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편, 이 모든 대화를 엿듣고 있는 구(久) 도원걸의 맴버들.
그들은 셋은 정성민의 방문에 귀를 댄 채 흐뭇하게 웃고 있었다.
이내 정성아의 ‘사랑해’ 발언까지 모두 들은 그들은,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귀를 뗐다.
“마침내 해내셨어. ‘전여자친구’인 나를 구원했던 그 방법으로.”
“프흐흐. 당연한 결과 아니겠어? 역시 ‘내 남자’셔.”
“후후. 과연 ‘나의’ 정성민이라 할 수 있겠네. ”
훈훈한 결말을 확인하자마자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하는 셋.
그때, 이하영이 말했다.
“그런데 성아는 바로 주인님의 ‘여자’가 되는 건가. 부럽다.”
“프흐흐. 그러게 업보 좀 적당히 쌓지 그랬어? 네가 주인님을 괴롭힌 영상만 1테라가 넘는단다.”
“윽....”
“그 정도였어?”
사랑하는 정성민을 괴롭힌 영상만 1테라 바이트.
그 사실에 화들짝 놀란 백하윤은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이하영을 내려보았다.
“그런데 언니는 광란의 섹스 파티를 몇 년이나 했더라? 고작 1테라로는 안 될걸요?”
하지만 이어지는 이희연이 말에, 백하윤은 딴청을 피우며 크흠 헛기침을 했다.
이하영이 두 눈을 사악하게 빛내며 뒤틀린 미소를 지은 것은 그때였다.
“후후. 희연아? 너도 깨끗하기만 한 건 아니야. 그 파일, 나한테 있거든.”
그 파일.
그 수상쩍은 단어에 이희연의 두 귀가 쫑긋 올라갔다.
그녀는 한껏 인상을 찌푸린 채 이하영을 보며 말했다.
“그 파일? 뭔 파일? 난 죄지은 거 없어.”
팔짱을 낀 채 치지직- 레이저를 쏘는 이희연의 눈.
자신이 지은 죄라곤 미스터 최에게 여러 번 대준 것, 그리고 주인님을 부랄을 걷어차고 복부를 두들겨 팬 뒤 사랑하라고 강요한 것밖에 없었다.
아무렴 투트랙 걸레 이하영과 상폐 이모 백하윤 언니보다는 훨씬 낫지 않은가.
하지만 이하영은 자신이 쥐고 있는 카드가 확실한지, 기분 나쁜 웃음만 흘릴 뿐이었다.
“큿... 뭔데? 그 파일이 뭔데?”
결국 안달이 난 이희연이 이하영에게 파일의 정체를 추궁했다.
그런데 그때, 백하윤이 피식 웃으며 지원사격에 나섰다.
“아~ 그 파일? 무슨 파일인가 했더니 그 파일이었구나.”
백하윤은 그렇게 말하며 쿡쿡 웃음을 흘렸다.
그녀 또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패가 확실한지, 기분 나쁜 웃음을 흘리며 깔보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
차분하게 가라앉은 분노.
이희연은 그러한 분노를 담아 이하영과 백하윤을 노려보았다.
도대체 그녀들이 말하는 ‘그 파일’이 뭔지, 알 길이 없었다.
설마 자신이 주인님의 여자가 되었다고 둘이 동맹을 맺어 나를 견제하는 건가.
하지만ㅡ.
“후. 상관없어. 어차피 난 주인님의 ‘여자’. 너와 언니는 ‘노예’. 언젠가 나는 주인님의 씨를 받겠지만, 너와 언니는 받지 못하겠지. 후후... 그러니까 상상해봐. 언젠가 주인님을 닮은 귀여운 내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거야. 엄마, 투트랙 이모랑 상폐 이모는 왜 결혼하지 못했어요? 왜 맨날 청소와 걸레질만 하고 있죠? 크흐흐... 어때? 눈앞이 아찔하지 않아?”
승리의 미소를 지으며 눈을 빛내고 있는 이희연.
그때, 이하영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하지만 아들에게 ‘그 파일’을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
백하윤이 옆에서 거들었다.
“엄마 이런 사람이었어요? 하면서 화들짝 놀라겠지.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보겠지.”
부들부들 떨리는 이희연의 손.
도대체 그 파일이 뭐길래 저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을까?
대체 어떤 가불기를 입수했길래!
“나, 난 당당해! 주인님도 이미 모두 용서하고 나를 ‘여자’로 인정해주셨는걸? 그딴 걸로 흔들어봤자 소용없어.”
“하지만 ‘그 파일’을 보여주면 어떻게 될까? 용서를 철회할 수도 있지 않으실까?”
“가능성이 적진 않아. 그만큼 ‘그 파일’의 내용을 충격적일 테니.”
계속되는 ‘그 파일’ 공세에 이희연은 머리를 굴려보았다.
자신이 주인님에게 큰 죄악을 저지른 게 어떤 것이 있을까.
저들이 저렇게 호언장담을 할 정도면, 얼마나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일까.
‘뭐지? 대체 뭐지? 바닥에 침을 뱉고 핥아먹으라고 시킨 것? 사타구니를 걷어찬 것? 날 사랑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협박한 것? 미스터 최의 명령에 따라ㅡ’
헉! 화들짝 놀라는 이희연.
제 발에 발을 저린 이희연은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이하영과 백하윤의 눈치를 보았다.
과연, 그 순간을 영상으로 입수했다면 저들이 저렇게 의기양양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하하. 이 좋은 날에 다들 왜 이런대? 좋은 덕담을 나눠도 모자랄 마당에.”
이희연은 그렇게 말하며 볼을 긁적였다.
이하영은 그런 이희연의 어깨에 손을 얹고는, 그녀의 귀에 속삭였다.
“우리에게 ‘그 파일’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마. 앞으로 잘 지내보자?”
이희연은 그 순간을 떠올렸다.
주인님이 정성아를 조교 했을 때, 자신이 이하영과 백하윤을 깔보던 순간을.
주인님에게 사랑받는 자신과, 주인님 앞에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이하영과 백하윤을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끼던 순간을.
‘괘, 괜히 자극했잖아. 승리감에 도취해선.’
이희연은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하영과 백하윤에게 사람 좋은 미소를 보이며 화제를 전환했다.
“어쨌든 오늘 정말 기쁜 날 아니야? 주인님께서 첫 번째 가족을 되찾은 날이야. 당장 축하 파티를 준비해야 해.”
황급히 화제를 전환하려 하는 티가 났지만,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이런 기쁜 날 주인님을 축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 성아가 주인님의 ‘여자’가 된 것에는 의미를 두지 말자고. 그분은 주인님과 같은 ‘성족’. 애초에 타고난 신분이 다른 거야.”
주인님과 같은 피를 나눈 같은 씨족.
그러하니 정성아 또한 주인님과 같은 성족.
“...음, 그 논리는 좀 바꿔야겠는데?”
하지만 이에 이견을 제시하는 이하영.
이희연이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거야? 신성모독이야!”
성민교의 철저한 광신도 이희연.
그녀의 신경질적인 말에 이하영이 고개를 갸우뚱하며 답했다.
“아니... 같은 피를 나눈 이유 때문에 성족이라면... 그 피를 누구에게 물려받았는데.”
“그야...!”
멈칫하는 이희연.
그녀는 정성민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올려보았다.
아버지는 정현재, 어머니는 민세라가 된 이신아였다.
.....신성모독이었다.
***
“비상 회의다. 소집 명령 내려.”
30분 뒤, 정성민이 황급한 표정을 지으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정성민의 축하파티를 준비하던 3자매는 갑작스러운 주인님의 소집 명령에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이 생긴 겁니까?”
정성민의 오른팔이자 최측근 비서 이희연.
보통 일이 터진다면, 자신이 먼저 알고 주인님에게 보고하는 식이었다.
그러하니 자신이 먼저 돌발상황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그건 크나큰 죄.
직무유기가 되는 것이다.
“성아에게 중요한 정보를 들었다. 미스터 최가 박종필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더군.”
다만 정보의 출처는 정성아.
이희연은 내심 안도하면서도, 눈을 빛내며 머리를 굴려보았다.
미스터 최가 박종필을 내쫓고 그 자리에 이신아를 앉히려는 수가 계산되었다.
“어머님이 내정되어 있겠군요.”
“그래.”
“전략관들 모집하겠습니다. 박종필의 처분은 어떻게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을까요? 그를 구하려 한다면 리스크가 따르지만, 잘만 하면 고급 정보를....”
뒷말을 흐리는 이희연.
정성민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지 않고 다른 한곳으로 고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희연은 정성민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ㅡ
“.....”
호흡을 가쁘게 내쉬며, 몸을 덜덜 떨고 있는 백하윤이 있었다.
정성민은 그런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박종필은 무조건 구한다. 다소 리스크를 짊어져서라도.”
“네. 주인님. 그러면 박종필 구출 계획은....”
“박종필은 구출은 나와 안지연이 직접 한다.”
“...예?”
“시간이 없어. 이미 박종필은 부하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을 거다. 민세라가 그의 세력을 다 잡아먹었거든.”
“.....”
이희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주인님이 박종필을 구하러 간다면,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결론은 하나였다.
“그러면 저는 정성아를 안전하게 복귀시키는 방법을 고민해보겠습니다. 주인님의 무사 귀환을 바랍니다.”
정성민이 박종필을 구출하러 간다면, 이희연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백하윤의 자살 시도를 막으러 온 정성아의 알리바이를 최대한 확보하여, 미스터 최의 진영에 복귀시키는 것.
즉, 정성아가 미스터 최의 진영에 복귀한 뒤, 의심받지 않도록 모든 방책을 꾀하는 것. 그것이 자신이 할 일이었다.
‘내일이면 미스터 최와 민세라가 성아를 재조교 한다고 했었지... 이에 대한 대비도 필요하겠어.’
완전히 정성민의 여자가 된 정성아이지만, 내일 있을 재조교 과정이 괴롭지 않도록 대비를 할 필요는 있었다.
이를테면 쾌락에 둔감해지는 약이라던가, 아니면 몇 분간 감각을 차단하는 약이라던가.
“그래. 항상 의지하는군. 작전은 백하윤과 같이 짜도록 해. 이하영은 이제 제2향락소로 복귀해야 하니까.”
그렇게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다음 명령을 내리는 주인님.
이희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주인님.”
“그럼 한시가 급하니 먼저 출발하겠다. 뒷일을 맡기지.”
정성민은 그렇게 말하며 전투 슈트를 챙기러 갔다.
어느새 나타난 안지연은 덜덜 몸을 떨고 있는 백하윤의 어깨에 손을 얹은 뒤, 박종필을 꼭 구해올 거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곧바로 정성민의 뒤를 따라 걸어갔다.
***
“허억... 허억... 허억....”
같은 시각.
박종필은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왼쪽 복부를 움켜쥔 채 달아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일궈온 마약 공장을 뛰쳐나와, 인적이 드문 어둑한 골목으로 발길을 꺾은 다음, 몸을 숨길만 한 곳을 두리번거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여신님이... 나의 여신님이...’
이렇듯 목숨이 위태로운 박종필이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오직 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자살하러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나의 여신님.
그분이 어떻게 됐을지, 정말로 죽은 것은 아닐지, 만약 정성아가 그분을 구해줬다면 몸은 얼마나 다치지 않았을지.
오직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내가... 내가 구해야 해. 이번에는 반드시...’
주인님에게 버림받은 자신과 여신님.
박종필은 문득 16년 전의 그 날을 떠올렸다.
부산에 있는 ‘타겟’을 죽이면 자신과 여신님을 놓아주겠다고 한, 주인님의 약속.
그때의 자신은 너무나도 여리고 어리숙해 타겟을 죽일 수 없었다.
그 결과 여신님을 잃고 말았다.
‘이번에는... 이번에는 반드시...’
울컥울컥 피가 쏟아지는 왼쪽 복부.
허나 박종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그였다.
그는 밤길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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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제 SUV 승합차.
그곳엔 특공복 차림의 인원이 8명 있었다.
정성민과 안지연. 그리고 최정예 요원 여섯.
이 전력이면 박종필을 좇는 무리 정도는 쉽게 처치할 수 있는 전력 구성이었다.
“총기는 사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들에겐 총기를 사용할 수 없는 제약이 있었다.
애당초 한국에서 총기 사용은 불법이고, 적의 몸에 박힌 총알로 경찰의 추적을 당할 수 있기에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박종필의 구출이 최우선이다. 살인은 최대한 피해라.”
웬만해선 구출만 하고 빠지는 게 좋았다.
전투를 하면 할수록 흔적을 남길 테고, 흔적이 많으면 많을수록 뒤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정성민은 이 사실을 부하들에게 철저히 숙지시켰다.
그리고 물었다.
“도착까지 얼마나 걸리지?”
“30분 더 가야 합니다.”
“서둘러라.”
-부아아아앙....
악셀을 밟아 속도를 올리는 SUV차량.
정성민은 창문을 보았다.
창문 밖에는 환한 달이 어둠을 헤치고 있었다.
***
한편, 정성아는 이희연에게 속성으로 과외를 받고 있었다.
이를테면 정성민이 이룩한 세력, 정성민이 거느린 전력, 정성민이 이룩한 사업 구조 등등 그가 이룩한 모든 것에 대해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
“...생각보다 훨씬 대단하네요.”
이런 고급 정보를 정성아에게 알려주는 이유.
이제 그녀도 정성민의 사람이 되었으니,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미스터 최의 세력으로 들어가 ‘이중첩자’로 활약하려면, 이쪽의 상황과 저쪽의 상황을 모두 꿰찰 필요가 있었다.
“...조심해야 할 부분도 알려줄게.”
그렇게 이희연의 속성 과외가 끝나자, 이번에는 백하윤이 자신이 쌓아온 노하우를 전수해주었다.
뒷세계의 여왕으로 살아남기 위해 뭘 해야 하고, 뭘 조심해야 하고, 어떤 스탠스를 유지해야 하는지, 지난 15년의 세월이 응축된 고급 정보들을 전수해주었다.
“알리바이는 이렇게 맞추자.”
그다음으로 해야 할 것은 알리바이를 맞추는 것.
공식적으로 정성아는 자살을 하려는 백하윤을 쫓아와 그녀의 고향에 있다는 설정이었다.
그러니 그에 맞는 알리바이를 만들어 의심을 피할 필요가 있었다.
다행히 이희연이 알리바이를 잘 준비해줬기 때문에, 정성아가 해야 할 일은 알리바이를 숙지하고 연기하는 것뿐이었다.
“고마워요...”
단지 정성민의 여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이 받은 모든 혜택.
정성아는 그 무게감을 느끼며 주먹을 꽉 쥐었다.
이후, 그녀는 이희연이 준 약물을 챙긴 뒤, 미스터 최의 본진으로 귀환할 준비를 했다. 떠나기 전에 정성민과 작별 인사를 하지 못 하는 것은 아쉬웠지만, 지금은 하루 빨리 본진으로 귀환을 해, 의심을 피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럼... 다음에 기회가 될 때 다시 올게요. 나중에 봐요.”
정성아는 마지막으로 이희연과 백하윤에게 인사를 했다.
이제 타락한 길에서 벗어난 그녀는 이전과는 다른 결연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
미스터 최의 집무실.
원래 그가 앉아야 할 의자에는, 현재 이신아가 앉아있었다.
올블랙의 관능적인 드레스에 자줏빛 사파이어 귀고리를 차고 있는 그녀는 날카로운 눈으로 자신의 앞에 뒷짐을 지고 있는 사내들을 훑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