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6화 (296/303)

어차피 이기는 건 자신이 될 테니까.

“그래. 그러면 무슨 종목으로 할래. 자신 있는 거 말해봐.”

“흐음. 그러면 너, 마인크래프트 좀 해?”

마인크래프트.

잼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거쳐 가는 잼민이들의 전통놀이.

이는 또래에 비해 성숙한 정하민에게도 해당되는 말이었다.

그녀는 눈을 빛내며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시우를 보았다.

“좀 하는 편이지.”

“그러면 4시간 제한으로 건물 만들기 어때.”

“좋아. 하자.”

하민도, 시우도, 자신 있어하는 종목.

그렇게 둘의 대결이 시작되어, 2시간쯤 지났을 때.

“크크큭...”

정시우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그간 하민의 테블릿을 중간중간 염탐해본 결과, 웬 근본 없는 이상한 건물이나 짓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자신이 만들고 있는 건물은 자신이 항상 뛰노는 대저택.

뒷세계의 왕이 기거하는 곳인 만큼, 그 규모나 웅장함. 형이상학적 아름다움이 매우 뛰어난 구조물이었다.

정하민이 살고 있는 이런 평범한 집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곳이었다.

‘크큭... 내가 만든 집을 보면 깜짝 놀라겠지?’

자신의 승리를 예견하고 있는 시우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의 패배를 받아들인 정하민이, 자신이 만든 이 구조물이 실제 살고 있는 집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아마 자신을 부러운 눈으로 보며 데려가 달라고 조르지 않을까.

아니면 초라한 자신의 집을 둘러보며 주눅 든 표정을 짓지 않을까.

어느 쪽이든 예린을 골탕 먹인 하민에게 한 방 먹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어어...?”

내내 평온한 표정을 짓던 예린이, 당황한 추임새를 내뱉으며 시우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이에 시우는 고개를 돌려 예린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 자신의 시선을 두었다.

‘어?’

무서운 속도로 구조물을 만들어 가고 있는 정하민.

분명 아까 전만 해도 근본 없어 보였던 건물이, 형태를 갖춰나가며 판타지에서 볼 법한 아름다운 예술품으로 변모해 가고 있었다.

‘뭐, 뭐야 저건!’

매일 자신의 대저택을 만들며 놀았던 시우에겐 하민이 만들고 있는 건축물은 놀라우면서도 신선했다.

그저 실재하는 건물을 그대로 구현하는데 집중했던 자신에 비해, 하민은 자신만의 독특한 상상력과 천재성을 가미하며 동화 속에서나 보는 것 같은 수중 공원을 만들고 있으니 말이다.

이리된 이상 결과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내가 졌어.”

결국 순순히 승복을 받아들인 정시우.

시우마저 패배하자 이를 으득 씹으며 분함을 삼키는 정예린.

하민이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소원을 빌 차례네. 내 소원은....”

꿀꺽- 침을 삼키며 하민을 바라보는 예린과 시우.

이윽고 하민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그들에게 말했다.

“우리 집을 투트랙이라고 부르지 않는 거야. 뭔가 그 말, 기분 나빠”

“....어. 알았어.”

“그리고 만약 다음에 올 거면, 실력 좀 갈고닦아서 와. 너무 시시하게 이겨서 김빠지잖아.”

“!!!!”

“그래도 나름 놀만 했어. 유치원에 있는 애들은 오기가 없어서 재미없었는데, 언니 오빠들은 나름 괜찮았어.”

도발적인 하민의 말에 이를 으득 짓씹는 예린.

분한 듯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시우.

“그럼 다음 승부를 기대하고 있을게.”

그렇게 뼈아픈 패배를 남긴 채, 예린과 시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이후 둘은 틈만 나면 이하영네 집에 놀러 가게 되었는데, ‘야! 이번엔 진짜 이길 수 있을 거 같다! 이 종목으로 하면 못 이기겠지!?’라는 생각으로 항상 하민에게 덤벼들었지만, 끝끝내 이길 수 없었다.

심지어 둘은 하민에게 굴욕적인 말까지 듣게 되었다.

‘언니 오빠들이 사는 대저택도 뭐 별거 없네. 언니 오빠들이 최고라면 뭐, 그 수준 알만하다.’

“크윽...건방진 꼬맹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가슴.

어떻게든 이 굴욕을 만회하고 싶은 예린과 시우.

결국 둘은 지원군을 부르기로 했다.

먼저 그림에 독보적인 재능을 보이고 있는 백하윤의 딸, ‘정시아’였다.

“야. 정시아. 우리 좀 도와줘. 투트랙의 ‘걔’가 너무 막강해. 네 그림 실력이 필요해.”

“흐음. 나 스케줄 바쁜데. 방송 촬영하러 가야 돼.”

하지만 아역 배우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시아는, 특히 어른들의 세계에서 활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그녀는, 시우와 예린을 ‘자신보다 급이 떨어지는 애들’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은 이미 어른들의 세계에 몸담고 있으니까.

벌써부터 연예인 병이 도진 시아였다.

“으아아아!! 저 싸가지! 내가 저럴 줄 알았어! 아까 봤어? 막 잘난 척하면서 말한 거.”

“하루 이틀 일이냐. 원래 저랬잖아.”

“드라마 촬영하고 나서 더 심해졌잖아! 으아아아!!! 화난다!!”

발로 바닥을 쾅! 쾅! 내려찍으며 분풀이를 하고 있는 정예린.

그런 정예린을 보며 피식 미소를 흘리는 정시우.

이윽고 그가 말했다.

“야, 노랭이.”

“이젠 너까지 노랭이라고 하냐. 왜”

“걔는 어때? 정진욱”

정진욱.

정성민과 안지연의 아들로, 시우와 예린보단 한 살 어린 8살.

하지만 예린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걔는 힘들걸? 축구에 완전 미쳐 있잖아. 눈 뜨면 공 차러 가서 하루종일 운동장에 죽치고 있고, 잠시 쉴 때면 축구선수 영상 돌려보면서 바보 같이 웃고 있고. 걘 그냥 축구에 미쳤어.”

항상 축구화를 신고 다녀서 ‘또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정진욱.

원래 진욱은 무술이나 몸 쓰는 일에 큰 재능을 보여 한때는 UFC선수를 꿈꿨지만, 그런 그의 재능을 높이 사 호시탐탐 살인귀로 키우려는 장태건 때문에 안지연이 축구에 눈을 돌리게 만들었고, 현재 그는 축구선수를 꿈꾸며 열정을 불태우고 있었다.

“음. 그건 그렇네. 걘 축구 관련 아니면 따라오지도 않겠다.”

“내 말이. 차라리 민준이는 어때?”

정민준.

정성민과 정성아의 자식이자, 나이는 하민보다 한 살 더 많은 7살.

민준은 시우와 예린처럼 악동도 아니고, 진욱처럼 운동을 잘하지도 않고, 시아처럼 연기에 특별한 재능을 보이진 않았지만, 정성민의 자식 중 가장 잘 생긴데다 성격이 좋았다.

온화하고 따스한 성아의 성품을 그대로 물려받아, 다른 또래에 비해 성숙한 인품을 지니고 있는 아이였다.

“근데 걔는 뭐, 딱히 잘하는 거 없잖아.”

다만 ‘재미있고 멋있고 웃긴 거’에만 관심있는 악동 시우와 예린의 눈엔 민준은 별거없는 아이처럼 보일 뿐이었다.

특히나 민준은 소위 ‘아랫것들’이라 부를 만한 평범한 하인들의 자식과 자주 어울리지 않던가.

“으음...그래도 한번 데려가 보자. 걔 좀 특이한 분위기가 있잖아.”

민준 특유의 부드러움과 성숙함을 ‘특이한 분위기’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예린과 시우.

하여 둘은 밑져야 본전이라 생각하며, 투트랙의 집에 민준도 꼬드겨서 데려가게 되었다.

남의 부탁을 잘 거절하지 못하는 민준은 순순히 형과 누나를 따라 하민을 보러 갔다.

“안녕. 네가 하민이야? 눈이 참 예쁘게 생겼네. 난 정민준이라고 해. 7살이야.”

온화하고 따스한 분위기의 미소년, 정민준.

하민은 그런 민준을 보자마자 묘한 끌림을 느꼈다.

시시하고 유치한 또래에선 찾아볼 수 없는 성숙함이 엿보였다.

“응... 안녕. 난 정하민... 6살.”

“하하. 반가워. 재밌게 잘 놀다 갈게”

“....응.”

시우와 예린을 대했을 때와는 달리 순둥순둥한 모드로 돌아간 하민.

예린과 시우는 이때를 틈타 하민과 민준에게 시합을 붙여보았다.

하민이 민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니, 혹시라도 민준이 하민을 이겨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었다.

하지만.

“음... 내가 졌네. 못 당해 내겠다.”

승부욕이 강한 하민이 쉽게 질 리가 없었다.

그나마 정민준의 특기인 ‘리듬 게임’에서도 정하민은 압도적인 실력 차를 보여주었다.

“하민아. 너 되게 잘한다. 좀 가르쳐 줄 수 있어?”

하지만 정민준은 그 나이 특유의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오히려 뭐든 잘하는 하민을 신기해하며 그녀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으응... 이, 이거는 패턴이 있어. 좀 하다 보면 보이는데...”

“...와. 너 되게 똑똑하다.”

그렇게 하민이 민준을 가르치고, 민준은 하민이의 천재성을 칭찬하던 와중.

예린과 시우는 뭔가 김이 탁- 빠지는 기분을 느꼈다.

예의범절이라곤 찾아볼 수 없던 정하민이 정민준 앞에선 저토록 다소곳해졌으니 말이다.

“에이씨. 뭐야. 쟤 버르장머리는 내가 고쳐주려고 했는데.”

“...그러게. 민준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내기도 분명 졌는데.”

“그냥 쟤가 마음에 든 건가? 쟤는 되게 다른 애들이랑 잘 노네. 아랫것들이랑도 잘 놀고, 저 싸가지랑도 잘 놀고.”

“쩝. 어쨌든 뭔가 김빠진다. 야. 그냥 우리끼리 다른 거 하고 놀까?”

“뭐 하고 놀게.”

“놀이터에 함정 만들래?”

“!”

함정.

흙으로 된 땅에 구덩이를 파고, 그 위에 오줌을 싼 다음 신문지로 덮는 행위.

다만 신문지만 있으면 티가 나니, 살살 흙으로 덮어 위장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크흐흐흐흐. 개재밌겠다.”

“물폭탄도 떨어뜨리자.”

“오. 좋은 생각”

“개구리 잡아서 라이터 고문도 하자.”

“그것도 좋지. 아니면 아랫것들 좀 불러모아서 숨바꼭질이나 할까?”

“킥킥킥. 걔들은 절대 못 찾는 비밀의 장소가 있지. 좋아. 그것도 해보자.”

그렇게 정예린과 정시우는, 하민과 민준이 놀도록 놔두고 투트랙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이후 집으로 돌아온 그들은, 언제나 그렇듯 온갖 장난을 치며 대저택을 뛰놀았다.

***

다시 5년이 지났다.

지난 5년 동안 시우와 예린은 온갖 사건 사고를 일으키고 다녔는데, 그냥은 넘어갈 수 없는 대사건 또한 2건이나 터트리고 말았다.

그중 하나는 창고에 대형화제를 낸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몰래 빼돌린 마약으로 ‘아랫것’들과 마약 파티를 벌이고 논 것이었다.

이 일로 단단히 화가 난 엘레나와 이희연은 둘을 떼어놓을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안 되겠다 예린아. 너 잠시 엄마 따라 러시아에 가 있자.”

“시, 싫어요...! 갈 거면 시우도 같이...”

“안돼. 걔가 널 다 배려놓잖니. 네가 어릴 때만 해도 엄마보다 한글도 빨리 배우고...성격도 되게 좋고... 아무튼 최고였는데, 지금은 맨날 사고만 치잖니.”

“....어, 엄마가 이상하게 한글을 못 배우는....”

“쓰읍. 말대답하지 말고! 조용히 엄마 따라 러시아에 2년만 가 있자.”

“.....”

그렇게 12살이 되던 해, 정예린과 정시우는 떨어지게 되었다.

하지만 어렸을 때부터 절친이었던 둘은 종종 메신저로 각자의 상황을 전하곤 했다.

[정시우: 러시아는 어떰? 살만함?]

[정예린: 존나 추워. 그리고 뭐라는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정시우: 너희 엄마 러시아사람이잖아. 근데도 러시아어를 못해?]

[정예린: 응. 너무 어렵다. 빨리 한국에 가고 싶어.]

[정시우: ...나도 너 없으니까 심심하다. 개심심해.]

매일매일 붙어 다녔던 둘인 만큼, 서로가 없는 상실감을 크게 느끼던 둘.

하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둘은 서로가 없는 일상에 점점 적응해갔고, 그렇게 1년이 지났을 때.

[사진]

정예린이, 러시아에서 사귄 친구가 있다며 사진을 보내왔다.

사진 속엔 웬 껄렁대는 금발 양아치 같은 놈이 예린의 어깨 위에 손을 얹은 채 맥주를 마시고 있었고, 예린은 배시시 웃으며 V자를 하고 있었다.

‘씨발, 왜 좆같지?’

정시우는, 그 사진에 묘한 분노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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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기분은 난생처음이었다.

사진을 보자마자 가슴이 옥죄어 오고,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예린의 어깨에 손을 얹은 저놈의 면상을 당장 후려갈겨 버리고 싶었다.

‘나 왜 이래...?’

대체 뭘까.

이 묘한 거슬림과 불쾌감은.

-까톡.

[정예린: 얘 존나 웃겨 ㅋㅋㅋ 셋이서 같이 놀면 재밌을 거 같음. 지금 맥주 마시는 거 보여? 여기선 맥주가 그냥 음료야. 역시 불곰국 ㅋㅋ]

다만, 예린은 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듯 계속 까톡을 보냈다.

보내는 메시지만 봐서는 단순히 친구를 소개시켜 주려는 듯했다.

[정시우: 그러냐. 근데 나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톡해.]

하지만 이미 화가 난 시우는, 메신저를 더 이상 하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대화를 나눴다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이 감정을 터트려버릴 것만 같았다.

[정예린: 아 ㅇㅋ 그러면 나중에 톡 해. 나도 니콜라이랑 가기로 한 곳이 있어서 ㅋㅋ 나중에 사진 보내줄게.]

이 메신저를 끝으로 잠잠해진 까톡창.

정시우는 하- 헛웃음을 흘리곤 한동안 방안을 서성거렸다.

도저히 달아오른 열이 식지 않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친구를 사겨? 니콜라이? 둘이 가기로 한 곳이 있다고?”

언제 그렇게 이름을 부를 만큼 친해지게 된 걸까.

니콜라이 그 자식은, 왜 예린의 어깨에 아무렇지도 않게 손을 얹은 것일까.

둘이 사귀기라도 하나?

“하-. 자기만 친구 만들 줄 아나. 나도 만들려면 언제든지 만들 수 있거든?”

정시우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이 좆같은 기분은, 정에린에 대한 배신감 때문이라고.

세상에 둘도 없는 베프인 것처럼 굴어놓고, 다른 놈을 우리 사이에 끼워 넣어서 기분이 더러운 거라고.

하여 정시우는 이날 이후, 은근슬쩍 예린의 메시지를 무시하기 시작했다.

잠든 척, 바쁜 척, 다른 친구와 노느라 미처 답장을 못 한 척, 정예린의 메시지에 건성으로 답장을 보냈다.

그리고 그 결과.

[정예린: 야. 너 뭐야? 왜 자꾸 내 톡 씹는데? 너 일부러 그러는 거 맞지? 요즘 이상해.]

결국 정예린이 알아차리고 말았다.

자신이 일부러 답장을 안 하는 것을.

‘내가 너무 속 좁게 굴었나....’

때문에 정시우는 미안한 기분을 느꼈다.

지금이라도 예린에게 사과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했다.

하지만.

‘그래도 그 새끼랑 노는 건 마음에 안 드는데.’

니콜라이를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다.

툭하면 니콜라이와 함께 찍은 사진을 보내서 자신의 속을 긁는데, 이대로 넘어가면 자신만 속이 답답할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러시아에서 사귄 유일한 친구와 만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하지만 자기가 뭐라고 그 녀석과 만나지 말라 한단 말인가.

아니, 애초에 친구가 다른 친구를 사귈 수도 있는 건데, 왜 이런 거로 기분을 나빠하는지 모르겠다.

하여 정시우는 이번에도 답장을 애매하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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