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님.
그러니까 미스터 최가 남과 관계를 맺는 방식.
그것은 상대를 소모하는 방식이었다.
아무리 밝고 빛나던 상대라도 그 빛이 모두 다 할 때까지 상대를 착취하는 것이다.
그렇게 백하윤이 모든 빛을 다 잃었었다.
쾌락에 만성이 생겨 더 이상 쾌락이 듣지도 않았고, 그녀의 인생은 무너지기 직전이었다.
아마 이하영과 이희연도 그대로 놔뒀으면 백하윤과 같은 길을 걸어갔을 것이다.
‘나는 다르다. 난 그렇게 두지 않아.’
하여 정성민은 다른 길을 걷기로 했다.
상대를 고갈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상대와 상호작용하는 방식을 택하기로 했다.
그 예로 정성민은 자기 사람을 철저히 챙겼다.
상대에게 자신이 필요한 것을 요구하고, 상대가 그것을 충족시켜주면 그만큼 상대에게 보상을 줬다.
상대가 사랑을 요구하면 사랑을 연기해서라도 주었고, 돈을 요구하면 더 많은 돈을 주었다. 같은 논리로 쾌락을 요구하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쾌락을 주었다.
“후-우.”
정성민은 밤하늘을 보며 야외에 비치된 의자에 앉았다.
담배를 태우며 정성아와 이신아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녀들을 되찾기 위해 앞으로 해야할 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이번 편으로 매출은 상당히 끌어올렸어. 나머지 커미션은 조교사들이 잘해주겠지’
‘커미션 게시판’의 홍보와 활성화를 위해 직접 나섰던 지난 1개월.
이것으로 지지부진하던 매출이 수직 상승할 수 있었다.
또한 앞으로 조교사들이 활약할 것도 생각하면 당분간 매출에 문제는 없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일 때가 되었군’
급한 불을 껐으니 이젠 다음 계획을 실행해야 할 때.
정성민은 눈을 빛내며 자신의 외할아버지를 떠올렸다.
자신의 딸이 어떻게 되든 방관으로 일관한 그를 생각하며 주먹을 꽉 쥐었다.
‘돈에 미친 새끼. 그룹을 키우는 데만 미친 수전노.’
자식들을 오로지 기업을 키우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그.
자신이 세운 기업을 키울 수만 있다면, 자식의 행복 따윈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그의 신념.
‘그래. 그렇다면 당신이 그토록 원하던 것을 들고 가 주지.’
정성민의 계획.
외할아버지가 혹할만한 것을 들고 가, 그와 거래를 하는 것.
그 거래를 통해 이신아와 정성아를 빼내는 것.
‘그리고 그 후엔...’
주인님과 얽힌 이 모든 전쟁을 끝내고 난 뒤엔, 이신아를 버린 대가를 치르게 하는 것.
그것까지가 정성민의 계획이자 이루고 싶은 목표였다.
-삑.
하여 정성민은 폰을 들었다.
그리고 백하윤에게 지시해두었던 일의 진행 상황을 물었다.
[생존자는 찾았어. 명령만 내리면, 곧바로 접촉할 수 있게 대기 중이야.]
정성민이 백하윤에게 지시했던 명령.
10년 전, 국민 배우 진태곤이 벌인 뺑소니 사건의 생존자를 찾을 것.
백하윤은 그 명령을 받들어 몰살한 일가족의 생존자 아이를 감시하고 있는 중이다.
“그래. 그러면 슬슬 접촉해봐. 아니, 내가 직접 가지.”
[응. 기다리고 있을 게.]
-삑.
정성민은 통화를 끊고 곧바로 외투를 챙겨입었다.
그리고 대기 중인 운전기사를 불러 백하윤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
한편, 같은 시각 어느 회의실.
통화를 끊은 백하윤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정성민이 이리 온대.”
“!”
“!”
백하윤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 위에 느낌표를 띄우는 둘.
다름 아닌 이하영과 이희연.
““아직 비상대책도 못 세웠는데?”“
친구 아니랄까 봐, 같은 생각을 동시에 내뱉는 이하영과 이희연.
그리고 그녀들이 말하는 비상대책.
그것은 바로...
”안지연 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정하지도 않았는데...!“
안지연.
1회용 오나홀일 줄 알았던 그녀가 정성민의 측근이 되었다.
그것도 신설된 부서 ‘특수정보팀’의 팀장으로.
지휘체계는 정성민과 안지연 1:1로 다이랙트.
한 마디로 주인님의 제 1검이 된 안지연.
”크으으읏...!“
끊어 오르는 질투심.
감히 주인님과 1:1로 ‘독대’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영광.
이희연은 단둘이 이러쿵저러쿵 이야기를 나누는 광경을 상상해보았다.
그녀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린다.
오, 지연이, 내 사랑. 그동안 고생 많았다. 이리 와라.
아으응~ 주인님~♥
”크으읏!!!“
주인님과 1:1로 ‘독대’할 수 있는 건 나만의 권리였는데!
일을 잘 해낼 때마다 주인님에게 칭찬을 받으며 삶의 보람을 느끼는 것은 나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었는데!
그런데 그 자리를 근육보지년이 함께 나눠 먹다니!
”후우... 성민이를 자꾸 빼앗기는 느낌이네.“
그리고 이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이하영도 마찬가지였다.
이번 비상대책을 위해 러시아에서 한국으로 급하게 귀국한 이하영은, 아직도 근육보지년의 ‘인사이동’에 대한 충격에서 헤어나오고 있지 못하는 중이다.
그녀는 어제 이희연과 나눴던 통화를 떠올렸다.
이하영! 좆됐어!
갑자기 뭐래니.
안지연이 우리 바로 밑 직급까지 오른대!
뭐?
게다가 신설된 팀의 팀장도 맡게 됐고!
그, 그런!
무슨 의미인지 알지!? 주인님과 ‘독대’를 할 거란 말이야!
!!!!!!!
어떡하지?
언니 불러! 내일 당장 갈게!
..... 그렇게 호다닥 한국으로 달려온 이하영.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중얼거렸다.
”성민이는 원래 내 남자친구였는데...“
자꾸자꾸 남자친구를 누군가에게 빼앗기는 기분.
오로지 자신의 것이었을 때 잘해줄 걸 하는 후회.
아직도 선명한 둘만의 추억과 사랑.
허나 이하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아냐. 성민이는 뒷세계의 왕이 될 사람이야. 더 이상 내 남자친구가 아니야.’
성민이를 배신한 죄인.
이미 그것으로 여자친구의 지위는 상실해버린 것이다.
성민이가 자신을 받아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해야 하지 않은가.
”인정해주는 건 어때.“
하여 이하영은 쓰라린 마음을 삼키며 그렇게 말을 꺼냈다.
그러자 이희연과 백하윤이 휘둥그레 눈을 뜬 채 자신을 바라보았다.
”뭐라고 했니?“
”미쳤어?“
”..... 잘 생각해봐.“
이하영은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직 ‘상실의 고통’을 모르는 이희연과 백하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민이는 이곳 뒷세계의 정점을 노리고 있어. 그리고 그 길을 가는 데 도움이 되는 사람에게 중요직책을 주고 있지.“
”.....“
이하영의 말에 침묵하는 이희연과 백하윤.
질투에 눈이 멀어, 정성민의 ‘제1검’을 부러뜨리려고 했던 자신.
그녀들은 눈을 감으며 속죄했다.
”안지연은 성민이에게 필요한 사람이야. 그것도 그런 직책을 줄 만큼 엄청 필요한 사람. 우리 품어야 해.“
”... 동생 말이 맞아.“
”... 나도 인정. 주인님의 앞길을 막으려 하다니. 내가 미쳤지...“
사랑하는 사람의 앞길을 위해서, 다른 여자를 받아들여야 하는 현실.
그녀들은 쓰라린 마음을 삼키며 엄숙히 이하영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다만-.
”더 들어봐 아직 안 끝났어.“
이하영은 더 하고싶은 말이 있는 듯했다.
백하윤과 이희연의 귀가 쫑긋 세워졌다.
”그래도 아직 다행인 건, 안지연이 우리 밑 직급이라는 거야.“
”...그래서?“
”그러니까 완전히 우리 편으로 끌어들여서 보듬어주자는 거야. 약간 언니로서 챙겨주는? 그런 포지션? 우리 말을 잘 들을 수 있게.“
”호오...“
”적으로 둬서 멀리하는 것보다 그게 나아. 다만 우리의 위치가 걔와 다르다는 것은 확실히 인식시켜주는 거지.“
백하윤은 턱을 괸 채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손가락을 탁! 튕기며 입을 열었다.
”괜찮네. 그럼 안지연을 적극 활용하는 게 어때?“
”“적극 활용?”“
”그래. 우리의 정보력과 그 애의 무력을 합치는 거지“
”!“
”!“
”그러면 앞으로 더 불어날 우리의 정적을...“
”미리...“
”짓밟을 수 있겠군요...“
후후후후- 사악한 미소를 짓는 도원걸의 3자매.
그녀들은 악수를 나누며 이번 ‘안지연 퇴출 건’을 기각하고 ‘안지연 특사 건’을 가결하기로 했다.
그렇게 안지연은 도원걸의 3자매의 제1검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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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윤을 만나러 가는 길.
나는 차 뒷자석에 몸을 파묻은 채 테블릿PC를 보고 있다.
[진태곤.hwp]
내가 보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진태곤에 관한 보고서.
이 보고서 안엔 10년 전 그가 벌인 뺑소니 사건의 전말과 그와 얽힌 관계자가 총망라되어 있다.
파일을 모두 확인한 나는 태블릿PC를 끄고 잠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백하윤이 아주 자료를 잘 모아놨어. 이 정도면 그를 파멸시키는 데 충분해.’
진태곤이 음주,마약을 한 정황.
그로 인해 발생한 교통사고를 방치하고 도주한 정황.
유준형 회장이 경찰을 매수하고 언론을 조작한 정황.
그 모든 정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은 백하윤의 꼼꼼함.
이러니 그녀에 대해 칭찬을 아낄 수가 없다.
조만한 한 번 안아줘야겠다.
-지이이잉.
몸이 달아올라 창문을 내려 밤바람을 쐬었다.
이렇게 목표에 차근차근 다가가는 게 느껴질 때면, 나는 어김없이 내부가 들끓는 것을 느낀다.
증오, 복수, 간절함, 추억, 씁쓸함. 이런 여러 감정들이 응어리져 폭발하는 듯한 느낌.
‘너도 이런 감정을 느끼게 해주지.’
잃어버린 것을 되찾겠다는 열망.
나는 이 열망을 뺑소니 사건의 생존자도 느끼게 해줄 것이다.
뺑소니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되면, 녀석도 분명 분노하게 되겠지.
잃어버린 것을 되찾고자 무슨 짓이든 하려 할 테지.
-솨아아아...
빠르게 흩어지는 도시의 야경.
나는 어둠 속 일렁이는 네온사인을 보며 녀석의 얼굴을 생각했다.
그리고 조교사로 성장한 녀석이 벌일 파멸적인 일들을 생각하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
장민혁.
10년 전 끔찍한 교통사고에서 살아남은 아이.
그는 지금 야근을 끝마치고 집으로 귀가하는 중이다.
절뚝-절뚝- 다리를 절며 힘든 걸음을 꾸역꾸역 옮기고 있는 중이다.
-절뚝... 절뚝... 절뚝...
10년 전 교통사고로 장애가 생긴 다리.
허나 그의 발걸음이 이렇게 더딘 것은 불편한 다리 탓만이 아니었다.
그의 걸음 하나하나가 이렇게 무거운 것은,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앞으로 나아가기 힘들 만큼 버겁기 때문이다.
“하-아...”
멈춰선 그.
문득 떠오르는 자신에 대한 수식어.
흙수저 인생, 실패한 삶, 가치 없는 하루하루.
그 모든 것이 담긴 그의 한숨.
장민혁은 이제 더 이상 살아갈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
10년 전 모든 것을 잃고 보육원에 맡겨진 후, 그의 인생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왜 나 혼자만 살아남아 이런 고생을 해야 하는 걸까.
-털썩.
이제는 지쳤다.
이딴 최하위 하청 업체에서 고단한 일을 하는 것도.
허름한 반지하 방에서 하루하루를 연명하는 것도.
친구나 애인 하나 없이 끝없는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것도.
이젠 모두 지쳐버렸다.
“흐흑...흐흐.....으으...”
그는 얼굴을 감싸 쥐고 울었다.
퇴근 전 작업반장에게 된통 혼난 게 자기비하의 신호탄이 되었다.
작업반장에게 들은 모진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며 그를 괴롭힌다.
‘하- 진짜 네 얼굴 보면 되던 일도 안 풀린다니까? 야 인마. 너 친구 없지? 어? 진짜 답답해서 열불 터지겠네. 야. 이따위로 할 거면 나오지마. 알겠어? 장애인이라고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평생을 놀림 받고 자라, 의기소침한 그.
그 때문에 일머리가 모자란 그.
내성적이라 친구도 없는 그.
장애인으로 살아오며 받은 온갖 차별의 시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