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3화 (173/303)

***

성공적으로 임무를 마친 안지연.

그녀는 정성민과 함께 퇴각하며 그녀의 주인에 대해 생각했다.

‘주인님의 실력이 이 정도였을 줄이야. 난 아직 멀었어.’

이번 일로 안지연은 두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는 주인님의 ‘살인’ 기술이 예상보다 훨씬 뛰어나다는 것과, 아직 자신은 그 수준을 따라가기에 갈 길이 멀다는 것이었다.

‘더 실력을 갈고닦아야 해. 주인님께 필요한 여자가 되려면...이것보다 훨씬.’

이번 작전 내내 주인님의 도움을 받기만 했던 그녀.

원래라면 스스로 해내야 할 몫을, 주인님께 떠넘겨 드리고 말았다.

미덥지 못한 실력 때문에 이런 위험한 곳에 주인님을 끌어들이고 만 것이다.

‘돌아가면 스승님께 특훈을 받아야겠어. 훨씬 더 강해져야 해.’

스승님.

퇴역한 특수부대 장교이자 주인님의 특공무술 스승.

허나 그것 말고는 딱히 아는 정보가 없었다.

안지연 또한 주인님의 스승님에게 갖가지 무술과 살인기술을 배우긴 했으나, 그의 정확한 출신도, 이름도, 목적도 모르고 있었다.

그저 주인님께서 유일하게 존칭을 쓰며 스승으로 모시는 존재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

을 뿐이다.

‘아무렴 어때. 강해지면 그뿐.’

허나 그런 것들이 중요한가.

스승님을 통해 강해질 수 있다면. 그래서 주인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안지연의 다시 한번 의지를 불태우며 앞서 나가는 주인님의 뒤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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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영은 울었다.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절규에 가까운 오열을 지속했다.

그렇게 얼마나 울었을까.

마침내 지난 과거의 감정을 모두 비워낸 이하영은 고개를 들었다.

초점 없는 공허한 눈으로 다 타버린 마음이 떠날 곳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휘이이잉-

황량하게 불어오는 바람.

이하영은 품 안에 소중히 모아두었던 두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리고 잘 때지지 않는 손가락을 펴, 그녀의 손에 남아있던 잿가루를 바람에 날려 보내주었다.

-휘오오오오-

흩어져 날아가는 잿가루.

뜨거웠던 머리를 맑게 하는 시베리아의 바람.

그녀는 재가 날아가는 곳을 멍한 눈으로 좇았다.

그 과정에서 그녀는 여전히 아름답게 돌아가고 있는 세상을 보았다.

구름은 여전히 뭉게뭉게 피어나고, 철새들은 부지런히 움직이며, 태양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결국 세상은 그대로다.

그저 혼자만의 이별.

혼자만의 비극.

혼자만의 드라마였다.

그것도 그 누구의 동정도 받을 수 없는, 마땅한 죄의 대가였다.

-휘오오오오....

여전히 바람은 분다.

또한, 주인님의 세상도 멈추지 않는다.

여전히 주인님의 적은 강대하고, 주인님은 내가 필요하다.

-스으윽.

이하영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광활한 설국을 바라보았다.

여기도 눈, 저기도 눈밖에 없는, 온통 눈밭인 허허벌판을 바라보았다.

“..... 주인님.”

그녀는 주인님을 부르며 짐작해보았다.

모든 절망을 딛고 일어선 주인님이, 과연 어떤 풍경을 마주했을지 짐작해보았다. 가족도, 친구도, 연인도 모두 잃어버린 그가, 대체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을지 상상해보았다.

“.....”

아마 이보다 더 황량한 풍경이 아니었을까.

아마 이보다 훨씬 더 절망적이지 않았을까.

마치 온통 눈밖에 없는 이곳처럼, 주위 아무것도 남지 않은 상황에 절망하지 않았을까.

“.....”

헌데 주인님은 그 상태에서 자신의 제국을 세우셨다.

그리고 그 제국은 어느새 강대한 적을 위협할 만큼 거대해졌다.

그에 비해 나는, 이 무슨 초라한 꼴이란 말인가.

‘난 그분의 노예로, 평생 속죄하면 돼. 그뿐이야.’

지금, 해야 할 것이 뚜렷해졌다.

모호했던 자신의 정체성이 확립되었다.

여자친구라는 굴레에서 벗어나, 주인님의 유능한 종복이 되고자 하는 그녀였다.

‘이젠 더 이상 눈치 보지 않을 거야.’

여자친구로 인정받지 못할까 봐 항상 전전긍긍해왔던 자신.

이제는 그런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졌다.

짊어진 죄의 무게에 대해서도 따질 필요가 없어졌다.

그저 그분의 노예로서 평생 봉사하면 될 뿐이다.

죽을 때까지 그분에게 진 빚을 평생 갚으면 될 뿐이다.

-저벅...저벅...저벅...

이제 그녀의 발걸음엔 힘이 실렸다.

흐리멍텅했던 그녀의 눈은 더없이 빛나고 있었다.

망설임이 사라졌으니, 이제 나아갈 일만 남았다.

이희연이 그랬던 것처럼, 마음을 얻기 위해 그저 최선을 다 할 뿐이다.

***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니 이하영이 우릴 맞이했다.

허나 난 그녀의 환영 인사를 무시하고 지나쳐 갔다.

당분간은 마음고생을 좀 시킨 뒤, 때가 되면 풀어줄 예정이다.

자신의 위치를 철저히 깨닫게 해야, 건방지게 여자친구 노릇 따위 하지 않을 것이다.

“... 현재 상황 보고드리겠습니다.”

허나 의외로 담담한 이하영의 얼굴.

난 장비를 점검하며 그녀의 보고를 들었다.

땀으로 젖은 상의를 탈의하고 물을 벌컥벌컥 마신 뒤 탁- 내려놓았다.

“이하영”

그리고, 그녀를 보지 않은 채 굳은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이하영은 고개를 깍듯하게 숙이며 내 말을 기다렸다.

“네 무리한 작전 때문에 내 여자가 죽을 뻔했다. 내가 조금만 늦었어도, 그녀는 살아돌아오지 못했을 거야.”

“... 죄송합니다. 어떤 처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

좀 의외였다.

이하영이 이렇게 감정을 잘 숨길 수 있었던가.

지금쯤이면 ‘서, 성민아...’ 이 지랄하며 감성팔이 할 줄 알았는데.

“... 내 여자를 위험에 빠트린 건 중죄다.”

“실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곳에 체류하는 동안, 네 등급과 그에 맞는 대우를 박탈하겠다. 다만 지휘권은 그대로 남겨두도록 하지.”

“예. 명령 받들겠습니다.”

어떤 변명의 말도 없이, 깔끔하게 처벌을 받아들이는 그녀.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던 것일까.

.....뭐, 이렇게 내 의도대로 풀리니 나쁠 건 없었다.

이하영도 한번 노예의 처지가 되어봐야 할 필요가 있으니까.

처음에는 많이 힘들겠지만, 차차 적응해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깨닫는 것들도 있겠지.

“좋다. 그러면 잡일을 하나 시킬까 하는데.”

“말씀해주십시오.”

“응급치료 키트와 얼음팩을 가져와라.”

이하영 같은 인재에게 이런 잡일을 시키는 것은 분명 낭비다.

허나 난 그녀에게 최대한 잔인해지기로 했다.

‘여자친구’라는 그녀의 환상을 깨트리려면, 강한 충격을 줘야 한다.

“알겠습니다. 다만, 1시간만 주시겠습니까. 처리해야 할 일이 남아있습니다.”

난 그녀의 말을 들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이번 전투로 인해 세르게이 일당과 부하들은 어수선한 상태였다.

아마 상황 정리를 하고 오겠다는 뜻이겠지.

“그래. 그러면 1시간 뒤 내 숙소로 와라. 위치는 네 비서에게 말해뒀다.”

“네, 주인님.”

난 이하영을 뒤로하고 숙소로 이동했다.

간단한 샤워를 한 뒤, 이희연으로부터 주요사항을 보고 받았다.

내가 특별히 신경 써야 할 이슈는 없어 보였다.

“그래. 그러면 내일도 이 시간쯤 알려줘. 고생이 많아.”

[후후. 주인님을 위해선 당연한 일인 걸요♥]

“그래. 그나저나 하는 일은 어때? 할 만하나?”

[어우. 죽을 거 같아요. 주인님은 이 많은 보고서를 어떻게 다 검토했대요?]

“뭐, 요령이 좀 필요할 거야.”

[노하우 좀 전수해주세요. 너무 급하게 가버리셨어]

[큭큭. 원래 고생하면서 배우는 건데, 특별히 알려주지.]

난 이희연과 잠시간 잡담을 떠들었다.

그 과정에서 대학생 시절의 분위기가 형성되기도 했다.

근심 걱정 없이 농담도 하고 웃기도 하고.

이런 소소한 일상이 내겐 더할 나위 없는 안식이었다.

“그럼 가봐야겠군. 해야 할 일이 있어서”

[무리하진 마세요. 제게 케어해드릴 수도 없으니까]

“그래. 새겨듣지.”

[그럼 주인님의 무사귀환을 빌게요. 저도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만.]

이희연의 깍듯한 인사를 끝으로 화상 회의는 종료되었다.

난 노트북을 덮은 뒤 시계를 확인해보았다.

이제 곧 이하영이 올 때가 되었다.

“안지연.”

하여 난 그 시간에 맞춰 안지연을 불렀다.

고생한 안지연도 달랠 겸, 이하영을 길들일 목적으로 말이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이윽고 문을 노크한 뒤 내게 인사를 올리는 안지연.

난 침대에 걸터앉은 채 내 옆자리를 팡- 팡- 친 다음 그녀에게 오라고 했다.

안지연은 얼굴을 붉히며 다소곳이 내 옆에 앉았다.

“상처 좀 보지. 가슴 부위에 총을 맞았다면서.”

“신경 쓰실 만큼 큰 건 아녜요.”

“판단은 내가 할 거야.”

난 그렇게 말하며 안지연을 눕혔다.

그리고 그녀의 상의를 벗긴 뒤, 시퍼렇게 멍든 그녀의 왼쪽 가슴을 보았다.

-스윽.

“하읏!”

왼쪽 가슴을 움켜쥐자, 통증에 반응하는 그녀.

그녀의 말대로 심각한 부상은 아니지만, 꽤 신경 쓰이는 상처이긴 했다.

일단 외관상으로 새파랗게 멍든 게 보기 좋지 않았고, 그녀가 임무를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될지도 모른다.

“많이 아팠겠군.”

“아.. 아녜요...”

또한, 안지연은 내 ‘여자’로 인정한 노예이니만큼 이런 상처에도 호들갑을 떨어줄 필요가 있었다. 어찌 됐든 날 위해 목숨 걸고 그 위험한 곳에 뛰어든 것인데, 주인으로서 당연히 보살펴 줘야 하지 않겠나.

“고생 많았다.”

하여 난 그녀를 다정히 안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이마를 키스를 한 뒤 소중한 내 여자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은 터질 듯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주인님ㅡ. 이하영입니다.”

그때, 문밖에서 자신의 도착을 알리는 이하영.

난 안지연을 안은 채 들어오라고 명령했다.

이내 문이 열리고, 이하영이 숙소 안으로 들어왔다.

“.....”

찰나, 이하영의 어깨가 움찔 떨리는 것이 보였다.

허나 이후엔 아무렇지도 않게 도게자를 하며 보고를 하는 그녀였다.

“명령하신 응급치료 키트와 얼음팩 가져왔습니다.”

응급치료 키트와 얼음팩.

그 외에도 치료에 도움이 되는 건 잔뜩 가져온 이하영이었다.

하나를 명령하면 그 이상을 해내는 그녀다운 일처리 방식이었다.

“그래. 그건 잠깐 놔두고, 욕실에 물 좀 받아놔라. 입욕제는 적당한 것으로 준비해두고.”

“... 명령 받들겠습니다.”

이하영은 공손히 손을 모아 발소리를 죽여 욕실로 들어갔다.

그사이 나는 안지연의 오른쪽 가슴을 잡으며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가슴이 예쁘게 잘 자리 잡았어.”

“...히끅.”

갑작스러운 칭찬에 당황한 듯 딸꾹질을 하는 그녀.

좀 전까지 적의 목에 숭숭 구멍을 뚫던 모습과는 상당히 상반되는 모습이었다.

-쭈웁.

“흐응!♥”

하여 그 귀여운 갭차이에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난 그녀의 유두를 핥으며 계속 칭찬을 퍼부어주었다.

“반응이 귀여워. 천상 여자야.”

“히끅.”

일평생 남자처럼 살아오며 자신을 단련했던 그녀.

때문에 그녀는 이런 칭찬에 굉장히 약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도 눈물을 찔끔 흘리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걸 보니 심히 당황한 게 분명했다.

“아주 적당한 크기야. 모양도 좋고, 탄력감도 좋아. 내가 만져본 가슴 중 가장 최고다.”

“흐웃...으읏...♥”

절벽에 가까웠던 가슴이 큰 컴플랙스였던 그녀.

하지만 지방을 찌우고 억제되었던 여성 호르몬을 투여하자 그녀의 가슴은 순식간에 비대해졌다. 애초에 그녀는 체급을 맞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지방량을 조절했기에, 이렇게 살을 찌우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비대해질 수 있었다.

즉 평생 마른 몸으로 살아와서 그렇지, 살이 찌면 모두 가슴으로 가는 사기체질이었다.

“역시 내 여자야.”

어쨌든 나의 연속되는 칭찬 세례에 이제는 머리에서 김까지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녀는 홍당무처럼 새빨개진 얼굴로 그렁그렁 눈물을 가득 담기 시작했다.

“음? 왜 우나.”

다만 연속된 칭찬에 감정 과잉이 되었는지, 코를 훌쩍이며 울기까지 하는 그녀.

나는 일부러 우는 이유를 콕 집어 물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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