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7화 (277/303)

생각해보니 그녀를 제외한 모든 노예가 자신의 ‘여자’로서 승격했고, 차례차례 결혼을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아무래도 자신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지대한 공을 세운 그녀들인 만큼, 거기에 대한 포상을 내려줄 필요가 있었고, 이제는 진심으로 그녀들을 사랑하게 되었기에 정성민은 그들을 하나하나 품어주고 있었다.

마땅히 누려야 할 대우를 해주기로 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하영에겐 그러지 않았다.

아니, 도저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정성민은 결심을 굳힌 듯한 표정의 이하영을 보며 말했다.

“너라면... 어머니를 믿고 맡겨도 되겠지. 그래도 경호원은 필요해.”

“경호원이라면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이미 제가 뽑은 경호원이 있거든요.”

정성민은 그 경호원이 누군지 물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하영이 가진 요원 중 최강의 무력을 자랑하는 요원이었다.

자신의 특수부대 대원과 맞먹을 정도로 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는 자이니, 믿고 맡길만 했다.

“그래도, 경호원 하나보단 둘이 낫지 않겠나. 내 경호원을 하나 빌려줄 테니ㅡ”

“주인님.”

그때, 자신의 말을 끊는 이하영.

그녀가 말했다.

“주기적으로 연락드릴게요. 감시역을 붙이지 않으셨으면 해요.”

“.....”

자신의 의도를 콕 집어서 말하는 이하영.

정성민이 입꼬리를 올리며 답했다.

“혹시라도 피치 못할 상황이 발생하면 내 도움이 필요할 텐데. 정말 괜찮나?”

“네. 자신을 돌아보고 싶어 떠나는 여행이니까요. 오롯이 우리끼리 떠나는 여행이 되고 싶어요. 주인님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

정성민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단호한 모습을 보이는데 더 말해봐야 뭐하겠는가.

애초에 자신이 이하영을 차등대우하면서 벌어진 일이고, 거기에 대한 해결책으로 택한 여행이니, 더 이상 자신이 끼어들 명분은 없었다.

“어머니를 잘 부탁하지.”

하여 정성민은 이하영에게 모든 것을 맡기기로 했다.

일처리 하나만큼은 똑 부러지게 하는 그녀인 만큼, 철저히 계획대로, 그리고 최대한 안전하게 여행을 다녀올 터였다.

“조심히 다녀와. 돌아오고 싶으면 언제든지 돌아오고.”

“엄마. 나 엄마 밥 아니면 잘 못 먹는 거 알지? 빨리 와야 해?”

그렇게 이신아&이하영의 여행이 결정되자, 정현재와 정성아는 이신아와 작별 인사를 나누기 시작했다.

특히 정성아는 한참이나 이신아의 손을 잡은 채 울먹이는 표정으로 보았다.

이에 이신아는 그녀를 꼭 안아주며 빨리 돌아올 테니 걱정말라고 답했다.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 오는 먼 곳을 떠나야 하는 만큼 이신아의 눈에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아무리 ‘민세라’의 잔재가 남아 있다곤 해도 기본적으로 가족에 대한 애착과 사랑이 기본으로 깔려있는 그녀였다.

그렇게 2주가 지났다.

-위이이이잉-!

정성민은 떠나는 비행기를 바라보았다.

그녀들이 떠나기 전, ‘비행기 사고가 날 확률’에 대해 논문을 써도 될 만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그였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았다.

담담히 그녀들을 보내줄 뿐이었다.

‘내 할 일이나 하자.’

왜냐하면, 그에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많았다.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한두 명이 아니었다

이제 곧 이희연은 출산을 앞두고 있고, 엘레나는 돌잔치를 열어야 하며, 안지연과도 빨리 결혼식을 올려야 한다.

심지어 백하윤 마저 임신하는 바람에 그녀와도 결혼을 준비해야 하지 않은가.

설마 tv로나 보던 대한민국 최고의 스타를 자신이 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존나 바쁘다.’

그러니 정성민에겐 걱정할 시간 따윈 없었다.

그저 그녀들이 무사히 돌아오리란 것을 믿고,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야 할 뿐이다.

그는 앞으로 걸어갔다.

***

그녀들이 여행을 떠난 지 두 달이 지났다.

둘은 걱정과는 다르게 일본, 중국을 아주 신나게 돌아다녔고, 진정으로 여행을 즐겼다.

사색이나 자기반성의 시간보다는 힐링의 시간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로 둘은 죽마고우처럼 잘 지냈고, 여행의 만족도도 높았다.

정말 즐거운 시간이었다.

‘흐어어어어엉...주인님....’

허나 그런 해피타임도 딱 2개월까지였다.

딱 2개월이 지나자, 이하영은 벌써부터 정성민을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인스타에 올라오는 ‘동기’들의 행복한 사진을 보며 눈물을 주르륵 흘리는 그녀였다.

‘주인니이이이이이이임!!!!!!!!!!!!! 보고 싶어욧!!!!!!!!!!!!!!!!!!!’

허나 그녀의 여행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었다.

EP.279 (외전) 이별

이하영이 여행을 떠난 지 2달.

이제 겨우 2달 지났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위기가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다.

이제 겨우 60일하고도 4일 13시간이 지났을 뿐인데, 자꾸만 정성민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한숨을 내쉬고, 심장 근처가 쿡쿡 쑤셔오는 그녀였다.

‘하지만, 참아야 돼.’

하지만 물러설 곳은 없었다.

당장 주인님이 보고 싶다고 하여 한국에 돌아가봤자,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 다.

십중팔구 지금 돌아가면 주인님과 ‘미래’를 함께하는 동기들을 바라보며 괴로워할 게 뻔했다.

결국 이 상황을 타개하려면 자신이 바뀌거나, 아니면 주인님이 바뀌어야 한다.

지금 돌아가면 그런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을 것이다.

“하아...”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이하영.

참, 깨어진 신뢰를 회복하는 것은 이토록 어려웠다.

그저 미소 한번 지어줬으면, 머리 한번 쓰다듬어줬으면, 따스한 눈길이라도 보내줬으면, 이렇게 타지로 나도는 일은 없었을 것을, 그 어떠한 성과를 세워도 주인님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단 한 번 미소를 지어준 적도 없었다.

‘오히려 그때 이후에 더 심해졌지.’

그때.

그러니까, 주인님 몰래 계획을 세워 어머님을 구출한 그때.

이하영은 그날, 자신과 주인님이 진심으로 통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자신은 주인님의 이름을 부르고, 주인님은 자신의 품에 안겨 눈물을 흘리고.

그래서 다시 예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오히려 그날 이후 주인님은 자신을 피하게 되었고, 잘 찾아오지도 않게 되었다.

향락소에 혁신을 일으켜 상납금을 올려도, 양지로 진출하는 사업을 성공적으로 런칭해도 ‘일적’으로만 칭찬을 해줄 뿐, 인간적인 따스한 칭찬은 전혀 해주지 않았다.

눈길 한번 준 적이 없으며, 자신이 찾아가도 바쁘다는 핑계로 물리기 바빴다.

도대체 왜 그렇게 돼버린 걸까.

왜 주인님은, 자신을 멀리하게 돼버린 걸까.

그때 참 좋았었는데.

나는 주인님을 이름으로 부르고, 주인님은 나를 다시 다정하게 불러줄 줄 알았는데.

“생각이 많아 보이네.”

그때, 근처에서 들리는 매혹적인 여자의 목소리.

이하영은 목소리의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청바지에 흰 티를 입은 채 이곳으로 걸어오고 있는 이신아가 보였다.

“어머님.”

여전히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

30대 초반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동안에, 볼륨있는 몸매. 농밀함이 베인 분위기.

“성민이 생각하고 있니?”

이하영은 그런 이신아의 모습을 보았다.

주인님의 성적인 매력이 눈앞의 여자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과연 모자는 닮았다고 할 만했다.

둘은 각자의 성별에 맞게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뭐... 그렇죠. 어머님은 가족이 그립지 않으세요?”

“후후. 왜? 돌아가고 싶니?”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

솔직히 수시로 그런 충동에 휩싸이긴 하지만, 진심이 된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이하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뇨. 계획대로 움직일 거에요. 무려 1년짜리 계획이잖아요. 적어도 1년은 채울 거예요.”

“응. 아직 마음이 굳건한가 보네.”

“...어머님은 좀 어때요? 가정이 그립진 않으세요?”

“후후. 당연히 그립지. 사실 조금 후회 중이야.”

“...저랑 같네요. 그래도 계속 여행하실 거죠?”

“응. 아직 그 ‘욕망’이 잠잠해지지 않았으니까. 좀 더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원인을 알고 싶어. 왜 자꾸 이런 욕망이 생기는지.”

자신의 욕망에 대해 탐구하고 싶다는 그녀.

이하영이 말했다.

“우리, 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욕망’에 대한 답이요.”

“글쎄. 만약 깨닫지 못하더라도, 얻는 게 많은 여행이 될 거야. 경험이 곧 사람을 만들잖니. 그동안은 너무...끔찍한 경험을 했고, 끔찍한 일을 저질렀으니, 이렇게 자기 수양을 하다 보면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

“... 그랬으면 좋겠네요. 저도 해답을 얻었으면.”

해답.

이신아는 자신의 불안정한 욕망을 컨트롤 할 수 있는 해답을 찾길 원했고, 이하영은 정성민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답을 원했다.

둘은 그 답을 찾기 위한 긴 여정을 시작했다.

***

1년.

이하영과 이신아가 여행을 한 지 벌써 1년이 되었다.

그동안 둘은 수많은 나라를 돌아다니며, 아주 많은 경험을 해보았다.

세계 곳곳의 명지, 관광소, 유적지를 탐험해보았으며, 때로는 험지 여행도 하곤 했다.

열대우림부터 사막까지 가지 않은 곳이 없었고,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봤었다.

“와아...”

그리고 그중 최고는 단연 북극의 오로라였다.

밤하늘에 쏟아진 황록색의 향연에 그들은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맘껏 만끽할 수 있었다.

과연, 여행의 마지막을 장식하기에 이만한 풍경은 또 없을 것이다.

“아름답네요.”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눈물을 머금고 있는 이하영.

이신아 또한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응. 아름답네.”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빛.

이하영과 이신아는 그 풍경을 바라보며 자신의 마음을 투영해보았다.

인생을 돌아보며, 자신을 돌아본 뒤, 순수한 욕망을 들여다보았다.

그 욕망을 대해야 할 자신의 마음가짐, 태도를 생각해보았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이 자신을 위한 것인지 생각해보았다.

-사락.

그들은 마지막 투어를 마친 뒤, 숙소로 돌아와 일기를 적었다.

그들은 물리적 세계만 탐험한 것뿐만 아니라 마음의 세계도 탐험했기에, 일기장은 이정표 같은 것이었다.

그 날, 그 순간에 남긴 마음의 사진 같은 것이었다.

하루도 빠짐없이 적은 일기는 마음의 양식이 되었고, 진정한 자신을 이해하게 해주었다.

처음에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립고, 가족이 그리워 너무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게 많은 여행이었다.

이제 그녀들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

일주일 뒤, 이하영과 이신아는 마침내 귀국했다.

꼬박 1년 동안 그들을 기다렸던 정성민과 일행들은 공항에서 대기 중이었고, 오랜만에 보는 그들을 맞이해주었다.

“.....”

다만, 1년 만에 서로의 얼굴을 보는 모자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미소를 머금은 채 눈빛으로만 인사를 할 뿐이었다.

“어머님. 돌아오신 걸 환영해요. 혹시 손주를 보고 싶으진 않으셨어요?”

그때, 출산 이후 몸관리까지 완벽하게 된 이희연이 싱긋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자신의 폰 안에 있는 ‘아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식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어머님~ 우리 아들도 엄청 예뻐요.”

그리고 이에 질세라, 아들을 출산한 안지연 또한 이신아의 옆에 붙어 자신의 아들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엘레나 또한 돌잔치를 한 정예린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제 막 말을 트기 시작했다고, 천재가 아닐지도 모른다며 딸 자랑을 해댔다.

“.....”

다만, 그 모든 호들갑을 미소로 받아주는 이신아.

그녀는 손주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정말 사랑스러운 아이들이었다.

그리고 그사이, 정성민은 이하영을 보았다.

그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이하영에게 말했다.

“이하영. 잘 왔다. 네가 없는 동안 매출이 많이 떨어졌더군. 역시 네가 있어야 향락소든, 양지사업이든 돌아갈 수 있는 모양이다.”

정성민은 그렇게 말하며 이하영에게 USB를 건네줬다.

이하영이 USB를 받자, 정성민이 그것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난 1년간의 사업 진행 요약본이다. 똑똑한 너라면 금방 핵심을 파악할 수 있겠지. 예전의 지위도, 자리도. 그대로 남겨뒀다. 바로 복귀할 수 있으니까, 일주일만 쉬고ㅡ”

“주인님.”

그때, 담담한 표정으로 정성민의 말을 끊는 이하영.

그녀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정성민에게 말했다.

“사실 복귀에 대해 말씀드릴 게 있어서요. 잠시 시간 내주실 수 있으세요?”

“.....여기선 할 수 없는 얘긴가?”

“...네. 개인적인 얘기이기도 하고, 중요한 얘기이기도 해서요.”

의미심장한 이하영이 말에 정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이하영에게 오늘 밤 9시에 시간을 비워둘 테니 자신의 개인 집무실로 오라고 말했다.

이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드디어 그리웠던 집으로 돌아온 이신아는 손주들을 먼저 보았다.

출산한 순서대로 엘레나, 이희연, 안지연의 아들,딸과 놀아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마지막으로 백하윤의 방도 들렀다.

백하윤 또한 최근 딸을 출산했는데, 출산 후유증이 심해 몸조리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이신아는 몸이 아픈 백하윤을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정성민을 보며 은은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제법 그의 뒷모습에서 가장의 모습이 보였다.

마치 젊은 시절의 정현재를 보는 듯했다.

“아. 벌써 시간이 됐네.”

그런 와중에 정성민이 손목 시계를 확인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는 이하영과 나눌 이야기가 있다며, 잠시만 자리를 비우겠다고 집무실로 향했다.

그렇게 그가 자리를 비우자, 이신아는 손주들과 노느라 정신이 없는 남편에게 다가갔다.

그리곤 뒤에서 남편을 끌어안으며, 그동안 하고 싶었던 말을 해주었다.

“사랑해. 보고 싶었어.”

“.....”

먹먹한 표정이 된 정현재.

한평생 일편단심 이신아만 보고 살아온 남편.

그는 자신을 안은 이신아의 손을 잡았다.

그리곤 몸을 돌려, 이신아의 얼굴을 정면으로 보았다.

그녀를 원했던 만큼, 꼭 끌어 안아주었다.

“나도 보고 싶었어.”

서로를 끌어안은 부부.

그리웠던 이의 체온을 느끼며 재회의 순간을 만끽하는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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