕성한 젊은 남자를 제외한 대부분 소방대원이 철수한 상태였다. 남자의 상사는 오랜 연륜과 현장 경험으로 설령 누군가를 발견한다 해도 구하지 못할 거라는 현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사람도 구하고 자신도 살아 내려간다는 남자와 달리 남자의 상사는 아무도 구하지 못하고 죽을지도 모른다는 최악을 가정했다. 남자와 상사의 실랑이가 극에 달할 무렵 호흡기를 손에서 뗀 나는 대답했다.

“누, 누나요!! 누나가 있어요!”

“부모님은?”

남자는 그 순간에도 물었다. 새벽 2시, 정상적인 가정이라면 어른이 집에 있어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순간 다시 유리창이 아래로 떨어졌다. 동시에 부모님의 방 쪽에서 쿵 하는 소리가 났다. 남자의 시선은 유리창이 떨어진 창문으로 향했고, 내 시선은 부모님의 방을 보고 있었다.

부모 같은 거.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나는 다급하게 물어보는 남자에게 대답했다.

“몰라요.”

“…….”

“오늘이 결혼기념일이어서 안 들어온다고 했어요.”

거짓말을 했다.

남자가 ‘잠시만.’이라고 한 뒤 산소 호흡기를 다시 사용했다. 남자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누나의 방을 손가락질했다. 남자가 누나의 방문을 강제로 열었다. 방문 앞에 누나가 쓰러져 있었다. 누나는 의식이 없었다. 고등학생 여자, 완벽한 어른은 아니었으나 성인에 따르는 체격이었다. 무거운 장비를 메고 있는 남자가 나와 누나를 동시에 안는 건 무리에 가까웠다.

나는 남자의 옷자락을 붙잡아 아래로 흔들었다. 남자가 미안하다며 나를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누나를 업은 뒤 남자가 다시 무전을 했다. 상사가 당장 내려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현관을 나서기 전 남자가 집 안을 힐끗거렸다. 나는 남자에게 업혀 있는 누나의 치마 끝을 붙잡았다. 누나는 교복을 그대로 입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정말 집에 아무도 없는 거지?”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자는 결국 아무도 없다며 보고를 한 뒤 소방 사다리가 있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죄책감은 없었다.

* * *

“네? 성폭행이요?”

“쉿! 야! 넌 눈치가 없냐? 조용히 해, 조용히!”

주변의 눈치를 본 선배 의사가 정혁을 밖으로 끌어냈다. 외과 전공의 임정혁. 아직 1년 차인 그는 새벽에 아파트에서 불이 났다는 소식에 자다가 일어나 날밤을 꼬박 새운 상태였다. 그는 정혁의 중학교 선배였다. 정확히는 선배라고 하기보다는 동네 형에 가까웠다.

정혁이 고등학생이 될 무렵 어딘가로 전학이 가 연락이 한 번 끊겼지만, 그가 전학 가기 전까지 정혁과 그는 형 동생 하며 지내던 사이였다. 정혁은 불과 1분도 떨어지지 않은 그의 집에 자주 놀러 가고, 그는 어린 정혁을 자주 돌봐주기도 했었다.

원래부터 성격 좋은 형은 병원에서도 여전했다. 형도 정혁이 반갑긴 한 모양인지 정혁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J대 병원 전문의. 펠로우 1년 차 과정으로 있는 형이 있었기 때문에 정혁은 남들보다 병원 생활을 편하게 할 수 있었다.

정혁은 형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아오, 씨! 일로와 좀!”

형이 답답하다며 정혁을 복도 끝 비상계단 쪽으로 끌어냈다. 형은 가운에 손을 넣은 뒤 벽에 몸을 반쯤 기대며 말했다. 병원 마당발로 유명한 형은 종종 이런저런 정보를 들은 뒤 정혁에게 얘기해 줬다.

이제 막 병원에 들어온 정혁에게 그런 정보들은 때때로 유용한 도움이 됐다. 그러나 성폭행이라는 형의 말은 정혁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불이 나서 들어온 환자에게 성폭행이라니. 정혁의 의문에 선배가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뒷목을 긁적이던 형이 결국 입을 열었다.

“한 간호사 알지? 응급실에 있는.”

“아, 알아요. 근데 왜요?”

“막판에 고등학생 여자애가 하나 들어왔는데, 교복을 입고 있었다는 거야.”

“입고 있을 수도 있죠.”

형이 답답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얌마! 내일이 토요일인데 새벽 2시까지 교복도 안 갈아입고 잔다는 게 말이 되냐?”

“그런가요?”

그것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 정혁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형은 지끈거리는 이마를 살짝 눌렀다. 정혁은 다 좋은데 이런 데서 맹한 구석이 있다는 게 형의 가장 큰 불만이었다.

“다른 환자 아녜요?”

“뭐가 다른 환자야?”

“화재 환자랑 섞여서 들어온 일반 환자일 수도 있잖아요.”

“그 아파트에서 소방대원이 마지막에 구조한 환자래. 원래 사다리 15층까지여서 포기했던 거 올라가서 구했다던데. 하여튼 너나 젊은것들은 겁이 없어, 겁이.”

“제가 언제 불에 들어간 적 있습니까?”

“안 들어가도 사고 치잖아. 어쨌든.”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형이 허공으로 손가락을 위아래로 흔들며 말을 되돌렸다. 저도 들은 거긴 하지만.

“스타킹이 찢겨 있었다더라.”

“강도예요?”

“무슨 강도. 아니, 차라리 강도면 좀 좋으련만.”

“그건 또 무슨?”

“그 여학생 집. 18층인데, 그 아파트가 원래 좀 구조가 이상하거든. 특히 그 집은 처음 오는 사람들도 잘 못 찾고는 그런다더라. 내가 말한 그 소방대원이 집에서 그 여학생이랑 7살인가 8살짜리 애를 데리고 나왔다는데…… 하, 화재 진압하고 그 집 방에서 부모 시체가 나온 거야.”

사인은 당연히 질식과 화재에 의한 사망이었다. 정혁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여학생의 안에서 남자의 DNA와 정액이 나왔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경찰이 수사를 시작했다고 했다. 정혁의 말처럼 강도에 의한 강간일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었다. 처음엔 그곳에 초점을 놓고 수사를 했다. 관리실 CCTV와 여학생의 행적을 전부 뒤졌으나 강도나 외부인이 침입한 흔적은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부인도 같이 있었다면서요? 그런데요?”

“그래 임마. 근데 더 대박인 건 뭔지 아냐? 그 집안이 교수 집안이란다. 너 H대 나왔으니까 알 거 아니냐. 어디서 말하고 다니지 말고. 그 죽은 남편이 H대에…….”

정혁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공은 아니었지만, 워낙 유명한 사람이라 몇 번인가 호기심에 수업을 참관한 적이 있었다. 형은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헐. 선배님 농담하시는 거 아니죠?”

“너 데리곤 하고 싶어도 못 하겠다! 하, 진짜 나도 제정신 소리 듣고 이 일 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진짜 미친놈들은 많구나 싶다.”

모든 증거가 여학생의 아버지를 가리켰다. 그가 들은 말에 의하면 DNA 결과가 내일쯤 나온다고 했다.

“같이 나온 아들. 7살인가 어쨌든 걔도 정상은 아니더라. 아동 학대래.”

“강 교수님 자식이요?”

“그래.”

담당 교수가 학대가 틀림없다고 했다. 죽은 부모를 대신해 친척들이 대거 소환됐다. 딸은 성폭행에 아들은 아동 학대. 단순히 넘어갈 만한 문제는 결코 아니었다. 당연히 친척들은 반발했다. 두 사람은 결코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가장 큰 문제는.

“당사자인 두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있다니 방법이 있겠냐 말이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옥상으로 올라갔다. 구석에 자리한 형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러나 곧 담배를 피울 기분도 들지 않았다.

“필래?”

형이 내민 담배를 정혁은 말없이 받아 물었다.

겨울밤 바람이 유독 찼다.

* * *

“아아, 나른해.”

식당에서 막 올라온 정혁은 가운 주머니를 뒤졌다. 주머니 안에서 담배와 초콜릿, 막대 사탕이 섞여 나왔다. 정혁은 초콜릿과 막대 사탕 중에 고민하더니 막대 사탕을 입안에 넣었다. 응급실 복도에 다 와 갈 무렵 같은 과 3년 차 선배와 만났다.

정혁이 슬쩍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고개를 숙였다. 인턴과 대화 중이었던 모양이다. 그가 인턴의 등을 살짝 쳤다. 눈치를 본 인턴이 자리를 피했다. 정혁이 선배를 지나쳐 가려 하자 선배가 정혁을 불렀다.

“너. 환자 드레싱은 똑바로 갔다 왔냐?”

“그거라면 아침에 전부 했는데요.”

“유 교수님 환자는?”

잠시 생각하던 정혁이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아, 맞다. 그 어린이 병동 화상 환자…….”

“맞다는 뭘 맞다야! 이게 미쳤나? 야! 사탕 똑바로 안 빼? 이게 선배가 말하고 있는데 얻다 대고 사탕을 처빨고 앉아 있어?”

“죄송합니다.”

사탕을 뺀 정혁이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그러나 건성인 그 사과에 진심이 들어가 있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선배는 정혁의 그런 태도에 질렸다며 혀를 찼다. 병원에 친한 형을 두고 있다는 것이 1년 차 주제에 하고 다니는 행동은 병원 생활 몇 년 한 사람 같았다.

그는 인턴 마치고 6개월 동안 병원 생활을 하면서 정혁이 큰 사고를 치지 않은 게 신기했다. 그가 들고 있던 종이로 정혁의 몸을 툭툭 건드렸다. 똑바로 가라고 아침에 그렇게 말을 했는데. 그는 팔에 차인 시계로 고개를 숙였다. 시계 초침이 정확히 12를 가리켰다.

“라운딩 전에 빨리 다녀와. 십 분 준다. 시작.”

“네? 지금요?”

정혁이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선배는 정혁과 시계를 번갈아 보며 혀를 찼다.

“9분 50초 남았다. 늦으면 뒤진다.”

“다녀오겠습니다!”

정혁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었다. 어린이 병동에 도착한 정혁은 뒤늦게 걸음을 멈췄다. 무턱대고 어린이 병동에 온 건 좋은데 환자의 이름이며 병실 호수가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아침 회의 때 듣고 노트에 적은 것 같은데. 정혁이 주머니에 있는 노트를 살폈다. 엉망으로 적혀 있는 노트는 정혁조차 무슨 소린지 알 수가 없었다. 젠장. 결국, 복도에 서서 머뭇대는 정혁을 보던 간호사 하나가 물어 왔다.

“임 선생님! 뭐 문제 있어요?”

“27일 날 들어온 YK 아파트 화상 환자요. 남아인데 7살인가 8살 정도인데.”

“아, 서진이요? 하아.”

서진의 이름이 나오자 간호사의 표정이 살짝 안 좋아졌다. 정혁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내 간호사가 정혁의 뒤쪽에 있는 병실을 손가락질했다. 정혁은 병실 옆에 적힌 이름들을 확인했다. 강서진. 정혁의 얼굴이 붉어졌다. 멀리 간호 데스크에서 그 모습을 본 간호사들이 웃었다.

“윽.”

바로 앞에 두고 못 찾은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는지 얼굴을 붉힌 정혁은 도망치듯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 6인실 병실 안으로 들어가자 보호자들의 시선이 한눈에 집중되었다. 부모님, 혹은 보호자와 있는 아이들과 달리 혼자 침대에 앉아 있는 서진은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멍하니 앉아 있던 서진과 정혁의 눈이 맞았다. 정혁이 서진의 침대 앞으로 가자 보호자들이 힐끗거렸다.

이미 병실 내에서도 서진에 대해 소문이 다 나 있는 상태였다. 아무리 병원에서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듣고 사는 정혁이지만 그 정도 눈치는 있었다. 정혁이 커튼을 길게 쳤다. 털썩, 정혁이 서진의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정혁의 무게에 침대 매트가 살짝 내려앉았다.

서진의 팔에 붕대가 감겨 있었다. 정혁이 허공으로 손을 내밀었다. 서진은 정혁이 미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정혁은 말없이 허공에 들린 손을 흔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가져온 드레싱용 키트를 뜯었다. 서진은 정혁이 달라는 것이 제 팔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서진이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었다. 커튼 너머 TV 소리만이 커튼 안을 맴도는 유일한 소음이었다.

“저기요.”

“어? 왜?”

“우리 누나요. 누나, 언제쯤 만날 수 있어요?”

정혁은 한동안 입을 다물었다. 순수하게 묻는 그 질문에 정혁은 아무런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아침에 선배에게 들은 얘기가 생각났다. 눈앞에 있는 환자가 선배의 얘기 속 환자라는 사실을 눈치채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또래 아이들보다 유독 마른 체형이 한눈에 띄었기 때문이었다. 병원복 사이 군데군데 오래된 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선배의 말에 의하면 따로 떨어진 두 사람은 수사에 협조적이지 않다고 했다. 제가 형사는 아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물었다.

“그 누나 말야. 혹시 아빠한테 이상한 짓을 당하고 그랬던 건…?”

“말했어요. 몇 번이나.”

아무도 믿어 주지 않았다. 막판에는 서진을 미친 아이처럼 취급했었다. 정혁은 생각보다 쉽게 말을 꺼내는 서진에 의외라는 느낌을 받았다. 정혁이 달래듯 서진에게 말했다.

“있잖아. 형은 사실 병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돼서 별다른 힘이 없어. 그래서 말인데 내일 좀 더 힘 있는 아저씨들이 병원에 오면…….”

“이미 왔다 갔어요.”

“아, 그래?”

“근데 그 아저씨들, 좀 이상해요.”

영문을 알 수 없는 정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서진의 붕대를 다시 감던 정혁은 뒤늦게 테이프를 들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진이 몸을 살짝 일으킨 정혁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이미 선배가 말한 10분은 훨씬 넘긴 후였다. 어차피 욕먹을 거 1분이나 5분이나 그게 그거였다.

“그치만요. 그 아저씨들 계속 그날 누나가 무슨 옷을 입었냐고 물어봐요.”

서윤은 그날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의사들도 아는 그 단순한 사실을 형사들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 집안이 교수 집안이란다. 그 죽은 남편이 H대에……. 선배의 말이 떠올랐다. 서진이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누나가 옷을 이상하게 입어서 그렇대요.”

그리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툭, 드레싱 키트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요란한 소리가 났다. 몸을 숙여서 바닥에 떨어진 것들을 주웠다.

“아오, 씨. 미안해. 잠깐만.”

정혁이 급하게 커튼 밖으로 나왔다. 바로 앞으로 간호 데스크가 보였다. 가슴 높이의 데스크에 팔을 올려 고개를 숙였다. 오늘따라 병원이 너무나 갑갑하게 느껴졌다. 테이프를 챙기고 병실로 돌아가려 하자 전화가 왔다.

서진의 병실 밖에 낯선 사람들이 잔뜩 몰려왔다. 잘 차려입은 어른들, 정혁은 병실 내 다른 환자를 문병 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병실 벽 쪽에 몸을 기대 전화를 받았다. 모르는 번호였다.

― 누구세…….

― 야! 임정혁!! 너 이 씨발! 당장 안 튀어와? 환자 드레싱 하러 가랬지 누가 수술하러 가랬냐? 지금 얼마나 지났는지 아는…….

정혁은 재빨리 전화를 끊었다. 왜 끊었냐고 물으면 본능이었다. 정혁은 저장되지 않은 휴대폰 번호를 확인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폰번호를 바꿨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혼이 날 걸 알고 있음에도 정혁은 담담했다.

초조하게 군다 해서 혼이 난다는 사실 자체가 바뀌진 않는다. 어차피 혼날 거라면 마음을 편하게 갖는 편이 좋았다. 테이프를 챙긴 정혁은 병실로 몸을 돌렸다. 병실 입구에 발을 걸친 정혁은 그제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모든 보호자의 시선이 안쪽에 있는 서진에게 닿아 있었다. 정혁이 치고 간 커튼은 반쯤 걷어진 상태였다. 서진에게 다가가려던 정혁의 걸음이 멈췄다.

“강서진, 형사님한테 똑바로 말해.”

“전 똑바로 말했어요. 아빠가 누나를…….”

“저기요. 말이 좀 심한…….”

“하, 네가 미쳤구나? 우리가 아무 말도 못 들었을 것 같니?”

여자의 옆에 있던 다른 여자가 눈물을 흘렸다. 중간에 끼어들려 했던 정혁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학생이랑 7살인가 8살짜리 애를 데리고 나왔다는데, 화재 진압하고 그 집 방에서 부모 시체가 나온 거야.’

서진이 방 안에 부모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람들 틈 사이에 낀 서진과 정혁의 눈이 맞았다. 언성이 점점 올라갔다. 지나가던 의사들과 병동 간호사들이 병실 안을 기웃거렸다. 여자 하나가 서진을 향해 삿대질했다.

“네가… 네가 오빠를 죽인 거야!!”

“저기요! 그만하시죠!! 도대체 지금 애를 상대로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보다 못한 정혁이 끼어들었다. 아무리 여자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아직 7살밖에 되지 않은 서진을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다. 친척들이 가운을 입은 정혁을 위아래로 훑었다. 외과 전공의 임정혁. 정혁의 가운에 박힌 이름표를 본 남자 하나가 정혁을 비웃었다. 그리고는 정혁의 어깨에 손을 툭툭 건드렸다.

“전공의 주제에 어디서 감히 끼어들어? 여기 병원은 애들 관리를 이딴 식으로 하나 보지? 자네. 담당 교수 누구야? 몇 년 차야? 어?”

사람을 내려 보는 데 익숙한 위압적인 태도. 그러나 그곳에 서 있는 친척 중 누구도 그걸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 정혁을 보고 있었다.

‘나도 제정신 소리 듣고 이 일 하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미친놈들은 많구나 싶다.’

정혁은 선배의 그 말을 전적으로 공감했다.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서 있으니 마치 제가 비정상이 된 것만 같았다. 숨이 목 끝까지 막혀 왔다. 어른들 사이에 낀 서진은 그럴 줄 알았다며 정혁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서진의 외면에 정혁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이를 문 정혁이 대답했다.

“송태현 교수님이십니다.”

“아아, 아. 외상과에 송 교수? 그 친구 내가 잘 알지. 의대 후배였거든. 근데 감히 선배도 몰라보고 이런 짓을 해? 송 교수 불러와.”

“교수님은 지금…….”

“임 선생, 자네 몇 년 차야?”

안 된다. 남자는 전혀 정혁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정혁은 아차 싶었다. 교수 집안. 그중에 의사 한두 명 있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었다.

“일 년 찹니다.”

“하, 이거 안 되겠구먼. 1년 차가 얻다 대고 눈을 부릅떠? 하, 요즘 의사들 인성이 글러 먹었어. 송 교수 불러와! 당장!!”

목소리가 높아졌다. 문 쪽으로 다른 병실 환자들이며 의사들이 모여 있었다. 간호사 한 명이 복도에서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간호사를 따라 병실로 들어온 건 다름 아닌 형이였다. 엉망인 병실을 본 형이 한숨을 쉬었다.

신분증을 두고 온 상태에서 남자가 형에게 얻을 수 있는 정보는 그게 다였다. 남자의 이름과 서진의 담당 교수 이름이 달랐다. 담당의가 아니라는 사실에 남자는 은근슬쩍 안심했다.

“자넨 또 뭔가?”

“밖에서 얘기하죠.”

“난 송 교수를 찾은 것 같은데.”

“송 교수님 지금 수술로 바쁘십니다. 밖에서 얘기하시죠.”

“우린 보호자일세. 보호자가 병실에 있는 건 정당한 거 아닌가?”

“글쎄요. 떼거리로 몰려와 애한테 소리를 지르고, 의사한테 강압적으로 구는 사람들을 보호자라고 생각하진 않는데 말입니다. 이러시는 거 다른 환자와 보호자분들에게도 민폐인 거 모르십니까?”

강압적으로 구는 남자 앞에서도 형은 당당했다. 늘 장난만 쳤던 형의 진지한 모습을 보는 것은 정혁도 처음이나 다름이 없었다. 남자가 선배의 멱살을 붙잡았다. 정혁이 다가가려 하자 형이 손을 살짝 들어 막았다.

“이게 어디다 대고 감히…!”

“그쪽은 어디다 대고 손을 대십니까? 의사라는 분이. 이것도 의료법 위반이신 거 아시죠?”

병실 문 너머 사람들 틈 사이로 정장을 입은 경호원 몇 명이 들어왔다. 경호원을 본 남자가 결국 병실 밖으로 나갔다. 남자를 따라 같이 온 친척들 또한 마지못해 병실을 나갔다. 주변 사람들도 슬슬 흩어지는 분위기였다. 선배가 저를 부른 간호사를 향해 살짝 손짓했다.

“저 사람들, 전부 블랙리스트 추가시켜 놔요.”

“그래도 돼요? 교수님 허락 없이는…….”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형은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들썩였다. 외상외과 조교수. 단순히 옆집 형이라고 생각했던 정혁은 그가 새롭게 보였다. 간호사가 가고 형이 한숨을 쉬며 정혁의 등을 토닥였다.

“고생했다. 마무리하고 내려와. 이 선생한테는 말해 뒀다.”

“형……. 진짜 고마워요.”

“그래. 그리고 임마, 아무리 그래도 선배 전화는 막 끊는 거 아니다.”

밖에 있는 친척들의 눈치를 본 선배가 병실 밖으로 나갔다. 정혁이 홀로 병실에 남았다. 몇몇 보호자들이 정혁을 보고 있었다. 정혁은 다시 커튼을 쳤다. 서진이 정혁의 가운 자락을 붙잡았다. 한마디도 하지 않던 서진이 입을 열었다.

“저는요. 부모님이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말 안 했어요.”

정혁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서진의 행동이 상식적으로 이해되는 행동이 아님은 틀림없다. 그 상황에서 자신의 거짓말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 모르고 있지는 않았다. 정혁이 서진을 품에 안았다. 정혁의 품에 안긴 서진이 말을 이어 갔다.

거긴요.

지옥이었어요.

아무도 저흴 도와주지 않았어요.

정혁은 알 수 있었다. 그건, 8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아이가 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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