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71화 (171/303)

그러자 화면이 다음 장으로 넘어가며, ‘이벤트 쇼’의 룰이 담긴 내용으로 전환되었다. 미스터 최는 안에 적힌 내용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이번 이벤트 쇼는 남도현과 그가 키운 아이돌이 ‘대결’을 하는 게임입니다. 게임 종목은 ‘애널비즈 줄다리기’. 서로의 항문에 애널비즈를 연결한 다음 힘을 줘서 상대방의 것을 모두 빼내면 승리입니다.”

애널비즈 줄다리기.

길이 50cm의 애널비즈의 양 끝을 서로의 항문에 꽂은 다음, 그것을 잡아당겨 상대방의 항문에서 애널비즈를 모두 뽑아내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

다만 남도현은 남자이기 때문에 그가 키운 아이돌 3명을 상대로 모두 이겨야 승리로 인정될 수 있었고, 갖가지 패널티도 주어진다고 한다.

‘내, 내가 서윤이와...지애와...아영이와 저딴 대결을 해야 한다고? 내가...?’

다만. 남도현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함께 동고동락하며 애지중지 키웠던 아이돌과, 저딴 미친 게임 따위를 해야 한다니. 나와 그녀들은 거의 스승과 제자나 다름없는 사이인데.

“큭큭큭큭... 패자는 그만한 벌이 있으니, 기대하셔도 좋을 겁니다.”

하지만 미스터 최로부터 패배에 대한 벌을 듣게 되었을 때, 남도현은 표정을 굳혔다.

절대로, 절대로 질 수 없다고 다짐하며, 이벤트 쇼의 단상 위로 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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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희연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인생 참 모를 일이라고.

외모면 외모,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사회성이면 사회성. 그 모든 것을 갖춘 완벽한 이하영이, 수화기 너머로 오열하고 있으니 말이다.

“흐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 그야말로, 어린아이처럼 목 놓아 우는 소리.

자신이 저지른 죄로 인해 사랑을 잃은 자의 절규.

이희연은 그 울음소리를 들으며 생각에 빠졌다.

어쩌다가 대화의 흐름이 여기까지 흘러, 이하영의 오열을 가만히 듣고 있게 되었는지, 그 과정을 추적해보았다.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처음에는 그저 ‘우월감’뿐이었다.

드디어 이하영 그년을 이기고 말았다는, 성취감의 발현이었다.

그래서 조롱의 의미를 담아 메시지를 보냈다.

자신의 승리를 알리고자 주인님의 여자로 인정받았다는 것을 마침내 선포했다.

[주인님께서 이하영을 내쳤습니다.]

허나 첩자가 자신에게 전한 말. 그리고 오열하고 있는 이하영의 사진이 마음에 걸렸다. 가슴이 미어지도록 울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온전히 승리를 즐길 수 없게 되었다.

‘멍청한 년...’

그래서 그런지, 측은지심이 들었다.

아니, 동병상련이라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문득 이희연은 과거, 주인님과 이하영이 이어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환하게 미소 지으며 웃고 있는 이하영에게, 그녀의 ‘친구’로서 어쩔 수 없이 축하해줘야만 했던 비참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아아아.....아아아아....”

그리고 그 과거의 모습이, 이하영과 오버랩되었다.

완전히 입장이 역전된 그녀를 보고 있자니, 과거의 자신이 겹쳐 보인 것이다.

-꽈아악....

이희연은 주먹을 쥐며 입술을 즈려 물었다.

형편없던 자신의 과거엔 항상 빛나던 이하영이 있었다.

항상 의기소침하고 음울했던 자신에게 이하영은 항상 빛이 되어주었다.

‘왜 애를 괴롭히는 거야! 왜!’

과거의 자신은, 놀림 받기 쉬운 아이였다.

찢어지게 가난해 제대로 꾸며본 적도 없고, 가지고 다니는 것은 모두 싸구려였다.

스킨이나 로션 같은 것도 바른 적이 없어 피부는 항상 엉망이었다.

‘한 번만 더 얘 건들면 가만 안 있을 거야. 알았어?’

그래서 이희연은 자신을 향한 괴롭힘이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이렇게 형편없고 모자란 아이니까.

엄마도 맨날 나 때문에 아빠가 떠났다고 했으니까.

‘누가 그래? 네가 그런 아이라고?’

하지만 이하영만큼은 아니었다.

그녀만큼은 이런 날 정말 예쁜 얼굴이라고 칭찬해주었다.

‘오늘이 생일이야? 그러면 이거 선물로 사줄게’

그녀는 항상 베풀어주기만 했다.

먹는 것, 바르는 것, 노는 것, 입는 것 그녀에게 받은 것이 참 많았다.

허나 그런 것들을 주면서도 그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다.

그저 한번 웃어주면, 그걸로 만족하는 아이였다.

‘와. 희연이 너 공부 엄청 잘 하네? 나랑 같은 대학 가자!’

지옥 같은 집안을 탈출하기 위해 악착같이 했던 공부.

전액 장학금을 타 기숙사에 생활할 수 있다면, 이 집안을 벗어날 수 있을 거란 희망.

그 희망 덕분에 이희연은 이하영과 같은 대학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사랑하고 동경하는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 그랬던 이하영인데...’

그런데 그 천하의 이하영이, 이렇게 초라하게 울고 있다.

첩자가 보낸 사진 속 그녀는, 이렇게 비참하게 엎드려 오열하고 있었다.

‘그냥 울어도 돼. 멀쩡한 척 하지마.’

그래서 그만 충동적으로 그런 말을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자꾸만 그때 그 시절의 하영이가 떠올라, 그만 마음을 제어하지 못해버린 것이다.

‘괜찮아. 진심이야. 그래도 한때 우린... 둘도 없는 친구였잖아. 그치, 하영아.’

둘도 없는 친구.

분명 서로를 그렇게 굳게 믿고 있던 시절이 있었다.

네가 나에게 손을 내밀었던 그때.

네 행복을 바라며 내 사랑을 포기하던 그때.

그때 분명 우리는, 서로에게 둘도 없는 친구였다.

‘그냥 울어도 돼. 솔직해져도 돼.’

너무나 동경했던 그녀.

하지만 그런 그녀의 배신 때문에 마음 깊이 새겨졌던 상처.

허나 미스터 최에게 당해본 이희연은 알고 있다.

그의 마수에서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의지가 노력으로 거스를 수 없는 그의 절대적인 지배력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내가 도와줄게.’

하여 이희연은 과거의 이하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녀에게 손을 내밀어주기로 했다.

여전히 그녀가 괘씸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번 한 번만 그녀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도와주기로 했다.

“후우....”

그렇게 이희연은 심호흡을 하며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았다.

‘우월감’으로 시작했던 마음이 과거에 대한 아련함으로 끝날 줄은 상상도 하지 못 하고 있었다.

아직도 그때 그 시절의 하영이를 잊지 못하고 있다니.

“.....”

어쨌든 과거를 돌아보는 사이, 어느덧 이하영의 울음도 멎게 되었다.

이희연은 크흠 헛기침을 하곤 이하영의 상태를 물어보았다.

“이제 좀 시원해?”

“.....응.”

“후우. 그러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응”

고분고분하게 코맹맹이 소리로 ‘응’이라고 하는 그녀.

괜히 웃음이 나왔지만, 이희연은 표정을 지우고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선 하나 알아둬. 주인님께서 말씀하신 거, 틀린 거 하나 없어. 솔직히 지금 네가 울고 있는 것도 웃긴 일이야.”

“.....”

침묵으로 답하는 이하영.

이희연이 말했다.

“넌 여전히 주제 파악을 못 하고 있어. 네가 그렇게 믿고 싶을 뿐, 넌 더 이상 주인님의 여자친구가 아니야. 주인님은 여자친구로서 널 받아준 게 아니니까.”

“.....그렇구나.”

“그렇구나는 무슨. 너도 사실은 알고 있었잖아? 그저 네가 애써 모른 척했을 뿐이지.”

“..... 그런가”

“어. 멍청아. 자기 마음도 몰라.”

“.....”

“너 혼자 전전긍긍하면서 주인님 눈치 보는 거. 태연한 척 주인님에게 반말하는 거. 주인님 도와준답시고 먼저 나대서 일 벌이는 거. 그거 다 네가 여자친구인 거 확인받고 싶은 마음 때문에 그런 거잖아. 맞지?”

수화기 너머 들리는 이하영의 숨소리.

그렇게 호흡을 고르다, 이하영이 주눅 든 목소리로 말했다.

“응... 네 말이 맞네. 나 계속... 성민, 아니. 주인님의 여자친구인 걸... 확인받고 싶었나 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욕망. 그리고 조직과 조직 간의 이해관계를 이용하여 상황을 비트는데 재능이 있는 이하영은, 정작 자기 마음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아니, 두려움 때문에 외면하고 있었다.

“그래. 만약 네가 주인님이라고 생각해봐. 계속 네가 그렇게 간 보는 짓을 하는데, 화나겠어? 안 나겠어?”

“... 화나겠지.”

“네가 잘못했어? 안 했어?”

“내가 잘못했네.”

이희연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이하영이 진실을 마주 보도록 계속 질문을 던졌다.

“그래. 게다가 넌 주인님을 위한답시고 또 일을 벌여놨어. 보고조차 하지 않고 말이야. 만약 네가 스스로 주인님의 노예라고 생각했다면, 그딴 일 절대 하지 못 했을 거야. 왜냐하면 주인님 내린 결정이 정답이고, 주인님의 말씀이 진리니까.”

“.....”

“알겠어? 넌 아직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했어. 무의식중에 여자친구 행세를 하고 있다고. 그건 오만이야. 주인님의 노예라면 그저 주인님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되는데, 주인님이 원하지도 않는 일을 벌여놓고 여자친구 행세까지 하려 했어. 주제넘은 짓이라는 생각 안 들어?”

“..... 응. 주제넘었네.”

순순히 인정하는 이하영.

이희연은 한숨을 내쉰 뒤 말했다.

“후우-. 그게 네 가장 큰 문제야. 아직 네가 주인님의 여자친구라고 생각하는 거.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는 거.”

“...응. 이제 난 뭣도 아니니까...”

다시 울먹이는 이하영의 목소리.

뭣도 아니란 말에 커다란 상처를 받은 그녀.

하지만 이희연은 가소로웠다.

“당연히 뭣도 아니지. 노예도 아니고 여자친구도 아니고. 네가 애매하게 구니까.”

“.....”

“이제 그만 떠나보내. 주인님과 너의 연인 관계는 끝났어.”

연인 관계의 끝.

그것을 언급하자, 수화기 너머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이희연은 해야 할 말을 계속 이었다.

“... 그런 짓을 했는데 어떻게 계속 연인으로 있어. 그렇게 망가진 관계에 뭘 더 하려고 한 거야.”

불규칙적으로 흐느끼는 이하영의 호흡 소리.

이윽고 그녀가 코 먹은 소리로 말했다.

“내가 너무 미워. 내가 너무 증오스러워서, 죽고 싶어..... 그냥 모든 게, 모든 게 다.... 너무 후회돼... 자꾸만, 자꾸만 날 학대하고 싶어...”

목소리만으로도 느낄 수 있는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

이희연은 잠시 이하영이 진정할 때까지 기다렸다.

그렇게 5분 뒤, 다시 말을 꺼냈다.

“괜찮아. 새로 시작할 수 있어.”

새로 시작할 수 있다.

그 말에 이하영이 답했다.

“어떻게...? 난 이미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저질렀는데.”

“... 그 죄는, 여자친구였던 이하영이 저지른 죄지.”

여자친구였던 이하영이 저지른 죄.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수화기 너머의 이하영은 그 의미를 곱씹어 보다 답했다.

“.... 이해가 안 돼. 어쨌든 내가 저지른 일이잖아.”

“하-아. 이 바보야. 주인님은 주인님이야.”

주인님은 주인님.

또다시 수수께끼 같은 말을 하는 이희연.

이윽고 이하영이 답했다.

“무슨 소리야. 이해가 안 돼.”

그러나, 역시 이해를 못 하는 이하영.

이희연은 목을 가다듬고 답을 말했다.

“크흠. 잘 들어. 한 번만 말해 줄 테니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뜸을 들이는 이희연.

이윽고 그녀가 조심스레 입을 뗐다.

“주인님은 주인님이야. 즉, 정성민은 정성민이지.”

감히 주인님의 성함을 언급한 죄.

이희연은 재빨리 입을 다물고 이하영의 반응을 기다렸다.

허나 여전히 이하영이 말뜻을 못 알아들은 거 같아, 다음 말을 덧붙였다.

“...사람 쉽게 안 바뀌어. 네가 무슨 죄를 지었든, 주인님은 널 품으려 하고 있어. 주인님이 원래 어떤 분인지 잘 알잖아? 그분은 자기 사람 안 버려.”

“..... 내가, 내가 그런 짓을 저질렀는데... 용서해준다구?”

“용서하는 게 아니야. 그걸 어떻게 용서해. 다만 주인님은 덮고 싶을 뿐이야. 없는 일로 만들고 싶으신 게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

이하영은 또다시 침묵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다만 이희연은 자기 생각을 말할 뿐이었다.

“그런데 네가 주인님의 여자친구 행세를 하면, 네가 그렇게 죄의식을 갖고 눈치를 보면. 그러면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지난 과거는 도려내야 해.”

수화기 너머의 이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녀도 드디어, 이희연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은 것이다.

“완전히 새로운 관계를 시작해. 진정한 그분의 노예가 되어서, 오로지 그분만을 생각하며 살아. 그런 관계라면, 주인님도 널 받아주실 거야.”

이희연의 조언을 들은 이하영은 눈물을 흘렸다.

왜 주인님께서 자신에게 노예가 되라고 강요했는지, 이제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기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 고마워. 고마워 희연아. 이제 모든 게 명확해졌어.”

진심이 담긴 이하영의 목소리.

이희연은 피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럼 이제 보내줘. 네 안에 남아있던 그 끈질긴 미련. 이제 다 보내주고 와.”

“...응. 그럴게.”

처음 통화를 했을 때와는 반대로, 어떤 확신이 깃든 목소리.

이희연은 그대로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오늘 자신이 한 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하. 원래는 이러려던 게 아니었는데.’

원래 계획은 절망하는 이하영을 조롱하여 멘탈을 아예 박살 내놓는 것.

도원결의니 어쩌니 했지만 결국 이하영은 자신의 강력한 경쟁자였다.

굳이 나서 도와줄 필요가 없단 말이다.

‘하지만...’

허나 결국 그녀를 저버릴 수 없었다.

마음을 잃어 절망하고 있는 그녀를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대체 난 왜 그랬던 걸까.

“후-우...”

이희연은 폰을 꺼냈다.

그리고 비밀 폴더에 들어가, 숨김처리를 한 사진 하나를 숨김해제한 뒤 클릭해서 보았다.

그 사진은 고2 시절, 이하영과 같이 어깨동무를 하며 V자를 하고 있는 사진이었다.

‘어쩌면 누군갈 떠나보내지 못하는 건, 나도 마찬가지일지도 모르겠네.’

***

터벅... 터벅...

이하영은 발걸음을 옮겨 한 잡화점에 들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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