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4화 (244/303)

이제 남은 것은 하염없이 기다리는 것이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도 못한 채, 다시 환청이 들릴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그렇게 환청이 들리기 시작하면, 자신은 다시 환영을 볼 수 있다.

눈을 찌르고, 혓바닥을 자르고, 보지에 칼을 쑤셔 넣는 그 환영을 다시 생성해내 볼 수 있다.

그러면 다시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철컥.

그때였다.

문이 열리고, 실험복 차림의 남자들이 걸어온다.

하지만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나와라. 특별히 휴식일이 주어졌다.”

다음화 보기

“나와라. 특별히 휴식일이 주어졌다.”

휴식일?

“주인님의 생일이라 오늘 하루만큼 너를 자유롭게 풀어주라는 이희연님의 지시가 있었다.”

주인님.

희연이가 주인님이라 부르는 사람.

내 아들 정성민.

우리 아들 성민이.

“나와.”

이신아는 실험복 차림의 남자를 따라가 드디어 밖으로 나왔다.

장장 3개월간 갇혀 있다 드디어 밖으로 나온 것이다.

“으아....으아아아아....아아아....”

밖을 나온 이신아는 뜨거운 눈물을 왈칵 쏟았다.

그녀는 석양이 지는 풍경을 두 눈으로 바라보며, 대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과, 향이 가득한 꽃향기와, 사아악- 바람에 쓸리는 잎사귀의 노래를 들었다.

“으아아...아아아아....”

오랜만에 만끽하는 색채가 가득한 풍경.

이에 무채색으로 피폐했던 이신아의 마음이 다채롭게 채워지기 시작했다.

삶이란 것을 다시 실감하기 시작했다.

“꼴값 떨고 있네.”

서늘한 이희연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옆을 돌아보니, 이희연이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가 말했다.

“희망 같은 거 가지지 마. 당신 상태가 너무 심각해서 하루만 빼주는 것 뿐이니까. 오늘은 주인님의 생일이기도 하고.”

“.....”

“오늘 하루만 별채에서 지내. 주인님 예전 집을 구현한 곳이니까, 거기서 회복이나 좀 해둬. 내일이면 다시 ‘그방’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이희연은 그렇게 말하곤 뒤돌아서 반대 방향으로 갔다.

이윽고 이신아는 이희연의 부하들의 안내를 받아 ‘별채’로 이동했다.

“.....”

별채.

그곳에 들어온 이신아는 오랜만에 느끼는 그리운 풍경을 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따뜻하게 맞이해주던, 화목한 가정이 살던 그 집이었다.

“흐...흐흑.....흐으으.....아아아....아아...”

이신아는 바닥에 엎어졌다.

그녀는 그리웠던 이 집의 바닥을 미친 듯이 손으로 쓸며 그 기운을 느꼈다.

“흐아아아....아아아....”

그녀는 일어나 집안 곳곳을 배회했다.

하염없이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며 집 곳곳을 돌아다녔다.

“으아아...아아아....”

부엌.

가족들에게 따뜻한 요리를 해주고, 식탁에 옹기종기 모여 그날 있었던 일을 떠들곤 했던 그 추억의 장소.

그녀는 식탁에 앉아 다 같이 밥을 먹는 가족의 환영을 보았다.

이신아는 오열하며 그 풍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으어...흐어어어...으어어어...”

부엌뿐만이 아니었다.

남편과의 추억이 가득했던 안방.

행복했던 그날의 웨딩사진이 있는 안방.

이신아는 매일 남편이 배고 자던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것의 촉감을 느끼고, 냄새를 맡은 뒤, 부둥켜안고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베개를 그대로 안은 채 딸의 방에 들렀다.

“성아...성아야....서, 성아....성아야...”

아이돌을 한다고 떠났지만, 그 물품만은 그대로 남겨놓은 방.

딸의 냄새가 배어 있는 추억의 방.

이신아는 딸이 좋아하던 곰 인형부터 백하윤의 브로마이드와 앨범CD까지 모든 물품을 눈물 가득한 눈으로 둘러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딸의 방에서 오열하던 이신아는, 마침내 남편의 베개를 안은 채 정성민의 방에 들렀다.

“하아아....흐아아...흐아...아아아....아아아아....”

아들의 방을 열자마자 눈에 들어온 건 그가 연구하던 레시피 노트.

이신아는 책상 위에 있는 그 노트를 보곤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득 정성민이 그녀를 위해 레시피를 연구했다며 요리를 해주던 그 광경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엄마. 이번에 연구한 건데 맛 좀 봐줘.

-무리하게 운동하니까 감기에 걸리지. 감기에 좋은 차니까 마셔봐.

-아 진짜 말하지 말라니까. 아빠가 말한 거지? 내가 케익 만들고 있는 거.

자신이 아플 때, 생일을 맞이했을 때, 어떤 기념일을 맞이했을 때, 언제나 맛있는 요리로 마음을 표현하던 아들.

누구보다 든든했고, 누구보다 밝았던 나의 아들.

“흐아아....으아아...성민아....흐으으으....성민아. 내가, 내가 정말....내가.....”

왜.

도대체 왜.

도대체 왜 그랬던 걸까.

나는 왜 이런 가족을 두고...

나의 인생이자 전부였던 가족을 두고.

“새, 생일....생일...“

분명 이희연이 그랬었다.

오늘이 아들의 생일이라고.

”나, 나도... 나도.“

용서받고 싶은 마음?

이제 그런 건 없었다.

절대 용서받지 못한 일을 저지른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고, 용서받아서도 안 되는 일이다.

그저 이신아는 무언가라도 해주고 싶었을 뿐이다.

-벌컥!

냉장고 문을 여니, 다행히 재료는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 집은 꾸준히 관리를 받은 흔적이 있었다.

곳곳에 사람의 흔적이 남아있는 집이었다.

-톡. 톡. 톡. 톡. 톡.

다만 이신아에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이신아는 아들의 생일에 해줄 요리에 집중했다.

그녀를 파와 양파를 썰고 느타리버섯을 손질했다.

그리고 냄비에 물을 붓고 다신 물을 내었다.

이신아는 멸치와 다시마를 뺀 뒤 된장을 넣고 소량의 고추장과 쌈장을 넣었다.

-보글 보글 보글...

끊기 시작하는 물.

이신아는 양파와 파를 넣고 두부를 송송 썰어 넣었다.

마지막으로 차돌배기를 다른 후라이펜이 살짝 익힌 다음, 팔팔 끓는 된장에 올려주었다.

이제 후추만 톡톡 뿌려주면 아들이 그토록 좋아했던 된장찌개가 완성된다.

-엄마 된장찌개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니까. 솔직히 된장은 못 이기겠네.

언젠가 아들이 했던 말.

자신이 만든 된장찌개가 최고라고.

정말 맛있다고.

이신아는 그렇게 완성한 된장찌개의 뚜껑을 덮고 손잡이를 잡은 뒤 밖으로 나섰다.

어서 이것을 아들에게 전해주어야 한다.

”들어가. 외출은 금지다.“

하지만 입구를 지키는 경호원들에게 막혀버렸다.

이신아는 애원하듯 사정하며 이것을 아들에게 전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하아. 이희연님에게 연락해보지.“

결국 이신아의 애원에 이희연에게 연락을 한 경호원.

이윽고 그가 통화를 마치고 말했다.

”따라와. 그것만 전해주고 오는 거다.“

이신아는 침을 꿀꺽 삼킨 뒤 경호원의 뒤를 따라갔다.

그녀는 경호원을 따라 정성민이 살고 있는 본채로 이동했다.

척 보기에도 수백 억원은 할 거 같은 으리으리한 펜트하우스였다.

”기다려. 출입허가 받아야 하니까.“

경호원은 귀에 꽂은 인이어를 눌러 누군가와 대화를 나눴다.

이윽고 허가가 떨어지자 그는 이신아를 안으로 안내했다.

”따라와.“

죽 늘어선 화려한 복도를 통과하는 이신아.

이윽고 그녀는 마침내 정성민이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는 정현재, 정성아와 함께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현재의 곁에는 웬 낯선 여자가 앉아있었다.

”하하하. 당신도 참. 음식은 성민이에게 맡기라니까.“

”아휴. 그래도 아들 생일은 내가 챙겨야지. 생일상을 본인이 차리면 그게 대체 뭐람.“

”푸하하하. 그건 그렇네.“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정현재와 낯선 여자.

다만 그 여자는 예전의 자신을 똑 닮아 있었다.

분명 자세히 보면 다른 사람이긴 하나, 말투나 행동이 자신을 똑 닮아 있었다.

”아...............“

마치 자신이 원래 있어야 할 곳을 강탈당한 기분.

그때, 자신을 데리고 온 경호원이 정성민에게 다가가 귓속말로 무언가 속삭였다.

그러자 정성민의 시선이 그제야 된장찌개를 들고 있는 자신에게 향했다.

”잠깐만.“

몸을 일으키는 정성민.

다만 정성아와 정현재는 사각에 위치한 자신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때문에 정성민이 몸을 일으켜도 자신들끼리 이야기꽃을 피우기 바빴다.

”뭐야?“

이윽고 자신에게 다가온 아들이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신아는 정성스럽게 만든 된장찌개를 스윽 내밀었다.

”이, 이거... 생일...이라고 해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된장찌개를 바라보는 정성민.

그는 그것을 들고는, 근처에 있는 방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문이 열린 곳은 방이 아니라 화장실이었다.

그는 된장찌개를 변기에 모두 내려버리곤 빈 냄비를 이신아에게 건넸다.

”필요 없으니까 당신이나 처먹어.“

”........................................“

완전히 빛을 잃은 이신아의 눈빛.

비참한 자신의 상황과는 정반대로, 정성민의 뒤편에선 하하호호 화목한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이신아는 자신이 죄악을 저지르지 않았다면 응당 함께 있어야 할 저곳으로 손을 뻗었다.

허나 정성민은 그런 자신을 벌레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뭐 하는 거지?“

”......“

이신아는 정성민을 보았다.

그의 눈엔 예전과 같은 따뜻함이나 사랑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끝없는 증오와 모멸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미안합니다.“

이신아는 깨달았다.

이제 자신은 완전한 타인이 된 것을.

”데리고 가.“

정성민은 그렇게 말하며 등을 돌려 가족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이신아는 다시 멍한 얼굴로 경호원의 손에 이끌려갔다.

그렇게 집에 도착한 그녀는 아직 온기가 남은 냄비를 끌어안은 채 쇼파에 앉았다.

그녀는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

-스윽.

그녀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종이와 펜을 방에서 가져온 뒤, 마지막으로 남길 말을 적기 시작했다.

이제 선처를 호소하는 문장은 한 줄도 없이,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사죄로 가득한 문장만 가득했다.

-스릉.

이신아는 부엌에서 식칼을 꺼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겨눈 다음, 눈을 감았다.

-후욱!

이제는 이 생을 지속할 의미가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그녀는 그대로 팔을 안으로 당겨 자신의 목을 찔렀다.

다음화 보기

초저녁.

정성민과 가족들이 행복한 식사 시간을 가지고 있을 때, 이신아는 빈 냄비를 끌어안고 허망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봤다.

그녀는 끌어안은 냄비의 온기를 느끼며 자신의 지난 세월을 돌이켜보았다.

재벌가의 막내딸로 태어나 잠깐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이후론 엄격한 부모님의 통제 아래 살다가 정략결혼으로 팔려가야 했던 그때, 정현재를 만난 것까지.

20대 초반까지의 자신은 그리 썩 행복하다고 볼 수는 없었다.

타고난 외모와 집안 덕분에 공주처럼 살아온 자신이었지만, 자신에겐 자유가 없었으니까.

그러한 자신이 겨우 숨통을 틜 수 있었던 이유는 정현재를 만나서부터였다.

그는 여타 자신을 지배하고 취하려했던 남자보다, 부드럽게 자신을 지지해주는 남자였다.

자신을 구해주겠다기보단 자신의 뜻을 지지해주는 남자였다.

이신아는 오히려 그런 정현재 덕분에 ‘자유’라는 꿈을 꿀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자신의 ‘신분’을 버리는 대신 ‘자유로운 삶’을 얻게 된 이신아였다.

이후 20대 초반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세월이 그녀에겐 황금기나 마찬가지였다.

비록 힘들었지만 그와 함께 개척하는 삶이 행복했으니까.

마침내 이룬 가정이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네가 다 망쳤어 네가 다 망쳤어 네가 다 망쳤어 네가 다 망쳤어 네가 다 망쳤어 네가 다 망쳤어 네가 다 망쳤어 네가 다 망쳤어】

하지만 다 망쳐버렸다.

장성한 아들과 딸이 인생을 꽃피우려는 이때, 남편을 의심하고 미스터 최에게 빠져들며, 그가 선사하는 쾌락에 모든 것을 내어주며 다 망쳐버리고 말았다.

이 정도 지경까지 이르지 않을 수많은 기회가 있었지만, 그 기회를 모두 제 발로 차버렸고, 오히려 미스터 최를 선택한 게 옳은 것이라며, 그를 더욱 맹신하며 양심의 가책없이 가족을 짓밟은 자신이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