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선을 다한다는 녀석의 음성에 온 진심이 담겨 있었다.
“좋아. 이희연.”
하여 난 이희연을 불렀다.
전략기획팀의 팀장을 맡고 있는 그녀인 만큼, 녀석의 ‘복수’에 대해 계획을 짜놨을 테니 말이다.
“예 주인님.”
“준비는 해놨겠지.”
“당장 실행 가능합니다. 명령만 주신다면.”
“진행해.”
주인님과의 최종결전인 D-DAY까지 4개월도 남지 않은 상황.
어떤 계획이든 빨리 완성시킬수록 좋다.
특히 이신아와 정성아를 합당한 방법으로 빼내려면 내 외할아버지인 이기수 회장의 협력이 필요했다.
이기수 회장의 명령이라면 제아무리 주인님이라도 이신아와 정성아를 보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바로 작전 진행하겠습니다. 회의에 참석하실 건가요?”
“아니. 결과만 보고해.”
“예”
이희연은 깍듯하게 고개를 숙인 뒤 장민혁을 데리고 사라졌다.
난 그녀가 나가자마자 밀린 서류를 처리한 뒤, 이하영, 안지연과 영상 회의를 진행했다. 현재 그녀들은 러시아에서 마피아 세력을 섭렵하는 데 힘쓰고 있다.
“일은 잘 풀리고 있나. 필요한 거는?”
[우리 쪽 전투원 세 명이 죽었어요. 한국으로 시신을 수습해줄 인원이 필요해요.]
“..... 그러지. 서류상 처리해야 할 일, 장례 쪽 일은 이쪽이 다 맡겠다.”
세계 3대 범죄 조직 중 하나인 마피아.
현재 마피아는 후계자 자리를 두고 내전을 치르고 있는 중이다.
유력한 후계자 후보로는 예브게니, 드미트리, 블라디미르 셋이 있는데, 우리는 예브게니에게 모든 걸 걸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목숨 걸고 싸울 전투원 일곱이 필요해요. 통역사도 하나 붙여주면 좋고요. 그리고 방탄슈트 7개와 소음권총 3자루도 필요합니다.]
물론, 마피아에 이렇게 직접 가담하는 건 위험하다.
그 방증으로 우리 쪽 전투원이 총 일곱이나 죽었다.
듣기로 안지연도 잠입을 시도하며 여러 차례 목숨을 잃을 위기를 맞이했고, 이하영도 예브게니의 숙적인 드미트리, 블라디미르에게 암살 시도를 당했다고 한다.
“... 최대한으로 지원해주겠다.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
[네... 이렇게 얼굴 볼 수 있어서 너무 좋네요.]
지친 기색이 역력하나 애써 미소를 짓고 있는 안지연.
일에 치여 살다 보니 그녀를 못 안아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적어도 떠나보내기 전이라도 안아줬어야 했는데.
[성민아.]
그때, 침묵하고 있던 이하영이 입을 열었다.
그녀 또한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쪽 일은 어때? 잘 진행되고 있어? 이기수 회장에게 접촉할 거라며.]
창백한 얼굴로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내 안부를 묻는 그녀.
말라붙은 입술과 혈색을 보니 어딘가 아파 보였다.
허나 자신이 아픈 걸 필사적으로 숨기려는 듯한 그녀의 모습 때문에, 이를 물어볼 수 없었다.
“이쪽 일은 걱정마. 희연이가 잘 처리하고 있으니까. 차근차근 계획대로 진행 중이야.”
[... 역시 희연이네. 잘 보필하고 있는 거 같으니 안심된다.]
불과 한 달 사이에 얼굴이 많이 상한 이하영.
갑작스레 마피아 내부에 내전이 터지는 바람에 이리저리 많이 시달린 모양이다.
구원자의 감시도 신경 써야 하고, 그에게 신뢰를 주기 위해 실제로 성과도 내야 하고, 그 와중에 내게 도움이 되기 위해 새벽녘 은밀하게 움직여야 하고.
아마 잠도 제대로 자지 못 하고 있겠지.
“... 넌 필요한 거 없어? 지원해 줄 수 있는 건 다 지원해줄게.”
[... 아냐~ 괜찮아. 구원자에게 말하면 다 지원해 주는 걸.]
구원자.
이하영은 구원자를 더 이상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이제 그녀는 평소에는 그를 ‘구원자’라 부르다가, 감정이 격해질 때면 ‘돼지 새끼’라고 부르곤 했다.
[어쨌든 나도 얼굴 봐서 좋다. 네 얼굴 봐서라도 좀 더 힘내야지! 히히.]
일부러 유쾌한 톤으로 외치며 싱긋 웃는 그녀.
그때, 그녀의 뒤에서 웬 러시아 남성이 오더니 러시아어로 뭐라 지껄여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하영이 황급한 표정을 짓으며 내게 말했다.
[나 가봐야 할 거 같아! 그러면 다음에 또 연락할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황급히 어딘가로 걸어갔다.
안지연 또한 자신도 가봐야 할 거 같다고 말하며 내게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영상 회의를 종료했다.
“.....”
그녀들이 회의를 종료하기 전, 희미하게 들린 총격 소리.
그 소리가 자꾸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그러다 그녀들을 마피아 내전 한복판에 던져놓는 게 과연 옳은 판단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이하영과 안지연은 내 가장 큰 전력 중 하나인데, 혹시라도 그녀들을 잃는다면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을 뺄 순 없어. 주인님도 반대파에 사람을 붙여뒀으니까.’
허나 내겐 그녀들을 뺄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이하영에게 전해 듣기로, 주인님은 블라디미르에게 배팅했다고 했으니까.
그러니 블라디미르의 승리를 막기 위해서라도, 이하영과 안지연을 러시아에 보낼 필요가 있었다. 만약 그가 승리하여 주인님에게 지원을 약속하기라도 하면 정말 곤란해진다.
“후우...”
결국 난 그녀들을 전장에 던져둘 수밖에 없다.
이대로 잘 해내리라 믿으며 필요한 자원을 지원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사락... 사락...
하여 난 마음을 굳히며 다음 일을 처리했다.
이번에는 각 지방에 파견해둔 조교사들이 ‘신흥 사이비 종교’를 잘 일으키고 있는지, 또 그 과정에서 생긴 문제는 무엇인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지역별 성민교(聖旻敎) 부흥 진척 보고서』
성민교(聖旻敎).
성스러울 성(聖)에 하늘 민(旻). 그리고 가르칠 교(敎)
즉, 신성한 하늘의 가르침.
“씨발.....”
당연히, 난 이런 낯간지러운 종교명을 원하지 않았다.
다만 이희연에게 적당히 작명을 부탁했더니, 저따위로 교명을 지어놨다.
맙소사, 성민교라니.
“후우...”
하지만 이미 물리기엔 늦었다.
이희연에게 보고를 받은 시점엔, 이미 내 지명을 받은 조교사들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 후였다.
-사락. 사락.
어쨌든 그건 그거고, 난 보고서를 넘기기 시작했다.
신도들의 수는 얼마나 되는지, 또 세뇌 강도는 얼마나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했다.
그리고 각 조교사가 요청한 인적, 물적 자원이 합당한지도 꼼꼼히 확인해보았다.
문제 될 건 없어 보였다.
-스슥. 스스슥.
하여 난 서명란에 사인을 한 뒤 책상 위에 툭 던져두었다.
그리고 의자를 돌려, 유리창 너머의 바깥 풍경을 감상했다.
머리가 지끈거려 휴식 시간이 필요했다.
“.....”
그러나 금세 이하영의 얼굴이 아른거린다.
어딘가 아파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신경 쓰인다.
또한 안지영의 안부도 걱정된다.
현재 그녀는 마피아 3대 세력 중 하나인 ‘드미트리’ 일당에 잠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만약 일이 잘못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
“젠장.”
꼴사납다.
이곳에 앉아 전전긍긍 그녀들의 소식을 기다려야 하는 게.
또 그녀들을 잃는다면 내 계획에 얼마나 차질이 생길지 계산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벌써 그녀들을 잃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자연스레 대체재를 떠올리고 있는 사고의 흐름도 역겨웠다.
‘그건 주인님의 방식이야. 내 사람을 소모하여 자신의 안위를 도모하는 건.’
지금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들은, 모두 주인님의 사고 방식.
주인님이라면 그녀들이 죽건 말건 딱히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목표만 이뤄낼 수 있다면, 언제든지 그녀를 살릴 수도, 또 버릴 수도 있는 게 바로 주인님의 방식이다.
‘난 달라. 아니, 달라야만 한다.’
난 주인님 같은 지배자가 되기 위해 그를 닮으려 노력했지만, 단 하나만큼은 원래의 내 가치를 고집하려 한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내 사람을 버리지 않을 것이다.
주인님은 쾌락으로, 또 구원자는 공포로 아랫것을 지배했다면, 나는 마음으로 아랫것들을 지배했다. 그러니 적어도 나는 마음으로 움직여야 한다.
‘백하윤의 쾌락이 무뎌지니 주인님의 세뇌가 약해졌지. 이하영의 공포가 무뎌지면서 구원자의 세뇌도 풀렸고. 그렇다면 나는...’
그렇다면 나는, 이 마음이 무뎌지면.
내 마음이 그녀들에게 와닿지 않으면.
내 마음을 무시한 채 이렇게 리스크와 결과값 만을 따지면.
그렇게 되면 그들의 세뇌 또한 풀리게 될 것이다.
나를 향한 절대적인 사랑과 충성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삑.
하여 나는 이희연을 호출했다.
내 역할은 이곳에 앉아 서류나 결제하고 있는 게 아니다.
“부르셨습니까 주인님.”
“그래. 러시아 지원 건 때문에 말이야.”
“네. 원격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러면 잘 알겠군. 모두 지원해줘. 준비하는 덴 얼마나 걸리지?”
“즉각 실행 가능합니다.”
“훌륭하군. 네게 참 많이 의지하고 있어.”
내 말에 번뜩 뜨이는 이희연의 두 눈.
이내 우물쭈물 말을 더듬으며 꺼내는 말.
“... 과, 과찬이세요오...”
베베 몸을 꼬며 얼굴을 붉히고 있는 이희연.
기분 좋은 걸 숨길 수 없는지, 귀까지 걸린 그녀의 미소.
“그러고 보니 우리가 몸을 섞은 지 얼마나 됐지? 최근에 바빠서 말이야.”
“어, 엄청 오래됐죠! 진-짜 지이인짜! 오래됐어요!”
기다렸다는 듯 오만 호들갑을 떠는 그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좀 쌓인 거 같아서 말이야. 괜찮다면 오늘...”
“넷! 네에엣!! 어, 어, 언제든지! 사실 지금도 가능-!”
“큭큭. 지금은 안돼. 아직 처리해야 할 게 남아서.”
“아... 그, 그러고 보니 저도 조금... 남아있긴...하네요...”
“음. 3시간 안엔 끝낼 수 있을 거 같은데. 빨리 끝내고 기분 전환이나 하지. 데이트도 하고 저녁도 먹고”
“네엣!? 데이트요옷!?”
“.....”
‘데이트’라는 말에 몸이 달아오른 듯 안절부절 가만히 있지 못하는 그녀.
그녀의 두 눈에 어떤 광기가 자리 잡는 게 실시간으로 보였다.
대체 뭘 생각하고 있는 건지.
“그, 그, 그러면 저도 빨리 끝내 놓을게요. 세, 세 시간 뒤에 봐요. 주인님...♥”
그녀는 그렇게 말을 남기며 내게 인사를 올리는 것도 까먹고 퇴장했다.
웬 괴상한 환호 소리가 복도 가득히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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쌓인 일을 처리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딱 3시간.
난 일을 마친 뒤 오랜만에 이희연과 데이트를 했다.
데이트 코스는 그녀가 미리 준비한대로 따라갔는데, 그냥 만화카페에서 개그만화나 보며 뒹굴거리는 게 전부였다.
내심 공원 산책이나 놀이공원. 아니면 영화관, 오락실 같은 곳에서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는데, 그녀가 원한 데이트 코스는 그저 개그만화나 보며 낄낄거리는 게 전부였다.
허나 이렇게 특별히 무언갈 하지 않고 시간을 죽이는 건 내게 최고의 데이트 코스였다.
그동안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나는 이렇게 한가하게 ‘킬링 타임’을 할 틈이 없었는데, 그녀 덕분에 이렇게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시간을 죽일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한가하게 개그만화나 보며 낄낄대는 게 대체 얼마만 인지 모르겠다.
“목마르지 않으세요? 여기-”
그리고 이희연은 웃음을 터트리는 날 흐뭇하게 바라보며 과자나 음료수를 먹이고 있었다.
원래라면 영양 관리한다고 군것질을 철저히 피했는데, 오늘만큼은 그녀가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먹었다.
오랜만에 먹는 불량식품의 맛은 최고였다.
“후후...♥”
이희연은 개그만화를 보며 낄낄대는 내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봤다.
아무래도 이렇게 한가하게 누워 군것질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모양이다.
하긴, 그동안 미친놈처럼 앞만 보고 달려왔던 날 생각해보면 그럴 만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녀의 눈엔 피 터지게 노력하는 내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던 모양이지.
“하음. 다음 일정은 어디지? 이제 볼만한 것도 없고.”
어쨌든 개그만화를 보며 시간을 때운 지 벌써 3시간 가까이.
이 짓도 슬슬 질려 다음 일정을 물어보았다.
이희연이 싱긋 웃으며 답했다.
“흐음. 그보다 지금 좀 나른하지 않으세요? 낮잠 주무실래요?”
낮잠?
...음. 솔직히 나른하긴 하다.
오랜만에 계속 웃어서 그런가.
그래도 오늘 데이트는 이희연을 위해 마련한 시간인데.
“주인님께서 자는 모습 보고 싶어요. 동침을 허락해주시지 않으니까~”
동침이라.
그러고 보니 각성한 이후로 누군가와 같이 자본 적이 없다.
하루하루 시간을 쪼개 살다 보니 자는 시간이 너무 귀중해 방해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어음. 그러면 뭐, 잠깐 눈 좀 붙일까.”
어차피 다른 무언갈 하긴 귀찮았다.
단지 홀로 남을 이희연을 위해 추억을 만들어 주고 싶었을 뿐.
그녀가 원하는 추억이 나와 동침하는 것이라면 기꺼이 들어줘야겠지.
“그럼 이부자리 깔게요~♥”
그렇게 동침을 허락하자,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매트리스와 베개, 이불을 세팅하기 시작했다. 이곳 만화카페는 취침까지 고려해 매트리스와 이불까지 벽장 안에 마련되어 있었다.
“잠깐 눈 좀 붙이세요. 저녁에 깨워드릴게요♥”
그렇게 취침 세팅이 완료되자, 공손히 무릎을 꿇은 채 내 이부자리를 가리키는 이희연.
난 그녀의 바람대로 이불 안에 들어가 잠을 청했다.
적당한 온도와 조도 덕분에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 한가로운 오후의 낮잠이었다.
***
다행이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겪은 일은 모두 꿈이었다.
알고 보니 난 교통사고를 당해 의식을 잃었었고, 주인님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내 망상이 만들어낸 허구의 일이었다.
하여 완전히 몸을 회복한 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오늘은 엄마의 48번째 생일로, 일류 쉐프가 된 나는 오랜만에 모인 가족을 위해 요리를 하고 있었다.
엄마와 아빠는 예전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고, 성아는 요리하는 내게 다가와 시비를 걸고 있었다.
“오올~ 실력 발휘 좀 하는 거야? 기대해볼게?”
“하하. 아무렴 오빠가 만든 건데 최고겠지. 스타 쉐프인데.”
“아빠. 난 대스타거든요?”
다 함께 모여 웃고 떠들고 있는 가족들.
응당히 내가 맞이해야 할 제대로 된 일상.
엄마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