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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7 생일날의 추억 (8/83)

Chapter. 7 생일날의 추억

학원 쉬는 시간, 시헌은 이어폰을 끼고 공부를 하고 있었다. 듣고 있던 노래 대신 촌스러운 기본 벨 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신경질적으로 한쪽 이어폰을 뺀 뒤 전화의 상대를 확인했다. 현정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복도로 나온 시헌이 마지못해 전화를 받았다. 이어폰 줄에 달린 마이크를 목 근처로 대었다.

― 어디야?

― 학원

― 넌 오늘 같은 날에 학원을 가고 싶니?

현정이 못마땅한 모양인지 잔소리를 했다. 복도에 걸린 시계를 슬쩍 바라봤다. 9시가 조금 넘었다. 시험을 앞둔 마지막 일요일이었다. 학원에 있다 해서 이상할 건 없었다.

현정의 휴대폰 너머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험 기간인데? 이상함을 느낀 것도 잠시뿐, 서진과 떠드는 은소의 목소리가 시헌의 인상을 찌푸리게 하였다. 휴대폰을 바로 잡은 현정이 말했다.

― 나와.

― 지금?

복도에 있던 아이들이 교실로 들어갔다. 거의 복도에 홀로 남겨지다시피 한 시헌은 한숨을 쉬더니 뒷문으로 들어가 가방을 챙겼다. 선생님이 들어옴과 동시에 교실을 나왔다. 조교 선생님이 무슨 일이냐며 물어왔다. 한쪽 어깨에 가방을 걸친 뒤 급하게 문제집을 집어넣었다.

“집에 일이 좀 생겨서요.”

시헌은 고개를 숙인 후 재빨리 학원을 나왔다.

― 나왔어?

― 어디로 가면 되는데?”

― 문자 할게.

현정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얼마 뒤 문자가 왔다. 현정이 보자고 한 곳은 뜻밖에 구도시 근처의 놀이터였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이들로 가득한 놀이터였지만, 새로운 아파트가 들어서고 입주자가 이사하면서부터 놀이터는 불량 학생들의 거주지가 되고는 했다.

거주하는 사람보다 빈집이 많은 아파트, 그나마 애를 키우던 부모들도 전부 이사를 하고 난 뒤라 대부분 집에는 나이가 많은 노인들만 남았다. 현정을 기다리는 시헌은 그네에 앉았다.

시헌의 몸무게를 이기지 못한 그네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은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멀리 교복 치마에 카디건을 걸친 현정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가자.”

현정이 시헌의 손을 잡아당겼다. 시헌은 현정이 어디로 가자고 하는지 묻지 않았다. 시헌의 손을 붙잡은 현정의 걸음이 평소보다 가팔랐다. 긴장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흥분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현정을 따라 아파트 안쪽으로 들어갔다.

아파트 군데군데 반쯤 철거되다 만 흔적들이 가득했다. 철골이 그대로 보이는 단지 내부에는 출입 금지 표지판이 엉성하게 붙어 있었다. 10년, 10년 동안 철거되지 못한 채 방치된 아파트는 마치 수학여행의 귀신의 집을 방불케 했다.

시헌이 처음 현정의 손에 이끌려 서진을 만난 아파트도 이곳이었다. 현정은 들어가지 말라며 입구에 걸어 놓은 쇠사슬을 넘어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1층 복도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바람 소리에 윙윙거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어느새 시간은 10시가 넘었다. 여자애가 무서워할 만도 싶은데. 현정은 별거 아니라며 어깨를 들썩인 채 계단으로 몸을 돌렸다. 15층. 지금으로 치면 높지 않은 아파트지만 당시에는 그것도 꽤 높은 편에 속했다.

헉헉거리며 올라가는 현정의 뒤를 밟았다. 15층으로 올라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낡은 철문이 있었다. 문고리가 없는 철문을 몸으로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시헌도 반쯤 닫히려는 철문을 붙잡았다. 계단을 조금 더 오르자 검은 하늘이 보였다.

텅 빈 아파트 옥상. 멀리 신도시 건물들의 불빛이 시헌의 눈을 부시게 했다. 현정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시헌이 바닥에 굴러다니는 건축자재들을 피해 옥상의 중앙으로 나갔다. 옥상 끝에는 떨어짐을 방지하는 낡은 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임시로 치고 수년이 지난 탓에 군데군데 철조망이 끊어진 흔적들이 보였다. 인기척에 등을 돌렸다. 서진과 은소였다.

“아, 안녕.”

“어. 안녕.”

안쪽에 있는 건축 자재 너머로 팟, 하고 불빛이 일었다. 이내 현정이 자제의 틈 사이로 나왔다. 현정의 양손에는 케이크가 들려 있었다.

엉성하게 꽃은 15개의 촛불, 현정의 손에는 노란 라이터가 있었다. 넌 오늘 같은 날에 학원에……. 그제야 시헌은 현정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됐다. 풋, 타들어 가는 초를 앞에 둔 시헌이 웃음을 터트렸다.

“내 생일은 내일인데.”

“야! 내가 그걸 몰라서 하는 줄 알아?”

현정이 입을 내밀며 대답했다.

“너넨 가족끼리 생일 파티 할 거잖아.”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봤자 중간에 누구 하나는 사라지고 마는 생일 파티겠지만 말이다. 도원만큼은 아니지만, 시헌의 가족과 몇몇 집안 어른들이 모이는 자리는 최소 한 달 전부터 예약해야만 식사를 할 수 있다는 호텔의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내일은 학교가 끝나자마자 백화점에서 선물을 사 주겠다는 누나―하연과 미리 약속을 잡아 놓은 상태였다. 선물을 산 뒤에는 수업을 마친 기욱이 데리러 오기로 했다. 가족이라고는 부모님과 본인밖에 없는 현정은 형제가 많은 시헌을 늘 부러워하고는 했었다.

촛농이 케이크 위로 뚝뚝 떨어졌다. 현정도 슬슬 팔이 아팠다.

“시헌아. 뭐 해?”

현정이 옆에 있는 은소를 쿡쿡 찔렀다. 머뭇거리던 은소가 조심스럽게 입을 떼자 옆에서 서진이 거들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시헌이. 생일 축하합니다.

화음이 전혀 맞지 않는. 세 사람의 어색한 노래가 울렸다. 노래가 끊겼음에도 시헌은 한동안 촛불을 가만히 바라봤다. 바람이 불었다. 시헌이 초를 불기도 전에 초가 꺼지며 주변이 어두워졌다.

아, 현정의 아쉬운 목소리가 들렸다. 시헌이 큭큭대며 이미 꺼진 초 위로 후 하고 입김을 불었다. 꺼진 초 위로 검은 연기가 낮게 올라왔다.

현정이 케이크를 바닥에 놓았다. 시헌은 바닥에 뭔가가 더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발견했다. 많진 않았지만, 선물들이었다. 흰 쇼핑백에 담겨 있는 봉투를 현정이 대표로 내밀었다. 시헌이 봉투 속을 살폈다. 전부 포장이 되어 있었다.

“뜯어 봐도 돼?”

은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치고는 포장된 상자의 크기들이 큰 편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종이 두께의 포장지는 시헌의 시선을 가장 먼저 사로잡았다.

시헌이 얇은 종이 포장지를 꺼내자 은소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정성스럽게 포장된 테이프를 뜯었다. 네모난 봉투 속에 뭔가가 담겨 있었다. 백화점 상품권인가? 만약 그렇다면 현정의 짓이 틀림없었다.

시헌의 예상과 달리 봉투에서 나온 것은 붉은색 영화 티켓이었다. 영화관에서 선물용으로 판매하는 자유 티켓이었다. 두 장짜리 티켓을 만지작거린 시헌이 고개를 들어 은소를 바라봤다. 만약 현정이 영화 티켓을 선물했다면 두 장으로 끝낼 리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다. 은소가 멋쩍게 뺨을 긁적였다.

“사실……. 좀 더 좋아하는 걸 해 주고 싶었는데. 돈도 없고. 네가 뭘 좋아하는지 잘 몰라서. 급하게 생각나는 대로 샀어. 그……. 미, 미안.”

시헌은 본인이 선물해 놓고 사과를 하는 은소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은 뒤 티켓을 다시 봉투에 넣었다. 마음에 안 들 리가. 다음으로 그나마 큰 상자를 뜯었다. 시계였다. 기욱의 시계는 돌려줬다. 시헌은 아무리 봐도 비싸 보이는 시계를 만지작거렸다.

“얼마야 이거?”

“아, 진짜! 울 시헌이 또 그런다! 그냥 받아 좀!”

현정이 신경질을 냈다. 고맙다는 말 대신 두 사람의 대화는 평소와 같았다. 시헌은 봉투 속 마지막 남은 상자를 힐끗거렸다. 시계가 현정의 것이라면 남은 건 서진의 선물이 틀림없었다. 무슨 선물을 넣었을까? 선물이 서진의 것이라는 걸 알고 난 뒤부터는 묘하게 긴장이 됐다. 봉투를 뜯자 나온 건 다름 아닌 이어폰이었다.

“비싼 건 아냐.”

서진이 고개를 돌렸다.

“너 맨날 이어폰만 끼고 자니까.”

시헌은 그런 서진이 귀엽게 느껴졌다. 이어폰 뒷면에 가격표가 그대로 붙어 있었다. 시헌은 재빨리 주머니에 있는 이어폰을 더 안쪽으로 구겨 넣었다. 혹시 밖으로 나올까 하고 말이다. 기욱에게 선물 받은 외국제 이어폰은, 근처 쇼핑몰에서 산 서진의 이어폰보다 배는 비쌌다.

“나 이어폰 안 고장 났는데.”

서진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이내 씩씩거리더니 돌려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시헌이 이어폰을 든 채 뒤로 물러났다.

“야, 줬다 뺏는 게 어딨어!”

“그럼 그런 말 하지 말든가!”

시헌이 펜스에 몸을 기댔다. 펜스가 흔들려 금방이라도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시헌은 이어폰을 주지 않겠다며 높이 손을 들었다. 쓰고 있는 이어폰이 고장 났든 나지 않았든 그런 건 관계없었다.

시헌은 서진에게서 받은 이어폰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 있는 이어폰 따위 서진이 준 이어폰을 쓸 수 있다면야 당장에라도 고장 낼 수 있었다. 멀리서 은소가 위험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바람이 거칠게 불며 장난에 가까운 몸싸움이 이어졌다. 펜스에 등을 기댄 시헌의 몸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박시헌 위험…!”

서진이 재빨리 시헌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균형을 잃은 시헌이 서진의 앞으로 쓰러졌다. 펜스 하나가 뜯어지고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침묵이 흘렀다. 현정이 먼저 뛰어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늦은 시간인 데다 사는 사람도 없는 동네라 다치거나 한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괜찮다는 현정의 말에 은소가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서진을 밑에 깐 시헌은 몸을 살짝 일으켰다. 아래로 떨어질 뻔했던 순간에도 놓지 않은 이어폰 상자가 손에 있었다. 아야,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친 서진이 인상을 찌푸렸다. 서진이 발끝으로 시헌의 몸을 툭툭 찼다.

“야, 박시헌.”

“…….”

“비키라고.”

“…….”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건데? 너 미쳤냐?”

시헌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두 사람을 보고 있는 현정과 은소가 있었다. 서진이 시헌의 몸을 밀었다. 서진에게 밀린 시헌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현정이 케이크를 가지러 가겠다며 뛰어갔다. 시헌은 서진의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정말 한순간이지만.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혹은 두 사람에겐 좀 미안한 말이지만 서진과 둘만 있기를 바랐다. 현정이 근처에 있는 박스를 끌어와 시헌의 앞에 앉았다. 멀리 은소가 옥상 벽에 있는 스위치를 만지작거렸다.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벽 끝에 달린 전구 하나의 불이 얕게 들어왔다. 전기는 금방이라도 끊길 것 같이 요동쳤지만, 주변을 밝히는 데는 그 정도면 충분했다. 보아하니 완전히 전기가 끊긴 건 아닌 모양이다. 어느새 11시가 넘었다.

기욱에게 조금 늦는다고 문자를 보냈다. 쪼그리고 앉아 카디건으로 치마를 가린 현정이 시간을 보고 웃었다.

“울 시헌이 조금 있으면 진짜 생일이겠네.”

현정이 학교 가방을 끌어 왔다. 가방 안에서 분홍색 디지털카메라가 나왔다. 현정이 서진을 향해 카메라 셔터를 몇 번인가 눌렀다. 아, 하지 말라고. 서진이 얼굴을 가렸다. 현정은 카메라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이 사진 찍자.”

“아, 나 사진은 별로…….”

“난 좋아.”

싫다는 서진의 모습에 시헌이 끼어들었다. 나, 나도 괜찮은데. 추억이잖아. 은소가 맞장구쳤다. 그럼 결정! 현정이 근처 건축 자재들을 쌓아 높이를 맞췄다. 타이머를 맞추고 빨리 오라며 손짓했다. 현정의 옆에 선 시헌이 서진을 향해 손짓했다.

“아, 진짜.”

서진이 마지못해 시헌의 옆에 섰다. 불빛과 함께 카메라 셔터가 올라갔다. 불빛이 켜지던 순간 시헌은 서진의 소매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가장 먼저 뛰어가 카메라를 확인한 현정이 생각보다 잘 나왔다며 카메라를 들이밀었다. 다행히 서진은 시헌의 행동을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12시까지 있다가 집에 가자.”

그 제안에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다시 바닥에 모여 앉았다. 가방을 뒤진 현정이 담배를 꺼냈다. 라이터 불이 잘 붙지 않았다. 현정이 서진의 눈치를 살폈다.

“오늘만이다.”

“알았어. 알았어.”

현정이 혼자 피우면 민망하다며 시헌에게 내밀었다. 시헌은 됐다며 손을 저었다.

“그러고 보니, 사진 찍는 거 원래부터 좋아했어?”

은소가 현정에게 물었다. 현정은 어딘가 놀러 가고는 할 때면 늘 사진을 찍었다. 휴대폰이든, 카메라든. 현정에게는 지금 이 순간을 담을 수 있다면 수단은 아무래도 좋았다. 현정은 무릎을 팔에 걸었다. 손가락 사이에 있는 담배가 타들어 갔다. 현정은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웃으며 대답했다.

“그냥, 사진 찍는 게 좋아. 지금 이 순간이 먼 미래에 보면 그저 지나가는 추억이 될지도 모르잖아?”

사람은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한다. 지금은 아무리 행복하더라도 먼 미래에는 그 행복을 모두 기억하고 살 수는 없다.

사진을 찍으면,

언젠가 잃어버렸던 그 순간이

현실이었구나 하는 걸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한 장이라도 더 남기고 싶었다. 여학생을 대신해 죽었을지도 모르는 현정은 자신은 죽지 않고 세상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다. 시헌의 눈치를 슬쩍 본 현정이 말을 이어 갔다.

“난 사진가가 될 거야.”

“너네 집에서?”

현정의 기분을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현정의 집안을 잘 알고 있는 시헌은 현정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살짝 불편했다. 병원 이사장 아버지, 외과 전문의인 엄마. 외국 병원에 교수로 있는 친척들, 현정의 집은 6·25 시절 훨씬 전부터 의사 집안으로 유명했다.

시헌이야 기욱과 하연이 있었지만, 외동딸인 데다 집안 친척 중 막내인 현정에게 쉽사리 다른 직업을 허락해 줄 리가 없었다. 현정이 그럴 줄 알았다며 입을 삐쭉 내밀었다.

“그러는 시헌이도 의사 않는다면서 노래를 부르는 주제에.”

“난 누나랑 형 있잖아. 넌 아니고.”

“부모님은 부모님이고 나는 나야. 게다가 꿈은 꿈일 뿐이잖아? 시헌인 너무 까다로워서 싫을 때가 있어. 자, 다음은 은소 차례야!”

현정이 은소의 몸을 쿡쿡 찌르며 말을 돌렸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은소가 한참 만에야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음. 어쩔 줄 몰라 하는 은소의 중얼거림이 들렸다.

“나, 난 말야. 그게 그……. 사실은 의사가 되고 싶어.”

은소가 시헌과 현정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말로만 듣던 의사 집안. 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고 하는 친구를 앞에 두고 할 말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현정이 괜찮다며 이유를 물었다.

“어렸을 때 수술을 너무 많이 해서. 나 같은 아이들을 조금이라도 돕고 싶어.”

“그럼 소아과 가겠네.”

“어? 응. 아마도? 거기까진 아직 생각 안 해서 잘 몰라…….”

은소가 막연한 꿈이라며 웃었다. 시헌은 생긴 거랑 똑같이 흔한 꿈을 꾼다고 생각했다.

“동정심만으로 하겠다고 하는 건 추천하지 않아.”

“넌 왜 그렇게 애가 삐뚤어졌니? 야! 그럼 너나 말해 봐. 넌 의사 말고 뭐 할 건데?”

시헌이 입을 꾹 다물었다. 현정이 그럴 줄 알았다며 은소의 등을 툭툭 건드렸다. 의사가 싫다더니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시헌은 현정의 말에 그 어떤 반박도 할 수 없었다. 머리에 망치를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부모님은 늘 바쁘다. 화목한 척 가족끼리 여행을 가지만 늘 누구 하나는 먼저 돌아온다. 늘 환자를 보아 온 부모님은 시헌이 다치거나, 울어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는다. 그 정도론 죽지 않는다며. 제 아이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안절부절못하는 다른 부모님들과 달리 시헌의 엄마는 담담하기만 했다. 간신히 울음을 그친 시헌에게 괜찮을 거라는 말 한마디를 남긴 것이 전부였다.

치료를 받고, 거짓말처럼 괜찮아졌다. 그래서일까? 그게 다였다. 호들갑을 떨거나, 자식이 혹시 어떻게 되면 어쩌나 걱정하는 부모님들과 시헌의 부모님은 확실히 달랐다. 어린 시절, 시헌은 정말 엄마의 자식이 맞나 하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다.

친척들을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족끼리 모일 때면 아무렇지 않게 죽음을 얘기했다. 혹은 삶과 죽음이 오가는 순간들을 얘기한다. 그들에게 삶과 죽음이란 얇은 종이 한 장 차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 누구에게든 다가온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남이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의 죽음이 친한 사람의 죽음이 되어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을 수 있는 건 필시 죽음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라고 느꼈다. 시헌은 결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럼 뭘 할 건데?

단지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을 뿐, 다른 걸 하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한 문제였다. 의사가 싫으면 다른 직업을 생각하면 된다. 시헌은 왜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가 들었다. 의기양양한 현정을 보고 있자니 약간 자존심이 상했다.

“나도 의사.”

서진이 먼저 끼어들었다. 현정이 기가 막힌다며 말을 했다.

“뭐야, 다 의사야? 짜증 나.”

“왜?”

시헌이 서진에게 이유를 물었다. 서윤이 H대 병원에서 일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다. 그러나 누나가 병원 간호사라고 해서 서진이 의사가 되어야 할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누나랑 같이 일할 거야.”

역시나. 시헌은 그럴 줄 알았다며 혀를 찼다. 중학생이 할 만한 생각이었다. 시헌은 그런 서진이 마냥 싫지 않았다. 교과서적인 모습은 그 모습 그대로의 매력도 있는 법이었다.

“몇 년이 될 줄 알고.”

딱히 비아냥거리는 말투는 아니었다. 서진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현정이 담배를 새로 물려 하자 서진이 그만 피라며 말렸다. 현정이 어쩔 수 없이 담배를 집어넣었다.

“언젠간 하지 않겠냐.”

언젠가. 그것만큼 편한 변명은 없었다. 교과서적이든, 유치하든, 지나치게 환상적이든 세 사람은 각자의 꿈이 있었다. 시헌은 한 번도 누군가에게 뭔가 뒤처진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째서인지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제일 뒤에 서 있는 느낌이 들었다.

“……독.”

“뭐라고?”

“영화감독 할 거라고.”

시헌이 입술을 깨물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먼저 현정이 웃음을 터트렸다. 순식간에 웃음바다가 됐다. 서진이 귀엽다며 시헌의 등을 토닥였다. 시헌이 서진의 손을 쳐 냈다.

“그래서? 이유가 뭔데?”

“몰라.”

“큭큭, 하하하하! 됐다. 됐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큭큭….”

시헌은 자신이 그 직업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영화를 좋아하는 건 맞지만 한 번도 감독이니 연출자 같은 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뭔가는 말해야 할 것 같았다. 젠장. 시헌은 답지 않은 실수를 했다며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현정이 열두 시가 됐다며 휴대폰 화면을 들이밀었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봤다. 별 하나 없는 도시의 검은 밤이었지만, 오늘따라 하늘이 높아만 보였다.

그날, 떠들었던 중학생 시절의 추억을 시헌은 결코 잊지 못할 거라고 느꼈다.

* * *

시험이 끝나고 집에 들어온 시헌은 자리에 앉았다.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컴퓨터에 앉기 무섭게 책상 위에 올려 두었던 휴대폰에서 시끄러운 벨 소리가 울렸다. 진동이라면 무시했을 텐데 하필이면.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열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시헌이 결국 전화를 받았다.

― 시헌이니?

― 누구세요?

― 나야 나. 학원 선생님. K학원에서 이 선생님 조교로 있었던.

아, 시헌이 생각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학을 입학하고 막 들어온 막내 조교였던 그녀는 시헌의 질문의 대부분을 대답해 준 사람이었다. 분명 중간에 다른 선생님 조교로 들어간다고 그만두었던 거로 기억했다. 시헌이 용건을 묻자 그녀가 대답했다.

― 아, 별건 아니구. 학생 중에서 시헌이 이름이 있길래 잘 지내나 해서 전화한 거야.

― 네? 무슨 소리세요?

그녀가 관두고, 시헌은 이 선생님의 수업을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선생님이 출강하는 K학원을 간 적도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더 이상 이 선생님의 조교가 아니었다. 시헌은 그녀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 또한 당황스러워하고 있었다.

― 부모님한테 들은 거 없어?

― 못 들었는데요.

― 이상하네. 어쨌든 수업 신청은 되어 있거든. 토요일 마지막 강의로. 아, 쌤 일해야 하니까 나중에 학원에서 보자.”

그녀가 전화를 끊었다. 시헌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봤다. 노트북 덮개를 덮은 시헌은 급하게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방 안으로 수화음이 울렸다. 한참 만에 연결이 됐다. 기욱이었다.

― 형! 대체 뭐 한 거…!

기욱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잠시 뒤 문자가 왔다.

「집 앞이야.」 오후 7:23

시헌이 재빨리 답장을 보냈지만, 더 이상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저녁 무렵 복도 너머로 인기척이 들렸다. 남자의 주검을 발견한 여자가 비명을 지르는 장면이었다. 중요한 장면이었음에도 시헌은 재빨리 화면을 정지한 뒤 거실로 뛰어갔다. 사실 영화를 보는 내내 집중을 할 수 없었다. 잘못 들은 건가? 거실이 조용했다.

잠시 뒤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도어락 문이 열렸다. 기욱이 맞았다. 학교에서 날밤을 새우고 온 것 같았다. 제아무리 기욱이라지만 이틀 동안 집에도 들어오지 못한 채 학교에 박혀 있으면 사람이 피곤해질 만도 했다.

시헌을 본 기욱은 말없이 계단을 올라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겉옷을 벗은 뒤 방을 나왔다. 기욱이 시헌에게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물을 마시고 있는 기욱을 두고 시헌은 종이를 확인했다. 학원 시간표였다. 시헌은 날짜를 확인했다.

16일이면 당장 내일모레 주말을 건너뛴 월요일부터였다. 시험이 끝난 지 고작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시헌은 기가 막혔다.

“엄마랑 얘기 다 끝났어.”

“하, 나한테 상의도 없이?”

“고등학교는 장난치지 말고 좋은 데 가야 할 거 아냐.”

탁, 기욱이 물 컵을 유리 테이블 위로 올렸다. 마치 시헌이 일부러 시험에 떨어져 구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는 투였다. 시헌이 살짝 긴장했다. 기욱은 그럴 필요 없다며 컵을 씻어 제자리에 올려 두었다.

“성적만 잘 나오면 다물어 줄게.”

기욱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여자의 목소리였다.

― 끝났어. 지금 갈게.

시헌은 기욱이 참으로 질리지도 않는다고 생각했다. 기욱이 위층으로 올라갔다. 방으로 돌아갔다. 도무지 영화를 이어서 볼 기분이 나지 않았다. 시간표를 앞에 두고 머리를 긁적이며 신경질을 냈다.

결국, 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기욱은 분명 엄마와 얘기가 끝났다고 했다. 시헌과 현정은 같은 처지에 있었다. 엄마의 귀에 들어갔다면 현정의 어머님 또한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 야, 장현정. 너도 학원…….

― 시헌아…….

전화를 받는 현정의 목소리가 떨려 왔다. 시헌이 팔에 차인 시계를 힐끗 보더니 장롱에 있는 잠바를 급하게 꺼내 입었다. 휴대폰을 어깨에 걸친 뒤 거실로 나왔다. 때마침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온 기욱과 마주쳤다. 밖으로 나가려는 타이밍은 시헌이 조금 더 빨랐다.

“일찍만 들어와.”

시헌은 문을 닫고 엘리베이터를 눌렀다. 1층,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시간도 아까웠다. 시헌은 곧장 계단 쪽으로 몸을 돌렸다.

* * *

택시를 탄 시헌이 신도시에 있는 아파트 단지 안 공원으로 갔다. 벤치 안쪽에 사복 차림인 현정이 앉아 있었다. 운 모양인지 눈가가 빨갰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현정에게 다가갔다. 시헌을 발견한 현정이 시헌의 품에 안겼다. 시헌이 살짝 뒷걸음질 쳤다.

“시, 시헌아…… 나 어떡해…….”

말을 잇지 못한 현정이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늘 밝은 모습의 현정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현정은 시헌의 품에 안겨 울었다. 시헌은 말없이 현정의 등을 토닥였다. 한참 만에 울음을 그친 현정이 벤치에 앉았다. 시헌이 조심스럽게 현정의 옆에 앉았다.

“왜 울었냐고 안 물어봐?”

“묻길 바래?”

현정이 고개를 저었다. 시헌은 어딘가 남다르다. 분명 집안 탓도 있겠지만 그건 단순히 집안의 문제는 아니었다. 또래와 다른 시헌이 현정은 알게 모르게 편했다. 현정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뜸을 들였다. 휴대폰을 슬쩍 연 시헌은 날짜를 확인했다.

그 녀석.

현정에게 직접 물어본 적은 없었지만 5년인가 6년 형을 받았다고 들었다. 범인은 초범이고, 정신병이 있었으며, 불우한 가정환경을 가졌다는 것이 감형의 이유였다. 사건을 저지르기 전까지 평범하게 직장 생활을 했으며 이웃들과 사이도 좋았다는 것 또한 하나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여학생과 현정이 납치되었던 곳은 재개발 예정지로 빈집들이 많았던 곳이었다. 아무리 어린아이지만 그런 곳에 갔으니 그런 사고를 당할 만도 하지 않냐는 질타도 있었다. 살해당한 피해자의 부모가 재심을 청구해 대법원까지 갔으나 그렇다 할 만한 성과는 없었다.

그것이 다였다. 시헌의 계산이 틀리지 않는다면 슬슬 출소할 때가 됐다. 그러니 이제는 물을 필요도 없고, 꺼낼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현정이 시헌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시헌이 고개를 돌렸다.

“나, 나 말야. 사실은…… 부모님이랑 얘기했는데.”

미국으로 유학을 갈 것 같다고 했다. 엄마의 친척이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하고 있다고 했다. 시헌은 당연히 그럴 수 있다고 느꼈고, 현정의 그런 선택이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단지 피해자가 도망쳐야 한다는 현실이 가슴 아플 뿐이었다. 현정이 한 가지 당부의 말을 했다.

“은소랑 서진이한테는 비밀로 해 줄래?”

현정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고였다.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 했다. 시헌을 보기 전까진 웃으며 말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어째서인지 시헌의 앞에서 현정은 늘 나약해졌다. 현정이 결국 다시 눈물을 흘렸다.

“흐윽…, 흐으으윽…… 시헌아…….”

제가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겠고, 왜 도망쳐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어른들은 네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현정은 이 모든 게 자신이 잘못 같았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엄마의 전화에 그 정도는 괜찮다며 밖에 나가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을까?

아니면 교무실에서 기다리라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던 것일까? 반 친구가 치마를 새로 샀다며 자랑하는 것이 부러워 엄마에게 치마를 사 달라고 졸라 입고 갔던 것이? 누구도 현정에게 그 이유를 말해 주지 않았다.

현정은 빌고 싶었다. 그날 이후 몇 번이나 혼자 울며 기도를 했는지 모른다. 신이 있다면 제발. 그날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그러면 친구를 부러워해 엄마에게 치마를 사 달란 말도 하지 않을 것이고, 엄마의 말처럼 선생님과 함께 교무실에서 기사 아저씨가 올 때까지 기다렸을 텐데.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날을 통째로 잘라 내고 싶었다.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눈가가 쓰라렸다. 겉옷 소매가 축축하게 젖었다. 그날 내린 비만큼 끝없이 눈물이 흘렀다.

가고 싶지 않다. 언젠가 이런 일이 올 거란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할 수 있다면.

“다 같이 고등학교까진 졸업하고 싶었어…!!”

현정을 대신해 다른 아이가 죽고 난 이후 현정은 웃었다. 어떤 사소한 것에도 웃었다. 늘 즐겁게 살려고 노력했다. 힘든 일이 있어도 내색하지 않았다. 행복해질 거다. 보란 듯이 행복해져서 언젠가 남자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당신이 빼앗은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큰 가치를 가졌는지. 그것이 그 애를 대신해 살아남은 현정이 해야 할 의무라고 느꼈다. 시헌은 현정의 등을 말없이 토닥였다.

시헌은 다른 남자애들과 달랐다. 아니 그 어떤 사람과 달랐다.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마치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일까? 현정은 시헌의 앞에서 허세를 부릴 수 없었다.

행복해질 거다. 그러나 그런 현정의 짐은 고작 15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홀로 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짐이었다. 무섭다. 설령 남자를 다시 보지 않는다 해도 남자와 같은 곳에 살고 있다는 현실이 무서웠다. 남자의 출소 소식을 들은 이후, 남자와 나이대가 비슷한 남자만 보면 전부 똑같아 보였다. 이대로 있다가는 정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미안해…. 으흑… 미안해.”

* * *

점심시간, 시헌은 책상에 엎드려 잠이 들어 있었다. 다른 아이들이 점심 메뉴에 관해서 이야기할 때 잠이 든 시헌은 점심시간이 되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시헌은 제집처럼 잠이 들어 있었다. 서진이 시헌을 깨우려 다가갔다. 서진의 손이 시헌의 어깨에 닿으려 하자 현정이 서진을 불렀다. 현정은 서진을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안 깨우는 게 좋을 것 같아.”

서진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두 사람의 인기척에 시헌이 결국 몸을 일으켰다. 잠이 덜 깬 채로 팔에 차인 시계와 칠판 위에 걸린 시계를 번갈아 바라봤다. 12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교실에는 네 사람을 제외하고 학생이 몇 명 남지 않았다.

시헌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간신히 책상에서 일어난 시헌은 두어 걸음도 가지 못한 채 서진의 옆에 몸을 기댔다. 시헌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정신이 없었다.

“너 아프냐?”

“아니.”

잠이 덜 깬 시헌의 목이 살짝 잠겨 있었다.

“그럼 왜 그래?”

시헌은 자리에 있는 가방을 슬쩍 내려다봤다. 평소보다 무거운 가방의 무게만큼 시헌의 피곤함도 늘었다. 시헌이 하품을 하며 눈물을 닦았다.

“그냥. 잠을 좀 못 자서.”

“하, 4교시 내내 잔 놈이 할 소리야?”

시헌은 서진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현정이 가자며 재촉했다. 점심밥을 먹고 교실로 돌아오기 무섭게 시헌은 책상에 다시 엎드렸다. 그리고는 이내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교실에 있었다. 눈을 감은 시헌에게 소리가 들렸다. 말투로 보아 은소였다.

‘과고 대비반? 그런 것도 있어?’

‘뭐, 그냥 한번 해 보려고.’

서진과 은소의 대화 소리였다. 눈을 뜬 시헌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두 사람은 프린트물을 들고 대화하고 있었다. 팔을 뒤척이자 뭔가가 바닥에 떨어졌다. 방과 후 신청을 받는다는 가정통신문이었다. 회장이 자는 시헌의 책상에 올려 두고 간 것이었다. 세 사람은 시헌이 깨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시헌은 고개를 숙여 프린트물을 자세히 살폈다.

2학기 겨울방학, 과고 대비반. 시헌은 책상 서랍 안을 뒤졌다. 책상 안쪽에서 싸구려 볼펜이 나왔다. 끝부분을 대충 찢은 후 종이에 이름을 적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헌은 종이를 들고 성큼성큼 서진에게 다가갔다. 서진이 무슨 일이냐며 시헌을 올려 봤다. 시헌은 들고 있던 종이를 서진의 책상 위에 올렸다.

“야, 박시헌 너 뭐 하는…….”

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헌은 자리로 돌아가 책상에 엎드렸다. 다시 잠에 든 모양인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서진은 시헌이 놓고 간 종이를 살폈다. 반과 이름이 적혀 있는 종이. 건성으로 과고 대비반에 동그라미 표시가 쳐져 있었다. 시헌의 신청지를 본 은소가 들고 있던 가정통신문을 만지작거렸다.

“나도 신청할까?”

“뭐? 그런 게 어딨어? 그럼 나도 할래!”

현정이 끼어들었다. 현정은 자리로 돌아가 재빨리 가정통신문을 가지고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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