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8화 (188/303)

백하윤은 여전히 비를 맞지 않는 그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다, 당신은 누군가요!”

우뚝 멈춰서는 청년의 걸음.

그가 뒤돌아보며 말했다.

“당신의 팬이요. 노래 잘 듣고 있습니다.”

...노래를, 잘 듣고 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일까.

아! 저번에 남고에서 했던 특별 공연을 말하는 걸까.

“마음이 가는 곳으로 가세요. 지금 당신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허나 그의 정체를 묻기도 전, 그는 그 말을 남기고 자취를 감춰버렸다.

그는 마치 신기루처럼 폭풍우 저편으로 사라져버렸다.

“.....”

귀신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신비롭게 등장해 홀연히 사라져버린 그.

하지만 손에 들린 우산은 그가 존재했음을 명백히 증명해주고 있었다.

이윽고 백하윤은 그가 자신에게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렸다.

“내가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는 곳으로... 가라고.”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사람.

이토록 비참한 나를 위로해줬으면 하는 사람.

“박종필...”

백하윤은 그의 이름을 중얼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그의 집 앞에 도착한 그녀는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고, 박종필을 마주하고, 그에게 안겼다.

그의 집으로 들어가 온수로 몸을 씻고. 따뜻한 차를 마시고, 따뜻한 이불로 몸을 덥혔다. 이윽고 자연스럽게 그에게 사랑을 느낀 그녀는 키스를 하고 몸을 섞고 처음을 허락해주었다.

모든 것이 그녀가 원래 가지고 있던 기억 그대로 흘러갔다.

다만 박종필과의 섹스가 끝난 뒤, 그녀에겐 한 가지 의문이 남아 있었다.

박종필의 집에 도착하기 전, 폭풍우 속에서 만난 그는 누구였을까.

왜 자신에게 그런 예언 비슷한 말을 하고, 우산을 건네준 뒤 홀연히 사라졌을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 답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은, 그녀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언젠가 이 지독한 가난에서 탈출할 수 있을 거란 그의 말이,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가 될 수 있을 거라는 그의 말이. 확신을 담아 자신에게 말하는 그의 음성이,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

연옥(煉獄)에는 강력한 안정제가 들어있다.

때문에 약 기운이 빠지기 전까지는 항상 깊은 잠에 빠진 상태가 되는데, 이를 이용해 약을 계속 투여해주면 무한히 꿈속 세계에 헤매게 만들 수도 있다.

-쉬이이익....

허나, 백하윤은 이제 일어나야 할 때이다.

굳이 그녀의 모든 과거를 모두 체험하게 하여, 아픔을 줄 필요는 없으니.

하여 나는 약 기운을 빼며 그녀가 꿈에서 깨어나도록 유도했다.

“.....”

이윽고 천천히 눈을 뜨는 백하윤.

그녀는 한동안 멍한 눈으로 천장을 응시하다,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 정성민.”

내 이름을 부르는 그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보았다.

“우리가 처음 만난 게... 혹시 15년 전이야? 폭풍우가 휘몰아치던 그 날...”

예상대로, 꿈과 현실을 혼동하는 그녀의 반응.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니. 내가 임의로 심은 기억이야. 실제 기억과 혼동하지 않도록 특별한 장치도 해뒀잖아.”

내가 안배해둔 특별한 장치.

우산을 쓰고 있지 않음에도, 비를 맞지 않는 모습.

허나 백하윤은 그 기억을 실제의 기억이라 받아들이고 싶은 모양이었다.

“오랫동안 너와 함께 한 기분이야. 그때 네가 해준 말 덕분에, 내 지난 삶이 덜 힘들 게 느껴지는 거 같아.”

꿈속에서 체험한 과거에 맞게 기억이 조금씩 바뀐 그녀.

그 기억들이 그녀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니, 나는 미소를 지을 뿐이다.

“사랑해”

내 미소에 그녀는 눈물이 가득 고인 눈으로, 다만 환한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이에 나는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에 가벼운 입맞춤을 한 다음, 두 볼을 타고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그리고 옆에 있는 연옥을 보며 생각했다.

‘엘레나. 이제 너를 치유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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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연옥의 테스트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나는 백하윤을 개인 숙소로 돌려보냈다.

이제 이 약을 이용한 최면이 실제 기억을 바꾸는 데 효과가 있음을 확인했으니, 엘레나에게 적용할 때가 되었다.

다만 약을 쓰더라도 그냥 쓰면 안 되고, 그녀에 대한 조사를 철저히 마친 뒤 사용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심상 세계를 내가 원하는 대로 구축할 수 없을 테고, 기억을 바꾸는 데도 문제가 생길 것이다.

-삑.

하여 난 이하영에게 전화를 걸어 정보 수집이 얼마나 이뤄졌는지 물어보았다.

이에 그녀는 지금도 쓸만한 정보들이 많으나, 앞으로 3일이면 더 결정적인 정보들이 있을 거라고 답을 주었다.

“그래. 그러면 수고 좀 해줘.”

앞으로 3일.

그 정도면 딱 적당한 기간이었다.

어차피 최면이 잘 들으려면 엘레나와 내적 친밀감도 잘 쌓아야 하니.

그렇게 난 이곳에 대한 생각을 갈무리하며 이희연에게 보고받은 자료를 확인해보았다. 차도현 검사의 동세와 사이비 종교의 진척도. 그리고 장민혁에 대한 내용이 정리되어 있었다.

“흐음.”

보고서를 읽는 것만으로도 몸이 근질거린다.

특히 저번에 백하윤 압수수색을 막은 것에 차도연 검사가 상당히 열 받은 모양인지, 이곳저곳 일을 벌이고 있는 꼴이 흥미로웠다.

그렇게 설쳐대면 좋은 꼴 보기 힘들 텐데.

“차도연...”

나처럼 주인님에게 가족이 망가진 여인.

그녀 또한 복수를 꿈꾸며 지난 세월을 살아왔지만, 그녀는 ‘정의’와 ‘법’이라는 허울 아래 묶여있는 상태다.

아무렴 진정한 복수를 하려면 그딴 허울 좋은 것들 벗어버려야 하는데 말이다.

“조만간 도와줘야겠군.”

벌써 기대가 된다.

차도연으로 어떤 식으로 바꿔 갈지.

어쩌면 굳이 연옥 같은 걸 쓰지 않고도 그녀의 가치관을 바꿀 수 있지 않을까. 그녀 또한 가족을 잃었고, 복수를 가장 최우선의 가치로 생각하고 있으니까.

정의나 법이 얼마나 쓸모없는 것인지 깨닫게 해주면 될 것이다.

***

3일이 지났다.

이하영은 약속대로 양질의 정보를 내게 주었고, 난 그녀의 자료에 만족할 수 있었다. 이 정도면 거의 엘레나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꼼꼼히 잘 정리되어 있었다.

“수고했어. 곧바로 귀국해야 한다고?”

“네. 구원자에게... 보고는 해야 해서요.”

“... 그래. 한국에서 보지.”

공식적으론 구원자의 여인인 이하영.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인사를 올린 뒤, 곧바로 공항으로 이동했다.

어찌 됐든 이번 러시아 원정의 명분은 구원자 측에 마피아 세력의 협력을 얻어내는 거였으니, 이에 맞춘 보고를 해야 할 것이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만 남았군.”

이하영, 안지연, 백하윤은 모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훌륭히 해내 주었다.

그러니 이젠 내가 그녀들의 노고에 보답할 차례.

난 침대에 누워있는 엘레나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이미 신약을 투여받은 상태로, 지금은 순백의 공간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아직 완전히 잠에 들기 전, 잠깐 머무르는 연옥의 공간에 말이다.

-스으윽...

지난 3일간 엘레나와의 친밀감은 충분히 쌓아뒀다.

난 20살의 젊은 그녀를 마음껏 탐했고, 그녀도 나 못지않게 나를 탐했다.

마치 불같은 3일이라 할 수 있었다.

“엘레나.”

하여 난 그녀의 옆에 누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윽고 엘레나는 미간을 꿈틀거리며 내 말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줭성...민?”

***

새하얀 순백의 공간.

엘레나는 온통 백색으로 빛나는 광경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정성민과 키스를 나누고 있었는데, 눈을 떠보니 갑자기 이런 이상한 곳이다.

[엘레나.]

그때, 귓속을 파고드는 정성민의 음성.

마치 꿈결에서 듣는 듯하면서도, 현실에서 듣는 듯한 오묘한 목소리.

“정성민...?”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나, 느낌이 조금 달랐다.

마치 신의 음성을 듣는 신자처럼 고양감이 올라왔다.

[당황할 거 없어. 모든 건 내 통제에 있으니까.]

정성민의 통제하에 있다.

그 말이 왠지 안심되는 엘레나였다.

[먼 과거로 갈 거야. 네가 아주 어릴 적, 그때로 말이야.]

먼 과거... 내가 아주 어릴 적...‘그때’.

어린 시절의 ‘그때’를 콕 집어 말하면, 엘레나에겐 ‘그 날’을 의미했다.

자신의 고모가 다른 마피아 세력에게 살해당한 그 날 말이다.

-쿠구구구궁...

그렇게 ‘그날’에 대한 일을 떠올리자, 순백의 공간이 붕괴되며 그때의 풍경을 재현하기 시작했다. 끊어 오르는 주전자 소리, 나와 함께 놀던 사촌 동생, 흥얼거리는 고모의 콧노래 소리, 따뜻한 색감의 조명, 바닥에 깔린 알록달록한 카펫,

“흐으으응~~ 흐응~♬”

그리고 그 카펫 위에 엎드려서, 고모의 콧노래를 따라 하며 스케치북에 그림을 그리고 있는 나.

이때만 해도 나는 마피아 회장의 딸이 아니라 평범한 가정의 사랑받는 외동딸에 가까웠다. 이땐 아직 아빠가 본격적으로 ‘마피아 전쟁’에 뛰어들 때가 아니었고, 그런 권력 투쟁에 관심이 없었을 때였으니까.

-탕! 탕! 탕! 탕!

하지만 비극은 언제나 갑자기 일어난다.

아빠의 부하였던 고모부가 ‘마피아 전쟁’에 참가하며, 그 불길이 이곳까지 번진 것이다.

“빠, 빨리 여기 숨어! 어서!”

고모는 나와 사촌 동생을 침대 밑에 숨기곤 방문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이내 고모는 어떤 괴한무리에게 붙잡혀 다시 방안으로 끌려왔는데, 괴한들은 고모를 두고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의견을 조율하고 있었다.

“인질로 잡아두죠. 나중에 협상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예. 일단 살려두죠. 이반 벨린의 여동생 아닙니까. 괜히 중립을 선언한 이반 벨린을 자극할 필욘 없습니다.”

“아니! 형! 이년의 남편이 내 아내를 죽였어! 흐으으...씨발, 그 새끼도 똑같은 꼴을 당해봐야 한다고!”

두목으로 보이는 남자 하나와 부하로 보이는 남자 셋.

부하 중 둘은 고모를 살릴 것을 제안하고 있었고, 나머지 하나는 고모를 죽여야 한다고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형! 여기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내가 나탈리아를 볼 면목이 없어... 똑같이 응징해줘야 해. 제발...”

덜덜 어깨를 떨고 있는 고모.

그런 고모를 보며, 고민을 이어가는 괴한의 두목.

이윽고 두목이 말했다.

“보리스. 네 뜻대로 해라. 우린 나탈리아의 죽음을 기억할 것이다.”

결국 ‘보리스’라는 자의 말을 들어준 괴한의 두목.

아내의 죽음에 감정을 호소하던 보리스는 고개를 끄덕이곤 권총을 고모에게 겨눴다. 그리고 짓씹는듯한 목소리로 고모를 보며 중얼거렸다.

“모든 건... 모든 건 네 남편이 자초한 일이다. 안드레이 그, 개새끼가...!”

-탕!

일순간 불꽃을 내뿜는 총구.

뇌수가 터져 나오며, 풀썩 쓰러지는 고모의 몸.

나와 같이 숨어있던 사촌 동생은 쓰러지는 고모를 보곤 침대 밖으로 뛰쳐나왔다.

“엄마!”

-탕!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고모를 쏘고 흥분상태에 있던 보리스가, 갑자기 뛰쳐나온 사촌 동생에게 놀라 그녀를 쏘고 만 것이다.

“젠장! 보리스! 무슨 짓이야!”

“나, 나도 놀라서...!”

“.....”

울컥울컥 피를 쏟는 사촌 동생.

그녀는 즉사한 고모에게 기어가고 있었다.

괴한무리는 그런 사촌 동생을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결심을 내린 듯 괴한의 두목이 사촌 동생의 머리에 총구를 조준했다.

-탕!

-풀썩.

엄마의 곁에서 생을 마감한 8살 여자아이.

두목은 울먹이는 보리스의 보며 말했다.

“보리스. 이건 사고야. 네 잘못이 아니다.”

“하, 하지만... 이건 내가...”

“나약한 소리 하지 마라. 자식까지 죽인 이상 이제 전면전은 못 피해.”

“.....”

할 말을 잃은 보리스.

이윽고 괴한무리는 발을 돌려 하나둘씩 집에서 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나갔음에도 한참 동안 침대 밑에 숨어 고모와 사촌 동생의 시신을 바라봤다. 그들이 다시 돌아와 나를 죽일까 봐 겁이 나서다.

“엘레나!! 엘레나!!!”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나를 찾는 아빠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나는 혹시나 목소리만 닮은 사람일까 봐 침대 밑에 숨어 상황을 지켜봤는데, 다행히 나를 찾는 목소리가 진짜 아빠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숨어있는 안방으로 들어온 아빠의 얼굴을 확인했으니 말이다.

“아...안나... 안나!!”

다만 난 침대 밑에 있었기에, 아빠는 먼저 고모의 시신을 안아 들었다.

아빠는 뇌수가 터진 고모의 뒷머리를 확인하곤 울부짖기 시작했다.

“아...아아....안나..안나!”

연신 고모의 이름을 부르며 오열하는 아빠.

나는 아빠가 오열하는 사이, 침대 밑에서 기어 나와 아빠의 곁으로 다가갔다.

“에, 엘레나...”

상처 하나 없는 날 확인했지만 혼란스러워 보이는 아빠의 표정.

난 아빠의 팔을 잡으며 내내 침대 밑에서 생각했던 말을 전했다.

“아빠. 보리스가 고모를 죽였어.”

“.....뭐?”

“고모부가 보리스의 아내를 죽여서 보리스가 복수를 한 거야. 그런데 고모는 아빠의 여동생이니까, 아빠와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 대.”

“.....”

“그러니까 빨리 우리도 대비해야 돼. 여기서 시간 낭비하고 있으면 안 돼.”

시간 낭비.

그 말을 들은 아빠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허나 어느새 세상에서 제일 슬픈 표정이 되어선, 내 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엘레나. 너는... 슬프지 않니? 네 고모가... 나의 안나가...”

뒷말을 흘리는 아빠를 보며 생각했다.

...내가 슬프냐고? 모르겠다. 분명 슬펐는데,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어차피 고모는 세상을 떠났고, 중요한 건 남은 사람들 아닐까.

“응. 그것보다 빨리 여기서 나가자. 보리스 일당이 다시 습격할지도 몰라.”

보리스는 한순간의 감정에 휩쓸려서 고모를 죽이고 말았다.

게다가 고모에게 다가가는 사촌 동생까지 우발적으로 쏴 죽이고 말았고.

보리스처럼 감정이 과잉돼서 좋을 건 없다.

“엘레나. 너....”

그때, 마치 날 괴물 보듯 바라보는 아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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