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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6 이간질 (7/83)

Chapter. 6 이간질

늦은 저녁 번화가 골목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한 골목 구석에 남자들 몇 명이 서 있었다. 편의점 옆,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은 남자들을 힐끗 쳐다볼 뿐 먼저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술을 좀 마신 것 같기도 했고 무엇보다 길거리헌팅이야 자주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계속되는 남자들의 권유에 현정은 곤란하다며 손을 저었다.

“저 진짜 학생이에요.”

“아, 저도 학생이에요. 대학생요. 그러지 말고 번호 좀요. 네?”

남자들 사이에 낀 현정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지만, 사람들은 현정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남자의 손이 현정의 얇은 팔목을 붙잡았다. 아무리 장난이라고는 하나 어린 현정은 남자의 손을 쉽게 뿌리칠 수 없었다. 현정이 놓으라며 손을 흔들자 남자의 손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경찰 부를…….”

현정이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누군가 남자들 사이로 다가왔다. 현정을 둘러싼 남자들보다 훤칠한 키에 건장한 체격, 한눈으로 봐도 값비싸 보이는 옷을 걸치고 있는 그는 아무렇지 않게 현정을 붙잡은 남자의 팔을 잡았다. 그에게 붙잡힌 팔이 아픈 남자가 현정의 팔목을 놓았다. 처음에는 못 알아볼 뻔했던 현정은 곧이어 그가 누군지 알았다.

기욱이었다. 현정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기욱은 남자를 살짝 밀어낸 뒤 현정의 앞에 섰다.

“현정아. 여기서 뭐 해?”

“저, 그게…….”

“가자.”

기욱이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남자들이 아쉽다며 혀를 찼다. 기욱은 사람들 틈을 헤치고 걸었다. 현정을 배려하는 듯 빠르지 않은 걸음이었다. 기욱의 뒤에 선 현정은 사람들 사이에 치이지 않았다.

현정은 기욱이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었다. 일 분여 정도 걷자 큰 거리가 나왔다. 사람들이 흩어진 덕에 조금은 여유가 생겼다. 기욱이 걸음을 멈췄다. 현정이 기욱의 몸에 살짝 부딪혔다.

“괜찮아?”

기욱은 현정의 옷차림을 살폈다. 하이힐에 스커트 치마, 아직 봄이긴 하지만 달랑 셔츠 한 장은 좀 추울 것 같았다.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11시가 넘었다. 기욱이 시간을 확인했다는 사실을 눈치챈 현정이 치마를 붙잡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 늦은 시간까지 뭘 했냐고 들으면 할 말이 없었다.

현정의 어깨 위로 뭔가가 걸쳐졌다. 기욱의 잠바였다. 현정이 셔츠 소매를 걷는 기욱을 올려다봤다. 현정이 잠바를 돌려주려 하자 기욱이 됐다며 현정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 어차피 덥다고 생각했던 참이었다. 현정은 말없이 잠바를 꽉 여몄다.

기욱의 말대로 잠바는 지금 입기에는 조금 더웠다. 기욱이 근처에 앉아 있으라며 손가락질했다. 문을 닫은 가게 옆 계단에 잠바를 무릎에 덮고 앉았다. 기욱은 바로 앞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잠시 뒤 기욱이 빠르게 편의점을 나왔다. 현정을 보고 있던 또 다른 남자들이 현정에게 다가가는 기욱을 보더니 자리를 피했다.

기욱의 손에 밴드가 있었다. 현정이 발을 내려다봤다. 몸을 살짝 숙인 기욱은 발뒤꿈치에 밴드를 붙여 줬다. 현정은 기욱의 잠바에 얼굴을 살짝 묻었다. 기욱이 다 됐다며 현정의 구두를 다시 신겨 줬다.

“고마워요.”

“그래.”

기욱이 손을 내밀었다. 현정은 기욱의 손을 붙잡고 일어났다. 현정은 기욱이 부담스러웠다. 집안끼리 가끔 볼 때면 기욱은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시헌만큼은 아니더라도 기욱이 여자들을 여럿 끼고 논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현정이 사람들 틈에 치이며 뒤처지려 하자 기욱은 현정의 어깨를 붙잡아 안으로 당겼다. 현정은 순식간에 반쯤 안기는 자세가 되었다. 기욱의 품 안에 살짝 안긴 현정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왜 웃어?”

“아녜요.”

“궁금하잖아.”

기욱이 현정을 추궁했다. 기욱이 되물어 오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현정은 살짝 당황했다. 생각을 정리한 현정이 말했다.

“시헌이도 가끔 그러거든요.”

기욱이 현정의 어깨에 올라간 손을 바라봤다. 현정의 말뜻을 깨달은 기욱도 풋, 하고 미소를 지었다. 보통 미안하다며 손을 놓거나 할 텐데 기욱은 현정의 어깨에 올라간 손을 떼지 않았다. 현정은 살짝 불편했지만 그렇다고 문제가 될 건 없다고 느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기욱이 가는 곳은 역으로 가는 방향과는 정반대였다.

“데려다줄게.”

“엄마한테 얘기할게요.”

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술집이며 늦게까지 하는 음식점들이 가득했다. 현정은 배가 고팠다. 엄마에게 문자를 보냈다. 기욱과 있다고 답장을 보내자 기욱에게 전화가 왔다.

― 네. 어머니. 아뇨. 차 있습니다. 집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기욱과 현정의 어머님 통화가 이어졌다. 기욱이 전화를 끊었다. 다시 현정의 휴대폰에 늦지 말라는 답장이 왔다. 현정이 알겠다며 답장을 보냈다.

“먹고 갈래?”

“그래도 돼요?”

“내가 데려다줄 거니까 상관없지. 사 줄게.”

마침 배가 고팠던 현정은 기욱이 독심술이라도 쓰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늦게 돌아다니는 데 익숙한 현정은 기욱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한가한 줄 알았건만, 웨이팅을 해야 했다. 지금 시간대에는 어느 가게나 마찬가지였던 터라 기욱은 어쩔 수 없이 웨이팅 종이에 이름을 적었다.

두 사람은 가게 옆 벽에 기댔다. 일단 밥을 먹고 가겠다고 하긴 했는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현정은 기욱이 준 잠바만 계속해서 만지작거렸다. 침묵을 깬 것은 알바생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기욱 오빠?”

여자였다. 중학생인 현정과 달리 한껏 차려입은 그녀는 누가 봐도 대학생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정은 그녀가 그저 기욱과 아는 사이인 줄 알고 고개를 숙였다. 여자는 현정의 인사에 기분이 나쁜지 인상을 찌푸렸다. 어울리지 않은 현정의 잠바는 누가 봐도 기욱의 것이었다.

키는 조금 작지만, 현정의 차림새를 볼 때 중학생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게다가 중학생이 이 시간에 이런 차림으로 돌아다닐 거라고는 보통 생각하지 않았다. 여자는 어이가 없었다.

“오빠 대체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얘는 대체 누구고?”

현정은 그제야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그 씨발 년은……. 아, 진짜 오해야. 오빠. 오 분이면 되니까 얘기 좀 하자. 응?”

여자는 기욱에게 매달리는 한편 기욱의 옷을 입고 있는 낯선 현정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마침 대기를 알리는 알바생이 밖으로 나와 목소리를 높였다.

“박기욱 두 분 손님!”

여자의 말을 가볍게 무시한 기욱이 손을 들었다.

“여기요.”

“이쪽이에요.”

알바생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현정은 가게에 들어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자의 눈치만을 살폈다. 기욱이 현정의 어깨를 살짝 안은 뒤 현정을 가게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현정이 마지못해 먼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앞에선 기욱을 여자가 붙잡았다. 기욱은 여자의 팔을 가볍게 쳐 냈다. 여자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았다.

“이, 일 분. 일 분이면 되니까 제발…….”

“내가 말했지.”

“…….”

“나 치근덕대는 거 안 좋아한다고.”

“오빠 그게 아니라…… 잘못했어. 그러니까 내 말 좀…….”

여자가 결국 눈물을 흘렸다. 옆에 있던 친구가 여자의 눈물에 어쩔 줄을 모르고 있었다. 현정이 몸을 살짝 돌려 기욱을 바라봤다. 기욱이 금방 들어가겠다며 손을 들고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여자는 끝내 기욱을 따라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가게 옆으로 빠진 여자는 한참 동안 친구를 옆에 두고 눈물을 흘렸다.

“헐, 대박…….”

건너편 골목에서 그 모습을 본 미아의 손에 들린 담배가 툭, 하고 떨어졌다.

* * *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서자 종이 쳤다. 시헌은 아침 조회를 하기 위해 앞문에 들어온 선생님과 거의 동시에 교실에 들어왔다. 가방을 정리하는 시헌을 선생님은 모르는 척 넘어가 줬다. 고개를 돌리자 은소의 빈자리가 보였다.

“얘들아! 출석 부르게 좀 앉아 봐!”

출석하겠다며 아이들을 확인하는 선생님은 은소의 자리를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 시헌이 발끝으로 앞자리에 앉은 서진을 툭툭 건드렸다. 조회 시간임에도 몰래 공부를 하고 있던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등을 돌렸다. 시헌이 은소의 자리를 힐끗거리며 물었다.

“은소는?”

시헌의 말에 서진이 한숨을 쉬었다.

“어제 병원 간다 그랬잖아.”

“못 들었어.”

“한참 전부터 얘기했어. 같이 다니면 관심 좀 가져라.”

서진의 잔소리가 시헌은 살짝 못마땅했다. 아침 조회가 끝나고 교과서를 품에 안은 현정이 시헌과 서진에게 다가왔다. 칠판 한쪽 커다란 보드에 시간표가 있었다.

월요일, 영어. 사물함 안으로 손을 넣었다. 텅 빈 사물함 안쪽에서 영어 교과서 대신 수학책이 나왔다. 시헌이 수학책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서진이 또 그러냐며 잔소리를 했다.

“네가 보여 주면 되잖아. 닳는 것도 아니고.”

“야, 박시헌. 너 일부러 그러는 거지?”

서진은 시헌의 행동이 고의로 행해지는 것이 틀림없다고 느꼈다. 시헌은 부정하지 않겠다며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뻔뻔한 시헌의 행동에 서진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이동 수업 교실로 들어섰다. 시헌과 서진이 자연스럽게 앉았다.

앞뒤로 다른 학생들이 앉아 있었다. 현정이 멀리 앞자리에 앉아 있는 여학생을 불렀다. 가끔 은소가 양호실에 가곤 하면 같이 앉았던 학생이었다. 그러고 보니 앞좌석에 유독 여학생들이 몰려 있었다. 현정에게 불린 여학생이 어색하게 눈짓을 하더니 이내 친구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현정이 다가가자 여학생은 다른 친구와 앉기로 했다며 다른 자리에 앉았다. 그 친구라는 게 반 아이들이 피하는 여학생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이 앉는 것보다 혼자 앉는 것을 택했던 여학생의 행동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혼자 앉을게.”

시헌은 비어 있는 맨 뒷자리에 아무렇게나 앉았다. 수업을 알리는 종이 쳤다. 미안. 여학생들의 눈치를 본 현정이 결국 서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수업이 시작되고 십 분이 지났을 무렵 현정은 결국 책상에 엎드렸다.

아침의 일은 결코 기우가 아니었다. 주로 남학생들과 어울려 노는 현정은 몇몇 여학생들에게 질투의 대상이 된 적은 있었으나 반에서 왕따라고 할 정도는 아니었다. 꾸미고 다니는 걸 좋아할 뿐, 현정은 모든 아이에게 똑같았다. 뒤에서는 현정을 욕했을지언정 대놓고 피하거나 싫어하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체육 시간, 음악 시간이며 모든 시간에 여학생들은 현정을 피했다. 불과 단 하루 만에 바뀌어 버린 모습에 현정은 당혹스러웠다.

이상한 분위기를 느낀 것은 비단 시헌만은 아니었다. 시헌과 서진이 눈치를 주고받았고, 결국 눈치 싸움에서 진 서진이 현정에게 다가갔다.

“너 괜찮아?”

“어? 응.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현정이 괜찮지 않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남학생인 서진과 시헌이 여학생들에게 가서 이유를 묻자니 그건 그거대로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두 사람 또한 여학생들과 친하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답답하고 짜증이 나는 건 서진도 마찬가지였다. 5교시 쉬는 시간, 서진은 시헌을 데리고 학교 밖 편의점을 다녀왔다. 아침 조회 시간에 편의점을 가지 말라고 경고했지만, 서진은 신경 쓰지 않았다.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시헌은 서진과 똑같은 초콜릿을 입에 물었다. 교실로 들어가는 복도에 반 여학생들 몇몇이 모여 있었다. 교실로 들어가려는 두 사람을 발견한 여학생들이 머뭇댔다. 교실 문을 두어 걸음 앞두고 여학생 하나가 시헌과 서진에게 다가왔다. 현정은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서진이 복도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여학생들 여럿이 순식간에 시헌과 서진을 둘러쌌다.

“저…. 서진아. 현정이 말이야…….”

시헌의 눈치를 살짝 본 여학생이 머뭇댔다. 다른 여학생이 팔꿈치를 건들자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친구한테 들은 애긴데…….”

여학생의 말을 들은 서진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입안에 있던 초콜릿이 삼키지도 못한 채 그대로 녹았다. 여학생의 말에 다른 여학생들도 한마디씩 거들었다.

“솔직히 걔가 하고 다니는 것도 좀 그렇고.”

“이런 말 하긴 그런데. 원조 하고 다니는 거 아니냐는 소문도 있었어.”

“맞아. 저번에 학원 끝나고 가는데 어떤 남자랑 있더라고. 근데 먼저 말 안 했으면 진짜 못 알아볼 뻔했어. 솔직히 거기 근처가 다 술집인데 남자랑 있으면 좀 이상하잖아. 걔 남자애들한테 꼬리 친다는 소문도 되게 많아.”

서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반쯤 먹은 초콜릿을 알루미늄에 대충 싸 시헌에게 넘겼다. 시헌은 서진이 먹다 만 초콜릿을 만지작거렸다. 현정이 그 시간에 남자와 뭘 했는지 서진은 알지 못한다. 확실한 건 서진이 아는 현정은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

“그 얘길 왜 나한테 하는데.”

시헌이 현정과 친하듯, 서진과 현정이 친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현정을 끼고 도는 소문도 소문이었지만 먼저 그 말을 하는 여학생들의 행동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여학생들의 표정이 살짝 굳더니 저들끼리 뭔가를 속삭였다.

대놓고 표현은 하지 않지만, 서진은 제법 여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다. 서진은 공부 잘하고, 성실하고 바른 데다 친절했다. 서진을 몰래 좋아하는 여학생들도 꽤 있었다. 맨 처음 서진에게 말을 건 여학생 또한 서진을 뒤에서 좋아했었다. 친구들에게 등을 밀린 그녀가 다시 대답했다.

“현정이랑 너랑 사귀잖아. 그……. 남친이면 알아야 할 것 같아서…….”

서진과 친한 현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선배들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현정을 고작해야 평범한 여학생이 어떻게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두 사람이 사귈지도 모른다는 소문은 늘 있었지만, 사실이 된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학생의 말에 서진은 또다시 기가 막혔다. 정확히는 여학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귀어? 누가?”

서진은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은 아무것도 모른다며 어깨를 들썩였다.

“나 여친 있잖아.”

여학생들 또한 서진의 반응에 할 말을 잃었다. 보다 못한 또 다른 여학생이 끼어들었다.

“너네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

“누구랑? 나랑 장현정이랑?”

여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달리 누가 있겠는가. 서진은 대체 언제부터 그런 소문이 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여학생들의 시선이 서진의 반지에 닿았다. 손을 살짝 들자 아무 무늬도 없는 은색 반지가 있었다.

“그거, 커플링이라고. 그러던데.”

여학생이 옆에 있던 친구를 힐끗거렸다.

“야, 나도 들은 거야.”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반지는 현정이 하도 난리를 치기에 그냥 산 것뿐이었다.

“이거 커플링 아냐.”

서진의 대답에 여학생들은 할 말을 잃었다. 서진은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라고 느꼈다. 서진이 참지 못할 것은 따로 있었다.

“누구야?”

“어? 누가?”

“누구한테 들었냐고. 현정이가 그랬다는 거. 증거 있어?”

“그게…….”

여학생들끼리 말을 주고받았다. 순식간에 처음 이야기를 꺼낸 여학생에게 시선이 몰렸다. 그녀 또한 모르는 일이라며 손을 저었다.

“나, 나도 들은 거야.”

서진이 여학생을 추궁했다. 옆 반 여학생에게 들은 거라고 했다. 현정은 몸이 아프다며 조퇴를 했다. 서진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한참 만에 처음 얘기를 들은 여학생을 찾았다. 여학생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나왔다.

“미아한테 들었어.”

“뭐라고?”

“아, 진짜. 이거 말하면 좀 그런데. 내 친구가 걔 전학 오기 전에 있었던 학교 다니거든. 유미아 걔. 담배 피우고 술 마시고 어쨌든 장난 아니었대. 여기 전학 온 것도 사고 쳐서 전학 온 거라고. 걔네 학교에서 모르는 애들 없을걸? 어쨌든 난 걔한테 들었어.”

서진이 황당한 얼굴로 시헌을 힐끗거렸다. 여학생은 이동 수업에 가 봐야 한다며 자리를 피했다. 시헌은 다 먹은 초콜릿을 복도 근처 쓰레기통에 버렸다. 유미아. 여학생이 말하는 미아는 서진과 시헌이 아는 미아가 맞았다.

“너, 알고 있었냐?”

“아니.”

시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서진은 그런 시헌을 의심하지 않았다. 종이 쳤다. 평소라면 급하게 교실로 들어가야 할 서진의 걸음이 다른 곳을 향했다. 복도를 돌아 미아의 반으로 들어간 서진이 거칠게 뒷문을 열었다. 몇몇 아이들이 그런 서진을 힐끗거렸다. 친구들과 떠들고 있는 미아의 목소리가 반 안에 시끄럽게 들렸다.

“그래서 그년이 말야…….”

미아는 서진이 뒤에 있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떠들었다. 반대편에 있던 여학생이 미아의 등 뒤를 손가락질했다. 책상에 반쯤 걸터앉은 미아가 몸을 돌렸다. 진한 화장과 향수 냄새가 풍겼다. 현정의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 서진을 불쾌하게 했다. 서진이 현정에 대한 소문에 대해 따졌다.

“저기 서진아. 난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현정이 소문내고 다니는 거 너냐고.”

“소문? 무슨 소문?”

미아가 모르는 일이라며 발뺌을 했다. 마침 뒷문으로 이동 수업을 가겠다고 했던 여학생이 들어왔다. 친구에게 뭔가를 빌리러 온 모양이었다. 시헌이 여학생을 붙잡았다. 미아를 본 여학생이 잘못 걸렸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미아가 눈이 마주친 여학생에게 다가왔다. 마침 다른 여학생에게 서진과 여학생이 떠들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너야? 내가 현정이에 대해 이상한 소문내고 다녔다고 말한 게? 야, 너 어이없다.”

미아가 역으로 여학생에게 따졌다. 여학생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순식간에 말싸움이 붙었다.

“소문은 무슨 소문. 내가 언제 틀린 말 했어?”

“야. 그걸 네가 왜 말하는데. 네가 강서진 여친이야?”

중간에 낀 서진과 시헌은 벙찔 수밖에 없었다. 아, 씨발. 급기야 둘 사이에 욕이 오갔다.

“씨발, 내가 언제 그랬는데?”

“네가 그때 장현정이랑 이상한 남자랑 있었다며! 애들한테 사진 돌리고 그랬잖아! 내가 너 그딴 얘기 하고 다닐 때부터 알아봤다. 진짜.”

여학생은 더 이상 말을 섞기 싫다며 등을 돌려 뒷문으로 나갔다. 미아가 여학생의 이름을 불렀으나 여학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선생님이 조금 늦었다. 교실 안으로 침묵이 흘렀다.

“나랑 현정이랑 사귄다고 소문내고 다닌 것도 너냐?”

“서진아. 그건 시헌이가…….”

복도 너머로 선생님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미아가 들어 보라며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선생님이 앞문으로 들어오고 무슨 일인지 몰라 뒤쪽을 힐끔거렸다. 교탁 위에 있는 시계는 이미 쉬는 시간을 훨씬 넘긴 후였다.

“박시헌이 뭐.”

“…….”

시헌과 미아의 눈이 맞았다. 미아는 어쩔 줄을 몰라 하며 간신히 입술을 뗐다.

“시, 시헌이가 말한 거야. 둘이 사귄다고.”

서진이 옆에 선 시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헌은 어깨를 살짝 들썩이며 대답했다.

“난 그런 말 한 적 없는데.”

“뭐? 야, 박시헌 너……! 아, 진짜. 서진아 내 말 좀…….”

“씨발. 유미아.”

“어? 뭐, 뭐라고?”

“씨발년아. 한 번만 더 그래라.”

서진이 먼저 교실을 나갔다. 자리에 앉으라는 선생님의 말이 들렸다. 시헌이 교실로 나오자 미아가 급하게 시헌을 붙잡았다. 시헌은 미아에게 붙잡힌 손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들었다. 미아의 목소리에 날이 서 있었다.

“야, 박시헌. 수업 끝나고 나랑 얘기 좀 해.”

“…….”

시헌은 대답하지 않았다. 밖에 나간 미아를 데려오라는 선생님의 지시에 반 여학생이 복도로 나왔다. 시헌은 복도 너머로 사라진 서진을 쫓아갔다. 점심 복도 너머로 미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씨발. 난 둘이 싸울 줄 알았지.”

미아가 손톱을 깨물었다.

* * *

「둘이 사귀는 거 아니었어?」 오후 4:56

「시헌아 제발 나랑 얘기 좀 해」 오후 5:00

문자가 계속 왔다. 미아였다.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에 시헌이 마지못해 휴대폰을 들었다. 때마침 전화가 왔다. 미아는 아니었다. 모르는 번호였다. 시헌은 전화를 받았다.

― …….

― 어? 시헌아. 나야 하은이.

운이 좋게도 제 이름을 소개한 덕에 전화의 상대가 누군지 알 수 있었다.

― 너 미아랑 싸웠다며? 미아가 계속 연락 안 된다고 그러더라.

문제집을 덮은 시헌은 의자에 몸을 기댔다. 살짝 열린 문 너머 위층으로 묘한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시헌은 기욱의 짓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거실로 나오자 그 소리는 더욱 강해졌다. 여자의 신음 소리. 아니, 남자겠군. 현관에 놓인 신발을 본 시헌은 그렇게 생각했다. 아무렴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옆에 누구 있어?

― 어? 아니. 아무도 없는데? 지금 집이야.

흐음, 목 너머로 찬물이 넘어갔다. 절정에 달한 남자의 목소리가 시끄럽게 들렸다. 휴대폰 너머 하은이 이상한 소리가 나는 것 같다고 중얼거렸다. 시헌은 문을 열고 오피스텔 복도로 나왔다. 다행히 소리는 밖까지 들리지 않았다. 시헌이 입술을 뗐다.

― 혹시 내일 시간 돼?

― 아마도.

― 그럼 볼래?

시헌은 바깥까지 가지고 들어온 유리컵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다시 거실로 들어갔다. 끝난 모양인지 소리는 더 이상 나지 않았다.

― 그래도 돼? 그……. 미아는?

― 상관없어. 너만 괜찮으면.

― 그, 그래. 그럼 내일 보자.

하은이 엄마의 눈치가 보인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가 끊기기 무섭게 문자가 왔다. 소파에 앉아 얼마 동안 문자를 했다. 어디서. 어떻게 볼 거냐는 내용이 전부였다.

하은의 문자 답장이 늦어질 무렵 방문이 열렸다. 예상대로 신음의 주인공은 남자였다. 기욱의 품 안에 반쯤 안긴 그는 정신이 없는 모양인지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다. 계단 난간에 몸을 살짝 기댄 채 그 자리에서 진한 키스를 했다.

시헌의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시헌은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고개가 아래로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기욱이 남자와 섹스를 한다는 사실은 이제 와 새삼 놀라울 건 없었다.

다시금 붉게 상기된 얼굴이 된 남자가 기욱의 품에 살짝 안겼다. 기욱이 위에 올라가 있으라며 손짓했다. 시헌을 살짝 본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계단 난간을 붙잡고 올라가는 그는 꽤 힘들어 보였다. 시헌이 그제야 고개를 숙여 문자를 확인했다. 하은이 아니었다. 창가로 가 커튼을 살짝 쳐 아래를 내려다본 시헌이 한숨을 쉬며 현관 쪽으로 갔다.

“어디 가?”

“요 앞에 잠깐.”

기욱이 테이블 위에 놓인 물을 마셨다. 시헌이 남긴 물이었다. 기욱의 얼굴에는 땀이 가득했다. 기욱이 욕실의 불을 켰다. 시끄러운 환기구 소리가 거실로 울렸다.

“적당히 해.”

“알고 있어.”

도어락 소리와 함께 문이 닫혔다. 시헌은 닫힌 문 너머를 보더니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 * *

학원을 끝마친 시헌이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먼저 앉아 있던 하은이 손을 흔들었다. 가게 안으로 고기 냄새가 풍겼다. 지난번에도 고기였던 것 같은데. 시헌은 하은이 고기를 참 좋아하는구나 싶었다. 별다른 뜻은 없었다. 시헌은 옆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가방이 묵직했다.

“시헌아. 근데 진짜 헤어졌어?”

하은이 조심스럽게 미아에 대한 말을 꺼냈다. 하은의 테이블 위에는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를 본인을 앞에 두고 다시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딘가 좀 우스웠다. 시헌은 젓가락을 살짝 내려놓았다.

“학교에서. 친하게 지내는 여자애가 있는데.”

하은은 시헌의 말을 듣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은 지나가는 알바생 한 명을 붙잡아 사이다를 시켰다. 탄산 때문인지 목 안이 따끔했다.

“이상한 소문을 내더라고.”

“정말?”

하은은 모르는 척 시헌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시헌은 그렇다며 대답했다. 그 말을 시작으로 하은은 시헌에게 이것저것 이야기를 꺼냈다. 하은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니 벌써 고기가 사라졌다.

“더 먹을래?”

“아냐, 괜찮아.”

이미 충분히 먹은 하은이 고개를 저었다. 시헌이 지갑에서 카드를 꺼냈다. 아직 돌려주지 않은 기욱의 카드였다. 시헌은 하은을 조심스럽게 불렀다.

“네 말을 들을 걸 그랬어.”

하은의 얼굴이 약간 수줍게 변했다. 시헌이 계산을 하려 하자 하은이 재빨리 자기 카드를 내밀었다. 결국, 고깃값은 절반씩 계산했다. 밖으로 나오자 밤바람이 약간 찼다.

“다음에 언제 또 시간 돼? 자주 보자.”

“응. 아, 맞아. 아까 학교 얘기 좀 더 해 줘. 친한 여자애가 어쨌다고?”

“별거 없어. 실은…….”

시헌과 하은은 거리를 걸으며 가볍게 이야기를 했다.

* * *

체육 시간. 배드민턴 연습을 할 상대를 고르라고 했다. 배드민턴 채를 든 현정이 주변을 기웃거렸다. 멀리 혼자 서 있는 미아가 보였다. 미아를 발견한 현정이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미아가 현정 쪽을 힐끗거렸다. 서진이 현정을 불렀다.

“장현정.”

“어? 왜 서진아?”

시헌과 배드민턴 준비를 하던 서진이 현정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잠시만. 현정이 이따 얘기하자며 서진에게서 등을 반쯤 돌렸다. 서진의 언성이 올라갔다.

“일로 오라고.”

“뭐? 왜?”

“됐고. 오라고!”

미아가 결국 다른 쪽으로 갔다. 멀어지는 미아를 본 현정이 마지못해 서진에게 뛰어갔다.

“아, 진짜. 왜 화를 내고 난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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