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80화 (280/303)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사고가 경직되고, 도무지 시야의 초점이 맞춰지지 않았다.

멍-하니 의식이 붕 뜨는 기분이었다.

“어...? 다, 당신이 그럴...그럴 리가...”

“사실이야. 당신을 안으면서, 다른 사람과 하는 것을 상상했어. 그 사람의 헐떡이는 얼굴을 떠올렸어.”

“어..............................”

절대로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변했다.

해바라기같이 자신만을 바라보던 남편이, 언제나 그 자리 그곳에서 자신만을 열렬히 사랑해주던 남편이 다른 여자를 떠올리며 자신과 몸을 섞었다.

“흐으...흐으으으....미, 미안해...나 때문에... 나 때문에 당신이...”

다만, 이신아는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 순수하고 한결같던 남편이 변한 거라면, 그 모든 것은 자신의 탓이었다.

“누굴 탓하자는 게 아니야. 잘잘못을 가려서 뭐해. 이미 지나간 일인 걸.”

하지만 정현재는, 잘잘못을 따지자고 이런 얘기를 꺼낸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서로의 욕망을 고백하여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꺼낸 이야기였다.

정현재는 그것을 설명했고, 이신아는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보. 당신이 먼저 말을 못 꺼내니, 내가 먼저 말할게. 당신과 관계를 할 때 떠올린 사람이 누구인지.”

“.....응.”

찢어질 거 같은 가슴을 움켜쥔 채 고개를 끄덕이는 이신아.

이윽고 정현재가 입을 열었다.

“내가 떠올린 사람은... 과거의 당신이야. 정말로 순수했던 과거의 당신.”

“.....?”

말장난 같은 말이었다.

아무리 과거의 자신과 현재의 자신이 다르다지만, ‘과거의 자신’을 다른 사람이라 말할 수는...

“정확히 말하면 과거의 당신을 잘 흉내 낼 수 있는 사람이지.”

“....어?”

나를 흉내 낼 수 있는 사람?

서, 설마...

“그래. 성아. 성아와 하던 섹스가...잊히지 않아. 순수했던 당신을 닮은 그 아이를... 나를 온몸으로 위로해줬던 따뜻한 그 아이를, 범하고 싶어. 하하... 나도 이젠 정상이 아니지?”

EP.282 (외전) 잘 지냈어 이년아?

흐릿하게 상이 맺힌다.

내게 충격적인 말을 건넸던 남편의 얼굴이, 눈가에 차오른 물기로 번지고 또 번져... 그 형상이 흐릿해진다.

마치 덜 마른 그림에 물을 쏟아부은 것처럼.

내가 알고 있던 남편의 형태가 흩어지고, 사방으로 퍼져 흐트러진다.

나의 사랑스러운 그이가 형체를 상실해 간다.

그래. 결국 이 모든 것은 나 때문이다.

미스터 최에게 굴복하여 뒤틀린 욕망에 빠져 살던 그 시절.

나는 남편을 매도하고, 학대하고, 괴롭혔으며, 그것으로 욕정을 채우던 최악의 아내였다.

그 행위로 남편은 미쳐버려 자아를 상실했고, 결국 모든 걸 꿈이라 여기게 되었다.

다만 그런 최악의 악몽 속에서도 그가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과거의 나를 행세하는 성아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 착해빠진 아이가... 남편을 똑 빼닮은 착한 아이가, 그이를 놓지 않고 계속 들여다 봐주어서... 나를 연기하면서까지 그에게 버틸 힘을 주어서.

그래서 남편은 그 지옥 같던 나날을 버틸 수 있었다.

지독한 악몽 속에서 성아라는 작은 버팀목에 기댈 수 있었다.

“모두...모두 나 때문이야....모든 게 다...”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

항상 그 자리 그곳에서 나를 지지하며, 나만을 바라봐준 사람.

내게 없어서는 안 될, 너무나도 소중한 사람.

난 그런 사람을 배신해버렸고, 결국 변하게 만들었다.

영원히 변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그가, 결국 그릇된 욕망을 품고 말았다.

결국 나처럼 뒤틀린 욕망을 품은 사람이 되고 만 것이다.

“많이... 충격인 모양이네. 하지만 이게 내 솔직한 심정이야.”

자신의 진심을 담담히 전하는 남편.

나를 안으며 성아를 보았다고. 그 아이의 따뜻한 품이 그립다고 말하는 남편.

남편이 말했다.

“그래. 미친 거지. 하지만 하루에 몇 번이고 그 생각을 해. 가장 힘들었던 그 시절... 그 아이에게 위로받으며 살아 있단 기분을 느꼈던 그때... 그때를 생각하면 자꾸 흥분이 올라와. 이 나이 먹고도 발기가 가라앉지를 않아. 다시 한번 내 소중한 딸에게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 그 아이 안에 내 것을 쏟아부을 때가 잊히지 않아.”

.....모든 게, 모든 게 결국 나의 잘못이다.

내가 그를 버렸기 때문에... 남편은 변모해버리고 말았다.

타락과 육욕에 찌든 나의 더러움이 남편에게 묻어버리고 말았다.

“여보. 많이 놀랐을 거라는 거 알아. 하지만 난 당신과 상의하고 싶을 뿐이야. 이런 욕망이 있다고 해서, 절제력이 사라진 건 아니야. 그저 내 개인적인 욕망일 뿐, 성민이와 성아를 상처 주고 싶진 않아.”

“.....”

다만, 남편이 자신의 욕망을 솔직히 드러낸 것은 이것을 실현하고 싶어서가 아니었다.

올바르게 해결하기 위해, 나와 상의하기 위해 꺼낸 얘기였다.

“그러니까 성아를 어떻게 하고 싶다는 게 아니야. 당신에게 솔직하게 모든 것을 말하고, 해결 방안을 찾기 위해 얘길 꺼낸 거지.”

...자식에게 욕정 하는 그릇된 욕망.

결국 남편도 내 입장과 같았다.

그 또한 이 욕망을 해결하여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을 뿐이었다.

“그러니 당신도 솔직하게 말해줘. 난 받아들일 준비가 됐어.”

자신의 큰 비밀을 말한 만큼, 내 비밀도 말해주길 원하는 남편.

나는 그가 상처받지 않길 바라며, 담담히 간직했던 비밀을 꺼냈다.

“...나도 당신과 같아. 성민이에게... 욕정하고 있어.”

“.....”

다만, 진실을 들은 남편의 표정은... 기대에 어긋난 답변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답변을 들은 듯, 멍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성민이라고? 당신이 욕정하는 상대가... 성민이라고?”

“.....응.”

“미스터 최...라고 생각했는데.”

잠시 할 말을 잃은 남편.

아무래도 내 욕정의 대상이... 미스터 최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이윽고 한참을 침묵하던 그가 내 눈을 보며 말했다.

“그럼 당신이 떠난 것도, 나와 이렇게 전국 일주 여행을 하는 것도, 다 그 욕망 때문인 거야? 성민이에게... 욕정하고 있다는 욕망 때문에?”

“...응. 당신과 함께... 모든 걸 되돌리고 싶어서. 우리 연애했던 그때처럼, 당신과 함께하다 보면 모든 게 돌아올 거 같아서... 그래서 여행을... 하자고 했던 거야.”

“.....”

잠시 생각을 정리하는 남편.

이윽고 그가 말했다.

“아직도 해결하지 못한 거지? 1년 동안... 나와 함께 있었는데도.”

“.....”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까.

나의 답이 남편을 상처줄까 너무나 두렵다.

내 답을 들은 그가 나를 떠날까 봐... 자신에게 자격지심을 느낄까 봐 너무 두렵다.

“여, 여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나-, 당신과 함께 있다 보면ㅡ”

“미스터 최라고 생각했어.”

그때, 내 말을 가로채며 자신의 생각을 전하는 남편.

이윽고 그가 입꼬리를 씁쓸하게 올리며 말했다.

“당신이 욕정하는 상대가... 미스터 최인 줄 알았어. 만약 그 새끼라면 내가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을 텐데.”

“.....”

“그런데 성민이면, 내가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 미스터 최 그 자식이라면... 내가 어떻게든...”

.....뒷말을 흐리며 주먹을 쥐는 남편.

아무래도 남편은 내 잘못된 욕정을 자신이 바로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무슨 방법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방법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려 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자신의 욕망도 솔직하게 말했던 것일 테고...

“엉망이네. 당신은 아들에게 욕정하고, 나는 딸에게 욕정하고.”

남편의 눈에 깃들었던 어떤 확신이 사라졌다.

해결책이라고 생각했던 그이의 어떤 생각이, 덧없이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모든 걸 되돌리기 위해 그이만의 방법으로 뭔가를 열심히 준비했던 거 같지만, 내가 틀린 답을 내뱉는 순간 모두 의미 없어진 듯했다.

“여보.”

그때,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날 부르는 남편.

그 한기에 어깨가 움찔 떨렸다.

나는 조심스럽게 남편을 올려다보았다.

“서로 시간을 좀 갖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

사고가 경직됐다.

정신이 붕- 뜨며 초점이 흐릿해졌다.

“무, 무슨 소리야... 시간을... 갖자니.”

“이 상태로... 여행은 힘들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아, 아냐 여보. 괘, 괜찮아. 내가 더 잘할게. 응? 해결할 수 있어. 우리 예전처럼 함께 있다보면...!”

“예전?”

그때, 싸늘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남편.

심장이 쿡-쿡- 쑤셔왔다.

처음 보는 그의 표정에 내 마음이 무너진다.

“아들에게 욕정하는 당신과, 딸에게 욕정하는 내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다고?”

“.....”

무너져 간다.

내 잘못된 욕망 때문에, 내 보금자리이자 안식처인 그가 무너져 간다.

언제나 내게 따뜻한 미소를 지어주던 그가 멀어져 간다.

“...솔직히, 당신을 이해할 수 없어. 왜 성민이인 거야? 나는 성아에게 위로받은 기억 때문에 이렇게 돼버렸다 해도, 당신은 왜?”

“.....그, 그게... 여, 여보...”

“당신의 욕망을 해결해서 예전 모습으로 되돌리면... 다시 모든 게 돌아올 줄 알았어. 내가... 내가 그리워하는 건, 예전의 당신이니까. 성아가 연기했던 당신의 예전 모습이니까.”

“.....”

“그런데 이젠 모르겠어.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다시 남편을...

“당분간 떨어져 있자.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해.”

“흐으...흐어... 여보...미안해. 나 때문에...”

“됐어. 울지마. 울어봤자 해결되는 건 없어.”

너무나도 낯선 그이의 모습.

침대에서 나와 옷을 챙겨입는 남편.

그이가 바지를 입고는 말했다.

“솔직히... 너무 화가 나. 대체 언제까지 이럴 거야? 나는 어떻게든 원래대로 돌아가고 싶어서 당신에게 모든 걸 맞춰주는데”

“.....”

“이젠 너무 지쳐. 당신을 받아주는 것도 한계가 있어. 씨발, 미스터 최에게 아직 미련이 남은 거라면, 그 새끼를 조지는 걸 보여줘서라도 어떻게든 하겠는데, 성민이라고? 대체 왜 성민이인 거야? 대체 왜!”

처음이었다.

그가 나에게 고함을 지른 것은.

독기가 오른 남편의 표정이 너무 낯설다.

“적당히 좀 해. 다 받아줬잖아. 그냥 다 묻기로 했잖아. 당신이 우리 가족에게 한 짓거리들, 모두 묻기로...”

뒷말을 흐리는 남편.

그러다 근처에 있는 물건을 땅바닥에 내팽개치는 남편.

“씨발! 개 좆같은! 왜! 왜 당신은 끝까지!”

...실수였다.

끝까지 숨겼어야 했다.

남편에게 말하지 말았어야 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하아...하아... 당신... 당신 같은 여자를 뭐라고 부르는지 알아? 씨발, 당신 같은 여자를...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부르는지!”

가슴이...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그 온순하고 선했던 남편이 이렇게 분노하는 모습을 보니,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너무 괴로워 숨을 쉬기도 힘들었다.

“당신 같은...그런...”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는 남편.

이윽고 남편은 상의를 걸치며 내게 말했다.

“나중에 연락할게. 그전까진 연락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찾아오지도 말고.”

“흐으으으...여, 여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내가 다 잘못했어. 미안해!”

“갈게.”

“여보!”

안 된다.

이대로 그이를 보면, 모든 게 무너질 것 같았다.

난 침대를 박차고 나와 그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응? 한 번만 다시 생각해줘 한 번만...”

두 손을 싹싹 빌었다.

비굴하게 남편에게 매달려 빌고 또 빌었다.

-삭. 삭. 삭. 삭.

“내가 더 잘할게! 당신이 시키는 건 뭐든 다 할게! 난 당신뿐이야. 나 당신이 없으면 안돼...”

남편의 다리를 붙잡았다.

어린아이처럼 꼴사납게 눈물범벅이 되어도, 콧물이 줄줄 흘러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된다.

“...놔.”

하지만.

하지만 이미 남편의 마음은 떠나버렸다.

한 번도 보인 적 없는 싸늘한 표정을 보일 뿐이었다.

이제 내가 알던 그이는... 더 이상 없는 것이다.

“.....”

스르르...손에 힘이 풀렸다.

그이를 붙잡고 있던 내 마지막 힘이 다했다.

손이 저항없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내 사랑이 그대로 등을 돌렸다.

-뚜벅...뚜벅...뚜벅...

그리고, 그대로 문을 향해 나아갔다.

이 공허한 방에 나를 홀로 남겨둔 채, 출구를 향해 나아간다.

-벌컥.

신을 신고, 문을 연다.

난 흐릿하게 번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이윽고 쿵! 소리가 들리며, 문이 닫힌다.

나는 추레한 나체로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이가 스스로 열고 떠난 현관문을 바라보기만 한다.

“....미안해...”

그렇게, 절대 변하지 않을 것 같던 그가 떠나버렸다.

이후, 그이는 한 달이 지나도록 내게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

***

“주인님. 문제가 생긴 것 같습니다.”

정현재가 떠난 다음 날.

정성민은 자신의 부하에게 정현재가 이신아를 홀로 남겨두고 모텔을 떠났다는 보고를 듣게 된다.

정성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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