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71화 (271/303)

아마 2개월 뒤면 안지연도 주인님과 결혼할 것이다.

비록 이희연처럼 ‘정부인’이라는 확고한 지위는 가지지 못 하나, 어쨌든 주인님의 부인이 되는 것은 사실이 아닌가.

게다가 얼마 전 출산을 한 엘레나도 이미 주인님의 ‘부인’으로 내정되어 있지 않던가.

차도연을 제외하면 가장 늦게 주인님의 전용 노예로 합류한 막내가, 자신을 앞지르고 부인이 되는 것이다!

그것도 이미 아이를 출산한 상태이고! 또 가장 어리다!

몸이 안정되면 곧 러시아에서 성대한 결혼식이 열린다고 하던데!

“으아아아아아아아아!!!!!!!”

-쿵! 쿵! 쿵! 쿵!

뒤처지고 있다.

계속해서, 뒤처지고 있다.

최근 주인님과 하윤 언니의 기류도 심상치 않던데.

하윤 언니가 있는 제2향락소에 주인님이 직접 들리기도 하고, 하윤 언니가 주인님을 먼저 찾아가기도 하고.

들리는 말로는 둘이 제대로 눈이 맞았다고 하던데.

“나도오ㅡ!”

주인님과 몸을 섞지 못한지 벌써 한 달째.

정말 이대로는 안 된다.

뭔가 아주 강렬한...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한다.

이하영은 까득-까득-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방법을 고민했다.

“아!”

그러던 중 떠오른 계략.

일명 ‘어머님 카피’ 작전.

“마, 만약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면?”

만약 자신이 갑자기 사라지면, 주인님은 어떻게 반응하실까.

어머님에게 그토록 가혹했던 주인님도, 막상 어머니의 부고 소식을 접하자 그대로 무너져버리지 않았던가.

아무리 뒷세계의 제왕이 되며 인격이 마모된 그라고 하지만, 그 내면 깊숙한 곳엔 원래의 인격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무나도 선하고 다정했던, 과거의 정성민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선한 인격을 ‘상실감’이라는 키워드로 다시 끄집어낼 수 있다면?

그 다정하고 온화한 마음을 자신에게 향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후후후후...”

이하영은 미소를 지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달만.

딱 한 달만 주인님의 시야에서 사라져보자.

자신이 추진하던 사업과 주인님께서 맡긴 일을 완벽하게 처리해놓고, 후속 조치는 자신의 오른팔에게 인수인계를 하고 떠나는 것이다.

그렇게 한 달간 사라져 있다 돌아오면 분명 주인님께서ㅡ

-네가 그리웠어. 당장 보지 벌려.

그리웠던 나를 품어주시지 않을까.

아무래도 한 달간이나 소식이 없으면 걱정을 하시지 않을까.

이하영은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큭큭큭큭... 두고 봐. 슬로우 스타터 이하영이 간다.”

아직 늦지 않았다.

어찌 됐든 주인님께서 한 번만 마음을 열어주면, 그 뒤는 잘 풀어갈 자신이 있었다.

결렬한 사랑의 섹스를 나누는 것부터, 그분의 아이를 품는 것까지.

모두 일사천리로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크하하하하하하ㅡ!”

이하영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

뒷세계의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정성민의 하루 루틴은 일정했다.

항상 새벽 5시에 눈을 뜨는 그는, 매일 10km 거리를 조깅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헉... 헉... 헉... 헉... 헉...”

명실상부 뒷세계의 제왕이 된 그가 이렇게 몸을 단련하는 이유.

사실 딱히 이유라 할 만한 것은 없었고, 그저 습관이 되었을 뿐이었다.

하루라도 새벽의 공기를 마시지 않으면, 해가 떠오르며 새벽을 몰아내는 장관을 보지 않으면, 제대로 된 하루를 보낼 수 없는 그였다.

조금이라도 몸을 게을리하면 미스터 최를 이길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강박이, 여전히 그에게 뿌리내려 몸을 채찍질하도록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었다.

“안 힘들어?”

그러나, 그런 그의 일상에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잠꾸러기인 정성아가 자신을 따라 새벽 운동을 하러 온 것이다.

“아우. 죽을 거 같애. 이 먼 거리를 어떻게 다 뛰어가?”

“뭐, 뛰다 보면 금방 가. 넌 아이돌 한다는 애가 왜 이렇게 체력이 약하냐”

“아니, 춤추는 거랑 이거랑은 다르지. 아무것도 모르면서.”

오랜만에 티격태격하는 두 남매.

정성민은 입꼬리를 올리곤 다시 뛰어가기 시작했다.

쉴 틈을 주지 않고 성아를 굴리려는 그의 계략이었다.

“벌써 뛰어? 갔다 와ㅡ! 여기서 쉬고 있을 게!”

허나, 호락호락 당해주지 않는 정성아.

그녀는 능글맞게 웃으며 앞서가는 정성민에게 손을 흔들었다.

정성민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리더니, 정성아를 뒤에 남겨두고 뛰어가기 시작했다.

“이씨. 가란다고 진짜 가냐!”

그러나, 이내 헥헥 거리며 뒤따라붙는 정성아.

정성민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쉰다며?”

“마, 말이 그렇다는 거지. 숨차니까 말 걸지 마.”

얼마 쉬지도 못하고 뛰는 바람에 숨이 차오른 정성아.

다만 정성민은 그런 그녀를 배려하기보단, 조금씩 속도를 올리며 그녀에게 고통을 줄 뿐이었다.

오랜만에 연인으로서의 모습보다 오빠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그였다.

“야!!”

그러자 버럭 화내며 정성민의 등을 찰싹 때린 그녀.

여동생의 손맛은 생각보다 매웠다.

웬만한 고통엔 반응도 하지 않은 정성민이 등을 문지르며 속도를 늦췄다.

“알았어 인마. 웨이트 했냐? 손이 왜 이렇게 매워.”

“하아... 하아... 그러니까... 좀 맞춰줘. 큰맘 먹고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 따라왔는데... 굴리기만 할 거냐...!”

“큭큭. 알았어.”

이내 뛰는 속도를 늦춰 정성아의 발걸음에 맞춰주는 정성민.

그는 정성아가 뛰기 시작하면 뛰고, 걷기 시작하면 발맞춰 걸어주었다.

그렇게 그들은 목적지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후-아. 개힘드네. 진짜 죽을 것 같다...”

벤치를 발견한 정성아가 그곳에 털썩 주저앉으며 중얼거렸다.

다만 정성민은 피식 웃으며 다시 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며 정성아를 힐끗 쳐다봤다.

그녀가 기겁하며 말했다.

“와. 안 쉬고 바로 돌아가게?”

“쉬면 더 힘들어. 자! 일어서!”

“와. 진심 짜증나려 하고 있어.”

“왜? 내 운동을 방해하는 건 넌데.”

눈을 좁혀 정성민을 노려보는 정성아.

그녀가 한숨을 내쉬며 그에게 말했다.

“바보야. 내가 진짜 운동하러 온 줄 알아?”

그녀의 말에 정성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운동하러 온 게 아니었나?

그래서 마구 굴려주고 있던 건데.

운동되라고.

“데, 데이트... 데이트 좀 하자... 오빤 맨날 바쁘니까.”

우물쭈물 중얼거리듯 말을 꺼내는 정성아.

정성민은 그제야 이해했다는 듯 피식 웃으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애써 태연한 척하고 있는 그녀였지만, 유독 붉게 달아오른 귀는 숨길 수 없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귀여웠다.

“그런 거라면 미리 말을 하지.”

“...대충 눈치채고 있을 줄 알았지. 오빠가 만나는 여자만... 몇 인데.”

“뭐, 그렇긴 한데, 그렇다고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은 없어서. 너도 알겠지만, 좀 비정상적이잖냐.”

“... 그렇긴 하지.”

생각해보면 정성민은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었다.

하영 언니와의 연애는 언니의 배신으로 나락으로 가버렸고, 그 뒤에 맺어진 여자들도 일방적인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시작했을 뿐이었다.

일방적인 그녀들의 구애를 오빠가 받아준 것일 뿐, 뭔가 쌍방으로 이뤄지는 연애는 없었다.

“크흠. 그러면! 내가 알려줄게. 옳게 된 연애가 무엇인지.”

EP.273 (외전) 남매2

“크흠. 그러면! 내가 알려줄게. 옳게 된 연애가 무엇인지.”

하여 정성아는 다짐했다.

진한 연애 한 번 못해본 오빠에게, 달달하고 순수한 연애가 어떤 것인지 제대로 알려주기로.

따지고 보면 이렇게 허물없이 오빠를 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신뿐이지 않은가.

“큭큭큭...”

하지만 정성민은 그런 그녀의 다짐이 우습다는 듯 큭큭거릴 뿐이었다.

정성아가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왜 웃어. 진짜로 알려준다니까. 못 미더워?”

“크큭...아니. 그게 아니고. 우리 사이에 ‘옳게 된 연애’라니 뭔가 웃겨서.”

우리 사이.

오빠와 여동생인 사이.

이복동생도 아니고, 무려 같은 부모를 두고 있는 사이.

하지만 정성아에게 그런 것은 방해물이 아니었다.

“크흠. 그건 그냥... 시대와 장소를 잘못 타고난 거뿐인 거야.”

시대와 장소?

뜬금없이 꺼낸 화두에 정성민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정성아가 설명했다.

“옛날엔 우리 사이도 정상이었잖아. 신라의 귀족들이라던가, 다른 나라의 여러 왕족과 귀족들도 그렇고. 남매끼리 결혼하고 아이를 가지는 건 흔한 일이었는 걸?”

아. 그런 말이었나.

정성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성아가 말했다.

“뭐, 권력을 보존하기 위해 그랬었다고 하지만, 진짜로 사랑해서 이어지는 경우도 꽤 많았어. 현재 유럽의 여러 국가에선 근친혼을 합법으로 할지 논의까지 이뤄지고 있다고.”

“...그러냐.”

그냥 한번 꺼내본 말에 다다다-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정성아.

정성민은 그녀가 남매 근친에 얼마나 진심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 유전병도 몇 세대에 걸쳐서 계속 근친을 하니까 그런 거지, 사실상 1세대쯤은 큰 문제가 안 돼. 아이에도 이상이 없다고.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유전 다양성이 뛰어나서, 1세대 자녀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연구결과에도 나와 있어.”

연구결과까지 근거로 내세우며 근친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정성아.

지금 그녀가 내뱉은 여러 말들은, 정성민에게 진심이었던 어린 시절부터 조사한 지식들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정성민과 함께하는 미래를 꿈꿔왔었고, 한번 포기했었고, 다시 그 꿈을 꾸고 있었다.

그 진심을 느낀 정성민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래 뭐, 잘 알았어. 그리고...”

뒷말을 흐리며 생각을 정리하는 정성민.

이윽고 그가 말했다.

“난 이제 누가 뭐라던 신경 쓰지 않기로 했어. 우리가 사랑하는데 무슨 이유가 필요하냐. 그냥 그런 거니까 그런 거지.”

정성민의 말에 다시 한번 귀가 잔뜩 붉어진 정성아.

그녀는 크흠- 헛기침을 하곤 은근슬쩍 정성민의 손을 잡았다.

정성민이 정성아를 보자 그녀가 말했다.

“가, 갈 땐 손 잡고 가.”

“크큭. 왜 부끄러워해. 알았어.”

둘은 서로의 손을 잡고 나란히 걷기 시작했다.

태양이 떠오르며 새벽의 기운을 몰아내고, 따스한 햇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정성민이 말했다.

“그런데, 아이돌은 계속할 거야? 매일 쪽잠 자가며 스케줄 소화하는 거 힘들다며.”

현재 정점 가도를 달리고 있는 성아가 속한 그룹 아인.

물론 그중에서 가장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것은 메인 비주얼이자 메인 보컬인 성아이기 때문에, 그녀에게 쏟아지는 일을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나마 정성민이 소속사 자체를 사들여 관리하고 있기 때문에 불필요한 일들은 다 쳐내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정성아가 감당해야 할 일이 많았다.

“괜찮아.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데. 나만 편하자고 은퇴하는 건 팬들한테 예의가 아니지.”

다만 정성아에게 이 일은 중요했다.

아주 어린 시절, 정성민이라는 애착을 상실했을 때 그녀의 마음을 위로해주던 게 빛나는 아이돌이 되고 싶다는 꿈이었다.

“그리고... 죗값도 치르고 싶어.”

또한 그녀는 아이돌 활동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으로 ‘품평회’에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보상해주고 있었다.

정성민은 중계만 했을 뿐인 왜 네가 나서냐며 말려보았지만, 정성아는 기어코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며, 피해자들을 찾아가 진심 어린 사죄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일주일 전 남도현의 집에도 들렸던 그녀였다.

이제는 친구 관계가 된 둘은 가끔 만나 이야기를 나누곤 했는데, 그때마다 정성아는 남도현에게 다시 돌아올 마음은 없냐고 물었었다.

만약 다시 돌아올 마음이 들면, 할 수 있는 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진심을 다해 남도현을 설득하는 그녀였다.

하지만 프로듀서로서, 한 여인의 남자로서, 여주인님의 노예로서, 그 모든 관계에서 실패를 맛본 남도현은 다시는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하지 않았다.

남자로서 그가 사랑했던 것은 이미 무너지고 없기에, 무한한 사랑을 받고있는 현재의 삶에 만족하는 그였다.

“.....”

하여 정성아의 표정은 금세 어두워질 수밖에 없었다.

남자로서 사랑했던 것을 모두 상실하여,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니.

한때 그를 사랑했던 그녀로선 너무 가슴 아픈 대답이었다.

“흐아앗!”

그때, 정성민이 침울해하고 있는 정성아의 엉덩이를 주물렀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답했다.

“가, 갑자기 뭐야!”

“표정이 아주 그냥 썩겠다. 좀 펴.”

“파-하.”

어이없는 듯 웃는 정성아.

그러다 그녀가 정성민을 흘겨보며 물었다.

“크흠. 그런데 말이야. 오빠는... 마음의 짐 같은 거 없어?”

그간 ‘복수’라는 미명아래 정성민이 벌인 수많은 악행들.

천성이 마음이 여리고 착한 정성아로서는 정성민이 짊어진 것들이 두려웠다.

혹시 그것들이 비수가 되어 오빠를 노리는 것은 아닐까.

“있지.”

그러나 정성민에게도 마음의 짐은 있었다.

정성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물었다.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

다만, 정성민에게 마음의 짐이란 자신의 악행에 대한 대가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 마음의 짐이란 그의 가족, 그의 노예, 그의 부하, 그가 다스리고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책임감이었다.

“다,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다만 정성아는 궁금했다.

그가 다른 피해자들에겐 관심이 없는지.

“크크큭...”

그때, 등골이 오싹할 정도로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짓는 정성민.

언제 보아도 낯선, ‘그 모습’을 보인 정성민이 성아에게 답했다.

“글쎄. 그건 내 마음이지. 기본적으로 난 악당이야. 도덕? 정의? 그딴 건 내 마음이 내킬 때나 챙기는 것이지, 내 의무가 아니야.”

문득 떠오른 두려운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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