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으으으으윽!!!”
이번에도 승기는 순식간에 정성민 쪽으로 기울였다.
정성민의 ‘반사신경’은 거의 전문 운동선수라 봐도 정도로 무척 뛰어났기 때문이다.
때문에 먼저 힘을 줘서 팔을 안쪽으로 끌어당긴 것은 정성민이었고, 팔이 조금 더 안쪽으로 굽은 정성민이 이 싸움에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철주먹의 힘이 아무리 강하다곤 하나, 힘과 기술을 모두 최상급으로 갖추고 있는 정성민을 이길 순 없었다.
-쿵!
그렇게 패배한 철주먹.
그는 곧바로 자신의 패배를 승복한 뒤, 나머지 팔로도 경기할 것을 요청했다.
하지만 결과가 뒤바뀌는 일은 없었다.
“..... 인정하지. 당신은 진짜배기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힘, 기술, 스피드. 모든 면에서 정성민이 우위를 보였다.
이는 마피아의 최고 싸움꾼이라 불리는 ‘흡혈귀’가 와도 뒤바뀌지 않을 결과였다.
애초에 ‘흡혈귀’와 ‘철주먹’의 서열은 그 구분이 의미 없을 정도로 호각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반성하게 되는군. 좋은 자극이었소. 큭큭큭.”
그렇게 충격적인 결과를 뒤로 한 채 퇴장하는 철주먹.
그리고 이 모든 광경을 보며 주먹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석유회사의 간부들.
이윽고 테이블은 정리되었다.
‘신고식’을 성공적으로 치른 정성민은 다시 자신의 테이블로 돌아올 수 있었다.
정성민의 테이블에 있는 석유회사 간부들은 침울한 표정으로 술을 홀짝이고 있었다.
“제가 작은 선물을 준비했는데, 한번 보시겠습니까?”
다만, 정성민은 침울해하고 있는 석유회사 간부들에게 오히려 손을 내밀었다.
이희연과 이하영의 조언에 힘입어, 그들을 포섭하려는 정치적인 술수였다.
“이, 이건!”
“오오!”
“한정판으로 구한 겁니다.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군요.”
정성민은 시계를 모으는 취미를 공유하고 있는 석유회사 간부들에게 스위스제 최고급 한정판 시계를 선물해주었다.
돈으로도 쉽게 구할 수 없는 귀중한 매물들이기에, 석유회사 간부들의 표정은 밝아질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거기에 더해 정성민은, 석유회사 간부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을 선물로 주었다.
북한의 김정은과 미국의 여러 유명 CEO들도 인정하고 애용하고 있는 스위스 은행의 비밀루트를 그들에게 공유해준 것이다.
“이, 이건....”
“저, 정말 저희도 쓸 수 있는 겁니까?”
“예. 자금출처 세탁부터 달러전환까지. 그곳의 회계사들이 모두 관리해줄 겁니다. 루트는 제 이름을 대면 뚫을 수 있을 겁니다.”
“오오오오오오!!!!!!”
격렬하게 정성민의 선물을 환영하는 석유회사 간부들.
이제 한배를 탄 것이나 다름없어진 그들은, 곧바로 태세전환을 해 정성민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아까의 시기 질투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크하하하하! 역시 사내 중의 사내가 아닙니까!”
“형님이라 불러도 괜찮습니까?”
“나보다 술 잘 마시고 힘세면 이미 형님아닙니까! 크큭.”
“처음에는 엘레나님이 아깝다고 생각했는데,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거 같군요. 하하하하!”
마피아의 전신인 석유회사 지분을 대량 보유하고 있는 이들.
이들을 포섭하는 것이 곧 마피아를 지배하는 지름길이기에, 정성민의 이 한 수는 향후 마피아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초석이 되었다.
그는 입꼬리를 올리며 보드카를 홀짝였다.
역시 ‘약’을 복용하길 잘했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
한편, 이 모든 소란 속에 홀로 술을 홀짝이는 여자가 있었다.
이제 떠날 준비를 모두 마친 이하영이었다.
‘때가 됐어...’
행복해 보이는 엘레나의 얼굴, 성대하게 열린 결혼식.
그녀는 이 모든 광경을 보며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정말로 떠날 때가 왔다는 것을.
이 이상 ‘동기’들의 행복을 바라보는 것은, 자신의 마음을 좀먹고 다치게 할 뿐이라는 것을, 그녀는 깨달을 수 있었다.
“하영아.”
그때, 의외의 인물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은 이신아였다.
-....꿀꺽.
너무나 아름다운 이신아의 모습.
문득 지금의 모습을 보자, ‘민세라’가 되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다.
민세라 또한 레드립을 한 채 화려하게 옷을 차려입는 걸 즐기지 않았던가.
그녀 특유의 고혹적인 미소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곧 떠날 거라는 소문을 들었어.”
그때, 어디서 들었는지 자신이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하는 이신아.
그녀는 순간 씁쓸한 미소를 짓고는, 이하영을 보며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듣는 이하영의 표정이 멍-해졌다.
“괜찮다면 나도 같이 합류할 수 있을까? 나도 떠나고 싶어.”
EP.278 (외전) 여행
이하영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드디어 가족의 품으로 돌아와 안정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는 어머님이, 갑자기 떠나고 말하고 싶다고 하니 믿어지지 않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닐까 생각될 정도였다.
“떠나고... 싶으시다구요?”
“응.”
허나, 다시 한번 확인해봐도 그녀의 답은 같았다.
분명 떠나고 싶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요. 너무 갑작스러워서.”
이유를 묻는 이하영의 말에 이신아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니 결심을 한 듯한 눈을 하곤 답했다.
“예전의 내가 아니기 때문이야.”
예전의 내가 아니다.
고심 끝에 내린 이신아의 답이었지만, 여전히 이하영에겐 수수께끼 같은 말이었다.
“예전의...어머님이 아니라구요?”
“응. 변해버린 내가 괴로워.”
변해버린 자신이 괴롭다...
그 말은 즉, 현재의 자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인데.
이하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곤 답했다.
“...자리를 옮기죠. 민감한 얘기가 될 거 같으니.”
“그래.”
두 여자는 인적이 드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식료품이 보관되어있는 어떤 창고 같은 곳이었다.
이하영이 말했다.
“...어머님. 아까... 자신이 괴롭다고 하셨는데, 무슨 뜻이에요?”
엿들을 사람이 없자 곧장 본론을 꺼내는 이하영.
이신아가 자신의 손을 매만지며 답했다.
“말 그대로야. 오로지 내 가족만을 생각하던, 그때의 내가 아니란 뜻이야. 난 변해버렸고, 다시는 예전의 그때로 돌아갈 수가 없어. 그래서 괴로워.”
변해버린 자신이 괴로운 이신아.
그렇다면 어떻게 변했길래 떠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것일까.
이하영이 물었다.
“.....어떻게 변했다는 말이죠?”
이하영의 요청에 이신아는 자신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내 안의 여성성이 미쳐 날뛰는 기분이야. 시도 때도 없이 욕망이 올라와서, 참기가 힘들어. 내 여성성을 자꾸만 시험하고 싶어져.”
“.....”
충격받은 표정의 이하영.
그도 그럴 게, 이신아의 발언은 위험한 발언이었다.
지금 그녀의 발언은, 자신의 여성성을 폭발적으로 싹틔운 ‘민세라’의 욕망이 올라오고 있다는 발언 아닌가.
시도 때도 없이 남자를 유혹하고, 가지고 놀고, 제멋대로 부려먹던.
여성성의 극한을 끌어올려 미쳐 날뛰던 민세라의 모습과 같지 않은가.
“어머님... 혹시 아직도 미스터 최를...?”
하여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미스터 최에 대한 애착이었다.
민세라로서의 욕구가 끓어오르면, 자연스레 미스터 최를 떠올리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아니. 이제 그런 패배자에겐 관심 없어. 그를 사랑했던 기억이 치욕스러워.”
마치 혐오스러운 기억이라는 듯 표정을 와락 구기는 이신아.
이하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미스터 최와는 상관없이 민세라로서의 욕구가 올라온다는 말이네. 그 인격은 완전히 사라진 줄 알았는데...’
끝내 가정의 품으로 돌아올 수 없어 자살 시도까지 했던 이신아.
때문에 완전히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온 줄 알고 있었다.
가정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속에 몸담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니.
“언제부터 그런 거예요?”
“...꽤 오래됐어. 그래서 다시 예전으로 돌아오려고, 이 욕망을 억누르려 노력하고 또 노력했는데, 이젠 너무 힘들어.”
자신의 여성성을 잠재우기 힘들다고 답하는 이신아.
이하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면... 그 욕망이라는 게, 어떤 욕망이죠? 억누르고 있다는 욕망이.”
“.....자꾸... 나를 치장하고 싶어져. 그로 인해 불가능한 사랑을 이루고 싶고, 금기를 깨트리고 싶어져.”
“.....”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는 이하영.
불가능한 사랑을 이루고 싶다.
금기를 깨트리고 싶다.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설마...”
“그래. 만약 그런 행동을 저지르면, 겨우 되찾았던 가정에 혼란이 올 거야.”
“.....”
이하영은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이신이의 욕망이란 주인님을 유혹하고 싶다는 욕망일 터였다.
확실히 예전의 어머님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미친 짓이었다.
‘하지만...지금은 상관없지 않나?’
다만,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이미 주인님의 가족은 정상이 아니다.
아닌 게 아니라, 어머님과 주인님은 이미 몸을 섞은 적이 있고, 아버님과 성아도 숱하게 섹스를 해오지 않았던가.
거기에 더해 아버님은 예전과는 달리 과격한 남성성을 보이기도 하고, 주인님과 성아는 공공연하게 연인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미친 가족에게 불가능이랄 게 있을까.
다만 이신아의 생각은 그게 아닌 듯했다.
“민세라로서 내가 했던 짓... 분명 끔찍한 짓들이야. 만약 내가 그런 모습을 다시 보였다간, 겨우 되찾은 가정에 불화가 올 게 분명해. 우리 가족이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예전의 나’니까. 계속 그 모습을 보여줘야 해.”
현재의 욕망을 억누르지 못하면 가정이 붕괴될까 걱정이 된다는 이신아.
그녀가 이어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 좀 떠나있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 이 욕망이 잠잠해질 때까지... 다시 원래의 내가 될 수 있을 때까지... 잠시 떠나있으려고.”
“...그렇군요.”
이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가족에게는 말하지 못할 고민거리이긴 했다.
멀리서 보았을 땐 행복해 보여도, 실상은 각자 자신만의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법이었다.
“근데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저, 꽤 오랫동안 떠나있을 생각인데.”
“응. 괜찮아. 사실, 제대로 여행해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정현재를 택하며 재벌가에서 쫓겨 난 뒤, 의도치 않게 임신하게 되어 그 뒤로 쭉 주부로 지낸 이신아.
가정을 챙기기 바빴던 그녀는 제대로 된 여행 한번 해본 적이 없었다.
모든 걸 가정을 위해 희생하고, 모든 행동에는 ‘가정을 위한다’라는 전제가 깔려있었다.
그녀는 오직 남편과 자식들을 위한 인생을 살아왔고, 그 안에 자신의 삶은 없었다.
“솔직히... 재밌을 거 같긴 해. 한 번쯤은 가정에서 자유롭게 벗어나고 싶어.”
이신아의 솔직한 고백을 들은 이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출국 예정 일자와 여행루트를 이신아에게 대강 설명해준 뒤, 일정에 맞출 수 있겠냐고 물었다.
이신아가 답했다.
“그럼, 물론이지. 언제든지 맞출 수 있어.”
“...오래전부터 준비를 해오셨나 보네요.”
“응.”
“...가족에게는 어떻게 얘길 꺼내려구요? 많이 당황할 거 같은데.”
“사실 그이에게는 이미 말해뒀어.”
“아버님한테요? 그, 어머님의 욕망도 전부?”
“후후. 아니. 아무리 날 이해하고 지지해주는 남편이라 해도... 내 욕망엔 상처를 받을 거 같아서. 더군다나 ‘남자’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그이에게, 아들이 남자로 보인다고 말하면, 그이가 상처받을 게 뻔하지 않니. 그래서 여행을 떠난다고만 말해뒀어.”
“...받아들이시던가요?”
“응. 사실, 과거에도 자주 말하곤 했었거든. 아이들이 독립하면 여행을 떠나고 싶다고. ”
이하영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의 지지가 있다면 큰 트러블 없이 떠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내 계획은 조금 틀어지겠네.’
다만 이하영에게 걱정거리가 있다면, 온전히 자신에 대한 상실감을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계획이 틀어져 버린다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의 공백 따위는 느낄 틈이 없지 않을까.
한낱 노예인 자신보다, 어머님이 차지하는 존재감이 훨씬 클 테니 말이다.
‘그래도... 어쩔 수 없지. 주인님을 위해서라면’
다만, 이번 여행은 자기반성의 시간이자 사색의 목적도 있었다.
이하영은 끝내 주인님에게 선택받지 못하는 경우까지 대비할 필요가 있었다.
어쩌면 긴 여행 끝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 자신의 자리가 없을 수도 있는 데다, 끝내 주인님께서 자신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지 않은가.
현재의 자신은 그 절망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주인님에게 버려진 슬픔을 감당할 자신 또한 없었다.
때문에 이번 여행은, 내면을 좀 더 단단히 하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다.
이하영 또한 자신을 돌아보고 내면을 좀 더 단단히 하고 싶었다.
“좋아요. 같이 떠나요. 혼자보다는 둘이 더 재밌을 거 같네요.”
이하영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웃었다.
***
3일 뒤, 이신아는 가족을 불러모아 자신의 여행 계획에 대해 얘기를 꺼냈다.
정성민과 정성아는 갑작스러운 그녀의 선언에 다소 당황했으나, 정현재의 도움으로 이내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신들을 키우느라 가지 못했던 여행을 이제야 비로소 떠나게 되었다고 설득을 하니, 그녀의 여행을 만류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도 경호원은 데리고 가. 혼자 하는 여행은 위험해.”
다만, 정성민은 감시역을 붙일 겸 자신의 경호원을 붙여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신아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같이 가는 사람이 있어. 하영아.”
이하영.
그녀의 이름을 부르자, 방문을 열고 걸어들어오는 그녀.
정성민은 전혀 의외의 동반자에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하영과 함께 떠난다니.
그리고 이하영은 왜 떠나고 싶어하는 걸까.
‘.....내가 너무 무심했었나.’
다만, 정성민은 곧 스스로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