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과거의 기억
시헌이 현정과 친해지기 전. 현정은 시헌이 다니던 사립 초등학교와 다른 초등학교에 다녔다. 시헌처럼 사립 초등학교는 아니지만, 나름 그 지역에서는 돈 많은 애들이 다니기로 입소문이 자자한 초등학교였다.
초등학교 2학년. 여름 장마철. 그날은 다른 날보다 유독 비가 많이 내리던 날이었다.
현정은 매일 학교 앞까지 데리러 오던 기사 아저씨가 교통사고로 평소보다 조금 늦어진다는 연락을 받았다. 학교 교문 밖 근처에서 붉은색 우산을 쓰고 있던 현정에게 낯선 남자가 다가왔다. 태어날 때 미숙아로 인큐베이터 신세를 졌었던 현정은 당시 또래치고는 키며 몸무게가 작았다. 거기엔 생일이 12월인 것도 한몫했다.
현정은 그곳에서. 그러니까 비가 내리고 우산과 사람, 차들이 얽혀 있는 교문 밖에서 납치를 당했다고 했다.
현정이 살던 곳은 시헌이 살던 동네와 비슷하게 개발이 진행 중인 동네였다. 당시만 해도 이곳저곳에서 한참 개발을 하고 있을 때니 그런 동네가 많은 것은 놀라울 일은 아니었다. 현정의 학교에서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철거 준비로 빈집들이 가득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벽지가 모두 뜯어진 반지하에 검은 갈색의 장판만이 존재하는 방에 팔이 묶인 채로 던져져 있었다.
문도 모두 뜯겨 나가고, 사람이 살 만한 가구들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한구석에 편의점 도시락과 썩은 음식들이 굴러다녔다. 칼 같은 물건을 본 기억도 있다. 불행 중 다행인 건 남자는 눈을 감고 있는 현정을 자는 줄 알고 착각했다는 점이었다.
눈을 감고 있는 사이 사진 셔터 소리가 들렸다. 한참 만에 셔터 소리가 잦아들 즈음 발걸음 소리가 멀어졌다. 살짝 눈을 뜨자 문이 없는 화장실 너머로 볼일을 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도, 어떻게 했는지도 모른다.
현정은 가방도 챙기지 않은 채 빗길을 무작정 도망쳤다. 찻길에서 택시와 부딪힐 뻔했고,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울며 살려 달라고 했다. 현정이 기사 아저씨의 도움으로 택시에 오르자마자 빗길, 창문 넘어 인도 쪽으로 비에 젖어 택시를 바라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창문으로 멀어지는 택시를 보며 웃는 남자의 모습을 현정은 아직도 잊을 수 없었다.
택시 아저씨의 도움으로 인근 경찰서에 갔다. 부모님이 오시고, 경찰이 조사해 보겠다고 했지만, 납치 미수에 그친 건은 예상대로 별다른 진전이 없었다.
당시에도 시헌의 집과 현정네 집안 어른들이 친했기 때문에, 현정은 곧장 시헌이 다니는 사립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시헌은 한 달 정도 현정이 자신의 집에 머무르며 같이 학교에 다녔던 것을 기억했다.
문제가 터진 것은 현정이 그 일을 겪고 정확히 한 달하고 2주가 지난 날이었다.
그즈음 현정이 다니던 학교에서 한 여학생이 사라졌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현정도 말을 섞어 본 적은 없지만, 현정과 비슷하게 남학생들 사이에서 제법 예쁘다고 칭찬받는 아이였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품성도 착하고 바른 아이였으며 학원도 빠지지 않고 꾸준히 나오던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2학년 여자아이가 가출할 리가 없으니 곧장 실종 신고 접수가 됐다. 납치를 당한 적이 있던 현정에게도 형사가 집까지 찾아와 질문하긴 했으나 그 애와 친하지 않았던 현정은 아무 말도 해 줄 수 없었다.
일주일이 좀 지났을까? 학교가 잔뜩 뒤집혔다. 막 집에 들어온 엄마는 아침, 학교에 가려고 씻고 나온 현정을 안고 울었다. 병원 가운도 입은 채였다. 비를 맞은 채 왔는지 온몸이 젖어 있었다. 잘 그린 화장이 엉망이 되는 것도 모른 채 우는 엄마를 현정은 이해할 수 없었다.
엄마가 울음을 그칠 즈음에는 아빠가 들어왔다. 엄마처럼 가운 차림은 아니었으나, 아빠 또한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반쯤 넋이 나가 괜찮냐는 말을 반복하는 아빠가 현정은 제정신이 아님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아무것도 알지 못한 채 학교에 가야 한다고 말을 한 현정에게 엄마는 당분간 학교에는 가지 않는 게 좋겠다고 했다.
거실에 앉아 있던 현정은 친구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친구들 또한 부모님이 학교에 가지 말라고 했다는 것 같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는 알지 못했다. 한 친구가 한참 만에 답장을 보내 왔다.
「나도 잘은 모르는데 죽었대. 걔.」
현정은 문자에서 지칭하는 아이가 누구를 말하는 건지 알아차렸다. 엄마는 거실에서 한동안 휴대폰을 붙잡고 통화를 했다. 중간중간 현정을 보며 “세상에.” 하고 탄식을 내뱉으며 눈물을 흘렸다.
여학생의 시체가 발견됐다. 사람들이 모두 나가고 빌라가 들어설 예정이었던 철거 개인 주택 반지하방에서 말이다. 사인은 과다출혈, 그러나 그게 진짜 사인은 아니었다. 강간을 당한 채 방치가 된 것이었다.
철거를 하려고 들어간 인부가 방바닥에 이상하게 피가 고여 있는 것을 보고 구석에 있는 시멘트 포대를 확인한 것이었다. 알몸이 된 채 눈도 감지 못한 채 죽어 있는 어린아이는, 현정의 옆 반에 있던 그 여학생이었다.
학부모 모임을 통해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현정의 엄마는 아무도 살지 않은 반지하방이라는 말에 놀라 병원에서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현정은 시헌이 살고 있는 건너편 아파트로 이사했다. 보안이 잘되어 있는 새로 지은 커다란 아파트 단지였다. 시헌은 현정이랑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단순히 집안 부모님들끼리 사이가 좋아서 뿐만은 아닐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현정과 같이 다니기 시작한 것은 이 무렵이었다. 그렇게 다시 만난 현정은 어딘가가 결여된 것 같았다.
현정과 시헌이 초등학교 4학년이 됐을 무렵 남자가 붙잡혔다. 당시 사건은 뉴스에 보도되고 시사 프로그램에 방송될 정도로 전 국민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대대적인 수사 끝에 범인을 잡았다. 소아성애자. 그것이 범행을 저지른 남자의 진단명이었다.
경찰이 남자가 머물던 원룸을 압수 수색을 한 결과 수많은 아동 청소년 음란물 영상과 함께 카메라가 나왔다. 그 아동 청소년 음란물에 찍혀 있는 것이 대부분 현정 또래의 여자아이들이었다. 카메라 속에는 죽은 여학생도 있었지만, 현정이 담겨 있는 사진 또한 있었다.
워낙 전 국민적인 관심사가 집중된 사안이다 보니 현정을 알아본 경찰이 부모님을 통해 조사를 받으러 나올 것을 제안했다. 사실 그 전부터 사건의 유사성에 관심을 가진 담당 형사들과 취재진이 찾아왔지만, 부모님이 어떻게든 막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범인인 남자의 카메라에서 현정의 사진이 발견된 이상, 이젠 부모님도 방법이 없었다.
그날 아침, 학교에 가기 전 현정을 부른 엄마는 현정의 앞에서 울며 조심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조사를 받아야 한다고. 여태껏 부모님들이 뒤에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지 알고 있었던 현정은 말없이 알겠다고 했다.
일 년도 더 지난 일이니까 괜찮을 거로 생각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학교에 갔으나 쉽게 마음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날따라 유독 불안한 현정은 결국 2교시를 버티지 못한 채 조퇴를 하기로 했다. 담임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조퇴를 하려는 현정과 시헌이 마주쳤다. 화장실에 다녀온 시헌은 어깨에 멘 가방끈을 양손으로 꼭 쥐고 있는 현정을 가만히 바라봤다.
“나 집에 가.”
“…….”
“같이 갈래?”
묻지도 않았는데 대답하는 현정이 시헌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잠시만 기다리라고 말한 뒤 가방에서 작은 지갑과 휴대폰만 챙긴 채 현정을 따라 학교 밖으로 나왔다.
현정은 집에 가지 않았다. 이제 막 9시 오픈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시헌이 현정에게 그동안 있었던 일을 들었던 것은 이날이었다. 경찰서에 같이 가자고 했다. 선생님에게 어딜 간 거냐고 전화가 왔지만,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현정의 조퇴 사실을 알아차린 부모님에게서 연락이 왔고, 카페라고 하자 현정의 부모님이 데리러 왔다. 시헌은 현정의 부탁으로 현정과 함께 경찰서에 갔다. 당연한 일이지만 시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취조실 밖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이 전부였다.
그 시절만 해도 아동 청소년 보호법이니 강간 문제가 물 위로 드러난 적이 없었던 시대라 피해자인 아이를 보호하는 법이나 제대로 된 규정 따위가 있을 리가 없었다. 남자와 직접 대화를 해야 한다는 형사의 말에 현정의 엄마는 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형사의 말로는 본인이 직접 얼굴을 보고 확인을 해야 한다고 했다. 현정의 엄마와 아빠는 유리 벽 너머로 확인해도 충분하지 않냐고 했지만, 형사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경찰서에 있는 기자들의 눈도 있었던 터라 어쩔 수 없이 허락해 줬다. 형사를 따라 취조실 안으로 들어가자 양손에 수갑을 차고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많이 컸네.’
취조실로 들어가자마자 현정을 알아본 남자가 내뱉은 한마디였다. 곧장 형사가 닥치라며 소리를 지르자 남자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웃어 보였다. 형사가 남자에게 이것저것 물었다. 현정은 묻고 싶었다. 도대체 이런 말을 왜 내 앞에서 하는 건지.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의 앞에서 어린 현정은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등을 돌리자 유리 벽 너머로 눈물을 닦는 엄마의 모습이 보였다.
8월 12일. 오후 1시 40분경 오현초등학교 앞에서 피의자가 납치했던 아이가 눈앞에 있는 아이가 맞습니까?
네.
당시 피해자는 빨간색 우산을 쓴 채 기사 아저씨를 기다리고 있었다는데.
그랬나 보죠. 잘사는 집 애들이잖습니까.
철거 예정 중이었던 개인 주택 반지하방으로 데려갔다는데 그게 맞습니까?
아마도요.
데려가서 어떻게 한 겁니까?
사진을 찍었죠. 근데 화장실이 가고 싶은 겁니다. 묶어 두고 갈까 했는데 자는 것 같아 내버려 뒀더니 그사이에 도망친 거 아닙니까. 이야. 감쪽같이 속았네요.
사진을 찍고, 어떻게 하려고 한 겁니까?
형사님. 일본에 말입니다, ZY사라고 아십니까? 제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인데. 거기 나온 애가 닮았거든요.
남자의 시선이 현정에게 향한다. 형사의 시선 또한 고개를 숙인 현정에게 닿았다. 철제 책상 밑으로 취조실 안에 들어가기 전 아빠가 쥐여 준 음료수 캔을 꼭 쥐었다. 유리 벽 너머로 목소리는 들리지 않지만 엄마가 우는 모습이 보였다. 현정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꼭 해 보고 싶었는데.
김우철 씨.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못 본 사이에 키가 많이 컸네요. 몸무게도 늘은 것 같고.
그만하시죠!!
더 커 버리면 할 수가 없잖아요.
듣다 못한 현정의 엄마가 결국 유리 벽 밖으로 나와 취조실 안으로 들어왔다. 들어오면 안 된다는 형사들의 실랑이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현정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취조실 밖으로 나오기 전, 현정은 절체 책상에 달려 있는 수갑에 팔이 묶인 남자와 눈이 맞았다.
비 오는 날, 그때와 비슷한 웃음을 머금은 남자의 입 모양이 조금 움직였다. 엄마와 형사, 주변 사람들의 실랑이 때문에 그 말을 제대로 들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마치 귀 바로 앞에 속삭이는 것처럼 그 목소리가 박혀 왔다.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그때부터인지도 모른다. 빨리 어른이 되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현정은 그렇게 되면 이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 * *
지루하다 못해 졸음이 오는 생일 파티가 끝나 갈 무렵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호텔 밖을 나왔다.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고 나오긴 했지만, 사실 두 사람이 어딜 가는지 크게 신경을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중학생임에도 불구하고, 가식적이고 형식적인 그런 아이들이 시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시헌은 호텔 로비 여자 화장실 옆 벽에 몸을 기댔다.
한 오 분쯤 지나자 화장을 고친 현정이 밖으로 나왔다.
“어때?”
시헌은 현정이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차이를 구분할 수 없었다. 여자들이란 때때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종종 있다.
“괜찮아.”
“건성으로 답하지 말고.”
“몰라.”
“시헌인 여자한테 너무 무심해. 도대체 이런 애가 뭐가 좋다고 따라다니는 거지?”
로비를 나오며 현정은 멋대로 시헌과 엮였던 여학생들의 얘기를 늘어놓았다. 당사자 앞에서 할 소린 아닌데 현정은 뭐가 그리 잘났는지 참 꿋꿋했다. 사실 시헌과 사귀었던 여학생 얘기라고 해 봤자 그렇다 할 만한 내용은 없었다.
시헌이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무렵 사귀었던 여학생이 양다리를 걸쳤던 사실을 듣게 되었을 때였다. 어린 나이에 울며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는 여학생을 두고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형과 통화를 했다.
무슨 통화를 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대화를 주고받은 것도 아니었다. 종종 시헌은 현정에게 여자에게 무심하다는 말을 듣고는 했었다. 여자에게 무심한 이유? 글쎄, 딱히 성격 탓만은 아닌 것 같았다.
대부분의 또래 남학생들이 예쁘다고 말하는 여자 연예인이나 여학생들을 봐도 별 감정이 없는 시헌이었지만, 서진만큼은 달랐다. 서진을 보고 있으면 없던 감정도 생겨났다. 참 아이러니한 건 남자라 해도 서진 외에 다른 남자들에게는 눈이 간 적은 없었다. 오직 서진이기에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호텔을 나온 현정은 지하철역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뭐 하는 짓인지 몰라 가만히 보자 택시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이른 저녁 번화가, 어린 학생들은 돈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안 택시가 현정을 그냥 지나쳐 갔다. 시헌이 멀어지는 택시를 보고 있는 현정의 옆으로 다가갔다.
“또 어딜 가려고.”
택시를 잡는 현정이 곱게 집에 들어갈 리가 없다는 사실을 시헌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뭐, 그렇다고 말릴 생각은 없지만. 멀리 주황색 택시가 현정의 앞으로 다가왔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택시에 시헌이 먼저 다가가 택시의 문을 열었다. 현정이 웃으며 택시에 탔다.
“집에 들어가기 싫단 말야.”
“며칠 전에도 그러고 혼났잖아.”
“너네 집해서 자고 간다고 해 주라? 응?”
목적지가 정해지지 않은 택시 안에서 현정이 시헌을 졸랐다. 택시 기사의 눈치가 보이기 시작한 시헌은 무작정 집 근처에 있는 역 이름을 불렀다.
택시가 천천히 출발하자 현정이 다시 시헌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시헌은 그런 현정의 손을 귀찮다며 쳐 냈다. 시헌의 집. 현정이 시헌과 기욱이 같이 산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한 번도 현정을 집에 데려온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딱히 일부러 의도한 건 아닌데 말이다. 저야 집에서 일어나는 기욱의 만행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별 상관은 없지만, 현정이 그걸 감당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분명 기욱이라면 현정이 있다 해도 개의치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우리 집은 안 돼.”
“아, 자는 거 아냐. 그냥 말만 해 달라니까?”
시헌의 말에 현정은 이해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입을 맞추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다. 문제는 거짓말을 한 뒤 어디서 자느냐다. 현정이 달리 하루 머물 만한 곳을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서 잘 거냐는 질문에 현정이 고민했다.
그사이 택시는 역 근처에 도착했다. 역 근처를 배회하며 몇 번 출구 근처에 내려 주냐고 묻는 택시 기사의 말에 현정이 뜬금없이 박수를 쳤다. 현정은 바로 앞에 있는 출구에서 적당히 내려 달라고 했다. 택시가 지하철 출구 근처에서 멈추자 곧장 택시에서 뛰어나갔다.
창문 밖으로 손을 흔드는 현정에 시헌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택시비를 계산했다. 만 원이 좀 넘은 것 같았지만, 금액 같은 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현정이 택시에서 내린 시헌의 옆에 붙었다. 현정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나왔다.
“서진이네 가자.”
현정이 눈을 크게 뜬 시헌을 보며 웃었다.
“뭐?”
“뭘 그렇게 놀라.”
“아니…….”
“가 본 적 없지?”
시헌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한 번 정돈 가 볼 법도 했는데 말이다. 시헌도, 서진도 학교에서 사적인 얘기를 잘하는 성격은 아니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집안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글쎄? 왜 그럴까?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사정이야 어찌 됐던 시헌은 서진의 집에 가자는 현정의 제안이 매우 끌렸다. 현정은 아주 가끔 시헌을 혹하는 제안을 하고는 했다. 단 한 가지만 빼면 말이다.
“민폐잖아.”
현정의 말은 아무리 잘 포장해도 결국 잘 곳이 없으니 서진의 집에서 하룻밤 묵고 가겠다는 뜻이었다. 어차피 내일은 주말이라 학교에는 무리가 없지만, 그래도 연락 없이 무작정 쳐들어가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시헌의 말에 현정이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괜찮아. 괜찮아. 몇 번 그랬거든.”
“무슨 말이야?”
“서진이 언니가 J대 간호대라는데, 지금 3학년인가 2학년인가? 그래. 아, 너네 형 알 수도 있겠다. 어쨌든 되게 착하셔. 자주 와도 된다고 했어.”
“부모님은?”
시헌은 문득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사적인 얘기 이상으로 서진은 부모님에 대한 말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시헌도 부모님과 사이가 좋은 편은 아니었으나, 그건 단순히 사이가 좋고 나쁘고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시헌의 질문에 현정이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런 현정의 반응에 시헌은 조금 더 일찍 관심을 가졌어야 했나 하며 후회를 했다.
“화재로 돌아가셨대.”
“처음 들어.”
“나도 안 지 얼마 안 됐어.”
현정도 자세한 사연은 모른다고 했다. 현정은 시헌도 알고 있을 줄 알았다며 말을 덧붙였다. 시헌은 입을 다문 채 얼굴을 긁적였다.
“잠깐 우리 집에 들렀다가 가자.”
“알았어.”
현정과 시헌은 구도시와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다행히 역에서 시헌의 집은 별로 멀지 않았다. 새로 지은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오피스텔 건물 안으로 들어간 뒤 도어락의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달각, 문고리를 붙잡은 시헌은 집 안쪽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문을 열던 손을 멈추고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헌아. 안 들어가고 뭐 해?”
“아니. 아무것도. 잠깐…….”
시헌이 말리기도 전에 현정이 멋대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어.”
안으로 들어간 현정의 표정이 굳었다. 집을 잘못 찾은 건가 당황하는 현정의 뒤를 이어 집 안으로 들어온 시헌 또한 인상을 찌푸렸다. 거실에 반나체 상태로 흰 셔츠만 걸치고 있는 여성이 서 있었다. 지난번 그 여자는 아니었으나, 차림새는 별로 다르지 않았다. 현정은 시헌과 여자를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시헌은 여자가 나왔으리라 추측되는 2층 계단의 방문을 바라봤다. 문을 살짝 열다 말고 고개를 숙인 기욱이 현장을 보자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이 옷을 입고 나오는 사이 시헌은 눈앞에 있는 여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벌어진 셔츠 사이로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여자의 가슴골이 그대로 보였다. 15살, 한참 성에 대해 눈을 뜰 나이라 민감할 법도 하지만 시헌은 여자의 몸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아마 여기서 여자가 그나마 걸치고 있는 셔츠를 벗고 알몸이 된다 해도 시헌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을 것이 틀림없었다.
시헌에게 여자의 알몸이란 잘 만들어진 밀랍 인형과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여자가 뺨을 긁적이며 누구냐고 묻는다. 보아하니 시헌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여자의 질문에 대답할 가치를 느끼지 못한 시헌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옷 입으세요.”
“…….”
“안 쪽팔려요? 노출증 환자예요?”
“뭐, 뭐라고? 노츨증? 너 대체 기욱 오빠랑 무슨 사이……!”
때마침 기욱이 문을 열고 계단 아래로 내려왔다. 기욱의 옷차림은 평소와 다르지 않았다. 그 짧은 시간에 옷을 갈아입었음에도 저렇게 주름 하나 지지 않은 셔츠를 입고 나타나는 기욱을 볼 때마다 시헌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기욱의 잘 다려진 셔츠는, 기욱과 여자의 행위가 충동적인 일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여자가 기욱에게 달라붙자 기욱이 여자를 밀어냈다. 기욱과 현정의 눈이 맞았다.
“안녕하세요.”
“그래.”
현정이 고개를 숙이며 기욱에게 인사를 했다. 불편해 보인다는 것이 표정에 드러나 있었다. 그러나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현정의 인사를 받았다. 기욱이 시헌과 현정이 친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었다. 기욱은 고개를 돌린 뒤 내려왔던 계단 위 방문을 손가락질했다.
“오빠 혼자 사는 거 아니었어? 누구야?”
“알 거 없잖아.”
“…….”
“옷이나 입어.”
시헌이 여자에게 했던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웃겼다. 달랑 셔츠 하나만 걸치고 있는 여자에게 무슨 입을 옷이 있단 말인가. 기욱의 말에 여자가 그나마 있는 셔츠의 단추를 잠그며 계단을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가는 여자의 허벅지 사이로 묻어난 흰 액체를 본 현정이 입을 살짝 벌렸다.
시헌과 기욱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현정이 시헌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시헌의 방이라 추정되는 문을 손가락질했다. 시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현정이 도망치듯 시헌의 방으로 쏙 들어갔다. 기욱이 현정이 들어간 시헌의 방문을 닫았다.
“놀랐잖아.”
“마음에 안 들어.”
“아, 여자? 지금 헤어질까?”
여자가 들어간 방을 본 기욱이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들썩였다. 마음에 안 든다. 무엇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이었으나 결코 방으로 들어간 여자를 향한 말은 아니었다. 기욱이 저런 여자를 집에 데려온 것이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 새삼 기분이 나쁠 일도 없었다. 오히려 기욱의 입에서 나온 헤어진다는 말이 시헌을 더 놀라게 했다.
여자 친구였군.
뭐,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여자가 기분 나쁜 것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마음에 들지 않아 그런 말을 한 거지? 스스로 입에 담고도 도무지 그 답을 찾을 수 없었다. 그사이 기욱은 정수기에 있는 물을 따라 마셨다.
“나 오늘 자고 올 거야. 친구네서.”
기욱은 마시던 물을 내려놓으며 휴대폰으로 날짜를 확인했다. 내일은 주말이었다. 흐음, 마시던 물을 마저 마시며 고개를 들어 시헌을 바라봤다.
“현정이네 말고?”
“중학교 친구야.”
“지난번 그 친구?”
“…….”
“오빠, 언제까지 거기 있을 거야?”
방 밖으로 나온 여자가 난간에 몸을 걸친 뒤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여자는 셔츠 위에 검은색 치마를 입은 것이 전부였다. 그래도 셔츠만 걸친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기욱이 여자에게 다시 들어가 있으라며 손을 저었다. 여자가 마지못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기욱의 손등이 물 묻은 입술을 닦았다. 입에 묻어 있던 립스틱이 물에 섞여 묻었다. 시헌은 이런 쪽으로 무서우리만큼 눈치가 좋은 기욱이 싫었다.
“흐음, 언제 한번 놀러 오라 그래.”
기욱의 대답에 시헌은 결국 인상을 찌푸렸다. 여태껏 기욱과 살면서 학교 친구에 관한 얘기를 아주 안 한 건 아니었다. 중학교에 막 들어가서 초등학교 때부터 지켜봤다던 여자에게 고백을 받아 사귀기 시작했다는 말을 했을 때도 기욱은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 기욱이 정말 놀러 오라고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 건지 의심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저런 사람이라도 시헌에게 있어 기욱은 하나밖에 없는 형이었다.
시헌이 기욱의 집에 머물며 보아 온 수많은 여자, 혹은 시헌이 모르는 여자와 남자들이 기욱에게서 빠져나오지 못했던 것처럼 시헌 또한 기욱에게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기욱이 시헌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리며 닫혀 있는 시헌의 방문을 힐끗 바라봤다.
“헤어질게.”
“어차피 여친도 아니잖아.”
시헌은 손을 밀어내며 기욱을 올려다봤다. 기욱이 웃었다. 그러나 시헌은 뭐가 그리 웃긴지 알 수 없었다. 시헌은 불과 2주 전쯤에 기욱이 엄마에게 K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N사 공채에 합격한 여자를 소개한 것을 알고 있다.
‘의사가 아닌 게 아쉽긴 하지만. 뭐, 그래도 하는 데까진 잘 해 봐.’
우연히 들려온 기욱의 휴대폰 너머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과정이야 어찌 됐던 부모님이 수백억대 자산가라는 여자가 저런 천박한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사실은 어린 시헌이라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기욱은 변명하지 않았다.
기욱이 다시 방 안으로 나오려는 여자를 데리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고 거실이 조용해지자 그제야 현정이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시헌은 문을 완전히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현정은 책상 옆 책꽂이를 뒤지는 시헌을 뒤로하고 침대에 앉았다.
‘여기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
시헌은 엉망인 책장들 사이로 한참 만에 학교 시험들이 프린트된 종이 뭉치들을 찾아냈다. 인근 학교의 기출문제들이 모인 문제집이었다. 앞부분을 조금 푼 것이 전부라 전체적으로는 새것이나 다름없었다. 시헌은 문제집을 가방에 챙겼다. 그런 시헌의 모습을 본 현정이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여자 친구래? 깜짝 놀랐어.”
“헤어진대.”
“뭐? 진짜? 그, 그래도 되는 거야?”
“나도 몰라.”
시헌은 옷가지를 들고 창고용으로 쓰는 빈방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은 뒤 방으로 돌아왔다. 침대에 앉은 현정이 발을 이리저리 흔들었다. 현정의 양말에 그려진 노란 병아리 그림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기욱 오빠 말이야.”
“…….”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역시 부담스러워.”
“미안.”
“왜 네가 사과해?”
“나도 잘 모르겠어.”
“사과하지 마. 네 잘못이 아니잖아.”
시헌이 가방을 메자 현정도 침대에서 일어났다. 집을 나온 두 사람은 말없이 길을 걸었다. 신도시를 나와 구도시로 들어서자 주변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중간중간 지나다니는 오래된 차들, 낡은 가로등이 시헌과 현정을 비췄다.
서진의 집에 도착하기 전 연락을 할 수도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현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어쩌면 단순히 귀찮은 걸지도. 시헌은 이번만큼은 현정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 편이 서진에게 재미있을 테니까.
“…….”
낡은 주택의 반지하방의 문을 두드리자 잠옷 차림인 서진이 문밖으로 나왔다. 누나가 늦어진다는 말을 들어 누나인 줄 알고 생각 없이 문을 열었던 탓이었다. 젠장. 곤란해하는 서진을 본 현정은 아무렇지 않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랑 시헌이 말야.”
“…….”
“집 나왔어.”
“뭐?”
정확히 말하면 집을 나온 건 현정이지만. 서진은 기가 막힌다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정이야 종종 그런 사고를 치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시헌은 아니었다. 서진은 막 씻고 나와 물기가 덜 마른 머리를 긁적였다.
“너네 미쳤냐? 당장 집에 들어가. 그리고 장현정. 너 꼴은 그게 뭐야?”
“어디 좀 갔다 오느라. 어쨌든 하루만 재워 주라. 아아, 시헌아 너도 한마디 해 봐 좀. 응?”
아니나 다를까 한참 동안 서진과 현정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자고 가도 돼?”
“안 돼.”
“아악! 갈 데 없단 말야. 나랑 시헌이가 노숙해도 좋아?”
“어. 상관없어. 집에 가.”
“싫어.”
끝이 없는 둘의 대화를 듣는 시헌은 타이밍을 잘못 잡았다고 생각했다. 서진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은 현정은 시헌에게 달라붙었다.
“울 시헌이가 불쌍하지도 않아?”
“얘기가 왜 그렇게 되는데?”
화살이 넘어오자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운이 좋은 걸까? 때마침 누군가가 집 근처로 다가왔다. 미묘하게 서진과 닮은 얼굴에 시헌은 그녀가 서진의 누나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를 발견한 현정이 가장 먼저 그녀에게 달려갔다.
“어머, 현정아. 여기서 뭐 해?”
“언니. 서윤 언니 있잖아요.”
친하다는 현정의 말이 거짓말은 아닌 듯 서윤은 현정을 꽤 좋아하는 것 같았다.
“제가. 친구 생일 파티에 갔는데…….”
현정이 적당히 사연을 붙여 사정을 늘어놓았다.
“어쨌든 그래서 잘 데가 없어요.”
“아, 진짜 집에 가라고!”
중간에 낀 서진은 몇 번이나 안 된다며 소리를 질렀다.
“뭐, 하루 정도는 괜찮지 않아?”
“아. 진짜 누나!”
“그러지 말고 일단 들어가자. 서진이 너도 추운데 밖에 있지 말고 얼른 들어가.”
서윤이 서진의 등을 떠밀며 집 안으로 구겨 넣었다. 서윤의 옆에 달라붙은 현정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대며 웃고 있었다. 현정이 안으로 들어가고, 아직 들어가지 못한 채 서 있는 시헌과 서윤의 눈이 마주쳤다. 눈치가 보였던 시헌이 서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시헌도 서진의 누나―서윤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안녕하세요.”
“어. 응. 들어와.”
시헌을 본 서윤은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약간 입을 얼버무렸다. 그러나 이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손을 저었다. 서윤의 그런 행동이 이상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왜 그런지 쉽사리 물어볼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다.
시헌은 우선 좀 씻고 싶었다. 현정에게 휘말려 어쩔 수 없이 간 미용실에서 해 준 어색하게 손질된 머리며 얼굴에 화장은 정말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시헌은 대충 화장만 지우고 머리를 내린 뒤 거실로 나왔다.
시헌의 집에 비하면 거실이라고 할 것도 없는 좁은 공간이었지만. 그건 그거대로 나쁘지 않았다. 시헌은 바로 건너편 서진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서진은 방의 한구석을 차지하는 접이식 책상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뭘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시헌이 다가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
“현정이는?”
시헌의 목소리에 서진이 깜짝 놀라 등을 돌렸다. 서진의 시선이 거실을 경계로 건너편에 있는 큰 방에 닿았다.
“누나 방에서 자.”
교과서를 덮은 서진은 기다리라며 큰 방 쪽으로 넘어가 이불을 가져왔다. 평소에 쓰지 않는 이불인지 이불이 뻣뻣한 느낌이 났다. 서진은 맨바닥 한쪽에 이불을 깔았다. 바닥에 주저앉은 시헌은 바닥에 깔린 얇은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수학여행을 제외하고는 침대 말고 다른 곳에서 자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거기서 대충 자.”
그렇게 말한 서진은 불을 끈 뒤 스탠드를 켰다. 스탠드라고 해 봤자 기껏해야 눈앞의 책을 간신히 보이게 할 정도의 밝기에 지나지 않았다. 말은 대충 자라고 해 놓고 불을 끄고 본인은 어두운 스탠드 앞에서 공부하는 서진의 배려가 시헌을 미묘하게 만들었다.
그런 툴툴거림이 좋은 점이라면 좋은 점이지만 말이다. 바닥에서 일어난 시헌은 불을 켠 뒤 가져왔던 가방을 열었다. 텅 빈 가방 안에는 집에서 가져온 문제집 한 권만 달랑 들어 있었다. 시헌이 서진의 책상 위로 문제집을 던졌다. 툭, 서진이 보고 있던 수학 교과서 위로 시헌이 던진 문제집이 올라갔다.
“뭐 하는 거야?”
“가지라고.”
“너 이거…….”
서진은 시헌이 준 문제집을 살폈다. 며칠 전 학교에서 현정이 보여 준 것과 같은 문제집이었다. 서진이 다시 시헌에게 문제집을 돌려주려 하자 시헌은 손을 저었다.
“어차피 안 풀어.”
“…….”
“학원엔 잃어버렸다고 하면 돼.”
“하아, 고맙다.”
서진이 마지못해 문제집을 받았다. 방 안 전등 앞에 선 시헌은 벽에 살짝 기대 서진을 바라봤다.
“대신.”
“대신?”
“일찍 자. 괜히 늦게 자지 말고.”
시헌이 서진이 켜 놓은 스탠드를 가만히 흘끗거렷다. 하아, 한숨을 쉰 서진이 스탠드 불을 끄며 책상을 정리했다. 시헌이 옆에 있던 이불을 서진 쪽으로 살짝 밀었다. 이불을 넓게 펴자 방 안이 가득 찼다. 딱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만한 크기였다.
서진이 이불을 반쯤 덮자 시헌이 불을 껐다. 시헌의 방과 달리 마땅한 예비 전등도 없는 터라 불을 끄자마자 주변이 캄캄해졌다. 간신히 이불을 덮자 등 옆으로 꼼지락대는 서진의 움직임이 그대로 느껴졌다.
“야, 가만히 좀 있어.”
“…….”
“아오. 가만히 있으라고!”
꼼지락대는 시헌에 짜증이 난 서진이 소리를 질렀다. 일부러 서진에게 딱 달라붙은 시헌은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방이 좁아서 그런지 딱 달라붙어야 하는 게 시헌은 제법 마음에 들었다. 서진은 불편한 모양이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시헌은 현정을 따라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어두워도 낮처럼 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분명 아침부터 현정에게 끌려 다녀 피곤해야 할 텐데 어째서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아니, 잘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그런 가운데 어둠 속에서 서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자.”
“너도.”
아아,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가출을 시도해 보는 건데 싶었다.
* * *
기억 속 여자는 늘 이렇게 말하고는 했다. 쓸모없는 놈. 차가운 동상 같은 시선을 올려다보며 말하고는 했다.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도대체 뭘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라도 잘못을 빌어 여자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풀린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여자는 이내 바닥을 힐끗 내려다보더니 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여자가 나간 방은 싸늘함만 맴돌았다. 몇 번이나 문을 두드려 보지만 문은 열리지 않았다. 박스로 된 온갖 짐들이 가득한 그곳은 방이라고 부르기보다 창고라 부르는 편이 맞았다.
창고 안 가득 찬 짐들로 인해 바닥에는 어린아이 하나 제대로 누울 공간조차 없었다. 여자가 나간 후 아이는 어둠에 가득 찬 창고 구석을 둘러 봤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어둠에 눈이 익고, 손을 더듬어 박스를 옆으로 밀어낸 뒤 그 사이로 몸을 쪼그리고 앉았다.
문틈 사이로 들어오는 빛은 어둠 속에서 아이가 볼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아이에게 이런 일은 한두 번의 일이 아니었다. 이젠 문 너머로 나는 음식 냄새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여자에게 머리채를 잡혀 이끌려 오기 전 저녁에 관해 얘기했으니 저녁밥을 먹고 있음이 틀림없었다.
비록 된 밥은 아니었지만, 음식 냄새가 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를 무렵 여자는 늘 다 먹고 난 음식들을 방 안에 던져두고 가고는 했다.
그런 음식을 받아먹는 것도, 여자가 들어올 때 거실 문틈 사이로 보이는 탁자 위에 가득 놓인 음식들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지 않는 것도 일상이 되었다. 아니, 당연한 줄 알았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물을 떠다 놓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거의 반나절을 하릴없이 맞았던 날이었다. 여자의 그런 사소한 트집은 특별할 이유가 없었다. 그날은 평소보다 음식이 조금 늦게 들어온다는 점뿐이었다. 여자는 가끔 밥을 주지 않을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은 여자에게 맞는 것보다 재수가 없는 날이었다. 설거지하는 소리가 들리고, 그날도 그런 줄 알았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고 쪼그려 선잠이 들었을 무렵 방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어오는 빛에 아이는 고개를 들어 인상을 찌푸렸다. 빛. 그렇게 원했던 빛과 함께 엉망이 된 창고 안으로 들어온 것은 그녀―서윤이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부모님 몰래 밥과 음식들을 가지고 창고 안으로 들어온 그날, 아이에게 있어서 그녀는 빛이자 세상 전부였다.
“허억…!!”
서진은 눈을 깜박였다. 익숙한 천장 구조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마를 살짝 짚자 옆에 있던 시헌이 몸을 뒤척였다. 머리맡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2시 반이 조금 넘었다. 혹시 시헌이 깰까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작은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에는 시헌이 준 문제집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스탠드 불을 켜고 최대한 빛을 안쪽으로 모았다.
“안 자고 뭐 해.”
“아! 박시헌! 놀랐잖아!”
어느새 등 뒤로 다가와 있는 시헌에 서진이 짜증을 냈다. 안 자고 뭐 하냐니. 그건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었다. 시헌이 준 문제집을 본 서진은 샤프를 붙잡았다. 그 모습에 시헌이 인상을 살짝 구겼다.
“자라고.”
“잠이 안 와서 그래. 신경 쓰지 말고 자.”
시헌은 하품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계속 자라고 하는 것도 웃기고, 자라고 해도 서진은 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시헌은 이불을 살짝 밀고 서진의 옆으로 붙었다.
학교 책상보다 조금 작은 접이형 좌식 책상. 서진이 좁다며 시헌의 어깨를 밀었으나 시헌은 꿈적도 하지 않았다. 시헌은 서진이 자기 전 풀다 만 문제집을 살폈다. 볼펜으로 표시된 틀린 문제들을 보던 시헌은 이내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아, 웃지 말라고!”
“틀릴 걸 틀려라.”
“뒤질래?”
“큭큭, 푸흡. 야,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아! 진짜! 방해할 거면 자라고!”
“야!! 너네 다! 시끄러!”
방문 너머로 짜증 섞인 현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때문이잖아. 시헌은 웃음을 참으며 서진의 몸을 쿡쿡 찔렀다. 그러나 서진은 시헌에게 놀림감이 된 것이 분한 모양인지 현정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아아, 조명이 좀 더 밝았으면 좋았을 텐데. 시헌은 분명 지금 서진의 표정은 가히 볼만함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장난이 좀 지나쳤다고 판단한 시헌은 서진의 필통에서 아무 샤프나 꺼냈다. 서진이 막힌 문제를 풀려고 펜을 잡은 시헌은 문뜩 뭔가 생각난 듯 고개를 들었다.
“서진아.”
“왜?”
“악몽 꿨어?”
서진은 입을 다물었다. 시헌은 초등학생도 아니고 악몽이 별 대수냐며 어깨를 살짝 들썩였다. 시헌은 처음부터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며 말을 돌렸다. 그런 시헌의 행동에 서진은 씁쓸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딱히. 그걸 악몽이라고 할 수 있다면.”
꿈속의 여자. 그녀는 서진의 엄마였다.
“틀린 거 봐 줄게. 기다려 봐.”
다행히 시헌은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서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비웃는 건 기분이 좋지 않지만 그래도 시헌은 제법 머리가 좋은 편이었다. 집안도 좋고, 머리도 좋은 시헌은 마음만 먹는다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고 또 될 수 있었다.
자랑을 하고 다닌다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서진은 그런 시헌이 얄미우면서도 부러웠다. 한편으로는 더 좋은 학교, 친구들을 만들 수 있는 시헌이 이런 낡은 동네의 평범한 중학교에서 별거 없는 저와 어울리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상한 녀석. 재수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었다.
* * *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밤새 잠을 설쳐서 그런지 몸이 뻐근했다. 서진의 공부를 알려 주다가 잠이 든 모양이었다. 언제 잠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반쯤 닫힌 문 너머로 서진과 현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아침 7시, 두 사람이 아침부터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시헌은 결국 몸을 일으켰다. 엉망이 된 머리를 긁적이며 거실로 나갔다. 거실 한쪽에 자리한 작은 식탁에 아침이 차려져 있었다. 시헌이 나온 것을 눈치챈 서진이 현정의 등을 돌렸다.
“잘 잤냐?”
“어. 아니.”
시헌의 대답에 서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잤으면 잔 거지 ‘어.’라고 했다가 아니라고 하는 건 또 무슨 심보인가. 그러나 시헌은 잘못 대답한 것이 아니라며 입을 다물었다. 잠자리가 불편해 잠을 설친 건 사실이지만 수학여행도 아닌데 서진과 같이 잘 수 있는 건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시헌은 서진과 현정이 앉아 있는 테이블 앞으로 다가갔다. 현정의 옆자리가 비었음에도 서진의 옆을 서성거렸다. 그런 시헌의 모습에 서진은 잠이 덜 깨서 그런 거니 하며 몸을 살짝 옆으로 비켰다. 안 그래도 좁은 거실에서 시헌 때문에 더 좁아진 자리에 서진은 불편하다며 몸을 움직였다.
시헌은 그런 서진을 힐끗 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건너편 화장실 문 너머에서 들려오던 물소리가 뚝, 끊겼다. 오 분이 좀 넘었을 무렵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서윤이 화장실에서 나왔다. 시헌은 서윤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였다.
어제는 어두워서 잘 몰랐는데 지금 보니 꽤 서진과 닮은 구석이 있었다. 7시 10분, 주말 아르바이트를 나간다고 했다. 대충 물기를 말린 서윤은 그대로 방에 들어갔다. 화장대에 앉은 서윤의 모습을 본 서진이 서윤을 불렀다.
“누나! 밥 안 먹고 가?”
“응. 나가서 먹으려고.”
서진이 벽에 걸린 시계와 시헌을 힐끗거렸다. 시헌은 누나가 아침밥을 사 먹는 거랑 저랑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그러나 서진은 시헌의 눈치만 볼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밥을 다 먹은 현정이 또 다시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서윤이 현정과 서진의 대화를 멍하니 듣고 있던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아, 맞아. 시헌아. 너 기욱 씨 동생이라며?”
“…….”
“어제. 내가 누구랑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서진이가 그러더라고.”
“아, 누나! 내가 나중에 말하겠다고 했잖아!”
서윤의 말에 서진이 짜증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서윤은 뭐가 문제냐는 듯 가볍게 어깨만 들썩였다. 시헌은 그제야 서진이 제 눈치를 살피는 이유를 조금 알 것 같았다. 서윤은 화장대에서 콧노래를 부르며 한껏 꾸미느라 정신이 없었다.
설마 그럴 리가.
똑똑, 마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익숙한 인기척에 입술을 깨문 시헌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나가 볼게요.”
“어머, 그래 줄래?”
“야, 야! 박시헌! 아, 진짜!”
등 뒤로 짜증을 내는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문고리를 돌리자 예상했던 인물이 시헌의 앞에 나타났다. 기욱이었다. 시헌이 기욱의 동생이라는 걸 안 서윤에게 미리 연락이라도 받은 건지 기욱은 서윤의 집에 시헌이 있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욱이 집 안을 기웃거렸다. 시헌은 몸을 살짝 옆으로 틀었다. 동시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는 서진이 시헌의 등에 가려졌다. 그런 시헌의 행동에 기욱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시헌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시헌이 인상을 구기며 기욱의 손을 쳐 내려 하자 방 넘어 서윤의 목소리가 들렸다.
“서진아! 누나 나갈 테니까 이따 저녁에 연락해. 아, 기욱 씨. 금방 나갈게요!”
금방 나간다는 서윤의 말과 달리 거실로 나온 서윤은 정신이 없어 보였다.
“아, 휴대폰. 어? 열쇠가 어디 갔지?”
“……하아. 천천히 해. 괜찮아.”
정신이 없는 서윤에 기욱은 천천히 하라며 문 옆 벽에 몸을 살짝 기댔다. 시헌은 그런 기욱을 올려다봤다.
“야, 박시헌. 언제까지 서 있을 거야?”
등 뒤로 들려오는 서진의 목소리에 시헌은 고개를 살짝 돌렸다. 동시에 기욱과 눈이 맞은 서진이 기욱을 보며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밥을 먹고 있는 서진과 현정의 모습에 기욱이 한마디 했다.
“밥 먹으라잖아.”
“먹을 거야. 알아서.”
시헌은 유난히 알아서라는 말을 강조했다. 때마침 준비가 다 된 서윤이 시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방이 좁아 시헌은 몸을 살짝 옆으로 비켰다. 기욱의 시선이 바로 앞에 있는 서윤이 아닌 방 너머 서진에게 닿는 것이 어딘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서윤은 먼저 나가겠다며 집을 나갔다.
“일찍 집에 와.”
기욱의 손이 시헌의 머리를 살짝 눌렀다. 시헌은 기욱을 올려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런 시헌의 반응에도 기욱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시헌은 기욱이 이런 행동에 반응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기욱이 나간 후 시헌은 아침이 차려진 식탁 앞으로 다가갔다. 현정은 밥을 다 먹고 화장실에 간 후였다.
“언제부터야.”
“뭐?”
“너네 누나랑 우리 형. 언제부터 둘이 알고 있었냐고.”
“어? 몰라. 과팅하면서 같이 술 마셨나 보더라고. 야, 나도 자세한 건 잘 몰라.”
서진은 수저를 내려놓은 뒤 근처에 있는 물을 마셨다. 아마 그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처음에는 서윤이 말하는 남자가 시헌의 형인지 서진도 알지 못했다. 갑작스럽긴 하겠지만, 서진은 형―기욱에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시헌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면서 혹시 저 때문인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미안. 말하려고 했어.”
“그런 거 아냐.”
“그런 게 아니라니…?”
“둘이 사귀어?”
뜻밖의 질문에 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사귄다면 제가 가장 먼저 알았을 것이 틀림없었다. 서진은 그럴 리가 없다며 손을 저었다. 무엇보다 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은.
“누나 남자 친구가 너네 형 친구라고.”
“그게 무슨 소리야?”
“누나 남자 친구 있어.”
“그럼 우리 형은 뭔데?”
“야, 꼭 남친이여야지만 만나는 건 아니잖아. 그냥 친구 정도겠지. 어쨌든 누나 지금 따로 남자 친구 있어. 너네 형님 누나 남친 부탁으로 온 거야.”
“누나가 그랬어?”
“어.”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문제가 될 건 없지만, 시헌은 어딘가 불안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언제까지 밥상 앞에서 앉아 있을 수 없었던 시헌은 마지못해 수저를 들었다. 엉망으로 만들어진 계란후라이와 김치, 장조림에 멸치 볶음이 전부였다. 국은 어제 먹다 남은 콩나물국이었다.
정말 콩나물만 들어가 있는 국이란 것이 흠이지만 말이다. 본가에서 먹는 아침과 비교하면 참으로 부실한 아침이었으나 지금의 시헌은 어느 때 보다 아침을 맛있게 먹을 자신이 있었다. 서진이 해 준 아침이라면이야. 김치만 나와도 괜찮았다. 시헌은 밥을 구겨 넣으며 서진이 먹다 마신 물을 집어 마셨다.
“사귀지 말라고 해.”
“아, 뭐라는 거야. 밥 먹다 말고. 미쳤냐?”
시헌은 물 컵을 놓은 뒤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서진은 장난 정도로 여기는 것 같았지만 시헌은 진심이었다.
“어쨌든 우리 형은 안 돼.”
“너 진짜 아침부터 별소릴 다 한다. 알았어. 알았다고. 밥이나 먹어.”
서진이 웃으며 시헌의 등을 토닥였다. 때마침 다시 물을 마시려던 시헌은 식도에 걸린 물에 기침했다. 시헌이 서진을 노려보자 서진이 고소하다며 입꼬리를 올렸다. 화장실에서 나온 현정이 두 사람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는 엄청난 사실이라도 되는 양 한껏 어깨에 힘을 준 뒤 자랑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은 생각이 났어.”
“…….”
“오늘 쇼핑할 거야. 난 진짜 천재인 것 같아.”
이런 젠장.
* * *
여자의 쇼핑은 남자의 적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 사이를 돌고 도는 그 말이 결코 헛된 말은 아니라는 것을 시헌은 실감했다. 지하철역 3개 이상을 잡아먹는 지하상가 벽 한쪽에 몸을 기댄 시헌이 휴대폰을 펼쳐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4시가 조금 넘었다. 벽에 기댄 몸을 일으켜 중앙 복도로 나오자 끝없이 펼쳐진 가게들이 시헌의 눈을 어지럽혔다. 이젠 옷만 보면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멀리 시헌을 발견한 현정이 손을 흔들었다. 휴대폰을 주머니에 구겨 넣고 금방 간다며 바닥에 내려놓은 짐들을 어깨에 들쳐 멨다.
많이 쳐줘야 고등학생―실제로는 중학생이지만―으로밖에 안 보이는 학생들이 유독 많은 짐을 들고 다니는 것은 아무리 쇼핑상가라 해도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옷이란 게 이렇게 무거워질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헌은 그사이 가게 안쪽에서 계산을 하는 현정을 힐끗 바라봤다. 카운터 위로 올라가 있는 짐들을 보니 벌써 한숨이 나왔다.
“최악이야.”
시헌은 저와 비슷하게 짐을 지고 있는 서진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체력 훈련을 하는 것도 이것보다는 쉬울 것이었다.
“들어 줄까? 너 좀 많은 것 같은데.”
“됐어.”
시헌은 괜찮다며 고개를 저었다.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말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 폼 좀 잡아 보겠다는 심보였다. 그래 봤자 같은 남자지만. 옷이 가득한 쇼핑백을 들고 폼을 잡겠다고 하는 꼴도 우습기는 마찬가지였다.
시헌은 도대체 이 많은 옷을 언제 다 입어 보나 싶었다. 현정이 한 번 쇼핑을 할 때마다 사는 옷의 양을 생각하면 현정의 옷이 매번 바뀌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헌은 옷을 진열하지 않은 벽에 머리를 기댔다. 사람들의 목소리, 지하상가의 낮은 천장, 눈이 부신 전등의 조명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부모님 말야.”
시헌의 두통을 깬 것은 서진의 목소리였다. 시헌이 슬쩍 고개를 돌렸다. 화재로 돌아가셨다는. 시헌은 뭐라 대답해 줘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작해야 15살밖에 되지 않은 사이에.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어 같은 건 너무 애늙은이 티가 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서진은 그런 시헌의 반응을 크게 시경 쓰지 않았다.
“화재로 돌아가셨거든.”
“아아…….”
시헌은 결국 낮은 신음만 냈다. 사실은 현정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물론, 이어지는 말은 전혀 아니었지만 말이다.
“나한테는 누나밖에 없어.”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면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 시헌은 당연하게 들려야 할 말이 당연하게 들리지 않았다. 얼마 가지 않아 그 이유를 눈치챌 수 있었다.
“누나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시헌아! 서진아!! 일로 와 빨리!! 거기서 뭐 해!”
계산을 마친 현정이 시헌을 불렀다. 하아, 한숨을 쉰 시헌이 현정이 있는 가게 안으로 몸을 옮겼다. 서진은 짐을 가지고 있겠다며 가게 밖에 섰다. 현정의 재촉에도 시헌은 쉽사리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서진은 끝내 말을 잇지 않았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서진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그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는 오직 서진만 알았다. 그러나 시헌은 서진의 그런 행동이 하나의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현정이 부르기 전 이어지지 못한 끝매듭이라고 말이다.
그 말은 결국,
누나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소름이 끼치지 않았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시헌이 현정의 짐을 가지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현정은 다음 가게로 이동하자며 발걸음을 빨리했다. 양손 가득 짐을 지고 있는 서진과 시헌이 현정의 걸음에 따라갈 수 있을 리가 없고, 또 자연스럽게 두 사람은 뒤처졌다. 서진이 시헌의 짐을 조금 들어 주었다. 어깨가 살짝 가벼워진 시헌이 서진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시헌의 고맙다는 인사 대신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안해.”
“뭐가?”
“기욱 형님. 사실은 먼저 말해야 했던 건데.”
서진이 뭘 생각하는지 지금의 시헌으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알 수 없음이 좋았다. 이것도 저것도 전부 알아 버린다면 그것만큼 재미없는 것은 또 없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른다면 조금씩 알아 가면 될 일이었다.
그 시절 우리들은 서로에 대해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고, 그렇게 믿어 왔다.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생각인지 알지 못한 채.
* * *
쇼핑을 마치고 집에 도착했을 무렵은 저녁 9시가 넘었다. 현정의 집까지 짐을 옮겨 준 시헌은 온몸이 뻐근했다. 현정의 집에서 짐을 덜고 오긴 했으나 그렇다고 아주 짐이 없던 건 아니었다. 쇼핑을 나가곤 할 때면 현정은 꼭 시헌과 서진에게 옷 한두 개쯤 살 것을 강요했다.
시헌은 그런 식으로 사 놓은 옷들은 가끔 친구들과 밖에 나갈 때마다 종종 입었다. 현정이 고르는 옷 센스는 나쁘지 않아서 무난하게 입고 다닐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현정과 오래 어울렸던 시헌이라 이런 옷들이 박아 두면 언젠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방 안 침대에 옷이 담긴 쇼핑백을 내던진 시헌은 곧장 거실로 나왔다. 오피스텔 2층 계단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살짝 열린 문을 몇 분 정도 바라보고 있었을까? 방문을 열고 기욱이 밖으로 나왔다. 가벼운 검은 티셔츠 차림의 기욱은 시헌이 온 사실을 몰랐는지 살짝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왔네.”
기욱은 피곤에 지쳐 보였다. 최근 들어 실습이다. 국시 준비다. 정신이 없었다. 시헌은 그런 주제에 할 짓은 다 하고 다니는 기욱이 다른 의미로 대단했다. 거실의 시계를 본 기욱은 머리를 긁적였다. 계단 밑 시헌은 기욱을 보며 입을 열었다.
“형 나랑 얘기 좀 해.”
“하아, 기다려.”
기욱은 시헌을 보더니 방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색 바지에, 하늘색 셔츠를 걸친 뒤 계단에 몸을 걸쳤다. 살짝 늘어난 셔츠 밑으로 보이는 쇄골이며 넓은 어깨, 약간 구릿빛이 감도는 피부와 군데군데 배긴 잔근육들. 이제 막 중학생인 시헌과 달리 유명 대학교의 의대생, 이제 막 초등학생 티를 벗기 시작한 시헌과 달리 몇 번인가 연예인이며 모델 제의를 받았을 정도로 어른스러운 외모는 지나가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눈을 돌릴 법할 정도였다.
“무슨 일인데?”
기욱은 계단 난간에 몸을 기대 단추를 잠그며 말했다. 아무리 학교에서는 한 성격 한다고 알려진 시헌이지만, 기욱의 앞에 서면 작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말만큼은 분명히 해야 했다. 입술을 깨문 시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건들지 마.”
누구를. 뭘 어떻게? 시헌의 한마디에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은 여러 가지였지만 기욱은 이내 가볍게 웃어 보일 뿐 다른 질문은 하지 않았다. 물론, 시헌 또한 기욱의 질문에 대답해 줄 의리는 없었다. 기욱이 뭘 생각하든 그 모든 것이 정답이었다.
“너랑 관계없잖아.”
“관계있어.”
시헌이 지지 않겠다며 받아쳤다. 그 모습에 기욱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평소라면 입도 뻥긋 못 하던 동생이 오늘따라 유독 반항적이었다. 그건 그거대로 보는 재미가 있었다. 아니, 그래야 동생이지.
운오는 기욱이 자신이 아닌 시헌을 택한 것이 사뭇 못마땅한 것 같았지만, 기욱은 달랐다. 평생 열등감에 절어 있는 녀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한계가 있었다. 그러나 시헌은 아니었다.
시헌의 모습은 어렸을 적 기욱과 닮았다. 기욱은 시헌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렸다. 한껏 긴장하고 있던 시헌의 어깨가 살짝 떨렸다. 기욱은 양손을 들어 보이며 웃었다.
“생각해 볼게.”
그러나 그 대답이 시헌의 말에 대한 확신은 아니었다. 생각해 본다는 게 건들지 않겠다는 대답은 아니잖아?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시헌은 끝내 입을 열지 못했다. 기욱에게서 그 이상의 대답을 듣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제 형. 박기욱은 그런 사람이었다.
시헌은 일이 있다며 집을 나가는 기욱의 뒷모습을 보며 그저 기욱의 생각이 변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었다. 9살, 기욱과의 나이 차이는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시헌은 만약. 아주 만약의 일이지만 기욱과 조금이라도 나이 차이가 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 * *
수업 시간. 시헌은 손톱을 깨물었다. 노트에는 숫자들이 가득 적혀 있었다. 수학 문제를 푼 노트이니 숫자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헌의 시선은 노트 한쪽에 적힌 다른 숫자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시헌은 고개를 들어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서진의 등을 바라봤다. 0514. 서진의 주머니 속 휴대폰 비밀번호였다. 시헌은 책상 밑으로 손을 내려 날짜와 요일을 계산했다. 월, 화, 수……. 주말이 걸렸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시헌은 서진에게 다가갔다. 서진은 교과서를 토대로 노트 정리를 하고 있었다. 시헌은 서진의 노트를 힐끗 내려 보더니 입을 열었다.
“일요일 날 시간 돼?”
막상 말을 꺼내고 보니 학교 밖에서 개인적으로 만나자고 한 것은 처음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매번 나갈 때마다 현정이 함께였기 때문이었다. 남학생들끼리 주말에 시간을 내 놀러 가는 것은 대수롭지 않은 일지만. 시헌은 왠지 무슨 고백이라도 하는 것처럼 손에 땀이 찼다. 아, 시헌의 물음에 서진은 곤란한 듯 얼굴을 긁적였다.
“미안. 내가 일요일 날 일이 좀 있어서.”
“토요일은?”
사실 토요일은 학원을 가는 날이다. 그러나 서진과 학원을 비교한다면 그깟 학원쯤은 열 번이든 스무 번이든 빠질 수 있었다. 어차피 보강이고. 시헌의 그런 위로에도 불구하고 서진은 연신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미안해, 토요일도 좀…….”
“알았어, 어쩔 수 없지 뭐.”
시헌은 아무렇지 않은 척 자리로 돌아와 엎드렸다. 사실은 아무렇지 않지 않았지만 이런 일로 티를 내는 건 어딘가 좀 남자답지 못해 보였기 때문이다. 책상에 엎드린 시헌은 서진 누나의 생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했다.
책상에 엎드린 채 얼마나 잠이 들었을까? 꼬박 2교시는 그대로 잠을 잔 것 같았다. 시헌이 잠에서 깬 것은 다름 아닌 현정의 목소리였다. 낯선 여자, 어디서인가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시헌이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들었다. 막 잠에서 깬 시헌과 미아의 눈이 맞았다. 미아가 그런 시헌을 보며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안녕? 시헌아? 그……. 잘 잤어?”
“…….”
시헌은 어째서인지 미아가 마냥 달갑지 않았다. 11시 4분. 점심시간인 줄 알고 착각했던 시헌은 다시 책상에 엎드렸다. 취하듯 막 잠이 들려 할 무렵 시헌의 귓가로 뜻밖의 대화가 들려왔다.
“그래서 말이야, 괜찮으면 일요일에 같이 가지 않을래? 거기 오빠 완전 착해.”
“그러고 싶은데. 내가 일요일에 약속이 있어서.”
“누구랑?”
“그게 좀…….”
“지난번에 좋아한다고 했던 사람?”
머뭇거리는 미아의 대답과 이어지는 현정의 질문에 시헌은 고개를 들었다. 미아의 시선이 현정이 앉아 있는 건너편에 앉아 공부하고 있는 서진에 닿았다. 동시에 미아와 시헌의 눈이 다시 마주쳤다. 미아가 헛기침하며 그런 게 아니라며 웃어넘겼다.
“아냐, 그런 거 아냐.”
“에이! 맞으면서. 누구야? 응?”
알려 달라는 현정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갔다. 시헌은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봤다. 착각인지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서진에게 시선이 닿은 것 같았다. 교실이 시끄러워지자 동시에 서진도 무슨 일인지 궁금해 고개를 돌린다.
그런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드는 미아의 얼굴이 살짝 빨갛다. 흐음, 두 사람을 지켜본 시헌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습관적으로 휴대폰을 열고 닫은 시헌의 눈에 오늘의 날짜가 보였다. 금요일. 8일……. 10일. 선약이 있다고 했던 서진과 미아의 행동이 수상했다. 그러나 심증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젠장! 책상에 엎드린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었다.
“야. …헌!”
“박시헌!”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자 보이는 서진의 얼굴에 시헌은 살짝 놀라 몸을 뒤로 뺐다.
“놀랐잖아.”
저게 어딜 봐서 놀란 사람의 표정이란 말인가. 담담하게 대답하는 시헌의 모습에 서진은 기가 찼다. 시헌은 무슨 일이나며 물었다.
“별건 아니고. 충전기 좀 빌려줘. 있지?”
“어. 응.”
시헌은 가방을 뒤졌다. 가방 안쪽에서 기다란 휴대폰 충전기가 나왔다. 휴대폰에 선을 연결한 서진이 콘센트를 찾으려고 벽면을 두리번거렸다. 그런 서진의 모습에 시헌이 달라며 손을 뻗었다. 시헌의 책상 밑 콘센트를 발견한 서진은 말없이 휴대폰을 넘겼다.
시헌은 손에 들린 서진의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쩌면 이 안에 미아와의 문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괜히 손에 땀이 찼다. 그러나 곧 서진의 눈치를 본 시헌은 아무렇지 않은 척 책상 밑 콘센트에 충전기를 꽂았다.
수업 종이 치고, 선생님이 들어오자 서진은 등을 돌렸다. 시헌은 수업 시간 내내 발밑에 있는 서진의 휴대폰을 힐끗거렸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서진이 열심히 수업을 듣고 있는 지금밖에 없다고 몇 번이나 생각했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그런 고민은 점심을 잘 먹으라는 선생님의 말과 동시에 끝이 났다. 정말 되는 일이 없었다. 점심시간 종이 치자 현정은 가장 먼저 시헌과 서진의 자리로 다가왔다. 현정은 서진에게 휴대폰을 내밀어 보이며 말을 걸었다.
“있잖아. 너 이거 어떻게 깼어? 나 좀 알려 주라.”
현정이 휴대폰을 내밀며 서진에게 다가왔다. 모바일 게임 화면이었다. 어쩐지 수업 시간 내내 뭔가 몰래 만지작거리더니 저 게임을 한 모양이었다. 서진이 줘 보라며 손을 뻗어 현정의 휴대폰을 만졌다. 은소도 관심이 있는 모양인지 서진의 뒤로 돌아가 현정의 휴대폰을 보고 있었다. 무슨 방을 탈출하는 게임이었다.
자신 있게 현정의 휴대폰을 만지기 시작한 것과 달리 무언가 잘못됐는지 서진의 입에서 짜증 섞인 탄성이 나오기 시작했다.
“아, 이게 아닌데.”
“뭐야. 깼다면서! 됐어. 내가 할 거야!”
“아, 야. 잠깐만. 진짜 일 분. 아니 오 분만. 헷갈려서 그런 거라고.”
현정이 휴대폰을 달라며 서진과 실랑이를 했다. 서진은 꽤 자존심이 상했는지 끝까지 제가 할 거라며 현정의 휴대폰을 높이 올렸다.
“아아, 달라고! 야! 강서진!”
서진이 어지간해서 저런 행동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시헌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서진의 모습에 시헌은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보기와 다르게 이상한 구석에 승부욕이 있단 말야.
“넌 또 뭘 웃냐.”
시헌은 그런 서진의 모습이 제법 귀엽다고 생각했다. 서진과 현정의 실랑이가 슬슬 지루해지기 시작할 무렵 시헌은 뒷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미아였다. 미아는 시헌이 저를 보고 있는 줄도 몰랐다.
미아의 시선 끝은 몸싸움하는 서진과 현정이었다. 시헌을 본 미아는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당황하며 교실을 빠져나갔다. 미아가 나간 것을 확인한 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서진의 손에 있는 휴대폰을 빼앗아 현정에게 던졌다. 당연한 얘기지만 서진의 짜증이 들려왔다.
“아, 박시헌! 왜 주냐고!”
“냅 둬.”
현정을 두라는 건지. 아니면 서진을 보고 도망친 미아를 두라는 건지 스스로 말을 해 놓고도 참 의미를 알 수 없는 대답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서진은 그런 시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원래부터 이상했지만, 오늘은 좀 더 이상한 느낌? 서진은 한숨을 쉬며 의자를 집어넣었다. 교실은 이미 급식을 먹으러 간 학생들로 텅 비어 있었다.
“너 휴대폰은?”
“몰라. 확인 안 했어.”
“냅 둬. 밥 먹고 와서 보지 뭐.”
서진은 별 대수롭지 않게 손을 저으며 흘려 넘겼다. 밥을 먹고 교실로 오는 복도에서 현정이 학교 앞 편의점에 가자고 제안했다. 사실 늘 있었던 일이라 저렇게 말을 하지 않으면 이상하지만. 당이 떨어졌다니. 누가 누구에게 애늙은이라고 말할 처지인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인 가는 거고. 은소는?”
“나도 갈래.”
“알아서 사 와.”
사실 오늘따라 과자가 먹고 싶은 건 사실이었지만 시헌은 교실로 돌아갈 것을 택했다. 시헌이 혼자 교실로 가는 것은 새삼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세 사람과 헤어진 시헌은 곧장 복도를 돌았다. 교실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빨랐다.
몇몇 학생들이 자리하고 있는 교실로 들어온 시헌은 책상 밑에 있는 서진의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무슨 도둑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눈치가 보였다. 0514. 비밀번호를 입력하자 화면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원역? 난 상관없어. 근데 뭐 하려고?」
「누나 생일이라서 선물 사야 하는데. 뭘 사 줘야 할지 모르겠거든. 시간 되면 같이 가자.」
「난 괜찮아. 그럼 12시에 볼래? 영화는 좋아해?」
「극장에서 보는 건 상관없어. 그럼 12시에 보자.」
이어지는 내용은 별거 없었다. 그날 보고 싶은 영화가 있는데 평점이 어떻다는 등, 배우가 어떻다는 등의 대화였다. 그러나 그것도 곧 서진이 별다른 호응을 하지 않자 다른 화재로 내용이 바뀌었다. 집중해서 휴대폰을 보고 있던 시헌은 인기척에 재빨리 문자 화면을 나갔다.
“야, 너 내 휴대폰으로 뭐 하냐?”
“어. 게임.”
시헌은 휴대폰에 깔린 게임 버튼을 눌렀다. <방탈출2>라고 크게 적힌 로고가 휴대폰 화면을 메꿨다. 자리에 앉은 서진은 몸을 살짝 돌려 시헌의 책상에 턱을 괬다. 서진은 뜻밖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나중에 내려 받아 봐. 그거 꽤 재미있어.”
“알려 줘.”
시헌이 제 휴대폰을 꺼냈다. 평소 게임을 잘 하지 않는 시헌의 모습에 비춰 볼 때 살짝 의외이긴 했으나 아무렴 상관없었다. 서진이 이렇게 하는 거라며 다운로드 방법을 설명했으나 시헌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미아.
시헌의 머릿속에는 그 생각밖에 없었다.
* * *
모자와 이어폰을 눌러쓴 시헌은 가로수에 몸을 기댔다. 주말 오후, 지하철 역 입구부터 길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역 출구 옆에 마련된 가로수 곁 의자에는 출구에서 나오는 사람들을 기다리는 또 다른 사람들로 가득했다.
시헌의 이어폰에서 들리는 노래가 끊기고 고개를 들자 계단을 올라오는 성인 무리 틈에 섞여 현정의 모습이 보였다. 시헌은 이어폰을 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흰 셔츠에 노란 가디건, 붉은색 미니스커트에 검은 구두를 신은 현정은 중학생이라고 하기보다는 키가 조금 작은 대학생 같았다.
시헌은 현정을 발견했지만, 현정은 시헌을 발견하지 못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현정에게 다가가려던 시헌은 잠시 사람들 무리에 막혀 걸음을 멈췄다. 이런. 사람들이 전부 지나가자 시헌은 시야에서 사라져 버린 현정에 혀를 찼다.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자 반 블록 너머 보도에 남자들과 서 있는 현정이 보였다. 딱 봐도 성인, 대학생 같아 보였다. 시헌이 사람들을 밀치고 다가가자 점점 말소리가 들렸다.
“그러지 말고요. 진짜 관심 있어서 그러는 건데, 번호 좀요.”
“저 그런 게 아니라…….”
“이 근처 대학생이에요? 저도 대학생인데. 저 이래 봬도 J대 의대생이에요.”
“아, 시헌아!”
다가오는 시헌을 발견한 현정이 시헌의 이름을 불렀다. 하아, 뒷목을 긁적인 시헌은 걸음을 조금 빨리해 현정의 앞으로 다가갔다. 저들끼리 동생이냐는 식의 말이 오갔다.
시헌은 남자에게 붙잡힌 현정의 팔을 잡아당겼다. 놀란 남자가 손을 놓자 현정의 몸이 시헌의 앞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시헌이 재빨리 현정을 붙잡았다.
“조심 좀 해.”
“먼저 잡아당긴 사람이 누군데!”
현정이 억울하다며 소리를 질렀다. 시헌은 고개를 살짝 들어 현정에게 번호를 묻던 대학생 남자들을 살폈다. 시헌에 비해 키가 크긴 했으나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리 키가 큰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성인은 성인이었다.
아무리 시헌이라 해도 성인 남자들을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시헌은 근처를 빠르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더니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높였다.
“J대 의대생이요? 형 이름이 뭐예요?”
“뭐야? 얘?”
“우연이네요. 저희 형이 J대 의대 다니는데.”
“뭐, 라고?”
“이름이랑 학번이 어떻게 돼요? 형이 의과대학 총학생회 소속이거든요.”
“이 새끼 뭐라는 거야?”
남자의 언성이 올라갔다. 주변 사람들이 무슨 일인지 흘끗거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시헌은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서로 눈치를 본 남자 하나가 입을 뗐다.
“1학년인데.”
“예과요? 본과요?”
“예? 뭐?”
“그보다 이름이 뭐예요?”
그의 말을 일방적으로 자른 시헌이 남자를 올려다보며 태연하게 물었다. 분명 내려다보는 것은 남자일 텐데, 왠지 모르게 남자는 시헌의 태도가 거만하다고 느꼈다. 남자가 눈치를 보며 입을 열었다.
“김지훈이다. 하, 근데 알아서 뭐 하려고?”
“그거면 됐어요.”
시헌은 기욱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실 시헌의 말 한마디로도 이미 남자들의 사칭은 판가름이 났다. 의대에 다니면서 예과인지 본과인지도 모르는 멍청한 놈은 없었다. 뒤늦게 자신들이 실수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다른 남자가 말을 했다.
“본과야.”
“야, 너 미쳤냐?”
옆에 있던 또 다른 남자가 친구를 쿡쿡 찔렀다. 뻔뻔하긴. 시헌은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기욱이 전화를 받았다.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모양인지 주변이 시끄러웠다.
― 형, 김지훈이라고 알아?
― 누군데?
― 올해 입학했다는데. 1학년이래.
시헌은 일부러 남자를 보며 기욱에게 운을 뗐다. 올해 입학했는데 본과 1학년이라고? 기욱은 시헌이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장난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문득 편입생인가 싶은 생각이 든 기욱은 한숨을 내쉬었다.
― 기다려 봐. 야, 김지훈이 누구냐? 노트북 가지고 있는 사람?
휴대폰을 쥔 채 기욱과 동기들이 대화를 주고받았다. 몇 분 뒤 기욱이 다시 휴대폰을 잡았다.
― 하아, 이상한 짓 하지 마.
기욱은 동기들에게 별일 아니었다며 수습을 한 뒤 전화를 끊었다. 기욱과의 통화로 김지훈이라는 학생은 본과 1학년이 아니라는 것이 사실상 증명된 셈이었다. 전화를 끊은 시헌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그런 사람 없다는데요.”
“이게, 보자 보자 하니까! 너 뭐야?”
“뭔진 알 거 없구요. 학교 사칭하고 다니면서 중…. 아니, 고등학생한테 번호 뜯고 다니니까 좋으세요?”
현정의 차림을 보고 중학생이라고 하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시헌은 재빨리 말을 바꿨다. 남자들과 현정, 시헌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학교 사칭이래. 근데 고딩한테 번호 따다가 걸렸나 봐.”
“헐. 개쪽팔리겠다.”
일부러 언성을 높인 시헌의 말을 들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의 대화를 들은 남자들의 얼굴이 빨갛게 변했다. 분위기를 보고 경찰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니냐고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다. 시헌이 다시 현정의 팔을 잡아당겼다.
“뭐 해? 안 가?”
현정은 남자들이 신경 쓰이는 것 같았지만 시헌의 재촉에 이내 고개를 돌렸다. 시헌과 현정이 자리를 뜨고 남자들을 둘러싼 사람들도 하나둘씩 갈 길을 가기 시작했다. 번화가의 웅성거림 너머로 남자들의 욕설이 들려왔지만 시헌은 무시했다. 제법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학로 거리로 들어서자 현정은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울 시헌인 무섭지도 않나 봐. 진짜 대단해. 싸움 나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 정도로 안 죽어.”
“죽고 안 죽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됐어. 어쨌든 고마워.”
현정이 시헌에게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굽 때문인지 현정의 키는 시헌보다 조금 더 컸다. 시헌은 현정의 구두를 내려다봤다. 현정보다 키가 작다는 사실보다 저 구두를 신고 발이 안 아픈 것이 더 신기했다. 주변을 둘러본 시헌은 미리 알아 둔 커다란 복합 쇼핑몰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처음부터 목적지를 정하고 만난 것은 아니므로 어딜 들어가든 상관없었다. 물론, 시헌은 그 복합 쇼핑몰 안에 서진과 미아가 가려 했었던 영화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딜 들어가든 상관없는 것은 정확히 따지면 현정에게만 해당하는 얘기였다.
“근데 아까. 사칭인 거 어떻게 알았어?”
자연스럽게 영화관 앞에 선 현정이 역 앞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시헌은 현정이 그러거나 말거나 시계와 사람들 틈 사이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애당초 현정의 질문은 대답할 가치도 없었다. 시헌은 제가 자잘한 질문에 일일이 대답하지 않는다는 걸 현정이 모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물어 대는 걸 보니 어지간히 궁금했나 보다. 사람들 틈을 둘러보는 걸 반쯤 포기한 시헌이 입을 열었다.
“진짜 J대 의대생들은 그런 거, 자기 입으로 말 안 해.”
“에이, 거짓말. 말할 수도 있는 거 아냐? 왜?”
“왜냐니…….”
시헌은 이어지는 현정의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J대 의대라면. 의대 중에서는 H대 다음으로 순위가 높은 학교였다. 마이너 학과라도 간판만 해도 어지간한 대학교 못지않은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시헌은 그 기분을 왠지 모르게 알 것만 같았다.
시헌과 운오가 들어간 사립 초등학교는 들어가는 조건이 꽤 까다로웠던 모양이다. 기욱만 해도 다른 초등학교를 졸업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했다. 시헌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것은 4학년이 넘어서였다.
그때까지 주변에 있는 초등학교보다 시설이 조금 좋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느낌을 받지 못했다. 신도시라 불리는 곳 내부에서도 시헌의 초등학교는 어지간한 돈이나 명예가 있는 애들만 들어오는 학교였다.
학원에서 어린 마음에 자랑하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시헌은 제 입으로 먼저 학교를 말하지 않았다. 사립 초등학교 출신이라고 하면 달라붙는 애들이 이래저래 성가셨다. 시헌은 그 감정을 말로까지 설명해야 할 일인가 싶기도 했다. 시헌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머뭇대고 있던 찰나 현정이 무언가를 발견한 듯 소리를 질렀다.
“어! 서진이다!”
현정의 목소리에 시헌이 재빨리 현정이 바라본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막 영화를 보고 나온 서진과 미아가 있었다. 시헌은 시계를 확인했다.
12시 영화를 본다더니 이른 영화를 봤던 모양이다. 현정과 시헌을 발견한 서진과 미아가 다가왔다. 현정은 두 사람이 마냥 반가운 것 같았다.
“안녕? 둘이 뭐 하는 거야?”
미아가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당황스러운 미아의 표정이 시헌은 제법 볼만했다. 그 사실을 알긴 아는 걸까? 현정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응? 놀러 나왔지. 우리 가끔 놀러 나오곤 하거든. 아, 시헌이가 먼저 놀자고 한 건 처음이긴 하지만.”
시헌과 현정이 대책 없이 번화가에 놀러 나오는 것은 종종 있는 일이었다. 불과 며칠 전 쇼핑만 해도 특별한 계획이나 목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아마 목적이 있었다면 핑계를 잡아서 떨어질 생각이었겠지. 속이 보이는 미아의 행동을 시헌은 속으로 가볍게 비웃었다.
“그래서 어쩌라고?”
현정의 말을 듣고 있던 서진이 살짝 인상을 구기며 끼어들었다. 그러나 진짜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았다. 현정이 서진의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서진이 그런 현정을 귀찮다며 살짝 밀었다. 굽 때문에 휘청거리는 현정을 서진과 시헌이 거의 동시에 붙잡았다.
“하아, 장현정. 내가 너 그런 신발 신지 말랬잖아.”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응? 우리 어차피 할 것도 없단 말야. 그치 시헌아?”
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현정이 시헌을 끌어들이는 경우는 의견을 묻기보다는 강요에 가까웠다. 남은 건 미아뿐이라는 걸 알아차린 현정이 미아를 향해 물었다.
“같이 놀아도 되지?”
서진도 미아가 신경 쓰이는지 눈치를 살폈다. 현정은 새 구두가 불편한지 서진에게 딱 달라붙어 있었다. 구두 탓에 현정의 키는 서진보다도, 미아보다도 컸다.
“나, 난 괜찮아. 어차피 우리도 딱히 정해진 건 없었으니까.”
“하아, 미안.”
“아싸! 그래서? 뭐 하러 온 거야?”
현정이 잘됐다며 손뼉을 쳤다. 대부분의 대화는 현정의 주도로 서진과 이뤄졌다. 네 사람이 걸어가는 자리가 미아는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미아와 시헌은 뒤로 밀려났다. 현정의 반응을 예상했던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길을 걸어갔다. 딱히 현정이 저에게 관심을 둬 주지 않아도 시헌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뭐? 누나 생일이었어? 언젠데?”
“내일모레.”
“야, 미리 말해 줬어야지.”
“뭘 그런 걸 말해.”
“아, 진짜! 너무한 거 아냐?”
현정은 서진이 서윤의 생일을 미리 말해 주지 않았다는 데 기분이 상한 것 같았다. 시헌이 알기로 그날 밤을 제외하고도 현정은 자주 서진의 집에서 잤던 것 같았다. 그만큼 현정이 서윤을 잘 따른다는 뜻이었다.
네 사람은 쇼핑몰 안에 있는 액세서리 가게에 들어갔다. 가게로 들어서자 현정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현정이 사라지자 재빨리 그 옆을 미아가 차지했다. 화장실을 가겠다던 현정은 꽤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다. 현정이 뭘 하러 갔는지는 대충 짐작이 갔기에 시헌은 입을 다물었다.
“시계는 어때?”
가게 안 물건을 둘러보던 미아가 한쪽 구석에 진열된 시계를 손가락질했다. 젊은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시계 진열대였다. 주황색, 분홍색부터 밝은 계통의 색과 큐빅들이 제법 괜찮아 보였다. 그러나 가격을 본 서진이 저건 좀 힘들겠다며 손을 저었다.
결국, 가게를 몇 군데 더 돌아다닌 뒤에야 작은 큐빅 귀걸이 하나를 살 수 있었다. 생각보다 가격이 높았기 때문이다. 혹시나 잃어버릴까 귀걸이를 잘 챙긴 서진은 그제야 현정이 없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화장실을 간다던 애가 뭘 하나 싶었다.
“현정이는?”
“글쎄.”
“야, 잘 좀 챙겨라. 화장실 한번 가 보자.”
서진의 뒤로 건너편 머리띠를 보고 있는 미아가 보였다. 시헌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진이 등을 돌렸다. 서진의 말소리에 미아가 흠짓 놀라며 들고 있던 머리띠를 내려놓았다.
“현정이 찾으러 갔다 올게.”
“아, 응.”
이미 처음 왔던 매장에서 제법 멀어졌던 터라 서진의 발걸음은 성급했다. 시헌은 미아가 있는 매장 안 유리 벽을 힐끗거렸다. 계산을 하는 미아의 모습이 보였다. 서진이 빨리 오라며 재촉했다.
한참 만에 통화를 하는 현정이 멀리서 다가왔다. 현정이 보이자 서진은 전화를 끊으며 한숨을 쉬었다. 처음부터 화장실에 가지 않은 현정을 찾는 건 꽤 골치가 아팠다. 결국, 서진의 연락을 받은 미아도 나와 있었다. 현정을 본 서진이 뭘 하는 거냐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시헌은 현정이 나온 방향이 백화점 매장 안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현정의 손에는 제법 커다란 쇼핑백이 들려 있었다. 검은 쇼핑백 위에는 백화점 안 화장품 브랜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어디서 뭘 했냐. 말은 하고 가야 하는 거 아니냐. 등등 서진의 잔소리가 듣기 싫어진 현정은 손에 들린 커다란 쇼핑백을 내밀었다.
“뭐야 이거?”
“언니 선물. 급하게 샀는데 서윤 언니가 저번에 이거 사고 싶다고 했었어. 네가 좀 더 일찍 말해 줬으면 안 이랬을 거 아냐!”
“야! 지금 누가 누구한테 화내는……!!”
“됐고. 받아.”
현정이 일방적으로 쇼핑백을 서진의 품에 넘겼다. 서진이 쇼핑백 안에 담긴 화장품 세트를 보더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 서진의 모습에 현정이 시헌을 향해 슬쩍 웃으며 브이 자를 지었다. 현정의 제멋대로인 행동이 이럴 때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근데 이거 얼마짜리……”
“진짜! 가격은 묻지 말고! 언니한테 줘, 알았지? 엄마 포인트로 샀어. 아, 나 진짜 화장실.”
“아까 간다며.”
“선물 사러 간 거잖아! 시헌아 나 서진이랑 화장실 좀 갔다 올게!”
“혼자 가.”
“아, 왜. 그렇게 굴 거야?”
현정이 서진의 팔을 당겨 화장실이 있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두 사람이 사라지자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시헌이 슬쩍 고개를 돌리자 미아가 재빨리 들고 있던 머리띠가 담긴 쇼핑백을 뒤로 숨겼다. 이내 다시 고개를 돌리자 가방에 넣은 듯 쇼핑백은 사라지고 없었다.
현정은 생각보다 늦었다. 미아는 현정과 서진이 돌아오지 않자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에 비해 시헌은 아무렇지 않았다. 현정이 화장을 고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것은 늘 있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헌의 눈치를 살핀 미아가 슬쩍 말을 걸었다.
“있잖아. 시헌아. 그……. 둘이 친해?”
“어.”
“그, 그래? 그 있잖아. 혹시 둘이 사귀어?”
시헌은 미아를 살짝 내려다볼 뿐 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멀리서 현정과 서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래방을 가고, 카페를 들렀다가 몇 번인가 쇼핑을 했다. 저녁이 될 즈음 배가 고프다는 현정의 제안에 근처 프렌차이즈 패밀리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창가 쪽에 자리를 잡자 현정이 재빨리 서진의 옆에 앉았다. 서진이 가라며 현정을 밀어내자 현정은 오뚝이처럼 제자리로 돌아왔다.
“뭐, 난 창가가 좋다고. 싫음 네가 시헌이 옆으로 가든가.”
그 모습에 머뭇대던 미아가 결국 시헌의 옆에 앉았다. 알바생인지 직원인지 모를 남자가 주문을 도와주겠다며 다가왔다.
“샐러드바 4인…….”
말을 하려던 시헌은 테이블에 붙은 새로 나온 스테이크를 보고 있는 현정을 발견했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현정이 실실대며 눈웃음을 쳤다.
“어떻게 해 드릴까요?”
시헌의 뒷말을 기다리는 남자의 모습에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그냥 샐러드바 2인에. 스테이크 2개 주세요.”
“야, 박시헌 멋대로……!”
“그냥 그렇게 주세요.”
남자가 스테이크에 샐러드바 포함이라는 설명을 늘어놓았으나 시헌은 별로 귀 기울여 듣지 않았다. 시헌이 그제야 테이블에 있는 가격표를 확인했다. 개당 4만 8천 원. 현정이 데려간 이상한 식당들에 비하면 비싼 축에 속하는 것도 아니었다.
“스테이크는 나랑 현정이가 시킨 거니까 둬도 되잖아.”
“그래도…….”
“신경 쓰지 마.”
“몰라. 맘대로 해라.”
시헌은 그런 서진의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헌을 따라 현정도 음식을 가지러 가겠다며 뒤를 따랐다. 현정이 접시를 들고 있는 시헌의 옆에 붙어 손을 뻗었다.
현정의 손에 처음 보는 반지가 눈에 띄었다. 시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정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현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서진이랑 맞췄다?”
“언제 했어?”
“아까 가게에서. 아, 넌 다른 거 하고 있어서 못 봤을지도 모르겠다.”
“진짜 사귀려고?”
근처에 있던 정수기에서 물을 뜬 시헌이 그 자리에서 반쯤 비웠다. 사실 음식보다는 목이 말랐기 때문이다. 시헌의 물음에 현정이 웃으며 손을 저었다.
“우정 반지야.”
“내 건?”
“너 반지 같은 거 싫어하잖아.”
현정은 시헌이 물어 올 줄 몰랐다며 대답했다. 맞는 말이었다. 반지 같은 건 관심도 없고 불편하기만 했다. 그러나 서진과 하는 반지라면 왠지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시헌이 말없이 음식을 고르고 있자 현정이 물었다. 아무래도 시헌이 실망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도 하나 해 줘?”
그런 현정의 태도에 시헌이 가볍게 웃었다. 접시 위에 놓인 유리잔 안에 있는 반쯤 담긴 물이 찰랑거렸다.
“아니. 괜찮아. 이대로가 딱 좋아.”
저녁을 먹고, 역 근처에서 쇼핑한 뒤 돌아왔다. 여덟 시가 조금 넘을 무렵으로 대학로의 조명들이 하나둘씩 켜지고 있었다.
“뭐야? 현정이는?”
잠깐 편의점에 다녀온 서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벤치에 앉은 시헌은 어두워진 하늘을 올려다보며 대신 대답했다.
“무슨 디저트 카페인가 가서 뭐 좀 사 온대.”
“그래.”
나무 의자에 앉은 시헌은 서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서진이 휴대폰 게임을 하는 시헌을 힐끗 바라봤다. 방탈출 게임. 서진의 추천으로 생각 없이 다운을 받았는데, 생각보다 재미있었다. 그러나 시헌은 딱히 목숨을 걸고 방을 탈출해야겠다는 욕심은 없었다.
서진은 시헌이 게임을 하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서진은 시헌의 플레이를 답답해하지도, 그렇다고 짜증 나 하지도 않았다. 시헌은 서진이 묻지 않아도 얼마 가지 않아 게임을 클리어할 것이었다. 서진이 봐온 시헌은 그랬다. 늘, 적당히 대충 함에도 불구하고 완벽했다.
공부도, 체육도, 대인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본인은 별다른 자각이 없는 것 같지만, 서진은 그런 시헌이 살짝 재수가 없으면서도 부러웠다. 막 한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시헌이 고개를 들었다.
“왜 그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시헌은 서진이 바라보는 쪽을 바라봤다. 남자들. 가게 밖으로 나와 있는 간판에 가려서 잘 보이진 않지만, 낮에 봤던 남자들 같았다. 남자들 사이로 어쩔 줄 몰라 하는 현정과 미아가 있었다.
“하아.”
한숨을 쉰 시헌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의자에서 일어나 남자들 쪽으로 다가갔다. 현정과 미아를 둘러싼 남자들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대화에 섞여 들렸다.
“그러니까 미안하다고 사과했잖아요. 중학생이면 뭐 어때. 안 그래?”
“저 지금 집에 가야 돼서…….”
“그쪽은? 술 마실 줄 알아? 오빠가 사 줄게. 어때?”
시헌이 남자들의 사이를 밀치고 들어가 현정의 팔을 잡아당겼다. 높은 구두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현정의 몸을 시헌은 어렵지 않게 받아 냈다. 시헌이 현정의 몸을 놓자 현정은 서진의 옆으로 다가갔다. 현정의 뒤에 있던 미아도 머뭇대며 시헌의 근처로 걸어왔다.
“야, 아까 그 새끼.”
남자들이 시헌을 알아본 모양인지 저들끼리 욕설을 내뱉었다.
“너 중딩이지?”
“아오, 씨. 고딩은 무슨 고딩이야. 중딩 새끼가.”
현정이 말을 잘못한 듯 그들은 시헌이 중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시헌은 그런 그들을 가볍게 비웃었다. 먼저 사칭한 건 저쪽인데 누가 누굴 탓하나 싶었다. 시헌은 잠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낮에보다 일행이 많았다. 시헌은 몸을 살짝 돌린 채 서진의 뒤에 있는 지하철역을 턱 끝으로 가리켰다. 역에는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가.”
“큭큭, 야. 이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돌았냐?”
“강서진. 현정이랑 미아 데리고 가라고.”
시헌은 자신을 향해 욕을 하는 남자들을 무시했다. 그 사실에 기분 나쁜 남자 하나가 퉤, 하고 바닥으로 침을 뱉었다. 주변 눈치를 본 다른 남자가 그를 말렸다. 시헌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서진은 기가 막혔다.
시헌이 겁이 없는 건 알았지만 이건 중학생들의 싸움 수준이 아니었다. 성인 남자와 중학생들끼리의 싸움은 급이 틀렸다. 무엇보다 눈앞에 있는 남자들은 아무리 봐도 시헌보다 키며 덩치며 모든 것이 컸다. 저런 성인 남자를 상대로 뭘 할 수 있겠단 말인가. 결국, 서진이 현정과 미아를 먼저 보내기로 했다.
“나도 남을게.”
“방해야.”
“박시헌. 작작해.”
“도움이 돼?”
“뭐라고?”
“네가 남아서 뭐가 달라지냐고.”
서진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원래 성격이 저렇게 직설적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걸 굳이 이런 상황에서까지 표현해야 할까 싶었다. 중학생 한 명쯤 늘어난다고 해서 달라질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서진도 잘 알고 있었다.
시헌은 늘 어떻게든 했다. 중학교에 처음 와 인근 초등학교에서 싸움을 잘한다는 애들과 시비가 붙었을 때도, 담배를 피우다 선생님에게 걸렸을 때도 어떤 식으로든 넘어갔다. 결과론적으로는 말이다. 서진은 이번에도 그럴 것으로 생각했다.
어차피 저는 시헌에게 있어서 걸림돌밖에 되지 않은 존재였다. 서진이 현정과 미아의 손을 이끌고 역 쪽으로 다가갔다. 괜찮냐는 현정과 미아의 말이 들려왔으나 별다른 방법은 없었다. 지하철역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개찰구를 앞에 둔 서진은 결국 걸음을 멈췄다. 미아가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서진아. 어떻게 하지?”
“젠장! 역시 나갔다 올게!”
서진은 다시 계단을 올라갔다. 지하철역 근처 주변을 둘러봤으나 시헌과 남자들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서진은 입술을 깨물며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꺼냈다.
‘뭔가 방법이…….’
한참 동안 제자리에서 고민하던 서진은 폴더 휴대폰을 열어 전화를 걸었다.
“저……. 시헌이 형님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