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5 질투와 오해 (6/83)

Chapter. 5 질투와 오해

체육 시간. 체육복을 갈아입고 가자 평소보다 많은 학생이 체육관을 매웠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합반 수업이었다. 잠을 자느라 뒤늦게 일어난 시헌은 엉망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맨 뒷줄에 섰다. 교복 바지와 셔츠 차림에 달랑 체육복 상의 하나를 걸친 시헌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했다.

준비 운동을 준비하던 선생님이 그 모습을 보더니 들고 있던 드럼 스틱으로 시헌을 가리켰다. 하품하던 시헌은 그게 저를 가리키는 줄도 몰랐다.

“박시헌!”

선생님의 호통 소리와 아이들의 시선이 겹쳐진 시헌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이 질린다며 고개를 저었다.

“너 체육복은?”

선생님의 물음에 시헌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모르겠는데요.”

“얌마, 모르는 게 어디 있어. 빨리 가서 빌려와!”

빨간 체육복 상의에 손을 살짝 넣은 시헌이 체육관에 걸린 시계를 바라봤다. 9분, 10분. 정확히 숫자가 바뀌자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렸다. 시헌은 제가 이겼다며 미소를 지었다.

“지금 가면 수업 방핸데요.”

“빨리 갔다 와.”

“저 친구 없는데요.”

“그걸 말이라고…….”

“제가 교복을 입었다 해서 수업에 방해되는 건 아니잖아요.”

시헌의 말에 선생님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이상하게 시헌이랑만 얘기하면 할 말을 못 찾겠더라고요. 영어 선생님의 그 말을 체육 선생님은 몇 번이고 공감했다. 시헌은 옆에 있는 서진을 힐끗거리며 말을 이어 갔다.

“쟤도 봐준 적 있으면서.”

“야, 야! 내가 뭘!”

당황한 서진의 모습에 시헌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서진을 물고 늘어지는 시헌에 체육 선생님이 한숨을 쉬며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큭큭.”

“너 죽는다?”

사실 딱히 서진을 걸고넘어질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었다. 당황하는 서진의 모습만큼 시헌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없었다. 시헌의 행동은 체육복을 갈아입으러 가기 귀찮아 변명을 늘어놓기보다 서진을 놀리려는 의도가 다분했다.

“은소는?”

시헌은 뒤늦게 한 사람이 적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박시헌! 그렇게 체조하지 말라고 그랬지!”

“…….”

“하, 저거. 대회에서 우승도 한 애가 왜 저래?”

설렁설렁 움직이는 자신에게 똑바로 못 하냐고 호통치는 체육 선생님의 목소리를 시헌은 반쯤 무시했다. 체육 선생님은 선생님 나름대로 시헌에 대한 기대가 있는 모양이었지만, 시헌에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준비 운동은 귀찮다. 시헌은 준비 운동 순간만큼은 연체동물이 되고 싶었다. 그러면 흐물흐물해도 아무도 뭐라 하지 못할 텐데. 건성인 시헌과 달리 서진은 동작 하나하나가 열심이었다.

“은소 아파서 보건실 갔어.”

체조에 집중하는 서진 대신 건너편에서 체조를 하던 현정이 대신 대답했다. 시헌은 그렇군. 고개를 끄덕였다. 박시헌! 또다시 체육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시헌. 너 앞에 나와서 해.”

“아, 쌤 잘할게요.”

“시끄럽고 나와서 해.”

“아 귀찮은데.”

체육 선생님의 단호한 말투에 시헌이 뭉그적대며 앞으로 나왔다. 앞에 나오면 달라질 거로 생각하는 건가? 시헌은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면서도 일부러 준비 체조를 대충했다. 선생님이 안 보면 멋대로 스킵을 하거나 10번을 해야 하는 운동을 2의 배수로 불러 빠르게 생략하기도 했다.

시헌은 요령과 편법에도 익숙한 사람이었다. 시헌에게 준비운동은 태권도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어차피 저녁에 또 운동해야 할 텐데 땀을 두 번 빼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나와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팔을 허공으로 움직이는 시헌과 고개가 반쯤 돌아가 떠들고 있는 현정, 그 사이에서 저 혼자 열심인 서진은 누가 봐도 이상한 장면이었다.

그런 셋에 익숙한 반 아이들은 눈길 하나 주지 않지만 세 명이 처음인 다른 반 아이들은 준비 운동을 하면서도 신기하다는 듯 눈을 흘겼다. 처음 보는 학생들의 시선은 익숙했다. 그렇게 바라보는 학생들 중에서는 미아도 있었다.

짝피구를 한다고 했다.

여학생 한 명과 남학생 한 명이 짝을 지어서 하는 피구 게임이었다. 남학생은 공을 맞아도 되며 짝인 여학생을 보호하면서 게임을 진행해야 한다. 알아서 짝을 지으면 선생님이 팀을 나누겠다고 했다.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이들끼리 서로 짝을 짓겠다고 소란이었다.

멍하니 서 있는 시헌에게 서진이 다가왔다. 서진과 시헌 둘 다 반에서 친한 여자라고는 현정밖에 없었다. 시헌은 참 별걸 다 걱정하는구나 싶었다. 누군가 오겠지. 시헌은 딱히 그 여자애가 다른 남자애들이 꺼리는 대상이라 해도 상관없었다. 멀리 옆 반 아이들 틈에서 미아가 다가왔다.

“저기……. 서진아 혹시 같이…….”

“야! 강서진! 빨리 와!”

딱히 다른 반 남자애와 하지 말라는 규칙은 없었다. 그러나 미아가 서진에게 말을 꺼내는 것보다 현정이 서진에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 더 빨랐다. 다가오는 미아를 미처 발견하지 못한 서진이 이미 줄을 서 있는 현정에게로 뛰어갔다.

“빨리 오라고!”

“어어. 알았어.”

현정이 뭐 하는 거냐며 서진의 팔을 잡아 이끌었다. 대부분 짝이 결정되었다. 남은 거라고는 여자도, 남자도 서로 불편해하는 몇몇 아이들뿐이었다. 시헌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미아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저기……. 멀리서 제법 예쁘게 생긴 여학생 한 명이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다급해진 미아가 여학생을 밀어내고 시헌에게 다가갔다.

“시헌아.”

“…….”

시헌은 다가오는 미아에게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남은 애들을 찾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미아가 다시 운을 뗐다.

“같이 할래?”

고개를 끄덕인 시헌이 맨 뒷자리에 줄을 섰다. 미아가 조심스럽게 시헌의 옆으로 붙었다. 맨 앞에 줄을 선 현정과 서진은 결국 다른 팀이 되었다. 중학생. 아이들은 남녀로 짝을 짓는 게 어색했다. 선생님은 손을 잡으라고 했지만 대부분 옷자락을 붙잡거나 등에 숨는다거나 하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손을 붙잡은 거로도 부족해 팔짱까지 끼며 서진의 등에 딱 붙어 있는 현정은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아아, 서진아 나 두고 가지 마!”

“잘 좀 잡으라고!”

“꺅!! 그렇게 하면 나 공 맞잖아!”

“악! 안 맞는다니까? 야 거기 잡지 말고 좀! 네 손톱! 진짜 아프다고!”

어색함이 감도는 체육관에서 두 사람이 떠드는 목소리만 시끄럽게 울렸다. 서진이 현정의 손톱이 불편하다고 하자 현정이 서진의 손등을 할퀸 것이었다. 두 사람은 게임이 시작된 사실조차 모른 채 떠들었다.

키가 큰 남학생이 두 명이 양쪽에서 친 공이 시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흐음, 옷자락을 붙잡은 미아의 손을 살짝 쳐 낸 시헌은 피구 공을 있는 힘껏 던졌다.

게임 시작 후 공이 바닥에 떨어진 지 불과 5초 만에 퍽, 하는 요란한 소리와 함께 현정의 옆에 있던 여학생의 어깨를 맞췄다. 탈락을 알리는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야! 박시헌…!”

여학생의 어깨를 튕긴 공이 시헌의 쪽으로 넘어왔다. 눈치를 보던 남학생 한 명이 시헌에게 공을 넘겼다. 한 손에 공을 든 시헌이 다른 손으로 미아를 향해 손짓했다. 눈치를 보던 미아가 다가와 시헌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불편해. 그렇게 생각한 시헌은 미아의 손을 거침없이 붙잡았다. 또 다시 현정의 근처에 있던 여학생이 탈락했다. 순식간에 지나간 공에 탈락한 여학생과 짝이었던 남학생도 황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아, 뭐 하는 거야!”

“그게……. 몰라! 순식간이라니까……. 미안해.”

여학생의 짜증에 어깨를 축 늘어트린 남학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청난 속도로 날아오는 공은 남학생이라 해도 함부로 맞기 부담스러웠다.

“오오, 박시헌!!”

“제대로 하는 거 맞지?”

피구를 할 때면 시헌은 매번 적 팀의 공을 맞고 밖으로 나가기 일쑤였다. 오죽하면 그 사실에 대해 아는 아이들은 시헌에게 가장 먼저 오라고 말할 정도였다. 시헌의 드문 행동에 시헌의 팀에 있던 학생들의 사기가 순식간에 올라갔다. 상황을 모르는 아이들이 시헌의 반 애들에게 어떻게 된 거냐고 묻기도 했다.

“쟤 체육 겁나 잘해.”

“오오. 진짜?”

다시 팀 여학생에게 공을 넘겨받은 시헌은 공을 살짝 허공으로 올렸다. 첫 번째 여학생을 아웃시키던 순간도, 두 번째 여학생일 때도 시헌의 시선은 처음부터 바뀌지 않았다. 시헌은 일부러 현정을 보며 웃은 뒤 현정의 바로 옆에 있는 여학생을 맞췄다.

그 모습에 현정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평소에 체육을 귀찮아하는 시헌이지만 시헌의 진심은 무서울 때가 종종 있었다. 현정은 시헌이 저와 같은 팀을 하지 않아 기분이 상한 줄만 알고 있었다. 세 번째 아웃, 오오. 이제는 같은 팀 아이들이 시헌만을 바라봤다.

상대편에서 제법 잘하는 아이가 미아를 노리고 공을 던졌지만,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맞으며 공을 받아 냈다. 눈 하나 끔벅하지 않는 모습에 던진 남학생이 민망해질 정도였다. 시헌은 가볍게 웃었다. 공은 공이다. 공에 맞는다고 죽거나 하지 않는다.

그럼 무서워해야 할 필요가 있나? 남들과 다른 사고방식 때문인지 시헌의 행동은 대담하기 그지없었다.

시헌은 일부러 서진과 현정의 근처에 있는 학생들만 노렸다. 근처에 있는 아이들이 하나둘씩 아웃이 될 때마다 당황하는 서진의 표정이 꽤 볼만했기 때문이다. 서진은 뒤늦게 시헌이 저를 상대로 장난을 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도 현정이 눈치를 줘서 깨달은 것이었다.

이미 서진의 팀에는 서진과 현정을 제외하고 두세 짝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한두 팀의 차이지만 시헌의 팀도 아웃이 많은 건 똑같았다. 보다 못한 서진이 공을 들어 던졌다. 퍽― 누가 들어도 아플 만한 소리가 시헌이 맞은 공에서 났다.

“시헌아…. 괜찮아?”

“응.”

시헌은 살짝 살이 쓰린 것뿐이라며 대답했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서진이 선 너머에서 똑같은 질문을 했다.

“괘, 괜찮냐?”

“아니.”

“아, 강서진! 너 미쳤어?”

시헌은 자기가 공을 던져 놓고 당황하며 괜찮냐 물어보는 서진이 귀여웠다. 현정 또한 시헌을 때린 서진을 타박하기 바빴다. 시헌은 주변을 살폈다. 슬슬 게임을 끝내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공이 다시 시헌의 팀으로 넘어왔다. 살아남은 남학생 한 명이 시헌에게 공을 던졌다. 허공에 뜬 공을 자연스럽게 받은 시헌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먼저 시비를 건 건 너야.”

“아니, 난 그…… 자, 잠깐만? 야? 시헌아? 박시헌!! 잘못했…….”

미아의 손을 잠시 놓은 시헌의 손이 올라갔다.

* * *

시헌이 게토레이를 내밀었다. 서진은 바닥에 주저앉아 아픈 팔을 만지작거렸다. 멀리 학생들과 배드민턴을 하는 선생님의 눈치를 본 시헌이 받으라는 식으로 게토레이를 흔들었다. 자유시간이라 해도 학교 밖에 나가는 걸 허락해 준 것은 아니었다.

서진이 게토레이를 받아 마셨다. 시헌은 서진의 앞에 털썩 주저앉았다. 시헌이 손을 내밀자 서진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더운지 서진이 소매를 걷었다. 시헌은 소매를 걷은 서진의 팔을 바라봤다. 생긴 거랑 다르게 팔목이 가늘었다.

시헌은 서진이 바닥에 내려놓은 게토레이를 멋대로 마셨다. 줄 때는 언제고. 서진은 도무지 시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의 공에 맞은 서진의 팔에 살짝 빨간 흔적이 남았다. 좀 세게 던진 감이 있었지만 아무렴.

“안 죽어.”

죽진 않는다. 시헌의 말에 서진은 기가 찬다며 소매를 내렸다.

“누가 죽는댔냐? 아프다는 거지.”

“죽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잖아.”

“넌 피구 하는데 죽을 정도로 아파야 하냐?”

“그러니까 괜찮다는 거지.”

서진은 도무지 대화가 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가끔, 아니 자주 느끼지만 시헌의 사고방식은 어딘가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반 친구들과 놀던 현정이 서진에게 돌아왔다. 현정의 손가락에는 서진과 맞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서진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본 시헌은 애써 웃음을 참았다. 현정과 서진이 맞춘 반지는, 우정 반지라고 하기에도 가격이 꽤 있는 반지였다.

“물 마시러 가자.”

현정이 서진의 팔을 붙잡았다. 짝피구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서진에게 달라붙는 현정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짝피구 때문이 아니었다. 둘은 원래 그랬다. 서진이 현정에게 얼마 남지 않은 게토레이를 내밀었다.

“너도 마실래?”

“난 물 마실래. 같이 가자.”

“하아, 알았어.”

서진이 현정을 따라 일어났다. 정수기는 체육관 밖 복도에 있었다. 서진과 현정이 체육관을 나가고, 다른 아이들과 떠들고 있던 미아가 눈치를 보더니 시헌에게 다가왔다.

“시헌아 둘이…….”

“사귀어.”

시헌은 미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두 사람이 사라진 체육관 문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미아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시헌은 체육관 바닥에 몸을 뉘었다. 오랜만에 움직여서 그런지 피곤했다. 눈을 살짝 감은 시헌은 방금 전 제가 했던 말을 짧게 회상했다. 사귄다는 말은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시헌은 그 거짓말에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못했다.

아니, 느껴야 할 필요성을 갖지 못했다.

* * *

교실로 돌아와 체육복을 의자에 걸었다. 먼저 보건실에서 돌아온 은소가 시헌에게 다가왔다.

“체육 끝났어?”

“응.”

처음보다는 불편한 기색이 사라진 상태였다. 곧이어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온 서진이 들어왔다. 시헌은 서진에게 다가가 일방적으로 말했다.

“영화 보자. 이번 주 목요일 저녁에.”

시헌이 멋대로 날짜를 불렀다. 지난번 약속에 살짝 자존심이 상한 시헌은 어떻게든 서진과 날을 잡아야 할 것 같았다. 일방적인 시헌의 말에 서진이 당황하며 손을 저었다.

“잠깐만 박시헌. 나 그날 약속 있어.”

“…….”

“그리고 지금 볼만한 영화 없지 않아?”

마지막 말은 괜히 했나 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약간 상처를 받은 듯 입술이 튀어나와 있었다. 서진은 가끔 시헌이 이상한 데서 어린 구석이 있는 것 같다고 느꼈다. 현정은 자리에서 화장을 고치고 있었다. 들고 있는 손거울로 시헌을 본 현정이 허공으로 손을 저으며 대답했다.

“언닌 바빠.”

언니는 무슨. 시헌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래도 은소는 되겠지 싶어 은소에게 다가갔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은 은소가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나도 목요일은 좀……. 다른 날은 안 될까?”

“잠시만.”

시헌이 잠시만, 하고 손을 내밀었다. 문자가 와 있었다.

「시헌아 혹시 문자 돼?」 오전 10:54

「말해」 오전 10:55

시헌이 급하게 문자를 보냈다. 몇 번인가 문자를 주고받는 사이 화장 수정을 마친 현정이 시헌의 목에 팔을 걸었다. 시헌은 재빨리 휴대폰을 덮었다. 현정에게서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울 시헌이 삐졌어?”

“아니. 됐어.”

“진짜 삐진 거야?”

“아니라고.”

시헌이 귀찮다며 현정의 손을 쳐 냈다. 서진이 시헌에게 다가가려는 현정을 말렸다.

“둬라. 쟤 저러는 거 한두 번이야?”

교실로 들어온 선생님이 자리에 앉으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자리에 앉은 시헌은 곧장 책상에 엎드렸다. 그사이 책상 밑으로 미아와 문자를 주고받았다. 예상 밖이긴 하지만 마냥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엎드린 시헌의 입꼬리가 낮게 올라갔다.

* * *

주말, 특히 토요일 저녁 시간의 영화관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입장 시작 20분 전부터 줄을 서 입장 5분 전에 간신히 팝콘을 주문할 수 있었다. 시헌은 커다란 팝콘과 음료수를 의자가 없는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빨대를 챙겨 온 미아가 머뭇대며 시헌의 옆에 섰다.

교복 치마보다 조금 짧은 스커트에 굽이 높은 힐. 옆으로 지나가는 미아의 또래 여학생들과 대조되는 옷차림이었다. 시헌은 미아의 옷차림이 마치 다섯 살 많은 언니의 옷을 훔쳐 입고 나온 것 같다고 느꼈다.

미아 자신도 새로 산 옷이 어색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미아는 내색하지 않았다. 그날, 또래답지 않은 현정의 옷차림이 미아는 잊히지 않았다. 현정과 한 번 어울리기 시작한 여자아이들이 현정을 따라 하는 것을 본 것은 한두 번 있었던 일이 아니었다.

커다란 전광판 위로 입장을 알리는 공지가 떴다. 미아가 팝콘과 티켓을 챙기는 시헌의 옷자락을 살짝 붙잡았다.

“시헌아 있잖아. 혹시 나랑…….”

미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헌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상영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 틈 사이로 서진이 있었다. 서진은 시헌을 발견하지 못했다. 시헌이 다가가려 하자 팝콘을 들고 온 은소가 서진에게 다가왔다. 서진이 전광판을 보며 상영 시간을 확인하는 사이 은소가 시헌을 발견했다.

미아와 시헌이 위층 영화관으로 가는 에스컬레이터 앞으로 다가갔다. 뒤늦게 시헌과 미아를 발견한 서진의 안색이 살짝 어두워졌다. 마치 거짓말을 하다 걸린 사람 같았다. 어색한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미아가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영화 보러 온 거야?”

“어. 응.”

시헌은 서진의 손에 들린 영수증 형식의 티켓을 힐끗거렸다. 시헌이 보자고 했던 영화였다. 시헌은 살짝 기분이 상했다. 시헌의 기분을 모르는 미아가 말을 이어 갔다.

“현정이는?”

“오늘 친척 집 간다고 했나? 나도 잘 몰라.”

서진의 손가락에는 현정과 맞춘 반지가 아직도 끼워져 있었다.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미아가 그렇구나 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내부 청소가 늦어져 입장에 시간이 좀 걸린다고 했다. 좁은 복도가 영화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헌은 사람들 틈에 낀 채 서진과 어깨가 닿았다.

“약속이 있다는 게 은소야?”

사뭇 불만스러운 얼굴로 서진의 옆에 선 은소를 흘겼다. 은소는 입장 준비를 하는 알바생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서진도 시헌에게 미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그렇게 대놓고 물어 올 이유는 없지 않나.

“그럴 수도 있지 뭘.”

“영화는? 안 본다며.”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보려고 했던 건 아냐.”

서진은 약간 짜증이 일었다. 은소와 선약이 있는 것은 사실이었고, 영화를 보기로 한 건 계획에 없던 일이었다. 서진은 시헌과 같이 영화를 못 본 건 미안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은소와 영화를 보는 것에 있어 눈치를 봐야 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도대체 왜 이렇게 추궁하는 듯한 분위기가 됐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묘하게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은소가 끼어들었다.

“내가 보자고 그랬어.”

“야, 됐어.”

서진이 팔꿈치로 은소의 옆구리를 살짝 건드렸다. 입장을 시작하겠다는 알바생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이 우르르 입장 줄 쪽으로 밀려들었다. 시헌은 자연스럽게 서진과 멀어졌다. 불이 덜 들어온 영화관 안. 시헌은 순식간에 자리를 메우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서진을 찾았다.

건너편 자리에 서진과 은소가 앉았다. 불이 꺼지고 화면이 들어왔다. 화면 불빛에 의해 두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보였다. 서진도 시헌이 신경 쓰였는지 등을 살짝 돌렸다. 그러나 서진은 끝내 시헌을 발견하지 못했다.

영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시헌은 끝내 영화에 집중할 수 없었다. 서진이랑 은소가 왜? 시헌은 괜한 의심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 갈 무렵에야 저도 모르게 깨문 손톱에 손톱이 반쯤 뜯겨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헌은 영화가 어떻게 끝이 났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들 틈에 휩싸여 영화관을 나왔지만, 시헌은 서진과 은소를 찾을 수 없었다. 어디서 길이 엇갈렸는지 알 길이 없다. 영화를 보고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 탔다. 푸드 코너가 있는 층을 확인한 미아가 시헌의 옆에 슬쩍 붙었다. 저녁 7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저녁 먹을래?”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아래층에 있는 레스토랑이었다. 프랜차이즈로 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을 갈 계획이었으나 대기가 너무 길었다. 벽면을 와인으로 장식한 레스토랑은 패밀리 레스토랑보다는 대기가 적었다.

입구에 배치된 메뉴판을 살짝 본 미아가 가격이 부담된다며 조심스러워했지만,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대기표를 뽑았다. 확실히 중학생이 올 만한 가게는 아니었다. 자리에 앉은 시헌은 알바생이 따라 준 물에 자연스럽게 입을 댔다.

눈치를 본 미아도 유리잔에 담긴 물을 조금 마셨다. 레몬을 넣어서 그런지 약간 씁쓸한 맛이 났다. 식사가 끝나 갈 무렵 미아는 근처에 있는 냅킨으로 입을 살짝 닦았다. 유리창 너머로 빌딩이 가득한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시헌아.”

시헌아.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헌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나랑 사귈래?”

미아의 고백에 시헌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좋아.”

* * *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운 거실 건너편 방에서 불빛이 새어 나왔다. 탁, 기욱이 불을 켜자 거실이 밝아졌다. 주말 저녁 7시. 시헌은 책상에 앉아 공부하고 있었다. 거실 테이블 위에 시헌의 휴대폰이 있었다. 웅웅, 진동 소리에 기욱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살짝 만졌다.

기욱의 휴대폰은 아니었다. 소파 앞 유리 테이블에 몸을 숙여 휴대폰을 집었다. 기욱이 시헌의 폴더 휴대폰을 살짝 열었다.

「자기♥」

화면에 저장된 이름에 기욱이 피식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진동이 이어지는 휴대폰을 들고 시헌의 방문을 열었다. 의자를 살짝 밀은 시헌이 무슨 일이냐는 듯 기욱을 올려다봤다. 기욱의 손에 시헌의 휴대폰이 허공에 들려 있었다.

“휴대폰 줘.”

이름이 그대로 보이는 화면에 시헌은 인상을 구기며 손을 내밀었다. 딱히 제가 저장한 건 아니었다. 그녀가 멋대로 바꿨을 뿐이다. 그러나 시헌은 기욱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말할 이유도 없었고. 시헌이 손을 내밀었다. 툭, 하고 시헌의 손 위로 휴대폰이 떨어졌다.

시헌에게 휴대폰을 건넨 기욱은 거실로 나갔다. 마침 오는 전화를 받았다. 미아였다. 주변이 시끄러워 뭐라고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뭐라고? 어. 아니.

짧은 단답으로 대화를 이어 가던 시헌이 입을 살짝 다물었다. 거실에서 커피를 타고 있는 기욱의 눈치를 보던 시헌은 마지못해 책을 덮었다. 어깨에 휴대폰을 낀 채 장롱에 있는 옷을 살폈다.

“알았어. 금방 갈게.”

전화를 끊은 뒤 휴대폰을 침대 위로 던졌다. 시헌은 가벼운 셔츠로 옷을 갈아입었다. 기욱이 방문 옆에 몸을 기대고 서 있었다. 기욱의 옷차림이 바뀌었다. 검은색 정장에 불편하다는 이유로 잘 차고 다니지 않던 고급 시계, 살짝 올린 머리에 순금으로 된 넥타이핀까지. 도무지 저녁에 갈아입을 만한 옷은 아니었다.

시헌은 여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시헌은 제 옷차림을 슬쩍 살폈다. 미묘한 상대적 박탈감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시헌의 기분을 아는 모양인지 기욱은 허공으로 손을 저었다. 기욱의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 너머로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오빠, 어디야?

― 지금. 막 나가는 중이야. 내가 우리 자기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러니까 조금 기다릴 수 있지?

― 금방 올 거지? 보고 싶어서 그래.

― 이제 막. 나갈 거야.

기욱은 나긋한 목소리로 대화를 마치며 전화를 끊었다. 기욱의 차림으로 볼 때 지난번 엄마에게 소개시켜 준 여자가 틀림없다고 시헌은 확신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기욱이 시헌을 보며 물었다.

“어디 가?”

“요 앞에.”

시헌은 다 알면서 묻는 기욱이 살짝 얄미웠다. 속으로 재미있어하고 있는 기욱을 생각하니 짜증이 났다. 방에 들어갔다 나온 기욱이 시헌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시계였다. 시헌은 소매를 걷었다. 시헌의 팔에는 이미 몇 달 전에 산 가죽 시계가 있었다. 기욱은 시헌의 손에 멋대로 시계를 올렸다. 기욱의 것과 비교가 될 정도는 아니지만, 시헌의 시계 또한 중학생이 차기에는 싼 시계라고 할 수는 없었다.

“내 건 못 주지만. 이것도 비싼 거야.”

“…….”

“고모한테 중학교 졸업 선물로 받은 거거든.”

당시 시가로 300만 원 정도 주고 샀다고 했다. 가죽이 떨어져 가는 시계를 본 시헌은 마지못해 시계를 갈아 찼다. 이런 거, 차고 간다 해서 알아볼 사람도 없을 텐데. 시헌은 끝내 그 말을 하지 못했다. 기욱의 지갑에서 카드가 나왔다. 시헌은 잠바 주머니에 있는 지갑을 만지작거렸다.

“카드 가지고 가.”

“형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기욱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시헌은 기욱이 카드가 한 장밖에 없을 리가 없다고 확신했다. 성인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시헌은 말없이 기욱의 카드를 받아 주머니에 대충 넣었다. 거실로 나와 신발을 신었다. 등 너머로 다시 여자와 전화를 하는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 * *

번화가의 한 고깃집, 미아와 통화를 한 시헌은 사람으로 가득한 고깃집 내부를 둘러봤다. 멀리 학생들 무리에서 손을 흔드는 미아가 보였다. 남자도 있었고, 대부분 처음 보는 애들이었다. 그중에는 후배도 있는 모양인지 몇몇 아이들이 시헌을 보더니 살짝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시헌은 인사를 한 아이들이 누군지조차 알 수 없었다. 후배인 것 같다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고작해야 중학생끼리, 이러는 것도 참 웃겼다.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미아가 있는 쪽의 자리를 비워 줬다. 딱히 구석도 상관은 없는데. 시헌은 마지못해 미아의 옆에 앉았다.

“일찍 왔네?”

“귀찮아서 택시 탔거든.”

“집에서? 택시비 많이 나오지 않아? 얼마 나왔어?”

“3만 원?”

정확한 금액은 몰랐다. 차가 밀려서 조금 더 나온 것 같기도 했다.

“헐. 많이 나왔네.”

“내 돈 아니니까.”

시헌의 대화를 엿들은 남학생 한 명이 떠들었다. 시헌은 말없이 앞에 놓인 물을 마셨다. 묘한 침묵이 맴돌았다.

“하하, 시헌이가 원래 좀 과묵한 편이라.”

친구들의 눈치를 본 미아가 재빨리 분위기를 환기했다. 아이들의 대부분이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전학 오기 전 미아와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라고 했다. 지금 있는 학교에서 놀던 아이들과는 외모며 분위기, 행동 자체가 달랐다. 평범하다고 보기는 좀 그렇고 흔히 말하는 노는 아이들 쪽이 맞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시헌과 남학생들 사이에서 별거 없는 대화가 오갔다.

“언제부터 사귀었어?”

“이 주 좀 넘었어.”

“너네 둘이 같은 반?”

“아니.”

별로 숨길 만한 얘기는 아니었기에 시헌은 묵묵히 대답했다. 인원이 많아 그런지 생각보다 먹는 고기의 양이 많았다. 돈을 들고 있는 여학생과 남학생 한 명이 금액을 계산했다. 사전에 자기들끼리 돈을 모은 것 같은데 예상했던 금액보다 돈이 많이 나와서 곤란해하는 것 같았다.

“아, 나 많이 못 먹었는데.”

“좀만 더 시키면 안 돼?”

“이따 노래방 갈 거잖아. 부족하다고.”

서로의 의견이 갈렸다. 고기를 더 먹고 싶은 여학생들은 남학생들이 많이 먹어서 그런 거라며 투정했다. 시헌은 마지막 남은 고기를 집어 먹었다. 결국, 다수결로 하자며 서로의 의견을 묻는 지경까지 왔다. 건너편에 있던 남학생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있는 시헌을 불렀다. 시헌이 어색해서 끼지 못한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너도 뭐든 말해 봐.”

시헌은 아직 의견을 말하지 않은 미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넌?”

“어? 나는……. 더 먹으면 좋긴 한데. 돈이 좀…….”

더 나오는 부분은 서로 조금씩 내서 메꾸기로 이야기가 끝났다. 그러나 잠시뿐이었다.

“저기요.”

시헌이 근처를 지나가는 알바생을 불렀다.

“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알바생이 무슨 일이냐며 다가왔다. 아직 결정이 끝나지 않은 아이들이 당황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서로 떠들자 알바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 여학생이 좀 있다 시키자고 말하려 했으나 시헌의 말이 좀 더 빨랐다.

“뭐 해? 안 시키고?”

“아직 결정한 게 아닌…….”

“내가 낼게.”

“어? 진짜? 대박. 그럼 더 시켜도 되는 거야?”

유독 강하게 고기가 더 먹고 싶다고 주장한 여학생이 재빨리 시헌에게 물었다. 그녀는 어린 학생 티가 나는 친구 중에서 성장이 빠른 모양인지 제법 어른스러운 흔적이 곳곳에 묻어 있었다. 아이라인을 하고 립스틱을 바른 그녀는 재빨리 주문했다.

“여기 삼겹살 3인분 추가해 주세요! 그리고…….”

텅 빈 병 음료수를 힐끗거렸다. 그 모습을 본 시헌이 끼어들었다.

“그냥 사이다랑 콜라 2병 더 해 주세요.”

환호를 지르는 아이들 틈에서 미아는 은근슬쩍 분위기를 타며 시헌에게 팔짱을 꼈다.

“시헌아. 진짜 괜찮아? 나 때문이면 진짜 무리 안 해도 돼.”

걱정하는 것 같은 말투 이면에는 자랑과 기쁨이 섞여 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말을 일부러 소리 높여 할 리가 없었다. 두 사람과 마찬가지로 건너편 자리에 앉아 있는 커플 중 남학생이 괜히 자존심 상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야, 나도 내일모레 용돈 받아.”

“그게 뭔 상관인데.”

여학생과 남학생이 저들끼리 투덕거렸다. 시헌은 주머니에 있는 카드를 꺼내 지갑에 옮겼다.

“형이 카드 줬어.”

굳이 기욱의 카드가 아니라도 엄마의 앞으로 되어 있는 카드만으로도 충분했다. 꺼져 가는 불판 위로 다시 고기가 올라갔다. 지갑을 주머니에 넣던 중 시헌의 소매가 살짝 드러났다. 미아가 시헌의 시계가 바뀌었음을 눈치챘다.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시계였다. 시헌은 하나하나 물어 오는 미아가 살짝 귀찮았다.

“아아, 나도 시계 사고 싶어.”

“나중에 사 줄게.”

“네 거랑 똑같은 걸로?”

“이거 비싸. 내 것도 아냐. 적당한 거로 해.”

“어? 정말? 약속한 거다?”

설마 진짜 사 주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던 미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지나치게 달라붙은 미아는 시헌이 고기를 먹는 데 방해됐다. 그러나 시헌은 굳이 미아를 떨어트리려 하지 않았다. 시헌은 마음대로 하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야? 진짜 사 주게?”

두 사람의 대화를 엿들은 여학생이 입을 살짝 벌렸다. 건너편에 있던 다른 커플이 떠들었다.

“너 나 저번에 시계 사 준다면서.”

“야, 100일 때 반지 했잖아. 돈 없어.”

“용돈 받는다며.”

“알았어. 사 주면 되잖아. 그깟 시계가 비싸면 얼마나 비싸다고 그래.”

참으로 웃기는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여자 친구와 약간의 말다툼을 한 남학생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시헌아. 시계 얼마야?”

대각선에 있는 여학생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시헌에게 물었다. 순식간에 침묵이 흐르더니 모든 시선이 시헌에게 집중됐다. 과한 관심에 시헌은 괜히 차고 나왔다며 후회했다. 그러나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시헌은 일부러 시계를 찬 팔을 테이블 위로 올렸다. 옷이 살짝 내려가며 시계가 드러났다.

“몰라. 천만 원까진 아니고. 몇백 정도는 할걸.”

“대박…….”

“그리고 내 거 아냐.”

그 한마디에 남학생들이 그럴 줄 알았다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어느 중학생이 몇백짜리 시계를 차고 다니겠는가. 남학생들은 시헌이 과시를 하기 위해 집안 누군가의 시계를 차고 나온 거라고 생각했다. 뭐, 반쯤 틀린 말은 아니니 시헌은 애써 부정하지 않았다.

“헐, 언니 부러워요.”

미아의 옆쪽에 앉은 후배가 미아를 띄워 줬다. 순식간에 미아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추가로 먹은 고기값은 10만 원이 더 넘게 나왔지만, 시헌은 신경 쓰지 않았다.

* * *

밥을 먹고 꽤 오래된 빌딩에 2층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노래방 문에는 대놓고 청소년 출입 금지라는 붉은색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그 스티커를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안녕하세요.”

“어. 그래.”

선두를 선 남학생 한 명이 자연스럽게 사장님과 인사를 했다. 시헌은 그 사장님이 알면서 모르는 척해 주는 건지, 아니면 청소년 출입 금지라고 붙인 가게에 10시가 넘어 청소년이 들어올 리가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건지는 알 길이 없었다. 시헌 덕분에 돈이 남은 아이들은 가장 큰 방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기 무섭게 남학생들이 서로 첫 곡을 하겠다고 정신이 없었다.

노래방 소리가 시끄러웠다. 시헌은 화장실을 갈 겸 조심스럽게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이 많이 온 모양인지 복도 또한 다른 방에서 흘러나오는 소음으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시헌의 귀에 복도를 맴도는 노래들은 노래가 아니라 소음이었다. 알바생은 복도를 돌아다니는 시헌을 슬쩍 볼 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이 상태면 12시가 넘을 것이 틀림없었다.

시헌은 등을 돌려 노래방 밖으로 나왔다. 유흥가라 그런지 밖 또한 사람들과 가게에서 틀어 놓은 음악들로 시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노래방 근처에서 조용한 곳을 찾아 헤매던 시헌은 건물과 건물 틈 사이에 있는 작은 주차장 안으로 들어갔다.

차가 없는 주차장 안쪽에는 몇몇 남학생들과 여학생들이 있었다. 시헌과 같이 노래방을 온 아이들이었다. 시헌을 본 후배 여학생―정작 시헌은 그녀가 후배였는지조차 몰랐지만―이 재빨리 담배를 끄고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인사만 몇 번을 하는 건지. 시헌은 고작해야 1학년, 혹은 몇 개월 차이밖에 되지 않는 사이끼리 이렇게 딱딱하게 구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시헌과 동갑인 남학생은 아무렇지 않게 담배를 계속 피우고 있었다. 눈치를 보던 후배 남학생이 시헌에게 다가왔다.

“있으세요?”

“아니.”

“하나 하실래요?”

“줘.”

시헌은 후배가 내민 담배 케이스를 흘끗 바라봤다. 현정과 아침에 몰래 숨어서 담배를 피우던 것이 떠올랐다. 현정과 시헌은 제법 담배의 취향이 맞았다. 좋아하는 담배도 아니고 담배를 피우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지만, 시헌은 입을 다물며 담배를 물었다.

후배 남학생이 손에 들린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와 함께 묘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시헌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그들은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다. 남학생들은 아무렇지 않게 후배들과 며칠 전 다른 학교 학생과 싸웠던 이야기를 했다. 시헌이 듣기에 싸웠다고 하기보다는 그냥 일방적인 폭행에 지나지 않았다.

“씨발, 내가 그때 그 걸레 년 때문에 기분이 진짜 좆같아서…….”

중학생의 입에서 나올 만한 욕은 아니었다. 시헌은 살짝 불쾌해지려고 했으나 주변에 있는 누구도 그의 욕설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에게 이 정도의 욕은 일상이고, 당연한 일이었다.

어느 정도 이야기가 끝나 갈 무렵 그가 먼저 올라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정작 노래방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그 누구도 담배를 입에서 떨어트리지 않았다. 아이들은 입구 앞에서 마지막 담배를 빠르게 피웠고, 그건 시헌 또한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한 개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불쾌한 기분을 가시게 하려고 하다 보니 어쩔 수가 없었을 뿐이었다. 시헌보다 먼저 담배를 끈 남학생이 시헌의 어깨에 손을 둘렀다.

“시헌아. 올라가자. 춥다.”

“이런.”

시헌의 손에 있던 담배가 툭, 하고 떨어졌다. 언제부터 친해진 건지 자연스럽게 이름을 부르며 어깨에 팔을 두른 남학생이 시헌의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남학생이 고개를 들자 저보다 훨씬 키가 큰 기욱이 서 있었다.

“…….”

난데없이 나타난 기욱의 포스에 골목 안쪽으로 침묵이 흘렀다. 보통 담배를 피우며 골목을 점령하는 학생들을 보면 모르는 척 길을 빨리 지나가는 것이 정상이었다. 그러나 기욱은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학생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당하다 못해 기가 막힌 기욱의 태도에 남학생이 입을 열었다.

“아는 사이야?”

그의 말에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은 기욱이 뒤에 서 있는 건물의 간판을 바라봤다. 러브모텔. 모텔 입구 쪽 주차장에 기욱의 차가 있었다. 모텔로 들어가려던 참이었던 것이 틀림없었다. 시헌의 발밑으로 꺼지지 않은 담뱃불이 올라왔다. 시헌은 재빨리 발끝으로 담배를 지졌다.

“담배는 언제부터 피웠어?”

“…….”

“전화는 왜 안 받고.”

시헌은 그제야 휴대폰을 주머니에서 꺼냈다. 주차장에 있을 때 기욱에게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시헌도 왜 이 전화를 못 받았을까 하고 생각했다.

“미안.”

두 사람이 늦자 몇몇 학생들이 건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한눈에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눈치챈 학생들이 시헌과 남학생의 뒤로 몰려왔다. 기욱과 눈이 마주치자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입구 옆으로 커다란 풍선이 서 있었다.

모텔 옆 편의점에서 한 여자가 나왔다.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높은 굽에 짧은 미니스커트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짙은 화장에 향수 냄새가 가득했다. 그녀는 금방 간다더니 오지 않고 있는 기욱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여자 친구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다. 시헌은 현 상황보다 자신이 여자의 정체를 잘못 짚었다는 것에 중점을 뒀다.

“오빠, 안 들어오고 뭐 해?”

여자가 기욱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학창 시절 놀 대로 놀아 본 여자 또한 학생들을 별로 무서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여자는 가만히 서 있는 기욱을 모텔 쪽으로 이끌었다. 그런 여자의 행동에 기욱이 몸을 돌렸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기욱의 손에 뺨을 올렸다. 슬쩍 눈치를 본 기욱이 그녀의 손을 살짝 든 후 뺨에 입술을 맞췄다. 여자의 얼굴이 입술 근처로 다가오자 기욱은 그녀의 손 위로 입술을 올렸다.

“좀 있다.”

“뭐야.”

“애들 보잖아.”

그녀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대박. 그 모습을 지켜본 남학생과 여학생들이 수군거렸다. 기욱의 손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얇은 허리를 감쌌다. 여자를 품 안에 안은 기욱이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시헌밖에 없었다.

“일찍 들어와. 그리고 전화 받고.”

“알았어. 미안.”

기욱과 그녀가 모텔 옆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두 사람이 완전히 사라지자 주변 학생들이 시헌에게 다가왔다.

“누구야 저 사람?”

방금까지 시헌과 친한 척을 하던 남학생이 새 담배를 물었다. 시헌은 그런 남학생의 태도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우리 형.”

옆에는 모르는 사람이고. 시헌은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옆에 있던 남자가 한마디 더 했다.

“아까 그 여자는 형 여친이야?”

“나도 몰라.”

“다리 봤냐? 개꼴리던데.”

“모텔 들어가던데 부럽다.”

“미친놈들, 발정은 다른 데서 나세요.”

남학생들 사이에 낀 여학생 하나가 욕을 했다. 시헌은 그 여학생이 눈에 익었다. 고깃집에서 고기를 더 먹고 싶다고 끝까지 주장했던 그녀의 모습은 꽤 인상적이었다.

이름은 모르지만. 여학생 또한 남학생의 여자에 대한 성희롱에 대해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여학생도 그냥 가벼운 농담 정도로 치부하는 것 같았다. 옆에 있던 후배에게 담배를 빼앗은 그녀 또한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우리 노래방 얼마나 남았어?”

“아까 나올 때 오 분 정도 남았대요.”

“아, 안 들어가 귀찮아. 유정아, 들어가서 은진이한테 아래에서 애들이랑 담배 피우고 있다고 전해 주고 와.”

전해 줄래도 아닌 일방적인 명령이었지만, 후배 여학생은 그런 선배의 태도를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녀의 말을 전해 들은 후배가 전해 주고 오겠다며 노래방으로 들어갔다.

교복은 입지 않았지만, 누가 봐도 어려 보이는 학생들이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은 좋은 풍경은 아니었다. 그러나 직접 와서 말을 거는 사람은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성인도 무섭다며 피하는데 같은 동급생들끼리는 오죽할까 싶었다. 아무렇지 않게 지나가는 사람들 틈 사이에서 시헌은 뜻밖의 인물을 발견했다.

“…….”

정직하게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고 지나가면서 힐끗거리는 서진과 은소에 한 몇몇 남학생들이 뭘 보냐며 욕설을 내뱉었다.

“야, 뭘 꼬나보냐?”

“…….”

“자, 잠깐…!!”

“시헌아!”

때마침 노래방 밖에서 나온 미아가 시헌을 불렀다. 시헌이 급하게 담배를 끄고 고개를 돌렸을 때 서진과 은소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두 사람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시헌은 바닥에 쪼그리며 주저앉았다. 미아와 몇몇 학생들이 무슨 일이냐며 물어 왔다. 바닥과 머리가 닿을 것처럼 고개를 숙인 시헌이 머리를 긁적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봐도 오해했음이 틀림없다.

“아 정말. 일이 왜 이렇게 된 거야.”

시헌의 그 말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초봄이 지났다. 교문을 지난 시헌은 자연스럽게 정문 옆 아이들이 서 있는 쪽으로 붙었다. 시멘트 벽에 몸을 기대 이어폰을 꼈다.

“박시헌. 이어폰 빼라.”

선생님의 잔소리에 시헌은 마지못해 이어폰을 정리했다. 등교하는 아이들이 늘어날 무렵 은소와 서진이 정문으로 들어왔다. 수학 선생님을 지나쳐 가는 서진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선생님과 실랑이가 이어졌다. 늘 있는 풍경이었다.

한숨을 쉰 서진은 결국 시헌의 옆에 줄을 섰다. 머뭇대던 은소는 교실에서 보자며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시헌은 넥타이가 없는 서진의 셔츠를 힐끗거렸다. 현정은 지각인지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 어제 은소랑…….”

“걔들 뭐야?”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말이 나왔다. 그리고 누구도 서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각자의 궁금증이 먼저였다. 이것만큼은 시헌도, 서진도 양보할 수 없었다. 짜증이 난 서진의 언성이 올라갔다.

“내가 묻잖아.”

“별거 아냐.”

“별거 아닐 리가 없잖아.”

시헌이 보기에 서진은 참으로 바른 학생이었다. 모든 수업을 열심히 참여하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예습 복습을 철저히 하는 말 그대로 교과서적인 모범생이었다. 늘 책상에 엎드려 자고, 마음에 들지 않는 수업은 참여조차 하지 않으며 교과서는 새것처럼 늘 깨끗한 시헌과는 모든 것이 반대였다.

서진은 흔히 불리는 불량 청소년들, 아이들끼리 말하는 노는 아이들을 무서워하기보다 혐오하는 쪽에 가까웠다. 현정과 처음 담배를 피울 때, 농담 삼아 서진에게 권유했다가 일주일 동안 시헌을 피해 다녔던 적도 있었다.

시헌을 보는 서진의 얼굴에는 실망이 가득했다. 최소한 그런 짓은 안 할 줄 알았는데. 시헌도 알고 있다. 서진이 그런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하지만 시헌이라고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미아의 친구들이 그런 아이들인지도 몰랐거니와 그 늦은 시간에 동네 번화가도 아닌 곳에서 서진을 볼 거란 생각은 더더욱 하지 못했다.

그 시간까지 은소와 함께 있는 서진의 잘못이 컸다. 교복도 갈아입지 않고 둘이서 뭔가를 했다는 생각을 하면 시헌은 도리어 화가 치밀었다.

“대체 은소랑…….”

“시헌아!”

멀리서 미아가 손을 흔들었다. 시헌은 미아의 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얇은 바람막이 잠바에 살색 스타킹, 핑크색 삼선 슬리퍼와 붉은색 가방, 짧아진 치마는 불과 몇 주 전까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가까이서 보니 화장도 한 것 같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미아를 본 선생님이 옆으로 가서 줄을 서라고 했다. 서진을 슬쩍 본 미아가 시헌에게 팔짱을 꼈다. 진한 파우더와 향수가 섞인 냄새가 났다. 서진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너, 너네 둘이…….”

“사귀어.”

서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시헌이 대답했다. 시헌은 서진이 미아에게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미아가 민망한지 어색하게 웃었다.

“이 주 정도 됐어.”

종이 쳤다. 선생님이 들어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줄을 선 아이들이 우르르 정문으로 몰려들었다. 자연스럽게 세 사람도 학교 안으로 들어갔다. 미아의 반은 정반대에 있었다.

“시헌아 이따 보자.”

“알았어.”

서진이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기 무섭게 현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왔다!! 서진아. 시헌아!”

현정이 기다렸다는 듯 손을 흔들었다. 지각인 줄 알았는데 이미 교실로 들어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서진은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는 현정을 옆으로 밀어냈다. 서진과 시헌의 눈이 맞았다. 서진이 시헌에게서 눈을 돌렸다. 삐진 것인지 아니면 화가 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헌은 그런 서진의 반응이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 * *

쉬는 시간. 미아가 시헌의 반에 있는 여학생에게 의자를 빌려 와 앉았다. 몇몇 여학생들이 달라진 미아의 모습을 보며 수군거렸다.

“헐, 쟤 왜 저래?”

미아 또한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시헌이 보기에 미아는 여학생들의 시선을 즐기는 것 같았다. 정작 원래부터 꾸미고 다니는 데 관심이 많은 현정은 미아의 변화에 불편해하거나 하지 않았다.

현정은 화장을 하고 치마를 짧게 줄이는 건 노는 아이들만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또한 노는 아이들이라 불리는 애들이 시헌과 같이 다니는 현정을 함부로 건드릴 수 없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평범한 여학생들은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있지. 시헌아, 오빠는 학교 다니고 있어?”

“대학교.”

“졸업 안 한 거야?”

“아직. 좀 남았어. 시험 때문에 요즘 바쁘다고 했고.”

그게 어딜 봐서 바쁜 사람의 모습인지는 알 수가 없지만. 기욱은 다른 의미로 시헌보다 하면 되는 사람이었다. 눈 껌벅하지 않고 며칠 밤을 새우는 기욱의 모습은 동생임에도 불구하고 무서울 때가 종종 있었다.

공부를 하던 서진이 두 사람을 은근슬쩍 힐끗거렸다. 미아와 이야기를 하면서도 시헌은 서진의 그런 시선을 놓치지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온 현정이 서진에게 다가왔다.

“어! 너 양말!”

“양말이 왜?”

뜬금없는 현정의 말에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미아와 대화를 하던 시헌도 책상 아래로 튀어나온 서진의 양말을 바라봤다. 흰색에 노란 병아리가 그려진 양말이었다. 서진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현정이 발을 살짝 들었다. 살짝 벗겨진 노란색 삼선 슬리퍼에 서진과 똑같은 병아리 양말이 있었다.

“나도 이건데.”

“누나 거야.”

“큭큭, 누나 걸 왜 네가 신어. 완전 커플 양말이네.”

현정이 옆에 있는 여학생과 떠들며 웃었다. 서진은 별걸 가지고 다 커플이냐며 문제집으로 고개를 숙였다. 한참 기욱에 대해 대화하던 미아가 입을 다물었다.

“아, 나 슬슬 가 볼게. 이다음에 이동 수업이라서.”

“그래.”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는 미아를 시헌은 말리지 않았다.

* * *

늦은 저녁 태권도를 마친 시헌이 건물 안쪽 골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담배 냄새가 훅 하고 올라왔다. 시헌을 알아본 몇몇 후배 남학생들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 안녕하세요.”

지난번에 본 적 없는 남학생도 있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시헌의 소문이 난 것 같았다.

“내 남친이야.”

“아아, 선배가 지난번에 말씀하셨던. 안녕하세요.”

미아가 웃으며 또래 여학생들에게 시헌을 소개했다. 눈치를 본 여학생들과 남학생 후배 몇 명이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덩치만 놓고 본다면 시헌보다는 인사를 하는 쪽이 더 선배 같았다. 미아는 며칠 전에 시헌이 사 준 시계를 자랑하던 중이었다.

백화점에서 샀다고 자랑했지만, 1층 로비 근처에 있는 중형 시계 브랜드에 지나지 않았다. 10만 원이 조금 안 되는 가격. 비싼 가격은 아니지만, 중학생이 함부로 아무렇지 않게 쓸 수 있는 금액 또한 아니었다.

“헐. 대박. 시계 진짜 이뻐요.”

“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선배님 진짜 좋으시겠어요.”

꼬박꼬박 경어를 쓰는 후배의 모습에 미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학생들의 대화에 끼어들기 뭐한 시헌은 자연스럽게 남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교복을 갈아입지 않은 아이들과 달리 시헌은 체육복 차림이었다. 시헌의 어깨에는 체육복이 있는 가방이 있었다.

“큭큭, 그런 애들은 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더 때리지 그랬냐. 아깝게.”

시헌을 낀 남학생들이 자기네들끼리 대화를 주고받았다. 딱히 낄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고 생각한 시헌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방탈출 게임, 지난번 무대는 깼지만 어째서인지 그 뒤로 계속 막혔다. 조금밖에 남지 않았는데 오기가 생겼다. 시헌은 언제쯤 돼야 방을 탈출할 수 있을까 싶었다. 비밀번호가 틀렸을 무렵 남학생 하나가 시헌에게 물어 왔다.

“야, 넌 뭐 없었냐?”

휴대폰을 닫은 시헌이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봤다. 시헌과 나이가 같은 남학생. 시헌은 자신에게 말을 건 남학생에 대해 생각했다. 시헌은 한발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헌이 고깃집에서 시계를 사 주겠다고 했을 때 홧김에 저도 사 주겠다고 떠들었던 학생이었다.

“아, 형 왜 그러세요.”

“궁금해서 그러잖아. 휴대폰만 하고.”

“…….”

“그럴 수 있죠.”

“그러긴 뭘 그래 새끼야.”

시헌을 몰고 가는 남학생에 후배가 적당히 하라며 손을 저었다. 그 모습에 남학생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중학생 평균의 키는 되지만, 시헌의 키는 주변에 있는 아이들에 비하면 큰 편이 아니었다. 시헌이 입고 있는 고가 브랜드 체육복을 본 남학생은 시헌이 돈밖에 내세울 게 없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청소년 시절의 잘못된 우월감. 시헌과 후배 남학생 한 명의 시선이 맞았다. 눈치를 본 후배 남학생이 시헌에게 담배를 내밀었다. 시헌은 말없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골목 사이로 교복을 입은 남학생 두 명이 시헌과 학생들이 있는 골목을 지나갔다. 서진과 은소는 아니었다. 허탈감이 들었다.

“1학년 때. 싸웠거든.”

시헌은 그날을 회상했다. 입학하고 얼마 되지 않아서 일어난 일이었다. 신도시 사립 초등학교 출신의 시헌과 현정은 입학 때부터 모든 학생에게 관심의 대상이었다. 그중에서도 남학생인 시헌과 달리 여학생인 현정은 더욱더 눈에 띄었다.

현정의 옷차림은 도저히 갓 입학한 1학년의 옷차림이 아니었다. 단정한 교복 사이에서 3학년이나 되어야 나올 법한 옷차림을 한 현정은 또래 여학생들에게도, 선배라 불리는 여학생들에게도 눈엣가시였다. 한 달이 좀 지날 무렵 선배라고 불리는 여학생들이 잔뜩 찾아왔고, 아니나 다를까 싸움이 붙었다.

당시 뒷자리에서 엎드려 자고 있던 시헌은 현정의 목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시헌은 선배 여학생들에게 적당히 하라고 한 것이 다였다. 아주 조금 짜증이 났던 것도 인정했다. 여학생들은 1학년 남학생인 시헌을 무서워하지 않았지만, 남자는 남자였던지라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

점심시간이었다. 현정을 둘러쌌던 여학생들 대신 키가 큰 남학생들이 떼거리로 몰려온 것은. 남학생들 뒤로 팔짱을 낀 여학생들이 보였다. 싸움이 붙었다.

시헌은 본능적으로 생각했다. 점심시간 복도, 1학년을 둘러싼 3학년 남학생들. 아니나 다를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몇몇 학생들이 교무실로 뛰어갔다. 싸움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았다.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맞고 있을 이유 또한 없었다. 서로의 말이 거칠어질 무렵.

“유리창을 깼거든.”

“어떻게? 뭘로?”

남학생들은 뜻밖의 이야기에 흥분했다. 참으로 단순했다. 처음 시헌에게 말을 건 남학생의 얼굴이 안 좋아졌지만 시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주먹을 살짝 쥐었다. 얇은 팔목 사이로 당시의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다.

“주먹으로.”

“…….”

“하도 좆같이 굴길래.”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근처에 있던 여학생들이 비명을 질렀다. 팔부터 시작해 산산이 조각난 유리가 시헌의 뺨과 얼굴 근처를 스쳤다. 선생님들이 빠르게 달려왔다. 대충 상황을 들은 선생님이 다짜고짜 3학년 남학생들을 질타했다. 그들은 억울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팔을 흔들었다. 후두두, 시헌의 팔에 박힌 유리들이 바닥으로 흩어졌다. 양호 선생님이 뛰어왔다. 팔에 굵게 박힌 유리를 만지작거렸다. 다른 손이 베어 피가 흘렀다. 양호 선생님이 손대지 말라며 주의를 줬다.

교무실로 따라오라며 소리를 질렀다. 도망치던 여학생들까지 전부였다. 양호 선생님이 시헌에게 당장 양호실로 가자고 했다. 선생님이 준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았다. 손수건에서 유리 파편이 묻어났다.

미친 또라이 새끼.

3학년 남학생 한 명이 질렸다며 중얼댔다. 시헌은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일이 복잡하게 되는 걸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복도의 유리창을 깬 자신의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행동이 잘못됐다고 느끼지는 않았다.

창문에 몸을 던진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유리가 깨진 일이다. 유리 파편이 자신 외에 다른 학생들에게 튄 것도 아니었다. 살짝 아프긴 했으나 그 역시 죽을 정도는 아니니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시헌은 별거 아니라며 대충 수습했다.

“그런 일이야. 잠깐 편의점 좀.”

담배를 끈 시헌은 건너편 골목에 있는 편의점에 들어갔다. 남학생 중 아무도 편의점에 가려는 시헌을 말리지 않았다. 새벽 시간, 벨 소리에 계산대에서 휴대폰을 하고 있던 남자 알바생이 고개를 들었다.

“어서 오세요.”

시헌을 본 남자가 건성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가장 안쪽 진열대로 들어간 시헌은 거침없이 게토레이를 집었다. 한 개가 남았다. 틱, 바코드가 찍히는 소리와 함께 익숙하게 포스기를 눌렀다. 1500원, 시헌은 주머니를 뒤졌다. 현금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아직은 중학생인 시헌이 쓰기에는 조금 큰 가죽 지갑 안쪽에 기욱의 검은색 카드가 있었다. 마지못해 카드를 집어 들던 찰나 다시 편의점 유리문이 열렸다.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들어왔다. 알바생이 기계적으로 다시 인사를 했다.

“어서 오세요.”

“어머, 시헌아.”

편의점 내부를 둘러본 그녀는 카운터에 있는 시헌에게 다가왔다. 편의점에 목적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계산하고 있지 않은 시헌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녀의 손에는 대학생이나 쓸 법한 분홍색 장지갑이 들려 있었다. 그녀는 시헌의 근처 초콜릿을 집어 계산대 위로 올렸다. 알바가 시헌의 카드를 받으려던 순간 그녀가 끼어들었다.

“같이 계산해 주세요.”

“아, 네.”

그녀가 거침없이 만 원짜리 현금을 내밀었다. 시헌은 조용히 카드를 다시 지갑에 넣었다. 가슴에 닿는 긴 생머리 사이로 이름표가 보였다. 이하은. 고깃집에서 끝까지 고기를 먹자고 제안했던 여학생이었다. 시헌이 마음대로 하라고 했을 때 가장 먼저 고기를 시켰으며, 노래방 앞에서 기욱이 누구냐고 물어 온 학생이기도 했다.

“현금 영수증 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하은은 그 자리에서 초콜릿 바를 뜯었다.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파라솔에 성인이라 생각되는 몇몇 남성이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편의점 건물 옆으로 돌아들어 갔다. 벽에 기댄 하은은 익숙하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사람들이 지나갔지만, 교복을 입고 있다는 사실을 크게 신경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실제로 하은에게 말을 거는 사람 또한 없었다. 시헌은 말없이 게토레이를 마셨다. 건너편 골목에서 떠들고 있는 미아와 남학생들이 보였다. 담배를 끈 하은이 눈치를 보더니 말했다.

“솔직히 난 좀 그래.”

“…….”

시헌이 남학생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무렵 하은은 미아에게 시헌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부분 어디서 돈을 얼마나 썼니 뭘 샀니 하는 이야기였다. 하은은 그런 미아가 불편했다. 새로이 담배를 물은 하은은 반쯤 먹은 초콜릿 바를 내밀었다. 시헌은 끝을 조금 뜯어 입에 넣었다. 입안 초콜릿이 이온음료와 섞여 오히려 텁텁한 맛만 났다.

“같은 학교였거든. 쟤 장난 아니었어. 진짜.”

미아의 전 학교 친구라고 했다. 하은은 시헌의 앞에서 묻지도 않은 미아의 얘기를 했다. 전 남자 친구에게 돈을 뜯어먹고 찬 이야기, 친구의 남자 친구를 꼬여 바람피우게 한 이야기. 결코, 남자 친구인 시헌에게 할 말들은 아니었다.

“야! 너네 둘이 뭐 하냐!”

“어! 지금 갈 거야! 어쨌든, 그렇게 돼서. 전학 간 거거든.”

미아는 전 학교에서 여학생을 따돌렸던 모양이었다. 그게 잘못 걸려 학교 폭력으로 경찰 조사까지 받았다. 다행히 상대 학생의 부모님이 합의해 준 덕에 전학으로 끝났다고 했다.

“평범해 보이던데.”

“평범? 내가 예전 사진 보여 줄까?”

휴대폰을 하던 하은이 앨범을 뒤졌다. 하은의 휴대폰 너머로 미아와 찍은 사진이 있었다. 노란 머리에 진한 염색, 노래방과 사진 속 테이블 너머로 보이는 술과 담배들. 금방이라도 속이 보일 것 같은 짧은 치마는 중학생의 사진이 아니었다. 하은이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

“미친년이. 그 일 있고 조용히 지낸다더니 또 지랄은. 어이가 없어서.”

“그래서?”

시헌의 말에 하은이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다. 마지막 남은 초콜릿을 입에 구겨 넣은 뒤 근처 상자에 쓰레기를 버렸다. 가로등 밑에 버려진 종이 상자에는 하은이 버린 초콜릿 봉지 외에 온갖 쓰레기들이 가득했다.

“그냥. 미아한테 돈 좀 적당히 쓰라는 뜻이었어. 중학생이잖아.”

유독 중학생을 강조하는 하은의 말에 시헌이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말은 저렇게 해도 뒤에서 제 집안에 관한 얘기를 실컷 떠들었을 것이 틀림없었다. 시헌은 반쯤 남은 게토레이에 다시 입을 댔다.

“넌?”

“나? 하하, 난 그런 애 아냐. 아, 내 번호 없지?”

하은이 먼저 휴대폰을 내밀었다. 멀리 시끄럽게 떠드는 미아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시헌은 휴대폰 번호를 불렀다. 잠시 뒤 시헌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왔다.

“나중에 연락해.”

하은이 한발 먼저 여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갔다.

* * *

오피스텔 복도의 불이 켜졌다. 시헌은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거실 불이 켜져 있었다. 기욱이 방에서 나왔다. 평범한 옷차림, 아무 무늬도 없는 검은색 티셔츠를 입고 있는 기욱은 싱크대 쪽으로 다가갔다.

커피포트의 물이 시끄럽게 끓고 있었다. 기욱은 텀블러에 물을 부었다. 시헌은 태권도복이 담긴 가방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기욱이 거실 벽시계를 힐끗거렸다. 새벽 한 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학원을 갔다 올 시간은 이미 한참 전에 지나 있었다.

“요즘 늦게 들어오는 것 같은데.”

“어쩌다 보니.

기욱의 방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기본 벨 소리, 기욱은 귀찮다는 듯 혀를 찼다. 전화를 받으러 갈 생각이 없는지 텀블러의 커피를 홀짝였다. 뜨거운 커피 열기가 얕게 올라왔다. 화장실에 양말을 벗어 던진 시헌은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애가 걔야?”

“아니.”

“좋아하지도 않는데 왜 사겨.”

시헌은 기욱의 말에 입술을 깨물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닐 텐데. 기욱이 말하니 어딘가 모순이 있어 보였다.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시헌은 몇 번이나 대답을 생각했지만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미아와 사귄 이유? 그러게 왜 그랬을까. 굳이 따지자면 미아 때문은 아니었다.

서진이 미아를 좋아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단지 그뿐이었다. 다행히 기욱은 시헌의 대답을 재촉하지 않았다. 또 벨이 울렸다. 기욱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시헌은 전화의 상대가 여자일 것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적당히 해.”

“응.”

누가. 누구한테 할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시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방에 몸을 반쯤 밀어 넣었다. 그 순간 뭔가 생각난 듯 걸음을 멈춰 등을 돌렸다.

“형 있잖아, 여자들은 원래 그래?”

문에 몸을 반쯤 기댄 기욱은 책상에서 울리는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기욱이 전화를 받았다. 전화기 너머로 여성의 목소리가 들렸다. 지난번 여자와는 다른 사람이었다. 귀찮아하는 표정과 달리 여자를 향하는 기욱의 목소리는 달콤하기 그지없었다.

― 응. 나도 그래.

시헌은 기욱이 과연 몇 명의 여자에게 저 말을 했을지 궁금했다. 전화를 끊은 기욱은 근처 침대로 휴대폰을 내던졌다.

“대체로 그래.”

기욱이 책상에 풀어진 시계로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 학교 가잖아. 일찍 자.”

“잘 거야.”

“잘 자라.”

기욱이 책상에 앉았다. 형도. 무미건조하게 대답한 시헌은 등을 돌려 방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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