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주인님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15년 전, 박종필이 떠나고 주인님에게 매일 겁탈 당하던 그때.
주인님이 내 귀에 속삭였던 말들이 나를 잠식해온다.
‘박종필이 행복하기를 바란다면 천박한 여자가 되어라. 그가 혐오할 만한 여자를 연기해, 그가 너를 단념하도록 하는 것이다.’
나를 구하기 위해 살인까지 저지르려 했던 박종필.
그리고 끝내 적에게 붙잡혀 목숨을 위협받는 지경까지 이른 그.
결국 난 그를 구하기 위해 주인님의 여자가 되기로 했다.
그리고 그가 돌아왔을 때, 이런 날 단념하도록 만들기 위해 나는 잔혹해지기로 했다.
‘떨어져라. 더욱 떨어져라! 그것만이 너희 둘이 행복할 수 있는 길이다.’
주인님은 나를 떨어뜨리며 쾌락을 밀어 넣었다.
나는 그렇게 한 달 만에 정신이 뒤틀려져 쾌락만을 갈구는 여자로 전락하고 말았다.
‘하, 하윤아...’
그리고 마침내 그가 돌아왔을 땐,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있었다.
여전히 그를 보면 마음이 아프지만,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그를 내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오히려 괴로워하는 그를 보며 흥분을 느끼는 나였다.
그렇게 1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난 점점 인간성을 상실하며 쾌락만을 좇는 여자가 되어버렸다.
“으으...으으으....”
그리고 현재. 나는 이렇게 비참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박종필을 포함한 수많은 사람에게 저질렀던 죄악이 나를 강하게 짓눌러온다.
“야, 약을... 약을...”
나는 비틀비틀 몸을 움직여 주사기를 찾았다.
그렇게 서랍에서 주사기를 꺼낸 나는, 주사 자국이 가득한 왼팔에 주삿바늘을 겨냥하였다.
“.....”
하지만 바늘을 찌르려는 순간, 난 망설이고 만다.
머릿속에 울리는 정성민의 목소리 때문이다.
‘힘들겠지만 참아. 일주일만 약을 끊고 내 연락을 기다려’
딱 일주일만 약을 참으라고 했던 정성민.
하지만 오늘은 벌써 토요일 오전 3시이다.
그러니까, 저번 주 금요일에 나와 정성민이 만났으니, 벌써 일주일이 지났다는 말이다.
‘이제는 한계야. 이제는 더 이상...’
매일 밤 그가 보고 싶은 것을 꾹 참아왔다.
저번의 만남 이후로 그에 대한 이상한 집착이 생겨버린 난, 매일 사무치도록 그가 그리웠다.
특히 오늘처럼 인생에 대한 회의와 죄책감이 밀려올 때면 그의 품에서 안겨 위로받고 싶었다. 다 괜찮을 거라고, 자기에게 모든 걸 맡기면 된다고 나를 안심시켜 주는 그의 목소리가 자꾸만 아른거린다.
-우우웅~
그때였다.
테이블 위, 내 스마트폰 액정이 밝아지며 진동이 울렸다.
나는 곧바로 손에 들린 주사기를 떨군 뒤 폰이 있는 곳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액정에 떠 있는 문자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해보았다.
[입구로 나와.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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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로 나와. 지금]
드디어 그에게서 온 문자.
난 외투만 대충 챙겨입고 그가 있는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를 찾으려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빵- 하는 경적이 울렸다.
“.....”
-저벅. 저벅. 저벅.
경적을 누른 차량은 저기 있는 검은색 승용차.
난 곧바로 그곳으로 걸어갔다.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창문이 위잉 내려가며 반가운 얼굴이 고개를 내민다.
“타.”
정성민.
지난 일주일간 나를 애타게 만들었던, 바로 그 정성민.
나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조수석에 몸을 실었다.
정성민은 곧바로 차를 몰아 지하주차장 밖으로 빠져나왔다.
-솨아아아아....
그렇게 밖으로 나오니,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콰르르르릉-! 천둥 번개가 치며 하늘이 분노하고 있었다.
-위잉- 위잉- 위잉- 위잉-
다만 차 안은 고요했다.
드디어 일주일 만에 만났는데, 와이퍼만 열심히 일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
하지만 구태여 어떤 말이 필요할까.
그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를 미치게 만들었던 불안증세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또 나는 이렇게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 날씨를 좋아해서, 지금은 이 소리를 조용히 감상하고픈 마음도 있었다.
”한숨 자.“
그때, 정성민이 정면을 응시한 채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내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자, 그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금단증상 때문에 힘들었을 거 아니야. 일주일간 잘 참았어. 자-“
정성민은 그렇게 말하며 병 하나를 내밀었다.
설명을 요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그가 말했다.
”그것도 마약의 일종인데, 엄청 약한 거니까 괜찮아. 보상의 의미로 받아들이고 마셔.“
보상의 의미.
수고했다고 칭찬해주는 건가.
기분이 좋아졌다.
”... 그럼.“
난 약병을 딴 뒤 안으로 쭉 들이켰다.
그러자 나른한 감각이 몸에 퍼지며, 희미한 쾌락이 몸을 감돌기 시작했다.
마치 일주일 전 최면 상태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감각이었다.
”아... 이 감각은 그때 그...“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몸을 뉘었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편안함과, 나른함이었다.
순식간에 졸음이 쏟아졌다.
-위이이잉....
졸린 나를 배려하는 것일까.
정성민이 버튼을 눌러 내 의자가 뒤로 기울도록 해주었다.
나는 천둥소리와 비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으며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렇게 나는 오랜만에 깊은 잠에 빠졌다.
***
”.....윤!“
”ㅂ....하..윤!“
”백하윤!“
누군가 나를 부르는 목소리.
나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려 목소리의 주인을 보았다.
정성민이었다.
”거의 도착했어. 그런데 좀 걸어가야 할 거 같은데.“
”.....걸어가?“
정성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난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악셀을 밟아 차 바퀴가 진흙에 빠진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갑자기 비가 쏟아져서 지반이 약해졌나 봐. 바퀴가 안 빠지네.“
”아...“
”괜찮아. 조금만 걸어가면 되니까. 근데 비 좀 맞아야 할 거야.“
”...우산은?“
”없어. 지하주차장으로 가면 되는 거라, 굳이 안 챙겼는데.“
”..... 어쩔 수 없네.“
집은 가까이 있고, 우산은 없는 상황.
결국 정성민과 난 차에서 내려 그의 집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차 밖으로 나오자 거친 자연의 생생함이 그대로 전해졌다.
-솨아아아아....
도대체 얼마 만에 맞는 비일까.
생각해보니 비 맞을 일이 거의 없었다.
항상 누군가가 우산을 씌워주거나, 아니면 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가자.“
허나 오랜만에 맨몸으로 맞는 비는 썩 나쁘지 않았다.
그것도 이 남자와 함께 손을 잡고 맞는 비라면 더욱.
나는 그가 내민 손을 잡고 그의 뒤를 따라갔다.
드라이한 머리와 화장이 엉망이 되고, 수백 수천만원 짜리 옷이 흠뻑 젖어가고 있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다.
오히려 내리는 비 속에서 자유로운 기분을 느끼는 나였다.
”프흐흐.“
왜일까.
돌연 웃음이 터져 나온다.
잃어버렸던 순수를 되찾을 기분이라고 할까.
이 비에 내 더러움이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다.
마치 진흙 속에 파묻혀 있던 어떤 반짝이는 것을 깨끗하게 씻어낸 느낌.
그와 함께하면 ‘비극’이란 내 인생의 장르도 ‘판타지로’ 바뀌는 기분이다.
”왜 웃어.“
그때, 그가 씨익 웃으며 나를 돌아봤다.
그의 얼굴을 보자 다시 웃음이 터져 나온다.
”프하하. 몰라. 재밌어.“
”큭큭. 실없기는. 거의 다 왔어.“
야심한 새벽.
우린 손을 잡고 빗속을 걸어갔다.
슬슬 온몸이 으슬으슬 추워지긴 했지만, 오히려 맞잡은 손의 온기가 진해져서 좋았다.
그의 넓은 등을 보고 있자니 간질간질한 어떤 무엇이 가슴에서 퍼져나간다.
”후-우. 수고했어.“
그렇게 그런 두근거림 속에 도착한 그의 저택.
현관에 도착한 우리는 홍채인식으로 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갔다.
그는 들어가자마자 나를 욕실로 데리고 가 온수로 몸을 데워주었다.
나는 조각 같은 그의 몸을 보며 욕정이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지금은 안돼. 몸부터 깨끗이 씻고.“
부끄럽게도, 이런 나의 욕망을 눈치챘는지 그가 샴푸를 짜내 내 머리를 장난스레 헝클어트렸다.
순식간에 욕정이 사라지고 자연스러운 미소가 번져나갔다.
”프흐흐흐. 귀신이네.“
”눈빛만 봐도 알지. 머리부터 감아.“
나체인 날 보고도 여유롭게 나를 가지고 노는 그.
보통 남자들은 내가 벗을 모습을 보면 여유를 잃기 마련이다.
뻣뻣하게 굳어선 나를 찬양하고 눈치를 보곤 한다.
하지만 이 남자는 달랐다.
그와 함께 있는 이 순간은 마치 연인 같았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순수한 감정이 다시 되살아나는 기분이다.
”스킨로션만 있으면 되지?“
”응.“
샤워를 마친 우리는 욕실 앞 화장대에서 스킨로션을 바르고 머리를 말렸다.
다만 중장발인 나는 머리를 말리는 데 오래 걸릴 수밖에 없었다.
”도와줄게.“
하여 자신의 머리를 다 말린 정성민이 드라이기를 하나 더 보태 머리 말리는 것을 도와주기 시작했다.
난 내 뒤에 서 있는 그를 화장대 거울로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주인님만큼이나 완벽한 몸을 하고 있었다.
”잡생각 금지. 계속 그쪽만 말리고 있잖아.“
”어? 아, 안 했거든.“
난 황급히 시선을 갈무리하며 머리를 말렸다.
그리고 내 머리를 훑는 그의 손가락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의 손길이 닿는 곳곳마다 기분 좋은 감각이 퍼져나갔다.
”후-우. 여자 머리 말리는 거 쉽지 않네.“
그렇게 얼마나 머리를 말렸을까.
우린 마침내 물기 하나 없이 머리를 말릴 수 있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할래. 최면실로 갈래. 아니면 그냥 할래.“
최면실.
만약 그곳으로 가면 그토록 그리워했던 15년 전의 박종필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이상하게도 오늘은 이 남자에게 더욱 마음이 끌렸다.
또, 어차피 동일인물이 아니던가.
그날 내가 봤던 15년 전의 박종필은, 정성민이 연출한 모습 중 하나에 불과할 뿐이니까.
”그냥 하자. 당신에게 안기고 싶어.“
그렇게 생각하니 확실하게 정리가 되었다.
지금 난 15년 전의 박종필에게 안기고 싶은 것이 아니라, 정성민에게 안기고 싶어 했다.
아마 지금의 나는... 정성민에게 연애감정 비슷한 것을 느끼는 모양이다.
15년 만에 순수하게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다니.
저번에 받았던 최면의 영향일까.
”좋네. 귀찮을 필요 없이. 저기로 가자.“
정성민은 내 손을 잡고 어떤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은 침대가 없고 바닥에 이부자리가 깔린 아담한 방이었다.
마치 박종필과 첫경험을 나누었던 반지하를 연상케 하는 구조였다.
”여긴...“
”흉내 좀 내봤어. 최면을 안 하더라도, 분위기는 맞춰야 할 거 같아서.“
15년 전, 내 처음을 박종필에게 주었던 그 공간.
나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이불 안으로 쏘옥 들어갔다.
그날도 이렇게 천둥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 날이었는데, 타이밍이 참 공교로웠다.
-스으윽...
이윽고 그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나와 같은 이불을 덮어쓰고 나를 지긋이 바라보았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반쯤 이불로 가렸다.
”큭큭. 그 반응은 뭐야. 귀엽네“
그가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사실 나도 별꼴 다 겪은 내가 왜 이러는지 의문이었다.
그와 있으면 10대로 돌아간 거 같은 기분이다.
-콰르르르릉!
그때, 천둥소리가 내 귀에 파고들었다.
솨아아아- 내리는 비소리도 배경음악처럼 깔리고 있었다.
그리고 난 왜 내가 10대로 되돌아온 기분을 느끼는지 깨닫게 되었다.
‘그때랑 비슷하잖아. 15년 전 그 날과.’
평생 잊을 수 없는 인생 최고의 순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