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6화 (136/303)

내가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한 적이 있던가.

뜬금없이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

“뭐, 그런 말을 듣고 싶었나.”

하지만 딱히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랑한단 말이 고팠던 모양이지.

난 폰을 집어넣고 다시 하려던 일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도심의 한 작은 세미나실.

이희연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통화를 끓은 다음 주위를 둘러봤다.

그녀의 양 사이드에는 이하영과 백하윤이 앉아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주인님께서 좀 늦는다고 하네~ 갑자기 일이 생겼다고. 역시 주인님은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한다니까~♥”

이희연은 그렇게 말하며 싱긋 눈웃음을 지었다.

호선을 그린 그녀의 눈이 썩어있는 이하영과 백하윤의 표정을 포착했다.

피식- 입꼬리가 올라갔다.

“풉.”

그런데 그때.

돌연 이하영이 비웃는 소리를 내며 이희연을 힐끗거렸다.

그리곤 한 손으로 턱을 비스듬히 받치며 말했다.

“뻥이지?”

“...뭐?”

“사랑한다는 말. 성민이가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할 리 없는데.”

.....순식간에 들통나버린 구라.

비수가 되어 꽂힌 이하영의 반격.

허나 이희연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어머, 질투하니? 나와 주인님은 꽤 오래전부터 그래왔는데? 서로 매일 붙어있는 사이라.”

이만하면 당황하지 않고 꽤 여유롭게 대처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차에, 이하영이 홍소를 터트렸다.

“푸하하하하하!”

듣기만 해도 기분 나빠지는 웃음.

당장이라도 저 투트랙 걸레년의 머리채를 쥐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여유를 잃어선 안 된다.

침착을 가장해야 한다.

“뭐, 못 믿을 만하지. 네가 돼지새끼랑 구르고 있는 동안, 나와 주인님은 서로 돈독한 관계를 쌓아왔으니까.”

..... 빠직. 맞받아치는 공격에 과격하게 일그러지는 이하영의 미간.

테이블 아래 그녀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허나 그녀는 다시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우리 희연이. 많이 컸네. 예전에는 내 눈치만 살살 보던 게.”

“후후. 그럼~ 지금 나와 주인님은 일거수일투족을 함께 하는 사이인걸?”

“아아- 그래? 뭐, 성민이와 넌 사업적인 파트너니까 그럴 수 있지.”

“풉.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모양이네~ 하지만 나와 주인님은 공사 구분이 없거든.”

“회사에선 비서, 집에선 가정부. 그런 말이니?”

“가정부가 아니라 내조.”

“데이트 한번 못 해봤으면서 내조는 무슨. 난 성민이랑 수백 번도 더 해봤는데.”

“..... 근데 너 되게 건방지다? 주인님의 이름을 막 함부로 부르네?”

“못 할 게 뭐 있어? 나와 성.민.이는 연인 사이인데.”

“아~ 연인 사이라서 돼지 새끼한테 벌리고 다녔구나.”

“버, 벌려? 너!”

“적어도 난 너처럼 주인님을 배신하진 않아~ 난 주인님 일편단심이거든.”

“배신하지 않는 게 아니라 배신할 상황조차 없었겠지. 아무도 널 원하지 않는데, 어떻게 배신해?”

“아~ 누군가 자길 원하면 그렇게 막 벌려도 되는구나.”

“너도 이전 주인님한테 넘어갈 뻔했으면서 무슨. 작정하고 널 떨어뜨리려 했다면 너도 내 꼴 났어.”

“글쎄? 다행히 그전에 주인님이 날 붙잡아줘서. 내가 너무 필요했던 모양이야.”

“내가 오랫동안 자리에 없으니 분노가 폭발한 거겠지.”

“.....”

서로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는 둘.

이때 백하윤이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유치하기는. 지금 이런 거로 싸울 때인가요?”

백하윤은 그렇게 말하며 의자 등받이에 느긋하게 몸을 기댔다.

이하영과 이희연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아요. 현재가 중요하지. 현재의 정성민이 누굴 가장 사랑하고 있는지, 그걸 생각해봐요.”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하영과 이희연을 훑어보는 백하윤.

그때, 이하영이 말했다.

“일단 아줌마는 아니네요.”

“뭐?”

“아. 죄송. 언니라 불러드려야 했는데.”

“친근하게 언니가 아니라 이모 어때.”

이모를 언급하며 옆에서 거드는 이희연.

친구 아니랄까 봐 저럴 때는 또 쿵짝이 잘 맞았다.

백하윤은 애써 심호흡을 하며 여유로운 표정을 유지했다.

“하! 근데 잘 생각해봐요. 최근 정성민이, 누굴 가장 신경 쓰고 있는지.”

“.....”

분하다는 듯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이하영과 이희연.

백하윤은 피식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말 안 해도 알죠? 최근 그와 진한 사랑을 나눈 사람이 누군지는. 사랑은 쟁취하는 거예요. 그에게 필요한 사람이 되어야, 그의 사랑을 받을 수 있죠.”

백하윤은 그렇게 말하며 정성민과 나눴던 완벽한 교감의 순간을 떠올렸다.

질 내부에 그의 흉물을 가득 받아들인 채, 입을 맞추고, 다정한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머리를 쓰다듬고, 두 팔과 다리로 서로를 끌어안고.

그리고 끝에는, 그의 뜨거운 정액을 질 안 깊숙이 받아들이고.

아아- 얼마나 황홀한 순간이던가.

다시 한번 그를-

“이봐요 아줌마.”

그때, 상념을 흐트러트리는 이하영의 차가운 음성.

이하영이 피식 웃으며 다음 말을 이었다.

“뭔가 착각하나 본데, 성민이에게 가장 필요한 건 저예요.”

“어머, 전 여자친구만큼 쓸모없는 게 또 있을까.”

“향락소. 들어봤죠?”

향락소.

모를 리가 없다.

이전 주인님의 가장 큰 적인, ‘구원자’가 운영하는 종합 향락 시설.

이전 주인님의 도박장과 박종필의 마약공장을 합쳐도 넘볼 수 없는, 한국 최대 규모의 성접대 시설.

그걸 왜 저년이 언급하고 있을까.

“향락소 제2지부. 그곳의 총책임자가 저예요.”

..... 향락소 제2지부를 이하영이 맡고 있다.

그 사실에 백하윤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최근 주인님에게 내쳐지며 일에 손을 떼다 보니, 이하영의 근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그녀였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소식이 구원자의 애첩이 됐다는 거였는데, 벌써 거기까지 올라가다니.

“대단하네요. 하지만-.”

허나 그렇다 해서 꿇릴 그녀가 아니었다.

백하윤은 어깨를 쫙- 펴며 또박또박 다음 말을 이었다.

“저는 백하윤이에요.”

백하윤.

그 이름 세글자가 의미하는 무게.

대한민국 최고의 연예인.

성공한 아이돌 가수이자 국민 여배우.

세계적으로 수출되는 K-컬쳐에 빠질 수 없는 그 이름.

그녀의 이름으로 써 내려간 신화적인 역사.

당장 그녀의 이름만 너튜브에 검색해봐도 수백 개의 영상이 넘쳐날 정도.

‘상장폐지 아줌마 주제에.’

허나 이희연에겐 그저 상장폐지 아줌마.

즉- 친근한 표현으로 상폐 이모일 뿐이었다.

그녀의 나이가 벌써 서른셋.

이제 곧 은퇴를 앞둘 시기 아닌가.

물론 간간이 드라마에 나오긴 하겠지만, 이제 대중들에게 잊혀지겠지.

‘쳇.’

하지만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아무리 백하윤이란 이름을 내려치려 해도, 백하윤은 백하윤이다.

뒷세계를 주무르는 여왕이자, 대중들의 여왕이다.

그녀가 아무리 망가졌다 한들, 그녀가 써 내려간 역사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뭐, 그쪽이 대단한 건 인정해요.”

하여 이번에는 이하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백하윤의 가치를 인정했다.

확실히 그녀는 성민이에게 필요한 존재일 테니, 성민이도 그녀에게 사랑을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저는 젊어요. 그리고 언니는?”

그렇게 말하며 씨익 입꼬리를 올리는 이하영.

허나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는 백하윤이었다.

“그깟 숫자 따위 중요할까. 이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관리에 공들였는데. 요즘은 관리하기 나름이란다.”

“그래요? 그래도 언니에겐 치명적인 약점이 있는데.”

치명적인 약점.

그것을 언급하는 이하영의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번졌다.

더불어 이하영의 의도를 눈치챈 이희연의 눈도 호선을 그렸다.

“언니는 양다리 걸치고 있잖아요. 그 박종팔인지 뭔지 하는 아저씨랑.”

“.....”

뿌드득- 균열이 일어나는 백하윤의 이마.

확실히 그녀는 박종필을 버릴 수 없었다.

차마 떼어 내지 못할 애착이자, 그녀의 원죄였다.

만약 그에게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이 주박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음. 한 방 먹었네. 그런데 말이야.”

허나 노련미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녀였다.

백하윤은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이하영에게 말했다.

“정성민은 그걸 다 알고도 날 받아줬어. 심지어 박종필과 얽힌 악연을 끓어낼 수 있게 도와준다고까지 했지. 그는 넓은 사람이야. 내 선택을 존중해준다 했고, 난 그에게 내 모든 걸 바칠 생각이야.”

백하윤은 자신의 진심을 담아 이하영에게 전했다.

이하영은 백하윤이 치명적인 약점을 딛고 정면돌파할 거라곤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 그건 맞지. 주인님은 넓은 분이니까.”

그때 고개를 끄덕이며 이희연이 동조했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 이하영과 백하윤 둘을 동시에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음이 넓은 분이시니 미스터 최와 구원자에게 넘어간 너를 받아주고, 미스터 최에게 15년 이상 조교 받은 것도 모자라서 박종필과 양다리 걸치고 있는 언니를 받아준 거겠죠. 안 그래요?”

“.....”

반박할 수 없는 진실.

이하영과 백하윤은 조용히 침묵했다.

허나 반박할 만한 진실이 하나 더 남아있었다.

“그렇지. 우리 성민이가 마음이 넓으니, 이런 죄 많은 날 다시 받아준 거지. 그리고 딱히 쓸모없는 널 받아준 이유도 그게 아닐까?”

“뭐?”

“동감해요. 우린 그에게 힘이 될만한 자본과 세력이라도 있지, 당신은 뭐 없는 거로 알고 있는데. 당신 딱히 쓸모없지 않아요?”

..... 투트랙 걸레년과 상폐 이모의 합동 공격.

이희연은 이마를 짚으며 둘을 노려봤다.

뭔가 반박할 만한 말이 또 없을까.

“..... 내 세력이 없긴 왜 없어.”

그러던 중, 하나 생각났다.

반박할 거리가.

“난 비서이긴 하지만, 스트리밍 사업체의 총괄 책임자이기도 해. 내 밑에 있는 직원들이 몇인데. 내가 관리하는 노예들이 얼마나 많은데.”

실제로 이희연은 정성민의 오른팔이다.

즉, 스트리밍 사업체의 2인자라는 말이다.

“물론 내 독자적인 세력은 아니지만... 비, 비서 역할만 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녀는 ‘관리’를 하고 있을 뿐이지, 소유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여 그녀는 대충 말을 얼버무리며 마무리 지었다.

그녀는 언젠가 자신도 주인님을 위한 독자적인 세력을 만들겠다고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쯤 하죠.”

그때, 후-우. 한숨을 내쉬며 사태 진압에 나서는 백하윤.

그래도 언니인 자신이 나서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그녀였다.

“정성민이 우릴 이곳에 모은 이유가 뭐겠어요.”

“정성민이 아니라 주인님.”

“..... 어쨌든, 이곳에 모은 이유가 뭐겠냐고요. 우리끼리 싸우라고 모은 건 아닐 거 아니에요.”

“.....”

“전 그 사람의 가능성을 엿봤어요. 언젠가 주인님을 뛰어넘을 수도 있는 재능이죠. 아마 그의 계획이 제대로 이뤄지기만 한다면, 그 사람은 뒷세계의 정점에 오를 수 있을 거예요.”

뒷세계의 정점.

백하윤의 말에 이견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하영과 이희연.

백하윤이 말했다.

“우린 그 계획에 차질이 없도록 하기만 하면 돼요.”

끄덕-

이하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중요한 것은 성민이를 위한 마음이다.

성민이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이 아니라.

“... 언니 말이 맞아요. 중요한 건 성민이를 위한 마음이죠.”

이하영을 그렇게 말하게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그를 두 번이나 배신한 자신에게 무슨 자격이 있을까.

그가 누구를 선택한다 한들, 이미 여자친구의 자격을 상실한 자신이 불만을 가질 순 없었다.

“후-우. 저도 동감해요. 우리끼리 싸울 게 아니라 더 노력해야죠.”

이희연 또한 백하윤의 말을 순순히 인정했다.

그 누구보다 주인님의 정실에 어울리는 사람은 자신이라고 확신했던 그녀였지만, 오늘 대화를 나눠 보니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결국 중요한 것은 주인님이 가는 길에 얼마나 쓸모있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인가.

그것만이 중요했다.

정실 자리는 주인님이 숙원을 모두 이룬 후에, 그때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는 왕이 될 사람이에요.”

돌연 훈훈하게 바뀐 분위기.

그 분위기 속에서 백하윤이 다시 말을 꺼냈다.

이하영과 이희연이 눈을 빛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지옥의 가장 밑바닥에 떨어졌다가, 다시 일어서 모든 것을 찬탈할 남자. 그가 바로 정성민이죠.”

반박의 여지가 없는 지당한 말.

왕의 자질을 타고난 그녀들의 주인, 정성민.

“왕에겐 당연히 수많은 여인이 따르기 마련이에요. 사실 우리 셋 정도는 어림도 없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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