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4화 (254/303)

그와 똑같은 눈높이에서 말했다.

“그렇게 혼자 아파하는 거! 저는, 절대 못 봐요!”

눈물이 차올랐으나, 강렬한 이하영의 눈빛.

이를 조용히 지켜보는 차분한 정성민의 눈.

이윽고 이하영의 두 눈에 고였던 눈물이 흘렀다.

“아니! 절대, 나는 절대로 못 두고 봐. 너 혼자만 아파하는 거. 너 혼자만 모든 걸 짊어지고 가려는 거. 너 혼자만 불행한 거. 절대 못 두고 봐.”

언제나, 언제나 여자친구로 있고 싶어했던, 이하영의 마음.

그 억눌렸던 마음이 폭발하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다... 다 끝났어, 성민아. 가족에게 돌아가. 가족은 통제하고 지배하는 게 아니야. 함께 나누는 거지.”

정성민은 조용히 이하영의 말을 들었다.

그녀의 말을 들을 때마다 저 깊은 곳에 쑤셔박혀 있던 약한 자신이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네가 나한테 그랬잖아. 힘든 일 있으면 말하라고 했잖아. 하루가 정말 힘들어도, 내일이 정말 막막해도, 같이 나누면 괜찮다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며. 네 부모님이 해준 말이라며.”

언젠가 정성민이 이하영에게 해줬던 말.

부모님에게 들었던 말을, 그대로 전해준 말.

사랑하는 사람끼리 고통을 나누는 방법.

“약해도 돼. 가족끼리 있을 땐 약해도 괜찮아.”

이하영은 분명히 복수자로서, 또 지배자로서의 정성민을 몰랐다.

사실 그녀에겐 짓밟고 파괴하고 굴복시켜 쟁취하는, 그런 정성민의 모습은 낯설었다.

지배자로 거듭난 그가 생소했다.

하지만 그가 한 사람의 연인으로서, 또 가족 구성원으로서 행복을 느끼는 방법은 잘 알고 있었다.

이해하고 보다듬고 아껴주어 품어주는, 그것이 정성민이 행복을 느끼는 방법이었다.

지배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그의 모습은 그러했다.

“다 끝났어. 돌아가자.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자.”

복수를 위해, 또 비정해지기 위해 묻어두었던 정성민의 마음이 꿈틀거렸다.

그에 따라 정성민의 표정이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자는 이하영의 말이, 그의 심장을 건드린 것이다.

“하, 하지만... 누군가가...누군가 벌을 내리지 않으면...”

조직을 유지하려면 상벌이 확실해야 했다.

정성민은 살아남기 위해 가혹해져야 했다.

때문에 성과를 올리는 자에게 확실한 상을, 잘못한 자에겐 확실한 벌을 내렸다.

정성민은 자신의 가족 공동체가 유지되려면 업보청산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누가 바래? 누가 죽어서 후련하대? 이 바보야.”

다만, 겪어보니 아니었다.

막상 이신아가 죽으니 모든 게 소용없어졌다.

그 누구도 이신아의 처벌을 원하지 않았다.

이하영이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머님은 네 설계가 실패해서 목숨을 던진 게 아니야. 돌아갈 곳이 없어서 그런 거지. 그러니까, 그냥 품어주기만 하면 돼. 내가 가장 잘 아는, 그래서 가장 사랑했던, 네가 되어 품어주기만 하면 돼. 성민아.”

“.....”

가족을 되찾으려면... 행복을 되찾으려면...

짓밟아야 했다.

가혹해져야 했다.

때리고 부수고 망가뜨려서, 취해야 했다.

모조리 집어삼켜서, 아래에 두어야 했다.

주인이 되어야 했고, 올라서야 했다.

통제해야 하고, 목표를 부여해야 했다.

상벌을 확실히 해야 했다.

그것이 행복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힘들어서... 힘들어서 못 해먹겠어...”

하지만 행복을 찾아 쌓아 올린 그 모든 것이,

주인이 되기 위해,

지배자가 되기 위해,

왕이 되기 위해 쌓아온 그 모든 것이, 마침내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 대단했던 정성민이 남 앞에서 흐느끼기 시작했다.

비로소 한 인간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괜찮아... 다 끝났어. 가족에게 돌아가자.”

이하영은 인간 정성민을 품어주었다.

마음속 깊숙이 처박아둔 그의 마음을 위로해주었다.

정성민은 이하영의 품에서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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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아는 걱정되었다.

아빠가 벌써 며칠째 제대로 끼니를 먹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힘든 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사랑하는 엄마가 죽었는데, 힘들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힘든 건 남은 가족들이 이대로 박살나는 것이었다.

아빠가...그리고 오빠가... 이대로 무너지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이곳에 남은 것이다.

이대로 두면 아빠는 또 혼자서 초췌해질 게 뻔하기 때문에...

아빠를 돌봐줄 사람은 자신밖에 없기 때문에, 정성아는 이곳에서 아빠를 챙기기로 했다.

‘오빠는... 언니들이 있잖아.’

오빠를 사랑한다.

가족으로서도, 그리고 한 여자로서도.

오빠도 그것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자신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 가족이 유지되는 것이었다.

이대로 영영 뿔뿔이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아빠... 밥 먹자.”

“.....”

하지만 이것도 지쳐가고 있었다.

마음에 큰 구멍이 난 자신이, 남을 제대로 위로할 리가 없었다.

난데없이 초인종이 울린 건 그때였다.

-띵ㅡ동

...집배원일 것이다.

정성아는 터덜터덜 걸음을 옮겨 문을 열었다.

“.....”

하지만 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오빠.

잠깐 마주한 것만으로도 눈물이 차오르는, 오빠였다.

“미안해. 많이 기다렸지?”

어딘가 분위기가 많이 달라진 그의 모습.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빠는?”

묻고 싶은 말은 많았으나, 정성아는 안방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정성민이 정성아를 꽉 안아준 다음, 그녀의 등을 토닥거리며 말했다.

“고마워. 아빠를 챙겨줘서.”

“.....응.”

그는 정성아를 놓아준 다음 안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문을 여니 엄마의 사진 액자를 끌어안은 채 멍하니 있는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오랜만에 부르는 그 호칭.

정성민이 정현재를 부르자, 그가 정성민을 돌아봤다.

그러자 그는 놀라는 표정이 되었으나, 이내 표정을 구기며 말했다.

“다시는 여기 찾아오지ㅡ”

“엄마 보러 가자.”

“.....”

“살아있어.”

벌떡 일어나는 정현재.

그가 말했다.

“사, 살아... 살아있어...?”

“응. 내가 다 설명할게. 일단 가자. 차에 타.”

***

이신아는 멍한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이제 더 이상 살아갈 희망이 없는 그녀에게, 생이 더 연장된다 한들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긍정적이려고 노력했다.

누구든지 만나면 밝게 인사하고, 호의를 베풀고, 크게 웃고, 농담을 던지고.

이 황량한 마음에 무엇이든 불어넣으려고 수없이 많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결국 이 상태다.

멍-하니. 아무 표정 없는.

전혀 의욕이 없는.

무의미한 시간의 연속.

-똑. 똑.

누군가의 노크 소리가 울린 건 그때였다.

간호사가 온 것일까.

대충 건성으로 네ㅡ 라고 답했다.

문이 열렸다.

“아....아아아....아....”

누군가의 목메는 소리.

여전히 창밖으로 시선을 두고 있던 이신아가 고개를 돌렸다.

“.....”

멈춰버린 듯한 시간.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 얼굴들.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그래서 꿈에 나오길 간절히 기도했던 그들.

“.....”

하지만, 자신은 죄인이다.

이들에게 용서받을 수 없고, 용서받아서도 안 된다.

끝까지 죗값을 받아야ㅡ

“여, 여보.....여보...”

허나, 울먹이며 다가오는 남편.

훌쩍이며 다가오는 딸.

죄인인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덥썩 잡은 그들.

그리고ㅡ

“.....”

그들과 함께 왔으나, 묵묵히 서 있는 아들.

허나 두 뺨에 눈물을 한가득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아들.

그가 말했다.

“엄마. 이제 돌아가자. 집으로.”

***

3시간 뒤, 은은한 어둠이 깔린 이하영의 집무실.

그녀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있었다.

자신의 부하에게 보고를 받기 위해서였다.

“그래. 결국 그렇게 됐나. 알았어. 그럼 수고해.”

-달칵.

이윽고 통화를 마친 이하영은 폰을 책상 위에 올려두었다.

그녀는 부하가 자신에게 했던 보고를 상기했다.

결국 정성민의 가족들이 재결합을 했다고.

자신의 의도대로 잘 풀린 거 같다고.

“흠.”

이하영은 오른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쳤다.

그리고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지렸다.”

지렸다.

물론, 자신의 활약상을 말한 것이다.

“개지렸다.”

개지렸다.

물론, 자신의 공적을 말하는 것이었다.

“이게 바로... 정실?”

대황 하영.

비극의 구렁텅이로 빠질뻔한 주인님의 가족을, 멱살 잡고 끌어올린 장본인.

이것이 바로...

“정실의 품격.”

끝났다.

이 정도면 평정을 한 것이다.

성민이가 자신의 품에서 울었고, 자신은 달래주었고, 거기에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다.

무쓸모년 이희연, 상폐줌마 백하윤, 괴물근육녀 안지연, 코쟁이년 엘레나는 닿을 수 없는 레벨에 도달한 것이다.

“내가 원조 맛집이다.”

원래 주인님이, 그러니까 성민이가 자주 찾는 보지는 자신의 보지였다.

무릇 명검에는 그에 어울리는 검집이 필요한 법인데, 희연이의 것은 너무 좁아터졌고, 하윤 언니의 것은 지나치게 헐렁했으며 지연이의 것은 너무 딱딱했다. 엘레나의 것은 외쿡산인 데다 연식이 너무 최신이라 착 감기는 맛이 없었다.

그러니 쫄깃쫄깃하게 촥 감기는 맛이 있는 자신의 검집이 성검에 어울리는 검집이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원조 맛집의 전통 검집인 것이다.

“크하하하하하하하ㅡ!”

이하영의 웃음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

네 가족은 차를 타고 오며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정현재는 묵묵히 차를 몰았고, 조수석에 앉은 정성민은 창가를 바라보았다.

정성아와 이신아 또한 각자의 자리에서 차가 해치는 풍경을 바라볼 뿐이었다.

허나 이들의 마음은 이미 통했었다.

서로를 마주한 순간, 서로가 서로에게 없어선 안 되는 존재임을,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때문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사색이었다.

각자가 지닌 죄를 돌아보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한 자기반성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었다.

다만, 그들은 서로가 지닌 죄의 무게는 따지지 않았다.

서로가 서로를 심판하려 하지 않았다.

네가 지은 죄가 더 크니, 내가 지은 죄가 더 가볍니, 이런 대화는 무의미했다.

그들은 그저 각자가 지닌 죄의 무게를 느끼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생각할 뿐이었다.

심지어 이 가족의 최대 피해자인 정현재도 말이다.

그는 자신이 가장으로서 무능했고, 나약했던 것을 탓하고 있었다.

가정의 수호자가 되었어야 할 자신이 아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쉽게 무너진 것에 대해 자책하고 있었다.

모두가 짊어진 마음의 짐이 있는 것이다.

-부와아아아앙....

때문에, 네 가족을 실은 차는 나아갔다.

그들이 함께할 집으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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