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9화 (189/303)

아빠가 왜 이러지.

아빤 항상 나한테 친절했는데.

“아빠. 시신은 나중에 수습해도 괜찮아. 우선 여기는 위험하니까ㅡ.”

“엘레나!”

아빠를 위해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고 싶었는데, 이번엔 고성을 지르며 내게 낯선 눈빛을 쏘는 아빠. 원래 아빠는 내가 이런 말을 할 때면 똑똑한 공주님이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어줬는데, 지금 아빠의 반응은 너무 낯설었다.

“제발... 제발 그만 말해... 알겠으니까 그만... 그만 입 다물어...”

“.....”

아빠는 울먹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뭐, 그래. 고모가 죽었으니까 그렇다.

나는 아빠가 오기까지 침대 밑에서 숨을 숙이며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지만, 아빠는 아직 그럴 시간이 없었으니까.

그래서 난 아빠를 이해해주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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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을 생생히 체험한 엘레나.

이후 그녀의 꿈속 세계는 그녀의 아버지와 연관된 기억을 위주로 흘러갔다.

‘그 날’ 이후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는 아빠.

이후 고모의 복수를 다짐하며 마피아 전쟁에 뛰어든 아빠.

마피아 내전에서 승승장구하며 점점 세력을 넓혀가는 아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소중한 사람을 많이 잃어 괴로워하는 아빠.

엘레나는 그 모든 아빠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때 느꼈던 그 감정을 체험했다.

“엘레나.”

그리고 엘레나는, 15살의 어느 밤. 자신의 방에 찾아온 아빠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때 아빠는 술에 잔뜩 취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는 고모의 기일이기 때문이었다.

“내가 생각을 좀 해봤다...”

알콜 향이 가득한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기 시작하는 아빠.

엘레나는 그의 모든 모습을 눈에 담았다.

“네 고모가 죽은 것은, 남편을 잘 못 만났기 때문이야...”

고모의 죽음을 자신의 부하 탓으로 돌리는 아빠.

그가 이어서 말했다.

“능력도 안 되면서 욕심을 부린 그 새끼 때문에! 안나는! 안나는...”

눈물을 삼키며 뒷말을 흐리는 아빠.

엘레나는 이때 아빠의 공허한 마음을 파고들 때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자신을 멀리하는 아빠와 가까워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 말이다.

“맞아. 무능력한 고모부 탓이야.”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아빠를 안았다.

그의 등을 토닥이며 그의 죄책감을 덜어내 주려 했다.

“아빠 잘못이 아니야. 아빠가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무능력한 고모부 때문에 언젠가 안나 고모는 화를 당하고 말았을걸.”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빠의 두 볼을 잡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을 보게 만든 다음, 두 눈을 맞췄다.

“아니면, 나를 안나라고 생각해.”

이반 벨린의 딸 이반 엘레나.

그녀는 이반 벨린의 여동생과 똑 닮은 얼굴이었다.

마치 그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점점 안나를 닮아가고 있었다.

“..... 안나.”

광기에 가득 찬 아빠의 눈.

마치 여인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엘레나는 자신의 직감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분명 안나 고모와 아빠는, 아주 어렸을 적 남매 이상의 감정을 품은 적이 있던 것이다.

“안나를 그런 쓰레기에게 맡기면 안 됐어. 그치?”

하여 엘레나는 알 수 있었다.

고모를 뺏어간 고모부를, 아빠가 얼마나 원망하고 있을지.

고모를 죽게 만든 고모부를 아빠가 얼마나 증오하고 있을지.

역시 고모부는 사고사가 아니라 아빠에게 살해당한 거구나.

“나는 오직 아빠 편이야.”

엘레나는 영악했다.

나이에 비해 머리가 비상했던 그녀는 고모가 죽던 날 자신의 감정을 죽여야 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슬픔을 틀어막아야만 울지 않을 수 있고, 울지 않아야 침대 밑에 숨은 걸 들키지 않을 테니까.

“사랑해.”

하여 엘레나는 나름 계산적으로 이반 벨린에게 접근했다.

아빠가 고모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은 것과, 자신이 고모를 빼닮은 것을 이용하기로 했다.

-스으윽...

그렇게 엘레나는 스르륵 눈을 감으며 이반 벨린의 입술을 향해 나아갔다.

만약 여기서 아빠가 실수를 저지르면 아빠의 죄책감을 이용해 아빠를 내 맘대로 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하며, 그의 입술을 향해 나아갔다.

“엘레나...”

하지만 이반 벨린의 반응은 예상했던 것이 아니었다.

이렇게 만취했으니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날’과 비슷한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마치 괴물을 보는 듯한 눈으로.

“... 괜찮아. 나만 알고 있어.”

엘레나는 아빠의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고모에게 남다른 감정을 품은 것을, 어떻게 네가 알고 있냐고.

아빠는 그런 눈을 하고 있었다.

“엘레나. 너는...”

충격받은 듯한 아빠의 얼굴.

엘레나는 조금씩 풀고 있었던 단추를 이불로 가리며 말했다.

오늘은 때가 아니었다.

“아빠 많이 취했어.”

“...뭐?”

“장난치는데 왜 이렇게 진지하게 받아들여. 그냥 해본 소린데.”

“.....아...”

“술 냄새 나. 나 잘 거야.”

“.....”

순식간에 태도를 바꾸어 순진한 딸을 연기하는 엘레나.

이반 벨린은 고개를 끄덕이곤 방 밖으로 퇴장했다.

엘레나는 아빠가 나간 뒤 아빠에 관해 적어놓은 노트를 꺼내 오늘 알아낸 항목을 추가했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는다.(아마도)

2. 아빠는 고모를 여자로서 사랑했고, 아직 그리워하고 있다.

3. 고모부는 사고사가 아니라 아빠한테 살해당했다.

4. 아빠는 결국 선을 넘지 않는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모부 같은 쓰레기에게 안나 고모를 넘겨주는 일은 없을 테니까.

아빠에 관해 깊은 비밀을 알아낸 엘레나.

그녀는 다시 노트를 넣은 뒤 아빠에게 어떻게 다가갈지 고민해봤다.

그렇게 여러 가지 방법을 궁리하다, 어렸을 적 환하게 웃으며 공주님이라 불러주던 아빠의 모습을 꿈꾸며 잠이 들었다.

***

엘레나의 꿈은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는 어느새 19살의 아름다운 여인이 되어있었다.

이제는 완전히 앳된 티를 벗어나 골반라인이 부각되고, 가슴도 봉긋하게 솟아올랐다.

-찌걱 찌걱 찌걱 찌걱 찌걱 찌걱

어엿한 숙녀가 된 엘레나.

하지만 아빠에 대한 그녀의 집착증은 해가 갈수록 더욱 심해지게 되었다.

이제는 그를 상상하며 자위를 할 정도로 그녀는 아버지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다.

‘아빠...아빠...’

-프슛! 프슛! 프슛! 프슛!

엘레나는 아빠를 사랑했다.

마피아를 통합하여 정점에 오른 그의 힘을, 파괴력을, 추진력을, 권모술수를 모두 사랑했다.

그런데 그런 아빠의 은밀한 비밀을 자신만이 알고 있다는 것에 우월감을 느끼기도 했다. 아직도 고모를 잊지 못해 고모의 기일마다 괴로워하는 아빠를 보며 미소를 짓는 엘레나였다. 이제 자신은 고모의 전성기 시절을 미모를 갖추게 되었으니, 아빠를 장악할 자신이 있었다.

아빠가 다시 나를 돌아봐 줄 때가 온 것이다.

‘중세의 왕족은 고귀한 피를 보존하고 권력을 집중하기 위해 근친상간을 했다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어.’

수십 개로 쪼개진 마피아 세력을 통합하여 그들의 왕으로 군림한 아빠.

엘레나는 ‘이제 진짜 공주님이 되었네’라고 생각하며 쿡쿳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녀가 원하는 건 공주 따위가 아니라 왕비로서 왕의 옆을 지키는 것이었다. 아빠는 엄마를 사랑하지 않으니, 안나 고모를 똑 빼닮은 자신만이 아빠를 위로해줄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ㅡ.

“하으응! 흐응! 으응! 하으응! 회장니임...♥”

-퍽! 퍽! 퍽! 퍽! 퍽! 퍽!

웬 낯선 여자와 뒹굴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확인하곤,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그녀였다. 하지만 이 또한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원래 왕은 여러 여자를 취하기 마련이니까.

누구보다 가정적인 아빠가 이런 불륜을 저지르는 건 좀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래도 뭐, 아빠도 괴롭겠지. 아직도 안나 고모를 잊지 못하고 있는데.

“안나. 뭐든 필요한 게 있으면 말해라.”

하지만 그 낯선 여자를 ‘안나’라고 부르는 순간.

그년에게 간이고 쓸개고 다 내줄 것처럼 매달리는 모습을 본 순간, 엘레나는 사랑해왔던 아빠에게 큰 배신감을 느꼈다.

왕으로 군림해야 할 그가 고작 저런 볼품없는 년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저런 병신년에게 감히 ‘안나’라는 명칭을 붙이다니.

그 이름은 언젠가 내가 계승했어야 할 이름인데.

“으아아아아!! 아아아악!!”

분노가 폭발한 엘레나는 방으로 돌아와 있는 대로 물건을 다 때려 부쉈다. 물론 매일 아빠에 대해 써오던 일기장 또한 부욱- 부욱- 찢어 사방에 뿌려버렸다.

“하아... 하아... 하아...”

한바탕 난리를 친 엘레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아빠를 그 여자에게 영영 빼앗길 것이라 생각하니 허망함과 절망이 밀려 들어왔다.

그래서 엘레나는 생각했다.

‘아빠를 명예롭게 해주자.’

지금의 아빠는 너무나 추했다.

온갖 위기를 해치고 마피아의 왕으로 군림한 아빠가 그깟 볼품없는 년에게 휘둘리는 모습은 자신이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런 건 아빠의 모습이 아니었다.

“실행해.”

하여 엘레나는 자신의 수족을 부려 아빠의 건강을 악화시켰다.

누구도 눈치챌 수 없을 만큼 교묘하게 수를 써, 아빠가 입원하도록 만들었다.

-삐. -삐. -삐. -삐.

그렇게 병실에 누운 아빠를, 볼품없이 늙어버린 아빠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결국 아빠는 그날 이후 한 번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셨다.

엘레나는 그 사실에 절망하며 아빠의 팔에 연결된 링거에 주사를 놓았다.

이 약을 놓으면 아주 잠깐만 발작을 일으키다 누구보다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것이다.

“엘레나....”

그런데 그때, 자신을 부르는 아빠의 목소리.

엘레나는 링거에 주사기를 꽂은 채 고개를 돌려 아빠를 보았다.

아빠는 쉬-익 쉬-익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자신을 보고 있었다.

“역시 네 짓이었구나...”

“.....”

엘레나는 말없이 아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링거에 주사기를 뗀 뒤 아빠에게 다가가 산소호흡기를 떼 냈다.

그리고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말했다.

“아빠. 아빠 손으로 그 여자를 정리해. 그러면 살려줄게.”

진심을 담아 자신의 마음을 전한 엘레나.

하지만 아빠는 자조 섞인 웃음을 짓더니 큭큭 웃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 왜 웃어?”

엘레나는 아빠의 웃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살려달라고 빌어도 모자랄 판인데, 대체 왜 웃는 걸까.

이제 아빠의 목숨은 내 손 안에 있는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지.”

“.....”

“집요하게 날 관찰하는 네 시선. 어린아이의 눈빛이 아니었어. 그건 마치...”

뒷말을 흐리는 이반 벨린.

그러다 엘레나를 보며 중얼거리듯 내뱉는 말.

“역시 넌 괴물이었어.”

괴물.

그 말을 들은 엘레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일순간 자신을 공주님이라 부르던 아빠의 모습이 오버랩되었다.

“엘레나. 넌 안나를 전혀 닮지 않았어. 안나는 그 누구보다 배려심이 많은 아이였지. 넌 절대 안나가 될 수 없어...”

허나 그가 내뱉은 다음 말에, 공주님이라 말하며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아빠의 모습은 산산이 흩어 사라진다. 엘레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말했다.

“아, 아니야. 이건, 이건 아빠가... 다 그 여자 때문에...”

엘레나는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중얼거리다, 인기척이 들려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핸드폰을 향해 손을 뻗는 아빠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필사적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거는 아빠.

엘레나는 공허한 눈으로 전화를 걸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았다.

그리곤 피식- 웃음을 흘리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는 이미 처리했어.”

“.....”

멈칫, 굳는 아빠의 표정.

엘레나가 일어서며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정돈 예상할 수 있잖아.”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아빠의 폰을 낚아챘다.

그리곤 주사기를 집어 들어 링겔에 꽂은 다음, 아빠를 보며 말했다.

“아빠는 딸을 끔찍이 사랑한 사람으로 기억될 거야.”

“아니, 넌 괴물ㅡ”

“잘 가.”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주사기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곧장 뒤돌아 병실 밖을 빠져나왔다.

.

.

.

.

“엘레나.”

이후 그녀는, 긴 꿈에서 깨어나게 되었다.

옆에는 정성민이 나란히 누운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아? 악몽을 꾼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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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삶을 꿈으로 돌아본 엘레나는 서서히 눈을 떴다.

허나 서서히 의식이 돌아오고 있음에도 머릿속엔 안개가 낀 듯 찌뿌둥했고, 정성민이 내뱉는 말은 수중에서 듣는 것처럼 모호하게 들렸다.

“괜찮아...?”

걱정이 한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성민.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금발을 쓰다듬어주었다.

그리고 아이를 달래듯 그녀를 품으로 끌어들여 등을 토닥여주었다.

“잠을 설치더라. 악몽이라도 꾼 거야?”

정성민의 다정한 음성에 엘레나는 안정을 느꼈다.

그녀는 정성민의 품에 더욱 파고들며 방금 그가 한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악몽을 꿨어.”

악몽.

엘레나에게 지난 20년의 인생은 악몽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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