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2화 (122/303)

나중에 하고 싶은 것.

내가 이루고 싶은 꿈.

당연하게도 그런 것 따윈 없었다.

그냥 세상이 멸망해버렸으면 좋겠다.

아빠가 죽었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만 하며 사는 대로 살았을 뿐.

좀 더 어렸을 때는 엄마가 돌아오길 소망한 적도 있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희망은 퇴색될 뿐이었다.

이제는 자신을 버리고 떠난 그 여자 미울 뿐이다.

“그냥 뭐, 행복한 가정.”

그래서 박종필은 가장 보편적인 행복관을 내뱉었다.

그리고 여기에 좀 더 살을 보태는 형식으로 다음 말을 이었다.

“뭐, 그런 거 있잖아. 아침상을 차려주는 아내라던가. 출근할 때 배웅해주는 아내. 뭐, 퇴근하고 나면 저녁도 같이 먹고. 애들이랑 좀 놀아주고.”

“이렇게 둘이 맥주도 마시고?”

“어? 어어. 맥주 마시면서... 티비 보고...”

박종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백하윤과 한집 살림을 하는 꿈을 꿨다.

그러자 얼굴이 붉어지며, 저절로 미소가 새어 나왔다.

“푸흐흐. 너 상상했지?”

돌연, 자신에게 손가락질하며 눈웃음을 짓는 그녀.

박종필은 황급히 손을 저으며 답했다.

“아닌데?”

“웃는 거 다 봤는데~? 누구 상상했어? 설마 나?”

“미, 미쳤냐! 아, 아침마다 문 두들기는 년이랑, 무슨.”

“녀언~? 그럼 너는 뻔뻔하게 치료비 안 갚은 놈이다.”

“하-. 가, 갚는다고 했잖아.”

“크흐흐. 그럼 사과도 하는 게 어때.”

“사과? 무슨 사과?”

“나랑 아저씨 때린 거. 아직 사과받은 적이 없어서. 사과하면 치료비 갚는다는 말 진짜 믿어줄게.”

사과.

그런 낯간지러운 짓은 해본 적이 없었다.

누구한테 미안했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미안한 마음이 들더라도, 그냥 무시했고.

“...미안하다.”

그래서 그런지, 의외로 쉽게 사과를 건넨 자신이 스스로 놀라웠다.

사과라는 게, 이렇게 쉬운 거였던가.

“사실 계속 후회 중이야. 너 때린 거랑. 걷어찬 거. 욕한 거. 무시한 거. 전부 미안하다.”

진심이었다.

박종필은 진심으로 우러나온 마음을, 담담히 백하윤에게 전했다.

그러자 백하윤은 울먹거리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후-아. 그래. 이제 우리 진짜 친구 할 수 있을 거 같다. 만나서 반가워”

백하윤은 그렇게 말하며 한 손을 내밀었다.

박종필은 얼굴을 붉히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어... 나도, 뭐. 반갑다. 그런데... 지금이 진짜 친구면, 그전엔 가짜 친구였나?”

“어. 사실 쿨한 척했지만, 나 너 존나 싫었거든.”

“아-. 하하... 뭐, 그럴 만하지.”

박종필은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백자윤이 맞잡은 손을 아래위로 흔들며 말했다.

“근데 지금은 괜찮아. 다 풀렸어. 나중에 아저씨한테도 꼭 사과해?”

“어... 봐서.”

야심한 밤.

친구가 된 둘은 맥주를 다 비우고도 한참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박종필은 무심결에 내뱉었던 ‘행복한 가정’이라는 것을 자신의 인생 목표로 삼고자 다짐했다.

그리고 행복한 가정의 중심에는, 백하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학교에서 퇴학당한 박종필은 하루에 3개 이상 아르바이트를 뛰며 치료비를 모으기 시작했다.

그 결과 일주일 만에 모든 치료비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 날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반성하겠습니다.”

박종필은 고기집 사장에게 직접 치료비를 건네주며 사과를 했다.

백하윤에게 박종필의 사정을 전해 들은 고기집 사장은 그날 자신이 했던 말이 상처가 되었다면 미안하다며 박종필을 용서해주었다.

“그, 자네 혹시 배달해볼 생각 없나?”

“네?”

“옆집 말이야. 배달원을 구한다고 하더구만. 시급도 세게 쳐주니 한번 잘 생각해봐.”

박종필은 고기집 사장의 소개로 배달 알바를 구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배달 알바는 노가다를 빼곤 가장 많은 시급을 주는 알바였다.

-쾅! 쾅! 쾅! 쾅! 쾅! 쾅!

“어이~ 박종필이~”

“아-. 그것 좀 하지 말라니까.”

박종필과 백하윤은 급속도로 친해졌다.

백하윤은 종종 박종필의 현관문을 두드리며 그의 집에 놀러 왔고, 어느새 박종필의 집은 둘만의 아지트가 되어버렸다.

“크으-. 역시 일 끝난 뒤에 맥주는 죽이네.”

“...오늘 힘들었냐?”

“헤헤. 티나?”

“딱 보면 알지. 무슨 일인데?”

“아니- 뭐. 진상 손님 때문에. 이뻐도 문제라니까”

“...진상 손님? 너한테 어쨌는데? 어떤 새끼가?”

“또 또 눈 무섭게 뜬다-! 내가 욱하는 거 고치라고 했지.”

“.....열 받잖아. 나도 이렇게 열 받는 데, 너는.....”

주먹을 꽉 움켜쥐는 박종필.

그런 그를 흐뭇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던 백하윤이 어깨를 툭- 부딪히며 말했다.

“괜찮아. 이렇게 풀 수 있으니까. 예전에는 이런 거 같이 풀어줄 사람도 없었는데.”

“네 학교 친구들 있잖아.”

“걔들한텐 얘기 못 하겠어. 약한 모습 보이기 싫어서.”

백하윤의 말을 들은 박종필은 내심 기분이 좋았다.

남들에게 보여주지 않는 약한 모습을, 자신에게만 보여준 거니까.

오늘처럼 그녀가 자신에게 기대는 날이 많아졌으면 하는 욕심이 생겼다.

“그런데 이 집에 계속 혼자야? 너희 아버지 올 때 한참 지나지 않았어?”

“어. 이대로 영영 안 왔으면 좋겠네.”

도박원정을 하러 집을 떠난 아빠.

원래 한 달이면 다시 집으로 기어들어 오는 그가, 이번엔 좀 늦어지는 모양이었다.

벌써 한 달하고도 2주가 지난 것을 보면 말이다.

“흐-음. 돈 엄청 딴 거 아니야? 자꾸 이기니까, 거기에 빠져서 늦게 오는 거라면?”

“뭐, 그럴 일은 없지만. 그랬으면 좋겠네. 차라리 왕창 따서, 다시는 여기 오지 않고 어디로 떠나버렸으면 좋겠다.”

“.....나도.”

백하윤은 깊이 공감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연 맥주잔을 높게 들어 올리며, 건배사를 제안했다.

“짠-하자. 우리의 독립을 위해서.”

독립.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벗어나는 일.

박종필은 피식 웃으며 백하윤의 맥주캔에 자신의 맥주캔을 부딪혔다.

둘은 아득한 미래의 꿈을 바라보며 맥주를 들이켰다.

***

-솨아아아아아....

그 날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밖엔 천둥이 치고, 바람도 심하게 불고 있었다.

박종필은 집안에 웅크린 채 어깨를 덜덜 떨고 있었다.

엄마가 떠나간 날도, 이렇게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오는 날이었다.

-쾅. 쾅. 쾅....

그때였다.

누군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박종필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아빠였다.

이렇게 술에 취한 듯 힘없이 현관문을 두드리는 사람이라면 아빠밖에 없었다.

‘젠장.’

짧지만 달콤한 행복이었다.

다시 이 공간에, 그 역겨운 인간을 들어놓아야만 하는 순간이 찾아온 것이다.

-벌컥.

박종필은 그동안 모은 돈을 숨긴 뒤 문을 열었다.

허나 문밖에 있는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얼굴에 피멍이 잔뜩 든 백하윤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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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는 산발이 된 채 얼굴에 피멍이 잔뜩 든 백하윤.

그런 그녀가 현관문 앞에 서 있었다.

“..... 너.”

흠뻑 젖은 몸, 덜덜 떨리는 어깨.

잔뜩 충혈된 눈동자.

머리끝까지 열이 뻗쳐 올랐다.

백하윤을 이렇게 만든 개자식을, 당장이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다.

“누가...누가 그랬ㅡ.”

“아빠가 시내에서 엄마를 봤대.”

“뭐?”

“우연히 봤는데, 행복해 보였대. 옆에는 자식도 같이 있었고.”

“.....”

“나도 그럴 거래. 나도 엄마처럼 욕심이 많아서, 자기를 버리고 여기를 떠날 거래.”

“.....”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절대 그렇게 두지 않겠대. 흐으으..흐윽.... 그래서 내가 모은 돈을. 흐으윽....하으으...다, 모조리 다... 다 태워버렸...하으으...다 태워버렸어...”

속이 울렁거렸다.

하윤이의 아버지라는 그 인간이 너무 역겨워서,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머리가 빙빙 돌고, 주먹을 말아 쥔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 나, 나는...필사적으로 막으려 했어. 막으려 했는데, 막으려....내가 막으려....”

박종필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 백하윤의 아버지를 두들겨 패고 싶었다.

얼굴이 곤죽이 될 때까지 때리고 때리고 때리고 또 때려서.

짖뭉개진 그녀의 마음만큼 그 자식을 뭉개뜨리고 싶었다.

“괜찮아.”

하지만 그는 오히려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어깨를 떨고 있는 백하윤을 안아주었다.

백하윤은 박종필의 품에 안긴 채, 왈칵 눈물을 쏟으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나, 나아....나....흐으으으...아으으.... 너무, 너무 힘들어.... 너무... 힘들어....”

매번 밝은 모습만 보여왔던 백하윤이 서럽게 울고 있다.

그렇게나 맑고 깨끗했던 아이가, 꿈과 희망을 가지고 열심히 앞으로 달리던 아이가.

이렇게 절망하여 서럽게 울고 있다.

하여 박종필은 그간 백하윤에게 받았던 위로를, 그녀에게 돌려주기로 했다.

“괜찮아. 다시 시작하면 돼. 내가 도와줄 게. 내가 옆에 있어 줄 게.”

그녀는 알려주었다.

진심을 다해 응원해주는 사람이 옆에 있으면, 사람은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살아갈 희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일단 들어가자.”

박종필은 그녀를 집안에 들여보냈다.

감기에 걸릴 수 있으니 샤워부터 하라고 한 뒤, 갈아입을 옷을 화장실 안에 넣어주었다.

그 사이 그는 주전자에 물을 올린 다음 보리차를 탔다.

줄 만한 게 이것밖에 없었다.

-끼이이익...

이윽고 샤워를 끝내고 나온 그녀는 헐렁한 자신의 옷을 입고 있었다.

샤워를 하면서 어찌나 울었는지, 그녀의 눈은 퉁퉁 부어있었다.

“... 머리 말려줄게.”

작은 부엌과 화장실. 그리고 방 하나가 끝인 허름한 집.

허나 오히려 집이 작은 만큼 아늑한 느낌이 있었다.

박종필은 백하윤을 방으로 들인 다음, 이불을 덮어주고 드라이기를 연결해 머리를 말려주었다.

“다 말랐네.”

이윽고 머리가 완전히 말려졌다.

백하윤은 박종필이 건넨 머그컵을 쥔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일순간 방안에 정적이 감돌았다.

“읍....으으읍....”

그러다 또다시 번진 음울한 생각에, 백하윤은 울음을 터트렸다.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보려 입술에 꾸욱 힘을 주었지만, 그간 쌓였던 울분이 터져 나오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

박종필은 그런 백하윤의 뒷모습을 보며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덜덜 떨리는 그녀를 안아주고 싶었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스으윽

대신 그는 몸을 일으켜 장롱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그 안에 숨겨둔 돈 봉투를 꺼낸 다음, 백하윤 앞에 툭 내려놓았다.

“그동안 모은 거야. 하루 3타임 알바 뛰니까 금방 모이더라. 300 정도 돼.”

백하윤이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박종필을 바라봤다.

박종필은 나지막이 자신의 마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뭐, 그동안 도움받은 것도 있으니, 그냥 가져도 돼. 예전에 너랑 아저씨 때린 거. 합의금으로 주면 이 정도쯤은 하니까. 그때 일 반성하는 셈 치면 되지.”

300만원.

이 금액을 벌기 위해 밤낮없이 일했지만, 전혀 아깝지 않았다.

이걸로 그녀가 웃을 수 있다면 그걸로 족했다.

허나 백하윤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리고 흐느낌이 배인 목소리로 말했다.

“아냐. 그 돈은 못 받아. 그때 일은 이미 끝난 일이고, 무엇보다 부담스러워”

“...정 부담스러우면 나중에 갚아도 돼. 아니면 일종의 투자라고 생각하던가. 나중에 두배로 받아낼 거니까.”

“.....”

“솔직히 너 같이 열심히 사는 애가 가수 안되면 누가 되겠냐. 그러니까 투자하는 셈 칠게. 나중에 유명해지면 이깟 300쯤 쉽게 벌 거 아냐.”

“그, 그래도...”

“괜찮아. 받아도 돼. 나중에 다 받아낼 거니까. 벌어보니까 300 정도는 뭐. 언제든 벌 수 있는 돈이더라. 누구 덕분에 좋은 알바 자리 구해서 그런가.”

“..... 고마워.”

망설이는 백하윤이었지만, 그녀에게 꿈은 소중했다.

언젠가 이 돈의 두 배 새 배 이상을 돌려주리라 다짐하며,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위기가 머쓱해지자 박종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오늘은 자고 가. 집에 가봤자 좋을 일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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