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3화 (293/303)

그가 말하는 과거의 소중함이란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인지 잘 알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갈 기회를 얻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르기 때문이다.

“당신은 내 엄마 해. 나는 당신 아들하고. 정현재는 알파남이 아닌 당신의 남편이자 내 아버지가 되고, 성아는 꿈많은 아이돌이게 놔둬. 이제 진짜... 나는 돌아가고 싶어. 엄마도 그렇지?”

이신아는 보았다.

슬프게 웃는 정성민의 얼굴에서, 아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그녀가 바라는 알파남도, 궁극의 남자도 아닌, 자신의 아들이었다.

일평생 소중하게 키운 자식이었다.

“...응. 정말.... 정말로 사무치도록...더 이상 간절할 수 없을 정도로, 그때가 그리워. 다시 시작하고 싶어.”

욕망을 완전히 비워내고, 다시 과거로 회귀하고 싶어하는 이신아.

정성민은 그녀 안에 남아 있던 질척하고 진득한 욕망이 완전히 소멸했음을 느꼈다.

오히려 그녀의 마음속엔 소중한 것을 되찾고자 하는 간절함만이 가득함을 확신했다.

“그래. 당신은 엄마로, 나는 아들로. 하지만ㅡ”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덧붙이는 정성민.

“성아랑은 지금처럼 연인으로 지낼 거야. 걘 내 거야. 이해하지?”

이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님’의 자아와 ‘정성민’의 자아가 완벽히 융합된 그를 보며, 그가 완전히 완성됐음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아들이자, 거대 조직을 이끌어갈 주인님이다.

주인님에겐 여동생이 아닌 연인이 된 정성아가 필요하다.

“좋아. 그럼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야. 눈을 떠.”

눈을 뜨라는 말과 동시에 붕괴되는 연옥의 공간.

동시에 심해 저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의식이 무언가에 끌려 수면 위로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허억!”

그렇게 이신아는, 장장 3개월 만에 연옥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다만 그녀는, 연옥에서 있었던 일을 70%는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억이 온전히 남아 있다면 현생을 살아가는데 혼돈이 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내 가족.”

하지만, 그녀가 깨달은 소중한 가치는 여전히 그녀 안에 남아 있었다.

지금 그녀는 몸을 참을 수 없을 만큼 정현재가 보고 싶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정현재가 헌신했듯, 그의 행복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고 싶었다.

그녀는 그대로 일어서 정현재에게 향했다.

***

-꿀꺽...꿀꺽...꿀꺽...꿀꺽...

소주를 나발째 입에 대어 마시는 정현재.

요즘 그는 이렇게 나발로 술을 마시는 일이 부쩍 잦아졌다.

딸에게 욕정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과, 아예 종적을 감춰버린 아내 때문에 마음이 너무 괴롭기 때문이다.

“흐으으...크흐흐흐흑...”

어쩌다 이렇게 돼버린 걸까.

왜 그날 자신은 아내에게 화를 쏟아낸 걸까.

결국 모든 것은 자신이 무능하기 때문인데.

아들이 가족을 되찾는 동안, 자신은 한심하게 딸의 몸이나 탐하며 안도를 느꼈기 때문인데.

그러니 아들이 남자로 보일만도 했다.

이런 병신 머저리에게 마음이 사라질 만도 했다.

“나는....이제 나는 어떻게...”

인생을 살면서 이토록 방황한 적이 있을까.

이렇게 한심한 가장이 세상에 또 있을 수 있을까.

정현재는 그런 자기 비관 속에서 다시 한번 소주를 들이켰다.

거하게 취하지 않으면, 자신을 괴롭히는 온갖 저주 같은 생각 때문에 잠들 수도 없는 그였다.

-똑. 똑.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시간은 벌써 새벽 2시 25분.

이 시간에 찾아올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텐데.

“누, 누구...”

-끼이익...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는 와중, 열리는 문.

활짝 열린 문 너머로 보이는 아내의 모습.

정현재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거 같은 아내의 모습에서, 예전의 그녀가 보였기 때문이다.

단지 느낌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너무... 너무 보고 싶었어.”

정현재에게 전하고픈 수없이 많은 말들을 생략하고, 단지 보고 싶었다는 말을 전한 이신아.

그녀는 그대로 쿵- 쿵- 쿵- 빠른 걸음으로 정현재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눈에 띄게 피폐해진 그를 와락 안고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말해주었다.

“여보. 난 당신이 그 무엇보다 소중해. 당신은 그저 당신으로 있어 줘. 다른 어떤 것이 될 필요가 없어. 난 정말... 온 마음을 다해서 당신이 필요해. 그냥 당신은 당신으로 있어만 줘.”

“.....”

그녀의 눈, 그녀의 심장 고동, 그녀의 숨결, 그녀의 목소리에 벤 흐느낌.

굳이 이런 정황증거를 들이밀지 않아도, 정현재는 이신아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부터 버릇처럼 자신의 등을 토닥이는 그녀의 손에서, 그토록 그리웠던 과거의 이신아가 돌아왔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아...아아아....”

이에 정현재는 이신아를 안았다.

자신의 품으로 돌아온 과거의 그녀를 부서질 듯 껴안았다.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무엇보다 소중한 그녀를 안고 울었다.

“미안해...이제 당신 힘들게 하지 않을게. 이젠 정말... 예전으로 돌아가자. 다시 그때로 돌아가자.... 사랑해 여보.”

그렇게 둘은 마침내 방황을 끝내고 부부가 될 수 있었다.

***

-Fly~ to the moon~♬ And let me~♭ play♬ among the stars~♪

야심한 밤의 분위기를 띄우는 재즈풍 음악.

이하영은 마감한 자신의 매장에서 칵테일주를 홀짝이며 음악을 감상하고 있었다.

구멍나버린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줄 것은, 오로지 이 음악과 술뿐이었다.

“하아....”

저절로 나오는 한숨.

수십, 수백, 수천 번을 반복해서 떠올리는, 그때의 일.

정성민에게 이별을 고하고 뒤돌아선 자신의 모습.

“에휴 병신아.”

왜 그랬을까.

이렇게 미치도록 괴롭고 힘든데, 자신은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아냐. 이게 맞아.”

하지만 성민이를 위해선 자신이 사라지는 게 맞았다.

성민이의 불행한 과거를 떠올리는 자신은 그의 짝이 될 수 없었고, 성민이도 그것을 인정해 자신을 보내주지 않았는가.

그래도 내심 붙잡아주길 바랐는데.

“으휴. 욕심 많은 년. 뭘 붙잡아줘. 네가 한 짓을 생각해!”

그래.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들을 저질렀다.

성민이는 그 수많은 악행을 견디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니 다시는 성민이의 앞에 나타나면 안 된다.

“그런데 보고 싶어!”

하지만 너무 보고 싶다.

특히 요 4개월간은 무슨 일을 하는 건지, 아예 종적을 감춰버리지 않았는가.

성민이의 가족에도 문제가 있다고 하는데, 그건 잘 해결했을까.

내가 도와줄 건 없을까.

.....혹시라도 공을 세우면 용서받을 수 있지 않을까?

“떽! 어딜 감히! 절대로 돌아가지 않기로 맹세했잖아! 나는 방해만 될 뿐이야!”

혹하는 마음이 들 때면 자신을 채찍질하는 이하영.

다만, 그녀의 최측근 부하들은 그런 그녀가 익숙하다는 듯 피식 웃으며 자기들끼리 숙덕거렸다.

“또 저러시네. 아니, 매일 저러시는 거지?”

“어. 혼잣말이 많이 느셨어. 솔직히 살짝 미치신 거 같긴 해.”

무슨 골룸도 아니고 혼자서 말을 주고받는 이하영.

부하들은 오늘도 1인 2역을 하는 이하영을 보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어허! 당치도 않는 생각을! 네 이년! 무례하다!

-그치만 성민이가 너무 보고싶어...

-그래도 한때는 성민이의 정실이었잖아? 그 기억을 안고 살아가면...

-그 기억 때문에 더 괴로운걸!

-괜찮아. 존버는 언제나 승리해. 버티고 버티다 보면...

-자살엔딩?

-좆같은 소리하지마.

-좆? 성민이의 자지가 보고싶어...

-미친년.

“.....”

저게 말로만 듣던 정신분열 증상일까.

솔직히 그녀의 모습이 조금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그녀의 부하들은 걱정되었다.

저러다 진짜 큰일이라도 나는 게 아닌지.

-쾅!

그때, 유리잔을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부하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리는 이하영.

그녀가 부하들을 보며 소리쳤다.

“너희들! 아직도 있냐! 퇴근해도 된다니까!”

“...아뇨. 주인님 퇴근하시는 거 보고 퇴근해야죠.”

“아냐. 그냥 퇴근해. 나도 이제 들어갈 거니까.”

“.....”

“그렇게 불쌍하다는 듯 쳐다보지 말고. 퇴근하라고. 퇴.근.해!”

퇴근을 부추기는 이하영의 말에 어쩔 수 없이 몸을 일으키는 이하영의 충복들.

그들은 자신이 앉은 테이블을 정리한 뒤, 이하영에게 인사를 올리고 퇴근했다.

이하영은 부하들이 퇴근하자마자 유리잔 안의 술을 모두 비워내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또각...또각...또각...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그녀의 걸음걸이.

이렇게 술에 만취할 때면.

그가 너무 보고 싶어 괴로운 날이면, 항상 그녀가 찾아가는 곳.

이 매장 안에 숨겨놓은, 그녀의 비밀 공간.

“성민아. 나왔어.”

그곳은, 정성민의 팬티가 널브러진 공간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양말과 티셔츠, 바지도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성민이도 나 보고 싶었구나.”

심지어 그곳엔, 여성용 러브돌이 곳곳에 있었다.

서 있는 러브돌, 누워있는 러브돌, 앉아있는 러브돌.

그 러브돌들의 고간엔 정성민의 자지를 본 따 만든 딜도가 꽂혀있었고, 얼굴 부위엔 정성민의 얼굴이 인쇄된 A4용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이하영은 그 종이에 입맞춤을 하며 말했다.

“사랑해, 성민아.”

EP.295 (외전) 재회

이신아의 연옥 조교가 끝난 뒤, 정성민의 가족은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었다.

나약하고 불행했던 자신의 과거를 받아들여 자아를 잘 융합시킨 정성민은 안정을 되찾을 수 있었고, 그만의 방법으로 뒷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래 수고가 많았다. 일하느라 고생 많았을 텐데, 푹 쉬어라.”

정성민이 뒷세계를 지배하는 방법.

그것은 자신의 최측근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었다.

자신에게 반기를 드는 자들에겐 혹독하고 잔악하게 응징을 하고, 자신을 위해 일을 해주는 부하들에겐 따뜻한 말과 포상을 해주었다.

덕분에 그를 향한 충성심은 날이 갈수록 높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제는 뒷세계의 모두가 그를 왕으로 인정하기 시작했다.

반기를 드는 세력도 점점 줄어들며, 그의 왕국은 안정기가 찾아오게 되었다.

“여보! 이번에 다 같이 놀이공원 가는 거 알고 있지!”

“그럼. 기대하고 있어.”

그렇게 정성민은 굳건히 유지되는 조직 체계 속에서, 안락한 일상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의 부인들이 그가 처리해야 할 수많을 일들을 도와주는 덕분에 그도 여가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빠-! 빠빠-!”

“크큭. 그래. 아빠 왔다~”

그리고 그는 여가를 자식들과 보내는 데 대부분 썼다.

언제봐도 사랑스럽고 귀여운 자식들은 그가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오늘은 백하윤과 동침하며 그녀의 자식과 놀고 있었다.

“그런데 여보. 궁금한 게 있는데...”

그때, 정성민이 표정을 굳히며 말문을 열었다.

그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백하윤을 보며 다음 말을 이었다.

“진호랑 혜정이는 이대로 헤어지는 거야? 드라마 전개상 다시 만나겠지?”

진호와 혜정이의 이별.

즉, 백하윤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있는 드라마, ‘사내연애’의 내용을 묻는 말이었다.

백하윤이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큭큭. 왜에~? 뒷내용이 궁금한 거야?”

“갑자기 급전개가 되니까. 이대로 커플이 될 줄 알았는데, 진호가 도대체 뭘 알아냈길래...”

한국 드라마 클리셰 대로라면 12회차에 들어선 지금, 알콩달콩 사랑을 나누고 있어야 할 진호와 혜정이.

하지만 12화의 마지막, 진호는 갑작스러운 이별을 통보했다.

뭔가 중대한 비밀을 알아낸 것 같은 연출 뒤에 말이다.

“후후... 헤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지.”

백하윤은 이미 대본으로 알고 있는 뒷내용을 상기하며 웃음을 흘렸다.

이에 정성민은 발정난 여자처럼 안달난 표정으로 백하윤을 빤히 보았다.

이유를 알려달라는 뜻이었다.

“그야 진호와 혜정이는...”

-꿀꺽.

“이복남매였으니까.”

“!!”

큰 충격을 받은 듯한 정성민의 표정.

그는 ‘맙소사... 안돼’라고 중얼거리곤 자신의 입을 가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스포였다.

“그러면 이대로 헤어지는 거야? 이제 둘이 행복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후후...글쎄. 과연 어떻게 될까~?”

“만약 이대로 헤어지면 둘이 너무 불쌍하잖아.”

“그치. 그렇게 마음고생하면서 이어졌는데.”

“...그래도 이복남매면 힘들겠네. 그런 막장 커플이 될 순 없을 테니까.”

“.....”

할 말은 많지만, 그냥 침묵하는 백하윤.

그녀가 정성민을 안으며 말했다.

“후후. 그러면 해피엔딩인지, 배드엔딩인지만 알려줄까?”

“어. 배드엔딩이면 앞으로 남은 분량을 보기 힘들 거 같아.”

자신의 꾐에 넘어온 정성민의 모습에 백하윤은 미소를 지었다.

뒤에서 정성민을 끌어안은 그녀는 그의 널찍한 등에 자신의 가슴을 밀착시키곤, 그의 유두 부분을 살살 문지르며 말했다.

“그럼... 주고받는 게 있어야겠지? 오랜만에...♥”

정성민의 허리를 두 다리로 감싼 뒤, 발뒤꿈치로 그의 자지를 살살 자극하는 백하윤.

최근 백하윤과 ‘드라마 역할극’을 하는데 재미를 붙인 정성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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