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만 해도 마음에 안정이 찾아오는 목소리.
차도연은 민찬기가 자신의 유일한 구원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이윽고 그녀가 답했다.
“응. 만나서 얘기해.”
***
도심의 한 칵테일바.
민찬기와 차도연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칵테일을 홀짝이고 있었다.
벌써 도수가 높은 술을 8잔째 기울이는 그들이었다.
민찬기가 술을 홀짝이곤 말했다.
“선배. 저 진짜로 선배 존경합니다. 제 우상이라구요.”
사회생활용으로, 그러니까 아부용으로 하는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민찬기의 말.
그 진심을 느낀 차도연이 피식 웃으며 답했다.
“크흐흐. 우상은 무슨. 나도 알고 보면 별거 아니다?”
“아니에요. 선배는 대단한 사람이에요. 선배가 아니었으면, 그 누구도 뒷세계를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못 했을 거예요.”
“.....”
차도연은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술을 홀짝였다.
그리고 반쯤 풀린 눈으로 민찬기를 보며 말했다.
“넌 내가 성공했다고 생각하니?”
“...네. 어쨌든 미스터 최를 몰락시켰고, 구원자도 몰락시켰잖아요. 정성민은 정부와 협력 가능한 상태로 수위를 조절하기로 했고.”
차도연은 다시 술을 한 모금 마셨다.
달콤씁쓸한 이 맛이 현재 자신의 상황을 대변해주는 것 같았다.
분명 성공이라 할 수도 있지만, 마냥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
과연 정성민이라는 1인자의 탄생이 이 대한민국에 좋은 일일 수 있을까.
오히려 구원자와 미스터최의 세력을 흡수한 그가 더욱 거대한 악으로 성장하지는 않을까.
‘.....내가 그런 말 할 처지는 안 되지만.’
다만, 이미 그에게 몸과 마음을 줬던 자신이었다.
정성민이라는 거악의 탄생을 우려하기에는 그 자격조차 되지 않았다.
“선배. 선배에겐 뭔가 몰두할 게 필요해요. 선배는 지금 목표를 잃어버려서 마음에 구멍이 생긴 거라구요.”
차도연은 민찬기를 보았다.
그의 눈은 마치 과거의 자신을 보듯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일을 해요. 선배만이 할 수 있는 일을.”
그는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서류 하나를 꺼내 슥 내밀었다.
차도연은 서류를 훑어본 뒤, 깜짝 놀란 듯한 표정으로 민찬기를 보며 말했다.
“이건...”
“네. 제가 파고 있는 사건이에요. 자살 사건인데, 강제로 덮으려는 정황이 많아요. 여기 보면 강간이나 성폭행의 흔적이 뚜렷이 남아있는데도 말이죠. 냄새가 나지 않아요?”
차도연은 눈을 빛내며 자료를 더 훑어보았다.
확실히 석연찮은 점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다.
제대로 파기만 하면 줄줄이 엮일만한 소스였다.
“선배의 도움이 필요해요. 저 혼자만 파기에는 사건의 스케일이 너무 커요. 노하우도 부족하구요.”
확실히, 재벌가가 얽힌 사건이라 만만치 않아 보였다.
이미 종결되었던 사건이기도 하고 말이다.
“하지만 난... 검사를 그만뒀는데.”
다만 차도연은 이미 검사를 그만뒀었다.
다시 복직하려면 할 수 있지만, 그게 흔한 케이스도 아니고.
그래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했던 건데.
“조언 정도만 해줘도 돼요. 저를 도와주면서, 다시 생각해보는 거예요. 선배가 하던 일에 대해서.”
“.....”
“선배는 이 직업이 맞아요. 일을 하다 보면 알게 될 거예요.”
차도연은 고민했다.
스스로 박차고 나온 업계에 다시 뛰어들 수 있을까.
“선배. 저 한번 믿어봐요. 비록 오래되진 않았지만, 선배 제가 제일 잘 알아요.”
하지만 너무도 확고한 민찬기의 설득에, 차도연은 수락을 했다.
당분간 민찬기의 일을 도우며 복직 준비를 하기로.
생각보다 일에 의욕이 안 생기면 언제든지 그만둘 수 있으니 말이다.
“좋아요. 그러면 일주일에 4번, 제 집에서 보는 건 어때요.”
“...그래. 그렇게 하자.”
***
이후, 차도연은 주기적으로 민찬기와의 만남을 가졌다.
매주 목, 금, 토, 일 그의 집에서 사건을 같이 파헤쳐보기로 한 것이다.
“태안 물산을 좀 더 파봐야 할 거 같은데. 커넥션이 있어.”
“음.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예전에 수사했을 때 이곳 사장을 눈여겨본 적이 있거든. 용의자와 관계가 있을 거야.”
그리고 차도연은 민찬기와 함께 사건을 파헤치며 오랜만에 ‘살아있다’라는 감각을 느끼게 되었다.
확실히 ‘악’이라고 할 만한 자를 추적하고 죄를 증명해내어 벌을 받게 만드는 것이 자신의 적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찬기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많을수록 복직에 대한 열망이 생기는 그녀였다.
하지만ㅡ.
“하아...하아...하아...”
그러한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아랫배에서 느껴지는 욱씩거림도 더욱 강해졌다.
특히 밤이 되어 생각이 많아질 때면 정성민의 단단하고 거대한 그곳과 그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눈앞에 아른거리곤 했다.
‘참아야 돼. 이겨낼 수 있어.’
하여 차도연은 매일 밤 자위를 했다.
자위를 한다고 하여 아랫배 안쪽에서 느껴지는 진득한 욱씬거림을 지울 순 없었지만, 어느 정도 해소는 가능했다.
“선배! 물증을 찾았어요!”
“후후. 거봐. 거기 파보면 나올 거라고 했지?”
그리고 민찬기와 함께 있을 때면 이 미칠듯한 욱씬거림을 잠깐이나마 잊을 수 있었다.
차도연은 반짝이는 민찬기의 눈에서 과거의 자신을 보며, 다시 검사로 돌아가겠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 선배. 오늘은 자고 갈래요? 시간도 늦었고.”
조금씩 티를 내긴 했으나, 민찬기가 본격적으로 대쉬를 하기 시작했다.
민찬기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었던 차도연은 자연스럽게 그의 호감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오늘은 밖에서 저녁 먹으면서 얘기할래요? 괜찮은 식당이 있어서.”
그렇게 함께 사건을 수사한 지 한 달이 지났을 땐, 민찬기는 차도연을 고급 레스토랑에 식사를 제안했다.
분위기상 오늘 고백을 하는 것을 감지한 차도연은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이를 승낙했고, 실제로 그녀는 민찬기에게 고백을 받게 되었다.
“선배. 저랑 사귀어요. 오, 오랫동안... 동경했고, 또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래.”
검찰계의 전설이 된 차도연.
그리고 그런 자신을 동경한 민찬기.
둘은 마침내 이어져 연인이 되었다.
민찬기는 오랜 시간 차도연을 동경했고, 존경했으며, 이젠 그녀의 힘이 되어주고 싶었고, 차도연은 민찬기의 젊은 패기에서 과거의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마치 그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자신이 특별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아... 하아... 하아... 선배...”
둘의 진도는 빨랐다.
사귄 지 2일째가 되는 날 차도연과 민찬기는 자택에서 키스를 했고, 바로 다음 날 새벽 몸을 섞게 되었다.
“날... 날 네 것으로 해줘. 날 모조리 가져줘...”
차도연은 이제 정착을 하고 싶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주는 민찬기의 아내가 되어, 그와 함께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었다.
인생 최대의 사명인 미스터 최의 몰락을 실현했으니, 이제 평범한 가정의 주부로 남고 싶은 그녀였다.
“크흐으윽! 선배!”
-뷰룻... 뷰룻... 뷰룻... 뷰룻... 뷰룻...
아랫배에 퍼지는 따스한 감각.
깜짝 놀란 민찬기가 허리를 빼려 했으나, 차도연이 다리로 조여 막아버렸다.
그녀는 민찬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그를 꼭 붙든 채, 그의 귓속에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너라면 괜찮아. 다 줄 수 있어.”
“.....선배.”
“이제 이름으로 불러줘. 편하게 말해도 괜찮아.”
차도연은 이제 어딘가에 종속되고 싶었다.
되도록 자신을 아껴주고 사랑해주는 민찬기에게 종속되고 싶었다.
그의 품에서 여자로서의 행복을 누리고 싶었다.
“...네. 아, 아직 어색하지만, 천천히...노력해볼게. 도, 도연아...”
홍당무처럼 붉어진 얼굴로 말을 놓는 민찬기.
차도연이 그런 그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눈이 맞은 둘은 진한 키스를 나누었다.
둘은 오랫동안 몸을 섞으며 서로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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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찬기와 사귄 지 한 달이 지났다.
처음으로 연애를 해 본 차도연은 모든 면에서 서툴렀지만, 민찬기의 능숙한 리드 아래 알콩달콩한 연애를 할 수 있었다.
동물원에서 원숭이에게 먹이를 주기도 하고, 손을 꼭 잡고 수족관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하고, 영화관에서 최신 영화를 보며 영화의 주제나 재미에 대해 이야기꽃을 피우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기억은 차도연에게 찬란하고 아름다운 기억이었다.
만약 자궁 안쪽에서 느껴지는 이 미칠듯한 욱신거림만 없었더라면, 그의 아내가 되어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었을 것이다.
“으웃...흐웃....으우웃...”
하지만, 이제 한계였다.
이대로 있다간 미쳐버릴 것 같았다
도대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기껏해야 성욕일 뿐인데, 고작 남자 하나일 뿐인데 왜 이 욕망을 참기가 이렇게 어려운 것일까.
-찌걱 찌걱 찌걱 찌걱 찌걱 찌걱
민찬기와 관계를 가지면 괜찮을 줄 알았다.
그의 것에 안쪽이 쑤셔져서, 그의 정을 듬뿍 받으면 암컷으로서의 욕망이 어느 정도 가라앉을 줄 알았다.
하지만 관계를 가지면 가질수록 불만을 더욱 커져갔다.
자꾸 정성민과 민찬기를 비교하게 되고, 관계가 끝난 뒤에는 항상 허전함과 공허함, 그리고 애타는 이 감정을 안고 잠들어야 했다.
-우웅... 우웅... 우웅...
그런 와중에, 폰이 진동하며 불이 들어왔다.
전화가 걸려온 것이었다.
발신인은 정성민.
차도연의 눈에 광기가 물들기 시작했다.
“흐...흐흫....흐흐흫....”
만약 이 전화를 받으면 어떻게 될까.
탁자 위의 스마트폰에 손을 뻗는 와중에도 수많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민찬기와 함께했던 아름다운 추억들과, 그와 약속했던 미래들이 떠올랐다.
악을 벌하고 정의를 수호하고자 했던 과거의 자신도 떠올랐다.
그들 모두가 이 전화를 받지 말라고 소리치는 듯 환청이 들렸다.
-선배! 선배가 어떤 사람인지는, 제가 잘 알고 있어요.
-차도연, 네가 누구였는지 잘 기억해. 무엇을 위해 살아왔고, 또 어떻게 살아가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기로 했잖아.
폰이 진동하는 동안, 계속 머뭇거리는 차도연.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걷어 들이고, 다시 걷어 들인 손을 뻗고.
그 과정을 반복하다 통화는 끊기게 되었다.
‘정성민’이라는 발신인만 큼지막하게 남아있을 뿐이었다.
“.....”
차도연은 퀭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그녀는 서둘러 채비를 한 뒤, 민찬기의 집으로 향했다.
그와 진하게 몸을 섞으며 이 비참한 심정을 위로받고 싶었다.
***
차도연이 민찬기의 집으로 간 그 날, 차도연은 아예 그의 집에서 머물기로 했다.
매일 밤 정신이 갉아 먹히며 미쳐버릴 바에, 그와 함께 있으며 위로받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었다.
그리고 그 결정은 실제로 효과를 보게 되었다.
그와 함께 일을 하고 그와 함께 잠을 드니 매일 밤 자신을 미치게 하던 그 ‘감각’이 다소 잦아든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일주일이 끝이었다.
일주일이 지난 시점부터는 민찬기가 곁에 있든 없든 다시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특히 민찬기가 일을 하러 떠난 뒤 혼자 남겨질 때면 증상이 수배는 더 심해졌다.
하루종일 범해지는 상상을 하며 자위를 해도 도저히 몸이 가라앉지 않는 것이다.
[발신인: 차지연]
그런 와중에 언니에게 전화가 왔다.
딱 봐도 그리 좋지 않은 전화인 게 분명했다.
이미 정성민의 노예가 된 언니에게 걸려온 전화를 받아봤자, 자신의 마음만 더 흔들릴 뿐 더 나아질 건 없었다.
결국 차도연은 차지연의 전화를 받지 않았다.
-우우웅~
그러자 문자가 한 통 도착했다.
잠금화면 너머로 언니의 메시지가 보였다.
[차지연: 매일 밤 힘들지? 네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알고 있어.]
“.....”
이 미칠듯한 욱신거림을 해결할 방법.
매일 밤 정성민의 얼굴을 그리며 그의 자지를 받고 싶은 미친 욕망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
차도연은 침을 꿀꺽 삼켰다.
언니의 말대로 이 미친 성욕만 해결할 수 있으면, 원래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은가.
민찬기와 앞으로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보낼 수 있지 않은가.
정성민은 자신을 노예 취급할 뿐이지만, 민찬기는 자신을 존중해주고 아껴주고 보다듬어준다.
자신에겐 민찬기가 필요했고, 그와 함께 살아가려면 이 미친 욕망을 해결해야 한다.
차도연은 폰을 들었다.
[나: 허튼 수작은 안 부리는 게 좋을 거야. 아무리 언니라도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
[차지연: ㅎㅎ 우리 동생 많이 박해졌네. 사춘기도 없던 애인데.]
[나: 본론만 말해. 그 방법이란 게 뭐야.]
[차지연: 메시지로만 말하기는 힘들어. 만나서 얘기하자. 단 둘이서만.]
... 단 둘이서만 만나자는 제안.
정성민이나 다른 부하가 오는 것이 아니라면 상관없겠다 싶었다.
만나서 얘기만 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차도연이 답장했다.
[나: 그럼 지금 만나. 2시간 뒤 송송카페로 와. 우리가 자주 가던 데니까 알지?]
[차지연: 그럼. 오랜만이네 거기도. 알았어. 두 시간 뒤, 3시에 거기서 봐.]
차도연은 폰을 덮었다.
심호흡을 하고, 냉수 샤워를 했다.
머리와 몸의 열기부터 없애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언니와 만나기로 했던 카페로 향했다.
***
화창한 오후, 따스한 햇살이 창가로 비치는 카페 안.
널찍한 홀의 수많은 테이블에서 하하호호 떠들고 웃는 소리가 오갔지만, 유독 한 테이블만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서로를 마주보고 있는 차도연과 차지연이었다.
“그러니까... 정성민과 몸을 섞는 조건이라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여는 차도연.
분명 아까 전, 그녀의 언니인 차지연은 이렇게 말했었다.
정성민과 1박 2일 보내기만 하면, 그가 자신의 욕구불만을 해결해 줄 거라고.
“응. 사실 파격적인 조건이지. 주인님께 안길 수 있는 영광을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