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논, 알고흐 있어요. 어렸훌 때에, 내 주휘, 카짜하, 만았어요흐.”
“.....”
신기했다.
분명 그녀는 아름다운데, 입만 열면 싸대기를 후려치고 싶으니 말이다.
결국 난 참지 못하고 폰을 들었다.
-삑.
“민우야.”
“예, 주인님.”
“와서 통역해라.”
“..... 하지만 엘레나는 한국말에 능통하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 어느 때보다 네가 간절하다.”
“당장 가겠습니다.”
-삑.
난 폰을 주머니에 넣은 뒤 그녀를 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내게 말했다.
“인터프리팅, 필효 엄써요우. 보다쉬피, 나, 한쿡말. 제붭 해요우.”
통역을 뜻하는 영어, interpreting.
그 발음은 버터를 입에 문 듯 유창한데, 한국말은 저 지경이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답했다.
“아니, 존나 못 해.”
“!!!!!”
충격받은 듯한 엘레나의 얼굴.
내 입장에선 충격받은 듯한 저년의 반응이 더 충격적이다.
“놜, 모요크 할, 셈인가요흐? 나, 한쿡말, 촌나, 잘 해요호.”
“제발 닥쳐.”
입만 열면 싸대기를 부르는 그녀.
분명 내 정체를 들킨 심각한 상황인데, 저년이 입을 열 때마다 콩트를 찍는 듯한 기분이 든다. 도대체 뭐하자는 건지.
“주인님!”
그때, 내게 달려오는 내 전용 통역사.
녀석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줄은 몰랐다.
난 녀석이 도착하자마자 엘레나를 보며 말했다.
“후-. 이제 얘기가 좀 통하겠군. 그냥 러시아어로 말해.”
내 말에 엘레나는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리곤 팔짱을 낀 채 러시아어로 뭐라 중얼거렸는데, 통역사가 번역해서 알려주니 그 내용이 참 가관이었다.
“자신의 한국어 실력을 못 알아준 건 주인님이 처음이랍니다. 자존심 상하지만 이번 한 번은 넘어가겠다고 하는군요.”
“.....”
할 말은 많지만 대충 넘어가기로 했다.
지금 중요한 건 저년의 속내를 알아내는 것이니.
하여 난 엘레나에게 내 정체를 알게 된 이유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그녀의 답을 종합해보면 이러하다.
일단 엘레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에게 많은 교육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교육 중 하나가 ‘요주 인물과 배신자를 간파하는 법’인데, 그 때문에 인면피구를 쓴 자와 아닌 자를 구분할 줄 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그녀는 내가 인피면구를 쓴 것을 간파할 수 있었고, 흥미를 가지고 쭉 지켜봤다고 한다. 이후 그녀는 내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 한국에 있는 정보원에게 뒷세계의 주요인물을 다 추려보라고 명령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주요인물 중 목소리와 습관과 말투를 미루어 ‘정성민’이라는 인물로 특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 그런 거였군.”
난 그녀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런 이유라면 인피면구의 존재를 들켜도 이상할 게 없었다.
설마하니 인피면구를 구분하는 방법이 있을 줄이야.
“너 말고 더 아는 사람이 있나?”
어쨌든 궁금증은 해소했으니, 이젠 내 정체를 아는 자가 더 있는지 추궁할 차례.
입막음이 안 된다면 죽여야 한다.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주인님에게 들켜선 곤란하다.
“нет. только я(아뇨. 저만)”
자신만만한 표정, 단호한 대답.
통역할 필요도 없이, 난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내 정체에 대해선 오직 그녀만이 알고 있다.
“원하는 게 뭐야.”
“Сначала покажи мне свое лицо”
통역된 말을 들어보니, 일단 내 얼굴을 보여달라는 요구였다.
이윽고 그녀가 덧붙여 말했다.
“ты выглядишь хорошо....”
“주인님께서 잘 생긴 걸 알고 있다고 합니다.”
“Я хочу увидеть это в реальной жизни.”
“실물로 보고 싶답니다.”
매혹적인 눈빛으로 날 흘겨보며 입술을 핥는 이 요망한 년.
엘레나는 내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다.
-스윽.
이미 들킨 마당에 망설일 건 없었다.
난 곧바로 인피면구를 벗었다.
그리고 짓눌린 머리를 흔들어 풀어준 뒤, 멍한 표정의 엘레나를 보았다.
그녀는 내 얼굴을 감상하며 한동안 침묵하고 있었다.
***
초대 마피아 회장 이반 벨린.
잔혹한 마피아 세계의 정점으로 군림한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애가 강한 인물이었다. 때문에 나이가 많았던 그는 자신이 없어도 부인과 딸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차기 회장 선출’ 시스템을 만들게 되는데, 그 시스템이란 ‘투표제’로 차기 회장 자리를 선출하는 것이었다.
즉,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석유회사를 중심으로 나머지 3개의 세력을 자회사로 둔 뒤, 지분의 대부분을 가족에게 넘겨주는 방식으로 ‘권력 몰아주기’를 하는 게 이반 벨린의 생각이었다.
때문에 마피아의 회장 자리는 바뀌더라도, 석유회사의 최대 주주인 이반 엘레나와 이반 옥사나가 마피아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구조였다.
아무래도 차기 회장이 되려면 ‘투표권’을 가지고 있는 석유회사 상임 이사들의 표를 받아야 하는데, 상임 이사들은 이반 옥사나와 이반 엘레나가 장악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만 이 완벽해 보이는 이반 벨린의 설계도 두 모녀가 갈라서며 모두 망가지게 되었다. 이반 옥사나는 블라디미르에게, 이반 엘레나는 드미트리에게 붙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두 모녀가 갈라섰던 건 아니었다.
사실 두 모녀는 ‘블라디미르만은 회장이 되어선 안 된다’라는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서로 각별했던 두 모녀인 만큼, 사람을 보는 눈도, 가치관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스터 최가 블라디미르에게 힘을 실어주면서, 그런 블라디미르가 ‘이반 옥사나’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면서 문제는 발생하게 되었다. 돌연 이반 옥사나가 블라디미르를 옹호하고 나선 것이다.
그리고 이때 이반 엘레나는 블라디미르의 마수가 뻗쳐오는 저택을 탈출해 드미트리에게 몸을 의탁하게 된다. 어머니를 이상하게 만든 블라디미르가 회장이 되는 것 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했으므로.
그래서 엘레나는 드미트리와 약혼이라는 초강수를 두게 된다.
혹여나 블라디미르가 개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드미트리와 약혼식을 올려 세력 균형에 못을 박아버린 것이다.
-휘오오오오....
상념을 흐트러트리는 시베리아의 찬 바람.
이반 엘레나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잘생긴 청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달빛을 받은 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러시아어로 중얼거렸다.
“억울해요.”
정성민의 얼굴을 보자마자, 억울하다는 말을 내뱉은 그녀.
통역을 전해 들은 정성민은 그녀의 뜻 모를 의중을 물어보았다.
“뭐가 억울하다는 거지.”
“..... 시시한 남자들 사이에서 내 운명을 결정해야 한다는 게, 너무 억울해요.”
시시한 남자들과 그녀의 운명.
정성민이 답했다.
“... 세 후계자를 말하는 건가.”
“네. 블라디미르, 드미트리, 세르게이. 내 아버지의 반도 못 따라오는 머저리들이죠. 당신의 반만 닮았어도 흥미를 보였을 텐데.”
세 후계자를 까내리며 정성민을 칭찬하는 엘레나.
이에 정성민은 낮은 웃음 소리를 내며 말했다.
“큭큭... 입 발린 말은 사양이야. 넌 드미트리와 약혼까지 했었잖나. 지금은 그의 오른팔인 옐친과 미래를 약속하는 사이고.”
“푸흡.”
그러나, 엘레나는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곤 정성민을 흘겨보며 입을 열었다.
“드미트리와는 단순히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것뿐이에요. 그는 내게 블라디미르의 숙청을 약속했고, 나는 회장 자리를 약속했죠.”
“... 그런데 왜 배신했지?”
“욕심을 부리니까요. 내게 집착하더군요. 그래서 그의 부하를 유혹해서 죽였어요. 물론 이하영의 도움을 받은 게 컸지만, 원래는 제가 직접 제거할 생각이었죠.”
정성민은 통역된 엘레나의 말을 듣고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가며 말했다.
“재밌네. 역시 너와 엮인 남자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소문이 사실이군.”
“시시한 남자들이니까요. 저는 진짜를 원해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정성민의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특유의 관능적인 얼굴로 말을 이었다.
“당신 같은... 진짜를 말이죠.”
진짜.
허세나, 과장이나, 부풀림이 없는.
아버지처럼 지배자로 거듭난 진짜 중의 진짜.
엘레나는 그게 바로 눈앞의 남자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나의 뭘 보고 그런 판단을 한 거지?”
다만, 눈앞의 청년은 여전히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보통 이쯤 했으면 반응을 보일 때도 됐는데 말이다.
“당신에 대해 조사를 해봤죠. 그 야망의 크기가 보이더군요.”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정성민의 손을 잡았다.
굳은살이 가득한 그의 손을 느끼며 엘레나는 홍조를 띄웠다.
“당신은 폭풍의 눈이에요. 지금은 조용히 웅크리고 있지만, 언젠가 한국의 뒷세계를 모두 쓸어버리겠죠. 미스터 최도 함께.”
정성민은 당돌한 엘레나의 발언에 기괴하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그리곤 그녀의 손을 꽉 움켜쥐며 답했다.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이는군. 입을 함부로 놀렸다간 제 명에 살기 힘들 텐데 말이야.”
살기가 생생히 와닿을 만큼 진심 어린 그의 말.
하지만 오히려 가슴이 두근거리는 엘레나였다.
그 누가 됐든 거침없이 방해물을 치워내는 그의 방식은, 아버지와 무척 닮아있었다.
“후후... 반응을 보니 제 추측이 맞나 보네요. 진짜로 뒷세계를 엎어버릴 생각이었어♥”
분노한 정성민의 반응을 보며 그의 야심에 더욱 확신을 갖게 된 엘레나.
그녀는 손톱을 세워 정성민의 왼쪽 가슴을 쿡- 찌르며 말했다.
“하지만 말이죠. 제가 입을 함부로 놀리면 죽는 쪽은 당신이 아닐까요? 아직 ‘준비’가 더 필요해 보이던데♥”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정성민의 가슴을 쿡- 쿡- 찔렀다.
이에 정성민은 그녀의 손을 낚아채며 답했다.
“내가 죽어? 아니. 지금 싸워도 이길 수 있어. 다만 더 확실한 승리를 준비할 뿐이지.”
“어머, 그런가요♥”
“그래. 그리고 그전에, 네년을 치워버리겠지.”
정성민은 그렇게 말하며 살기 어린 시선으로 엘레나를 노려보았다.
엘레나는 그런 그의 시선을 받아내며, ‘살아있음’을 느꼈다.
‘역시 위험한 남자가 재밌어....♥’
몸을 부르르 떨며 정성민을 바라보는 엘레나.
지금 당장이라도 탄탄한 그의 몸을 덮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은 그럴 단계가 아니다.
“후후... 감당할 수 있겠어요? 절 여기서 죽이면, 블라디미르가 마피아를 장악할 텐데♥”
“..... 그게 네년의 죽음과 무슨 상관이지.”
“후후... 옐친한테 말해뒀거든요. 내가 죽으면, 당신에게 살해당한 거라 생각하라고♥”
“.....”
“동맹이 파기돼도 블라디미르를 이길 수 있을까요? 하물며 내가 죽으면 옐친은 블라디미르에게 붙을 텐데...♥”
엘레나는 그렇게 말하며 다시 정성민의 왼쪽 가슴을 쿡- 찔렀다.
쿡- 쿡- 쿡- 쿡- 찌르며 다음 말을 이었다.
“만약 블라디미르가 회장이 되면, 당신도 장담할 수 없을걸요? 미스터 최와 블라디미르의 동맹을 상대로, 당신이 이길 수 있으리라곤...♥”
... 이미 완벽하게 설계를 해놓은 엘레나.
정성민의 입장에선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결국 정성민은 한 발 뒤로 물러서기로 했다.
“큭큭큭... 재밌는 썅년이군. 원하는 게 뭐야.”
“후후. 우선 모든 게 끝나면, 옐친을 죽여줘요.”
“역시 썅년이군.”
“그리고... 이곳 러시아 땅에도, 당신의 제국을 세워보지 않겠어요?”
엘레나의 말을 듣자마자 정성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의 말을 해석하자면, 마피아의 회장 자리를 자신에게 주고 싶다는 건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일까.
“....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나?”
“물론이죠.”
“무슨 수로?”
“마피아의 ‘돈’은 우리 일가가 다 거머쥐고 있거든요. 회장은 ‘총 경영권’을 승계하는 자리일 뿐이에요. 우리 일가가 당신을 밀어주면 불가능할 것도 없죠.”
“내부 반발이 만만치 않을 텐데.”
“당신이 그것도 처리 못 할 시시한 남자라면 애초에 얘길 꺼내지도 않았어요. 당신이라면 모두 입 닥치게 만들 수 있잖아요?”
“날 과대평가하는군.”
“후후. 부담스러워 마세요. 제가 지극정성으로 도와줄 테니까.”
정성민은 엘레나의 답을 듣곤 표정을 굳혔다.
지금까지는 듣기 좋은 말만 들었으니, 이젠 자신이 지불해야 할 대가에 대해 들을 차례였다.
“뭐, 그렇다 치고. 당신 제안을 받아들이면 나는 뭘 내놓아야 하지.”
정성민이 내놓아야 할 대가.
그 얘기를 듣자마자 엘레나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간단해요. 오직 나만의 남자가 될 것.”
그녀만의 남자.
정성민은 그 정의에 대해 물었다.
“그게 어떤 남자지.”
“뭐긴 뭐예요. 오직 나만 바라보는 남자죠.”
“.....”
“다른 여자는 모두 내쳐야 해요. 당신을 모실 수는 있지만,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은 금지. 몸을 섞는 것도 금지.”
“그게 전분가?”
“아뇨. 러시아로 귀화하세요. 우리말을 쓰고, 우리 문화를 배우세요.”
“그렇게 되면 한국에 있는 내 조직은 버리라는 얘기인데.”
“믿을 만한 대리인에게 맡기고 오면 되죠.”
“.....”
“당신은 더 큰 제국에 있어야 해요. 우리 세력이 얼마나 큰지는 잘 알고 있죠?”
러시아 마피아.
양지에선 석유, 천연가스 사업을 쥐고 있고, 음지에선 인신매매, 마약, 무기 판매를 독점한 세계 최대의 범죄 조직.
“당신은 그 제국의 정점에 서는 거예요.”
마피아의 회장.
세계적인 기업체와 여러 범죄 조직을 다스리는 범죄 조직의 왕.
하지만ㅡ.
“회장이라. 당신의 꼭두각시에 불과해 보이는데.”
본질적으로 회장 자리는 경영권만 손에 쥐는 것에 불과했다.
애초에 이반 벨린 초대 회장이 그렇게 설계를 해놨으니.
실질적인 권력은 모든 돈을 거머쥔 이반 일가에게 있다.
“어머, 꼭두각시라뇨?”
그러나, 엘레나는 더 파격적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녀는 진정 정성민을 마피아의 정점으로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