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92화 (292/303)

눈에 띌 정도로 그의 상태가 수척해졌기 때문이다.

“시간이 없어.”

하지만 남은 시간은 촉박했다.

아무리 망해가고 있다고 해도, 정성민은 여전히 뒷세계의 왕이었으며, 그의 실종은 큰 사건이었다.

그의 세력이 이곳에 몰려오기 전에 빨리 연옥을 성공시켜야 한다.

그렇게 이신아가 나섰다.

“시작할게.”

곤히 잠든 정성민에게 약을 투여하는 그녀.

이후, 그녀는 절차대로 약을 투여하며 정성민의 기억을 다시 바꿨다.

다만, 어설프게 기억을 바꾸려다간 오히려 기억이 꼬여 그가 미쳐버릴 수도 있으므로, 그녀는 정성민의 기억을 아예 삭제하기로 했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기억을 말이다.

“으음...”

그렇게 약 4시간가량의 재세뇌 공정이 끝난 뒤, 정성민은 마침내 눈을 뜨게 되었다.

그는 이신아의 의도대로 그녀와 관련된 모든 기억을 말끔히 잊은 상태가 되었다.

그에게 가족은 오직 정성아, 정현재뿐이며, 정현재는 얼마 전 교통사고로 죽은 것으로 기억을 바꿔놨다.

그렇게 어느 정도 예전의 정성민으로 되돌리는 데 성공한 이신아는, 이제 그에게 혼동을 주지 않도록 영영 사라지기로 했다.

정성민의 여인들은 이신아가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를 보며 말했다.

“다시는 주인님 눈에 띄지 마. 물론, 성아 눈에도.”

싸늘한 이희연의 말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신아.

이희연이 말했다.

“당신도 한번 느껴봐. 사랑하는 사람에게 잊히는 게 어떤 기분인지. 그리고, 절대 자살하지 마. 죽지 못하도록 감시할 거야. 평생 괴로워하면서 살아.”

“.....그래.”

“그럼 꺼져. 다시는 우리 앞에도, 주인님 앞에도 나타나지 마.”

고개를 끄덕이곤 그대로 뒤돌아서는 이신아.

터벅- 터벅- 힘없는 걸음을 옮기는 그녀.

그녀는 그대로 한 시골에 내려가 그곳에 정착했다.

자신의 연락책을 통해 정성민과 정성아의 소식을 간간이 들으며, 집 앞의 텃밭을 가꾸거나 애완동물의 키우는 것이 그녀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

그 외에 그녀는, 하루 종일 후회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밥을 먹을 때.

고양이의 털을 갈아줄 때.

강아지의 변을 치워줄 때.

텃밭에 물을 줄 때.

멍하니 tv를 볼 때.

하늘을 올려다볼 때.

모든 날, 모든 순간.

그녀는 후회했다.

“...보고싶다.”

참 웃겼다.

하필 이럴 때,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이 남편이라니.

자신의 모든 욕망을 터트리고, 그로 인해 모두에게 버려진 지금.

그녀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은 정현재였다.

그가 너무도, 너무나도 사무치게 그리웠다.

‘여보. 나중에 말야. 우리 시골에 내려가도 재밌겠다. 그치?’

그 이후, 간간이 정현재의 환청이 들렸다.

그나마 그 목소리가 버틸 힘이 되어 주었다.

하루하루 비참한 날을 보내고 있는 자신에게, 그의 목소리는 살아갈 힘이 되어주었다.

언제나 자신을 일으켜 세워주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남편이었다.

.....그런 세월이 12년간 지속되었다.

“아아....아아아아아....흐으으으...”

이신아는 자신의 애완동물을 묻어주며 오열했다.

그나마 하루에 웃는 순간이 있다면 애완동물의 애교를 볼 때였는 데, 이젠 애완동물 마저 떠나보내게 되었다.

자신의 곁에 남은 존재는 더 이상 아무것도 없었다.

“.....”

모든 게 떠나갔다.

아들도, 딸도, 자신을 잊어버렸고, 손주들도 자신을 모른다.

그나마 정을 붙이던 애완동물마저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제는 대체 뭐에 기대어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그때ㅡ.

‘여보. 왜 그러고 있어.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있어?’

절망에 주저앉은 순간, 어김없이 들리는 정현재의 환청.

해바라기처럼 자신만을 바라보며 아낌없는 사랑을 준 그.

“아...”

그녀에게 어떤 깨달음이 왔다.

모든 욕망을 다 토해내고, 그 욕망으로 인해 모든 게 무너져버린 지금.

그녀가 추구하는 ‘궁극의 남자’는 결국 정현재였음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안에 남아 있는 알파남의 환상은 그저 실현하지 못한 자신의 야욕과 재벌가에 대한 분노 때문에 만들어진 허상일 뿐이지, 결국 자신에게 맞는 진정한 짝은 정현재라는 것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아니, 내겐... 과분한 사람이었지. 너무나도 과분한 사람...”

마음의 가치를 경시했었다.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두각을 보인 자신이, 대접받아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무능하고 멍청한 오빠들보다 유능하고 뛰어난 자신이 재벌가의 주인이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고, 자신을 ‘매물’ 취급하는 아버지의 태도를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정현재의 마음에 큰 가치를 두지 않았었다.

재벌가의 막내딸이자 어렸을 때부터 신동 소리를 듣던 자신에 비하면 정현재는 그저 평범한 남자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모자란 건 자신이었다.

미모와 실력을 모두 갖춘 자신이 우월하다는 편협함에 갇혀, 그의 마음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지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와 함께한 모든 순간 자신의 세세한 마음까지 들여다 보아 배려를 해준 그의 따스함이 얼마나 견고한 울타리인지 모르고 있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여자란 말인가.

왜 그 마음에 감사함을 느끼지 못했단 말인가.

“나도 결국... 아버지와 다를 게 없었어... 나는...”

외모, 능력, 실력.

오직 그것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했던 자신.

자신에 비하면 정현재의 가치가 떨어지기에, 그를 알파남으로 만들려 여러 노력을 기울였던 자신.

그 기준은 결국 아버지의 기준이었다.

정현재를 알파남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도 아버지의 기준에 맞춘 것이었고, 자신을 증명하고자 했던 것도 아버지의 기준이었다.

“하...하하하.....어리석은 년.”

이신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로 가치 있고 귀중한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깨달은 자신이, 너무나도 한심스러웠다.

이런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과분한 사람이었어... 그런 사람을 곁에 두고, 난...”

마음의 귀중함을 깨달은 그녀.

이후, 이신아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주로 그리는 것은 하루에도 몇 번씩 아른거리는 정현재의 얼굴이었다.

20대 시절의 그부터, 50대로 접어든 그의 모습까지.

때로는 그와 함께했던 추억의 장소를 그리기도 하고, 아직 갓난아기인 정성민과 정성아를 안고 있는 그를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그러한 그림이 무려 수천 장에 달하게 됐을 때였다.

-쉬익... 쉬익...

오랜 세월, 번뇌와 후회 속에서 남편의 그림을 그려온 이신아.

이제 그녀의 수명은 얼마 남지 않아 최후를 앞두고 있었다.

“아무도...없구나....내 곁엔...”

한 달 전부터, 몸이 급격히 아파오기 시작해도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심지어 이렇게 임종을 앞둔 순간에도 이신아는 혼자였다.

“....그래. 이게... 내게 어울리는..... 마지막이지....나 같이 어리석은... 년에겐....”

소중한 사람의 마음을 무참히 짓밟은 자신.

그런 자신에게 이런 죽음은 썩 어울리는 죽음이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거고, 신경조차 쓰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도 묻어주지 않을 거고, 이렇게 방안에 악취를 풍기며 썩은 시체로, 그리고 유골이 되어 방치될 것이다.

그 누구도 자신을 기리지 않을 것이다.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또각.

그때, 이신아의 귀를 자극하는 선명한 구두굽 소리.

순간 헛들은 것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구두굽 소리는 점점 더 선명하게 들려왔다.

분명히 이곳으로, 규칙적인 박자로, 또각 또각 걸어오고 있었다.

힘 있고 묵직한 남자의 발걸음이었다.

이윽고 발걸음의 주인이 자신의 바로 앞에 당도하게 되었다.

“.....”

힘겹게 고개를 들어 발걸음의 주인을 확인하는 이신아.

순간, 그녀의 동공이 크게 확대되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신아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어때. 욕망을 실현한 인생을 살아보니.”

그녀가 확인한 남자의 얼굴.

사무치도록 그리웠고, 그래서 너무나 보고 싶었지만.

“어, 어떻게...”

남자의 얼굴은 기대하는 것과 달랐다.

이제는 60대를 바라보고 있어야 할 정성민의 모습이, 여전히 가장 아름답게 빛나던 20대의 얼굴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EP.294 (외전) 귀환 

멍하니 입을 벌린 채 정성민을 바라보는 이신아.

그녀는 혹시 자신이 이미 운명을 달리한 것이 아닐까 생각을 했다.

그게 아니고선 눈앞의 정성민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직도 꿈이라고 믿는 건가. 그럼 이러면 어때.”

정성민은 그렇게 말하며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유배지로 버려진 이신아의 집이 순식간에 증발하며 순백의 공간으로 대체되었다.

“.....이건.”

“똑똑한 당신이라면 알겠지. 이곳이 연옥의 초기 단계인걸.”

연옥.

그 세계의 초기 형태는 이렇게 아무것도 없는 순백의 공간이었다.

이는 연옥을 쓸 줄 아는 이신아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도대체 언제부터?”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대체 언제 연옥에 걸려든 걸까.

정성민이 말했다.

“처음부터 쭉. 그러니까 내가 당신을 불러들인 순간부터, 당신은 쭉 연옥 안에 있었어.”

“.....처음....부터...?”

뒷말을 흐리며 생각에 잠긴 이신아.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처음’이 언제인지 짐작할 수 없었다.

연옥의 세계에 40년을 산 그녀는, 이곳을 이미 현실로 인식하고 있었고, 그렇기에 꿈과 현실의 경계를 구분 짓지 못하고 있었다.

“흐음. 그러면 자. 이걸 받아봐.”

하여 정성민은 이신아에게 조금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는 자신의 손 위에 거울을 소환한 다음, 이신아에게 넘겨주었다.

이신아는 손거울을 들고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

주름이 자글자글한 노인이 되어버린 자신.

시골에 내려온 이후, 매일 자신을 자학하며 지낸 탓에 완전히 생기를 잃은 모습.

“그 모습은 당신이 맞이할 최악의 모습이야. 모든 걸 망친 뒤 가족에게까지 버려져, 쓸쓸히 최후를 맞이하는 거지. 하지만ㅡ”

정성민이 잠시 뒷말을 흐리자, 일렁이기 시작하는 거울.

마치 잔잔한 수면에 작은 돌멩이가 떨어진 것처럼, 거울은 이신아의 얼굴을 파동의 형태로 일그러트리다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

그리고 그 모습은 아직 생기과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었다.

아직 노화의 저주에 찌들지 않은, 동안의 축복이 얼굴 곳곳에 남아 있는 생기 어린 자신이었다.

“그래. 바로 그때야. 내가 당신을 이곳에 부르고ㅡ”

-딱.

손가락을 튕김과 동시에, 변화하는 공간.

정성민이 이신아를 강제로 겁탈했던, 대형 최면실.

“당신을 강제로 범했을 때. 이미 그때 모든 게 시작되고 있었어. 혼절한 당신은 곧바로 특수 최면실에 옮겨져 연옥 안에 갇혀 있었지.”

“.....”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아니, 시간이 지날수록 기억은 또렷해졌다.

어찌 그 순간을 잊을 수 있단 말인가.

아들이 자신을 강제로 범하던 그 순간을.

“...기억났어. 그때부터였구나. 하지만 대체 왜 이런 짓을...?”

하지만 이신아는 정성민이 대체 왜 이런 짓을 벌였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연옥은 보통 기억을 조작시킬 때 쓰는 약물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자신의 기억을 조작시켜 성향을 바꿀 계획이었다면, 이곳이 연옥인 것을 알려주지 말아야 한다.

조작된 기억이 가짜인 걸 눈치채는 순간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당신에게 알려주고 싶었어. 당신의 그 욕망을 그대로 방치했을 때, 어떤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

“요컨대, 당신의 욕망을 올바른 방향으로 틀고 싶었어. 내가 그랬던 것처럼.”

“...네가 그랬던 것처럼...?”

“그래. 나도 당신처럼 욕망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있었어.”

이신아는 궁금했다.

아들은 욕망은 무엇이며, 그가 깨달은 욕망의 본질은 무엇인지.

하여 아들에게 물었다.

네 욕망은 무엇이었냐고.

“강해지는 거. 영원히 무너지지 않고 군림하는 거. 죽는 그 순간까지, 누구도 나를 넘볼 수 없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거.”

말인즉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뒷세계의 왕이 되는 것이 정성민의 욕망이었다.

정성민은 잠시 숨을 고른 뒤, 자신이 왜 그런 욕망을 가지게 되었는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게 남았었나 봐. 내 가족과 연인을 잃었을 때 말이야. 그래서 다시는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어. 과거의 나를 도려내려 무단히도 애썼지.”

“.....”

“하지만 생각을 바꿨어. 이하영과 내 부인들이... 나를 설득했어. 그래서 마음을 비우고 고민을 해보니, 결국 내가 강해지고 싶은 이유는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더라.”

자신이 깨달은 것을 이신아에게 전하는 정성민.

그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생각했어. 과거의 나를 도려내는 게 내 사람들을 지키기 위한 길인지. 원래의 나를 버리고, 오직 ‘주인님’으로서 군림하는 게 내 가족을 되찾는 길인지, 오랫동안 고민해봤어.”

정성민은 잠시 하던 말을 멈추고 이신아에게 걸어갔다.

이신아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정성민을 보았다.

정성민이 말했다.

“그리고 고민 끝에, 알게 됐지. 내가 ‘주인님’의 모습을 보일수록, 우리 가족은 파멸할 것이란 걸. 당신은 내 모습에서 당신이 바라던 ‘이상향’의 잔재를 보고, 정현재는 그런 나를 카피하려 하고, 결국 당신은 나의 아류가 된 정현재에게 만족하지 못하는. 그런 악순환 속에서 파멸할 거란 걸 말이야.”

이신아의 바로 앞에 멈춰선 정성민.

‘주인님’과 예전의 정성민이 반반 섞인 듯한 그의 모습.

“그러니까, 이제 돌아가자. 당신도 깨달았을 거 아니야. 난 예전의 내가 소중해. 당신도 과거의 당신이 소중하고, 정현재도 과거의 정현재이기에 더 가치 있지. 이제 성아도 우리 사이에서 그만 불행할 때도 됐고.”

이신아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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