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3화 (283/303)

“오. 그렇게 됐군요. 축하해요.”

음식을 하는 동안, 과거에 대해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는 푸드트럭 사장과 이희연.

이윽고 튀김이, 끝나자 푸드트럭 주인인은 정성민과 이희연에게 핫도그를 하나씩 주었다.

이희연이 인사를 하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여전히 맛있어요~ 많이 파세요~!”

적당한 인사말을 남기고 다시 차에 탑승한 정성민과 이희연.

이후, 이희연은 계속해서 정성민이 과거를 회상할 수 있을 만한 곳으로 데리고 갔다.

식당부터 시작해서 사진을 찍었던 곳, 특별한 기억이 담겼던 곳 모두 가리지 않고 추억의 장소를 돌아다녔다.

그렇게 4시간이 지나 슬슬 해가 떨어지고 있을 때였다.

“여보. 우리 저기서 좀 쉬자.”

이희연은 바다를 볼 수 있는 한 벤치를 정성민에게 가리켰다.

정성민은 그 벤치를 보자마자,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분노, 슬픔, 애틋함, 그리움이 한데 섞인 것 같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감각을 느꼈다.

“여보 해지기 전에 빨리! 저기 사진 잘 나올 것 같단 말야.”

다만, 이희연은 아무렇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그저 정성민과 함께 하는 이 순간을 사진으로 남기려 혈안이 된 듯하다.

‘옛날 생각나나 보네.’

허나 겉보기에만 그럴 뿐, 지금껏 이희연이 했던 행동은 모두 계산된 것이엇다.

남편 안에 봉인되어 있는 선한 정성민을 끌어내기 위한, 그녀의 계책이었다.

“빨리! 여기서 투샷만 찍으면 더 이상 귀찮게 안 할 게.”

하여 이희연은 계속 정성민을 벤치로 끌어들였다.

셀카봉을 끼운 폰을 내려놓고 자신의 옆자리를 팡- 팡- 두들기며 정성민을 흘겨보았다.

“...알았어.”

그래서 내키진 않지만, 정성민은 이희연의 옆자리를 앉게 되었다.

그리고 이 자리에서 자신이 그녀에게 했던 말을, 찬찬히 떠올리고 있는 그였다.

-찰칵. 찰칵.

다만 이희연은 자신이 이곳에서 말했던 ‘꿈’이 뭔지 완전히 까먹은 듯, 온갖 종류의 컨셉 사진과 커플 사진을 남기는 데 여념이 없어 보였다.

“.....”

그렇게 일방적인 촬영의 시간이 이어진 지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이희연은 폰 안의 사진을 흐뭇하게 바라보고는, 정성민에게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보고를 올렸다.

“어. 다녀와.”

이곳에 놀러 오며 전담 경비원들도 붙은 상황.

이희연은 자신의 호위를 데리고 자리를 비켜주었고, 혼자 남게 된 정성민은 사색에 빠져들게 되었다.

“.....”

정성민의 사색은 가정법으로 시작하는 이야기였다.

만약 자신의 인생에 미스터 최가 없었더라면 어땠을까.

만약 그렇다면 부모님 같은 부부가 되어 안락한 가정을 이루고, 세계 최고의 셰프가 된다는 꿈을 서서히 이뤄가고 있을까.

지금쯤 자신의 곁을 떠난 이하영과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을까.

지금보다 더 행복했을까.

“...무슨 소용이야.”

하지만 방금 중얼거린 말대로, 무슨 소용이지 싶었다.

절대로 되돌릴 수 없고, 앞으로 이룰 수도 없고, 그래서 너무나 아픈, 그래서 반드시 버려야만 하는. 그런 꿈을 떠올려봤자, 무슨 소용일까 싶었다.

-털썩.

누군가 자신의 옆에 앉은 건 그때였다.

정성민은 이희연이겠거니 생각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곳엔ㅡ

“.....”

5년 전과 변함이 없는 이하영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었다.

아무런 말도 없이, 표정도 없이, 저무는 황혼의 빛을 받으며, 그저 자신의 옆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헛것을 봤나.

정성민은 눈을 깜박거렸다.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환영을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해가 지는 게 되게 쓸쓸하다. 그치? 마치 옛꿈이 지는 거 같아.”

“.....”

멍한 얼굴로 이하영을 바라보는 정성민.

다만, 이윽고 모든 걸 이해한 그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보기 좋게 낚였군. 지금 뭐 하는 거지? 다시는 돌아오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

“.....”

“뭐, 시도는 괜찮았어. 희연이까지 끌어들여 옛 감성팔이를 하는 건 나름 신선했어. 그런데 거기까지야. 이제 완전히 남이 되기로 하지 않았나?”

비릿하게 입꼬리를 올리며 이하영을 노려보는 정성민.

이희연과 이곳을 탐방하며 순해졌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하영이 그런 그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 맞아.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로 했었지. 하지만 말야, 내가 너를 떠난 이유는, 내가 네게 방해만 된다고 생각해서... 자꾸 네 과거의 모습을 끄집어내려는 내가, 네게 방해만 된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떠났던 거야.”

“.....”

무표정한 얼굴로 이하영의 말을 듣는 정성민.

그가 말했다.

“그래. 잘 알고 있네. 그럼 끝까지 네 약속 지켜.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마. 너는... 자꾸 주제넘게 날 되돌리려 하는 너는... 내게 방해만 될 뿐이야.”

절대 과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정성민의 확고한 의지.

과거의 나약했던 자신이 무엇을 잃었는지 뼈저리게 깨닫고 있기에, 현재의 잔혹하고 강인한 모습을 끝까지 지키려 하는 정성민.

이하영이 말했다.

“어쩜 그때랑 변한 게 하나도 없네. 이번에도 자신의 행복은 완전 뒷전이지. 왜 자꾸 혼자서 모든 걸 짊어지려고 해.”

“.....”

이하영의 발언에 미간을 꿈틀거리는 정성민.

그가 말했다.

“같잖은 설교하러 온 거면 꺼져. 내가 그때처럼 네 품에 안겨 울기라도 기대하는 모양인데, 이제는 다시ㅡ”

“성민아.”

다만, 정성민이 뭐라든 자신의 뜻을 전하는 이하영.

이미 한번 정성민에게 버림받을 것을 각오한 그녀였기에, 그녀는 정성민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녀가 말했다.

“그럼 이건 어때. 네 부모님의 문제에 대해서 내가 잘 알고 있어. 내가 그걸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준다면, 내 말을 들어줄래?”

“.....”

부모님에 대한 얘기가 나오자 곧바로 흥미를 보이는 정성민.

그가 말했다.

“...희연이에게 들었나? 하지만 굳이 네 도움이 없어도 해결할 수 있어. 애초에 둘이 여행을 떠난 것도 더욱 돈독한 부부관계를 위해서였고, 지금은 단지ㅡ”

“어머님께서 네게 욕정하고 있어.”

“일시적....”

하던 말을 멈추고, 뒷말을 흐리는 정성민.

그가 뒤늦게 이하영의 폭탄 발언에 반응했다.

“...뭐, 뭐라고 했어? 아까 뭐라고?”

“어머님께서, 네게 욕정하고 있다고. 그리고 아버님에게도 문제가 있는 거 같아.”

“.....”

믿기지 않는 듯, 멍한 얼굴로 이하영을 보는 그.

이하영이 말했다.

“그러니까 내 말을 들어줘. 중요한 얘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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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의심했다.

아니, 제대로 들은 건 맞지만,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었다.

지금 누가 누구에게 뭘 하고 있다고?

어머니가, 내게, 욕정하고 있다고?

“파-하.”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제 발로 걸어나간 년이, 다시 돌아오기 위해 이렇게 추해질 수도 있구나 싶었다.

“씨발, 말도 안 되는 개헛소리는 집어치워. 무슨 말도 안되는...”

허나, 뒷말을 흐리는 정성민.

거짓이라곤 하나 찾아볼 수 없는, 결백한 이하영의 눈.

정성민의 주먹이 꾹 움켜쥐어졌다.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에 ‘민세라’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너...!”

팔을 뻗어 이하영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가까이 끌어당겨, 죽일 듯 그녀의 눈을 노려보았다.

다만 이하영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그의 분노한 눈에 정면으로 마주 바라볼 뿐이다.

“사실이야? 책임질 자신 있어?”

만약 그녀의 말이 거짓일 시, 죽일 수도 있다는 기세로 그녀를 압박하는 정성민.

허나 이하영은 여전히 흔들림 없는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온 진심을 다 해 자신의 말이 틀림없음을 눈으로 보여줬다.

-파앗.

이에 정성민은 이하영의 멱살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인 채, 곰곰이 생각을 이어나갔다.

고뇌로 가득 찬 그의 표정은 감정이 없는 것처럼 무표정하고 삭막했다.

그가 말했다.

“언제 알게 됐어. 여행을 떠났을 때부터?”

“응.”

“왜 말 안 했어. 진작 말할 수 있었잖아.”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라 생각했어. 어머님 스스로 해결하려고도 했고. 어머님이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거라 믿었어.”

“.....”

화가 난 표정의 정성민.

그가 말했다.

“넌 그게 문제야. 얌전히 내게 사실을 알려 바쳤으면, 내가 어떤 조치라도 했을 텐데. 결국 시기를 놓쳐서 일이 터지게 만들어.”

“난 네 노예가 아니니까. 그리고 어머님께서 스스로 해결하리라 생각했고.”

“.....”

이하영과 다른 여인들의 결정적인 차이.

다른 여인들은 ‘주인님’으로 각성한 자신을 만났고, 그 모습을 사랑하는 반면, 이하영은 언제까지나 과거의 자신을 그리워했다.

특히 모든 복수가 끝난 뒤에는, 시도 때도 없이 과거를 언급하며 자신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건가? 우리 가족에게 문제가 있으니, 네가 도와주겠다고?”

그리고 그러한 자세는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솔직히 처음 이하영이 등장했을 때, 지금이라도 무릎 꿇고 싹싹 빌면 다시 받아줄 마음이 있었다.

다시는 주제넘게 나서지 않고, 온전히 자신의 노예가 되겠다고 맹세하면 자신의 복수를 이룰 수 있도록 도와준 공을 봐서라도 품어줄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결국 그녀는 변하지 않는다.

자신이 되돌아온 이유는 용서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문제를 빌미로 자신을 어떻게 해보려고 돌아온 것이었다.

“응. 널 도와주려고 왔어. 네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두고 볼 수만은 없으니까.”

대강 이하영의 의도를 파악한 정성민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결국 용서를 빌지 않은 꼬라지를 보니, 더 얘기를 나눠봐야 달라질 건 없어 보였다.

또 자신을 거슬리게 할 것이 분명했다.

“네 도움은 필요없어. 문제를 인지했으니, 내가 고치면 그만이야. 돌아가. 다시는 이딴 헛짓거리 꾸미지 말고. 다음에도 이러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정성민은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뒤돌아 돌아가려는 순간.

“나 혼자 꾸민 일이 아니야.”

이하영이 낮은 목소리로 정성민을 붙들었다.

정성민이 뒤돌아선 그대로 답했다.

“희연이에게 도와달라 했겠지.”

“아니. 희연이가 도와달라고 했어. 하윤 언니, 지연이, 엘레나도 같이.”

다만, 지금의 답은 의외였다.

정성민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 만큼 예상한 답이 아니었다.

“희연이가 부탁했다고?”

“그래.”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진 않았다.

정성민은 주먹을 꾹 쥐며 생각을 이어나갔다.

‘약한 모습을 보여서 그래. 술 따위에 의존하니, 그들을 변하게 만든 거야.’

항상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했던 이희연과 다른 여인들이, 자신 몰래 이하영을 끌어들여 이런 일을 꾸몄다.

이는 정성민에게 위험 신호와 다를 바 없었다.

자신이 아내를 제대로 통제하고 있지 못하는 증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생각이 안일했어.’

충분히 통제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술을 조금 즐기기만 할 뿐, 아내와의 생활에는 별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든 여인을 고루 사랑해주었고, 자식에 대해서도 소홀하지 않았다.

매일 새벽 운동을 하는 것도, 근력 운동을 하며 몸을 유지하는 것도, 여러 사안에 대해 일을 처리하는 것도, 모두 완벽하게 해오고 있다고 생각했다.

술 조금 마시는 것 정도야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나.’

하지만, 아무래도 술을 너무 가까이 한 모양이었다.

수시로 느껴지는 공허함과 허탈함 때문에, 아내들을 불안하게 만들 만큼 술을 가까이 했던 모양이다.

정성민은 그런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며 생각했다.

‘그래도 이하영까지 끌어들여 이런 일을 벌인 것에 대해 벌은 줘야겠지. 그리고 내가 흔들리지 않을 거란 모습을 보여주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올 거야.’

‘아내’라는 호칭으로 부르긴 하나, 그들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소유이며, 자신의 지배하에 있어야 한다.

그러고 그런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들의 존중을 얻어야 한다.

절대적인 장악력과 흔들림 없는 모습으로 그들의 존중을 얻어야 한다.

이하영처럼 공존하려 들면 곤란하다.

“성민아, 지금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내가 맞춰볼까?”

그때, 이런 자신의 생각을 알고 있다는 듯, 방금 생각했던 바를 그대로 말하는 이하영

아내를 제대로 통제하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자기반성, 그리고 완벽한 통제를 위한 계획수립과 실행방법까지.

정확히 정성민이 생각했던 바를 그대로 읊는 이하영이었다.

솔직히 조금 놀라웠다.

“맞지? 그런 생각한 거.”

“.....”

조용히 이하영을 노려보는 정성민.

이하영이 말했다.

“성민아. 네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야. 분명 희연이를 포함한 네 부인들은, 그걸 바라고 있어. 네가 걔들을 지배하고 옭아매는 걸, 스스로 바라고 있다고. 걔들을 뼛속 깊이 너를 주인님이라 생각하고, 섬기는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으니까.”

정성민의 여인들이 스스로 지배받길 원한다고 말하는 이하영.

즉, 그녀의 말은 정성민이 그녀들을 지배하려는 행위 자체는 틀리지 않았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다만ㅡ.

“하지만 문제는, 너 혼자 모든 걸 짊어지려 한다는 거야. 네 여자들을 지배하는 것부터 가족 문제까지.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 하고,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앓으려 해. 그래서 넌 항상 힘에 겨워해.”

...정성민은 담담히 그녀의 말을 들었다.

자신의 여인들이 차마 자신에게 하지 못했던 말을, 그녀의 입을 통해 듣고 있었다.

“그러니까 약한 모습 보여도 괜찮아. 네가 약한 모습을 보여줘도, 그들이 결국 너를 ‘주인님’으로 만들기 위해 무슨 짓이든 다 할 거야. 네가 약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와도, 그들이 앞장서서 너를 지켜주고 네가 주인님으로 있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거야.”

정성민은 생각했다.

과연 이하영의 말대로 약해진 나를 그녀들이 사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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