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나 보이는 건 뭐든 그와 함께했던 그녀였기에.
‘위험한 거 아냐?’
‘안 들키면 되지. 애들 모아서 놀면 개재밌을 듯?’
‘....흠. 그럴 거 같긴 하다. 키키키킥...’
그렇게 정예린은 정시우를 끌어들였고, 정시우는 자신이 짊어질 책임까지 모두 짊어지게 되었다.
어쨌든 아랫것을 두들겨 패다가 발각된 것이니, 자신이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시우였다.
하지만 정예린은 그 이유가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괜찮냐? 엄마한테 많이 혼났지?’
‘.....나는 뭐... 괜찮은데. 난 네가...’
‘뭐, 괜찮아. 그래도 앞으론 장난 못 치고 놀겠다. 엄마한테 단단히 찍혔음.’
‘...미안.’
‘뭘 미안하냐. 재밌게 놀았으면 됐지. 그 나이에 마약파티하고 논 게 우리밖에 더 있겠냐? 크흐흐.’
대수롭지 않은 듯 시원하게 웃는 그 모습.
예린은 그 모습에 심장이 쿵쾅쿵쾅 뛰는 것을 느꼈다.
손에서 땀이 나고, 머리에 찌릿찌릿한 울림이 느껴졌다.
첫사랑을 마주하는 순간이었다.
[예린. 그냥 잊어. 네 마음만 아플 뿐이야. 러시아에 있다보면 괜찮아질 거야.]
“.....응.”
하지만 이제는 오랫동안 짝사랑하던 그를 보내주고, 친구로 남아야 할 때.
예린은 씁쓸하게 웃으며 통화를 끓었다.
이젠 마음을 정리하고 러시아로 떠나야 할 때이다.
***
하민의 첫사랑이 무너진 그 날.
하민은 집으로 돌아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그저 민준과 함께했던 여러 추억을 떠올리며 하염없이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어떻게....”
운명의 남자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자신이 태어난 순간 신이 점지해준 완벽한 짝이라고, 그와 자신이 만난 것은 운명이라고 생각했었다.
“흐으으...흐아앙...흐아아아아....”
하지만 빼앗겨버렸다.
웬 평범하고 볼품없는 년에게 운명의 남자를 빼앗기고 말았다.
하민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아니. 이제야 그녀의 나이대에 맞게 울음을 터트렸다.
“어머! 하민아!”
이하영은 갓난아이 때를 제외하고 단 한 번 운 적이 없던 하민이 대성통곡을 하자, 잔뜩 당황하여 자초지종을 물었다.
하민은 ‘오빠를 뺏겼어’라는 말만 계속 되뇌었다.
“오빠? 누구? 설마 민준이를 말하는 거니?”
정민준.
남편과 그 여동생의 자식이자, 가장 정성민의 얼굴을 닮은 아이.
하민은 그 아이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흐음. 민준이란 말이지...”
이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무쓸모년 이희연의 자식도 아니고, 근육보지 안지연의 자식도 아닌, 사랑스러운 성아의 자식.
그 아이라면 하영은 기꺼이 허락할 수 있었다.
딸의 첫사랑을 응원할수 있었다.
“주말에 아빠가 올 거야. 그때 얘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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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2년.
참 많고 많은 일이 있었지만, 여전히 내 생활에 흐트러짐은 없다.
매일 아침 6시에 기상을 해 조깅을 하는 것부터, 여러 사업의 현안과 이슈를 처리하는 것까지.
난 철저히 내 몸과 외모를 관리하면서도 이 조직을 완벽하게 다스려왔고, 그 결과 뒷세계는 유례없는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다.
이제는 소규모 분쟁조차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뒷세계의 체계와 균형이 갖춰져 가고 있으며, 뒷세계에 종사하는 많은 이들이 나를 진정한 왕으로 인정하고 있다.
이렇듯 나의 지배하에 뒷세계는 건설적인 방향으로 변해왔다.
이제 뒷세계의 구성원들은 내가 제시하는 규칙 아래 생업을 이어가고 있으며, 민간에 지대한 피해를 끼칠만 한 일들을 일절 하지 않는다.
또한 그들이 양지로 진출할 수 있게끔 지원금도 주고 있어, 마약, 인신매매, 무기거래 같은 강력범죄의 비중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뒷세계를 양지화시키는 작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허나 그렇다고 하여 가정에 소홀하지 않는다.
나의 최우선 순위는 무엇보다 나의 가정이며, 일 때문에 가정을 소홀히 할 수 없다.하여 난 요일을 정해 고루고루 부인들과 동침하며 그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그들 모두를 사랑으로 품어준다.
누구 하나 버릴 수 없는 내 소중한 사람들이고, 그들이 절대로 불행하도록 둘 수 없다.
애초에 내가 행복을 느끼는 방법은,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원활하게 돌아가야 완성될 수 있다.
나의 행복은 마치 정밀한 기계의 여러 부속품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야 완성될 수 있는 것이기에, 단 한 순간도 소홀하지 않고,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는다.
그 누가 됐든 감히 나의 행복을 망치려 든다면, 난 어느 순간이라도 괴물이 될 수 있고, 미스터 최나 구원자보다 더한 악귀가 되어 그 원인을 찢어 죽일 것이다.
“주인님. 시우 도련님께서 창고에 불을 질렀습니다.”
“뭐라고?”
하지만 내 행복을 망치려 드는 존재가 내 아이라면, 난 어떻게 해야 할까.
나의 가장 든든한 조력자이자, 내 평생의 배필인 희연이의 아들 ‘시우’ 녀석 말이다.
“후우. 인명피해는?”
“없습니다.”
“다행이군. 창고 안의 물품은 얼마나 보존했지?”
“...전소됐습니다.”
“.....”
....그래. 그럴 수도 있다.
원래 아이들이란 사고 치면서 크는 게 정상 아닌가.
그것보다는 시우가 벌인 일 때문에 희연이가 곤란할 것이 걱정된다.
아마 내 부인들의 주말 모임인 ‘도원결의’ 회의에서 대차게 까이겠지.
울상이 된 희연이를 달래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골이 아프다.
“주인님. 시우 도련님과 예린 아가씨께서 마약 파티를 벌이셨습니다.”
“뭐라고?”
하지만 불과 1년 뒤, 더 큰 대형 사고를 쳐버린 내 아이들.
아아. 이대론 내 행복이 완성될 수 없다.
아무래도 엘레나와 희연이를 불러놓고 상담을 해봐야겠다.
그나마 아직 어렸을 때는 개구리를 고문한다거나 개미집에 불을 지르는 귀여운 장난을 쳐댔는데, 점점 나이가 드니 장난의 수위가 높아지니 말이다.
“여보. 내가 예린이를 데리고 잠시 러시아에 가 있을게. 둘이 떨어져 있으면 괜찮을 거야.”
“그래. 친정에서 푹 쉬고 와. 한 달에 한 번은 나도 러시아에 갈 테니까.”
“응...♥ 예전부터 여보랑 러시아에서 데이트해보고 싶었어.”
“큭큭. 옛날 생각나고 좋겠는걸. 거기서 당신을 처음 만났지.”
“후후...♥ 그러게♥”
“아무튼 몸 조심히 가. 예린이 잘 부탁할게.”
“응♥ 사랑해 여보♥”
“그래. 나도.”
좋아. 이것으로 나의 행복은 완성되었다.
엘레나가 예린이를 데리고 러시아에 가고, 시우는 대저택에 홀로 남고.
쓸쓸해 보이는 시우의 뒷모습이 내심 신경 쓰이긴 했지만, 그래도 잘 이겨내리라 믿는다.
녀석의 장난이 좀 과하긴 해도, 책임감 하나만큼은 남다른 녀석이다.
적당히 사리분별 할 줄도 알고.
난 내 아들이 올바르게 크리라 믿으며, 크게 꾸짖지 않았다.
“아빠, 저. 예린이를 사랑해요.”
“뭐라고?”
이건 무슨 기출변형일까.
시우 녀석, 장난이 너무 과하잖아.
“그게 무슨 말이냐.”
“.....전... 예린이가 없으면... 안 될 거 같아요. 걔가 하루종일 생각나서... 니콜라이인지 뭔지 그 새끼한테 예린이를 뺏긴 게 너무 화가 나서...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잠깐. 예린이를 빼앗겼다니. 니콜라이? 그게 무슨 소리냐.”
“그게... 말하자면 복잡한데.”
망설이는 듯한 시우의 모습.
그러다 이내, 에잇 모르겠다-라는 표정으로, 주머니 안의 폰을 꺼내 내게 보이는 녀석.
녀석이 내게 보인 휴대폰의 액정 안에는.
“.....”
웬 금발 양아치 같은 놈이, 예린이의 어깨에 팔을 두른 사진이 있었다.
난 처음 하영이를 빼앗겼을 때 같은 분노를 느끼며, 그 자리에서 폭발해버렸다.
“이놈은 누구냐아아아아아아!!!!!!!!!!!!!!”
***
정예린.
내 소중한 첫째 딸이자, 언제봐도 어여쁜 엘레나의 딸.
나를 딸바보 멍청이로 만든 작고 소중한 아이이자, 내 목숨과도 맞바꿀 수 있는 소중한 아이.
“하아...하아...말해라. 어떻게 된 건지.”
그런데 그런 딸아이의 작고 소중한 어깨에 웬 양아치 같은 놈이 껄떡거리는 표정으로 팔을 얹고 있었다.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마냥.
“.....예린이가 러시아에 가서 사귄 남자친구예요. 근데 이놈... 별로 질 좋은 놈 같진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냐.”
“.....”
복잡한 표정으로 아랫입술을 짓씹는 시우.
하지만 난 녀석의 생각을 기다려줄 여유가 없었다.
세상의 그 어느 아빠라도 딸이 질 좋지 않은 남자친구를 뒀다는 말에 침착할 순 없을 것이다.
“무슨 소리인지, 말해라.”
“....오늘, 예린이가 러시아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해줬어요. 그런데 좀 듣기 불편한 말들이 많더라구요...”
듣기 불편한 말?
벌써 속이 울렁거린다.
난 계속 말해보라는 뜻으로 시우를 바라봤다.
“..... 그, 남자친구랑 같이 가는 파티가 있는데... 그 파티 분위기가 좀... 문란해보이더라구요.”
“...문란하다고? 어느 정도로?”
“그게...”
“어느 정도로.”
“자유롭게... 몸을 섞을 만큼요.”
“.................”
-쾅!
엘레나를 믿었다.
예린이가 그런 길로 빠지지 않게 잘 이끌어주리라, 그녀를 철썩 같이 믿었다.
하지만 러시아로 예린이를 보낸 결과가 고작 이거라니.
“예린이를 불러와라.”
“아, 아빠... 예린이는...”
“어서!”
크게 움츠러드는 시우의 어깨.
나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 보니, 아이들 앞에 이렇게 큰 소리로 화낸 적이 처음이었다.
그때.
“.....아빠. 저한테도 기회를 주면 안 될까요. 제가 해결하고 싶어요.”
시우는 나의 분노한 모습에도 굴하지 않고, 내게 기회를 구했다.
아무래도 아까 전에 말했던 예린이를 좋아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고 싶은 듯했다.
“하아. 시우야. 너도 알다시피, 예린이와 너는 이복ㅡ”
“아빠도 성아 이모랑 결혼했잖아요.”
“.....”
이건 가불기인데.
그래도 시우와 예린이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사랑했다면서요. 이모가 자랑하는 거 다 들었어요. 아빠가 맨날 이모 방에 찾아갔다고.”
...?
난 그런 적이 없는데?
성아가 날 찾아왔으면 찾아왔지.
“아무튼... 예린이는 제가 책임지게 해주세요. 제가 해결하고 싶어요.”
“.....”
생각을 좀 해봐야겠다.
그러고 보니 시우가 이렇게 내게 뭘 요구한 적이 있던가.
...아마 처음일 것이다.
부족한 거 하나 없이 자란 아이인 만큼, 아주 어렸을 때 장난감을 사달라는 것 빼고는 내게 뭘 부탁하거나 조른 적이 없었다.
“...일단 들어보마. 네 계획이 뭐냐.”
그러니 일단은 화를 가라앉히고, 시우의 계획을 들어보기로 했다.
녀석의 계획이 그럴듯하면 한번 맡겨봐도 괜찮겠지.
“...사실 큰 계획은 없어요. 그냥... 말로 한번 설득해보려구요.”
“...그러니까, 어떻게 설득할 건지, 그걸 내게 설명하면 된다.”
“음.... 그냥... 솔직한 제 마음을 전하고, 러시아에 가지 말라고 부탁할 거예요. 니콜라이와 있으면 왜 좋지 않은지... 예린이에게 얼마나 큰 해를 끼치는지... 그걸 설명하려구요.”
한마디로 그냥 계획없이 감정으로 들이받겠다는 말이다.
역시, 아직 시우는 뭔가 일을 꾸미기엔 어리숙하고 어리다.
“시우야. 이 아빠가 어떻게 뒷세계를 차지했는지, 알고 있니?”
하여 난 시우를 타이르기로 했다.
내가 뒷세계를 정복한 과정을 예로 들어서.
“...그냥 아빠가 제일 세서 이긴 거 아니에요?”
“아니. 아빠도 원랜 약했어. 뒷세계의 가장 최하위층에 있었지.”
“...그런데 어떻게 왕이 된 거예요?”
“누구보다도 간절했기 때문이야. 또,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고 차근차근 이뤄갔기 때문이지. 계획을 세우면 성공할 수밖에 없도록 노력했고.”
“간절함과 계획...”
“그래. 무슨 일이든 해내려면, 그 일을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과, 그 간절함을 실현할 계획이 필요해. 하지만 시우야. 넌 정말로 간절하니? 온 마음을 다해서, 예린이를 사랑한다고 할 수 있어?”
“.....네.”
그래. 이건 예상했던 답이다.
하지만...
“그래도 시우야. 네 계획은 허술해. 내가 봤을 때 네 계획은... 예린이에게 네 마음을 고백한 뒤, 너를 택해달라 감정에 호소하는 건데... 내가 이해한 게 맞니?”
“네.”
“...그래. 그것도 좋은 방법이 될 수도 있지. 하지만 그 방법이 성공하려면, 예린이가 네게 마음이 있어야 해. 그런데 예린이의 마음은 지금 누구에게 있지?”
“.....니콜라이요.”
“그래. 니콜라이지. 그리고, 예린이가 너를 친구로 생각하는 거 같니, 아니면 이성으로 보는 거 같니.”
“...친구요.”
“그래, 시우야. 이제 다시 물어보마. 네 계획이, 성공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아뇨.”
“계획이 실패하면 어떨 거 같니. 너와 예린이의 사이가, 지금보다 좋아질까, 나빠질까?”
“.....나...나빠질...흐으....나빠질 거...흐으으으....”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 시작하는 녀석.
아무래도 예린이를 좋아하는 마음은 진심인 듯하다.
“그러니 시우야. 이번 일은 내게 맡겨라. 내가 어떻게든 조치를...”
“아뇨.”
하지만 순간, 울음을 싹 거두며 표정을 굳히는 시우.
녀석이 나를 정면으로 응시하며 말했다.
“그럼 차라리, 차이더라도 부딪히겠어요. 아빠가 이번 일을 대신 해결해주면, 전 아무것도 안 될 거 같아요. 뭐라도... 전 뭐라도 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