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7화 (177/303)

아직 ‘스튜디오’ 사업이 본격적으로 자리 잡기 전부터, 전문 청소꾼이나 유명 킬러들을 만나보기도 하고 실제로 그들에게 교육도 받아보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은 딱히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살인술’보다 정체를 숨기거나 증거를 남기지 않는 것에 더욱 특화됐을 뿐, 모든 상황에서 제 힘을 발휘할 수 있는 폭력의 기술을 가르쳐줄 순 없었다.

하여 정성민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각종 무술을 배워보기도 하고, 수없이 많은 스파링도 해보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일정한 룰을 따라 정확한 자세를 수행하는 데 중점을 두었을 뿐, 정성민이 원하는 근본적인 폭력의 기술이 아니었다.

‘주인님. 찾은 거 같습니다.’

그렇게 적당한 스승을 찾지 못해 낙담하고 있을 때, 이희연이 희소식을 물어다 준다. 전설 중에 전설이라 칭송받은 특수부대 퇴역 장교를 찾아낸 것이다.

이에 정성민은 한달음에 그에게 달려가 가르침을 호소했다.

여자건 돈이건 명예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다 줄 테니, 진정한 폭력의 기술을 가르쳐달라고 사정하다시피 매달렸다.

허나 그의 반응은 냉랭했다.

그는 정성민이 제시한 그 어떤 것에도 흥미를 보이지 않았다.

군인 출신이면서도 명예를 등한시했고, 모아놓은 돈도 없으면서 재물을 탐하지 않았다. 마찬가지로 여색에도 딱히 관심이 없어 보였다.

‘.....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결국 정성민은 일단 물러나기로 했다.

여색도, 물욕도, 명예도 마다한 그이니, 현재 자신이 가진 것으론 그를 설득할 수 없었다.

‘협박할 수도 없어.’

물론, 그를 협박하거나 조종하는 것도 불가능해 보였다.

이는 그의 눈을 마주치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감이라 해야 할지, 촉이라 해야 할지.

그저 그의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 그가 타고난 ‘지배자’라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절대 다른 누군가에게 굴할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 정성민과 이희연은 특수부대 퇴역 장교. 즉, ‘장태건’에 대한 조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특수부대인 출신인 만큼 온통 기밀 투성이인 그였지만, 돈의 힘으로 알아낼 수 없는 것은 없었다.

그렇게 정성민은 오랜 조사 끝에 장태건이 혹할 만한 것을 찾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장태건에게 꺼내자마자, 그는 곧바로 흥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뒷세계의 정점에 오르고 싶다고?’

‘예, 그렇습니다.’

장태건.

그가 원하는 것은 여자도, 돈도, 명예도 아니었다.

그는 그저 날뛰고 싶을 뿐이었다.

사람을 죽이는 데 특화된 그의 미친 재능을, 마음껏 발산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렇게 그는 젊은 시절, ‘애국’ 혹은 ‘임무’라는 이름으로 그 능력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었다. 쓰임이 필요한 곳에 달려가 죽여야 할 적을 모조리 도륙 낼 수 있었다. 끊임없이 분비되는 ‘살인 충동 욕구’를 합법적으로 해소할 수 있었다.

‘흐음...’

하지만, 이제 그는 늙었다.

여전히 그는 위험하지만, 지긋한 노인이 되어버렸다.

그에 따라 ‘살인 충동 욕구’ 또한 잦아들었고, 이제는 안락을 원할지도 모른다.

‘스승으로 모실 수 있게 해주십시오. 죽여야 할 적이 너무나 많습니다.’

허나, 정성민은 알고 있었다.

미치광이 살인광이었던 그의 본성이, 늙었다고 하여 퇴색되지 않음을.

이윽고 미스터 최와 정성민의 사연을 들은 그는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말년에 큰 재미를 보게 되었다며 정성민을 흥미로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큭큭큭큭... 자네 눈도 이미 정상이 아니야. 이거 아주 재밌는 놈을 만났구만.’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정성민이 야심을 드러내자마자, 변태 영감처럼 혀를 날름거리며 정성민의 목을 노려보았다. 저 우수한 청년의 흰 목을 자신의 나이프로 두 동강 내는 것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이 나이에도 저절로 발기가 될 지경이었다.

‘..... 참아야 한다. 놈은 물건이야.’

허나, 그는 아직 설익었다.

좀 더 제대로 된 맛을 느끼려면, 이보다는 훨씬 농익어야 참맛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미스터 최’라는 놈을 어떻게 요리할지 궁금하기도 했다.

미스터 최라는 놈도 만만찮은 강적이니 재밌는 이야기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좋다. 내 모든 것을 네게 전수해주지.’

그렇게 장태건은 정성민을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후 그는 한동안 기초체력 단련만 시켰는데, 말이 ‘기초’지 웬만해선 누구도 소화하지 못 하는 지옥훈련에 가까운 맹훈련이었다.

그런데 정성민은 그 모든 것을 소화하면서도 사업을 키워나갔다.

그야말로 복수에 미친 악귀였다.

‘찾았다!!! 찾았다찾았다찾았다!!!!’

장태건은 흥분했다.

이제 퇴역군인이 되어 따분한 일상이나 보내다 죽는 것밖에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뜻밖의 재미를 볼 수 있게 되었다. 가르치는 족족 스펀지처럼 기술을 흡수하는 정성민의 재능은, 감탄이 절로 나올 지경이었다.

‘이 녀석이다!! 바로 이 녀석이야! 녀석이야말로 나의 예술이다!!’

장태건은 발기했다.

말 그대로 정성민을 보며 발기했다.

그도 그럴 게, 장태건은 정성민을 보며 직감할 수 있었다.

가르치는 족족 모든 기술을 흡수하는 그의 재능이, 타고난 육체와 그의 반사신경이, 센스있는 감각과 전투지능이 자신을 뛰어넘을 살인 병기가 될 수 있음을 장태건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정성민을 통해 궁극의 예술을 이뤄내리라 다짐하게 되었다.

‘큭큭큭큭큭큭큭....’

그날 이후, 장태건은 하루종일 정성민만 생각했다.

오늘은 뭘 가르칠까. 내일은 뭘 가르칠까.

실전에 투입하면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을까.

이 녀석도 나처럼 살인에 기쁨을 느끼게 될까.

우린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스승님. 또 이상한 표정 짓지 마십쇼.’

허나 이 녀석은 자꾸 튕긴다.

살인의 참맛을 좀 알려주고 싶은데, 그 선을 넘진 않는다.

하지만 저 녀석이 나와 같은 살인귀가 되면 어떨까.

내가 과연 저 녀석을 이길 수 있을까.

내 기술을 모조리 흡수한 저 녀석을... 나는 이길 수 있을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스승님. 정신 좀 차리십쇼.’

허나, 음흉한 표정을 짓고 있던 장태건은 또 꾸중을 듣고 만다.

본디 어느 한쪽에게 마음을 뺏긴 자는 ‘을’이기 마련이라, 장태건은 정성민의 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자꾸 그런 표정으로 쳐다보면 훈련 나오지 않을 겁니다.’

하여, 정성민이 훈련 보이콧을 하면 장태건은 애원을 해야 했다.

아직 가르쳐줄 게 잔뜩 쌓여있는데, 네가 훈련에 안 나오면 난 무슨 재미로 살라고.

‘아, 안된다! 너랑 이것저것 해야 할 자세들이 많다! 네 몸에 맞춘 새로운 기술을 쓰고 싶단 말이다!’

‘.....내일 훈련은 나오지 않겠습니다.’

‘뭐, 뭣!? 그럴 수가! 널 위해 잔뜩 쌓아놨는데! 3일 치나 모았단 말이다!’

‘제발 좀 구체적으로 말씀하십쇼.’

‘널 위해 탄피를 가득 쌓아놨다!!’

‘가겠습니다.’

‘안된다 성민아! 스승이 잘 못 했다-!’

-휘오오오.....

머리를 차갑게 식혀주는 바람.

정성민은 감았던 눈을 떴다.

한국에 있는 철부지 스승을 떠올리며, 폰을 들었다.

그로부터 수십 개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도착해있었다.

“.....”

정성민은 다시 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침 운동을 끝낸 그는, 숙소로 돌아와 샤워를 한 뒤 속옷을 갈아입었다.

“.....”

그런데 하나, 둘, 셋.

팬티 3장이 없어졌다.

어떻게 된 일일까.

최근에 이하영이 하나 잃어버렸으니, 팬티 두 장이 사라진 셈인데.....

“.....”

뭐, 딱히 신경 쓸 필요 있나.

어차피 여분의 팬티는 많다.

아니면 이하영보고 좀 더 자주 빨라고 시키면 될 뿐.

정성민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속옷 서랍을 밀어 넣었다.

옷을 갈아입고 인피면구를 장착한 뒤, 회의실로 걸어갔다.

오늘은 내일 진행될 ‘총력전’을 앞두고, 마지막 회의가 열리는 날이었다.

***

총력전.

말 그대로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적을 궤멸시키는 전술.

이하영이 주도하는 지휘부는 이번 총력전으로 승리를 거둘 가능성이 80% 이상이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그 기반에는 나와 안지연이 설치해놓은 폭발물과, 동맹으로 인한 병력 차. 그리고 나와 안지연이 실시할 ‘특수작전’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Генеральная атака состоится через два дня в 3 часа ночи...”

하여, 난 이하영의 유창한 러시아어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고 있었다.

어차피 경청해봐야 러시아말을 못 알아듣는 데다, 내가 신경 써야 할 건 ‘폭발물 관리’와 ‘특수작전’ 뿐이기에 그 외의 것은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경청하는 척 시늉만 할 뿐이다.

“.....”

다만, 거슬리는 시선이 하나 있었다.

아까부터 날 빤히 쳐다보고 있는 이반 엘레나.

그녀는 회의에 관심이 없는 듯, 아까부터 날 노골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중이다. 하여 모른 척 딴 곳을 쳐다보고 있던 난 고개를 돌려 그 눈빛에 응수하기로 했다.

-싱긋.

그렇게 그녀와 시선을 섞자, 내게 싱긋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녀.

꽤 치명적인 척하는 거로 봐선 외모에 자신감이 상당한 듯했다.

표정이나 몸짓이 남자 한둘 꼬셔본 솜씨가 아니다.

“엘레나.”

그때, 이하영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불렀다.

그리고 러시아어로 뭐라 지껄였는데, 엘레나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린 걸 보면 적당히 주의를 준 모양이다.

“...흐음.”

다만 나는 여전히, 좀 전의 일로 이반 엘레나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중이다.

들리는 소문으론 그녀가 꼬셔서 안 넘어간 남자가 없다는데, 그녀에게 넘어간 남자들은 단물이 빨아 먹혀 모두 버려졌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드미트리도 저년에게 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막장드라마 같지만 일리가 있어.’

보스의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는 보스의 오른팔.

흔히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 법한 치정 로맨스.

그게 엘레나의 외모나 색기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도화살이라고 해야 할지, 저년에겐 남자를 끌어들이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이 중요한 회의를 앞두고 저년에겐 은근슬쩍 시선을 보내는 사내놈들이 꽤 다수인 걸 보면, 저년에게 도화살이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과연 초대 마피아 수장의 따님답다고 해야 할까.

그녀의 폭발적인 몸매를 보고 섹스를 떠올리지 않는 남자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 쪽 대원들의 임무도 알려줄게요.”

어쨌든 엘레나에 대해 생각하는 사이, 이하영은 내 부하들에게 작전 개요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에 러시아놈들은 금세 집중력을 잃어 딴짓을 하거나 동료들끼리 소곤소곤 수다를 떠들었는데, 엘레나만은 이하영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손가락을 톡- 톡- 두들기며 고개를 끄덕이는 것이 마치 모든 말을 알아듣는 듯했다.

‘영재 교육을 받았다고 했던가.’

이반 엘레나.

초대 마피아 회장의 딸인 그녀는, 어린 나이에 멘사 회원이 됐을 정도로 두뇌가 뛰어나다고 한다.

듣기로는 어렸을 때 잠깐 영재 교육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과정에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한국말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아마 이하영의 말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걸 보면, 한국말이 유창할 가능성이 크다.

“그럼 회의 종료하겠습니다.”

그렇게 회의는 금세 종료됐다.

어차피 다들 대부분 숙지하고 있는 내용이고, 이하영이 심혈을 기울여 완벽하게 준비한 만큼 질문할 것도, 딴지를 걸 것도 없었다.

-드르륵.

그렇게 난 몸을 일으켰다.

야간 훈련이나 하며 몸이나 풀러 갈까 하는 참이었다.

“주인님.”

그때, 날 불러 세우는 전용 통역사.

뒤를 돌아보니 그와 함께 엘레나가 서 있었다.

그녀는 날 보며 도발하는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주인님과 따로 대화를 나누고 싶다고 합니다.”

그녀의 용건을 대신 전하는 통역사.

허나 난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저년보다 삼두를 조지는 게 더 중요했다.

“я знаю твое настоящее лицо”

그러나 그녀의 제안을 물리기도 전, 그녀가 먼저 선수를 쳤다.

그 특유의 매혹적인 표정으로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꺼낸 것이다.

“..... 저, 주인님.”

그리고 이를 증명하듯, 통역사는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조심스레 내 귀를 빌렸다.

호기심이 동한 난 귀를 기울여 통역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엘레나가, 주인님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다고 합니다.”

“.....”

내 얼굴을 알고 있다.

웬만해선 항상 인면피구를 착용하고 다녔는데,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귀신 같은 년.

“따라오라고 해.”

통역사는 곧바로 내 말을 러시아어로 번역해주었다.

허나 그가 말을 채 끝맺기도 전, 엘레나는 통역사를 지그시 밀어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통역이 필요 없다는 뜻이겠지.

-저벅. 저벅. 저벅.

하여 난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도 나와 단둘이 얘기하고 싶은 모양이니, 통역사를 물린 뒤 외진 곳으로 걸어갔다. 이윽고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녀를 내려보며 입을 열었다.

“재밌군. 내 얼굴을 봤다니. 어떻게 본 거지?”

숙소가 아니고선 거의 인면피구를 착용해왔다.

혹시나 벗더라도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벗었다.

그런데 그녀는 어떻게 내 얼굴을 봤던 걸까.

“후후...”

말하기 앞서, 날 보며 싱긋 웃는 그녀.

달빛을 머금은 오묘한 톤의 금발과 새하얀 피부.

매혹적인 눈빛과 입술.

“돵신훌, 쭈훅 치켜봤숴요.”

허나, 어이없을 정도로 어눌한 그녀의 한국말.

그러나, 여전히 치명적인 표정으로 말을 잇는 그녀.

“줭쉉민. 만나서흐, 반카워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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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지 싶었다.

자동으로 머릿속에 유명 미드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허나 나는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힌 뒤, 그녀를 보았다.

억양이야 어찌 됐든. 그녀는 내 정체를 알고 있다.

위협이 된다면 죽여야 한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지?”

먼저 해결하고 싶은 것은 내 정체를 어떻게 알아냈냐는 것.

거의 틈을 보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내 정체를 간파한 걸까.

이윽고 엘레나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당쉰, 얼굴 가묜. 난, 볼 출 알아요우.”

...인피면구인지 아닌지 구분할 줄 안다는 말인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알아들은 게 맞는지 확인해보았다.

그러자 그녀는 싱긋 웃으며 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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