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하아...♥”
이윽고 둘은 몸을 섞기 시작했다.
정성민은 더욱 건강해지고 아름다워진 백하윤의 몸을 탐했고, 백하윤은 정성민의 욕망을 받아들이며 행복을 느꼈다.
“백하윤. 넌 목소리가 정말 좋은 거 같아.”
백하윤의 얼굴을 쓰다듬던 중, 문득 정성민이 내뱉은 한 마디.
그 말에 백하윤이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그, 그런가....?”
“응. 네 목소리로 듣는 한국말. 아름다울 지경이야.”
“.....?”
영문 모를 정성민의 말.
아무튼 칭찬의 의미니, 기분은 좋았다.
“그럼 이제 약을 사용할까 하는데, 준비됐어?”
그때, 살짝 표정을 굳히며 본론을 꺼내는 정성민.
백하윤은 싱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문득 저번 최면과는 다르게 심층 의식으로 진입할 거라 조금 위험할 수도 있다는 그의 말이 떠올랐지만, 아무렴 그에게 도움이 될 수만 있다면 상관하지 않는 그녀였다.
“후-우. 그럼 시작할게.”
따라서 백하윤은, 오히려 긴장한 표정의 정성민을 보며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이렇게 그가 긴장한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그에게 있어 소중하다는 증거니까.
-주우욱....
그렇게 백하윤의 몸에 약물이 주입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백하윤의 시야가 빛으로 점멸되더니, 주위 모든 것이 새하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화아아악!!
사방으로 퍼져나간 빛.
이윽고 전후좌우, 새하얀 선과 면으로 뒤덮이기 시작하는 순백의 세상.
“.....”
백하윤은 그 세상의 중심에서, 자신의 인지를 초월한 시공간의 세계를 보았다.
이곳은 그야말로, 시간적, 공간적 감각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다른 차원의 세계였다.
[백하윤...백하윤...백하윤....백하윤....]
이윽고, 메아리쳐 울리는 정성민의 목소리.
마치 꿈결에서 듣는 듯 오묘하지만, 깨어서 듣는 것 같기도 한 뚜렷한 감각.
“이, 이게 대체...”
의식과 무의식이 공존하는 곳.
마치 꿈과 현실이 교차점을 이룬 듯한 이곳은, 연옥(煉獄)의 세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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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옥(煉獄).
그 사전적 의미는 천국에 들어가기 전, 남은 죄를 씻기 위해 불로써 잠벌(暫罰)을 받는 가톨릭의 사후세계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쉬운 표현을 빌리자면 천국행 기차에 타기 전, 신발을 터는 느낌이라 해야 할까. 깨끗한 몸으로 천국에 들어가려면 죄를 씻어야 하니까.
그런 의미에서 정성민의 신약에 붙은 연옥(煉獄)이란 명칭은 참 절묘하게 잘 어울렸다. 이 약 또한 천국(정성민의 노예)에 진입하기 위해 세척(Brain Washing)을 하는 공간이니 말이다.
[백하윤....]
새하얀 순백의 세계.
그 세계의 중심에 덩그러니 놓인 백하윤은 정성민의 음성을 듣는다.
현실에서 듣는 듯 뚜렷하면서도, 꿈결에서 듣는 듯 흐릿한 그의 음성을 귀에 담는다.
“정성민.....”
아직 그녀의 인지는 현실을 많이 벗어나지 않았다.
하여 귓속에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정성민’의 것이라고 뚜렷하게 인지하고 있고,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안심해라. 모든 건 내 통제에 있으니. 긴장을 가라앉혀.]
시간적 공간적 감각을 전혀 느낄 수 없는 초현실의 세계.
백하윤은 이 드넓은 공간의 중심에서 공포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자신의 통제에 있다는 정성민의 목소리에 금세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잠시 후 네 심층 의식으로 진입할 거야. 그곳에 들어가면 이젠 정말 꿈과 현실을 구분할 수 없게 되겠지.]
수많은 임상 실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 하나.
‘연옥’에 주입된 대상자는 서서히 깊은 잠에 빠져든다는 것.
이는 신경 안정제가 서서히 퍼지도록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먼 과거로 갈 거야. 네가 아주아주 어릴 적부터.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기억이 뭐지?]
아주 어릴 때의 기억...
엄마가 날 품에 안고 동화책을 읽어주던 기억.
날 버리고 다른 남자와 행복을 찾아 떠난 무정한 사람이지만, 그 사람이 너무 밉지만, 여전히 그리운 엄마의 체온.....
-쿠구구구구궁.....
순백의 세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유리창처럼 끄긋-끄긋 금이 가더니, 와장창 허물어지며 어린 시절의 풍경이 소환되고 있었다.
-쿠우우우웅....
은은한 조명이 들어선다.
침대 맡에 있는 스탠드 등이었다.
자신과 엄마는 침대에 누워있는 중이다.
나는 엄마의 팔을 배고 동화책을 보고 있는 중이다.
엄마의 차분한 음성이 내 귓속을 파고든다...
“내 마음은 이런 거야 매우 간단한 거지. 오로지 마음으로 보아야만 정확하게 볼 수 있는 거야...”
스르르-스르르-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
백하윤은 6살로 돌아와 그때의 기억을 ‘체험’하고 있었다.
자세히 기억나는 부분은 1배속으로 그때와 기억을 체험했고.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부분은 빠르게 휙-휙- 스치면서.
그렇게 그녀는, 깊은 꿈속에서 6살 이후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
난 완전히 잠이 든 백하윤을 확인한 뒤 몸을 일으켰다.
지금쯤 그녀는 깊은 꿈에 빠져 과거의 기억을 더듬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제 내가 해야 할 건 꿈속 세상이 ‘현실’이라 인식할 수있도록, 그녀를 가만히 놔두는 것이다. 단 1시간만 방치해도 꿈속에선 몇 년 치의 시간이 흐르기 때문에, 그녀는 꿈속을 현실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계획대로만 풀린다면 신의 기술을 손에 넣은 셈인데.”
내가 꿈꿔왔던 궁극의 약물, 연옥(煉獄).
이 약의 가장 큰 장점은 깊은 꿈에 빠지게 만드는 동시에, 외부에서 들리는 소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즉, 내가 뱉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꿈속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는 말은.....’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꿈의 내용이 바뀌는 원리.
그리고 꿈에 빠진 사람이 꿈속 세상을 현실로 받아들이는 원리.
이 두 원리를 이용하면, 사람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즉, 꿈에서 체험한 것을 현실의 기억으로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물론 이 같은 ‘기억 조작’을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선 꿈속 세상을 바꾸려면 대상자가 꾸고 있는 꿈이 어떤 꿈인지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만약 대상자가 9살 때 놀이공원에 온 것을 꿈으로 꾸고 있는데, 14살 때 놀이공원에 온 기억을 조작하려 하면 기억에 괴리감이 올 수도 있다. 또한 아무런 개연성 없이 터무니없는 기억으로 바꾸려 한다거나, 대상자가 싫어할 만한 기억을 억지로 쑤셔 넣으려 하면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도 있다.
자칫 잘못하면 기억에 혼동이 생겨 성격과 가치관이 뒤틀릴 수도 있고, 정신병이 올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기억을 건드리는 것은 최대한 섬세하게, 그리고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
-달칵.
하여 난 1시간 뒤, 휴대폰에 녹음해놓은 폭풍우 소리를 재생한 뒤 백하윤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곤히 잠든 그녀의 귀에 다음과 같은 말을 속삭였다.
“백하윤. 이제 꿈에서 깨어날 시간이야.”
***
깊은 잠에 빠져있던 백하윤은 스르르 눈을 떴다.
항상 보아왔던 익숙한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잠들었지.....”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추적 추적 내리는 밤.
그녀는 몸을 일으키며 집안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술병과 벽지에 눌러붙은 곰팡이.
컵라면 용기 안에 수북이 쌓여있는 담배꽁초가 눈에 들어왔다.
“.....”
방금 꾼 꿈과는 대비되는 차가운 현실.
따뜻한 엄마의 품 안에서 행복한 나날을 보냈던 유년기 시절의 꿈.
백하윤은 한숨을 쉬며 몸을 일으켰다.
“하아...”
그녀가 보는 집안의 풍경은 항상 이러했다.
집에만 들어오면 항상 엉망으로 어질러져 있고, 아비라는 인간은 술에 진탕 빠져 치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18살의 소녀에겐 너무 가혹한 환경이었다.
-스윽... 스윽...
하지만 백하윤은 강한 아이였다.
기댈 어른이 하나도 없을지라도 미래에 가능성을 맡겨두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주어진 현실에 불평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여 고통스러운 삶을 인내한다. 이런 쓰레기 같은 인간이 남겨놓은 것에 상처받지 않는다.
“후-우!”
그렇게 백하윤은 집안의 모든 쓰레기를 깔끔히 치웠다.
매일 이 짓거리를 반복하다 보니 이 정도 난장판을 치우는 덴 단 30분이면 충분했다.
“언제 오는 거야...”
다만, 꽤 시간이 늦었는데도 아버지가 오지 않았다.
보통 밖에서 사 먹을 돈이 없어서 집에서 술 퍼마시는 인간인데, 10시가 넘도록 왜 집에 돌아오지 않을까.
혹시 어딘가에서 사고라도 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된다.
-벌컥!
그때, 거칠게 열리는 현관문.
곧이어 어떤 중년 남성이 흐느끼는 목소리로 외쳤다.
“흐아아아아!! 백하윤!!”
고성을 버럭 지르며 자신을 부르는 아버지.
백하윤은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곳엔 비에 홀딱 젖은 아버지가 술 냄새를 풍기며 비틀거리고 있었다.
“.... 아빠 밖에서ㅡ”
“너!!”
자신의 말을 낚아채는 아버지.
그의 눈동자엔 슬픔과 광기가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너도 날 버릴 거지! 네 엄마년이랑 똑같이!! 날 버릴 거지!”
돌연 자신을 버릴 거냐고 추궁하는 아버지.
물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이 좆같은 집에서 나가 독립할 생각이다.
그럴 생각으로 독립금 300만원을 몰래 모아두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본심을 내보일 때가 아니라, 이 미친 인간을 진정시켜야 할 때이다.
“내, 내가 아빠를 왜 버려. 그런 일 없으니까... 이제 진정하고...”
“다 알고 있어! 날 버리려고 네년이, 몰래 돈을 모으고 있는 거! 씨발, 네 엄마처럼 다른 남자랑 붙어먹으려고... 날 버리려고 기어코 네년이...”
“.....”
백하윤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아버지 모르게 차곡차곡 모은 자신의 돈을, 이미 아버지가 알고 있다니.
최대한 안 들키게 잘 숨겼는데,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내가... 내가 가만히 둘 것 같아? 크히히히히...씨발, 너는 절대 못 떠나. 너는 절대...”
백하윤은 아버지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집안으로 쿵-쿵- 발을 들였다.
그리고 서랍 뒤에 숨겨놓은 백하윤의 독립금을 꺼낸 다음, 광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네 엄마가... 그년이 기어코 다른 남자의 아이를 낳았어... 크히히히... 너는 아빠 이해하지? 응?”
덜덜덜- 떨리는 백하윤의 어깨.
이윽고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내는 아버지.
백하윤은 아버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나자빠진 그의 손에 들린 독립금을 낚아챈 다음, 이 빌어먹을 집안에서 탈출하려 몸을 일으켰다.
-쿵!
하지만 자신의 발목을 붙잡는 아버지의 손에, 그녀는 쓰러지고 말았다.
백하윤은 필사적으로 독립금을 품 안에 숨기며 소리쳤다.
“안돼!! 절대 못 줘!!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안돼!”
“이 씨발년이!”
그때,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아버지.
그래도 백하윤은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가수의 꿈을 이루기 위한 희망이나 다름없는 독립금을 꼭 품으며 아버지의 폭행에 저항했다.
“내놔! 씨발! 네년도 날 버리려고! 이 씨발 너도 날 버리려고!”
하지만 이성을 상실한 성인 남자의 힘을 이길 순 없었다.
얼굴에 피멍이 들 정도로 끝까지 저항한 그녀였지만, 결국 독립금을 아버지에게 뺏기고 말았다.
“너도 아빠를 이해하게 될 거야! 자! 봐! 씨발, 희망이 불타는 게 어떤 기분인지, 너도 느껴보라고!”
아버지는 그렇게 말하며 300만원 뭉치에 불을 붙였다.
백하윤은 활활 타오르는 돈을 보며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마치 불타오르는 자식을 보는 어미의 심정으로, 재가 되어가는 독립금을 보았다.
“아아아아아!! 아아아! 흐아아아!!”
“크히히히히.... 너, 너도 이제 아빠 맘이 이해되지? 네, 네 엄마가... 그년이 내게 한 짓이 뭔지... 너도 이제 이해되지? 응?”
백하윤은 빛 한 점 없는 시체 같은 눈으로 잿더미를 보았다.
그리고 웃음을 흘리고 있는 아버지를 힘없이 보며, 무미건조한 음성을 내뱉었다.
“당신은 방금, 살인을 한 거야. 이제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
“크히.....흐히.....히........”
웃음기가 사라지기 시작하는 아버지의 얼굴.
허나 그러거나 말거나, 백하윤은 그대로 등을 돌려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천둥이 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거리를 정처 없이 떠돌아다녔다.
그녀의 절규는 폭풍우에 파묻혀 덧없이 흩어져 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
백하윤은 딱히 목적지를 정해두지 않았다.
이대로 폭풍우에 휩쓸려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걸음은 박종필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같은 불행을 공유하고 있는 그에게 자기도 모르게 마음을 준 만큼, 마음이 가는 대로 발걸음이 뒤따르는 것이다.
-또각... 또각... 또각...
그때, 맞은 편에 한 인영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인영은 또렷한 발소리를 내며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검은 장우산을 쓰고 있는 한 청년이었다.
-솨아아아아아....
-콰르르르릉....
천둥 번개가 치는 밤.
청년은 백하윤 앞에 우뚝 섰다.
“백하윤.”
그리고 청년은, 백하윤의 이름을 불렀다.
백하윤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의 얼굴을 보았다.
그의 얼굴은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만큼 잘생긴 얼굴이었다.
“받으세요.”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에 들린 검은색 장우산을 건넸다.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든 백하윤은, 다시 그를 보았다.
그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서 있음에도, 비를 전혀 맞지 않았다.
“당신은 꿈을 이룰 겁니다.”
오묘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그의 모습.
백하윤은 반쯤 입을 벌린 채 그의 말을 귀담아들었다.
“당신은 이 지독한 가난에서 벗어나, 대한민국 최고의 가수가 될 겁니다.”
자신을 위로하는 듯한 그의 음성.
그는 그 말만을 남기고 뒤돌아 걷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