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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4 사람은 원래 죽어 (5/83)

Chapter. 4 사람은 원래 죽어

역에서 십 분 정도 떨어진 거리의 낡은 놀이터. 남자의 발길이 시헌의 배를 향했다. 남자의 억센 발길에 시헌은 억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바닥으로 쓰러졌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그런 시헌과 남자들을 바라봤으나 달리 신고하는 사람들은 없었다.

남자 하나가 시헌의 머리채를 잡은 채 시헌과 눈높이를 맞췄다. 남자에게 맞은 뺨이며 배가 아팠다. 시헌은 눈을 살짝 감았다. 남자들을 따라가기 전, 서진의 시선이 떠올랐다. 서진은 저에게 어떻게든 할 거란 기대를 걸었지만 사실 시헌은 아무런 대책이 없었다.

“으윽….”

단지 일이 커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뿐이다. 성인 남자를 상대로 싸울 마음은 처음부터 없었다. 이어지는 다른 남자의 발길질에 시헌의 팔이 부딪혔다. 시헌은 팔이 부러지지 않으면 다행이겠군, 하고 생각했다.

“야야, 적당히 해둬라. 애 상대로 이게 뭐냐.”

“와, 그렇게 팼는데. 비명 하나 안 지르는 거 봐라. 독하다 독해. 요즘 애들 다 이러냐?”

머리가 어지러웠다. 시헌은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넘어지면서 돌에 부딪힌 모양인지 머리에서 피가 나왔다. 입에서는 모래 섞인 맛이 났다. 멀리 주머니에서 떨어진 휴대폰이 보였다. 시헌의 휴대폰에서 불빛이 나고 있었다. 시헌이 휴대폰을 집어 들려 하자 그 모습을 본 다른 남자가 선수를 쳐 시헌의 휴대폰을 낚아챘다.

“어? 전화 오는데?”

“박기욱이 누구야?”

“큭큭, 받아 봐.”

남자들의 말에 시헌이 가볍게 실소를 터트렸다. 옆에 있던 남자가 다시 시헌의 팔을 발끝으로 짓눌렀다. 남자들끼리 통화를 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발에서 손을 뺀 시헌은 기욱이 어떻게 알고 전화를 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현정이 말한 거겠지 싶었다. 배를 움켜쥔 시헌은 근처에 있는 가로등에 몸을 기대며 힘겹게 일어났다.

“야.”

“얘 뭐라는 거야! 야! 돌았냐?”

“큭큭, 하하하하!”

시헌은 손등으로 피를 닦았다. 밤이라 잘 보이지 않았으나 푸른색 옷소매가 붉게 물들어 갔다. 피가 묻은 채로 머리를 만지자 머리가 눌렸다.

남자들은 난데없이 웃는 시헌을 미친 사람처럼 바라봤다. 한참 만에 웃음을 그친 시헌은 고통에 기침을 하며 입가에 고인 피를 퉤― 하고 내뱉었다.

“너넨 인제 다 뒤졌다.”

* * *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사이 다시 기욱에게 전화가 온 모양이었다. 남자 하나가 전화를 받았다.

― 야, 너 뭐냐?

― …….

― 누구냐고!

― 어디냐.

남자의 말을 듣던 기욱이 한참 만에 침묵을 깼다.

― 하, 이거 봐라. 어딘지 알면 찾아오게?

― 어디냐고.

같은 말만 반복하는 기욱에 남자들은 어이가 없었다. 한 남자가 시헌과 있는 장소를 불렀다. 시헌은 긁힌 팔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멍하니 바라봤다. 뼈가 부러진 것 같지는 않지만 꿰매야 할지도 몰랐다. 가끔 말이다.

뉴스에서 맞아 죽는 사람들 얘기가 나오던데 정말 가능할까? 시헌은 별생각이 다 들었다. 그래도 내린 결론은 저는 죽지는 않을 것이었다. 저 병신 같은 놈들이 자신들의 위치를 기욱에게 불렀기 때문이다.

얼마나 시간이 더 지났을까? 시헌의 시야가 흐려질 무렵 남자들의 목소리가 시헌의 머릿속을 울렸다.

“야! 왔다!”

분위기상 전화를 한 기욱이라는 것을 알아본 한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기욱이 진짜로 올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허둥대는 남자들의 목소리에 시헌이 눈을 크게 떴다. 기욱과…….

“야! 네가 여길 왜… 으윽!”

시헌은 배를 잡고 헛기침을 했다. 놀란 서진이 시헌에게 뛰어가려 했으나 기욱이 그런 서진의 팔을 붙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가서 경찰 불러와.”

“그래도 시헌이는…….”

“하하, 씨발! 불러! 좆같은 새끼들! 경찰 부르라고!”

기욱은 시헌을 때린 남자들을 힐끗 보더니 다시 서진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기욱을 본 서진이 알겠다고 대답한 뒤 오는 길에 있었던 파출소 쪽으로 뛰어갔다. 서진이 사라진 기욱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었다. 후, 기욱이 내뱉은 담배 연기가 가로등의 불빛을 타고 허공으로 올라갔다.

남자 하나가 기욱을 향해 주먹을 날렸다. 남자의 주먹이 정확히 기욱의 얼굴을 맞으며 기욱의 손에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남자들의 환호 소리가 들려왔다. 기욱은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아쉽다는 듯 바라보며 발끝으로 담배를 지졌다. 그리고는 바지에 떨어진 담뱃재를 툴툴 털었다.

남자들의 환호가 채 끝나가지도 않을 무렵 기욱의 주먹이 남자의 명치를 가격했다. 분명 기욱보다 덩치가 큰 남자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꺽꺽대며 순식간에 무릎을 꿇었다.

“커헉…!”

“담배 피울 때는 말야.”

“…억…!”

“개도 안 건든다던데.”

“자, 잠깐… 크윽…!”

남자가 손을 뻗으며 그만하자고 했지만, 기욱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기욱은 엄지 끝으로 입술에 묻은 피를 닦아 낸 뒤 남자의 몸을 발로 찼다. 남자는 제대로 된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쓰러졌다. 기욱은 남자의 등에 발을 올린 채 새 담배를 입에 물었다. 입안에서는 담배 맛 대신 피 비린 맛이 났다.

“나도 말야. 경찰 끼는 건 별로거든.”

“그게 무슨…….”

“옮기자고.”

기욱이 반쯤 피운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걸며 자리를 옮길 것을 제안했다. 기욱과 남자들 사이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싸움 난 거야?”

“경찰 불러야 하지 않아?”

주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순식간에 제압당한 친구를 본 남자들 또한 자리를 옮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기욱이 시헌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시헌은 됐다며 고개를 젓고 제 발로 일어났다. 기욱이 말하는 장소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더 떨어진 곳이었다.

번화가라고는 볼 수 없는, 군데군데 오래된 낡은 건물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누가 봐도 정상이 아닌 불법 매춘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다. 더 안으로 들어가자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단지가 나왔다.

무작정 기욱을 쫓아온 남자들도 이건 아닌 것 같아 등을 돌렸다. 기욱은 아파트 입구 옆 공터에 놓여 있는 건축 자재에 몸을 살짝 기댔다.

“내가 말했잖아.”

“…….”

“경찰 끼는 거 안 좋아한다고.”

기욱은 다 피운 담배를 껐다. 뭐? 안쪽 아파트 입구에서 또 다른 남자들이 걸어 나왔다. 시헌을 때린 남자들과는 사뭇 다른, 한눈에 봐도 위험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기욱의 옆에서 옷으로 머리에 흐르는 상처를 누른 시헌과 남자들의 눈이 맞았다.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남자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올렸다.

“하하, 내가 말했잖아. 니들 다 좆된 거라고.”

* * *

자정이 조금 지났을 무렵 벤치에 앉아 있는 시헌과 기욱을 사람들이 힐끗거렸다. 한 여대생이 시헌의 상태를 보더니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어머, 세상에. 다친 거 아냐? 괜찮니?”

약간 술을 먹은 한 여대생이 머뭇대며 친구와 함께 다가왔다. 시헌의 옆쪽에 앉은 기욱이 여자의 손을 살짝 밀어냈다.

“병원 갈 겁니다. 괜찮아요.”

“아. 하하. 네.”

민망해진 여자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기욱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아윽!”

기욱이 적셔 온 손수건으로 시헌의 머리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팔을 만지자 시헌이 인상을 찌푸리며 소리를 질렀다. 그사이 현정에게 전화가 왔었다.

― 시헌아! 괜찮아? 서진이한테 들었어. 기욱 오빠가 거기 갔다면서?

― 하아, 지금 옆에 있어. 괜찮아. 윽! 아파.

― 너 괜찮은 거야?

― 좀. 그냥 그래. 지금은 그러니까 이따 문자 보낼게.

― 알았어. 정말이지.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

시헌이 전화를 끊었다. 주머니에 넣으려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욱이 시헌의 휴대폰을 대신 주워 주었다. 시헌이 다친 팔을 힘겹게 내밀어 휴대폰을 받았다. 기욱이 시헌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누르면 아파?”

“윽! 형 그만해. 나 진짜 아파.”

“부러진 곳은 없는 것 같은데. 병원 가자.”

“싫어.”

병원은 싫다. 특히 병원 특유의 냄새가 가득한 응급실은 더더욱 싫었다. 자정이 넘은 마당에 응급실 말고 문을 연 병원이 있을 리 없었다.

시헌은 병원을 가더라도 차라리 내일 아침 동네 병원을 방문하겠다고 했다. 게다가 혹시 하룻밤 자고 나면 나을지도. 시헌의 변명에 기욱은 시헌의 찢어진 이마를 손가락질했다.

“형, 서진이랑…….”

“잠깐만.”

기욱과 시헌의 실랑이는 기욱에게 온 전화로 인해 잠시 중단됐다. 기욱은 시헌에게 가지고 있던 손수건을 준 뒤 통화를 하러 자리를 피했다. 일 분여 뒤 기욱의 손짓과 함께 경찰과 서진이 다가왔다. 경찰의 손에 들린 무전이 시끄럽게 울렸다. 시헌의 상태를 본 경찰이 근처 나무에 몸을 반쯤 기댄 기욱에게 물어 왔다.

“신고받고 왔습니다만. 어떻게 된 겁니까?”

분명 맞고 있다는 신고였는데 공터에는 벤치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대학생 무리 외에 수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대학생에게 다가가 폭력 현장을 보지 않았냐고 물어봤지만, 그들은 본 적이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다시 돌아온 경찰이 기욱을 바라봤다. 나무에서 몸을 뗀 기욱이 시헌의 손을 붙잡아 이마를 좀 더 세게 눌렀다. 기욱이 준 손수건은 이미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시헌의 옷과 벤치에는 피들이 흥건했다. 머리뿐 아니라 넘어지면서 긁힌 상처에서도 피가 나고 있었다.

밤이지만 아스팔트 바닥에 젖은 피들이 검붉게 물들어 주변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피를 흘리는 시헌과 그 모습을 보고 있는 기욱은 그 상황을 기분이 나쁘다거나 불편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헌이야 조금 어지럽긴 했지만 자고 일어나면 될 일이었고, 기욱은 고작 이 정도 피를 흘린다 해서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의 뻔뻔한 태도를 본 서진은 기가 막혔다. 기욱은 손가락에 묻은 시헌의 피를 살짝 보더니 한숨을 쉬며 경찰에게 말했다.

“동생인데요. 친구랑 놀러 왔다가 다른 학교 아이들이랑 싸움이 좀 난 모양입니다.”

“학생이, 중학생이랬나? 이야. 심하게 싸웠네. 학생, 병원 가야겠어.”

병원이라는 말에 시헌은 경찰 대신 기욱을 노려봤다. 기욱은 제가 한 말이 아니라며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사이 옆에 있는 경찰에게 또 다른 무전이 오고 있었다. 경찰들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두 경찰은 사건 해결보다는 한시라도 이 자리를 빨리 뜨고 싶어 했다.

“그래서? 어떻게. 고소라도 하실 겁니까? 근데 서로 싸운 거면 그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텐데…….”

경찰이 공원 근처 CCTV를 힐끗거렸다. 일이 늘어나는 건 절대 사양이었다. 경찰의 말에 서진이 끼어들었다.

“싸운 게 아니라 맞은…!”

가로등 밑에 선 기욱과 서진의 시선이 맞았다. 입꼬리를 살짝 올린 기욱이 입가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쉿.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서진은 기욱의 행동에 뭐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기욱은 이상했다. 시헌에게 서윤과 기욱이 만난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은 것도 그 알 수 없는 위화감 때문이었다. 그래도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서진이 고개를 돌려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은 기욱의 행동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마침 무전이 울려 경찰은 서진의 말을 전부 듣지 못했다. 경찰이 무슨 말을 했냐며 되묻자 기다렸다는 듯 기욱이 끼어들었다.

“뭐, 이 나이 때 애들이 다 그렇지 않습니까.”

기욱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으며 담배를 입에 물었다.

“정말이지. 저희도 골치 아파 죽겠습니다. 어쨌든 날이 밝는 대로 본인들끼리 해결하시는 거로 알겠습니다.”

“그래야죠.”

계속되는 무전에 경찰이 금방 간다는 답을 남기며 등을 돌렸다. 이대로 끝일 거란 생각에 서진이 다시 소리쳤다.

“자, 잠깐만요! 싸운 게 아니라요! 맞은 거라고요! 학교 친구들도 아니고 그 사람들 성인…….”

서진의 외침에 등을 돌린 경찰이 기욱을 바라봤다. 근처 쓰레기통에 담배를 버린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요즘 애들 얼굴만 보고 구분하는 게 어디 쉬운 일입니까. 당황해서 정신이 없었던 모양이죠.”

“지금 그걸 말이라고……!”

서진은 참을 수 없다며 기욱을 노려봤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동생이 맞았는데 어떻게 저런 대답을 할 수 있는 거지? 서진은 화가 날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서진을 내려다보는 기욱의 시선은 냉담하기만 했다. 이 남자.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의 경찰 중 꽤 연륜이 있어 보이는 경찰 한 명이 마지못해 기욱의 앞으로 다가왔다. 기욱이 쯧, 하고 혀를 찼다.

“당신. 진짜 학생의 형 맞습니까?”

기욱이 새 담배를 물려 하자 경찰이 기욱의 손을 붙잡았다. 대답이 들려온 것은 벤치 쪽이었다.

“형 맞아요.”

“학생. 사실대로…….”

“우리 형 맞다고.”

“팀장님, 그만 가시죠.”

무전이 급했던 터라 다른 경찰이 그를 끌어냈다. 마지못해 끌려 나온 경찰이 목을 살짝 긁적이며 사과를 했다.

“어쨌든 말입니다. 저희도 일 복잡하게 만드는 걸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자, 잠깐…….”

“둬.”

“야, 박시헌. 너 지금 그게 말이 되는…….”

“두라고.”

기욱이 그럴 줄 알았다며 살짝 웃었다. 서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하다.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기욱도, 자기 일임에도 그런 거짓말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시헌도 이상했다. 너무나 당연해 마치 제가 이상한 사람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시헌이 어딘가 남다른 구석이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이런 행동은 아무리 생각해도 비정상이었다. 그래. 정상이 아냐. 서진의 등 뒤로 기욱이 다가왔다. 흠칫, 놀란 서진이 기욱을 올려다봤다.

“마실 거라도 사 올게.”

건너편 길목에 편의점이 보였다.

“게토레이.”

기욱이 서진을 힐끗거렸다. 하, 서진은 기가 막힌 걸 넘어서 허탈해졌다.

“같은 걸로요.”

기욱이 간 뒤 서진이 시헌의 옆에 앉았다. 시헌의 이마에서는 여전히 피가 나오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15살의 어린 나이. 사람이 눈앞에서 이렇게 피를 흘리는 모습은 처음 봤다. 서진은 이렇게 계속 피를 흘리다가는 정말 시헌이 죽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머리도 다친 것 같은데 말이다. 시헌은 그런 서진의 반응이 귀엽기만 했다. 이렇게 걱정도 받아 보고. 시헌은 제가 크게 다치거나 하면 서진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했다. 울어 줄까? 그 생각을 하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괜찮아? 병원 갈 거지?”

시헌에게 있어서 서진은 그 정도의 존재지만 그래도 병원이 싫은 건 그대로였다. 시헌이 고개를 저었다. 이미 기욱이 준 손수건은 붉게 물들어 시헌의 이마에서 흐르는 피는 흡수되지 못한 채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형이 부러진 곳은 없댔으니 괜찮아.”

“팔 얘기가 아니잖아.”

서진이 잔뜩 부은 시헌의 팔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서진이 슬쩍 손을 대자 시헌이 아프다며 인상을 구겼다. 이렇게 아픈데. 시헌의 사정을 모르는 서진은 시헌이 왜 이런 데서 고집을 부리는지 알 수 없었다.

“병원 가자. 같이 가 줄게.”

“응.”

시헌이 어린아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병원은 싫지만. 서진이 같이 가 준다면 괜찮을지도 몰랐다. 서진의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서윤이었다.

서진이 잠시 통화를 하고 오겠다며 안쪽으로 뛰어갔다. 그사이 음료수를 사 온 기욱이 다가왔다. 기욱이 음료수 뚜껑을 딴 뒤 시헌에게 내밀었다. 목 너머로 찬 이온음료가 빠르게 넘어갔다.

“병원 가기 싫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더니.”

“…….”

“별일이네.”

시헌이 반쯤 마신 이온음료를 벤치 옆에 내려놓았다.

“엿듣지 마.”

“뭘. 우연히 들린 것뿐이야.”

앉아 있는 시헌에게로 몸을 숙인 기욱이 시헌의 옆에 놓인 음료수 뚜껑을 닫은 뒤 시헌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헌아. 병원 가자.”

* * *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았다. 시헌의 엉망이 된 옷을 보더니 간호사가 와서 휠체어에 앉을 것을 제안했으나 시헌은 싫다며 고개를 저었다. 팔이 아플 뿐 걸을 수 없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미 시간은 새벽 한 시 반이 넘어갔다.

간단한 검사를 마친 뒤 두꺼운 유리문 앞에 섰다. 보호자용 네임택을 목에 건 기욱과 서진의 눈이 맞았다. 응급실 규정상 진료실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한 명뿐이었다. 기욱의 휴대폰에서 전화가 왔다. 화면을 살짝 열어 보자 서윤이었다.

후우, 얕은 한숨을 쉰 기욱이 목에 걸린 네임택을 서진의 앞으로 내밀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서진이 네임택을 받았다. 네임택을 쥐고 있는 기욱의 커다란 손 위로 서진의 손이 겹쳐졌다. 서진에게 네임택을 건넨 기욱은 이내 자연스럽게 전화를 받으며 응급실 밖으로 나갔다.

“박시헌 환자분!”

안쪽에서 시헌의 이름을 부르는 간호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살면서 응급실이라는 곳을 처음 들어간 서진은 어쩔 줄 몰라 하는 눈치였다. 막 들어온 중환자가 있었는지 문이 열린 소생실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났다.

시헌은 바닥에 떨어진 피를 정리하고 있는 간호사를 보고 있는 서진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그쪽이 아니라며. 서진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시헌이 신기했다. 그래도 조금은 신기할 법도 한데 말이다. 차트 기록을 위해 간단한 대화를 하고, 따로 처치해 줄 선생님이 금방 올 거란 말을 남긴 뒤 여의사는 다른 환자를 받았다.

“밖에서 기다릴게.”

“잠깐, 서진…….”

뒤늦게 시헌이 서진을 향해 팔을 뻗었으나 서진은 이미 나가 버린 뒤였다. 시헌은 홀로 환자용 의자에 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금방 온다던 의사는 한참 지나도 오지 않았다.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한 시헌이 커튼이 처진 벽 한쪽에 몸을 기댔다. 잠이 왔다. 시헌은 잠시 눈을 감았다. 커튼 너머로 시헌의 초진을 봐 준 여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인턴이 오기로 한 거 아니었어요?”

“하하, 이래저래 일이 있어서.”

“…이 하실 만한 일은 아니신 것 같은데…….”

“그게 사실…….”

여의사와 남자 의사가 잠시 나가 밖에서 떠들었다. 아무렴 상관없겠지. 눈을 감고 있다 보니 졸음이 왔다. 피를 흘려 어지럽기도 했고, 한 시까지 안 자니까 졸리기도 했다. 차르륵, 커튼이 걷히며 수술복 차림의 남자가 들어왔다. 남자의 목에는 아직 풀지 못한 수술용 마스크가 그대로 걸려 있었다. 그는 안쪽에 기대 자고 있는 시헌을 발견하지 못한 듯 커튼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어? 박 쌤! 환자 어디에……. 이런.”

“무슨 일 있어요?”

“아니. 아니야.”

남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저었다. 커튼 사이로 벽에 머리를 기대 잠이 들어 있는 시헌이 보였다. 책상 모서리에 몸을 살짝 기댄 남자는 이내 허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교수님 아들이 다쳐서 병원에 왔다길래 수술이 끝나기 무섭게 내려왔더니 말이다.

대충 보고를 들어 심한 상태가 아니라는 건 알았지만 이건 너무 여유가 있었다. 남자는 의자를 꺼내 잠들어 있는 시헌의 앞에 앉았다. 남자의 움직임에 잠에서 깬 시헌이 눈을 떴다. 습관적으로 눈가를 비비려던 시헌은 따끔거리는 팔에 인상을 찌푸렸다.

“팔 좀 보자.”

남자의 말에 시헌이 소매를 걷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가 한 손의 처치를 하는 동안 시헌은 벽에 걸린 시계를 살폈다. 오 분밖에 지나지 않은 시계를 보니 허무해졌다. 한 시간은 잔 것 같은데 말이다.

시헌은 익숙하게 처치 준비를 하는 남자의 모습을 살폈다. 목에 걸린 수술용 마스크와 수술용 두건. 늘어진 수술복과 가슴 주머니에 신분증 대신 잔뜩 꽂혀 있는 물건들. 슬쩍 보고는 아무렇지 않게 팔에 주사를 놓는 모습은 시헌이 들은 것과는 달랐다.

저 모습은 아무리 봐도 인턴이 아니었다. 레지던트 초년 차? 그런 것치고는 남자의 차림이 맞지 않았다. 수술 스케줄이 없는 이 새벽에 의사가 들어갈 만한 수술이라고는 응급밖에 없었다. 그것도 꽤나 급한.

일반 수술에서도 잘 껴 주지 않는 초년 차가 응급을 들어갈 리 없다. 고년차들은 주로 전문의 시험이나 외래 진료로 바쁘다. 게다가 고년차가 이런 새벽에 인턴이나 할 만한 일을 지원해 내려올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면 펠로우나 조교수 정도 되겠군.

옷 색이며 차림, 응급 수술이라는 걸 생각해 볼 때 외과계열. 특이 외상계열일 확률이 높았다. 외상외과군. 시헌은 제 팔을 꿰매는 남자를 보고 확신했다.

남자가 팔을 뻗어 누군가 멋대로 두고 간 물을 마셨다. 몇 시간, 혹은 며칠이 지났는지도 모르는 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의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물 안에서 텁텁한 맛이 났다. 남자의 시선이 시헌이 대충 올려 두었던 게토레이에 닿았다. 시헌이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남자에게 게토레이를 건넸다.

“어. 고맙다.”

남자가 반쯤 남은 게토레이를 순식간에 비웠다. 게토레이를 마신 뒤 다시 의자에 주저앉은 남자는 다리를 꼬며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도 급해 보이지 않고, 저도 피곤하니 천천히 해도 괜찮겠지, 하고 생각했다. 어쨌든 남자는 좀 쉬고 싶었다.

“인턴이 온다고 들었는데요.”

남자는 가볍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저건 또 어디서 들은 거야. 남자는 시헌의 이마를 보자며 의자를 끌어당겼다. 머리 주변이 피로 인해 잔뜩 눌려 있었다.

“내가 인턴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시헌은 거즈를 챙기는 남자를 손가락질했다. 나? 남자는 자신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보면 알아요.”

남자는 재미있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내가 병원 생활만 올해로 8년째인데. 너처럼 당돌한 녀석은 본다. 무섭지도 않냐?”

새벽에 응급실에 들어온 아이들은 상처의 크기와 상관없이 대부분 겁에 질려 있기 마련이었다. 팔을 꿰매는 모습을 당연하다는 듯 구경하며 아무렇지 않게 졸기까지 하는 시헌은 남자가 보기에도 평범해 보이지는 않았다. 시헌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 대답은 남자를 다시 놀라게 했다.

“무서워해야 할 이유가 있어요?”

“하, 이거 봐라. 야. 너 여기서 죽어서 나간 환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

어린애한테 말이 좀 심했나. 남자가 멋쩍게 고민하던 찰나 시헌이 먼저 입을 뗐다.

“사람은 원래 죽어요.”

“…….”

“의사는 모든 사람을 살리지 못해요.”

“…….”

“만약 그게 가능했다면 그건 이미 신이라고 불려야겠죠. 그러니 병원에서 사람이 죽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닌걸요…… 라고 우리 집에선 자주 얘기해요.”

하, 남자―임정혁은 기가 막혔다. 시헌의 집안은 병원 내에서도 제법 유명했다. 말로만 듣던 의사 집안. 남자가 일하고 있는 J대 병원장인 아버지, 외과 의사이자 교수인 어머니. 이름만 대면 알 법한 의사들이 시헌의 친척들이었다.

그중에는 현 대통령의 주치의도 있다고 했다. 평범한 집안에서 의사니 하는 전문직은 저 하나밖에 없는 정혁이 들으면 허무한 이야기들뿐이었다. 그중에서도 시헌의 가족, 일주일에 한 번 외래 교수로 수업을 나가는 정혁은 시헌의 형인 기욱을 알고 있다.

누나인 하연은 몇 번인가 실습차 병원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어딘가 정상이 아닌 것 같다. 분명 의사들만 모여서 그런 걸 거야. 하연과 기욱을 직접 본 적이 있는 정혁과 동료 의사들끼리 농담으로 주고받았던 말이었다. 정혁은 그 말이 결코, 틀리지 않을 수도 있다고 짐작했다.

“뭐, 저랑은 상관없는 얘기지만요.”

혼잣말하듯 중얼대는 시헌의 말은 오히려 정혁의 긴장을 풀게 했다. 누가 의사고, 환자인지 알 수가 없었다. 처치를 마친 정혁이 컴퓨터 마우스를 움직였다. 까맣던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이름이 뭐랬더라. 정혁은 차트에 적혀 있는 시헌의 이름을 눈으로 힐끗거렸다.

“시헌인 의사 안 하려고?”

“누나랑 형이 의산데 뭐 하러 해요.”

그렇겠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집안이라면 형제 중 2명이 나란히 이름 있는 의대에 들어간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런 진 모르겠지만 시헌은 의사를 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시헌 본인의 생각이지만 말이다. 처치가 끝나 갈 무렵 안쪽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커튼이 열리자 정혁이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살짝 숙였다.

“아, 박 교수님.”

“임 선생. 늦은 시간까지 시헌이 때문에 고생시켜서, 미안해.”

시헌은 의자를 살짝 돌려 엄마를 올려다봤다. 살짝 팔짱을 낀 정혁은 시헌의 엄마를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시헌과 엄마 사이에 묘한 침묵이 흘렀다. 엄마가 시헌의 상처를 보더니 이내 정혁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엄마가 무얼 궁금해할지, 무슨 이야기를 할지는 뻔했다. 그러나 보통 그 전에 자식 걱정이 먼저 아닌가? 아무리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해도 말이다. 정혁은 혹시 시헌이 서운해하면 어쩌나 걱정했으나 시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커튼 너머로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정혁은 엄마에게 시헌의 처치에 관해 설명했다. 고개를 숙인 정혁은 오래 일을 하다 보니 참 별일이 있다고 하고 자리를 피했다.

“아.”

도무지 게임을 깰 수가 없다. 시헌은 벌써 몇 번이나 막힌 마지막 스테이지에 머리를 긁적이며 신경질적으로 휴대폰을 닫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튼을 치고 밖으로 나가자 정혁이 간 뒤 다른 또 다른 의사와 대화 중인 엄마가 있었다.

“시헌아 왜?”

“나가 있을게요.”

엄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엄마와 대화 중인 의사가 같이 가 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내심 걱정했으나 사안이 사안이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대화를 이어 갔다. 시헌은 응급실 복도 주변을 둘러봤다. 당연하게 앉아 있어야 할 서진이 없었다.

시헌이 하염없이 복도를 헤매고 돌아다니자 몇몇 사람들은 길을 잃은 게 아닌가 걱정 어린 시선으로 시헌을 쳐다봤다. 한참 만에 밖에 나갔다 돌아온 서진을 발견했다. 서진은 처치를 끝마친 시헌의 모습을 살폈다. 상처는 괜찮아 보였지만 옷은 엉망이었다.

“걱정했잖아.”

시헌의 목소리였다. 서진은 어이가 없었다. 누나와 통화를 하고 온 것뿐인데 누가 누구를 걱정하나 싶었다. 정작 걱정을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라 환자인 시헌이었다. 시헌과 서진은 응급실 밖 벤치에 앉았다.

“괜찮아?”

“응.”

시헌은 이내 괜찮지 않다고 대답할걸, 하고 후회했다. 좀 더 걱정을 받는 편이 나았을지도. 대화가 끊긴 걸 아쉬워한 시헌은 화젯거리에 대해 생각했다.

“누나는?”

“지금 너희 형이랑 있어.”

시헌의 인상이 살짝 구겨졌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떨어지라고 하고 싶었으나 피곤해서 그런지 뭐라 말할 기운이 나지 않았다. 시헌은 멋대로 괜찮을 거라며 자기 위안을 했다.

서윤이 서진의 누나라는 사실을 기욱이 모를 리 없었다. 시헌은 아무리 막 나가는 형이지만 친구의 누나한테까지 손을 대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했다. 그리고 시헌이 그날 그 생각이 얼마나 그릇된 생각이었는지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려야만 했다. 가운 차림의 엄마가 밖으로 나왔다. 서진이 살짝 일어나 시헌의 엄마에게 인사를 했다.

“네가 서진이구나?”

“안녕하세요.”

“그래. 기욱이한테 대충 얘기 들었어. 집이 어디라고?”

비싸 보이는 외제차 한 대가 응급실 넘어 야외 주차장에 놓여 있었다. 시헌은 익숙하게 차 앞으로 다가갔다. 자연스럽게 태워다 주겠다는 이야기를 하자 서진은 머뭇거리며 시헌의 옆에 섰다. 시헌이 서진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너 어차피 막차 끊겼잖아.”

차 문이 열리고 시헌이 차 안에 탔다. 엄마는 운전석에 앉기 무섭게 가운을 벗어 조수석 쪽에 접어 놓았다. 서진이 조심스럽게 집 주소를 이야기했다. 차 안으로 새벽 뉴스 라디오가 흘러나왔다. 골목 근처에 도착한 서진이 여기서부터는 걸어갈 수 있다며 대답했다. 서진이 뒷문을 열고 내렸다.

“내일 보자.”

“응.”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 문이 닫히고 천천히 왔던 골목을 빠져나와 3차선 도로로 들어갔다. 빨간불에 차가 잠시 멈췄다. 엄마가 라디오를 껐다. 차 옆으로 앰뷸런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피곤한지 핸들에 몸을 살짝 기댄 엄마가 입을 열었다.

“시헌아. 난 네가 고등학교도 이상한 데 갈까 봐 하연 누나랑, 아빠랑 얼마나 걱정인 줄 아니?”

시헌의 싸움을 말하는 것이었다. 싸움이라고 하기보다 일방적으로 맞은 거지만. 엄마에게 그런 사실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시헌은 엄마의 잔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아, 기욱이랑 같이 살면 좀 달라질 줄 알았건만. 엄마가 무슨 말 하는지 알지?”

모를 리가 없었다. 오랜 집안 의사 카르텔로 굳어진 아빠의 집안 못지않게 엄마의 집안 또한 내력이 좋은 편이었다. 평소라면 끝내 한마디도 하지 않을 시헌이 입을 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서진을 건드리는 것만큼은 넘어갈 수 없었다.

“서진이 공부 잘해.”

“엄마가 그 말을 하는 게 아니잖…….”

“누나가 H대 간호학과 수석이야.”

“하아, 그래 알았다. 어쨌든 다음부터 조심 좀 하렴.”

차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문에 턱을 괸 시헌은 그녀가 제 엄마지만 참으로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 * *

평소보다 학원이 조금 일찍 끝난 시헌은 가방을 멘 채 골목으로 들어갔다. 일찍이라고 해도 고작 30분이었다. 9시가 넘어갈 때까지 아무것도 먹지 못한 시헌은 오늘따라 배가 고팠다. 팔 한쪽에는 가벼운 보호대가 차져 있었다.

며칠 후 다시 병원을 찾자 당분간 보호대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제안 받았다. 왼팔을 다친 게 불행 중 다행이었다. 가방을 멘 채 집 근처 사거리를 헤매고 있던 시헌은 뭔가를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에 골목 안쪽으로 들어갔다.

술집이며 음식집들이 늘어진 골목가, 안쪽으로는 낮은 주택가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시헌은 생각 없이 거리를 걸었다. 뭔가 먹긴 먹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급하게 먹고 싶은 건 아니었다. 낡은 가로등이 줄지어진 골목 사이로 묘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남학생, 교복을 입은 남학생들이었다. 싸우고 있는 듯한 모습에 몇몇 사람들이 힐끗거리며 그들을 바라봤으나 신고를 하거나 다가가는 이들은 없었다. 골목 사이에 선 시헌은 가로등 밑에 선 남학생들을 살폈다. 익숙한 얼굴, 그리고 익숙한 풍경이었다. 시헌은 한숨을 쉬며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씨발, 너네 뭐 하냐.”

남학생들 사이에 있던 은소의 눈이 커졌다. 시헌은 메고 있던 가방을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새벽에 응급실에 간 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건만 말이다. 시헌을 알아본 남학생 한 명이 인상을 구겼다.

저 새끼 대학생이랑 싸웠대. 응급실에 간 후 다음 날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났다. 소문이 퍼지게 된 경위는 알 수 없었으나 범인이 누군지 짐작은 할 수 있었다. 싸운 게 아니라 맞은 거지만. 시헌은 그 사실을 정정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거짓된 소문이라 할지라도 믿으면 진실이 되는 법, 과장된 소문이 퍼진다 해도 해가 될 건 없다고 느꼈다.

“기은소. 너 운 좋은 줄 알아라.”

남학생 하나가 은소의 어깨를 강하게 치고 지나갔다. 메마른 몸은 또래 남자의 가벼운 스침에도 불구하고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시헌은 바닥에 내려놓은 가방을 어깨에 살짝 걸쳤다.

“야.”

“…….”

시헌의 부름에 남학생들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돌렸다. 수적으로 남학생들 쪽이 훨씬 우세했지만 시헌은 그런 남학생들이 무섭지 않았다. 무서워할 이유도 없었다.

“한 번만 더 내 앞에서 은소 건들면 다 뒤진다.”

“니가 뭔데……!”

“건드려라.”

“…….”

“나 두 번 말하는 거 존나 싫어한다.”

화를 참지 못한 남학생이 시헌에게 덤벼들려 하자 옆에 있던 다른 남학생이 그를 말렸다. 1학년, 학교 복도에서 나름 힘 좀 썼다는 아이들과 아무렇지 않게 싸우며 맨손으로 유리를 깨고도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던 시헌의 모습을 눈앞에서 지켜본 남학생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태권도를 다녔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난 뒤부터 학교에서 시헌을 건드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친구들의 만류에 남학생이 신경질을 내며 자리를 피했다. 가방을 바로 멘 시헌은 골목 넘어 번화가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밥 먹자.”

은소는 허탈해졌다. 박시헌, 특이한 녀석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번 저를 구해 주는 시헌이 은소는 마음에 들었다. 시헌은 성격이라고 하지만 글쎄? 은소는 단순히 성격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느꼈다.

시헌도 그 사실에 아주 공감을 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단지, 무엇이 저를 움직이게 하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을 알기에는 두 사람은 아직 너무 어렸다. 시헌은 골목에 들어오기 전 봤던 가게에 대해 생각했다. 시헌의 재촉에 지갑을 확인한 은소가 곤란하다며 대답했다.

“저기……. 나 돈 없는데.”

조명을 등진 시헌은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은소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이내 아무렇지 않게 등을 돌렸다.

“뭐 해? 안 오고.”

시헌의 재촉에 은소가 바닥에 떨어진 가방을 챙겨 시헌에게로 뛰어갔다. 시헌은 근처 설렁탕 가게로 들어갔다. 24시 설렁탕, 어디에나 있을 법한 흔한 가게의 이름이었지만 늦은 시간 중학생이 들어가 밥을 먹을 만한 가게라고 보기에는 좀 어색한 구석이 있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또한 대부분 나이가 많은 아저씨들이나 혹은 간혹 있는 대학생들이 전부였다. 교복을 입은 시헌과 은소는 누가 봐도 한눈에 띄었다. 나이가 많은 아주머니 한 분이 다가오자 시헌은 자연스럽게 주문했다.

메뉴판도 없는 테이블에서 뭘 주문해야 할지 몰라 머뭇대던 은소는 어쩔 줄 몰라 하며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이 마지못해 대신 주문해 줬다.

“그냥, 설렁탕 두 개 주세요.”

은소는 민망한 마음에 물만 벌컥 마셨다. 막 정수기에서 따라 플라스틱병에 담긴 물은 미지근했다.

“무섭지 않아?”

“뭐가?”

테이블 밑으로 휴대폰을 만지던 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아까. 애들은 여섯이고 넌 하나잖아.”

시헌은 그게 무서워해야 할 이유인가 잠시 고민했다. 인원이 많다고 무서워해야 하는 건 대체 무슨 논리인 거지? 시헌의 사고로는 은소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은 개미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개미 한 마리가 여섯 마리가 됐다 해서 딱히 없던 무서움이 생기지는 않았다.

시헌은 그런 단순한 사실을 일일이 설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이내 아무렇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별로.”

남학생들이 무섭냐, 무섭지 않으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시헌은 테이블 위에 놓인 물수건을 은소에게 내던졌다. 물수건을 받아 든 은소가 영문을 알 수 없어 했다.

“맞고 다니지 마. 재수 없으니까.”

시헌은 손끝으로 뺨 근처를 살짝 손가락질했다. 뺨? 은소가 손으로 뺨을 살짝 닦았다. 넘어지면서 얼굴에 기름이나 뭔가가 묻은 모양이었다. 물수건으로 뺨을 닦자 검은 때가 묻어 나왔다.

“알고 있으면 말 좀 해 주지.”

“방금 말했잖아.”

“어쨌든 구해 줘서 고마워.”

설렁탕이 나왔다. 배가 고팠던 시헌은 곧장 밥에 국을 엎었다. 한두 번 먹어 보는 솜씨가 아닌 그 행동은 아무리 봐도 중학생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애늙은이 같다. 현정이 시헌에게 했던 그 말을 은소는 조금 공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학원 갔다 오는 길이야?”

시헌과 현정의 집이 의사 집안이라는 것, 집안의 강요로 두 사람이 늘 학원에 치여 사는 건 잘 알려진 흔한 이야기였다. 시헌은 근처에 있는 김치를 집어 입안에 넣었다. 학원이라고 하기보다는.

“태권도.”

아, 그것도 학원인가. 시헌은 뒤늦게 말실수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니, 그게 그건가.

“태권도도 다녀? 얼마나 다녔어? 어쩐지. 그래서 그렇게 잘 싸우는구나?”

태권도라는 말에 은소가 시헌에게 질문을 퍼부었다. 시헌은 적어도 은소가 대답할 시간은 주고 질문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헌은 은소의 호기심이 잠시 사그라들 때까지 밥 먹기에 집중했다. 금방이라도 체할 것 같이 급하게 먹는 시헌과 달리 은소는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사실은 여기 오기 전 이미 밥을 먹었기 때문에 입맛이 없는 탓도 있었다. 시헌이 대답을 하지 않자 약간 시무룩해진 은소가 중얼거렸다.

“나도 태권도 다니면 좀 나을까…….”

은소의 중얼거림을 들은 시헌이 슬쩍 눈을 치켜떴다. 은소의 교복 가슴언저리를 본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국물을 어느 정도 마신 시헌은 수저를 내려놓았다. 술을 마시는 사람 때문인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초등학교 때. 형이 있었거든.”

그는 처음 태권도 학원에 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시헌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준 사람이었다. 나이는 모른다. 교복을 입었으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쯤 되지 않을까 하고 짐작할 뿐이었다. 당시 또래 아이들보다 키가 작아 발차기를 할 때면 늘 불편하고는 했던 시헌에게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 준 사람이기도 했다.

처음엔 이렇게 오래 배울 생각으로 다닌 건 아니었다. 그저 엄마가 같은 아파트에 사는 학부모님과 피아노 학원과 태권도 학원 중 고민하고 있다는 말을 우연히 듣고 피아노보다는 태권도 학원을 가겠다고 했을 뿐이었다.

제 발로 걸어간 것도 아니었고,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학원이 늘 거라면 영어 학원이나 피아노보다야 낫겠거니 싶었을 뿐이었다.

어린 시헌은 그가 좋았다. 일부러 늦은 시간대로 태권도 수업 시간을 옮긴 것은 그 때문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엇이 시헌을 그렇게 만들었는지 시헌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는 평범했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배웠다는 것 외에 별다른 특별한 점이 없었다.

그의 부모님은 평범한 직장에 다니는 회사원이었고, 누나는 지방의 한 대학교에 다녔다. 그렇다고 그의 얼굴이 특별히 뛰어나거나 잘생긴 것 또한 아니었다. 그저 고개를 돌리면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남학생의 모습이었다. 후우, 시헌은 물이 없는 플라스틱 컵을 씹으며 말했다.

“언젠가부터 안 나오더라고.”

그가 태권도 학원에 나오지 않은 건 어느 날부터였다. 원장님과 조교 선생님들이 이상했다. 경찰과 사복을 입은 형사들이 학원을 왔다 갔다 했다. 학교 폭력이라고 했다. 당시 시헌에게도 예쁘게 생긴 여경이 와 물었지만 시헌은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이 보기에 그는 너무나 평범해 보였다. 무엇보다 대회를 나갈 때마다 금상을 타 오는 형이 누군가에게 맞는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시헌은 그의 행방을 물었지만, 누구도 시헌에게 그의 소재를 알려 주는 사람은 없었다.

그가 나오지 않은 후 몇 개월간 똑같은 시간대에 수업을 받은 것은 혹시 그가 다시 나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다시 학원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의 죽음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몇 개월 후의 일이었다.

“교통사고라는데.”

학원이 난리가 났다. 병원에 왔을 때는 이미 상태가 심각했고, 고된 수술 끝에 간신히 중환자실로 옮겨지긴 했으나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사망했다고 했다. 아, 은소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눈을 깜박였다. 시헌은 의자 밑으로 주먹을 살짝 쥐었다.

“근데 난 그거 안 믿어.”

“그러면?”

“자살한 거야.”

은소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니까 그날, 그의 죽음을 전해 듣기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늦은 시간까지 학원을 마치고 집에 가던 중 골목길에서 맞고 있는 그를 봤다. 가로등 밑에서 교복을 입은 또래 아이들에게 처참하게 맞고 있는 학생은, 틀림없는 그였다.

사람들은 그런 그들을 못 본 척 지나갔다. 학생들은 시헌이 저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누가 봐도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된 어린아이가 뭔가를 하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시헌은 그 자리에 오래 있지 않았다. 얼마 뒤 누나―하연에게 전화가 왔기 때문이다.

그날, 맞고 있는 그의 옆에 기욱이 있었다.

시헌은 죽기 전 그를 봤다는 사실을 은소에게 말하지 않았다. 은소는 이유를 물어 왔으나 시헌은 시간이 늦었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쨌든.

“태권도를 잘한다고 안 맞는 건 아냐.”

은소 대신 계산을 마친 시헌이 밖으로 나왔다. 시헌은 은소를 못 본 척 넘어가지 못했던 이유를 뒤늦게 깨달았다. 저녁 바람이 평소보다 쌀쌀했다.

“슬슬 나가자.”

* * *

한참을 걷자 주택가가 가득한 골목이 나왔다. 신도시와 구도시를 구분하는 골목길이기도 했다. 다 쓰러져 가는 낡은 2층짜리 개인 주택들이 줄지어 있는 건물 너머로 고개를 높이 들어야만 볼 수 있는 타워펠리스 건물이며 고급 아파트들이 이질적으로 늘어져 있었다.

은소는 시헌과 이곳에서 갈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새로 길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인도와 인위적으로 박아 놓은 나무를 가로등의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은소가 가야 하는 길 한쪽에는 금방이라도 속옷이 보일 정도의 짧은 치마를 입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남학생들과 떠들며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학생들이 있었다.

남학생 또한 그리 정상적인 것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저쪽은 이쪽에 관심이 없어 보였지만 은소의 생각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주머니에 휴대폰을 슬쩍 꺼낸 시헌은 기욱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오늘 좀 늦어」 오후 11:23

뭐라고 답장이 왔으나 읽지 않았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시헌은 은소의 등을 살짝 밀었다. 흠칫, 놀란 은소가 눈을 크게 뜨며 시헌을 바라봤다. 시헌이 뒷목을 살짝 긁적이며 말했다.

“데려다줄게.”

“어. 응. 고마워.”

은소는 시헌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다. 정확히는 거절해야 할 타이밍을 놓친 것이었지만. 두 사람이 학생들이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었다. 대화는 하지 않았다. 골목에는 두 사람의 대화 대신 담배를 피우고 있는 여학생들의 욕설 섞인 대화만 들려왔다.

그래서 그 씨발 년이 나한테……. 퉤, 하고 침을 뱉던 그녀와 은소가 눈이 맞았다. 은소가 재빨리 고개를 돌렸다. 담배를 다시 문 그녀는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녀의 앞에서 이야기를 듣는 남학생들도 두 사람에게 별다른 눈길을 주지 않았다. 은소는 골목을 완전히 돈 뒤에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다시 침묵이 흘렀다. 이제 그만 가도 괜찮다고 말해야 하지만 은소는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모처럼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는 마음 때문일까? 일부러 평소에 집에 가는 길과 다른 골목으로 걸어갔다. 시헌은 그런 은소의 옆을 말없이 따랐다.

길을 돌아가는 사실을 시헌이 알까? 모를까? 조마조마했다. 시헌이 좋아했었다는 형의 이야기를 들은 은소는 저도 무슨 말이라도 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우리 부모님 말야. 사실……. 이혼했어.”

“그래서?”

힘들게 이야기를 꺼낸 것과 시헌의 반응은 덤덤했다. 평범한 중학생에게는 심각한 고민일지도 모르지만 시헌에게 그런 이야기는 누구나가 가지고 있는 가정사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부모님 이혼했다 해서 비정상은 아니고, 부모가 있다 해서 모든 사람이 정상 또한 아니었다.

“어, 어? 아니, 그냥. 그렇다고.”

달리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은소가 어색하게 말을 끊었다. 시헌은 그제야 은소가 집에 들어갈 생각이 별로 없음을 눈치챘다. 멀리 작은 놀이터가 보였다. 시헌은 놀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우리 부모님은. 한 번도 공개 수업에 온 적이 없어.”

엄마와 아빠의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다. 이혼 얘기가 오고 갈 정도였다면 자식을 네 명이나 낳지도 않았을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을 내 가족끼리 비싼 식당에 가 밥을 먹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가족 여행을 가면 늘 둘 중에 한 사람은 여행을 끝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왜?”

텅 빈 공원 근처 벤치에 앉은 시헌은 은소를 올려다봤다. 은소는 자신의 질문에 어디가 잘못되었는지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시헌은 마지못해 대답했다.

“둘 다 의사거든.”

아, 그제야 말실수를 깨달은 은소의 얼굴이 약간 빨갛게 변했다. 은소가 조심스럽게 시헌의 옆에 앉았다. 놀이터 담벼락 너머 쓰러져 가는 빌라의 창문마다 불빛이 가득했다.

은소는 허공에 발을 살짝 들었다.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어렸을 땐 공원 벤치가 높아 보였다. 어렸을 적, 가끔 엄마와 병원 밖으로 나와 벤치에 앉으면 바닥에 발이 닿지 않은 것이 늘 고민이었다.

“내가 태어나고 일 년이 조금 넘었을 무렵에.”

“…….”

“아빠가 남자를 데려왔대.”

시헌이 잠시 이해를 하지 못한 시선으로 은소를 바라봤다. 그 모습을 본 은소가 그럴 줄 알았다며 어색하게 웃었다. 은소는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들은 것은 아니었다.

친척들끼리 방문을 닫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그 얘기의 어디가 잘못됐는지 은소는 알지 못했다. 학교에 다닐 당시 친한 친구에게 그 사실을 말했다.

그 뒤로 학교에 소문이 났다. 한 아이가 부모님에게 말한 것이 화근이었다. 애 아빠 없이 자라는 걸 걱정해 직장을 다니면서도 없는 시간을 내 학부모 회장까지도 맡아 하며 온갖 학교 행사에 참여했던 엄마를 은소는 이제는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

매주 커피숍에서 갖고는 했던 학부모 모임에도 참여하지 않았다. 늘 은소 엄마, 하고 먼저 다가와 이것저것 챙겨 주던 부녀회장 아주머니는 이런저런 소문을 내기 바빴다.

불과 며칠 전까지 친한 친구니, 제일 친한 친구니 하면서 떠들었던 친구가 떠나갔다. 학교 행사에 뵌 학부모님들은 은소의 인사를 받는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엄마는 누구의 탓도 하지 않았다. 친구에게 그 사실을 말한 은소도, 은소를 버리고 간 아빠도.

주변에서는 재혼하라고 권유를 했다. 실제로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는 남자가 고백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재혼을 하지 않았다.

친척들의 뭇매를 맞으며 구석에서 울고 있는 엄마에게 다가갔을 때 그녀는 말했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모든 것은 제 잘못이라고. 그를 사랑한, 그리고 그를 닮은 은소를 버릴 수 없었던 자신의 잘못이라며.

“이상하지?”

“아니. 별로.”

은소는 그럴 줄 알았다며 웃었다. 시헌과 만난 지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교복을 입지 않아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던 첫날과 다를 게 없었다. 은소는 자신이 시헌에게 엄마에 대한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였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시헌은 같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다른 세상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시헌이 보는 세상은 어떤 느낌일까? 은소는 조금이라도 시헌과 가까워지고 싶었다. 지금은 무리라도 언젠가는 같은 풍경을 볼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넌 되게 특이한 것 같아.”

시헌의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기욱이었다. 휴대폰을 꺼내 본 시헌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휴대폰의 날짜가 바뀌어 있었다. 시헌은 가방을 챙기며 벤치에서 일어났다.

“늦었어. 집에 가.”

“넌?”

시헌은 왔던 길로 등을 돌렸다. 멀리 얕은 차 소리가 들렸다.

“사거리에서 택시 타고 갈 거야.”

시헌이 일어날 마음이 없는 은소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은소는 시헌의 손을 붙잡고 벤치에서 일어났다. 은소에게 시헌은 마치 동화 속 왕자님 같은 역이었다.

“내일 보자.”

“그래.”

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어디야?

― 형. 나 지금 택시 타려고. 응. 금방 갈 거야.

은소는 골목을 도는 내내 들려오는 시헌의 목소리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할 무렵에서야 등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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