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1화 (281/303)

“...여기 사진을 보면, 아버님의 표정이 상당히 화나 보이십니다. 아마 다툰 게 아니신지...”

정성민은 부하가 건넨 사진 몇 장을 살펴보았다.

그가 이마를 짚으며 말했다.

“나가 봐.”

“...예.”

자리를 비워주는 부하.

정성민은 손을 덜덜 떨며 옆에 있는 위스키를 가져와 술을 따랐다.

이제 대낮에도 술을 마시는 게 버릇이 된 그는, 위스키를 원샷한 다음 유리잔을 쾅! 내려놓았다.

“미쳐버릴 거 같군.”

이신아가 집으로 돌아오고, 가족들이 그녀를 받아줬을 때.

모든 게 해결됐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자꾸만, 사건 사고가 끊이질 않는다.

-우우웅...

그때, 주머니 안쪽에서 울리는 진동.

정성민은 폰을 꺼내 발신자를 보았다.

엘레나였다.

-달칵.

“어. 여보.”

이미 사막과도 같은 정성민의 마음이지만, 그는 있는 힘껏 다정한 목소리를 흉내냈다.

이에 엘레나가 황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여보, 많이 바빠?”

“아냐. 통화할 시간은 돼.”

“웅. 다른 게 아니라, 우리 예린이 있잖아.”

“어.”

“아무래도 천재가 아닐까?”

“.....하하. 왜?”

“글쎄, 벌써 한글을 또박또박 잘 읽는 거 있지? 나도 배우는 데 한참 걸렸는데, 아직 어린아이가 나보다도 발음이 좋은 게, 보통 일이 아니야. 당신 부하한테 물어보니까 아무래도 영재스쿨을 알아보는 게 좋을 거 같대!”

정성민은 생각했다.

이르면 4살 때 한글을 읽을 수도 있고, 유독 당신이 한글을 못 깨우치는 거라고.

그리고 영재스쿨은 그냥 아부한 거뿐이라고.

하지만ㅡ.

“그래. 역시 우리 딸이네.”

정성민은 잔뜩 들뜬 엘레나의 기분을 맞춰주었다.

그녀의 순수함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히히. 당신 닮아서 그런 가봐. 당신은 키도 크고, 몸매도 좋고, 잘 생기고, 똑똑하고, 존나 카리스마 있고, 자지도 크고, 섹스도ㅡ”

“여보.”

“응?”

“한국에서 그런 숭한 말하면 못써.”

“...웅.”

“설마 예린이 앞에서 자지 보지 막 이러는 거 아니지?”

“.....”

“그치?”

“...다, 당연하지!”

애매하게 답을 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무필터로 막 내뱉은 모양.

정성민은 피식 웃으며 엘레나에게 말했다.

“아무튼 나 일하러 가봐야 할 거 같아.”

“웅. 시간 날 때 예린이 보러와. 아빠 보고 싶대.”

“하하. 그래.”

“응~ 그러면 일 끝나면 들려. 사랑해♥”

“나도.”

-삑.

은은한 미소를 머금은 채 통화를 끓은 정성민.

허나 그 옅은 미소는 점차 흩어 사라져 버렸다.

정성민은 다시 위스키를 유리잔에 따른 다음, 원샷으로 들이켰다.

그리곤 무표정한 얼굴로 오랫동안 허공의 한 지점을 바라보았다.

스멀스멀, 자신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던 이하영의 모습이 아른거렸다.

그는 1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소식이 없는 그녀를 떠올렸다.

-쪼르르륵...

정성민은 위스키를 따랐다.

***

“크흐흐. 이런 기분이구나.”

어두컴컴한 방.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나발째로 소주를 삼키던 이하영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이 비좁은 원룸의 침대에 쪼그려 앉아, 정성민과의 찬란했던 순간을 상기하며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어머니께선, 이런 기분이었던 거야.”

그때는 그저 지레짐작만 했었다.

소중한 사람을 잊어야만 하는 그녀가, 어떤 슬픔과 고통을 느꼈을지 어림짐작으로 가늠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똑똑히 알게 되었다.

아. 다시는 소중한 것을 되찾지 못한다는 것이, 이 정도의 아픔이구나.

이 정도로 인생이 허무해질 수 있구나.

당장 내일 죽어도 괜찮다고 생각될 만큼, 살아갈 이유가 없는 거구나.

“푸하하. 똑같네. 나도.”

결국에는 그렇다.

아무리 발버둥을 쳐보아도, 벗어날 수 없는 게 있었다.

열심히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다른 사람과 사랑하려 해보아도, 결국 자신이 있을 곳은 이곳이 아니었다.

노력해도 바꿀 수 없는 게 있었다.

“그래도, 살아가야겠지.”

하지만, 이 생을 놓아서는 안 된다.

이대로 스스로 목숨을 끓으면, 자신이 내뱉었던 말이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속죄.

속죄하는 마음으로 이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

조금씩, 조금씩... 사랑했던 그를 잊어야 한다.

“자자.”

하여 늦은 새벽. 그녀는 잠을 청했다.

그녀에겐 분명 해야 할 일이 있었고, 그러한 일들이 그녀의 삶을 붙들어주고 있었다.

-삑.

오후 2시.

그녀는 알람을 맞춰놓고 눈을 감았다.

이제 그녀가 업으로 삼는 일은 누군가의 넋두리를 들으며 술잔을 기울이는 일이니,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려면 푹 자둬야 한다.

그렇게 그녀는 잠이 들었다.

***

강남의 목 좋은 곳에 있는 빌딩.

그 빌딩 전체가 이하영의 것이다.

인간이 오를 수 있는 궁극의 상위 등급인 갓물주가 된 것이다.

하여 그녀가 하는 일은 5층에 칵테일 바를 열어 손님들과 노가리나 까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의 미모에 홀린 아저씨들이나 젊은 남자의 넋두리를 들으며, 그들의 신세 한탄에 미소를 지어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녀에겐 나름 재미있는 소일거리였다.

“그러니까 말이야...그 개자식만 아니었어도...내 사업이...그렇게 망할 일은 없었다고. ”

오늘은 33살에 사업을 하여 큰 성공을 이뤘다가, 친구의 배신으로 대차게 사업을 말아먹고 월급쟁이로 전락한 40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슬슬 진상의 기미를 보이는 것 같아, 이하영은 그를 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런. 힘드셨겠어요.”

“큭큭...그걸 말이라고. 씨바알... 나도, 한때는 나도, 너 같은 여자가 끊이지 않았는데 말이야...”

진상의 기미를 보이는 손님이 이하영의 손을 덥썩 잡았다.

허나 이하영은 불편한 기색 한번 내비치지 않고 자신이 따른 술을 그에게 주며 말했다.

“후후. 괴로움은 술로 달래야죠. 서비스로 드리는 거니 쭉 들이키세요.”

수면제. 그리고 설사와 복통을 유발하는 약을 탄 술을 슥- 내미는 이하영.

그녀는 싱긋 웃는 얼굴로 진상의 손등을 간질렀다.

“나는 술 잘 마시는 남자가 멋있더라~♥”

“.....”

홍조 가득한 얼굴로 이하영을 바라보는 남자.

그는 이하영의 의도대로 쭉- 술을 원샷한 다음, 그대로 테이블에 쿵- 머리를 처박았다.

이하영은 피식 웃으며 선반에서 비싼 술을 꺼낸 다음, 싱크대에 모두 흘려보냈다.

그리곤 남자의 계산서에 250만원을 추가했다.

“어머. 통도 크셔라. 감사해용 손님~”

잠든 남자의 귀에 속삭이듯 말하는 이하영.

그녀는 남자의 주머니에 지갑을 꺼낸 다음, 카드를 긁었다.

일시불로 320만원이란 금액이 나왔다.

“치워.”

그리곤 자신을 따라 나온 부하들에게 진상을 치울 것을 명했다.

남자는 우람한 체격의 부하들에게 업혀 칵테일 바를 퇴장했다.

“후후. 여전히 썅년인 게 보기 좋네.”

그때, 어디선가 들리는 친숙한 목소리.

고개를 돌리니, 도도한 걸음걸이로 이곳으로 다가오고 있는 이희연이 보였다.

이하영은 멍한 얼굴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잘 지냈어 이년아? 말도 없이 우리 도원결의를 탈퇴하면 어떡해?”

이희연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칵테일 바의 입구로 우르르 몰려오는 미녀들.

칵테일 바 안의 남자들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차례대로 백하윤, 안지연, 엘레나가 걸어오고 있었다.

EP.283 (외전) 설득 1~3 (完)

아내에게 화를 내고 떠난 지 한 달.

정현재의 마음 한구석엔 응어리가 굳어 있었다.

결국 자신의 힘으론 아무것도 이루지 못해, 오래된 무기력함이 곪아버린 결과였다.

‘대체 왜...’

원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아내와 이렇게 완전히 틀어져 별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에게도 다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직 미스터 최의 잔재가 남아있는 아내를, 자신의 힘으로 되찾아오겠다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에 아내가 뒤틀린 욕망을 보여도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이 바로 잡을 수 있을 줄 알았다.

아닌 게 아니라, 이제 자신은 예전과는 달라졌으니까.

반병신이 되어버린 미스터 최를 굴복시키고, 자신의 남성성을 입증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렇게 미스터 최를 완전히 무너트려 자신의 남성성을 증명할 수 있으면, 아내를 다시 원래대로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가 아내를 ‘민세라’로 만든 것처럼, 자신도 시간을 들여 민세라의 잔재를 완전히 지우고 ‘과거의 이신아’로 되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성민이인 거야...’

하지만, 아내의 욕정이 대상이 아들인 것을 확인한 순간, 그 계획은 모두 물거품이 되었다.

자신의 힘으로 아내를 되찾겠다는 자신의 야망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고 만 것이다.

때문에 허탈함은 느낀 정현재는 분노했다.

자기주도적으로 아내를 원래대로 되돌리겠다는 최초의 시도가 실패하자, 아내에 대한 원망과 허망함이 밀려 들어왔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여보...”

그리고 다시, 이렇게 꼴사나운 모습이 되어버렸다.

나약한 가장은 노력했으나, 여전히 이렇게 나약할 뿐이었다.

결국 자신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끄으으으으....”

정현재는 자신의 머리를 감싸 쥐었다.

***

실내의 어둠을 은은하게 밝히는 형형색색의 조명.

듣기 편안한 재즈 음악의 볼륨.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일자형 테이블, 심플하면서도 모던한 인테리어.

가로로 폭이 넓은 목재선반에 진열된 수많은 종류의 고급술.

정성민의 여인들은 이하영이 운영하고 있는 칵테일 바를 둘러보았다.

조명, 음악, 인테리어. 모든 것이 완벽하게 맞물려 이곳만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제법 괜찮네. 이런 쪽으론 감각이 있다니까?”

일자형 테이블에 나란히 앉은 4명의 미녀들.

그중 가장 좌측에 앉은 이희연이 이하영의 칵테일 바에 대한 감상평을 남겼다.

“당연하지. 나만큼 사업체를 운영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리고 이에 이하영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멀지 않은 과거, 정성민의 양지 사업체와 향락소를 성공적으로 운영했던 만큼, 그녀의 사업 감각은 여전히 살아있었다.

“뭐, 그건 인정. 그런데 그 능력을 왜 이런 곳에 쓰고 있을까.”

다만, 이희연과 여인들이 이곳에 온 이유는 이하영의 사업감각을 칭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녀들에겐 이하영을 다시 데려오려는 목적이 있었다.

인정하긴 싫지만, 주인님의 알콜 의존 증상은 이하영이 떠난 것과 관련이 있는 듯하니 말이다.

“여기가 어때서. 나름 괜찮아. 소소하게 보람도 있고. 크게 스트레스받을 일도 없고. 사람 사는 얘기 듣는 것도 재밌고.”

하지만 이하영은 돌아갈 마음이 없는지, 지금의 생활이 마음에 든다고 답을 했다.

실제로 그녀의 표정은 향락소를 운영하던 시절보다 더욱 밝아 보였다.

하지만-.

“정성민이 힘들어하고 있어.”

이어지는 백하윤의 말에, 이하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조금 전의 웃음은 온데간데없이,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로 정성민의 안부를 묻는다.

“서, 성민이가...? 왜? 뭔 일 있었던 거야?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알콜 의존증이 심해.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잠들 수 없을 정도로.”

“.....”

충격받은 이하영의 표정.

덜덜 떨리는 어깨, 가빠지는 호흡.

그러다 조용히 고개를 떨구는 그녀.

이윽고 안지연이 홀짝이던 칵테일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언니. 주인님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예요? 언니는 왜 갑자기 여행을 떠난 거고, 왜 돌아오자마자 우리를 떠난 거예요? 이렇게 안절부절못할 거면서.”

말없이 고개를 떨구고 있는 이하영.

이윽고 그녀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냥... 여행하는 동안 깨달았을 뿐이야. 난... 성민이에게 방해만 되는 존재라는 걸.”

“...방해?”

“응. 사실 성민이는...”

이하영은 정성민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충돌하는 것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말인즉, 자신은 정성민을 과거의 모습으로 되돌리려 하는 반면, 정성민은 나약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에 대해 말이다.

이윽고 이하영의 얘기가 모두 끝나자, 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엘레나였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러면 온뉘가 여보한테 맞추면 되잖아. 여보가 과거로 돌아가기 시러하는데, 온뉘가 뭐라고 과거로 되돌리려 해.”

화가 난 듯한 엘레나의 표정.

그녀가 말했다.

“온뉘의 과거에 대해 알고이써. 우리 여보에게 엄청 큰 상처를 줬다고. 그래서 여보가 과거로 돌아가기 싫어하는 거 아뉘야. 근데 언뉘는 왜 여보를 과거로 되돌리겠다는 거야?”

핵심만을 짚어 직설적으로 말하는 엘레나의 화법.

흥분한 탓에 어눌함 발음이 곳곳에서 드러났지만, 그녀의 말은 분명 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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