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많이 사귀어서 좋았겠다?”
“푸흐흡. 질투하냐?”
“아니~ 뭐, 질투라기보단, 걍 네가 없으니까 심심하니까 그렇지.”
“킥킥. 나 없으면 안 되는구만~”
오랜만에 만나도, 그동안 톡을 잘 하지 않았어도 스스럼이 없는 둘.
이후 둘은 예린이 몰래 꽁쳐온 러시아산 맥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그렇게 2시간이 지났을 때였다.
“진짜 너도 나중에 러시아 놀러 와. 같이 놀면 개재밌을 거 같은데.”
“음? 놀러 오라고?”
러시아에 놀러 오라는 예린의 말.
마치 다시 러시아로 돌아가기라도 할 것처럼, 그곳으로 놀러 오라는 그녀.
“아... 그게. 나 한국에 3일만 있다가 돌아가기로 했어.”
“.....”
할 말을 잃어버린 정시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예린의 얼굴을 멍하니 보았다.
이제 다시 함께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시 러시아로 떠난다는 그녀의 말은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어...그, 그러냐... 근데, 워, 원래는 러시아에 2년만 있다가... 한국으로 오는 거 아녔어? 다시 여기서 사는 줄 알았는데...”
애초에 2년 제한을 걸고 러시아 생활을 했던 예린.
특히 러시아에 처음 지냈을 땐 매일매일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떼쓰던 그녀이지 않았던가.
“음...그렇긴 한데, 내 친구들도 다 거기에 있고. 남자친구...도 러시아에 있어서. 그래서 러시아에서 지내려구. 미리 말 못해서 미안.”
“아..... 남자친구. 남친... 생겼구나. 그, 누구였더라, 니콜라이? 걔인가?”
애써 태연한 척 말을 이어가는 정시우.
다만 수줍게 웃으며 얼굴을 붉히는 예린.
“응. 그렇게 됐어.”
“어어. 두, 둘이 자주, 자주 놀긴 하더라. 하하... 그런데... 언제부터냐?”
“한... 3개월 전에?”
“...얼마 안 됐네.”
“응. 그때 니콜라이가 고백했는데, 처음엔 별 마음 없었어. 근데 사귀다 보니 마음이 생기더라. 웃음코드가 잘 맞기도 하고. 아. 최근에 같이 데이트 간 곳이 있는데, 거기가 어디냐면...”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폰을 꺼내는 정예린.
다만 시우는 그녀가 갤러리에 들어가 사진을 찾는 동안, 이미 넋을 잃은 듯 공허한 눈동자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아. 여기 있다. 여기서 니콜라이랑 첫키스를 했는데, 아마 그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한 거 같아. 뭔가 친구에서... 본격적으로 연인이 된 느낌이라 해야 하나. 예전엔 손잡아도 두근거리고 그런 게 없었는데, 이젠 금방 더워져서 손에 땀나.”
이런 시우의 마음을 모른 채, 수줍게 웃으며 니콜라이와 찍은 사진을 보는 정예린.
그녀가 시우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야. 너도 한번 잡아봐. 내가 딱 차이를 설명해줄게.”
“어? 어어. 뭐라고?”
“내 손 잡아보라고. 어떤 느낌인지 설명해줄 테니까.”
“아. 손잡으라고? 왜?”
“뭐야. 내 말 듣긴 한 거야? 좋아하는 마음이 생기니까, 손만 잡아도 땀난다고 했잖아.”
“아. 니콜라이랑?”
“어. 근데 너랑은”
-파앗!
“이렇게 손을 잡아도, 아무렇지 않잖아. 되게 신기하지 않아?”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하는 시우.
다만 그런 시우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며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는 예린.
“처음엔 걔랑 나도 이랬어. 내가 막, 사귀긴 뭘 사귀냐. 이렇게 손잡아도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랬거든? 아니 근데 걔는 손잡으면 두근거린다는 거야 크히히히. 존나 웃겨. 어쨌든 그래서 장난으로 사귀자고 했지.”
“...어.”
“그런데 여기 사진 보이지? 여기서 분위기 잡고 키스하고 난 뒤에 손잡고 걷는데... 막 심장이 뛰기 시작하는 거야. 원래 안 이랬는데, 손에 땀도 엄청나고. 다한증이라도 걸린 줄~?”
-두근...두근...두근...두근...
“하-아. 그 뒤엔 갑자기 불타오르기 시작했어. 자꾸 걜 의식하게 되고, 생각나고, 보고 싶고, 막... 스킨쉽도 계속하고 싶고. 엉망진창으로.....”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야. 정시우. 너 아직 아다 못 뗐지~? 푸흐흐. 이 돼지야.”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어? 어어? 야! 너 손에 땀 난다! 정시우 너! 설마 나를?”
그때, 장난스럽게 소리치며 정시우를 놀리기 시작하는 정예린.
시우는 침을 꿀꺽 삼키곤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 지랄! 야! 나 원래 열이 많거든? 원래 파오후 특이 열이 존나 많아!... 인마!”
“푸흐흐흐흐. 그러니까 살 좀 빼라니까.”
“아, 알아서 해.”
정시우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뗐다.
그리곤 응큼하게 웃고 있는 예린을 보며 말했다.
“뭘 그렇게 봐?”
“후후... 우리 순진한 시우~”
“뭐?”
“우리 시우는 대체 언제 아다를 뗄까나? 누나가 좀 도와줘?”
“지랄하지마라. 애, 애가 러시아에 가더니만, 존나 빠꾸 없어졌네.”
“크히히히히. 그 자유분방함이 좋은 거지~ 이것저것 즐거운 일들♥”
쿵.쿵.쿵.쿵.
아프게 요동치는 심장.
속이 메스꺼워지고, 울렁거리는 이 기분.
“뭐, 그렇냐. 좋겠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여유로운 척 미소 지으며 예린을 대하는 시우.
이미 속이 완전히 망가졌지만, 그는 자신의 무너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응. 그 좀, 문란하긴 한데, 쾌락의 끝을 보고 싶으면, ‘우리 파티’에 한번 참가해봐.”
그렇게 말하며 갤러리를 다시 뒤적이는 예린.
잠시 후 그녀는 ‘찾았다!’라고 외치곤, 술에 잔뜩 취한 채 V자 포즈를 하고 있는 자신의 사진을 시우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어때? 존나 재밌어 보이지? 내 뒤에 춤추고 있는 애 보여?”
“....어.”
“분위기 개쩔어. 여기 다음 사진을 보면...”
다음 사진.
사타구니가 봉긋하게 솟아오른 남자 여럿이 예린을 중앙에 두고 찍은 사진.
다만 그녀는 자신의 치마를 살짝 들춘 채 팬티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발적인 표정으로 혀를 날름거리고 있었다.
“.....”
“이 사진 찍을 때 애들 표정 존나 웃겨 크히히히. 거기에 반응 온 거 보여? 이날 단체로 장난 아니었다니까? 나랑 남자애들 여럿이서, 다른 여자애들도 그렇고... 아무튼 와 보면 알아.”
“.....”
“너도 분명 한번 빠지면....아 잠깐만.”
그때, 우웅- 진동하는 예린의 폰.
그녀의 폰 액정에 떠 있는 ‘내 사랑♥’이라는 글자.
“Да Николай(응, 니콜라이)”
예린은 전화를 받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애교 섞인 목소리로 니콜라이와 대화를 나누며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정시우는, 멍-한 얼굴로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예린이를...”
그리고 그는,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예린을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꽤 오래전부터, 그녀를 원해왔음을.
이제는 걷잡을 수 없이 그 마음이 커졌음을.
“젠장...”
하지만 그녀는 이미 변해버렸다.
웬 양아치 같은 놈에게 넘어가 천박한 여자가 되어버렸다.
“정예린...”
시우는 자신의 얼굴을 덮으며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제는 자신을 영영 떠나버린 첫사랑의 이름을 되뇌며 그녀를 말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
하지만, 후회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예린을 되찾기 위해선 뭐라도 해야 했다.
정시우는 문밖에서 들리는 애교 가득한 예린의 음성을 들으며, 이를 으득- 짓씹었다.
***
일주일에 세 번.
하민이 민준을 찾아가는 일수였다.
그녀는 거의 이틀에 한번 꼴로 그를 찾아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언제 고백하지...’
이제 12살이 된 그녀는 민준과 정식으로 교제할 날짜를 고르고 있었다.
민준도 천재에다가 예쁜 자신을 좋아할 거라 확신하고 있었기에, 고백만 하면 100% 사귈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하민이었다.
‘부끄러워...’
하지만 뭔가 부끄러웠다.
분명 오빠도 나를 좋아하고, 나도 오빠를 좋아하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고백을 하기가 부끄럽고 두려울까.
혹시라도 거절당하지 않을까 불안해질까.
분명 오빠도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한데.
“그, 그럼 나 갈게! 내, 내일 봐!”
그래서 오늘도 고백을 하지 못한 하민이었다.
바보처럼 그에게 손을 흔들곤, 자신의 전용차로 발걸음을 향하고 말았다.
“기사 아저씨! 다시 돌아가 주세요!”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던 중, 하민은 차를 돌리도록 부탁했다.
자신의 장대한 계획을 세우려면 반드시 오늘 고백을 한 뒤 사귀기 시작해야 하므로, 그녀는 해야할 일을 하기로 다짐했다.
‘17살에 임신해서 애 낳으려면 지금부터 사귀어야 해!’
정하민의 원대한 계획.
그녀는 이른 나이에 임신해서 아이를 키운 다음, 비교적 젊은 나이에 그와 완전한 독립을 이룰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왜냐하면 젊을 때 낳은 애일수록 건강하고, 육아로부터 해방되는 날이 빠를수록 남편과 원활한 중년- 노후 생활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었다.
웬만하면 몸이 완전히 늙기 전, 인생의 황금기를 사랑하는 민준과 단둘이 보내고 싶었다.
‘정하민! 할 수 있어! 오늘은 진짜 고백하는 거야!’
그렇게 정하민은 다시 정성민의 대저택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녀는 차에서 내리자마자 정민준의 방을 들렸고, 그가 방에 보이지 않자 가정부에게 그의 위치를 물어보았다.
“예 아가씨. 민준 도련님은 3번 창고에 있을 겁니다.”
“...3번 창고요...?”
“네. 아가씨랑 놀고 나면 항상 그곳에 가곤 하거든요. 아마 오늘도 그곳에 갔을 겁니다.”
3번 창고.
하민이 알기론 그곳은, 하인들의 자식이 모여 노는 곳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지.”
다만 그녀는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예전부터 민준은 타고난 신분에 상관없이 여러 사람과 잘 어울리곤 했으니까.
오히려 그의 그런 점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하는 하민이었다.
‘민준 오빠는 사람 됨됨이가 됐어. 그러니까 내 남자가 될 수 있는 거야.’
그렇게 하민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3번 창고로 향했다.
자신의 고백을 받아들인 오빠와 나란히 손을 잡고 걸을 것을 상상하며 피히히- 미소를 흘렸다.
그러나 3번 창고에 다다랐을 무렵.
“흐읍...우움...흐우웁...으움....흐우움...”
질척하고 끈적이는 기분 나쁜 소리가 창고에서 들려왔다.
하민의 심장이 순식간에 쿵- 쿵- 요동치기 시작했다.
‘설마...’
하민은 불안한 마음으로 창고에 귀를 갖다댔다.
혹시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것이 아닐까, 그런 막연한 기대를 하며 그 기분 나쁜 소리가 들리지 않길 기도했다.
“우움...츄웁...하아...하아...민준아...♥”
“하아...하아... 세연이 누나...♥”
“나 사랑해? 정말 내가 제일 예뻐?”
“네. 누나가... 누나가 제일 예뻐요. 그러니까....”
“우움...후우웁....하아...우움...”
열기가 베인 그들의 숨소리.
서로의 이름을 부르며 혀를 섞는 그들.
“아아...”
하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다만 그녀는 여전히 믿을 수 없다는 듯, 근처에 있는 의자를 가져와 발돋움으로 이용하여 창고의 창문을 빼꼼 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간절함 바람과는 달리 창고 안은ㅡ
“우움...우우움....츄웁...”
진득하게 키스를 나누고 있는 민준과 웬 낯선 여자가 있을 뿐이었다.
하민의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
“응... 니콜라이. 진짜 나한테 맘이 없는 거 같아.”
한편, 좀 전까지 애교 가득한 목소리를 흉내 내고 있던 예린은, 축 처진 목소리로 니콜라이와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니콜라이의 조언대로 시우를 자극할 만한 여러 ‘거짓말’을 해봤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을 친구 대하듯 별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사진까지 다 보여준 거 맞아? 아예 작정하고 찍은 사진 있잖아. 파티에서 찍은 거. 화 안 내?]
“...응. 그냥 무덤덤하더라.... 걔는 진짜 내가 편한가 봐. 별로 당황하지도 않고, 그냥 피식 웃기만 하고...”
[... 그 정도면 진짜 맘 없는 거 같은데.]
“어떡하지...”
[그 정도면 됐어. 예정대로 그냥... 러시아에서 지내. 빨리 잊는 게 나아.]
“하지만....나는, 나는 시우가...”
시우에게 답장이 잘 오지 않은 뒤로, 하루종일 휴대폰을 쳐다만 봤던 예린.
이후 그녀는 시우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매일 폰을 들여다보며 그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자신을 깨닫는 순간, 어느새 그를 이성적으로 좋아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대체 언제부터...’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결정적인 순간은 그때인 거 같았다.
‘아랫것’들을 불러모아 마약 파티를 벌이던 그때.
웬 약에 취한 아랫것이 자신에게 추근덕거리다 강제로 덮치려고 하던 그때.
‘이 씨발새끼가! 감히 누구에게 손을 대?’
그때 망을 보고 있던 시우가, 자신을 강제로 덮치려던 아랫것을 두들겨 패주었다.
그 분노에 가득 찬 치우의 모습에서 ‘아빠’의 모습을 엿볼 수 있었다.
‘뭔가 되게 간절했어. 나를 정말 지키고 싶은 듯이...’
그런 모습, 그런 눈빛, 그런 표정은 처음이었다.
분노에 가득 차 녀석을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팬 다음, 혹시라도 다친 곳은 없는 자신을 살피는 그 눈빛.
하지만 막상 마약파티를 벌인 것이 발각되자, 모든 책임을 자신이 다 짊어지고 앞으로 나서는 그 모습.
예린 그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제가 벌인 일이에요. 예린이랑 쟤들은...그냥 제 말을 따르기만 했어요.’
마약 파티의 주동자.
사실 그 주동자의 정체는 정예린이었다.
호기심이 많고 자유분방한 그녀는 1급 보안 창고에 쌓여있는 ‘흰가루’가 무엇인지 궁금했고, 결국 그 정체를 알아냈을 땐 그것을 무척 사용해보고 싶었다.
‘검은머리! 마약 파티할래!?’
그래서 정시우를 꼬드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