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 박기욱 (2/83)

Chapter. 1 박기욱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현관에 신발을 벗고, 습관처럼 무미건조한 대답을 했다. 당연하지만 들려오는 대답은 없었다. 초등학교 때는 형식적인 대답이라도 돌아왔는데 말이지. 1년이 지난 지금은 그게 딱히 서운하지는 않았다. 익숙하지 않았던 형의 자취방도, 지금은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어디까지나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시헌이 익숙해지지 않은 것은 집이 아닌 어렸을 적부터 보아 왔던 큰형뿐이었다.

11시 30분, 정상적으로 학원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활짝 열린 창문 때문에 거실 공기가 찼다. 찬 공기 사이로 나가지 않은 옅은 담배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거실 한가운데 낯선 여자가 있었다. 시헌의 시선을 느낀 여자가 시헌을 향해 손을 흔들며 말을 걸었다.

“어머, 네가 시헌이야?”

“…….”

시헌은 살갑게 묻는 여자가 별로 달갑지 않았다. 여자의 말에 시헌이 한 행동이라고는 가방끈을 쥔 채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가방끈을 양손으로 쥐어 맨 시헌은 낯선 여자를 위아래로 훑었다.

여자는 흰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다. 셔츠 사이로 보이는 맨다리, 반쯤 말려 올라간 팬티가 그대로 드러났으며, 위쪽으로는 프릴이 달린 브래지어가 보였다. 화장이 되어 있었지만 땀 때문에 약간 번진 것 같기도 했다.

시헌의 노골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헌의 시선을 약간 즐기는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그만큼 남 앞에서 벗는 게 익숙한 여자이거나. 혹은 노출증 환자거나. 어느 쪽이든 여자가 시헌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든다는 변함이 없었다.

중학교 2학년, 호기심이 왕성할 나이에 셔츠 한 장에 속옷만 입고 있는 여자를 보면 신경이라도 쓰일 법하지만, 그녀를 바라보는 시헌의 표정은 그저 미술실에 있는 마네킹을 보는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성인 여성이라 그런지 시헌 또래의 여자에 비해 몸매는 괜찮았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마네킹을 보고 예쁘다고 말할지언정, 마네킹이 예쁘다는 이유로 발정을 하는 사람은 없듯이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는 시헌도 마찬가지였다.

시헌이 그녀에게 성적으로 관심을 가질 일은 결코 없었다.

그녀의 허벅지 사이에로 묻어 있는 마른 정액을 본 시헌은 반나체 상태로 안쪽 방 침대에 다리를 꼬고 앉아 노트북을 하고 있을 9살 차이가 나는 형에 대해 생각했다.

시헌의 형, 박기욱. J대 의대 본과 2학년, 장녀인 누나의 뒤를 이어 의대에 입학한 시헌의 형이었다. 시헌은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형이 어색하기보단 불편했다.

사실 처음부터 기욱이 불편했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엔 형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챌 지능조차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일은, 초등학교 3학년, 세상에 태어난 지 10년이 되는 해. 나이가 한 자리 숫자에서 두 자리 숫자로 바뀌던 그해 방학에 일어난 일이었다.

수학 학원에서 영어 학원으로 가려던 중 영어 학원 숙제를 집에 두고 온 시헌은 급하게 집으로 들어갔다.

“아응, 읏… 하으읏… 기욱아…….”

“…후우, 가만히 있어.”

“하앙, 응, 아으응…!”

아무도 없어야 할 집 안으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동안 넓은 집안을 기웃거리던 시헌은 소리의 근원을 찾기 시작했다. 어린 동생은 저녁까지 하는 영어 유치원에, 두 부모님은 병원에, 누나와 형은 학교에 있을 시간이었다. 시헌이 알기로 이 시간에는 청소부 아주머니도 없었다.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엄마에게 연락을 해야 하나? 휴대폰을 만지던 시헌의 손은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광경에 멈췄다.

“하응, 아으으읏! 하악!”

아응, 으읏! 금방이라도 죽을 것같이 숨을 헐떡이며 교성을 내지르는 여자의 신음 소리에 시헌은 저도 모르게 손에 휴대폰을 바닥으로 떨어트렸다.

탁― 소리가 방바닥에 울리고 여자를 향해 허리를 흔들던 기욱의 시선이 시헌에게 닿았다. 기욱에게 안긴 여자는 시헌이 휴대폰을 떨어트렸는지조차 알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기욱이 몸을 살짝 들자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여자, H대를 졸업함과 동시에 유명 대기업 입사가 확정되었다는 기욱의 과외 선생님이었다. 여자는 종종 나중에 크면 자신에게 과외를 받으라며 시헌의 머리를 쓰다듬고는 했었다. 가끔 꽤 값나가는 과자나 사탕 등을 줘, 그걸 받아먹은 기억이 있었다.

시헌의 기억이, 눈이 틀리지 않다면 옷을 입지 않은 채 기욱의 침대에 누워 있는 여자는 그 과외 선생님이 맞았다. 그러나 기욱에게 안겨 있는 그녀의 모습은 너무나 낯설었다.

“응, 으읏…! 하으응… 응… 기욱아…….”

“누나… 읏… 후우…….”

하앙, 하응, 침대가 흔들릴 때마다 그녀가 또 신음을 뱉었다. 허리를 움직이며 그녀의 안에서 사정없이 움직이는 기욱을 어린 시헌은 가만히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 기욱은 세상 전부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시헌은 추측했다. 그러나 그런 그녀의 기대와 달리 그녀의 안에서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허벅지를 움직이는 기욱의 시선은 냉랭하기만 했다.

“하응, 으응. 읏. 기욱아. 사랑해. 흐응…….”

“윽… 하아…….”

냉랭하기보다, 무감각해 보였고 그녀의 사랑에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어린 시헌은 그것이 무슨 행위인지조차 알지 못한 채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어젯밤, 기욱의 방 책상에 두고 온 영어 숙제를 한 노트를 가져와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아, 으응… 하으응… 으읏! 하으… 윽, 기욱아 나 더 이상…… 하으읏…!!”

그녀와 기욱의 신음 소리 간격이 점점 짧아지며 질척거리는 소리가 났다. 절정에 달하는 그녀의 신음에 시헌은 ‘그녀가 정말 죽는 건가?’ 하며 눈을 찔끔 감았다. 감은 눈 사이로 눈물이 새어 나왔다. 전에 없는 경험으로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후우, 하…….”

하아, 하아, 방 안에서 기욱의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떠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이 들었다.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시헌의 머리 위로 남자의 손이 닿았다. 기욱이였다. 살짝 눈을 뜨자 눈가가 뜨거웠다. 소매로 눈가를 닦자 흐릿한 방 너머로 침대에서 헐떡이는 여자가 보였다.

다행이다.

어째서인지 안도감이 들었다. 시헌은 옷도 입지 않은 채 아래층으로 내려간 기욱의 뒤를 쫓아갔다. 계단 난간에 매달려 1층으로 몸을 숙이자 물을 마시고 있는 기욱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기욱이 조심하라는 듯 손을 안쪽으로 저었다.

기욱의 손에 들린 물 컵 속 찬물이 땀과 섞여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방금 전까지 여자의 안을 들어갔다 나왔다 했던 것이 그대로 보였다. 기욱의 알몸이, 시헌은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형제인걸. 몇 번인가 같이 목욕한 적도 종종 있었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기욱의 손가락이 시헌이 서 있는 계단 난간 뒤 2층 방에 닿았다. 여자가 있는, 기욱이 나온 그 방이었다.

“문제집 가지고 가.”

기욱의 행동 어디에서도 죄책감이나 부끄러움은 보이지 않았다. 그 한마디에 시헌은 쪼르르 방으로 들어갔다. 키보다 조금 높은 책상에 팔을 간신히 뻗어 문제집을 집었다.

하아, 방 안으로 그녀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면 금방이라도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제가 한 행동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죄를 지은 것처럼 얼굴이 빨개졌다. 숙제 노트를 면죄부인 양 품에 안은 채 도망치듯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시헌의 시선은 나무 바닥 아래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급하게 거실로 내려온 시헌과 기욱이 부딪혔다. 시헌은 깜짝 놀라 기욱을 올려다봤다. 시헌에게 기욱의 키는 어른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기욱의 커다란 손이 다시 시헌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학원.”

“…….”

“조심해서 다녀와.”

“응.”

머리에서 내려간 기욱이 시헌의 어깨를 건드렸다. 기분이 나쁜 손길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부담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서둘러 신발을 신고 고개를 돌렸다. 기욱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아마 방으로 들어갔겠지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그때부터였을지도 몰랐다. 시헌이 형―기욱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은.

당시에는 몰랐던 기욱의 그런 행동이,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시헌이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이었다. 인근에 있는 평범한 중학교에 진학하고 싶었던 시헌은 당시 일부러 국제 중학교와 사립 중학교 입시에 떨어졌었다. 먼저 꼬신 건 현정이었지만. 어쨌든 모든 입시에서 떨어진 시헌은 당시 집안의 골칫거리였다.

그런 시헌을 대학교에 들어가고 막 자취를 시작한―그래 봤자 집에서 10분 거리도 채 되지 않은 거리지만―기욱이 받아 주겠다고 했다. 부모님도 딱히 반대를 하지 않았고, 기욱의 새집이 중학교에서 거리가 멀지 않았던 터라 시헌에게 있어서 기욱의 제안은 마냥 나쁜 제안이 아니었다.

기욱의 섹스 상대가, 매번 바뀐다는 것을 안 것은 중학교에 올라오고 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사실 기욱의 집에 들어가기 전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처음에는 과외 선생님, 학교 후배, 선배, 과외 학생, 학교 인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여대생, 자주 가는 술집에서 일하던 여자……. 시헌이 여자의 정체를 알아내는 것에 질려 갈 즈음에는 여자가 아닌 남자들이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중학교 1학년, 남자와의 섹스가 가능하다는 것을 안 것도 충격이었지만 그 충격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기욱의 밑에서 신음을 흘리는 남자 또한 결국은 다른 여자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여자는 냉장고 안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었다. 시헌은 여자를 살짝 밀어낸 뒤 냉장고 구석에 있는 맥주를 꺼내 여자에게 내밀었다. 맥주를 쥔 시헌의 손이 여자의 가슴에 닿았다. 여자가 뒤늦게 셔츠를 여몄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여자는 시헌의 맥주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마시기 싫음 말던지.

시헌은 손에 있는 캔 맥주를 유리 테이블 위로 올렸다. 탁, 유리가 금이 가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방으로 나온 기욱과 시헌의 눈이 마주쳤다. 시헌과 여자를 힐끗 본 기욱은 엉망인 셔츠를 손보고, 벨트가 없는 바지 버클을 올렸다.

여자가 기욱의 옆으로 달라붙자 기욱은 여자를 귀찮다며 밀어냈다. 그럼에도 다시 팔짱을 끼며 달라붙는 여자는 오뚝이 같았다. 여자를 팔에 낀 기욱이 시계를 찬 뒤 시간을 확인했다. 11시 36분, 여자를 사이에 둔 시헌과 기욱은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주고받았다.

“저녁은?”

“안 먹었어.”

“고기 먹으러 갈래?”

“이 시간에?”

“늦게까지 하는 데 있어. 가방 두고 나와.”

시헌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여자와 기욱의 대화가 들려왔다. 여자가 기욱에게 칭얼대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아, 오빠. 나는? 응?”

“넌 또 왜.”

“아까 걔 동생이지? 시헌이? 잘생겼네. 모처럼인데 나도 사 줘.”

여자와 기욱의 대화에 단추를 풀던 시헌의 손이 순간 멈췄다. 툭, 하고 셔츠의 단추가 뜯겨 나갔다. 시헌은 허리를 숙여 바닥으로 떨어진 단추를 주우며 중얼거렸다.

“병신.”

시헌은 뜯어진 단추를 책상 위로 올린 뒤 아무렇지 않게 교복을 갈아입고 방으로 나왔다. 시헌을 본 기욱이 차 키를 흔들었다. 시헌은 패딩 잠바의 지퍼를 올린 뒤 현관 쪽으로 갔다. 기욱이 팔에 매달린 여자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기욱의 팔에 매달린 여자의 앙칼진 목소리가 더욱 높아져 갔다.

“오빠, 나는? 나도 간다?”

기욱이 여자의 손을 쳐 냈다. 탁, 소리가 제법 큰 편이었으나 기욱은 신경 쓰지 않았다. 안겨 드는 여자를 밀어내자 여자가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눈물에 화장이 묻어 흐르는 모습이 꽤 추했다. 여자의 눈물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소파 근처에 엉망으로 놓여 있는 여자의 옷가지들을 집어 여자에게 던졌다.

기욱이 던진 여자의 잠바 사이로 고무줄에 말려 있는 만 원짜리 지폐가 바닥을 굴렀다. 기욱은 몸을 숙여 바닥에 떨어진 지폐 뭉치를 여자의 품에 던졌다.

‘뭐야, 여친도 아니었잖아.’

시헌은 딱히 여자가 기욱의 여친이길 바라는 것은 아니었다. 시헌이 보기에 기욱에게 여자 친구라는 것은 하나의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여자들은 매번 기욱에게 매달렸다.

몇 번 본 적 없는 그 드문 광경은 시헌의 기억 속에서도 꽤 볼만한 광경이었다. 그러나 매번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여자에게서 시선을 돌린 시헌은 학원에서 올 때 봤던 가게를 생각하며 고개를 들었다.

“학원 근처에. 고깃집 생겼던데. 가 보고 싶어.”

“거기 사람 많잖아.”

“그래도 맛있대.”

“하긴 맛있긴 하지.”

이미 몇 번 갔다 온 곳인지 기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욱은 신발을 신고 있는 시헌의 뒤쪽 벽에 서 몸을 기대며 여자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뭐 해, 안 꺼져?”

옷도 끝까지 입지 않은 채 여자가 도망치듯 집을 빠져나갔다. 시헌은 여자가 나간 아파트 복도를 보며 바지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그러기에 미친년이. 적당히 기어올라야지.

* * *

은소가 전학 오고 난 뒤 일주일이 지났다. 달라진 건 없었다. 첫날 혹은 며칠 은소에게 관심을 보이던 아이들도 이제 은소에게 관심을 끊었다. 정확히는 관심을 끊었다고 하기보다는 익숙해졌다는 쪽에 가까웠다.

은소가 멀리 타지에서 왔을 거란 추측도, 다른 반에 있던 남학생이 은소를 알아보면서 물거품이 되었고. 혹시 신도시에 사는 아이일까 은소랑 친해지려던 여학생도 아침, 구도시가 있는 인근 등굣길에서 은소를 마주치고 난 뒤 입을 다물었다.

첫날, 멀리서 같이 밥을 먹자고 해 보라던 무리들도 은소가 시헌의 무리들과 같이 밥을 먹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원래 전학생이란 그런 것이었다.

이동 수업 시간, 은소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시헌의 이름을 불렀다.

“가, 같이 가자!”

이어폰을 끼고 있어 뭐라고 말하는지 들리지는 않았지만 대충 입 모양으로 알아먹은 시헌이 걸음을 멈추고 은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책 한 권과 책상 위에 굴러다니는 볼펜을 주머니에 구겨 넣은 시헌의 옆으로 현정, 서진이 다가왔다. 둘이 다가오자 시헌은 가장 먼저 등을 돌려 교실 밖으로 나갔다. 현정이 시헌을 쫓고, 그 뒤로 서진과 은소가 교실 밖으로 나왔다. 이어폰의 소리를 줄이자 은소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현정이 이것저것 물어 대는 소리가 복도에서 그대로 들려왔다.

“그럼 계속 병원에 있던 거야?”

“응. 한 일 년 정도. 수술도 몇 번 했었어. 너는……. 얘기 들었어. 아빠가 N병원 교수라고…….”

“작년에 부원장으로 진급했어.”

“그러면 엄청 높은 거 아니야?”

“뭐, 그렇지? 실은 우리 아빠 나이가 좀 있으시거든. 이것저것 공부하시느라고 늦게 결혼하셔서. 왜, 원래 의사란 게 다 그렇잖아. 의대 졸업하고 전문의 되기까지 10년. 난 하라 그러면 죽어도 못 할 것 같아.”

“그쪽은 잘 몰라서……. 그렇게 오래 걸려?”

“그럼. 장난 아니야! 언니들 얘기 들어 보니까 병원을 집처럼 생각하게 된대!”

병원이라는 단어에 시헌이 민감하게 반응했다. 현정이 시헌의 눈치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시헌이 이어폰 줄을 감아 주머니에 넣었다. 현정과 시헌이 내로라하는 유명한 중학교 입시에 떨어지고, 개발 중인 신도시 출신에 유명한 의사 집안이라는 것은 학교 내에서 공공연하게 알려진 사실이었다.

말하지 말라고 해도 알려질 대로 알려진 사실이라 부정하는 것 자체가 부질없는 짓이었다. 현정이 한숨을 쉬는 시헌의 팔을 잡아 은소의 앞으로 잡아끌었다.

“잠깐 뭐 하는 짓……!”

난데없는 현정의 돌발 행동에 시헌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현정은 눈 하나 끔벅하지 않았다.

“우리 시헌이도. 미래에 의사님이 되실 사람이지.”

“안 한다고 의사. 그리고 우리라고 칭하는 것 좀 그만해.”

“뭐 어때,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에. 게다가, 너만 있는 거 아니거든? 그치? 울 서진아?”

현정의 행동에 서진이 씁쓸하게 웃었다. 내가 왜 하필이면 저런 여자에게 다가갔을까. 결국, 시헌은 마음대로 하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동 수업 교실에서 현정은 은소와 앉았다. 아직까지는 홀수보다 짝수가 익숙한 학교. 그건 비단 시헌의 무리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나마 이 반은 홀수인 무리가 두 명이 있었던 터라 다른 반보다는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시헌의 무리와 마찬가지로 홀수인 무리에 있는 여학생 한 명이 교과서와 무거울 정도로 많아 보이는 필기구가 들어 있는 필통, 담요 등을 가슴에 안고 시헌의 무리에게 다가왔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여학생이 어색하게 인사를 했다.

“하하, 안녕 시헌아?”

여학생, 참 이상한 일이었다. 시헌과 현정의 집안이 의사 집안이니 돈이 많니 하는 것을 알고 나서 가장 먼저 전교에 소문을 내고 다녔던 여학생. 두 사람을 문제아 정도로 취급하며 학교에 기부금을 내서 들어온 거라는 등의 얘기가 한참 퍼졌을 때 누구보다도 뒤에서 열정적으로 떠들어 댔던 학생이었다.

돈 많은 집 애들은 싫다며 자긴 수수하게 살 거라는 주제에 남자 친구가 기념이라고 몇만 원짜리 반지를 사 줬다느니, 자기 과외 선생님이 유명 대학교 출신이며 한 달에 과외비가 얼마가 나간다느니, 현정이 썼던 유명 브랜드 화장품을 따라 쓰고는 했던 여학생이었다.

재수 없는 년.

평소에는 아는 척도 하지 않더니만 이렇게 사람이 부족하거나 할 때만 아는 척을 하는 여학생이 시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짐이 무거운 모양인지 여학생이 시헌과 현정의 앞에서 머뭇댔다. 품 안에 들린 짐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았지만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책상에 팔을 올렸다.

순간 시헌의 책상에 잠시 짐을 내려놓으려던 여학생이 멈칫하며 시헌의 눈치를 봤다. 시헌이 앞자리에 앉은 현정이 있는 곳을 향해 목을 살짝 까닥였다. 평소라면 현정의 옆에 가 앉았을 터이지만 오늘은 상황이 조금 달랐다.

친구들과 놀 만큼 논 뒤 종이 치고 늦게 들어온 여학생, 당연히 자신의 자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라도 했던 모양이었다.

“뭐야? 쟤 자리 없는 거야?”

“놀 애 없으면 장현정이랑 앉았잖아.”

“아, 그거. 솔직히 좀 뻔뻔하지 않냐? 현정이가 남자애들이랑 다닌다고 뒤에서 그렇게 까더니.”

멀리 있는 자신의 친구들과 눈이 맞은 여학생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선생님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학생들은 이미 자리에 앉은 후였다. 뒤늦게 사정을 눈치챈 은소가 여학생과 현정의 눈치를 살폈다.

“하아.”

현정은 은소와의 대화에 방해를 받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얕은 한숨을 쉬었다. 현정이 구석에 혼자 앉아 있는 또 다른 여학생들 대충 손가락질했다. 그 여학생이, 여학생 무리들 사이에서 떨어진, 흔히 말하는 왕따 아이라는 것을 반에서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여학생들과 별 인연이 없는 현정의 눈에는 그 애가 그 애였다.

현정의 손가락질에 시헌은 등을 돌려 구석에 앉은 여학생을 힐끗 바라봤다. 적어도 현정은 제멋대로일지언정 누군가를 차별하거나 왕따에 동조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시헌 또한 눈앞에 있는 여학생과 구석에 혼자 앉은 여학생의 차이점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들이란 왜 이렇게 편을 못 갈라 안달인 걸까. 일부러 목소리를 높이는 현정의 목소리는 시헌의 귀에 방해하지 말라는 또 다른 신호와도 같이 들렸다.

“미안, 미안. 그래서? 그 의사 쌤이랑 어떻게 됐어?”

“그, 그래. 은소 전학 온 지 얼마 안 됐으니까. 다음번에는 같이 앉자.”

여학생의 말을 현정은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때마침 들어온 선생님의 잔소리에 여학생이 결국 빈자리에 혼자 앉는 것을 택한 사실도 현정은 관심이 없었다. 시헌은 턱을 괴며 그런 현정의 행동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 별다른 제재를 하지는 않았다. 할 이유도 없고. 시헌과 눈이 마주친 혼자 앉은 여학생이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책에 얼굴을 묻었다.

“오늘 수업 시작할 테니까 책 펴 다들.”

“예에.”

시헌은 서진의 영어 교과서를 옆으로 잡아당겼다. 펼쳐진 책이 겹쳐진 두 책상 사이에 끼었다. 서진이 그런 시헌의 책상 안쪽에 있는 초록색 수학 교과서를 바라봤다. 선생님이 칠판에 영어를 적기 시작했다. 교과서를 당기는 서진의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시헌도 지지는 않았다.

필기를 따라잡아야 하는 서진이 마지못해 교과서를 놓고 시헌 쪽으로 어깨를 붙였다. 시헌의 시선은 칠판보다는 주로 책에 있었다. 정확히는 서진이 써 놓고 지나간 필기들이었다. 다른 중학교 남학생들과 달리 깔끔한 글씨는 몇 번을 봐도 마음에 들었다.

서진이 불편하게 필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나 시헌은 끝까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참다못한 서진이 한마디 했다.

“좀 옆으로 가 봐.”

“……싫어.”

“싫은 게 아니라 비키라고.”

“…….”

시헌은 서진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불편하게 서로의 몸이 닿는 것이 시헌은 마냥 싫지 않았다. 그 사실을 서진은 알 리가 없었다.

“박시헌, 교과서 좀 똑바로 가지고 다녀. 한두 번도 아니고 이게 뭐냐?”

“비슷하잖아. 헷갈릴 수도 있는 거지.”

“지난번에는 음악 교과서였어.”

그랬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교과서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서진은 시헌이 단순히 저를 놀리는 것이 재미있어 일부러 그러는 것이라고 넘겨짚었다. 시헌은 필기나 하라며 칠판을 향해 손을 저었다. 여전히 힘들게 필기를 하는 서진을 시헌은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다.

사실은 일부러 그런 거라고. 나란히 어깨를 마주하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 시헌은 죽어도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이어폰 너머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지는 않았으나 시헌의 계산으로는 점심시간임이 틀림없었다. 점심시간, 반 아이들의 대부분이 다른 반 아이들을 찾아 나가거나 복도에서 떠들기 때문에 점심시간의 교실은 조용해야 했다. 그러나 가끔 몇몇 아이들이 시헌의 반에서 모이는 일이 종종 있기도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시헌은 그런 짓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전 수업 시간에 잠을 잤을 때는 더더욱 말이다. 시헌이 신경질적으로 노래의 볼륨을 높인 뒤 몸을 뒤척였다. 때마침 흘러나온 곡이 발라드라 그런지 볼륨을 높이는 것은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덕분에 대화의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야, 씨발. 죽은 줄 알았잖아.”

“큭큭, 우리 은소. 이게 몇 년 만이야? 응?”

“사내새끼가. 팔이 이게 뭐냐, 뼈다귀지. 밥은 먹고 다니냐? 개웃기네.”

중간중간 들려오는 욕 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다른 반 학생이 들어와 떠드는 것 이상으로 시헌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제 앞에서 싸움질하는 것이었다. 시헌은 결국 볼륨을 끝까지 줄인 뒤 이어폰을 뺐다.

“야.”

덩치가 큰 남학생들 사이에 둘러싸여 떨고 있는 은소의 모습이 마치 토끼 같았다. 은소와 시헌의 눈이 맞았다. 딱히 은소를 도와줘야 할 이유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이유 또한 없었다. 시헌은 패딩 잠바에 휴대폰을 구겨 넣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미친 미친 하지 말고 나가서 싸워. 미친것들아.”

“아놔, 이게 진짜 돌았나. 야. 너 뭐냐? 자고 있었으면 처자세요.”

시헌보다 훨씬 키가 큰 남학생이 시헌을 노려봤지만 시헌은 남학생이 우스웠다. 시헌이 남학생을 우습게 보는 이유는 비단 시헌의 집이 신도시에서 가장 좋다는 아파트에서 살아서 때문만은 아니었다.

1학년, 입학하자마자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인근 구도시 초등학교에서 나름 놀았다 하는 아이들과 교내에서 싸움질했다는 것은 시헌의 부모님이 유명 대학교 대학병원 교수님이자 의사 집안이라는 사실 다음으로 잘 알려진 사실이었다.

“너 같으면 그 상황에서 잘 수 있겠냐?”

“…….”

“잘 수 있겠냐고.”

“이게 뭐라는……!!”

“야야! 그만해. 그만. 어? 왜 그래?”

옆에 있던 다른 친구가 결국 시비를 거는 남학생을 말렸다. 그는 주변 친구들과 눈치를 교환하며 남학생에게 속삭였다.

“얘 걔잖아. 태권도 다닌다고 해 놓고 유리창 깬 애. 부모님이 의사래. 괜히 일 벌이지 말고 가자. 어?”

“하, 어이가 없어서. 돈 있음 다냐?”

남학생이 마지못해 한마디 내뱉으며 친구들과 함께 교실을 떠났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꾸준히 다녔던 시헌은 딱히 키가 크기보다도 싸움을 잘하는 편이었다.

물론, 시헌이 싸움을 하고 올 때면 사범님은 그런 데 쓰라고 가르쳐 준 것이 아니라며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러나 그 말을 하는 사범님 또한 시헌의 싸움에 대한 요인이 태권도를 오래 다닌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도장에서 시헌보다 태권도를 더 오래 다녔던 형은 학교 폭력 피해자로 경찰에 조사를 받았기 때문이다.

시헌이 사람을 때리고도, 유리창의 유리가 전부 깨지면서 팔에 피가 흘러도 아무렇지 않은 이유는 집안 환경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의사인 부모님, 친척들을 보고 자라서 그런지 시헌은 다치거나 상처를 입는 것에 대해 별다른 감각이 없었다.

죽는 것만 아니라면 뭐. 보통 어떻게든 되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하는 시헌 본인조차도 자신의 사고방식이 남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학생 무리들이 완전히 교실을 떠나자 은소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게 그……. 고마워.”

“됐어.”

어차피 시끄러웠던 것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현정과 서진이 오기 전까지 조금 더 잘까 생각했던 시헌의 앞으로 낯선 남학생 하나가 다가왔다. 교실에는 은소에게 욕을 한 남학생들 외에도 몇 명의 남학생들이 더 있었고, 시헌에게 다가온 남학생도 그중 하나였다. 남학생을 본 은소는 머뭇거리더니 시헌의 등 뒤로 살짝 숨었다.

시헌의 눈앞에 서 있는 남학생은 100만 원이 넘는 패딩 잠바를 걸치고, 명품 신발에 인근 교복점에서 아무렇게나 산 셔츠가 아닌 손수 맞춤 제작한 교복 셔츠를 입은, 구도시에 있는 학교에는 드물게 외제차를 타고 등교를 하는―거의 유일하다― 남학생이었다. 김도원. 시헌은 깔끔하게 잘 박힌 도원의 이름표를 살짝 바라봤다.

시헌이 일부러 입시에 떨어져 구도시에 있는 중학교에 온 것과 달리 도원은 정말로 떨어져서 왔다고 했다. 시헌은 진짜로 입시에 떨어진 도원을 참 신기하게 생각했으나 학교에서는 자신이나 도원이나 그 처지가 그 처지였다. 덕분에 도원은 시헌과 현정이 자기와 같은 처치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도원이 옆에 있는 남학생의 등을 살짝 밀었다. 도원에 의해 등 떠밀린 남학생의 손에 뭔가가 들려 있었다. 방금까지 은소를 향해 욕을 하던 주제에 이제는 러브레터 타임이라니. 어이가 없었다.

시헌은 고개를 든 채 남학생의 손에 들린 고급 편지지를 살짝 바라봤다. 편지가 밖으로 나오자 도원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하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편지지는 2개였다. 실링 왁스 처리가 된 편지지를 뜯자 밀랍이 엉성하게 뜯겨 나갔다. 고급스런 문자로 타이핑이 된 생일 초대 카드였다. U호텔, 신도시에 새로 들어선 얼마 되지 않은 호텔이었다.

“다음 주야. 그거 없으면 못 들어오거든.”

“…….”

“하나는 너, 하나는 현정이 줘. 특별히 초대하는 거니까. 알지? 우리 누나 J대 인턴 들어간 거.”

“모르는데.”

아빠가 병원장이라 해서 병원 인턴들 이름을 일일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애당초 병원에 있는 교수님들 이름도 모르는데 그까짓 인턴 따위가 뭔 상관인가.

시헌은 그제야 도원의 집도 자신의 집처럼 의사 집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봤자 양쪽 집안이 4대에 걸쳐 이름 있는 의사들을 줄줄이 배출한 시헌의 집과 달리 도원의 엄마 쪽은 평범한 집안의 여자였다.

같은 학교에 입시에서 떨어져 온 의사 집안의 자식들만 세 명이라니. ―어디까지나 도원의 생각이지만― 도원에게 있어서 이런 일은 행운이 따로 없었다. 시헌 일행과 친해진다면, 입시에서 떨어져 집안의 놀림거리가 되었던 자신의 처지를 만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도원의 얄팍한 수가 시헌은 우습기보다 어이가 없었다.

“병신.”

시헌의 중얼거림을 들은 도원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헛기침을 했다. 보다 못한 시헌이 초대장을 책상 위로 올렸다.

“생각해 볼게.”

쓰레기가 생겼군.

입과 다른 생각을 한 시헌은 은소의 팔을 잡아당겼다. 습관처럼 점심시간이 되자마자 교실을 뛰쳐나가 편의점에 다녀온 현정과 서진과 마주쳤다. 시헌은 은소에게 잡혔던 손을 놓으며 서진에게 다가갔다.

“뭐, 뭐야?”

서진이 부담을 느끼며 살짝 뒤로 물러났다. 입을 다문 채 자신의 손에 있는 초콜릿을 보는 시헌의 시선에 부담을 느낀 서진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시헌은 여느 때와 같이 서진의 손에 들린 초콜릿을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현정이 한마디 내뱉었다.

“넌 꼭 서진이 것만 빼앗아 먹더라. 내가 주는 건 안 먹으면서.”

현정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을 내밀었다. 그 행동이 진짜 기분이 상한 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현정은 편의점 봉투를 뒤져 새 초콜릿을 은소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은소 거.”

“난 괜찮은데…….”

“그러지 말고 받아! 많이 사 왔어!”

“그럼…. 하나만 먹을게.”

은소는 현정에게 받은 초콜릿과 시헌을 번갈아 바라봤다. 시헌이 서진에게서 빼앗아 먹은 초콜릿과 같은 제품이었다. 현정이 배가 고프다며 서진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시헌은 초콜릿을 손에 쥐고 있는 은소의 등을 툭, 하고 건드렸다. 살짝 쳤을 뿐인데 은소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다시 보니 확실히 팔이 얇은 것 같기도 했다. 시헌은 은소의 긴장을 풀어 주기 위해 아무 말이나 던졌다.

“처음이야.”

“뭐가?”

“현정이가 나랑 서진이 말고 다른 사람한테 먹을 거 주는 거. 쟤 저렇게 보여도 되게 성격 나쁘거든. 여자애가. 맨날 싸움질이나 하고 다니고.”

“정말?”

“싸움도 못하는 게. 지난번엔 내 여친한테 시비를 걸어서 나만 나쁜 놈 만들고 말야.”

시헌이 다시 은소의 등을 밀었다. 시헌은 은소가 자신의 말을 끝까지 듣고 있지 않은 것을 알고 말을 마쳤다.

“둘이 거기서 뭐 해! 빨리 와!! 밥 먹으러 가자!”

현정의 재촉에 시헌이 먼저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헌의 옆으로 은소가 붙었다. 은소가 현정이 준 초콜릿을 주머니에 넣으며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처음이야.”

“뭐가?”

“같이 다니고 일주일 넘었는데. 나한테 한 번도 먼저 그런 식으로 말 걸어 준 적 없었잖아.”

“몰라. 성격이 그래서 그래. 신경 꺼.”

시헌이 뒷목을 긁적였다. 그사이 요 일주일 동안 있었던 일들을 생각했다. 은소의 말이 틀린 것 같지 않기도 하고, 틀린 것 같기도 하고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젠 ‘이런 애를 왜 챙겼던 거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큭큭, 알았어.”

“웃지 말라고.”

“하하…. 미안. 계속 웃음이 나와서. 아, 알았어. 그만 웃을게. 그렇게 노려보지 마.”

시헌의 표정에 은소가 웃음을 참으며 손을 저었다. 그러나 그런 은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을 수상하게 여긴 현정이 다가왔다.

“뭐야? 무슨 일인데? 나도 알려 줘!”

“…….”

“울 시헌이 삐졌어?”

현정의 물음에도 시헌은 끝내 은소와의 대화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어쩐지 단것이 더 당겼다. 시헌은 걸음을 빨리해 계단을 내려가 마지막 남은 초콜릿 조각을 먹으려 하는 서진의 손을 붙잡아 입에 집어넣었다. 초콜릿과 함께 손가락이 입안으로 들어왔다.

기겁하는 서진의 표정이 제법 볼만했다. 입을 살짝 닫자 이빨과 혀끝으로 손가락의 감촉이 닿았다. 시헌은 초콜릿을 핥는 척하며 혀를 움직였다. 혀의 움직임을 느낀 서진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씨발! 아, 박시헌! 미쳤냐!!”

뒤늦게 상황을 알아챈 서진이 욕설과 함께 손을 빼냈다. 검은색, 아니 갈색. 갈색보다는 좀 더 묽은. 녹은 초콜릿에 섞인 시헌의 타액이 서진의 손가락에 그대로 묻어났다. 서진이 시헌의 잠바에 멋대로 손을 닦았으나 시헌은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검은색 잠바 위로 얕은 물기 자국이 남았다. 등을 돌린 서진을 힐끗 본 시헌은 걸 또 손으로 만져 봤다. 사실 별 느낌은 없었다. 혀로 이빨을 살짝 긁자 이빨 사이에 껴 있던 초콜릿 덩어리가 녹아내렸다. 단맛이 입안에 퍼졌다.

“맛있네.”

“하. 이런 또라이 같은 새끼.”

“화났어?”

“안 나게 생겼냐!”

“미안.”

“닥쳐, 사과하지 마. 재수 없게시리.”

신경질적으로 고개를 돌리는 서진의 모습이, 어딘가 귀엽게만 느껴졌다.

“이따 갈 때 떡볶이 사 줄게.”

“순대는?”

“맘대로 먹어.”

서진이 얼마를 쓰던 금액은 관계가 없었다.

“어어! 나도! 나도 떡볶이!”

뒤쪽에서 은소와 있던 현정이 큰소리로 외쳤으나, 시헌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말했다.

“넌 네 돈으로 사 먹어.”

“울 시헌이가 쏘는 거지?”

현정의 말에 시헌은 멋대로 하라며 고개를 돌렸다. 현정과의 시선을 피한 시헌의 눈과 은소의 눈이 맞았다. 은소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가는 것이 느껴졌다. 어린 시헌은 그런 은소의 행동이 그저 소심해서 그런 거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 * *

「언제 와?」 오전 9:54

「올라가는 중이얌. 왜? 우리 시헌이 나 보고 싶엉?」 오전 9:55

「빨리 와」 오전 9:57

「매정해ㅠㅠ가구 이써!」 오전 9:57

「그러니까 어디…」 탁, 폴더 휴대폰을 거칠게 닫았다. 고개를 돌리자 미닫이문이 열리며 서진과 현정이 들어왔다. 현정의 손에는 늘 그렇듯 편의점 봉투가 들려 있었다.

다음 수업은 체육 시간이었다. 쉬는 시간이 2분 정도 남은 학생들이 전부 빠져나간, 아무도 없는 교실을 은소는 불안하게 둘러보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서려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은소를 제외한 그 누구도 이 상황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없었다.

현정은 짧은 치마가 아닌 허벅지에 파란 줄이 나 있는 체육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세탁소에서 수선해 딱 달라붙는 바지를 또 덥다는 이유로 힘겹게 접어 올리는 꼴이 꽤 우스웠다.

“그럴 거면 줄이질 말든가.”

현정의 모습을 한심하다고 생각한 시헌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현정의 체육복 바지와 달리 윗도리는 아침에 입고 왔던 빨간 패딩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와이셔츠도 그대로 입은 채였다. 시헌이 주번에게서 받은 출석부를 현정에게 건넸다. 출석부 끝에 엉성하게 교실 열쇠가 달려 있었다.

주번도 아니지만, 이젠 교실 문을 잠그는 데 익숙한 현정이 교실의 불을 끄며 남아 있는 세 사람에게 나가라며 소리를 질렀다. 시헌은 그제야 뭉그적뭉그적 뒷문으로 나갔다. 엉망인 머리를 긁으며 복도 창문에 몸을 기대고 있는 꼴이 꼭 피난민 같았다.

열려 있는 창문 뒤로 목을 넣자 밑으로 있는 작은 연못과 공원들이 거꾸로 보였다. 그 상태로 눈을 살짝 올리자 구름 없는 파란 하늘이 그대로 보였다. 구름이 뭉실뭉실 떠다니는데 그게 꼭 솜사탕처럼 예뻤다.

‘아아, 솜사탕 먹고 싶다.’

시헌은 가끔 학교 앞에 나오는 솜사탕 아저씨를 생각했다. 오늘 나올까.

3층, 몸이 반쯤 창문에 나와 있는 위험한 행동임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아무렇지 않았다.

구름이 사라지자 이젠 차라리 이대로 다이빙하듯 아래로 떨어지면 어떻게 될까?

밑에 있는 나무에 몸이 걸리지 않을까? 그럼 죽진 않겠군. 대신 팔다리가 부러지려나? 아니면 머리를 다치나? 떨어져 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없었다. 잠이 덜 깬 상태로 이상한 생각을 하는 시헌의 이름을 누군가 불렀다.

“시헌아. 위험하게 거기서 뭐 해?”

그 목소리에 시헌은 다시 복도 쪽으로 몸을 뺐다. 은소였다. 시헌은 은소의 상태를 위아래로 훑었다. 1학년처럼, 새로 산 체육복을 정갈하게 차려입고 있는 은소의 모습은 익숙하기보다는 어색했다. 빳빳하게 선 체육복 상의 깃을 본 시헌은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까닥였다.

얼마 되지도 않은 거리를 쭈뼛대며 다가오는 은소가 답답한 시헌이 획, 하고 팔을 잡아당겼다. 금방이라도 얼굴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였다. 시헌은 말없이 은소의 체육복을 정리해 주었다. 이제 보니 바지도 좀 큰 것 같았다. 현정처럼 일부러 줄인 것과 바지가 큰 건 엄연히 달랐다.

이쯤 되면 학교에 형이라도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모습을 본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숙여 은소의 바지를 접어 올려 주었다. 봄이라 춥지는 않을 것이었다.

“고마워.”

“…….”

시헌은 참 별걸 다 고마워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다물었다. 딱히 대답할 필요가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은 것뿐 은소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근데 너 체육복은?”

“몰라.”

집에 있나? 아니면 교실 안 사물함에 들어 있나? 그것도 아니면 옆 반 여친이 빌려 입고 안 돌려줬나? 어쨌든 기억이 나지 않았다. 상의는 사라진 지 오래였고, 바지 하나만 남은 체육복을 체육복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은소의 바지 정리가 다 된 시헌은 다시 몸을 일으켜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때마침 시헌의 시선이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서진에게 닿았다. 3월이지만, 아이스크림을 먹고 다닐 만한 시기는 아닌데 말이다. 시헌이 다가가자 서진이 아이스크림을 품에 안으며 사수를 했다.

“왜, 왜 또…….”

“크읍……. 하하. 아니다.”

아이스크림이 옷에 묻었음에도 신경 쓰지 않는 걸 보면 어지간히 시헌에게 빼앗기는 것이 싫은 것 같았다. 지난번 초콜릿 이후로 서진은 유독 경계가 심해진 것 같았다. 초콜릿도, 아이스크림도, 딱히 좋아해서 빼앗아 먹는 건 아니었다.

시헌이 보기에 서진은 참 간식을 좋아했다. 서진이 늘 뭔가를 먹고 있다는 시헌의 말은 마냥 틀린 말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시헌은 서진이 먹고 있는 것을 보면, 그 순간만큼은 이상하게 싫어하는 음식도 맛있는 것처럼 보였다.

먹던 걸 먹거나 더럽다느니 하는 생각은 해 본 적도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고 시헌은 확신했다. 된다면 입안에 들어간 사탕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물론, 그랬다가는 진짜 맞을지도 모르겠지만. 저렇게 경계를 하는 서진을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수업 종이 쳤다. 초등학교 때보다 더 종소리가 유치해진 것 같았다. 시헌은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를 교내에 흘러나오는 음악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시헌뿐만이 아니었다. 서진도, 현정도 마찬가지였다. 종소리에 놀라는 것은 은소뿐이었다. 시헌은 아마 은소가 초등학교 시절 굉장히 바르고 성실한 아이였음이 틀림없다고 확신했다.

종이 치기 전까지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하고, 종이 침과 동시에 수업이 시작된다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 그런 아이 말이다. 정작 수업은 선생님이 오고 난 뒤에 시작되는데. 매시간 정확히 치는 종소리는 그저 형식적인 약속에 지나지 않았다.

편의점 봉투 대신 출석부를 품에 안은 현정이 슬슬 내려가자며 재촉했다. 시헌은 운동장을 내려가는 계단과 정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서진이 그런 시헌을 이상하게 생각하며 말을 걸었다.

“너 어디 가?”

“양호실. 머리 아파. 잘 거야.”

“너 양호실에서 자는 거 안 좋아하잖아. 체육복 빌려줘?”

“체육하기 싫어.”

“맘대로 해라. 혼나도 난 모른다.”

“잘 말해 줄 거면서. 핑계는.”

세 사람이 내려가자 시헌은 곧장 양호실이 있는 복도로 걸음을 옮겼다. 오랫동안 운동을 해 온 학생들이 체육을 좋아하는 것과 달리 시헌은 체육 시간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는 것도 없이 땀을 빼야 하는 것도 귀찮고, 게임을 해도 별 재미가 없었다.

체육 선생님도 시헌이 수업을 빠지는 것에 별다른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부분의 수행평가에서 별다른 연습 없이도 최고 기록을 찍는 시헌을 어떻게 대할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출석 부분만 본인이 책임진다면 말이다. 양호실에 들어간 시헌은 양호실 특유의 약 냄새에 인상을 찌푸렸다. 문을 열고, 시헌임을 눈치챈 양호 선생님이 귀신같이 말했다.

“어머, 시헌아! 체육 시간이니?”

“어떻게 알았어요?”

“창문에서 보이잖아.”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봄바람에 섞인 체육 선생님의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형광 조끼를 입은 아이들과 입지 않은 아이들이 축구공을 두고 운동장을 뛰고 있었다. 빨간 패딩을 입은 현정은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먼저 온 학생을 보낸 양호 선생님은 시헌의 이름과 반, 번호가 적힌 일지를 확인하고, 사인한 뒤 제자리에 올려놓았다. 양호 선생님은 시헌이 체육 시간을 싫어하는 것도, 꾀병을 부리고 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또 어디가 아파?”

“머리요.”

“체육 시간마다 머리가 아픈 병으로 논문을 써 보는 건 어때?”

젊은 양호 선생님의 터무니없는 제안에 시헌은 어이가 없었다. 중학생한테 논문이라니.

“선생님이 쓰셔서 발표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시헌이가 조수로 들어오면 생각해 볼게.”

조수라는 말에 시헌은 또 고개를 저었다. 농담이라도 내키지 않은 제안이었다. 시헌에게 병원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곳이었다. 싫다, 불편하다 하면서도 결국은 이렇게 제 발로 찾아오지 않는가. 도대체 어떤 불편함이 시헌을 이끌었는지 알 수는 없었다. 축구를 하는 학생들을 창문 너머로 본 양호 선생님이 말했다.

“축구는 싫어해?”

“축구는 별로예요.”

“왜?”

“너무 쉽게 이기거든요. 농구라면 괜찮은데…….”

“농구도 똑같지 않아?”

“우리 반에 농구부 많잖아요. 농구하면 할 만한데 쟤들 축구는 젬병이드라구요.”

“얘는,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운 거야?”

“국어책에서요.”

시헌이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들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왠지 양호 선생님이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것 같아 억울한 기분이 든 시헌이 한마디 더 했다.

“진짜예요. 이제 자러 가도 돼요?”

“언제는 침대가 병원 냄새 나서 싫다 그러지 않았니?”

시헌은 좀 자고 싶은데, 계속해서 말을 거는 양호 선생님이 슬슬 귀찮아졌다. 오늘따라 심심하신가 보다.

“지금은 좀 괜찮아졌어요. 자도 되죠?”

시헌은 빈 침대에 몸을 누인 뒤 커튼을 끝까지 쳤다. 차르륵, 커튼 소리가 났다. 시헌은 주머니를 뒤졌다. 이런, 이어폰을 두고 온 모양이었다.

책상 위에 꼬여져 놓여 있을 이어폰을 생각한 시헌은 한숨을 쉬며 휴대폰을 베개에 올렸다. 사실 딱히 피곤하지도, 그렇다고 진짜로 머리가 아프지도 않지만 그대로 눈을 감았다. 창문 너머로 축구를 하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중간중간 들렸다. 시헌은 부직포 같은 이불을 덮으며 몸을 뒤척였다. 그사이 커튼 너머로 몇몇 여학생과 양호 선생님의 대화가 들려왔다.

“아, 쌤. 진짜 자고 가면 안 돼요?”

“수업 시간이잖니? 교실로 돌아가렴.”

여학생이 커튼 너머에서 뒤척이는 시헌을 부러운 듯 바라봤다.

“자리 없어. 꾀병 부리지 말고 돌아가.”

“으, 알았어요.”

양호 선생님의 말에 여학생은 아쉬운 듯 양호실 밖으로 나갔다. 시헌은 커튼을 살짝 걷어 양호실 밖으로 나가는 여학생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커튼을 경계로 시헌과 양호 선생님의 시선이 맞았다.

“안 잤어?”

“병원은 역시 저랑 안 맞나 봐요.”

“양호실은 병원이 아니잖아.”

“어쨌든 그게 그거잖아요. 지긋지긋해요. 병원이니 의사니 하는 거요. 전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데 집에서는 그게 안 되나 봐요. 다들 절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거든요.”

“그럼 뭐가 하고 싶은 건데?”

“아직 생각 중이에요. 지금은 그냥 이대로가 좋아요.”

시헌이 부스럭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커튼을 반쯤 걷고, 고무 슬리퍼를 챙겨 신었다. 대학병원 수술실 간호사 출신인 양호 선생님이 시헌은 그다지 싫지 않았다. 유명 사립 중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많이 왔지만, 그녀가 택한 곳은 집 근처에 있는 평범한 인근 중학교였다.

그녀는, 수술실 간호사라고 하기보다는 상담 선생님 같은 느낌이었다. 보통 수술실 간호사는 환자를 직접적으로 대하는 걸 싫어하는 간호사들이 많이 한다고 들었는데 말이다.

“왜 하필 *OR이였어요?”

*OR[operation room] : 수술실

그녀가 처음 스크럽 간호사 출신이라는 것을 안 시헌이 그녀에게 물은 질문이었다. 당시 막 초등학교에서 벗어난 중학교 1학년이 할 만한 질문은 아니었다. 시헌은 그녀가 수술실 간호사라는 것이 굉장히 의외였고, 또 그녀와 수술실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지금 뭐라고?’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온 시헌의 말에 그녀는 한동안 어이가 없었다. 정작 질문을 한 시헌은 무슨 문제가 있는지조차 눈치채고 있지 못한 것 같았다. 당시엔 학생들이 많아 시헌의 말에 대답해 주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친해져 가끔 그 얘기를 할 때면 양호 선생님인 그녀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말대로 스크럽 간호사 같은 건 하는 게 아니였다며.

시헌은 그녀의 사연을 모른다. 그러나 그녀가 굉장한 후회를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게 느껴졌다. 그녀를 보며 왠지 자신도 의사를 하면 그렇게 되지 않을까 괜한 걱정이 들었다.

학창 시절부터 미친 듯이 공부해, 내로라하는 유명한 대학교에 나와 졸업하자마자 간호사로 취직해 온갖 일을 겪은 그녀지만 지금은 결국 작은 중학교 양호 선생님이 되었다. 그러나 시헌은 그녀의 인생이 결코,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만은 않았다. 시헌이 침대에 걸터앉아 다리를 흔들었다. 발끝에 걸린 슬리퍼가 아슬아슬하게 움직였다. 컴퓨터로 작업하던 그녀가 고개를 들자 시헌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쌤요. 만약에 제가 의사가 되면. 저랑 같이 수술해 주실래요?”

시헌은 그 질문이, 마치 좋아하는 남자 선생님에게 어렵게 고백하는 여학생의 말투와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말을 잘못했다거나 이상한 질문을 했네요, 하고 넘어가지 않았다.

평범한 중학생이라면 뭘 몰라서 하는 소리라며 넘길 수도 있지만, 부모님이며 친척, 의대를 다니고 있는 누나와 형, 장래 희망에 당당히 ‘의사’를 하고 싶다고 적어 온 남동생을 보고 자란 시헌이 그런 말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생각해 볼게.”

“진짜요?”

“그럼. 내가 누구 앞에서 거짓말하겠니? 넌 착하니까. 좋은 의사가 될 거야. 그런 의사 옆에서 수술하면 그것만 한 영광이 어디 있겠어?”

“수술이랑 인격은 상관없어요.”

“글쎄, 그건 또 모르지.”

시헌은 더 이상 대답하지 않았다. 긍정적인 그녀의 대답이, 사실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양호실 문을 열었다. 동시에 문 앞에 선 누군가와 눈이 맞았다. 은소였다. 시헌은 엉망이 된 은소의 몰골을 살폈다.

창문 너머로 시헌의 반 아이들이 막바지 축구 경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체 무슨 축구를 하면 이런 몰골이 되는 거지? 은소는 문 앞에 서 있는 시헌을 보며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등 뒤로 전화벨 소리가 들려왔다. 양호실 선생님이 전화를 받았다.

― 네네. 아뇨. 그게… 일단 알겠습니다. 제가 학생이 있어서. 최대한 빨리 갈게요.

양호 선생님이 무릎이며 팔이 까진 은소를 발견했다. 시헌은 한쪽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곤란해하는 양호 선생님을 올려다봤다.

“급하세요?”

“아, 응. 좀.”

“제가 할게요.”

“할 수 있어?”

“대충요. 몇 번 봤거든요. 많이 다친 것도 아닌데 괜찮겠죠. 다녀오세요.”

“그래? 그럼 잘 좀 부탁할게.”

은소의 상처들이 큰 상처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한 양호 선생님이 잘 부탁한다며 양호실을 빠져나갔다. 시헌은 여전히 양호실 밖 문 너머에 서 있는 은소의 팔을 잡아당겨 안으로 이끌었다. 발끝으로 미닫이문을 슬쩍 밀었다.

은소의 팔과 무릎에 난 상처를 본 시헌은 한숨을 쉬었다. 현정과의 대화로 태어날 때부터 몸이 약해 병원 신세를 졌다는 말을 들었지만 이건 아니었다. 시헌은 근처에 있는 원형 의자를 빼내 은소를 앉혔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소독약과 거즈 등을 찾아내 책상 위로 올렸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대충 상처를 닦아 냈다. 입술을 깨물며 아픔을 참는 은소가 어딘가 안쓰러웠다. 안 그래도 살아 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마른 녀석이. 죽을상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

“아냐. 진짜 안 아프… 으읏! 지금 건 좀 아파.”

“일부러 그랬으니까.”

뭐? 은소가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시헌을 바라봤다. 일부러 상처 부분을 꾹꾹 눌러 댄 사실을 굳이 말할 필요는 없었다. 시헌이 은소의 상처를 소독한 뒤 거즈를 붙였다.

“하아, 미안. 쌤이 많이 늦었지?”

미닫이문이 열리며 양호 선생님이 안으로 들어왔다. 시헌은 손을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이 시헌의 처치를 보더니 입꼬리를 올렸다.

“올. 우리 시헌이. 잘하는데? 돗자리 깔아도 되겠어.”

“아, 진짜. 그렇게 좀 부르지 마세요.”

마침 수업을 끝마치는 종이 쳤다. 은소를 걱정한 현정이 양호실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쌤! 은소 많이 다쳤어요?”

“현정아. 둘이 친구야?”

“네네. 그래서 괜찮아요? 은소는?”

“그럼. 괜찮지. 방금 시헌이가 나 대신 소독해 줬어. 잘하던데?”

양호 선생님의 칭찬에, 현정은 마치 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어깨를 들썩였다. 시헌은 서진의 팔을 잡아끌며 교실로 향했다. 활짝 열려 있는 양호실 문 너머로 현정과 양호 선생님의 대화가 그대로 들렸다.

“제가 말했잖아요. 울 시헌이는 나중에 엄청난 의사가 될 거라니까요?”

* * *

10:45,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집 앞에 도착했다. 원인은 버스를 타기 귀찮아 택시를 탄 탓이었다. 회색 택시가 고급 빌라 앞에서 멈췄다.

“11,400원입니다.”

시헌은 현금으로 계산한 뒤 택시에서 내렸다. 가로등 조명 근처로 대학생처럼 보이는 여자가 머뭇대고 있었다.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여자, 이 근처 사람은 아니었다. 빌라 입구의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시헌에게 여자가 다가왔다. 빌라의 유리문이 열렸다. 여자가 거슬렸던 시헌이 마지못해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인데요?”

묘한 침묵이 공기를 가라앉혔다. 시간이 지나가 유리문이 다시 닫히고, 시헌과 여자가 문밖에 서 있었다. 여자의 손에 화려한 큐빅으로 튜닝 된 휴대폰이 들려 있다. 매니큐어를 하고 화려한 큐빅을 붙인 손톱이며, 어둠 때문에 잘 보이지는 않으나 화장도 되어 있었다. 짧은 미니스커트며 튈 정도로 붉은 힐을 본 시헌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여자가 다시 시헌에게 말을 걸었다.

“네가 시헌이니?”

“그런데요?”

“기욱 오빠……. 집에 있어?”

“그 인간을 왜 저한테 찾으세요.”

시헌의 말투에 여자가 살짝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런 일도 한두 번이지 반복되면 질리는 법이었다. 형의 여자 문제를 시헌이 책임져야 할 의무는 없다. 기욱과 연락이 안 된다는 것 자체가 이미 버림을 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이 여자는 그 정도 눈치도 없나 보다.

시헌이 다시 비밀번호를 누르자 유리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려는 시헌을 여자가 붙잡았다. 시헌은 여자에게 붙잡힌 팔목을 가만히 바라봤다.

“기욱 오빠랑 연락이 안 돼서 그런데 혹시 연락 오면 알려 줄 수 있어?”

“알았어요.”

여자의 표정이 밝아졌다.

“고마워. 아, 혹시 휴대폰 좀 줄래? 혹시 모르니까 내 번호 찍어 줄게.”

“그러던가요.”

시헌은 주머니에 있는 휴대폰을 건넸다. 여자가 자신의 휴대폰 번호를 찍었다. 유리문이 닫히고 계단을 오르는 시헌은 여자 번호가 적혀 있는 휴대폰을 저장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닫았다.

* * *

학교 앞 편의점. 딸랑, 벨 소리가 들리며 문이 열렸다. 하굣길 편의점 안으로 서진과 현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학교 2학년인 알바생이 시헌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세요.”

알바생의 인사를 반쯤 무시한 시헌은 초콜릿을 고르는 현정의 뒤로 다가갔다. 현정은 새로 나온 초콜릿의 어떤 맛을 사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시헌이 보기엔 그 맛이 그 맛이었다. 현정은 결국 3개를 다 집어 들었다.

서진은 이미 계산을 하고, 또 뭔가를 먹는 중이었다. 하얀색. 초콜릿은 아니었고, 식품 코너에 있었던 치즈 같았다.

“너도 먹을래?”

초콜릿 사건 이후로 시간이 지나서 그런지 서진의 행동에 위화감은 없었다. 설령 그렇다고 해도 서진이 먼저 뭔가를 내미는 것은 마냥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모처럼의 행동에 시헌은 기분이 좋아졌다. 냉동고에 있던 치즈라 그런지 입안에서 치즈가 뚝, 하고 끊겨 나갔다. 예상했지만 맛은 없었다.

“은소는?”

시헌의 질문에 계산을 마친 현정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교실에 없었어?”

“없던데.”

청소 당번으로 청소하고 온 시헌은 자료 정리를 도와달라는 선생님의 말에 교무실에 갔다가 오는 길이었다. 은소는커녕, 교실 문조차 잠겨 있었다. 마침 문을 잠그고 교무실로 가려는 주번을 발견해 열쇠를 받은 뒤 가방을 챙기고 곧장 편의점으로 온 것이 전부였다.

“흐음, 그러게? 은소 어디 갔지?”

새로 산 초콜릿을 씹어 먹던 현정의 표정이 구겨졌다. 현정은 먹던 초콜릿을 서진에게 떠넘기듯 건넸다. 표정으로 보아 맛이 없는 것 같았다. 서진은 현정이 준 초콜릿을 아무렇지 않게 먹고 있었다. 새로 초콜릿을 뜯은 현정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알아서 집에 갔지 않을까?”

“연락해 볼까? 폰번호 있는데.”

시헌은 휴대폰을 만지는 서진을 바라봤다. 서진의 휴대폰 너머에 저장돼 있는 은소. 휴대폰 속에는 은소와 주고받은 최근 기록과 메시지 흔적이 가득했다.

도대체 언제? 어디서? 번호를 주고받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서진은 시헌에게 붙잡힌 팔목을 보며 인상을 구겼다. 서진의 엄지손가락이 통화 버튼 위로 살짝 떠 있었다.

“내버려 둬.”

“맞아, 알아서 집에 갔지 않을까? 그보다 노래방 가자! 노래방!”

현정이 끼어들었다. 별일 아니겠지 하며 넘기는 현정의 모습에 서진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시헌은 주머니 속, 서진의 휴대폰에 대해 생각했다. 문자를 주고받은 흔적, 무슨 얘기를 한 걸까? 중학교 2학년 남자애들의 문자가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상하게 궁금증을 지울 수 없었다. 노래방을 가자고 조르는 현정의 옆에서 시헌은 생각나는 대로 한마디 던졌다.

“배고파.”

상황에 맞지 않은, 뜬금없는 대화에 서진과 현정이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정말 생각 없이 말을 했는데. 말을 하니 거짓말처럼 배가 고파지는 기분이었다.

“너 점심 안 먹었어?”

“점심 맛없었잖아.”

“그럼 떡볶이 먹고, 노래방?”

“분식 말고. 설렁탕. 지난번 노래방 옆에.”

맛있었는데. 시헌이 말을 잇자 옆으로 서진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을 참지 못한 서진이 시헌의 어깨를 토닥였다.

“크읍, 큭큭… 하하하! 너 너무 애늙은이 같잖아! 미치겠다!”

“야! 난 진짜 먹고 싶어서 하는 말을…….”

“하하하, 알았다고. 먹자, 먹어. 너도 괜찮지?”

서진이 현정에게 동의를 구했다. 손가락을 볼에 대며 잠시 생각하던 현정이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 앞 편의점 건너편 놀이터 벤치에 앉았다. 현정은 마지막 남은 화이트 초콜릿을 뜯었다. 익숙하게 초콜릿을 반으로 쪼개 서진에게 건넸다.

초콜릿을 입에 문 서진이 익숙하게 휴대폰으로 문자를 쳤다. 옆에 앉은 시헌은 서진의 휴대폰이 걸리적거리는지 힐끗거렸다. 마침 전송 버튼을 눌러 뭐라고 보냈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수신자가 은소라는 사실만은 확인할 수 있었다.

전화를 걸려던 서진이 시헌의 눈치를 보며 휴대폰을 닫았다. 그리고 이내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입을 열었다.

“야, 너네 학원은?”

초콜릿을 핥아 먹던 현정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시헌을 바라봤다.

“나는 땡땡이. 으음. 우리 시헌인?”

“집에서 성적만 잘 나오면 신경 안 써.”

“야, 너네 말하는 거 되게 재수 없다.”

“뭐? 그런 게 어딨어!”

서진이 농담 삼아 던진 말에 현정이 발끈했다. 누나와 함께 구도시에 있는 작은 반지하의 집에서 살고 있는 서진은 두 사람과 달리 학원을 다니고 싶어도 다니지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 기초수급생활자에, 그나마 이름 있는 대학교 간호과에 다니는 누나가 과외다, 장학금이다 하면서 돈을 버는 것으로 간신히 생활해 왔다.

졸업하고 난 뒤 대학병원의 간호사로 취직하면 좀 나을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는 있었지만 그게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은 서진도 알고 있었다. 지금의 현정은, 적어도 서진의 그런 집안 사정을 배려할 만큼 성숙한 편이 아니라는 것을 시헌은 알았다. 그런 현정을 대신에 시헌이 사과를 했다.

“미안.”

“됐어. 그냥 한 소리야.”

현정과 서진이 초콜릿을 다 먹은 것을 본 시헌은 슬슬 가자며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시헌이 짜증을 냈다. 어쩐지 주머니가 허전하더라니만은.

“아, 씹.”

“울 시헌이. 왜?”

“교실에. 폰 두고 왔어.”

“가지러 가면 되지 꼭 욕을 해야 되냐.”

서진의 타박에 시헌은 입술을 깨물었다. 귀찮다고. 시헌은 책상 옆 창문가에 올려 뒀던 휴대폰을 생각했다. 현정이 서진의 팔을 잡고 다시 벤치에 앉았다. 짧은 치마를 입은 다리를 벤치 위아래로 흔들었다. 현정은 서진의 팔을 잡은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갔다 와, 기다릴게.”

“뭐? 야, 그래도 같이 가 줘야지.”

“아, 뭐 어때! 나 움직이기 귀찮단 말야.”

서진은 시헌을 혼자 보내려 하는 현정이 마음에 들지 않아 보였다. 상관없는데.

“금방 갔다 올게.”

“어? 야, 박시헌!!”

시헌은 자신을 부르는 서진을 무시한 채 등을 돌렸다. 교무실로 들어가자, 아직 퇴근하지 않은 담임선생님과 눈이 마주쳤다.

“어머, 시헌아 무슨 일이니?”

“휴대폰 교실에 두고 왔어요.”

적당히 말을 한 뒤 열쇠를 챙겨 교무실을 나와 교실 뒷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정면으로 보이는 창문 근처에 휴대폰이 그대로 있었다. 휴대폰을 열어 보지도 않은 채 주머니에 넣은 뒤 교실을 나왔다. 열쇠를 제자리에 두고, 담임선생님에게 인사를 한 뒤 휴대폰을 만지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사이 형인 기욱에게 문자가 와 있었다.

「오늘 늦어.」 오후 4:02

「알겠어.」 오후 4:32

답장을 보내던 시헌은 문득 지난밤에 일어난 일을 생각했다. 폴더 휴대폰을 열어 한 손으로 다시 문자를 쳤다.

「어제 형 여친 왔었어.」 오후 4:44

「어떻게 생겼는데?」 오후 4:45

여친이 여친처럼 생겼지 어떻게 생긴 건 또 뭔가. 시헌은 기욱의 문자에 코웃음을 쳤다. 여자라고 보내려던 걸 예의상 여친이라고 적었지만. 시헌 또한 기욱과 마찬가지로 그녀를 기욱의 여자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시헌은 어젯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손을 붙잡았던 여자에 대해 생각했다.

「몰라. 연락 닿으면 알려 달라고 하던데.」 오후 4:45

「번호 받았어?」 오후 4:46

「저장 안 했는데.」 오후 4:46

「버려 그럼.」 오후 4:46

기욱의 답장에 시헌은 휴대폰을 닫았다. 아무리 친형이지만. 기욱은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형임에도 불구하고 기욱은 이상하리만큼 시헌에게 친절했다. 기욱의 그런 행동은 시헌이 단순한 가족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시헌 본인도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었으나 그런 기욱의 행동이 어느 순간부터는 묘한 특권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시헌은 기욱에게 답장을 보낸 뒤 계단을 내려왔다. 답장이라고 할 것도 없는 답장이었다.

* * *

1층에 도착한 시헌은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제야 휴대폰을 하느라 정문과 반대 방향으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잘못 나왔어.’

머리를 긁적인 시헌은 쓰레기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좀 돌아가야 했지만, 다시 계단을 올라가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도로가 있는 높은 담벼락, 학생들이 잘 다니지 않는 쓰레기장 근처 안쪽에는 아직 퇴근하지 않은 몇몇 선생님들의 차들이 드문드문 주차되어 있었다.

폐휴지를 버리는 쓰레기장 안으로 말소리가 들려왔다. 처음에는 쓰레기를 처리하는 아저씨인 줄 알았으나 차 뒤에 쪼그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학생을 발견한 시헌이 인상을 찌푸렸다. 시헌을 발견한 남학생의 담배가 입안에서 툭, 발밑으로 떨어졌다.

아씨. 아깝게. 남학생이 바닥으로 떨어진 담배를 툴툴 털어 냈다. 시헌은 남학생들이 모여 있는 안쪽 쓰레기장으로 고개를 돌렸다.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우리 은소. 중학교 오니까 살 만하지 그치?”

“너 없어서 태민이가 얼마나 힘들였는지 알아? 야, 병원으로 튀면 튄다고 말을 해야 할 거 아냐.”

버리지 않은 폐휴지 더미 위로 은소가 주저앉아 있었다. 학생들 틈에 가려져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얇은 팔다리며 하얀 얼굴은 틀림없는 은소였다. 남학생의 발이 은소의 어깨를 짓눌렀다.

시헌은 근처 초등학교 출신이라더니. 초등학교 왕따 출신이었나 하고 생각했다.

쓰레기장 안을 보고 있는 시헌의 뒤로 누군가 다가왔다. 시헌은 등 뒤로 다가오는 도원의 손을 쳐 냈다. 흠짓, 놀란 도원이 시헌을 보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인사를 했다.

“시, 시헌아. 안녕? 집에 안 가고 뭐 해?”

“…….”

지난번 생일 카드도 그렇고, 유독 친한 척 구는 도원이 시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폐휴지가 있는 쓰레기장 안으로 들어가자 담배 냄새가 났다. 시헌은 구석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남학생의 담배를 빼앗아 폐휴지장 밖으로 내던졌다.

폐휴지장 밖, 아스팔트 위로 남학생의 담배가 떨어졌다. 자리에서 일어난 남학생이 시헌의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야, 너 뭐냐?”

“담배 꺼라.”

시헌은 남학생의 손목을 잡아 힘을 주었다. 남학생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다. 남학생의 뒤로 엉망이 되어 있는 은소가 보였다.

폐휴지인 줄 알았는데, 은소의 가방에서 튀어나온 교과서들이 바닥에 굴러다니고 있었다. 남학생이 간신히 시헌에게서 손을 거뒀다. 정확히는 시헌이 힘을 풀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학생과 거리를 벌린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너네 지금 뭐 하냐?”

폐휴지장 안으로 침묵이 일었다. 하, 시헌의 옆으로 짜증 섞인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숨을 쉬고 싶은 것도, 짜증을 내야 할 대상도 남학생이 아닌 시헌이었다.

짜증을 내는 남학생을 올려다봤다. 은소에게 발길질을 가하던 남학생이었다. 중학교 2학년에 170cm가 넘는 키는 남학생들 사이에서 위압감을 형성하기엔 충분했다. 방금 전 남학생이 했던 것처럼 그 역시 시헌의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이번에는 팔을 잡거나 하지 않았다. 그냥 내버려 둘 뿐이었다. 시헌의 어깨를 미는 남학생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한 번, 두 번. 세 번. 시헌은 남학생이 자신의 몸을 건든 횟수를 셌다.

“뭐 하긴 뭐 해. 큭큭. 보는 대로지. 왜. 치려고?”

“…….”

“야, 박시헌. 집에 돈 좀 있다고 유세 떠니까 좋냐?”

아, 남학생을 보던 시헌은 한발 늦게 그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어디서 많이 본 익숙한 얼굴이더라만은. 1학년. 학교 초에 싸웠던 무리 중에 같이 있던 남학생이었다. 같이 다니던 무리의 남학생들과 패싸움이 있고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친구들의 대부분이 전학을 가 버렸으니 화가 날 만도 싶었다. 정작 시헌은 싸움이 난 이후의 기억은 거의 없었다.

부모님 대신으로 학교에 불려온 기욱이, 담임이며 담당 선생님과 학부모들을 전부 상대했기 때문이었다. 싸운 애들은 초등학교 시절부터 문제아였다는 핑계로 학교 측에서 전학을 보내기로 하고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이들이 문제아였던 것은 맞으나 그 일이 전학을 보내야 할 만큼 중대한 사안 또한 아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돈을 받았는지, 아니면 학부모가 돈을 받았는지는 시헌은 알 수 없었다. 시헌의 기억 속에 눈앞에 있는 남학생은 유리가 깨지고, 피가 튀는 싸움의 현장에서 그저 벌벌 떨며 구경만 하고 있었다.

싸움을 잘하는 친구들이 사라지고 난 뒤 허세를 부리는 모습이 우스웠다. 시헌은 은소를 힐끗 바라봤다. 노을이 지고 있는 저녁 폐휴지장 안, 조명은 없었으나 은소의 안색이 처음보다 많이 창백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시헌의 주먹이, 남학생의 얼굴을 정면으로 강타했다. 쾅, 소리와 함껜 남학생이 폐휴지 더미 위로 주저앉았다. 남학생의 코에서 터져 나온 피가 시헌의 손목에 그대로 묻었다. 손목이 좀 아팠다.

때릴 때 잘못 때린 것 같았다. 손목을 살짝 털어 내자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린 피가 바닥으로 튀었다. 폐휴지장 바닥 회색 신문지 위로 검붉은 핏자국이 났다. 남학생이 손으로 코를 막았다. 코에서 흐르는 피가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씨발 새끼!!”

시헌은 메고 있던 가방을 내던졌다. 동시에 뒤에 있던 남학생이 시헌의 팔을 붙잡았다. 다리를 걸어 넘어트리자 좁은 폐휴지장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시헌에게 얼굴을 맞은 남학생이 코를 막은 채 주먹을 휘둘렀다.

남학생의 손 밑으로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봐줄 필요도 없이 다시 얼굴을 쳤다. 바닥으로 넘어진 남학생을 시헌은 거침없이 발로 찼다. 땀이 났다. 손으로 이마를 닦자 손에 묻은 피가 그대로 묻었다.

이런. 문지르면 더 번질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시헌은 손에 묻은 피를 그대로 내버려 뒀다. 폐휴지장 밖에서 보고 있던 도원의 표정이 점점 굳기 시작했다. 도원이 그런 시헌을 말렸다.

“시헌아. 왜, 왜 그래. 진정해.”

“안 꺼져?”

도와줄 것도. 그렇다고 덤벼들 용기도 없는 도원이 시헌은 거슬렸다. 짧은 비명을 내지른 도원이 도망쳤다. 시헌은 손에 묻은 피를 담담히 내려다보더니 혀로 살짝 핥았다. 비릿한 향이 났다. 그러나 곧 아무 맛도 나지 않게 되었다. 조금 질척할 뿐 물이랑 별로 다른 느낌은 들지 않았다. 그 생각에 웃음이 나왔다.

“이런 미친 새끼!!”

미친 새끼, 시헌의 입가에 번지는 미소에 근처에 있던 남학생이 질색하며 중얼거렸다. 틀린 말은 아니지. 시헌은 남학생의 말을 부정할 생각이 없었다. 얼굴을 두 대나 맞고, 여전히 피가 흐르는 코를 쥐고 있는 남학생의 앞으로 다가갔다.

시헌 또한 남학생이 했던 것처럼 한 번, 두 번, 세 번, 남학생의 어깨를 밀었다. 시헌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남학생은 점점 뒤로 밀려났다. 시헌의 계속된 행동에 남학생은 결국 벽에 몸을 받은 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시헌은 남색 교복 바지에 손에 묻은 피를 닦았다. 그것은 손에 묻은 물을 닦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행위였다.

“이대로 뒤질 때까지 처맞아 볼래?”

“하, 부모님이 의사란 새끼가 사람 패고 다니니까 좋냐?”

“어. 난 의사 아니거든.”

시헌은 남학생의 몸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렸다. 시헌의 발길질에 남학생이 인상을 찌푸렸다. 근처에 있는 학생 중 누구도 시헌과 남학생에게 다가가려 하지 않았다. 시헌은 몸을 숙여 남학생과 키를 맞췄다. 남학생의 짧은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남학생의 코 밑이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야, 저거 위험한 거 아니야?”

“누가 말려 봐.”

“난 좀…….”

교복 셔츠와 바지를 빨갛게 적신 피에 다른 남학생들이 수군댔다. 시헌은 가볍게 어깨를 들썩였다. 고작 이 정도 피가 난다 해서, 눈앞에 있는 남학생이 당장 과다출혈이니 하는 것으로 죽을 리가 없었다. 인간의 피는 생각보다 적지 않다.

목이 마르면 물을 마시면 되고, 피가 부족하면 수혈을 하면 된다. 초등학생, 아니 유치원도 생각할 법한 상식이다. 참으로 간단한 방법이지 않은가? 피가 안 된다면 수액을 부으면 당장 과다출혈로 죽진 않는다. 적어도 병원에 갈 때까지 시간은 벌 수 있었다.

시헌의 머릿속에 문득 양호 선생님이 스쳐 지나갔다. 대학병원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니 라인을 잡는 것쯤은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럼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므로 눈앞에 있는 남학생이 얼마나 피를 흘리던 시헌이 알 바는 아니었다. 시헌이 남학생의 머리를 잡은 손을 놓았다. 남학생의 머리가 벽에 살짝 부딪혔다.

“병원 가. 근데.”

“…….”

“코 말고 부러지고 싶은 곳 있냐?”

“젠장! 박시헌! 넌 역시 미친놈이야!”

남학생이 벽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있던 다른 학생들이 남학생을 부축하며 폐휴지장을 빠져나갔다. 멀어지는 남학생들을 힐끗 본 시헌은 은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씨발.”

시헌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나왔다. 은소의 뺨을 건드리던 시헌은 안색을 굳혔다. 식은땀을 흘리며 숨이 가파른 모습을 보니 정말 상태가 안 좋은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하아, 하, 괜찮…… 그냥 가슴이…….”

시헌은 남학생이 은소의 가슴 부근을 찼던 것을 생각했다. 가슴을 움켜쥔 은소의 모습에 시헌은 은소의 셔츠 단추를 풀었다. 시헌의 손에서 셔츠의 단추가 후드득, 하고 뜯겨 나갔다. 안으로 흰색 반팔티를 들춘 시헌은 가슴 근처에 있는 커다란 수술 흉터에 인상을 찌푸렸다.

벽에 기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은소에 시헌은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긁적였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무의식중에 팔에 차인 시계의 시간이 눈에 들어왔다.

5:02. 늘 늦게까지 남아 5시가 조금 넘어 퇴근하는 양호 선생님이었다. 양호 선생님이라면 응급 처치든 뭐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시헌은 언제 올지 모르는 119에 연락을 하는 것보다, 양호 선생님이 먼저였다. 시헌은 은소의 몸을 살짝 벽 쪽으로 뉘였다.

“금방 올 테니까 기다려.”

시헌은 곧장 계단을 올라갔다. 급하게 올라가느라 발을 헛디뎠지만, 그 사실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달렸다. 계단을 오르며 가장 빨리 양호실을 갈 방법을 계산했다. 텅 빈 교실의 복도 끝에 있는 양호실. 후우, 양호실 문을 열려던 시헌의 손이 멈췄다. 열쇠가 잠겨 있다. 시헌은 혹시나 하고 문을 두드렸으나 역시나 반응은 없었다. 혹시 간발의 차로 놓친 건 아닐까 근처 복도를 기웃거리지만 아무도 없었다.

“학생! 거기 무슨 일이야?”

“그게…. 아니에요.”

나이가 지긋한 경비 아저씨는, 시헌의 기준에서 은소에게 데려오는 것만도 못했다.

“늦었으니까 빨리 집에 가.”

“네.”

빨리 집에 가라는 경비의 말을 무시하고 급하게 계단을 내려왔다. 계단을 내려가는 시헌은 주머니 속 휴대폰을 꺼냈다. 119에라도 연락을 해 보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시헌의 손이 119에 전화를 건다. 수화음이 이어졌다.

― 여보세요? 119입니다. 무슨 일인가요?

― 저, 학생이 숨을 못 쉬는 것 같은데…….

― 혹시 위치가 어떻게 되시나요?

― 그게…….

구급대원과 통화를 하며 휴지장이 보이는 계단을 내려와 유리문을 열려던 시헌의 손이 멈췄다.

“…….”

― 여보세요? 학생? 거기가 어디라구요?

휴대폰 너머로 저를 찾는 구급대원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유리벽 너머 운동장 쪽으로 은소를 부축하며 멀어지고 있는 서진이 보였다. 서진이 시헌이 있는 교사 쪽을 바라봤다. 잘못한 것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시헌은 문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시헌은 재빨리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후우, 숨을 가다듬고 다시 유리문을 연 뒤 밖으로 나왔다. 폐휴지장으로 돌아가자 구석에 던져 놓았던 가방이 그대로 있었다. 은소의 가방은 없었다. 폐휴지 사이에 미처 챙기지 못한 은소의 학생증을 발견했다. 기은소. 은소의 학생증을 쥔 시헌의 손이 살짝 떨렸다.

가방을 챙기고 폐휴지장을 나와 다시 운동장을 바라봤다. 정문 근처 도로에서 은소를 부축하고 택시를 잡는 서진의 모습이 그대로 보였다. 은소를 택시에 태운 서진도 얼마 가지 않아 택시를 탔다.

두 사람이 탄 택시가 교문 밖 시헌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시헌은 교문을 응시했다. 신경질적으로 뺨을 만지자 굳어 있던 피가 손톱 사이로 긁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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