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0 기은소와 강서진(1권) (1/83)

너를 위한 랩소디

1권

Chapter. 0 기은소와 강서진

이것은 나와 누나. 그리고 그와 그의 동생에 관련된 이야기이다.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는 모르겠다.

무엇이, 어떻게,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시간이 지난 지금도 알 수는 없다. 분명한 건 박기욱은 처음부터 끝까지 박기욱이라는 점이었다.

* * *

가장 먼저 기억하는 것은 중학교 2학년 시절 봄이었다. 왜냐고 묻는다면 이유는 없다. 그날은 평소와 똑같은 날이었다. 평소와 똑같이 등교하고, 지각하고 떠들었던 날이었다.

단 하나, 그날을 기억하게 만들 만한 요소가 있다면 그것은 그날이 시헌이 은소를 처음 만난 날이었다는 것뿐이었다.

기은소.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나 중학생이라는 이름에 익숙해질 무렵 일어난 일이었다. 이른 등교 시간도, 긴 수업 시간도 이젠 낯선 풍경이 아닌 일상이었다. 160cm의 키. 아직은 성인 남성보다는 조금 작은, 그래도 또래에 비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시헌이 이어폰을 낀 채 등굣길을 걸었다.

시헌의 옆으로 교복을 입지 않은 초등학생들이 지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등교를 하는 학생들 중에서 교복을 입은 것은 시헌이 유일했다. 그 많은 학생이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시헌도 모른다.

시헌은 셔츠를 만지작거렸다. 등교를 하고 있는 시헌의 모습은 교복이라고 하기는 애매한, 그렇다고 사복도 아닌 차림이었다.

처음 입학했을 때 셔츠의 가장 윗단추까지 잠그고, 대각선에 파란색과 빨간색이 섞인 무늬의 넥타이를 조여 맨, 그 위에 베이지색 조끼를 입은 뒤 마이 단추를 전부 잠근 반듯한 옷차림은 사라져 버린 지 오래였다.

넥타이는 장롱 어딘가에 들어가 있었으며 윗단추 두 개가 풀어진 셔츠 사이에는 검은색 반팔티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부직포 같은 마이는 단지 등교할 때 조금이라도 따듯하기 위함이지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어차피 교실에 들어가면 가장 먼저 벗어 버릴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시헌은 이어폰 한쪽을 빼고 운동장 옆으로 난 담을 따라 걸었다. 교문을 통과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가자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정문이 보였다. 정문에는 아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시헌은 편한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자연스럽게 입구 대신 줄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시헌의 그런 행동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선생님조차도 시헌의 행동에 아무런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교복을 똑바로 입고 오지 않는 학생들은 늘 고정이 되어 있었다. 시헌도 그중 한 명이였다.

시헌의 반에서 범생이라 불리는 남학생은 시헌을 지나쳐 문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시헌은 안으로 들어간 남학생을 부러워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다시 이어폰을 끼고 벽에 몸을 기댔다.

벽이 차기는 했지만 참을 만했다. 곡 하나가 끝나 갈 무렵 한 무리의 학생들 사이에서 한 여학생이 시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시헌은 여학생의 가슴 부근에 옷핀으로 달린 이름표를 확인했다.

장현정.

현정이었다. 짧게 줄인 치마하며 한껏 공을 들인 화장, 머리에 네일까지. 등교를 하는 학생의 모습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었다.

“안녕?”

“어.”

현정이 시헌에게 인사를 하자 작게 입술을 뗐다. 시헌의 그런 태도는 현정에게 익숙했다. 시헌은 시선이 현정의 짧은 치마를 보더니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리 봄이지만 스타킹 하나 신고 오지 않을 만한 날씨는 아니었다.

“치마.”

“치마가 왜?”

시헌의 중얼거림을 들은 현정이 무슨 문제가 있냐며 몸을 틀었다.

“아니다, 됐다.”

“뭐야. 시시하게.”

시헌의 옆에 선 현정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현정의 주머니에서 며칠 전 친구에게 받은 손난로가 나왔다. 주머니에 넣어 놓고 까먹은 것 같았다. 현정이 손난로를 비빌 때마다 알갱이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묘하게 시헌의 귀에 거슬렸다. 이미 다 써 버린 손난로가 저런다고 따듯해지는 것도 아닐 텐데 왜 저러는 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참다못한 시헌이 현정의 손난로를 빼앗았다.

“아, 무슨 짓이야!”

현정이 달라며 소리를 질렀지만, 시헌은 손난로를 제 주머니에 넣어 버렸다. 처음부터 오래된 손난로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현정은 시헌의 행동에 별다른 미련 없이 손난로에서 시선을 돌렸다.

셔츠 하나에 벽돌처럼 붉은색 마이는, 이른 봄의 추위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현정의 차림을 살핀 시헌은 현정이 늘 입고 오던 붉은 패딩을 입고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현정은 손난로 대신 팔을 모아 비비볐다. 추위에 입가에 바른 립글로즈가 살짝 굳어 있었다.

“패딩은?”

“엄마가 세탁소 맡겼어.”

“다른 거 입고 오면 되잖아.”

“난 그게 좋아!”

빽, 하고 소리를 지르며 어린애 같은 투정을 부리는 현정에 시헌은 어이가 없었다.

“그럼 하나 더 사든가.”

현정의 집에 가 본 적이 있는 시헌은 현정의 집에 빨간 패딩 외에 다른 패딩들이 넘쳐나는 걸 알고 있었다. 그 많은 패딩들 중 왜 하필 빨간색이여야 하는지 시헌은 이해할 수 없었다.

현정이 계속해서 시헌이 입고 있는 고가의 검은색 패딩을 보며 헤프게 웃었다. 바보 같은 웃음의 의미를 시헌이 눈치채지 못할 리 없다.

“나 추워.”

“너 진짜…….”

시헌이 못 이기는 척 겉옷을 벗었다. 현정이 웃으며 시헌의 잠바로 무릎을 덮었다. 현정의 그런 행동에 시헌은 애써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걸치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얇은 셔츠 안으로 찬바람이 들어왔다.

“감기 걸렸으면 병원에 가.”

남의 패딩을 빼앗아 덮은 주제에 하는 말이라고는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나 때문이라는 거야?”

“어.”

“웃겨, 엄마가 어차피 감기 걸릴 사람은 어떻게든 걸리게 되어 있다고 그랬거든?”

“마취과시잖아.”

“얘는, 마취과 의사도 의사거든?”

부모님의 직업을 걸고넘어지는 시헌에 현정이 지지 않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그런 현정의 태도에 시헌의 패딩을 빼앗아 입은 것에 대한 죄책감 같은 건 전혀 없어 보였다. 시헌의 감기는 다분 현정의 패딩 탓만은 아니었다. 사실 며칠 전부터 머리가 지끈거리며 아팠기 때문이었다. 시헌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벽에 몸을 기댔다. 콘크리트로 된 벽은 여전히 찼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입구이자 출구인 문 앞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났다.

“아, 쌤! 왜요!”

“빨리 가라.”

“진짜 똑바로 입었다니까…….”

교복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던 학생 한 명이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멀리 그 모습을 본 현정이 시헌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웃었다.

“큭큭. 쟤 또 걸렸다.”

“강서진! 뒤에 애들 기다리는 거 안 보여? 빨리 가서 줄 서 있어!”

여자 선생님의 단호한 말에 서진은 입술을 삐죽 내밀며 멀리 서 있는 현정과 시헌을 흘끗거렸다. 서진은 그나마 둘과 비교했을 때 가장 정상적인 교복 차림이었다. 서진은 죽어도 줄을 서기 싫은 눈치였다.

“쌤, 한 번만…….”

“벌점 카드 쓰고 들어갈래?”

“며, 몇 점이였죠?”

“5점.”

서진의 머리가 빠르게 자신의 벌점을 계산했다. 5점. 이내 서진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재수가 없게도 이런저런 요소로 받은 벌점이 딱 25점이었다.

“3점 안 될까요? 저 5점 받으면 교내 봉사인데. 조끼 안 입은 게 다잖아요.”

“임마. 그러니까 내가 잘 입고 오라고 그랬잖아. 아니면 줄 서.”

선생님에게 자비란 없었다. 단호하게 거절당하는 모습을 지켜본 현정이 서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결국, 뒤에 학생들이 지나가야 한다는 이유로 길을 비킨 서진은 터덜터덜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분명 난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벌점은 왜 이렇게 많이 쌓인 건지. 평소에는 잡지도 않던 조끼를 오늘따라 왜 또 귀신같이 잡아내는 건지. 서진의 불만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이게 다 너네 때문이야.”

“얘는. 자기가 잘못해 놓고 뭐라는 거야? 안 그래?”

“너네가 저번에 수업 시간 빼자고 말만 안 했어도 됐잖아.”

“지나간 얘길 왜 해! 그리고 너도 찬성했잖아!!”

시헌의 패딩을 무릎에 두른 현정이 끝까지 지지 않고 소리를 질렀다. 사실 현정의 말이 틀린 구석은 없었던 터라 서진도 그에 관해선 오래 말하지 못했다. 빽빽, 시끄럽게 싸워 대는 서진과 현정을 본 시헌이 셔츠 소매 끝으로 흐르는 콧물을 살짝 닦았다. 그 모습을 본 서진이 성큼성큼 시헌의 앞으로 다가왔다.

“왜?”

“너…….”

“야, 잠깐…….”

시헌이 무슨 짓이냐고 묻기도 전에 서진의 손이 시헌의 이마에 닿았다. 시헌의 이마에 손을 올린 서진은 사뭇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야, 박시헌. 너 열 있잖아.”

“열 없어.”

“있잖아.”

“네가 의사야? 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아?”

“내가 의사면 너도 의사겠다. 넌 열이 없는지 어떻게 장담하는데?”

“내 몸이잖아.”

“어쩌라고.”

서진은 그런 시헌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채 현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현정이 무릎에 두르고 있는 옷이 평소 시헌이 즐겨 입는 검은색 패딩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당장 시헌이 옷 돌려줘,”

“아, 나 추워! 그럼 네가 벗어 줄 거야?”

“알았어. 마이 벗어 줄 테니까 돌려줘.”

서진의 말에 현정이 무릎을 덮고 있던 시헌의 패딩을 내밀었다.

“그냥 덮고 있어. 패딩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이건 또 무슨 허세야?”

“허세가 아니라 진짜…….”

“됐으니까! 입으라고!”

서진이 현정의 손에 들린 패딩을 빼앗아 반강제로 시헌의 품에 던졌다. 방금 전까지 무릎을 덮은 패딩이라 그런지 패딩이 따듯했다. 서진의 시선에 눈치를 본 시헌이 마지못해 잠바를 다시 입었다. 그러나 지퍼는 잠그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서진이 다시 한번 혀를 찼다.

“보건실 가라.”

“교실 들어가서 자면 나아.”

“자도 보건실 가서 자. 담임쌤한테 말해 놓을 테니까.”

서진의 강압적인 태도에 시헌은 뚱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뭔가 불만은 있고, 근데 딱히 할 말은 없을 때 나오는 시헌 특유의 표정이었다. 서진은 그런 시헌의 불만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넌 감기 걸린 애 옷 빼앗아 입고 싶냐? 맨날 입던 옷은 또 왜 안 입고 와서 그러는데?”

“엄마가 세탁소 맡겼다니까!”

“다른 거 입고 오면 되잖아.”

“난 그게 좋단 말야!”

“그럼 하나 더 사!”

“그거 엄청 비싼 거거든?”

“너네 집 돈 많잖아!”

“……크읍. 하하하하하!!”

꽁트에 가까운 현정과 서진의 대화를 엿들은 시헌이 배를 잡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저 대화는 서진이 오기 전 시헌과 현정이 이미 한 번 했던 말이었다. 어쩜 이리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대화를 하는지 그것도 재능이었다.

서진의 말투는 시헌에 비해 약간 날이 서 있었지만, 말하는 내용은 꼭 엄마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니 웃음이 나오지 않으려야 않을 수 없었다.

그럼 누가 엄마지? 뭔가 이상한데. 혼자 큭큭대며 웃음을 터트린 시헌을 본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멈추며 고개를 돌렸다.

“시헌아. 너 많이 아파? 진짜 나 때문이야?”

“아니.”

“봐! 아니라잖아.”

“그걸 본인 앞에서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어?”

“흐음. 여기?”

현정이 꺄르르 웃었다. 그 모습을 본 서진이 현정의 팔꿈치를 꼬집었다. 현정은 살짝 꼬집었음에도 아프다며 소리를 질러 댔다.

“악! 아파!!”

“야, 얼마나 세게 했다고…….”

“쌤! 쌤! 여기! 학교 폭력!!”

“아, 장현정 진짜 미쳤나…!”

현정이 큰 소리로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어 선생님을 불렀다. 정작 소리를 지르는 현정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보다 못한 영어 선생님이 소리를 질렀다.

“야! 박시헌, 장현정, 강서진! 너넨 매번 걸리면서 왜 이렇게 시끄러워!”

“전 아무것도 안 했…….”

“오늘은 똑바로 입고 왔…….”

시헌과 서진이 동시에 억울하다며 변명을 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는 대사에 서로를 가만히 바라봤다. 두 사람의 얼굴에 중간에 낀 현정이 다시 웃었다.

이내 서진도 큭큭대며 웃었다. 시헌은 감기에 걸린 척 기침을 하듯이 입을 가렸다. 억지로 하는 기침에서 중간중간 웃음이 새어 나왔다. 줄을 서는 주변에는 3학년 선배들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 같았다.

“크읍… 하하. 진짜 내가 너네 둘 때문에 못 산다.”

“너 아까 현정이랑 했던 말 내가… 하하. 먼저 했거든? 콜록, 콜록…….”

웃음을 그친 시헌이 진짜 기침을 했다. 웃고 나니 머리가 더 아픈 기분이 들었다.

“야, 박시헌 괜찮아? 장현정. 이게 다 너 때문에…….”

“넌 뭐만 하면 나 때문이라고 그러더라? 서진아 그것도 습관이야.”

아픈 자신을 두고 싸우는 두 사람의 대화 소리가 귀에 울렸다. 시헌은 두 사람이 싸우는 것을 말릴 생각이 없었다. 정확히는 말리고 싶어도 말릴 기운이 없었다. 오늘처럼 빨리 교실에 들어가고 싶은 것은 처음이었다.

이마에서 손을 뗀 시헌과 한 남학생의 시선이 맞았다. 여기 서 있는 학생들의 대부분이 교복을 똑바로 입지 않아서 서 있는 것이었지만, 시헌의 옆에 서 있는 남학생은 누가 봐도 사복 차림이었다.

‘전학생인가?’

키가 작은 왜소한 체형의 남학생은 교실에 들어가지 못하고 서 있는 것이 부끄러운 것 같았다. 모든 사람이 자기를 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는지 고개를 숙인 얼굴이 붉었다. 사과를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 같았다. 체형이 왜소한 것뿐 아니라 성격도 소심해 보였다.

사실 줄을 서 있는 학생들 중 아무도 남학생에게 관심을 가지는 사람은 없었다. 남학생 혼자만의 착각이었다. 시헌과 남학생의 눈이 살짝 맞았다. 남학생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달아올랐다.

시헌은 모르는 척할 걸 그랬나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2학년인 시헌이 모든 학생에게 말을 걸 권한은 없었지만 미안한 마음에 먼저 말을 걸었다.

말 걸어 놓고, 3학년이면 곤란한데. 뭐라고 물어보지? 전학생이야? 좀 싸가지 없어 보이나. 그럼, 전학생입니까? ……입니까? 또 웃기다고 생각한 시헌은 결국 끝을 맺지 않은 채 얼버무리며 입을 열었다.

“전학생?”

시헌의 목소리에 남학생이 고개를 끄덕였다.

“몇 학년?”

“2학년.”

3학년이면 골치가 아플 뻔했는데. 시헌은 속으로 잘됐다며 곧장 남학생의 손을 붙잡았다.

“잠깐……!”

“가만히 있어 봐.”

남학생의 얇은 손목은 시헌의 굵은 손에 붙잡혀 힘없이 끌려 나왔다. 시헌은 선생님들 중에서도 국어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때마침 수학 선생님은 볼일이 있다며 올라간 뒤였다. 원래 당번도 아니었으니 수학 선생님이 사라진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막 임용고시를 합격한, 국어 선생님에게 학생들을 상대하는 것은 수업을 진행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시헌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이들이 장난을 심하게 쳐 수업 도중 울고 나간 적도 몇 번 있는 선생님이었지만, 수업을 들어가는 반 아이들의 이름을 전부 외울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었다. 시헌이 다가오자 그녀가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시헌아, 무슨 일이니?”

“전학생이래요.”

그녀는 시헌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시헌은 수학 선생님이 돌아오기 전까지 일을 처리해야 한다는 조급함에 사로잡혔다. 예쁘고 젊은 여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무시를 당하는 이유를 시헌은 어렴풋 알고 있었다.

시헌은 이름 모를 남학생의 등을 국어 선생님의 앞으로 밀었다. 선생님 앞으로 다가간 남학생은 시헌과 국어 선생님만 번갈아 봤다. 국어 선생님의 시선에 남학생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녀가 외운 얼굴과 이름에 이런 학생은 없었다. 선생님과 대화를 하는 시헌을 본 서진과 현정이 옆으로 다가왔다. 시헌은 학생들이 들을 수 있게 최대한 목소리를 높였다. 일부러, 화가 난 척 굴었다.

“교복도 없는데 서 있으라고 하는 건 너무하신 거 아닌가요?”

“어, 어? 아니, 시헌아. 그게 아니라…….”

“들어가도 되죠?”

“잠깐만. 선생님이 주임 선생님한테 먼저 물어보고…….”

시헌의 말에 그녀는 먼저 올라가 버린 수학 선생님만 찾기 시작했다. 그녀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지자 시헌은 다시 남학생의 팔을 잡고 1층 로비로 향하는 유리문을 넘었다.

“잠깐! 시헌아 넌 교복…!!”

그녀가 들어가지 말라며 시헌을 불렀지만 시헌은 그녀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시헌은 쫓아오려 하는 그녀를 힐긋 보더니 이내 등을 돌려 곧장 계단으로 올라갔다. 멀리 그런 남학생과 시헌의 모습을 본 현정과 서진이 목소리를 높였다.

“야! 박시헌 너 뭐냐!”

“전학생이면 혼자 들여보내야지 쟤는 왜 같이 가?”

현정이 서진의 팔을 살짝 꼬집었다. 살짝 눈을 맞춘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두 사람이 시헌과 남학생의 뒤를 쫓아 로비로 들어갔다. 뒤늦게 상황을 눈치챈 국어 선생님이 로비 안으로 쫓아 들어왔지만 두 사람은 계단 위로 사라지고 없었다. 급하게 계단을 올라가는 발소리 사이로 현정이 소리를 질렀다. 시헌을 따라가지 못한 서진이 현정을 말렸다. 시헌은 이미 둘의 시야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시헌아! 같이 가!!”

“야야, 처, 천천히 가. 그냥 가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교복을 입은 후 1년. 중학교 2학년 봄. 그것이 시헌과 은소의 첫 만남이었다.

* * *

강서진.

시헌이 서진을 만난 것은 조금 더 전의 이야기였다.

은소를 만난 동네 인근에 있는 작은 중학교가 아닌, 신도시 근처에 있는 커다란 사립 초등학교였다. 인근에 고가의 타워팰리스며 재개발이 이뤄지며 거기에 발맞춰 사립 초등학교 또한 시헌과 현정이 입학하기 몇 년 전 증축을 했다. 그중에서도 초등학교 5학년인 두 사람이 사용하는 교실은 지어진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신관이었다. 티끌 하나 묻지 않은 페인트하며 낙서 없는 책상, 1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 건물 냄새가 풀풀 나는 공간이었다.

“아아, 재미없어.”

교실의 맨 뒷좌석에 앉은 현정은 한쪽 팔을 괴며 옆에 앉아 있는 시헌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수업 시간, 선생님 몰래 이어폰을 끼고 있는 시헌은 현정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정확히는 들렸지만 무시했다. 자신을 일부러 무시한다는 것을 눈치챈 현정이 시헌의 귀에 있는 이어폰을 확, 하고 잡아당겼다. 책상 밑, 휴대폰으로 한참 영화의 하이라이트를 보고 있던 시헌의 표정이 구겨졌다.

“아오 씨. 어쩌라고.”

한참 몰입하고 있었던 시헌은 영화의 방해를 받은 것이 짜증 나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내 무릎에 놓인 작은 휴대폰 가득 커다란 시체가 팟, 하고 나타났다. 이어폰을 끼지 않은 탓에 무음이었다. 화면 속 형사 배우가 입을 움직였지만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시체가 나오기 전으로 휴대폰을 살짝 돌리고 반대편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칠판에서 젊은 여선생님이 열심히 수학 문제를 풀고 있었다. 현정의 수학 교과서에는 볼펜으로 풀어진 풀이들이 가득했다. 화이트나 수정 테이프도 사용하지 않고 줄을 긋고 나서 옆에 이어서 풀이가 마구잡이로 적혀 있었다. 답에는 네모 표시를 쳐 놓은 뒤 채점도 하지 않은 채 끝이었다.

단정하게 풀어진 시헌의 수학 교과서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시헌은 현정이 푼 그 답이 정답일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시헌의 책상에 펼쳐진 수학 교과서와 현정이 펼쳐 놓은 교과서의 페이지가 달랐다. 정확하게는 시헌과 현정의 두 사람의 페이지만 달랐다.

시헌은 1학기에 진작 배우고 지나간 앞 장이, 현정은 맨 뒷장의 배우지도 않은 페이지가 펼쳐져 있었다. 둘 다 선생님이 칠판에 열심히 수업하고 있는 단원과는 맞지 않았다.

“시헌아. 놀아 줘.”

“싫어.”

시헌은 현정을 무시하고 영화에 집중했다. 선생님의 목소리, 놀아 달라는 현정의 목소리, 영화의 대사들이 섞여 들려왔다.

초등학교 5학년 교실, 유명한 사립 초등학교. 수업을 똑바로 듣지 않고 있는 사람은 현정과 시헌뿐이 아니었다. 사실 설명을 하는 선생님도 중간중간 하품을 하거나 습관처럼 잠시만, 이라고 짧게 대답하고 휴대폰을 하고는 했다.

칠판의 분필들 사이에 놓인 휴대폰에 오는 문자가 급한 문자가 아니라는 걸 모르는 학생들은 없었다. 반 아이들 누구 하나 그 사실을 알고도 신경 쓰지 않는다는 걸 선생님은 알고 있었다. 흰색 분필들 사이에서 보호색을 띠며 놓여 있는 흰색 폴더 휴대폰. 저 안에는 분명 수업이 지루하다거나 퇴근하고 저녁은 어디서 먹자는 등의 남자 친구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가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현정의 칭얼거림이 점점 심해졌다. 결국, 이어폰 잭이 작은 휴대폰에서 뽑혀 나갔다.

― 꺄아아악!!

― 야! 저 자식 쫓아!!

영화에서 흘러나온 비명 소리와 수상한 남자를 쫓는 형사의 목소리가 수업 중인 교실에 울려 퍼졌다.

“장현정 너……!!”

시헌이 재빨리 소리를 줄였다. 몇몇 아이들이 고개를 돌려 시헌과 현정을 바라보며 큭큭댔다. 시헌이 현정의 이어폰을 빼앗으려 들었다.

“아, 놀아 달라고 했잖아!!”

결국, 현정이 소리를 질렀다. 수업 시간에 할 만한 행동은 아니었다.

“장현정, 박시헌. 놀 거면 나가서 놀아!”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라고 생각한 선생님이 소리를 치며 문 밖을 손가락질했다.

“내 이어폰 내놔.”

탁, 하고 현정에게 이어폰을 빼앗은 뒤 영화의 화면을 일시 중지한 시헌은 의자에 걸려 있는 잠바를 걸친 뒤 아무렇지 않게 복도로 나갔다.

“쌤! 저도 놀고 싶은데 나가도 돼요?”

“큭큭. 하하하하!”

“저두요!”

“안 돼! 둘만 나가!”

“에에, 치사해.”

시헌은 선생님과 아이들의 대화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현정이 시헌에게 팔짱을 끼며 달라붙었다. 춥다는 이유였다.

“저리 가.”

“아아, 추워. 춥단 말야.”

복도로 나와 살짝 열린 뒷문으로 현정의 자리에 걸린 잠바를 본 시헌은 한숨을 쉬며 걸친 잠바를 벗어 현정에게 내밀었다.

“시헌아.”

“…….”

“나 어제 엄마 병원 놀러갔었는데.”

“…….”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해 줄까? 엄마 밑에서 일하는 여자 의사가 있는데 어제 그 언니랑…….”

한쪽 이어폰을 끼고 마저 영화에 집중하는 시헌에게 현정은 계속 말을 걸었다. 시헌이 무슨 영화를 보든, 현정은 제 할 말만 하고 있었다. 더 이상 영화를 볼 상황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시헌은 영화를 끄고 이어폰이 꽂힌 휴대폰을 그대로 주머니에 넣었다. 주머니 속에서 휴대폰의 이어폰 줄이 마구잡이로 엉켰다. 시헌은 시멘트 벽에 몸을 기댔다. 살짝 열린 창문 틈 사이로 선생님의 수업 내용들이 새어 나왔다. 현정이 시헌에게 했던 말을 시헌도 똑같이 했다.

“재미없다.”

“그치? 아, 방과 후에 나랑 어디 안 갈래?”

“어딜?”

“친구 만나러? 있잖아. 지난번 초콜릿.”

아아, 시헌은 어렴풋 생각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주 전쯤인가 시험을 앞두고 학원을 땡땡이치고 놀다가 부모님에게 걸려 집에서 쫓겨난 현정에게 초콜릿을 주고 갔다는 남학생을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인근에서 가장 시설이 좋다는 사립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사람과 달리 그 남학생은 평범한 공립 초등학교 학생이었다. 몇 번 만나더니 친해진 모양이었다. 현정이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 것은 별로 특이한 일은 아니었다.

어딘가 어른스럽고, 음침한 시헌과 달리 밝고 사교성 좋은 현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현정이 먼저 나서서 시헌에게 사람을 소개를 해 주겠다고 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시헌은 현정이 소개해 주겠다는 남학생에 관한 관심보다는 남학생의 무엇이 현정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현정의 얘기를 들어 보면 남학생은 현정과 제법 잘 맞는 것 같았다.

“어쨌든 되게 재밌었어. 아아, 나도 걔랑 같은 초등학교였으면 좋았을 텐데.”

“왜?”

“맨날 놀 수 있잖아.”

“너 어차피 맨날 학원에서 놀잖아.”

“그래도 학원은 학원이잖아. 난 학원이 싫어. 집에 가면 11시가 넘는단 말야.”

“나도 그래.”

“그치? 학원 따위 다 망해 버렸으면 좋겠어.”

딱히 남학생이 원인이 아니더라도 그렇게 중얼거리는 현정의 말을 시헌은 차마 부정할 수 없었다. 벌써부터 국제 중학교 입시니 특목고, 대학 입시니 하고 떠드는 건 정말 재미가 없었다. 시헌은 실내화로 복도 대리석 바닥을 툭툭 건드리는 현정에 대해 생각했다.

양쪽 부모님이 전부 의사 집안인 시헌의 집과 현정의 집은 둘이 태어나기 전부터 종종 교류했다. 현정의 엄마와 시헌의 엄마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이어진 친구였다. 시헌의 돌잔치 때도 찍혀 있는 현정의 사진을 생각하면 둘이 같이 친하게 지낸다는 걸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조금 시끄럽고, 여학생이라 그런지 유독 꺅꺅대는 것만 제외한다면 시헌은 현정이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고급 편지지에 초등학생 글씨로 어울리지 않는 고백 편지를 써 수줍게 가져다주고는 도망가는 다른 여학생들보다 현정이 훨씬 나았다.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은 시헌은 생각나는 아무 말이나 던져 댔다.

“남학생 만난다며.”

“그런데?”

“오늘 학원은?”

그리고 이내 쓸모없는 질문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너도 안 갈 거지? 응? 나 저번에 혼나서, 나 혼자 빠지면 좀 그렇단 말이야.”

“내가 가도 넌 안 갈 거잖아.”

“넌 가끔 너무 직설적이라 내가 할 말이 없어.”

“틀린 말 한 거 아니잖아.”

“어쨌든 가지 말자. 걔한테 너 소개해 주기로 했단 말야!”

“저녁에 태권도는 갈 거야.”

시헌의 대답에 종이 쳤다.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몇몇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고, 둘은 자연스럽게 교실 안으로 들어갔다. 난방으로 교실 안이 따듯했다. 현정은 시헌의 잠바를 벗지 않았다. 교실로 들어와 다시 영화를 보려는 시헌은 문득 오늘 옆 반에 있는 여자 친구와 같이 하교를 하기로 했던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어떻게 하지? 시헌이 고민하는 사이 현정은 책상 위에 놓인 흰 우유에 몰래 네스퀵을 타 넣고 흔들었다. 타 먹지 말라는 선생님의 잔소리를 현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흰 유우 싫어요.

선생님에게 그렇게 말하는 현정은 뻔뻔한 건지 당당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사물함에 숨겨 놓았던 네스퀵을 선생님에게 전부 빼앗긴 뒤로 현정은 아예 가방에 따로 넣고 다녔다. 현정의 필통 안에는 필기구 사이사이로 네스퀵들이 들어 있었다. 입가에 덜 타진 네스퀵 가루들이 그대로 묻었다. 그 모습을 본 시헌은 한숨을 쉬며 가방에 있는 휴지를 꺼냈다.

“이리 와 봐.”

시헌은 가방에 있는 휴지로 현정의 입가를 닦아 줬다.

“나 오늘 여자 친구랑 하교하기로 했었는데. 깜박했어.”

뒤늦게 생각난 시헌의 중얼거림에 현정의 대답이 참 가관이었다.

“헤어져.”

“집에 같이 못 간다고 헤어지자고 하는 건 좀 웃기잖아.”

“내가 소개해 주고 싶은 건 너야.”

현정이 시헌의 휴대폰을 빼앗더니 멋대로 비밀번호를 풀어 문자를 보냈다. 시헌은 문자 메시지가 간 휴대폰을 받아 들었다. 뭐라고 보냈는지, 확인하지 않았다. 얼마 뒤 여자 친구에게 답장이 왔지만 시헌은 애써 틀은 영화의 흐름이 끊기는 게 싫어 무시했다.

* * *

거리 한복판에서 시헌은 걸음을 멈췄다. 옆에 있는 약국에 들어갔다. 현정이 시헌의 뒤를 따라 약국 안으로 들어갔다. 후시딘을 산 시헌은 현정을 약국 안에 있는 의자에 앉혔다. 고작해야 뺨에 난 상처에 약을 바르는 것임에도 현정은 아프다고 징징댔다. 점심시간, 시헌의 반으로 쳐들어온 여자 친구와 한바탕 싸운 현정을 시헌은 한심하게 바라봤다.

“그러니까 왜 싸우고 그래.”

“걔가 먼저 때린 거거든? 웃겨.”

“가만히 좀 있어.”

“아얏! 아파. 살살 좀 해! 야! 부모님이 둘 다 의사면서 그것도 하나 똑바로 못 해?”

“약 바르는 거랑 뭔 상관이야.”

“우리 시헌이. 좋은 의사 되긴 글렀네.”

약을 바른 시헌은 현정의 뺨에 밴드를 붙였다. 밴드 쓰레기를 처리하고 약국 밖으로 나온 시헌은 한발 늦게 대답했다.

“의사 안 할 거거든?”

시헌의 대답에 현정은 큭큭 웃어 댔다.

“너희 집에서 의사 안 하면 뭐 할 건데?”

“몰라. 생각 중이야.”

“오늘 내가 들은 말 중에 가장 웃겼어.”

시헌은 주변을 둘러봤다. 익숙하지 않은 낯선 동네의 풍경이 주변을 감쌌다. 매번 번화가며 새로 지어진 건물들이 즐비한 곳만 다니는 시헌은 어딘가 달동네 같은 이곳이 익숙하지 않았다. 집 근처에 이런 곳이 있었나 싶었다. 반면 현정은 자기 동네같이 익숙했다. 1차선 도로 근처를 기웃거리던 현정은 택시를 잡았다.

“다리 아파. 택시 타자.”

“돈은?”

“엄마 카드 훔쳐 왔어. 우리 엄마 카드 많아서 한 개쯤 사라져도 모를걸? 여차하면 네가 내면 되지. 너 돈 많잖아.”

현정의 그 말을 시헌은 부정하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인가. 용돈을 주기 귀찮다며 부모님은 시헌에게 카드를 줬다. 카드를 받은 날, 얼마가 들었는지 얼마나 사용하면 화를 낼지 궁금하다는 현정의 꼬임에 넘어가 인근 백화점 패밀리 레스토랑에 간 적이 있었다.

가장 비싼 스테이크를 시켜 놓고 정작 칼질을 잘못해 반도 먹지 못하고 남겼다. 푸드 코너에 들려, 생일도 아닌데 케이크를 사고 초콜릿이며 과자들을 잔뜩 샀었다. 학원에서 사 오라는 문제집도 샀다.

그리고 그날 저녁은.

―여느 때와 같이 평범했다.

사용할 때마다 부모님의 휴대폰으로 문자가 감에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카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밥을 먹던 중간에 누구 생일이었냐고 물어본 것이 다였다. 시헌은 살짝 실망했으나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인 아무것도 모르는 남동생을 제외하면 시헌은 부모님과 식사를 하는 것이 불편했다. 부모님이 바쁘셔서 매일 같이 밥을 먹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가족이 다 같이 밥을 먹었다. 그러나 정작 가족을 생각하는 부모님이니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의사 부모님, 의대를 다니는 누나, 대학 병원에서 실습 중인 형, 네 사람이 밥을 먹으며 주고받는 대화들은 시헌이 끼기에는 너무 먼 주제였다.

중간중간 시헌을 신경 쓴 누나가 시헌의 진로―그래 봤자 의사지만. 어떤 분야를 하냐 하는 세부적인 것들―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는 했다.

그럴 때면 시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의사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말도, 그렇다고 다른 직업을 말할 용기도 없었다.

가족끼리 식사를 할 때면 시헌은 빠르게 밥그릇을 비우고 가장 먼저 일어났다. 다른 아이들보다 밥을 빠르게 먹는 것은 불편한 자리를 벗어나기 위한 하나의 생존 전략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시헌은 현정에게 ‘실패’라는 문자 하나만 보냈다.

잠시 뒤 현정의 말투가 그대로 드러나는 장문의 문자들이 여럿 왔지만 시헌은 끝내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다음 날, 둘이서 다 먹지도 못할 양의 케이크며 과자들은 학교에 가져가 아이들에게 나눠 줬다. 그것이 전부인 이야기였다.

택시를 탄 현정은 앞 유리를 손가락질하며 기사 대신 네비게이션의 역할을 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가 주세요.”

대체 현정은 언제 이런 복잡한 골목을 다 외웠는지 참으로 신기했다.

“네네. 저기 슈퍼 앞 골목에서 내려 주세요.”

잠시 뒤 한 골목의 낡은 슈퍼 앞에서 현정이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기본요금에서 딱 1,000원을 넘긴 금액이었다. 카드가 안 된다는 택시 기사의 말에 현정이 곤란한 듯 시헌을 바라봤다. 결국, 시헌이 마지못해 약을 사고 남은 돈을 택시 기사에게 건넸다.

“넌 꼭 현금으로 계산하더라.”

현금을 들고 다니는 시헌을 현정은 이상하게 여겼다. 아무리 부모님에게 카드를 받았다고 해도 지난번처럼 사용처가 전부 드러나는 건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다.

“초등학생이라도 사생활은 있어.”

“택시비가 사생활이라는 말은 처음 들어.”

택시에서 내린 현정이 낡은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뽀글 머리 파마를 한 아주머니와 익숙하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어머, 현정이니? 옆에 친구는 누구야? 잘생겼는데.”

“훗, 울 시헌이가 쫌 잘생겼죠.”

“안녕하세요.”

기세가 등등해진 현정에 시헌은 마지못해 손을 모아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를 했다. 그사이 좁은 슈퍼 안을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한 현정은 진열대에 있는 초콜릿을 종류별로 샀다. 얼마나 많이 샀는지 봉투 안은 초콜릿으로 가득했다. 계산을 마친 현정은 이상한 소리를 하며 초콜릿이 담긴 봉투를 챙겼다.

“보답이야.”

“무슨 보답?”

“아이참, 걔한테 줄 거라고.”

현정이 답답하다며 중얼거렸다. 가게 밖으로 나온 시헌은 현정의 초콜릿이 담긴 봉투 안에 손을 넣었다. 하나쯤은 괜찮겠지, 하고 무의식적으로 눈에 띄는 초콜릿 바 하나를 집어 들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흥얼대는 현정은 시헌이 초콜릿을 빼 간 줄도 모르고 있었다.

“어?”

“뭐?”

뒤늦게 시헌이 초콜릿을 멋대로 빼 가 먹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현정의 눈이 커졌다. 돈도 많은 주제에. 이런 걸로 신경 쓰는 애였던가? 으득, 하고 초콜릿을 씹은 시헌이 담담하게 말했다.

“정 그러면 지나가다가 하나 더 사 줄게.”

시헌의 말에 현정은 오해가 있다며 손을 저었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거. 걔가 나한테 줬던 거랑 똑같은 거야.”

“생각 없이 집은 건데?”

“큭큭, 그럼 운명이네.”

시헌은 과한 해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현정의 말에 은근슬쩍 손에 쥔 초콜릿 바를 만진 것은 부정하지 못하는 사실이었다.

남학생은 부모님과 싸우고 집을 나와 울고 있는 현정과 만났다고 했다. 시헌은 울고 있는 현정에게 남학생이 건네줬다는 그 초콜릿을 한 입 더 베어 물었다. 도대체 어떤 녀석인지 호기심을 지울 수 없었다.

겨울이라 날이 금방 어두워졌다. 드문드문 있는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긴 했지만 밝기가 어두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래도 안 보이는 것보다는 나았다. 차들도 거의 다니지 않았다. 다 먹은 초콜릿 쓰레기를 손에 쥔 시헌은 현정의 뒤를 말없이 밟았다. 낡은 아파트 단지들이 드러났다. 좀 더 안으로 들어가자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몇 채가 보였다. 담력 훈련이라도 해야 될 것만 같은 장소였다. 앞에 선 현정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잠시 뒤 무너져 가는 아파트 건물 계단에서 남학생이 내려왔다.

“여기야! 여기! 여기!”

현정은 초콜릿이 들어 있는 봉지를 손에 쥔 채 남학생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손에 들린 봉지가 이리저리 움직였다.

시헌은 현정이 소개해 주겠다고 한 남학생을 가만히 바라봤다. 시헌보다 보다 키가 조금 큰, 마르지도 살이 찌지도 않은 체형에 평범한 외모의 남학생이었다. 남학생과 시헌의 눈이 맞았다. 멍하니 서 있는 시헌과 남학생 사이에 낀 현정이 둘 사이를 소개했다.

“이쪽은 박시헌. 저번에 말한 학교 친구고.”

“…….”

“시헌아. 얘가 지난번에 말한 그 초콜릿 남학생. 그…….”

“강서진.”

머뭇대는 현정을 대신해 서진이 짧게 자기소개를 했다. 시헌이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눈앞으로 서진의 손이 나와 있었다. 시헌은 그런 서진의 행동이 과장되었다고 느꼈다. 서진도 그 사실을 알았는지 괜히 시선을 피했다. 민망한 듯 자연스럽게 손을 내리는 척하는 서진을 시헌은 재미있다고 느꼈다. 시헌이 내려가려는 서진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 이미 들었을 이름을 말했다.

“박시헌이야.”

초등학교 5학년의 어느 날, 그것이 시헌과 서진의 첫 만남이었다.

* * *

종이컵의 찬물이 목으로 넘어갔다. 약을 넘긴 뒤 종이컵을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눌렀다. 37.5도 미열이 있는 온도계를 가만히 바라봤다.

“열이 좀 있는데. 정 그러면 자고 갈래?”

“괜찮아요.”

자고 가라는 양호 선생님의 제안을 적당히 거절한 시헌은 다음 수업이 뭔지 생각해 보지만 기억이 나지 않았다. 사실 시헌은 학교에서 큰마음 먹고 바꿨다는 양호실 침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새로 바뀐 침대는 어딘가 병원의 입원실을 떠올리게 했다. 시헌에게 병원은 가족들이 있는 곳이면 족했다.

“그래도 교실에서 자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교실에서 안 잘 거거든요.”

“우리 시헌이 교실에서 자는 거 선생님이 다 알거든.”

“아니라구요.”

“뭐, 어쨌든 아프면 언제든 와.”

뚱한 표정을 짓는 시헌에 양호 선생님이 웃으며 한발 물러섰다. 언제부터인가 양호 선생님은 시헌을 저런 식으로 불렀다. 시헌은 대학 병원 간호사 출신인 양호 선생님을 싫어하진 않지만, 양호실은 싫었다. 의사는 좋은데 병원은 싫은 것과 같은 아이러니함이 아닐 수 없었다.

시헌은 양호 선생님의 제안을 정중하게 거절하며 교실로 돌아와 가장 뒷자리에 앉았다. 2학년 첫 학기에 자리를 정할 때 시헌은 자진해서 뒷자리에 앉았다. 성적만 놓고 보면 시헌의 1학년 성적은 가장 높았다. 시헌이 공부를 잘하는 학생의 특권인 앞자리를 포기한 이유는 간단했다. 그 자리가 선생님 몰래 영화를 볼 수 있는 자리이기 때문이었다.

시헌은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책상에 엎드렸다. 책상 옆에 걸어 두기 귀찮아 올려 뒀던 가방을 베개 대신 팔 밑으로 깔았다.

‘머리 아파.’

여전히 머리가 아팠다. 엎드려 있는 시헌의 주변으로 서진과 현정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있지. 그래서……. 서진아 잠깐만.”

서진과 한참 대화를 하던 현정이 엎드려 있는 시헌에게 다가왔다. 엎드린 채로 현정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시헌은 일부러 모르는 척했다. 현정의 팔이 시헌의 밑에 있던 딱딱한 가방을 확 하고 빼냈다.

“…….”

난데없이 사라진 가방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든 시헌이 현정을 노려봤다. 현정은 서진의 손에 들린 베개를 빼앗아 시헌에게 내밀었다. 서진의 베개는 인근 천원숍에서 산 2,000원짜리 베개였다. 어께에 담요를 두른 현정은 시헌에게 베개를 빌려주는 것이 대단한 일이라도 된다는 양 자랑스러워했다.

“자. 빌려줄게.”

“하아. 내놔.”

시헌은 서진의 베개를 빼앗기 무섭게 얼굴을 묻어 엎드렸다. 싸구려라고는 하나 확실히 가방보다는 훨씬 나았다.

박시헌, 장현정. 유명 사립 초등학교에서 국제 중학교 입시에 떨어져서 왔다고 알려진 두 사람을 학교에선 이상하게 생각했다.

재개발 탓에 빈부 격차가 유독 심한 동네, 고급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고 타워팰리스 건물이 들어선 동네에서 5분도 걸리지 않은 곳에는 다 쓰러져 가는 오래된 빌라들이 줄지어 자리했다. 그 조합은 참으로 기괴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오래된 굴뚝이 있는 목욕탕 옆으로 지어진 주상 복합 빌딩. 목욕탕을 경계로 빌딩 너머를 동네 사람들은 신도시, 안쪽을 구도시라고 불렀다. 도시라고 할 것도 없는 규모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으므로 누구 하나 그 단어에 트집을 잡는 사람은 없었다. 신도시와 구도시는, 어른들의 직업부터 아이들의 학업 수준까지 모든 것이 갈렸다.

신도시라 불리는 지역에 사는 애들은 구도시 거지라며 놀리고, 반대로 구도시 애들은 돈밖에 모르는 졸부 새끼들이라고 서로를 부르고는 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어린아이들의 교육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곳에 사는 어른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런 거였다.

그런 신도시 출신의 학생이 제 발로 구도시의 학교에 걸어 들어왔다고 하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현정이 잠시 물을 마시러 나가고, 시헌의 앞에 선 서진이 말을 걸었다.

“약은?”

“먹었어.”

“자라.”

“고마워.”

서진은 시헌의 감사를 이해할 수 없어 보였다. 사실 시헌도 뭐가 고맙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서진은 베개를 팔 밑에 깔고 눈을 감았다. 약 때문인지 금방 졸음이 왔다. 자고 있는 시헌을 대신해 서진이 아침 조회 중인 담임선생님에게 말을 했다.

“시헌인 왜 저래?”

“아침부터 머리 아프대요. 양호실 갔다 왔어요.”

“그래, 알았다.”

선생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침 조회를 했다. 잠결에 선생님과 서진의 대화를 들은 시헌은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살짝 미소를 지으며 서진의 손이 닿았던 베개 끝을 만지작거렸다.

자신을 챙겨 주는 듯한 서진의 한마디가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 * *

시헌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쉬는 시간 무렵이었다. 아이들이 떠드는 소리에 시헌은 고개를 들었다. 열은 없었지만 두통은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다. 그래도 아침보다는 나았다. 주변을 둘러보며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주번이 칠판에 적혀 있는 영어들을 지우고 있었다. 칠판 왼편으로 커다란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월요일. 1교시. 영어.

납득이 간 시헌은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돌린 시헌은 옆자리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몸을 돌렸다. 옆자리는 분명 빈 책상이어야 했다. 남학생, 세상 사람들이 다 저를 보는 줄 알고 얼굴을 붉히던, 사복 차림의, 메마른 남학생이 시헌의 옆에 앉아 있었다. 시헌의 기억이 맞다면 분명 아침에 자신이 데리고 온 남학생이 맞았다.

‘어. 이름이 뭐였지?’

시헌은 한참 동안 교복을 입지 않은 남학생의 이름을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잠에서 막 깬 시헌은 남학생의 이름을 들은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시헌의 시선을 눈치챈 남학생이 눈을 돌렸다. 머뭇대던 남학생이 휴대폰을 만지고 있는 시헌을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아침에는 고마웠어.”

아침, 불과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은 일이었다.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별로. 마침 서 있기도 귀찮았거든.”

“그래도 고마워.”

시헌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서진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왜 이렇게 우린 서로에게 쓸모없이 고마운 일만 많을까 하고 고민했다. 시헌은 남학생의 가슴 부근을 바라봤다. 당연하겠지만 교복을 입지 않은 남학생의 가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남학생이 언제 전학을 왔니, 어떻게 전학을 왔니 등 같은 건 시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이름은?”

“기은소. 은소야.”

“특이하네.”

“너는?”

“박시헌.”

“너도 만만찮은데.”

은소가 웃으라고 한 건지 아니면 진지하게 대답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남아 있는 두통에 시헌은 다시 엎드렸다. 시헌이 다시 잠에서 깬 것은 책상에 있는 시험지가 바닥으로 떨어졌을 무렵이었다. 정확히 몇 교시인지는 모르지만 또 다시 잠에 든 것은 분명했다.

‘뭐야?’

수업치고는 주변이 조용했다. 뒤척이면서 책상 밑으로 떨어진 시험지를 주워 들었다. 수학 시험지였다. 시헌은 베개를 무릎에 내려놓고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고 보니 오늘 시험을 본다는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가방에서 필통을 꺼내 샤프를 딸각였다. 빈 샤프심 통을 흔든 시헌은 발로 앞자리에 앉은 서진을 찼다. 어려운 문제가 걸렸는지 고민하고 있던 서진이 신경질적으로 뒤를 돌아 시헌을 노려봤다. 시헌이 빈 샤프심 통을 흔들었다.

“박시헌! 너 뭐 해!”

“샤프심이 없어요.”

“미리 안 사 두고 뭐 했어.”

“자다 일어났는데요.”

“얌마, 자다 일어난 게 자랑이야? 연필 없어?”

“있었으면 안 이랬어요.”

“누가 얘 펜 좀 빌려줘라.”

선생님은 꼬박꼬박 말대답을 하는 시헌을 불편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조금만 말대답을 하면 부모님을 모셔오라는 신도시 학교 선생님과 달리 구도시에는 시헌처럼 엇나간 학생들이 워낙 많아 시헌의 말대답은 반항의 축에도 못 끼는 수준이었다.

시헌의 뒷자리로 샤프심이 가득한 샤프심 통이 날아왔다. 대각선에 앉은 서진의 짓이었다. 샤프심을 채운 시헌은 뒤에 붙어 있는 작은 포스트잇을 확인했다.

「4번 답 좀」

샤프심을 채운 시헌은 뒷장을 넘겨 4번 문제부터 풀기 시작했다. 답을 구한 뒤 3번에 체크를 했다. 서진의 쪽지를 지우개로 지우려던 손이 멈췄다. 서진의 쪽지를 필통에 넣은 시헌은 서랍 안에 손을 넣어 교과서 한 귀퉁이를 찢어 새로 답을 적었다. 고작해야 쪽지임에도 불구하고 버리고 싶지 않았다.

시헌은 샤프심 통과 함께 쪽지를 건넸다. 문제를 풀던 서진이 지우개로 문제 주변을 지웠다. 몇 분까지 푸는 시험인지 모르는 시헌은 빠르게 문제를 풀었다. 순식간에 문제를 푼 시헌은 턱을 괴며 주변을 둘러봤다. 몇 분까지인지는 모르지만 늦게 시작한 시헌이 가장 빨리 문제를 다 풀었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무도 없던 옆자리에 사복을 입은 은소가 앉아 있었다. 살짝 밀려 나온 은소의 시험지가 보였다. 4번 문제. 시헌은 다시 시험지 종이 끝을 찢어 은소에게 살짝 던졌다.

「4번에 3번」

쪽지를 펴 본 은소가 입 모양으로 고맙다며 웅얼거리고 고개를 숙였다.

“야. 너네 또 뭐 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선생님이 시헌에게 다가왔지만, 시헌은 의자를 살짝 뒤로 빼며 태연하게 대답했다.

“샤프심 빌렸는데요.”

선생님의 시선이 찢어진 시험지 가장자리 종이에 닿았다. 은소가 재빨리 작은 종이쪽지를 숨겼다. 시헌의 주변에 있는 현정, 서진을 둘러본 선생님이 시헌의 살짝 펼쳐진 노트를 손가락질했다.

“이건 왜 찢은 거야? 커닝했냐?”

“자다가 모르고 찢은 거예요.”

“인마, 자다가 책을 찢긴 뭘 찢어.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네네.”

성적에 반영되는 비율도 낮은, 쪽지 시험이라는 걸 아는 수학 선생님은 시헌의 커닝을 알고도 넘어가 줬다. 후유, 은소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시헌의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선생님 몰래 휴대폰을 꺼내 확인할까 말까 고민했다.

“시헌아. 시헌아.”

대각선에서 현정의 목소리가 들리자 시헌이 고개를 돌렸다. 현정이 손짓으로 휴대폰을 확인하라며 눈치를 주었다. 시헌은 옷소매로 가려 휴대폰을 열었다.

「시헌아 ㅠㅠ4번 문제 답 뭐야? 알려주세여♡」

하트가 들어간 문자를 보며 시헌은 다시 시험지를 뒤집어 4번의 정답을 확인했다. 그리고 이내 혼자 큭큭 웃어 댔다. 뭐가 즐거운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냥 이 상황이 재미있었다. 책상 서랍 안으로 손을 넣으며 키패드를 보지도 않고 답장을 보냈다.

「33이라고」

「33없는데?」

「3번. 18.」

답장을 끝으로 시헌은 엎드렸다. 뒤늦게 풀지 않은 마지막 문제가 생각났지만, 다시 몸을 일으키기 귀찮았던 터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시험이 끝나고 잠이 든 시헌을 깨운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중간중간, 선생님에게 대신 아프다는 말을 해 주는 서진의 목소리만 들려올 뿐이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시헌은 왠지 안심되었다.

* * *

점심시간이 되었을 무렵 시헌은 나지막이 고개를 들었다. 2학년, 3학년부터 배식을 하는 터라 지금 내려가면 줄을 선 1학년들과 밥을 먹으려는 3학년들 사이에 치일 것이었다. 종일 잠을 자 엉망이 된 머리를 긁으며 비어 있는 앞자리와 대각선 자리를 바라봤다. 습관처럼 휴대폰을 열자 문자가 와 있었다.

「나랑 현정이 지금 올라가고 있어. 좀 일어나라 ㅡㅡ」 오후 12:10

「일어났거든?」 오후 12:11

시헌은 답장을 보낸 뒤 휴대폰을 닫았다. 시헌의 옆으로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은소가 앉아 있었다. 몇몇 반 애들이 은소를 흘끗거렸지만, 누구 하나 먼저 은소에게 다가와 같이 밥을 먹자고 하는 아이들은 없었다.

여전히 기침은 났지만, 머리의 두통은 많이 가신 상태였다. 약의 효과가 들긴 들은 모양이다. 복도에서 서진과 현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의자를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헌은 조금 오래된 슬라이드 휴대폰을 손에 쥐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은소의 어깨를 건드렸다.

은소가 놀라 시헌을 올려다봤다. 그 모습에 시헌은 은소가 다람쥐나 작은 동물 같다고 느꼈다. 동그랗게 뜬 눈이 뒷문을 바라보고 있는 시헌을 향했다.

“밥 먹어.”

시헌은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뒷문에 있는 서진과 현정에게 걸어갔다. 그냥 같이 먹자고 한마디만 하면 끝날 일임에도 시헌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성격이라 어쩔 수 없는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등을 돌려 머뭇대고 있는 은소를 힐끗 바라봤다. 시헌과 눈이 마주친 은소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렇게 놀랄 것까지는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잘못한 것 같아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밥 먹자고. 안 먹어?”

“아, 아니야!”

시헌이 한마디 더 하자 은소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뒷문으로 들어온 현정이 들고 있는 봉투에는 학교 담 너머 편의점에서 사 온 과자들이 담겨 있었다. 선생님이 나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했지만, 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서진이 은소를 바라봤다.

서진의 손에는 초콜릿이 들려 있었다. 처음 만난, 그날 먹었던 초콜릿과 똑같은 초콜릿이었다.

머뭇머뭇 옷을 챙겨 입고 일어날 준비를 하는 은소를 흘겨본 시헌은 아무렇지 않게 초콜릿을 들고 있는 서진의 손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다 대었다. 으득, 하고 이빨에 닿은 초콜릿이 아무렇게나 부서졌다. 텁텁한 입안으로 밀크 초콜릿이 녹아 들어갔다.

“아, 박시헌! 사 먹으라고!”

시헌은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엄지 끝으로 살짝 닦으며 은소를 향해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서진은 모르는. 시헌 나름의 영역 표시였다.

“하, 넌 진짜 꼭 내가 먹는 것만 빼앗아 먹더라?”

“왜들 그래. 자. 시헌아 네 것도 있어.”

현정이 편의점 봉지를 뒤지더니 뜯지 않은 새 초콜릿을 시헌에게 내밀었다. 서진이 먹고 있는, 시헌이 빼앗아 먹은 그 초콜릿과 같은 종류였다.

“됐어.”

시헌은 괜찮다 손을 저으며 입가에 묻은 초콜릿을 손끝으로 살짝 쓸었다. 손가락을 확인하자 녹아 버린 초콜릿이 묻어났다. 혀를 가져다 대자 단맛이 느껴졌다. 시헌은 주머니에 손을 넣으며 급식실이 있는 계단 쪽으로 내려갔다.

“아아! 시헌아 같이 가!”

현정이 같이 가자며 달라붙었다.

“하아. 진짜. 왜 저래.”

서진은 사과 한마디도 없이 급식실로 내려가는 시헌과 시헌이 베어 먹은 초콜릿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서진이 교실 안 가만히 서 있는 은소를 향해 말을 거는 소리가 시헌의 귀에 들려왔다. 그 말은 시헌이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기은소라고 그랬나? 밥, 같이 먹자.”

“고마워.”

―다들 참, 뭐가 그리 고마운 건지 여전히 알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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