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우린 정말 가족이 맞는 걸까?
교무실 밖 벽에 몸을 기댔다. 이어폰을 꽂고 있지만, 노래는 나오지 않았다. 살짝 열린 교무실 미닫이문 사이로 말소리가 들렸다. 지나가는 아이들이 그런 시헌을 힐끗 바라봤다. 좋은 시선은 아니었다. 문이 열리고 교무실에서 기욱이 나왔다. 시헌을 본 기욱이 목에 있는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그런 기욱과 눈이 맞은 여학생들이 얼굴을 붉히며 복도를 지나갔다.
“헐, 대박.”
“완전 잘생김. 쩌는데?”
대박. 개잘생겼어. 그런 여학생들의 대화에 시헌은 쓴웃음을 지었다. 기욱의 뒤로 담임선생님과 학년부장 선생님, 학부모들이 나왔다. 학년부장 선생님은 시헌에게 별일이 없을 거라고 했으나 학부모를 바라보는 기욱의 표정은 살짝 어두웠다. 기욱이 시헌에게 가 있으라며 손을 저었다. 시헌은 계단을 내려와 1층 로비에 있는 전신 거울에 몸을 기댔다. 노래가 나오지 않는 이어폰을 빼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서진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싸웠다며. 괜찮냐? 어떻게 됐어?」 오후 4:35
「지금. 쌤들이랑 형이 얘기 중.」 오후 4:36
「먼저 가서 미안하다.」 오후 4:47
지난번 휴대폰도 그렇고, 서진은 참 미묘한 데서 착한 구석이 있었다. 재수 없는 말투며, 툭하면 화를 내고 툴툴대긴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챙겨 주는 서진이 시헌은 마냥 싫지 않았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답장을 하려던 찰나 계단 너머로 기욱이 내려왔다. 뒤이어 내려온 학부모와 상처를 입은 남학생들은, 시헌에게 붙어 있는 기욱을 보더니 한숨을 쉬며 학교를 나갔다.
기욱의 시선이 문자를 치다 만 시헌의 휴대폰 화면에 닿았다. 시헌은 재빨리 휴대폰을 닫아 주머니에 넣었다.
“누구야? 여친?”
“아냐.”
“히히대면서 문자하던데 여친이 아니라고? 좋아하는 애?”
“그냥 친구야.”
“그래. 일단 집에 가자.”
부모님이 올 거라는 선생님의 말과 달리 기욱이 학교로 찾아왔을 때 시헌은 놀라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었다. 학교 수업을 빠지고 부모님을 대신해 급하게 온 기욱을 두고 시헌은 미한하다거나 잘못했다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
기욱도 시헌에게 왜 때렸냐, 무슨 일이 있었냐, 같은 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학교 주차장에 주차되어 있는 보기 드문 외제차 앞좌석에 앉아 벨트를 맸다. 정면 유리창 틈새로 뜯어진 콘돔 봉지가 보였다. 그 옆으로 접힌 작은 종이가 놓여 있었다.
회색빛의 재활용 종이, 손에 감기는 익숙한 재질은 학교에서 나눠 주는 가정통신문이었다. 시헌은 한 번도 기욱에게 가정통신문을 준 기억이 없다.
「공개 수업 안내문」
4월 22일, 시헌은 휴대폰을 열어 날짜를 확인했다. 내일이었다. 밑으로 내려가자 ‘초등학교’라는 문구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시헌이 졸업한 학교와 같은 인근 사립초등학교에 다니는 초등학교 5학년짜리 남동생, 박운오의 가정통신문이었다.
박운오. 운오는 초등학교 2학년부터 영재교육원에 다니고, 수학이며 과학 올림피아드 대회에서 늘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학교에서는 늘 반장이나 부반장을 해 왔으며 전교 부회장 출마를 앞두고 있었다.
가족끼리 밥을 먹을 때는 종종 내년에는 전교 회장을 할 거라며 자랑스럽게 떠들어 대고는 했던 것이 기억에 났다. 은오가 시헌과 같은 초등학교라는 것을 제외하면 두 사람의 학창 시절은 매우 달랐다. 시헌은 영재 교육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고, 부모님과 학원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나간 올림피아드 대회에서는 대충 찍은 뒤 잠을 자고는 했다.
부회장이나 회장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시헌이 전교 회장이니 부회장 같은 걸 신경 쓸 리가 없었다. 학원에 다니며 학교 수업만 간신히 따라가고 기껏해야 한 학년 위 수학 문제를 조금 풀 줄 아는 시헌과 달리 운오는 벌써 시헌과 비슷한 수준의 문제집을 풀고, 외고 입시를 준비하고 있었다.
시헌이 기욱을 부담스러워하는 하는 만큼, 동생인 운오 또한 크게 다를 건 없었다. 그런 동생이라 그런지 시헌은 운오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시헌은 손에 들린 가정통신문을 살짝 흔들었다. 운오의 가정통신문이, 부모님이 아닌 기욱의 차 안에 있다는 것은 기욱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뜻이었다.
“이거. 안 가도 돼?”
“버려.”
창문을 살짝 연 기욱이 핸들을 붙잡으며 시헌의 손에 들린 가정통신문을 살짝 바라봤다. 기욱에게 오라며 운오가 준 가정통신문이 기욱의 눈에는 그저 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내일을 기대하고 있을 운오가, 시헌은 조금 불쌍해졌다. 그러나 기욱에게 왜 공개 안 가냐는 등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우리 집은 참으로 이상한 집이다. 그렇게 생각한 시헌은 종이를 다시 접어 제자리에 두었다.
“독서실 갈 건데.”
“맘대로 해.”
차가 천천히 골목으로 들어갔다. 시헌이 방과 후에 학원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기욱이 모를 리가 없었다. 어차피 독서실에서 하는 것도 공부밖에 없으니 그게 그건가 싶기도 했다. 시헌은 기욱의 옆자리에 앉았다.
9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 귀마개 대신 노래를 틀지 않은 이어폰을 끼고 있는 시헌의 어깨를 기욱이 건드렸다. 손짓을 보니 일어나라는 것 같았다. 시헌은 이유를 묻지 않은 채 조용히 짐을 챙겨 독서실을 나왔다. 독서실을 나와 차가 있는 인근 주차장에 가자 통화를 하고 있는 기욱이 보였다.
― 어. 아니. 시헌이랑 있어. 별일 아냐. 금방 갈게.
통화 내용으로 보아 엄마인 것 같았다. 시헌은 목적지도, 무엇을 하러 가는지도 묻지 않은 채 기욱의 차에 몸을 실었다. 번화가의 한 호텔에 도착한 시헌은 가방을 두고 차에서 내렸다. 고개를 들자 호텔 벽으로 유리창들이 가득했다.
벽 전면이 유리창이었으며. 15층은 족히 넘어 보였다. 차를 대고 온 기욱과 호텔 안으로 들어갔다. 한적한 엘리베이터, 기욱이 10층 버튼을 눌렀다. 레스토랑이 있는 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주변을 둘러보는 기욱의 근처로 직원이 다가왔다.
“도와드릴까요?”
알바생인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지만 나긋한 여자의 말투에 기욱이 가볍게 대답을 했다.
“일행이 있습니다만. 확인 좀 부탁드립니다.”
“아,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기고 그녀가 다른 사람을 불러왔다. 귀에 무전이 차인 또 다른 여성이 기욱과 시헌을 안내했다.
“박하연 님 일행분 맞으신가요?”
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큰 누나―하연의 이름으로 예약이 되어 있었나 보다. 안내를 받은 두 사람은 전망이 잘 보이는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시헌은 먼저 앉아 있던 하연에게 인사를 했다. 하연의 앞으로 은오가 앉아 있었다. 기욱을 본 은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은오가 의자를 살짝 옆으로 밀었으나,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하연의 옆에 앉았다.
은오는 제 옆에 앉은 시헌이 마음에 들지 않은지 몸을 슬쩍 옆으로 피했다. 시헌과 기욱이 앉자 직원이 다가와 물을 따라 주었다. 시헌은 말없이 직원이 따라 준 물을 마셨다. 얼음은 없었으나 물이 찼다. 기욱이 하연의 옆에 있는 빈자리를 힐끗거렸다. 마시다 만 와인이 따라진 와인 잔 표면에 와인과 비슷한 검붉은색의 립스틱이 살짝 묻어 있었다.
“엄마는?”
“잠깐 볼일이 있어서 밖에 통화하러.”
기욱의 물음에 하연이 자연스럽게 대답했다. 기욱은 익숙하게 직원을 불러 주문을 했다. 시헌을 본 기욱이 멋대로 시헌의 것까지 시켰다. 시헌은 기욱이 시켜 준 음식에 대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시헌을 옆에 둔 운오가 몸을 내밀며 기욱에게 말을 걸었다.
“형, 내일 공개 수업 올 거야?”
“엄마 있잖아.”
“엄만 진료 봐야 돼서 안 된대.”
하아, 기욱이 귀찮다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연에게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다.
“좀 가 줘.”
보다 못한 하연이 테이블에 놓인 냅킨으로 물기가 묻은 입가를 닦았다.
“나도 내일 수업 있어서 안 돼.”
“남자랑 약속 있는 건 아니고?”
“박기욱 너 진짜…….”
“알았어. 생각해 볼게.”
기욱의 대답에 은오의 표정이 점점 밝아졌다. 그러나 시헌은 그런 기욱의 대답이 가지 않겠다는 완곡한 표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시 뒤 음식이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 엄마가 자리로 돌아왔다. J대학교 병원 외과의인 시헌의 엄마. 의대 시절 집안의 소개로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했다고 들었다.
“미안, 미안. 엄마가 통화 좀 하고 오느라. 늦었지?”
나이와 맞지 않게 젊은 외모의 엄마가 자리에 앉았다. 엄마가 앉자 운오는 기욱이 했던 말을 엄마에게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엄마, 형이 내일 공개 수업 온다고 했어!”
운오의 대답에 엄마가 살짝 웃었다.
“바쁠 텐데 괜찮아?”
“뭐, 어떻게든 되겠죠.”
“그래. 너무 무리하지 말고.”
기욱이 다시 하연을 노려봤다.
“내가 뭘.”
하연이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엄마와 기욱의 대화를 들은 시헌은 기욱과 하연의 대화가 포인트에서 어긋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사실을 지적하거나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사자인 은오 또한 엄마가 공개 수업에 오지 않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은오는 밥을 먹는 내내 몇 번이나 기욱에게 진짜 올 거냐며 물었다.
“형, 진짜 오기로 약속한 거야?”
“어.”
기욱은 시헌과 은오가 같은 학교에 다닐 때도 은오의 공개 수업에 온 적이 없었다. 운오는 귀찮다는 식 기욱의 대답도 좋은 것 같았다.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테이블 밑으로 살짝 내려 폴더 휴대폰을 열었다. 현정에게서 온 문자였다.
「노래방 왔는데. 학원이얌?」 오후 8:32
「이 시간에?」 오후 8:33
「울 시헌이 답장 빨라! 거의 끝나가. 10분 정도 남았엉. 이따 못 나와?」 오후 8:34
「가족끼리 밥 먹으러 왔어. 낼 학교에서 보자.」 오후 8:34
잠시 뒤 현정에게서 알겠다는 답장과 사진이 날아왔다. 시헌의 시선은 현정의 셀카보다, 구석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는 서진에게 닿았다. 노래방, 휴대폰 화질이 좋지 않아 잘 보이지 않았지만, 사진이 찍힌 줄도 모른 채 노래를 부르고 있는 서진이 보였다.
그 뒤로 수줍게 앉아 탬버린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은소도 있다. 무슨 노래를 부르는 걸까? 시헌은 사진 안쪽으로 살짝 보이는 커다란 노래방 모니터를 살폈다. 그러나 무슨 가사가 있는지 알 수는 없었다.
고개를 숙인 채 큭큭대며 답장을 보냈다. 그 소리를 들은 기욱이 시헌을 바라봤다. 기욱의 시선에 시헌은 재빨리 휴대폰을 덮었다.
때마침 엄마와 하연이 열심히 대화하고 있었던 터라 두 사람에게는 관심이 없는 상태였다. 기욱의 시선을 느낀 순간, 시헌은 마치 보면 안 되는 동영상을 보다가 부모님이 갑자기 방 안으로 들이닥친 것 같은 두려움을 느꼈다.
“뭐 해?”
“아무것도 아냐.”
“뭐야? 서운하게. 학교에서 말한 친구야?”
시헌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한편으로 기욱이 옆자리에 앉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생각했다. 흐음, 샐러드를 먹던 기욱의 시선이 시헌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분명 휴대폰은 닫혀 있건만 기욱에게 휴대폰 너머가 보이는 것 같았다.
“처음 보는 앤데.”
“…….”
기욱의 말이 진심인지, 아니면 한번 던져 본 건지 시헌은 알 길이 없었다. 제 형―박기욱은. 이런 일에서는 유독 감이 좋았다.
엄마가 마시던 와인을 따라 마시던 기욱은 턱을 괬다. 입가에 묻은 와인이 기욱의 손에 있는 냅킨에 의해 그대로 묻어났다. 소름 끼칠 정도로 검붉은 와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는 것이 꼭 기욱 같았다.
“나중에 집에 놀러 오라 그래.”
시헌이, 초등학교 때 현정 외에 제대로 된 친구가 없다는 것을 기욱은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몇 번인가 학교 숙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집에 들인 친구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기욱은 알고 있었다.
기욱은 시헌이 학교에서 왕따를 당한다 해도―그럴 일은 없지만― 상관없다고 말할 사람이었다. 현정이 있으니 마냥 왕따는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현정과 친해지고 싶어서 친해졌던 것은 아니었다. 현정과 시헌의 관계는 어쩌다 보니, 혹은 정신을 차리고 보니라는 단어가 딱 어울렸다. 그 증거로 두 사람은 서로가 어떻게 친해졌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기욱의 말에 시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서진이 아니라, 차라리 좋아하는 여자라도 있다고 거짓말을 할 걸 그랬나 하고 후회를 했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시헌이 머무는 기욱의 집에 멋대로 찾아오는 사람들, 그중에는 누가 봐도 남자처럼 생긴 사람들도 있었다.
그럴 리가.
시헌은 미친 생각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시헌과 기욱의 대화를 엿들은 운오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형, 형! 나도 학교에 좋아하는 여자애 있다?”
“그래.”
“내가 지난번에 말한 애 있잖아. 아빠가 N사 부장이라는 애. 저번에 걔가 나한테 초콜릿 줬거든 그래서…….”
운오는 별로 시헌을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다시 진동이 울렸다. 하지만 시헌은 휴대폰을 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기욱은 은오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운오의 말이 지루하다며 하품을 하더니 엄마와 하연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운오는, 시헌과 마찬가지로 집안의 대화를 이해할 수 없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려운 의학 전문 용어가 오가는 대화는 아직 초등학생인 은오에게는 먼 나라 얘기나 다름없었다. 은오는 그것이 꽤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싶었지만 시헌은 아무래도 좋았다. 결국, 운오는 휴대폰을 손에 쥔 채 만지작거리고 있는 시헌을 건드렸다.
“형 뭐 하고 있어?”
“…….”
웃으며 말을 거는 운오가 시헌은 마냥 곱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시헌이 말없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운오가 시헌을 건들 때 기욱이 두 사람을 힐끗 바라봤다.
운오는 기욱이 시헌에게 잘해 주는 것을 유독 못마땅해했다. 시헌을 향한 불만 대부분은 기욱에게서 나왔다고 해도 이상할 것 하나 없었다. 한 번은 시헌을 앞에 두고.
‘왜 하필 시헌 형이야?’
하고 물어 온 적도 있었다. 이해한다. 기욱이 이상하리만큼 은오에게 차갑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시헌도 알고 있었다. 운오뿐만이 아니다. 시헌 또한 묻고 싶었다.
왜 하필 나냐고.
질문을 하는 사람이 바뀌었을 뿐 근본적인 내용은 은오나 시헌이나 같았다. 그 질문에 기욱은 결국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은 결코 어린 동생의 철없는 질문이나 장난을 넘기는 웃음이 아니었다. 그건, 당연한 질문을 당연하게 물어 오는 상대를 무시하는 비웃음이었다. 동생을 상대로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동생이니까.’
―네가 아니라 시헌이. 시헌의 귀에 그 대답은 그렇게 들렸다.
은오가 시헌을 향해 말을 걸었다. 하연과 기욱이 와인을 마시는 대신, 오렌지 주스가 담긴 잔을 마시며 말이다.
“형 싸웠다며?”
“…….”
“미쳤어? 형 그러다가 과고도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래? 기욱 형이 형 때문에 고개 숙이고 다녀야 해?”
“박은오. 너 형한테 무슨 말버릇이야! 입 안 다물어?”
“형! 그치만! 기욱 형이 오냐오냐해 주니까 맨날 시헌 형이 싸움이나 하고 다니는 거 아냐!”
“너랑 관계없잖아. 한 번만 더 시헌이 싸운 얘기 하면 나 진짜 화낸다.”
보고 있던 하연이 기욱과 은오를 말렸다. 기욱의 손가락이 입가에 닿았다. 가만히 있으라는 신호였다. 손가락을 가린 입술 너머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이 보였다. 분명 웃을 상황은 아닌데, 뭐가 그리 기욱을 재미있게 만들었는지 시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걸 본 은오가 또 인상을 찌푸렸다. 기욱의 웃음은 은오에게는 한 번도 지어 준 적 없는 웃음이었다. 시헌은 기욱이 은오를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우린 정말 가족이 맞는 걸까? 아니면 부모님이 서로 다른 자식들을 몰래 입양한 것은 아닐까?
식사를 마치고, 주차장으로 갔다. 기욱이 제 차 근처로 다가오려는 은오를 보더니 반대편에 있는 차를 손가락질했다. 은오는 열리지 않는 차 문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발견한 하연이 다가왔다.
“은오야. 누나랑 가야지.”
“시헌 형은?”
“시헌이는……. 기욱이랑 같이 살잖아.”
“집 근처잖아. 형 집에서 내려서 걸어갈게. 아니면 형이 근처에서 내려 주면 되지.”
“기욱이 아까 술 살짝 마셨잖아. 괜히 그러지 말고 누나랑 엄마 차 타자.”
은오는 입술을 내밀었다. 하연도, 엄마도 술을 마시긴 똑같았다. 집까지는 차로 고작 10분인 데다 취할 만한 양이 아니라는 것은 어린 은오도 알았다. 은오의 팔을 잡아 이끈 하연은 기욱에게 빨리 들어가라며 손짓했다.
삐빅, 차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자 시헌은 아무 말 없이 차 안으로 들어갔다. 차창 유리 너머로 보이는 은오와 눈이 마주쳤다. 시헌은 안이 보이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알면서도 애써 고개를 돌렸다. 기욱은 엄마의 차가 나간 뒤 한참 만에 시동을 걸렀다.
시헌은 좌석 밑에 떨어진 가방을 다시 품 안에 안았다. 시동만 건 채, 약간 술에 취해 핸들에 몸을 기댄 기욱이 입을 열었다. 마치, 시헌이 무슨 질문을 할지 알고 있다는 것 같은 말투였다.
“초등학교 때. 옆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애가 자기 동생 자랑을 하는 거야.”
“…….”
“재수 없는 새끼.”
그 길로, 기욱은 집에서 엄마에게 말을 했다. 동생이 가지고 싶다고. 남동생이. 초등학교 3학년, 집에서는 단순한 어린아이의 질투와 호기심 정도로 생각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부모님이 기욱의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는지 아닌지는 잘 알지 못하지만. 엄마는 얼마 가지 않아 거짓말처럼 임신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아니, 필연인지도 몰랐다.
시헌이 생각하는 기욱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동생을 가져야 하는 사람이었다. 기욱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기욱의 손가락 끝이 시헌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시헌의 창문 뒤 은오가 하연과 멀어지던 그 길이었다.
“내 생각에 남동생은 하나면 족하거든.”
―집착, 유애, 독점, 소유욕 그것이 그를 살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 * *
등굣길, 시헌은 교복을 입고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등지고 섰다. 7:20. 휴대폰으로 시계를 확인했다. 조금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걸어서 등교하려면 마냥 여유로운 시간은 아니었다. 시헌의 등은 학생들이 향하는 방향과 정반대였다. 5분을 좀 더 기다리자 골목 끝에서 현정이 뛰어왔다.
짧은 동복 치마에, 빨간 패딩을 입은 것이 누가 봐도 눈에 띄었다. 최근 염색한 갈색 머리는 고대기가 되어 있으며 화장 또한 완벽했다. 한눈에 봐도 공을 잔뜩 들인 외모에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빨리 안 나와?”
“미안. 미안. 오늘따라 화장이 잘 안 돼서. 어때? 잘된 거 같아?”
현정이 시헌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시헌은 그런 현정을 무시하고 등을 돌렸다. 현정은 길을 걷는 내내 아이라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거울을 들여다봤다. 시헌이 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게 없는데 현정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고급 빌라나 정원 딸린 개인 주택이 가득한 동네, 사거리를 나와 횡단보도에 섰다. 인근 사립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과 달리 평범한 공립 중학교 교복을 입은 시헌과 현정의 모습은 유달리 눈에 띄었다. 횡단보도를 건너 구도시 안으로 들어갔다.
고층 건물과 10년도 더 된 것 같은 낡은 건물이 이질적인 대비를 이뤘다. 중간중간 공사 중인 컨테이너들이 눈에 들어왔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그제야 두 사람과 비슷한 교복을 챙겨 입은 학생들이 하나둘씩 나타났다. 서진과 늘 만나는 골목이었다.
“시헌아. 시헌아.”
“왜?”
“일로 와 봐.”
현정이 시헌을 낡은 주택 안쪽으로 이끌었다. 아무도 살지 않는 반지하방, 뜯어진 유리창과 텅 빈 집 안은 아침이지만 흉가와 별로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방 안에는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마시고 간 소주병들이 굴러다녔다.
초록색 대문을 열자 시멘트 사이로 잡초가 무성한 정원―이것도 정원이라고 불러야 한다면―이 나왔다. 쓰러져 가는 회색 담벼락에 몸을 기댄 현정이 핑크색 가방을 뒤적였다. 화장품 파우치 밑에 깔려 있던 담배가 나왔다. 뜯지 않은, 새 담배였다.
검은색에 파란 줄이 쳐진 담배 케이스를 현정이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담배가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가방 앞 지퍼를 열자 노란색 편의점 라이터가 나왔다. 친구 케이크에 초를 붙여야 하는데 불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사 온 라이터였다.
7시 35분. 이대로 서진이 나오는 것까지 기다린다면 어차피 지각은 확정이나 다름없었다. 시헌은, 딱히 지각하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았다. 까짓것 청소를 하거나 벌금을 내면 그만인 일. 벌점을 주면 주는 대로 받아도 관계없다. 단지 작년과 달리 지각생을 교무실로 불러 왜 지각했냐, 어째서 늦은 거냐, 하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담임선생님을 보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특히 세 사람, 이제는 한 명이 더 늘어 버린 네 명은 담임선생님의 블랙리스트였다. 주머니 안에서 손에 쥔 휴대폰에 진동이 울렸다.
「늦어. 금방 갈게.」 오전 7:38
서진의 문자였다. 답장을 보낸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요 며칠간 서진과 문자를 주고받은 게 없어서인지 비슷한 문자들이 주를 이뤘다. 늦어. 혹은 가고 있어. 그게 다였다. 빨리 와. 시헌은 재촉하는 답장을 보냈다.
「빨리 와. 현정이랑 있어.」 오전 7:39
하지만 결코 빨리 오라는 뜻은 아니었다. 현정이 담배 개비를 내밀었다. 시헌은 현정에게 받은 담배를 손에 끼운 채 현정을 바라봤다.
“피우고 갈 거지?”
담배를 입에 물자 현정이 라이터를 던졌다. 초록색 대문 위로 뿌연 담배 연기가 올라갔다. 현정 때문에 몇 번인가 피운 적은 있었다. 그러나 아직 담배가 불편한 시헌은 이내 기침을 했다. 그런 시헌과 달리 현정은 자연스럽게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시헌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담배를 문 채 입을 열었다.
“어디서 났어?”
“아는 오빠. 아, 왜 그래! 이상한 오빠 아니라니까?”
“아무 말도 안 했어.”
“엄마 같은 표정 지었잖아.”
“걱정되니까 그런 거지. 위험한 짓만 하지 마.”
역시, 더 이상은 못 피우겠다. 시헌은 반쯤 피운 담배를 보며 인상을 구겼다. 그 순간 골목에 있는 서진과 눈이 마주쳤다. 현정은 아직 서진을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무슨 일이냐며 물어 오는 현정에 시헌은 머리를 긁적였다.
서진의 등 뒤에 있던 은소가 고개를 내밀었다. 시헌을 본 은소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시헌은 손안에 있는 담배를 끌 생각도 못 한 채 서진만 바라봤다. 손가락이 뜨거워질 무렵 닳아진 담배를 바닥에 던져 발끝으로 구겼다.
서진이 시헌을 노려봤다. 화가 나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때마침 서진은 한 개비 더 피우려고 담배를 입에 문 현정을 발견했다.
“장현정, 담배 꺼라.”
“아, 왜! 이제 막 폈다고.”
“도대체 담배는 어디서 난 거야? 빨리 꺼.”
“싫어. 조금만 피우고 버릴게.”
서진과 현정의 실랑이가 이어졌다. 은소는 한발 떨어진 대문 너머에서 그런 두 사람과 시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쪽으로 들어올 생각은 없어 보였다. 서진은 현정의 담배를 강제로 끈 뒤 남은 것도 전부 빼앗았다.
“악!! 담배 내놔!! 그거 어렵게 구한 거라고!!”
“담배 피우는 게 자랑이야!”
담배를 사이에 두고 실랑이를 버리는 서진과 현정을 본 시헌이 뜬금없이 서진에게 말을 걸었다.
“쟤는 왜 너랑 와?”
“야, 박시헌, 넌 뭘 잘했다고 그런 걸 묻냐?”
은소가 서진과 마찬가지로 개발되지 않은 건물이 가득한 구도시 지역에 산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서진의 집과 은소의 집이 가깝다거나, 둘이 같이 등교를 할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서진은 그런 시헌의 마음을 잘 알지 못하는 듯 인상을 구겼다.
“왜 너랑 왜 오냐고.”
“내가 누구랑 등교하든 뭔 상관이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중요해.”
“너 말이야. 가끔 좀 이상한 거 알아? 아, 장현정! 작작 좀 해!”
서진이 결국 현정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서진이 미워!”
현정이 볼멘소리 하며 대문 밖으로 나갔다. 은소에게 도와달라고 SOS를 해 보았지만, 은소는 어색하게 웃을 뿐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멍하니 선 시헌은 서진의 말에 반박할 대답을 찾았다. 하지만 좀처럼 그 대답을 찾을 수 없었다.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긁적였다. 서진은 제가 말을 하고도 심했다고 생각했던 모양인지 먼저 사과를 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이런 비유 좀 이상한 거 아는데, 너 가끔 말야. 진짜 무슨 애인처럼 군다고.”
“뭐라고?”
“질문 말이야. 너 은소 말고도 다른 사람들이랑 있었을 때도 종종 그랬던 거 기억이나 하냐? 어쨌든, 친구로서 신경 써 주는 건 고마운데, 그러게 과민 반응할 필요는 없잖아? 누구랑 오든, 별로 네가 상관할 바도 아니고……. 하아, 괜한 소릴 했다. 가자.”
서진이 대문 밖으로 나갔다. 담벼락 넘어 현정이 서진에게 담배를 돌려달라고 소리를 질렀다.
“서진아. 서진아. 담배 돌려주면 안 돼? 응? 내가 맛있는 거 사 줄게.”
“안 돼.”
“안 피울게. 그냥 돌려만 줘.”
“너 돌려주면 몰래 피울 거잖아.”
“진짜 안 피울게.”
“안 피울 거면 안 줘도 되잖아.”
“아아아악!! 담배 달라고!”
문간에 서 있는 시헌을 은소가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시헌아. 안 가?”
은소를 힐끗 본 시헌은 말없이 대문으로 나왔다. 자연스럽게 서진과 현정이 앞으로 가고, 시헌과 은소가 뒤를 걸었다. 멀어지는 시헌의 걸음을 은소는 종종거리면서 따라붙었다. 시헌의 시선은 앞서가는 서진에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정확히는 방금 전 서진의 그 말에서 시헌의 시간은 아직도 멈춘 상태였다. 등교를 하고 있는 건지, 걷고 있는지조차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헌은 서진의 말을 곰곰이 생각했다.
유치원 때부터―혹은 그보다 더 어렸을 때부터였을지도 모른다― 친구였던 현정이 시헌이 모르는 남자를 만나 담배를 얻어 오고, 같은 학교의 남학생과 사귄다고 해서 기분이 나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상대가 서진이 되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그런 거라고? 똑같은 남자인 서진이, 다른 여자에게 안 좋은 일을 당할까 봐? 정말 그게 다인가?
답은 NO였다. 딱히 여자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었다. 언제부터였지? 서진의 옆에 누군가 있으면 시헌은 짜증부터 났다. 누구와 오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아니, 시헌에게는 중요했다. 서진이 누구와 등교를 하는 것 외에 어떤 사람의 만나는지. 누구와 무엇을 하는지 하나하나 전부 다 말이다.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애인처럼 군다는 서진의 말은 틀리지 않을지도 몰랐다.
현정이 학교 근처 편의점에서 걸음을 멈췄다. 교문을 바로 앞에 두고, 은소가 당황하며 두 사람에게 물었다.
“어디 가?”
“잠깐만 기다려. 알겠지?”
현정은 들어가기 싫다는 서진의 팔을 잡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등교 시간 막바지, 학교에서 늦은 아이들이 교문을 향해 뛰어갔으나 은소와 시헌은 두 사람이 들어간 편의점 문을 멍하니 바라봤다.
편의점 유리문 너머로 뭔가 열심히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이 보였다. 시헌의 옆에서 은소가 머뭇댔다. 할 말이 있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그런 은소가 시헌은 홍당무 같다고 생각했다.
“저기. 시헌아……. 지난번에 고마…….”
딸랑, 거의 동시에 편의점 문이 열리고 서진과 현정이 밖으로 나왔다. 종소리에 맞춰 은소가 입을 다물었다. 시헌이 못 들었다고 하며 고개를 돌렸다.
“왜?”
“아니야. 아무것도.”
아냐. 아무것도. 시헌은 그런 은소의 말을 적당히 흘려들었다. 편의점을 나온 현정은 시헌을 향해 웃었다. 아니나 다를까 서진의 손에는 초콜릿이 있었다.
현정이 주머니 속 담배를 꺼내자 서진이 집어넣으라고 언질을 주었다. 아침 조회가 시작할 시간이 넘었다. 지각은 확정된 일이고, 1교시 수업 시간이나 늦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시헌은 빨리 가자고 재촉하는 서진의 앞으로 다가갔다. 초콜릿을 베어 문 서진이 시헌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나도 줘.”
“야, 사 먹어!”
“너도 현정이가 사 준 거잖아.”
“넌 내가 먹는 것만 빼앗아 먹더라?”
“네가 맨날 뭘 먹잖아.”
시헌의 그 말에 차마 부정할 수가 없는지 입을 다문 서진은 벙찐 얼굴로 몇 번인가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은, 시헌이 서진을 놀려먹는 걸 그만둘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내, 내가… 언제… 아씨! 야! 먹어라! 먹어!”
결국, 서진은 시헌을 향해 초콜릿을 내밀었다. 재미없게 굴기는. 시헌은 서진이 좀 더 당황해도 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시헌은 서진의 팔을 잡아당겨 초콜릿을 입으로 가져다 댔다. 사실 먼저 다가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시헌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으득, 초콜릿이 입안에서 부러짐과 동시에 녹았다. 그러나 어딘가 부족했다. 시헌은 한 번 더 초콜릿을 베어 물었다. 순식간에 절반이 사라진 초콜릿을 보며 서진이 아, 하며 짜증 섞인 탄식을 내뱉었다.
“야! 그만 좀 먹어!”
그런 서진의 짜증도, 시헌은 싫지 않았다. 시헌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등 뒤로 시헌과 서진의 모습을 그대로 보고 있는 은소가 있었다. 시헌은 은소를 보며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살짝 닦았다. 손가락에 가려진 입꼬리가 올라가 있었다.
어젯밤, 기욱이 은오에 대한 얘기를 할 때, 시헌은 기욱이 자신을 물건 정도로 취급하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하기야 그 전부터 늘 생각해 왔던 거라 이제 와 새삼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시헌이 중학교 입시에 떨어지고, 중학교에 입학하자마자 사고를 쳤음에도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도 사실은 시헌을 자신의 소유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사고를 치고, 입시에서 떨어지는 것과 시헌이 기욱의 동생인 일은 별개의 일이다. 기욱의 입장에서 본다면 시헌의 행동들은 물어볼 가치도 없을 정도의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시헌이 고등학교 입시며 대학 입시에 떨어지거나. 살인을 저지른다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 틀림없었다. 오랫동안 기욱을 봐 온 시헌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기욱이 책임을 묻고 따지는 것, 그것은 자신이 기욱의 동생이 아니게 될 때뿐이다.
과도한 집착과 소유욕, 그게 기욱을 움직이는 것이라면 동생인 자신이 조금 욕심을 낸다 해서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지 않는가? 서진이 자신의 행동을 여친처럼 군다 생각하여도 상관없다. 무슨 말을 하든, 뭐라 생각하든 괜찮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서진을 보는 것만큼은 용서할 수 없었다.
욕을 하는 것, 화를 내거나, 울고 우는 것부터 모든 것이 시헌을 향하지 않으면 안 됐다. 시헌이 기욱의 동생으로 있는 한 기욱의 것인 것처럼, 시헌과 서진이 친구로 있는 한 서진은 시헌의 것이어야만 했다.
시헌은 손에 묻은 초콜릿을 다시 핥았다. 이건, 그러니까 시헌 나름의 경고였다. 그 모습을 본 은소의 표정이 굳자 시헌은 아무렇지 않은 듯 어깨를 들썩였다.
“뭐 해? 가자.”
시헌이 서진의 등을 밀었다. 곧이어 상황을 모르는 현정이 서진의 옆으로 달라붙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등굣길이었다.
* * *
5:20,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이 떠졌다. 시헌은 휴대폰으로 알람을 확인했다. 여섯 시 삼십 분에 맞춰진 알람. 십 분 정도 더 잘 수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방 너머 물기에 젖은 발소리가 들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갔다. 막 샤워를 하고 나온 기욱이 목에 수건을 두른 채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일찍 일어났네.”
“형은?”
“방금 들어왔어. 더 자지 그래.”
시계를 본 기욱의 제안에 시헌은 고개를 흔들었다.
“잠 깼어.”
“그래?”
반쯤 열려 있는 욕실 문 사이로 수증기가 흘러나왔다. 잠옷 차림의 시헌에 기욱은 열려 있는 욕실 문을 손가락질했다. 시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기욱이 나왔던 욕실로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기욱이 샤워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시헌은 적당히 머리를 감고 씻은 후 거실로 나왔다. 그사이 옷을 갈아입은 기욱이 간단한 아침을 차렸다. 띵― 토스트기에서 빵이 올라왔다. 기욱이 접시에 빵을 올려 잼을 바르는 사이 시헌은 우유를 꺼내 잔에 따랐다. 시헌의 앞에 앉은 기욱은 빵을 입에 문 채 전화를 받았다.
―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 그럼 어제 어디 있었는데?
― 하아, 그냥. 술 좀 마시고 아는 동생네서 잤어. 정훈아.
― …….
― 내가 너 많이 생각하는 거 알잖아.
여자의 목소리는 아니다. 기욱이 상대를 부르는 이름만 들어도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친구와 할 만한 대화는 아니었다.
― 그럼, 알지.
휴대폰 수화기 너머로 이따금 들려오는 ‘사랑해’라는 단어는 시헌이 기욱과 전화 상대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단서였다.
― 그래. 나도 사랑해.
그렇게 말하는 기욱의 표정에는 어떠한 감정도 들어가지 않아 있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아무리 형이지만 이런 기욱의 어디가 좋다고 쫓아다니는지. 시헌은 가끔 사람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시헌은 먹던 빵을 반쯤 내려놓은 뒤 우유를 마셨다.
“다 먹지 그래.”
“그냥. 입맛이 없어.”
여섯 시. 아직 충분히 여유가 있는 시간이었다. 시헌은 이미 다 마신 우유가 담긴 유리잔 끝을 이빨로 살짝 깨물며 기욱을 불렀다. 형. 때마침 전화를 끊은 기욱이 무슨 일이냐며 고개를 들었다.
“형. 나 좋아하는 사람 생긴 것 같아.”
전화가 끝나니 문자였다. 휴대폰 화면을 힐끗거리며 문자를 하던 기욱은 시헌의 말에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내 끝을 맺지 못한 문자를 두고 그대로 휴대폰을 닫았다. 아무렇지 않게 굴 거라는 시헌의 예상과는 조금 어긋난 반응이었지만 그렇다고 과한 반응은 아니었다.
당연했다. 시헌은 여태껏 기욱에게 이런 말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 친구가 있다는 사실을 기욱에게 걸렸을 때, 좋아하냐는 기욱의 말에 시헌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런 시헌이 먼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제아무리 기욱이라 해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얘기였다.
“어떤 사람인데?”
기욱의 말은 흔히 남자가 여자에 대해서 말할 때 습관처럼 나오는 ‘예뻐?’ 혹은 아직 학생인 시헌의 입장을 배려해 ‘몇 학년인데? 같은 반이야?’ 하는 질문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이냐니. 마치 여자가 아닐 수도 있다고 전제를 까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데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
다행히 기욱은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것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흐음, 기욱이 손끝으로 테이블을 툭툭 건드렸다. 기욱의 긴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시헌의 눈 또한 기욱의 손가락을 따라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내 기욱이 턱을 괸 뒤 입을 열었다.
“나도 네 나이 때 첫사랑이었어.”
“어떻게 됐어?”
“자살했어.”
“왜?”
“왕따였거든.”
시헌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이유도 있고, 기욱의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은 것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인데. 그 애가 왕따였고 자살했다고?
기욱의 성격을 생각할 때 결코 정상적인 사랑이 아닌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정작 기욱은 첫사랑의 죽음에 대해 그 어떤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것 같았다.
기욱은 슬슬 가 봐야 한다며 접시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나가기 전, 기욱은 할 말이 생각났다는 듯 등을 돌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꽤 잘해 줬다고 생각했는데. 살다 보면 말야, 아무리 해도 가질 수 없는 것이 있더라고. 남들이 가질 바에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하는 것이 편할 때도 있거든.”
시헌은 한동안 기욱이 나간 현관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 말이 시헌을 향한 것인지, 아니면 기욱 자신을 향한 말인지 알 수는 없다.
아침, 묘한 감정이 들었다.
* * *
쉬는 시간, 시헌의 앞에 자신의 의자를 가져와 앉은 현정이 다리를 꼬며 큐빅이 박힌 검붉은 색 매니큐어를 자랑했다.
“시헌아! 이거 어떻게 생각해?”
“어. 예뻐.”
“그 세화역 사거리 있잖아. 거기에 샵이 새로 생겼거든.”
시헌은 현정의 말이 거의 들리지 않았다. 현정의 무릎에는 체육복 상의가 덮여 있었다. 시헌은 책상에 턱을 괴며 현정의 매니큐어를 봤다. 시헌이 보기에는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현정은 큐빅의 위치가 틀어졌다는 등 샵에 있는 언니가 별로라는 등의 불평을 늘어놓았다.
시헌은 그런 현정을 보며 말없이 그렇구나 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나마 하는 고갯짓조차 아무 의미가 없는 행동이었으나 현정은 신경 쓰지 않았다. 현정은 시헌이 대답하지 않아도 끝까지 말을 이어 가고 있었다. 시헌의 대답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뜻이었다. 그렇지만 옆에서 종달새처럼 떠들어 대는 현정이 싫거나 귀찮지는 않았다.
현정이 한참 새로 만나기 시작한 오빠에 관한 얘기를 늘어놓을 무렵 다른 반에서 들어온 한 여학생이 현정의 매니큐어를 보고 신기하다는 듯 다가왔다.
“그래서 있지 시헌아, 그 오빠가 나한테…….”
“와, 이거 네가 한 거야?”
무릎을 덮는 단정한 교복에 화장도 하지 않은 깨끗한 얼굴, 검은 긴 생머리에 평범한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시헌은 고개를 살짝 들어 여학생을 살펴봤다. 그래도 또래 여학생들 기준으로 예쁘게는 생겼네. 시헌은 현정에게 말을 거는 여학생과 현정을 가만히 바라봤다.
보통 평범한 여학생들은 현정을 보면 껄끄러워하거나 피할 만도 할 텐데 그녀는 현정에게 말을 거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가. 그러나 곧 친구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성격인가 보다.
“매니큐어 되게 예쁘다.”
“응? 아냐. 샵이야. 근데 진짜 괜찮아? 이상하지 않아? 아, 거기 언니 진짜 짜증 난단 말야.”
샵이라는 현장의 대답에 그녀가 살짝 당황했다. 한 번 갈 때마다 기본 5만 원, 큐빅이나 디자인이 추가될 때마다 심하면 몇만 원 단위로 돈이 들어갔다. 결코, 평범한 중학생이 아무렇지 않게 하고 다닐 만한 가격은 아니었다.
현정은 그녀에게 시헌에게 했던 말들을 처음부터 다시 하기 시작했다. 그래도 아무 반응이 없는 시헌이 마냥 서운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성의껏 맞장구를 쳐 줄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헐, 그건 좀 아니지 않아? 너무했다.”
“그치? 괜찮을 줄 알았는데. 다시는 안 가려고.”
시헌과 달리 그녀는 현정의 말에 맞장구를 쳐 줬다. 그런 모습을 본 시헌은 여학생은 여학생이라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현정이 여학생의 가슴 근처를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어? 명찰 없네? 이름이 뭐야?”
“유미아. 미아야. 3반인데,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거든.”
“어쩐지. 첨 보는 얼굴이더라. 이름 되게 예쁘다! 부러워.”
“너도 이름 예쁜데?”
“농담 마. 시헌이가 저번에 내 이름 보고 뭐라고 그런 줄 알아? 트로트 가수 이름 같다고 그랬다고! 진짜, 그거 때문에 얼마나 상처 받았는데!”
현정이 가만히 있는 시헌을 걸고넘어졌다. 처음 듣는 이름에 미아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시헌에게 닿았다. 현정이 미아에게 시헌을 소개했다.
“여기 옆에 뚱한 표정 짓고 있는 애가, 우리 시헌이야.”
“…….”
그놈의 우리라는 단어 좀 빼 줬으면 싶지만 들을 것 같지 않았다. 이젠 일일이 말하는 것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때마침 뒷문으로 편의점에 다녀온 서진과 은소가 들어왔다.
가위바위보를 해서 진 사람이 편의점에 갔다 오는 것이었다. 시헌은 서진의 눈치를 살피며 같은 계속 같은 것을 냈음에도, 결국 마지막에는 은소와 서진이 가게 되었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끝까지 주먹을 낼걸, 하고 후회가 들었다. 현정은 서진의 편의점 봉투 낚아채듯 빼앗았다.
“왜 이렇게 늦었어!”
현정의 잔소리에 서진도 마냥 지지는 않았다.
“아, 학주 서 있었다고.”
후우, 서진이 시헌의 앞자리에 앉아 몸을 돌렸다. 아침 댓바람부터 학주와 달리기를 해야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운동장을 가로질러 온 것이 틀림없었다. 이 학교는 이상하게 운동장만큼은 어지간한 학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넓었다.
시헌은 현정이 주는 막대사탕을 받아 입에 물었다. 아, 칠판을 본 시헌은 다음 시간이 영어라는 사실을 깨달았으나 이내 아무렇지 않게 사탕을 입안에 넣었다. 수업 시간에 사탕 좀 먹는다 해서 닳는 것도 아니니까 말야. 입안으로 요구르트 맛이 퍼졌다.
“으…….”
“왜 그래 시헌아?”
“요구르트 싫다고 했잖아.”
“아, 몰라. 사탕이 다 똑같은 사탕이지!”
현정은 뻔뻔했다. 시헌은 주머니에 구겨 넣은 종이를 꺼내 확인하며 인상을 구겼다. 그런 시헌의 귀 너머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서진과 떠들고 있는 미아가 보였다. 둘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어?
“서진아 안녕?”
“아, 응. 여기 있는 줄 몰랐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내일 방과 후 수업에서 보자.”
으득, 입안에 넣은 사탕이 반으로 쪼개졌다. 시헌은 정확히 반이 쪼개진 막대사탕을 꺼내 보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이미 미아는 사라지고 없었다. 시헌은 사탕을 다시 입에 넣었다. 으드득, 남은 반쪽의 사탕도 입안에서 전부 쪼개졌다.
시헌과 초콜릿을 먹고 있는 서진의 눈이 마주쳤다. 그런 서진의 얼굴에 순간 짜증이 일더니 이내 한숨과 함께 먼저 초콜릿을 내밀었다. 이젠 왠지 이 상황이 웃겨 왔다. 시헌은 서진의 초콜릿을 받아먹으며 방금 전 나간 미아에 관해 물었다.
“아는 사이야? 전학생이라던데.”
“방과 후 수업 들으면서 알게 됐어.”
“방과 후?”
“학교에서 하는 거. 너넨 학원 다니니까 관심 없잖아.”
그러고 보니 그런 게 있었던 것 같기도 했다. 정말 관심은 없지만. 짧은 진동이 울리자 휴대폰을 꺼냈다. 폴더 휴대폰을 열자 화면이 보이지 않았다. 시헌은 그사이 현정과 얘기 중인 서진의 어깨를 건드렸다.
“초콜릿 더 안 줄 거다.”
“그런 거 아냐.”
“그럼 뭔데?”
시헌이 화면이 나오지 않은―일부러 전원을 꺼 버린―휴대폰을 서진 앞에 흔들었다. 시헌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서진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 형한테 전화해야 하는데 폰 좀 빌려줘.”
“어, 어? 알았어.”
시헌은 서진의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휴대폰을 열자 비밀번호를 입력하라는 화면이 떴다. 시헌이 휴대폰을 쥐고 있자 서진이 하는 수 없이 비밀번호를 불러 줬다. 0514. 아무리 봐도 날짜 같았다. 그러나 서진의 생일은 아니었다.
“누구야?”
“뭘? 아, 그거. 우리 누나 생일. 하여튼 박시헌. 감은 좋아.”
“전화하고 올게.”
“자, 잠깐만! 야! 가지고 나가면 어떻게!! 종 쳤……. 미쳤나. 저거.”
복도를 나오자 교실로 들어오려는 선생님과 마주쳤다.
“어머, 시헌아!! 어디 가는 거니!!”
“화장실요.”
시헌이 가는 방향은 화장실과 반대였다. 시헌은 대충 복도를 돌아 계단으로 내려왔다. 무슨 도둑질이라도 한 사람처럼 주변을 살핀 뒤 서진의 휴대폰을 만졌다. 유미아. 최근 통화기록에 익숙한 이름이 보였다. 통화기록을 내려 본 시헌은 문자 메시지함을 들어갔다.
「나도 방과 후 신청해도 안 늦을까?」 오후 7:48
「영어쌤한테 말하면 아직 괜찮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어.」 오후 7:50
「그냥 다음번에 할래.」 오후 7:55
그 뒤로도 문자가 이어졌다. 누나가 H대 간호학과고, 4학년이라는 것. 다음 주 일요일 날 오전에 번화가에서 보기로 했다는 내용이었다. 어림잡아 서진과 미아가 연락을 주고받은 지 일주일 정도 된 것 같았다.
시헌은 서진과 만난 지 1년이 좀 지나서야 들은 얘기들을, 고작 일주일밖에 되지 않은 미아가 알고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 기분이 나빴다. 시헌은 휴대폰을 켜 날짜를 확인했다.
10일. 12시 주원역 3번 출구.
시헌은 그것이 마법의 주문이라도 되는 것처럼 손톱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 * *
시헌은 뒷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왔다. 수업 시간, 몇몇 학생들이 등을 돌려 교실로 들어오는 시헌을 살짝 힐끗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판서를 하던 선생님이 한발 늦게 이미 자리에 앉아 버린 시헌을 발견하고 한숨을 쉬었다.
시헌은 휴대폰으로 서진의 등을 찔렀다.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서진이 몸을 돌렸다. 그러나 이내 필기를 놓칠까 다시 볼펜을 들었다.
“이따 돌려줘.”
서진은 시헌의 대답을 기다릴 틈도 없는지 고개를 돌려 칠판을 봤다. 칠판이 밉기는 또 처음인 것 같았다. 칠판을 상대로 질투라니 그건 그거대로 웃겼다. 설령 질투라 한들 달리 어떻게 할 방법이 없었다. 시헌은 서진의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서랍을 뒤지자 교과서가 나왔다. 수학 교과서. 하지만 지금은 영어 시간이었다. 상관없었다. 아무 페이지나 펼친 뒤 칠판에 적힌 영어들을 힐끗거렸다. 별거 없는 가벼운 동화였다. 저런 동화가 뭐라고 저렇게 열심히 필기하는지 시헌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업을 듣지 않은 시헌은 발끝으로 서진을 툭툭 건드렸으나 서진은 반응이 없었다. 아니, 시헌이 건드리는 걸 알면서도 무시하는 걸지도 몰랐다. 몇 번 건드리던 시헌은 반응이 없는 서진을 보며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래. 수업이나 열심히 들어라. 영어 선생님의 자장가에 가까운 수업에 시헌은 결국 엎드려 잠을 청했다.
“아, 짜증 나. 저번에 학원 빼먹은 거 엄마한테 걸렸어.”
“너네 학원은 문제집 뭐 풀어?”
“어? 그냥 시중에 있는 거? 다른 학교 기출문제집 모아 주기도 하고. 그냥 별거 없어.”
점심시간, 급식실에 내려가기 전 시헌의 자리에 모인 현정과 서진이 떠들었다. 시헌이 책상에 앉지 말라 몇 번이나 말했으나 현정은 듣지 않았다. 막 잠이 깬 시헌은 제 앞을 가리는 현정을 멍하니 바라봤다. 책상에서 내려온 현정은 자신의 가방을 뒤졌다. 학원 문제집이었다.
문제집이라고 해 봤자 인근 학교의 중간, 기말고사가 모아진 프린트물을 파일 처리한 것이 전부였다. 아아, 저거 있지. 집 어딘가에. 시헌이 별거 아니라며 넘겨짚고 있는 것과 달리 서진은 현정이 건네준 문제집―그걸 문제집이라고 할 수 있다면―을 꽤 진지하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시헌은 ‘현정과 제가 받은 문제집이 다른 거였나?’ 하고 생각했다. 현정은 문제집을 보고 있는 서진을 두고 은소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은소는? 학원 안 다녀?”
“병원비 문제 때문에. 아직 학원은 힘들 것 같아.”
“나중에 학원 다닐 거면 우리 학원으로 와!”
은소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진짜 학원에 갈 것 같은 표정은 아니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질 기미가 없자 시간을 확인한 시헌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데없이 뒷문으로 향하는 시헌을 서진이 불렀다.
“시헌아! 어디 가? 밥은?”
시헌은 칠판 끝 압정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는 급식 가정통신문을 살짝 바라봤다. 여느 때와 다르지 않은 평범한 식단. 딱히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좋아하는 음식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오늘은 점심이 먹고 싶지 않았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안 먹어.”
“어디 가는데?”
“도서실.”
“하, 마음대로 해라.”
서진이 시헌에게서 등을 돌렸다. 교실을 나온 시헌은 뒷문으로 현정과 대화를 하는 서진을 힐끗거렸다. 어쩌면 급식이 먹고 싶지 않은 이유는 오늘 본 문자 때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도서실로 걸음을 옮겼다.
* * *
“박시헌!”
거실에서 기욱의 목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앉아 노트북으로 영화를 보고 있던 시헌은 영화를 중단한 뒤 시간을 확인했다. 노트북을 닫은 뒤 방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을 확인한 시헌은 그대로 침대에 누워 대답했다.
“형, 왜?”
시헌이 대답하기 무섭게 기욱이 시헌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거꾸로 보이는 기욱의 모습에 시헌은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바로 했다. 기욱이 문 바로 옆 벽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팔짱을 낀 기욱의 손에 익숙한 종이가 들려 있었다. 도원에게서 받은 생일 파티 초대장이었다.
아, 이런 거지 같은 경우가.
시헌은 그제야 도원의 초대장을 거실 폐휴지 쓰레기통에 아무렇지 않게 던져 두었던 것을 생각했다. 깜박하고 집까지 가지고 온 탓이었다. 설마 그걸 기욱이 주울 거란 생각은 못 했지. 이럴 줄 알았으면 밖에 나가서 버릴걸, 하고 후회했으나 이미 늦은 뒤였다.
“얘네 아빠 내 담당 교수님이신 거 알지?”
“그건 형 사정…….”
“갔다 와.”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기욱이 책상 위에 초대장을 올려놓고 방을 나갔다. 자세히 보니 한 장이 아니라 두 장이었다. 현정이랑 갔다 오라는 암묵의 명령이었다. 시헌은 기욱이 두고 나간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시헌의 손이 초대장을 가로로 찢으려 했다. 도어락 소리가 들렸다. 기욱이 집을 나간 모양이다. 집 안에 사라진 인기척에 시헌은 한숨을 쉬며 초대장을 내려놓았다. 초대장은 끝부분이 살짝 찢겨져 있었다. 시헌은 침대위에 굴러다니는 휴대폰으로 현정에게 전화를 걸었다. 짧은 수화음이 이어지고 이내 현정이 전화를 받았다.
― 뭐 해?
― 응? 나 학원 쉬는 시간. 쌤이 너 학원 왜 안 나오냐고 물어보시던데?
― 귀찮아서.
― 내가 낼 숙제 프린트 가져다줄게.
현정은 시헌이 학원을 땡땡이치는 것이 별로 놀랍지 않았다. 시헌은 도원의 생일 파티에 관해 이야기해야 할 것 같았다.
― 형이 생일 파티 가래.
― 누구 생일 파티?
― 김도원인가 하는 애.
김도원이 맞았나? 시헌은 성조차 헷갈렸다. 잠시 침묵이 일던 현정이 한숨을 쉬었다.
― 버려. 그걸 왜 가?
― 버렸어.
― 근데?
― 형한테 걸렸어.
― 울 시헌인 꼭 이런 데서 멍청하게 굴더라. 알았어. 언젠데?
기욱을 걸고넘어지자 현정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대답했다.
― 나도 몰라.
시헌은 생일 카드를 펼쳐 봤다. 이번 주 금요일이었다. 현정이 큭큭대며 웃었다.
― 학원은 빠지니 좋네. 아, 나 쉬는 시간 거의 끝나 간다.
전화를 끊을 무렵 현정은 알 수 없는 말을 던졌다.
― 근데 기욱 오빠 말야.
― 우리 형이 왜?
― 어딘가 특이한 것 같아. 아, 근데 넌 달라. 쌤 들어왔다! 시헌아, 낼 학교에서 보자!
현정이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시헌은 전화가 끊긴 휴대폰을 바라봤다. 다르다는 현정의 말이 시헌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과 기욱의 무엇이 어떻게 다르다는 거지. 그러나 다시 질문하기에는 너무 늦은 뒤였다.
결국 휴대폰을 보던 시헌은 다시 침대에 몸을 던졌다. 잠이나 자자.
* * *
“하아.”
U호텔의 작은 홀을 빌려 만든 생일 파티 장소에 시헌은 노골적으로 한숨을 쉬었다. 생일 파티에는 도원의 초등학교 친구들과 학원 친구들이 주를 이뤘다. 간혹 도원의 친척이라는 몇몇 어른들이 얼굴을 비친 뒤 사라지고는 했다.
도원의 초등학교 친구들이라고 해 봤자, 이름 있는 집안의 아이들이거나 혹은 그대로 사립, 국제 중학교에 진학한 아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 너도 왔네? 잘 지내고 있어?”
“그럭저럭.”
시헌은 자신을 알아보고 다가오는 친구들에게 단답으로 말을 잘랐다. 그렇게 다가오는 초등학교 동창 친구들을 쫓아낸 뒤 십 분이 좀 지났을까?
“맞다. 시헌아, 너네 오빠 K과고 졸업했다면서? 우리 친척 누나도 거기 다니고 있거든. 너네 오빠 안다고 그랬어.”
“어. 그래?”
“J대 들어갔다고 들었는데…….”
시헌과 현정의 집안에 대한 소문이 퍼진 모양인지 처음 보는 아이들이 다가와 친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난 네가 사립중 입시에 떨어진 거 별로 안 믿겨.”
“맞아, 학원에선 네가 유학 준비하고 있단 얘기도 돌았거든.”
“유학은 생각 없는데.”
말도 안 되는 헛소문에 참다못한 시헌이 한마디 했다. 이런 식의 대화가 여러 번 반복되니 슬슬 지긋지긋했다. 그러나 늘 마지막은 어딘가의 명문학교 얘기였다. 이쯤 되면 다들 오기 전 대본이라도 써 온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근데 나. 일부러 떨어진 건데.”
“아, 그렇구나.”
시헌의 말에 어색하게 대답한 아이들은 결국 아무 수확도 얻지 못한 채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갔다. 그런 반응도 초반뿐. 시간이 지나자 시헌이 어울릴 생각이 없는 걸 눈치챈 모양인지 누구 하나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그에 비해 학원 친구들을 만난 현정은 시헌의 생각보다 재미있게 놀고 있었다. 도무지 전화로 초대장을 버리라고 말했던 사람 같지는 않아 보였다. 현정은 그런 애니까. 상관없다.
시헌은 구석에 몸을 기댄 채 현정과 홀에 있는 아이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휴대폰을 만지던 시헌에게 현정이 옆으로 다가왔다. 현정이 뒷짐을 지며 시헌의 옆에 붙었다.
어깨가 부딪히자 시헌은 고개를 돌렸다. 평소보다 한껏 차려입은 현정의 모습이 보였다. 화장도 깨끗하며 머리도 단정했다.
고작 중학교 2학년, 미용실 연간 회원권을 끊고 온갖 샵을 돌아다니는 현정의 행동은 아무리 잘사는 집 아이들만 모인 곳이라 해도 부러움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몇몇 남학생들에게 적극적인 대시까지 받는 현정이 혼자 있는 시헌에게 무슨 용무인가 싶기도 했다. 현정은 여자아이들에게 둘러싸여 떠들고 있는 도원을 살짝 손가락질했다.
“쟤 말야, 부담스러워서 싫어. 저번에 나한테 고백하더라고.”
“정신이 나갔네.”
도원이 언제 그런 짓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미친 짓임은 틀림없었다. 받아 줬어? 어떻게 했어? 등의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은 현정이 도원의 고백을 거절했을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도원이 아니라 어떤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현정이 화장하고, 네일이니 머리니 하는 외모에 평범한 또래 여자 수준 이상으로 관심이 많은 것은 일종의 신호일지도 모른다고 시헌은 생각했다.
현정의 그런 행동은, 또래보다 외모에 관심이 많아서가 아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는, 어른이 되어서 전부 잊어버리고 싶다는, 살기 위한 발버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