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7화 (267/303)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판사를 바라보니, 판사가 표정을 와락 구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예. 죄송합니다.”

민찬기는 가까스로 정신을 가다듬고 서류를 보았다.

새하얀 종이 위에 적힌 활자들이 마치 지렁이처럼 꾸물꾸물 기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피, 피고인 박준성은 2021년 4월 27일, 골드선 호텔 207에서 마약류 약물을 복용하고 파티를 벌인...”

다만, 오늘을 위해 몇 달간 노력한 만큼, 민찬기는 공소 진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그간의 조사를 통해 알아냈던 피고인의 부적절하고 범법적인 행위를 진술한 다음, 그에 합당한 죄를 판사에게 구형했다.

이에 판사는 절차대로 ‘피고인, 변론하겠습니까’라고 질문했고, 차도연이 일어서며 변론하겠다고 답했다.

‘선배. 대체 왜...’

다만 민찬기는 차도연이 변론하는 광경을 보며 멍하니 입을 벌렸다.

도무지 지금 보이는 이 광경을 믿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사랑하는 선배가 자신이 몇 달간 판 사건에 맞선 변호사가 되다니.

게다가 변론을 시작하기 전, 자신을 흘겨보며 야릇하게 웃는 얼굴은 또 뭐란 말인가.

그전에 입속에 희멀건 액체를 들이붓곤 그것을 보여주는 행위는 또 무엇이고.

그야말로 악몽에서나 나올 법한 광경이 현실로 펼쳐지고 있는 꼴이 아닌가.

‘주, 주인니임...♥’

그러나 안타깝게도, 차도연은 그런 민찬기를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지난 2주간 정성민에게 절여질 대로 절여진 차도연은, 그의 완벽한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녀는 그저 주인님의 ‘1등급 노예’가 될 수 있는 현재의 테스트를 통과하고픈 마음뿐이었다.

만약 이번 재판을 이겨 1등급 노예가 된다면, 추후에 주인님의 ‘여자’로 승격하여 그분의 아이를 가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러한 욕망을 품은 채 변론을 마쳤다.

판사가 말했다.

“변호인. 변호인의 주장대로라면 고(故) 김다연 양은 성폭행을 당한 것이 아니라 합의하에 피고인과 성관계를 했다는 말인데,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증거 신청하세요.”

그리고 차도연은 재판에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민찬기의 멘탈은 이미 박살 난 상태로 보였고, 지난 몇 달간 자신도 이 사건을 도와주며 사건의 허점들을 잘 꿰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녀에겐 정성민이 준 정보도 있었다.

그것도 박준성의 무죄를 입증할 아주 확실한 증거 말이다.

자신도 그 증거를 보기 전까진 박준성이 성폭행을 시도하고 이를 은폐하려는 것인 줄 알았으나, 폐기된 줄로만 알았던 블랙박스 영상과 CCTV영상을 보자 박준성의 무죄를 믿을 수 있었다.

[흐응...하읏...으으읏...♥]

우선 실내 녹화가 된 블랙박스 영상.

블랙박스 영상 안에는 뒷좌석에서 섹스를 즐기고 있는 박준성과 김다연이 있었다.

둘은 온갖 가학적인 플레이를 하며 섹스를 했고, 서로를 때리거나 깨무는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아앗...! 오빠아...!]

서로의 몸을 손톱을 핥퀴는 그들.

삽입을 하며 목을 조르고, 뺨을 때리고, 유방을 꽉 깨물기까지 하는 박진성.

허나 김다연은 그것을 즐겼다.

오히려 몸에 상해가 생기면 생길수록 좋아하는 그녀였다.

그녀는 완벽한 마조 성향의 파트너였다.

‘이겼어...!’

결정적인 증거였다.

이 증거 하나로 그동안 조사했던 모든 것이 뒤집힐 수 있었다.

김다연은 성폭행으로 인한 자살이 아니었다.

그녀의 죽음엔 좀 더 복잡한 사연이 얽혀 있던 것이었다.

“증거의견 말하세요.”

“.....”

“증거의견 없습니까?”

그러니 오늘 아침에 갑작스럽게 제출된 증거에 민찬기가 대응할 방법은 없었다.

민찬기는 피해자 언니의 주장을 믿고 있었고, 박준성의 평소 행실과 정황 증거들로 그의 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심지어 김다연의 죽음을 덮으려는 정황이 속속히 드러나 살인에 그가 가담되어 있을 거라 확신하지 않았던가.

“..... CCTV의 녹화시간을 보면, 자살 추정 시간과는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주목해야 할 건 피고인이 김다연 양과 정사를 나눴던 흔적을 지우려 했던 점입니다.”

하여 민찬기는, 박준성이 김다연의 흔적을 덮으려 했던 것에 집중하여 재판을 풀어나갔다.

성폭행은 입증할 수 없어도, 김다연의 죽음에 박준성이 연관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증거들이 입증하고 있었다.

그의 동선, 그의 행적, 사건을 덮으려던 정황까지 박준성이 범인이라는 것을 가리키고 있었다.

심지어 그것은 차도연의 조언을 받아 구했던 증거들이 아닌가.

“변호인, 변론하겠습니까.”

“변론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도 대비책을 가지고 있는 차도연이었다.

그녀는 박준성에게 재벌가 집안끼리 정해놓은 약혼자가 있음을 알리며, 박준성은 약혼자의 존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김다연의 흔적을 지우려 했던 것일 뿐, 살인엔 가담하지 않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한, 김다연이 자살했던 자택에서 박준성의 흔적이 남은 것도, 자살한 김다연을 목격하고도 신고를 하지 않았던 것도, 자신의 동선에 남은 흔적들을 지우려 했던 것도 모두 약혼자에게 이 사실을 들킬까 봐 저지른 일이라고 변론했다.

그렇게 민찬기는 제대로 힘을 써보지도 못하고 공소사실을 입증에 실패했고, 박준성은 무죄판결을 받게 되었다.

한 마디로 차도연의 완벽한 압승이었다.

‘.....선배. 대체 선배는.’

패배한 민찬기는 멍하니 서서 차도연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박준성과 인사를 나누며 미소를 짓고 있었고, 중간중간 표정을 야릇하게 찌푸리며 다리를 베베 꼬곤 했다.

-지이이이잉....

‘으흥...♥’

다만, 민찬기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차도연이 다리를 꼬며 신음을 참는 것은, 그녀의 질내에 산입된 로터 때문이라는 것을.

방청석에 변장을 한 채 앉아있는 정성민이 로터 스위치를 누르며 그녀를 가지고 놀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하는 그였다.

‘주인님...♥ 승리했습니다아...♥’

재판이 끝나자, 하나 둘 떠나가기 시작하는 법정.

차도연은 정성민이 심어놓은 로터를 느끼며 눈을 까뒤집었다.

이제 1급 노예로 승급한 만큼, 정성민이 약속한 대로 그가 운영하는 회사의 전문 변호인이 될 그녀였다.

그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요한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주, 주인님을 위해엣...♥’

정의를 표방하던 차도연은 완전히 죽었다.

이제 그녀는 정성민이 불법으로 벌어들이는 자금을 세탁하고 관리하는 일을 맡게 되었다.

마약을 단속하고 성범죄자를 응징하던 그녀가 마약으로 벌어들인 자금을 세탁하고 성범죄자를 변호하게 된 것이다.

완전히 악의 하수인으로 전락해버린 그녀였다.

‘큭큭...존나 흥분되는군.’

그리고 정성민은 그런 그녀의 변화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의 깨끗했던 정의와 신념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니 정복감과 고양감이 한없이 치솟는 그였다.

한시라도 빨리 자신의 밑으로 떨어진 저년을 범하고 싶은 충동이 마구 샘솟아 올랐다.

“선배. 나랑 얘기 좀 해요.”

그때, 간신히 정신을 차린 민찬기가 차도연을 불렀다.

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후후. 궁금한 게 많은 표정이네♥”

“대체 왜 그런 거예요.”

“후후 글쎄? 굳이 이유를 꼽자면, 저번에 갔던 여행에서 진정한 ‘나’를 찾았기 때문이지.”

1박 2일로 예정되었던 여행이 4박 5일까지 늘어난 여행.

민찬기에겐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드는 여행이긴 했다.

도대체 그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이 안에 모든 해답이 있어.”

차도연은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민찬기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편 다음, USB 하나를 올려주었다.

“.....”

멍하니 USB를 바라보는 민찬기.

왠지 봐서는 안 될 판도라의 상자를 보는 듯한 느낌.

이 안에 도대체 무슨 내용이 들어있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울렁거렸다.

“찬기야.”

그때, 자신을 부르는 그녀.

순식간에 야릇했던 표정을 지우며, 진중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

마치 예전의 모습을 보는 듯한 느낌.

그녀가 말했다.

“나 없이도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

“너와 함께한 시간, 즐거웠어. 하지만 난 네가 원하는 여자가 아니야. 너도 내가 원하는 남자가 아니고.”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그냥 그 USB를 보면 알 거야. 그곳에 모든 걸 담아놨어.”

“......”

“찬기야. 아까는 잘 했어. 흔들리지 않고 끝까지 멘탈 잘 지키더라. 나보다 더 유능한 검사가 될 수 있을 거 같아.”

차도연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고 그를 민찬기를 와락 안으며 그의 귀에 속삭이듯 말했다.

“나처럼 되고 싶다고 했지? 그러면 아까 했던 것처럼 하면 돼. 무죄라는 결정적인 증거가 나와도, 유죄로 몰아붙이는 거지. 우리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죄를 입증해야 하는 직업이니까.”

“.....”

“오늘은 패배했지만, 그렇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죄를 입증하다 보면, 나처럼 될 수 있을 거야. 건투를 빌어.”

아무런 설명도 없이 일방적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 그녀.

하지만 민찬기는 그녀를 잡을 수 없었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알던 사람과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기에, 잡는다고 해서 잡을 수 없으리란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그였다.

때문에 지금은 그녀와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보다 손안에 있는 비밀에 대한 궁금증이 컸다.

우선 이 모든 일에 대한 의문을 해결해야 슬퍼하든 분노하든 눈물을 흘리든 뭐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각... 또각... 또각...

그렇게 민찬기는 멍하니 멀어져가는 차도연을 보았다.

그녀의 곁에는 중년 남자로 분장한 정성민이 나란히 걷고 있었다.

둘은 마치 연인처럼 찰싹 붙어 걸어가고 있었다.

-꾸우욱...

민찬기는 손안에 있는 USB와 함께 주먹을 움켜쥐었다.

생각조차 하기 싫었던 불길한 상상이 점점 현실에 가까워지는 듯한 불쾌한 감각이 느껴졌다.

‘나 말고... 만나던 남자가 있었던 거예요? 그런 거예요?’

통보하듯 마지막 인사를 남기고 떠난 차도연.

민찬기는 텅 빈 법정에 홀로 남아, 돌아오지 않을 질문을 속으로 내뱉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이 손에 있는 USB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는 곧바로 법정을 빠져나와 자신의 사무실로 돌아온 뒤, 검사복을 벗고 이른 퇴근을 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컴퓨터를 부팅시킨 뒤 USB를 꽂았다.

그 안엔 온갖 외설스러운 썸네일의 동영상들이 다수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찬기에게’라고 적힌 메모장 파일도 하나 들어있었다.

-달칵.

민찬기는 덜덜 몸을 떨며 메모장을 클릭했다.

메모장 안에는 차도연이 자신에게 남긴 글들이 적혀 있었다.

“.....하.”

그리고 그는, 이때 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오늘 이 일을 시작으로, 자신과 차도연의 질긴 악연이 시작되게 될 줄은.

언젠가 자신은 정성민의 조교사들과 기업체를 수도 없이 공격하는 검사가 되고, 차도연은 이에 맞서는 변호인이 될 줄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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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기에게.txt]

음란한 썸네일의 수많은 동영상.

그리고 그 속에 섞여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는 메모장 파일.

민찬기는 자신에게 남긴 차도연의 메모장을 더블클릭했다.

두려움 가득한 눈으로 그녀가 자신에게 남긴 글을 보았다.

「찬기야. 그 어떤 말로도 너를 납득시킬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아.

법정에서 너를 맞선 것, 다른 남자의 정액을 입에 머금고 너에게 보여준 것. 아마 혼란스러웠을 거야. 그러니 이 메모장을 클릭했을 거고.」

속이 울렁거렸다.

설마설마했던 일이 이 메모장으로 인해 진실이 되어버렸다.

진짜로 정액을 입에 머금고 보여줬던 거라니.

「맞아. 난 너를 배신했어. 너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줬어. 하지만 이게 내 선택이야. 나는 내가 증오하고 혐오하던 부류의 인간과 똑같다는 걸 인정해버렸어. 나는 법과 정의를 실현하는 그런 검사가 아니야.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복수자였을 뿐이지.

그래서 정성민을 사랑하게 된 거야.

아니, 이제는 주인님이라고 불러야 할까.

난 주인님의 노예가 되기로 했고, 그분의 사랑을 받으며 행복을 누리고 싶어.

하지만 널 사랑하지 않았던 건 아니야.

분명 너와 있으면 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해져서 좋았어.

나를 존중하고 존경하는 너의 태도 덕분에 내가 누군가에게는 정말 특별한 사람이라는 걸 느낄 수 있었어.

그런 작은 행복을 줬던 너에게 감사해.

하지만 네 자지는 너무 작아.

작고 형편없어서 전혀 느낄 수 없어.

또 나를 대단한 존재라고 믿는 너의 강렬한 믿음이 내겐 부담이야.

난 사실 복수만을 위해 달려온... 그냥 그 목표 하나만 바라보고 달려온 그저 평범한 여자야.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은, 그냥 흔한 여자 중 하나였던 뿐인 거야.

그래서 지금 너무 행복해.

나의 모든 걸 휘어잡고 지배하고 종속시키는 주인님을 사랑해.

그분과 함께 있으면 여자로서의 행복이 뭔지 느껴져.

나를 꽉 채우는 그분의 성물을 느낄 때면 완전히 내가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야.

그에 비해 너는 자지도 형편없이 작고 지속력도 떨어질 뿐이지.

미안해. 하지만 이게 사실인걸.

그러니 이 파일에 담긴 영상을 봐줘.

영상을 보며 괴로워하고, 아파하고, 상처받아.

왜냐하면 주인님은 상처받은 네게 ‘복수’와 ‘보상’을 주고 싶어하시거든.

주인님도 가족과 연인을 잃고 그 분노로 일어서신 분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복수할 너의 권리를 보장하고 싶어하셔.

물론, 영상을 안 봐도 돼.

나를 잊고 네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도 네 권리야.

만약 더 이상 상처받지 않고 여기서 끝내고 싶다면 ‘결정.exe’을 실행해서 3번을 선택하면 돼.

.....네게 전할 말은 여기까지야.

어떤 선택을 하든 네 선택을 존중해.

그럼 안녕.」

“.....”

메모장을 다 읽은 민찬기는 꽉 막힌 가슴을 부여잡고 흐느껴 울었다.

최악도 이런 최악이 없었다.

이딴 이별 통보를 받고 무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만, 민찬기는 선택을 해야 했다.

척 보기에도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을 것이 자명한 영상을 보느냐, 아니면 영상을 보지 않고 그만 그녀를 잊어버리느냐.

...선택은 어렵지 않았다.

오랫동안 동경했고, 존경했고, 사랑했던 사람이다.

비록 얼마 되진 않지만, 그녀와 함께한 시간들은 자신에게 제일 행복한 기억이고 추억이었다.

때문에 민찬기는 영상을 보기로 했다.

어차피 잊으려 해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사람이고, 영상을 지워봤자 미련만 남을 것이 뻔하기에 상처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녀의 추악한 일면을 들여다보기로 했다.

그렇게 그는 첫 번째 영상을 재생했다.

다만, 민찬기는 영상을 재생하자마자 얼어붙어 버렸다.

첫 번째 영상부터 그 내용이 충격적이기 때문이다.

[우웁....우움....후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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