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1화 (121/303)

...혹시 이년이 날 놀리는 건가.

“너, 진심이냐? 만약 거짓말이면ㅡ”

“진짜야. 아빠가 그랬어. 술만 마시면 폭력적으로 변하거든.”

“.....”

다시 한번 말문이 막혔다.

저렇게 밝고 예쁜 아이가,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이 그려지지 않았다.

보통 저런 애들은 부잣집에서 사랑받고 자란 아이일 텐데. 어째서?

“뭐야. 못 믿겠다는 얼굴이네.”

“... 아니. 네가 왜? 보통 너 같은 년은, 그럴 리가 없는데.”

“푸하하. 그러면 확인시켜 줄까?”

“뭐?”

“따라와.”

백하윤은 그렇게 말하곤 어딘가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박종필은 어떨결에 그녀를 뒤따라 갔고, 둘은 버스를 20분 타고 이동한 다음 다시 15분을 걸어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우리 집 저기야. 집만 봐도 대충 각이 보이지?”

백하윤의 손끝이 향하는 곳.

달동네 한가운데 위치한 허름한 빌라촌.

그중에서도 가장 후미진 건물, 반지하에 위치한 백하윤의 집.

백하윤과 박종필은 그곳으로 걸어갔다.

이내 백하윤이 현관문을 열며 손짓했다.

“들어와”

박종필은 멍한 얼굴로 백하윤의 집으로 들어갔다.

자신의 집과 똑 닮은 가난의 냄새가 코를 파고들었다.

“많이도 마셨네.”

백하윤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안엔 깊은 잠에 빠진 그녀의 아버지와, 그 주위에 널브러진 소주병이 있었다. 백하윤은 방 안에 있는 소주병을 한가득 품에 안은 뒤, 검은 비닐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

박종필은 어질러진 방 내부를 바라보았다.

방안엔 알콜 냄새와 라면 냄새, 그리고 담배 찌든 냄새가 진동하고 있었다.

백하윤은 그런 냄새가 익숙하다는 듯 능숙하게 방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소주병을 한데 모아 비닐봉지에 담고, 담배꽁초와 비닐을 쓸어 담아 버리고, 컵라면 안에 남은 내용물을 화장실 변기에 버려 물을 내리고, 걸레를 빨아 바닥을 닦은 뒤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후-우.”

이 모든 과정을 단 5분 만에 끝낸 백하윤은 소주병이 담긴 비닐봉지를 들어 박종필에게 건넸다.

“야. 이것 좀 들어봐.”

“어?”

대꾸할 틈도 없이 손에 들린 비닐봉지.

그 사이 백하윤은 싱크대 위에 수북이 쌓인 전단지 묶음 2개를 들고 말했다.

“나가자. 일하러 가야 돼.”

“어...”

박종필은 자신도 모르게 그녀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백하윤이 가장 먼저 들린 곳은 작은 슈퍼마켓이었다.

“아주머니~ 저 왔어요~”

“어어~, 하윤이 왔니”

“네-. 여기 소주병 팔려구요.”

“쯧쯧쯧쯧. 네가 고생이다. 그 양반 많이도 퍼마셨구먼.”

“헤헤, 그러게요~”

“그런데 옆에 있는 친구는 누구니? 못 보던 친구인데”

“아~ 전에 알던 친구예요. 인사드려.”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등을 꾹 누르는 백하윤.

허리가 숙여지며 저절로 인사가 튀어나왔다.

“어? 어어어-안녕하세요.”

“그래~ 훤칠하니 잘 생겼네.”

“양아치긴 해도 얼굴은 쓸만해요.”

“.....”

슈퍼 아줌마와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기 시작하는 백하윤.

이윽고 그녀는 긴 수다 끝에 공병 수거 값으로 1200원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럼 또 놀러 와~ 잘생긴 친구도~”

“헤헤. 들어가 볼게요~”

백하윤은 슈퍼 아줌마와 인사를 나눈 뒤 다시 길을 나섰다.

박종필은 어느새 전단지 묶음을 한 손에 든 채 그녀를 따라가고 있었다.

“... 근데 겨우 1200원 벌려고 슈퍼에 들린 거냐?”

뭔가 말을 건네고 싶었던 박종필은, 그녀를 비꼬는 방식으로 말을 건넸다.

원래는 좀 더 상냥하게 말을 꺼내고 싶었는데, 그런 건 그에게 너무 어려웠다.

“겨우 1200원? 티끌 모아 태산이야 임마.”

“... 대신 그 아줌마한테 20분이나 붙잡혀 있었잖아. 그런 아줌마 넋두리 들어주는 거 귀찮지 않나.”

“사실 귀찮지. 그런데 이득이 더 많아. 아줌마랑 친해져서 폐기 직전의 음식은 내가 다 얻어먹는걸? 그걸로 충당하는 식비가 얼마나 많은데.”

... 그렇다고 하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래서 그냥 궁금한 거나 물어보기로 했다.

“너는,”

아버지가 안 미워? 라고 물어보려 했다.

또 어떻게 그렇게 멀쩡할 수 있는지 물어보려 했다.

그딴 집에서 사는데 이 세상이 좆같지 않냐고.

사실 너도 나를 혐오하지 않냐고, 그렇게 물어보려 했다.

“음? 왜? 왜 말을 하다 멈춰”

허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대충 아무 말이나 둘러대 버렸다.

“아-. 지금 어디 가고 있냐고.”

“어디 가긴. 알바 하러 가지. 전단지 나눠주러.”

“...뭐? 그럼 나는 왜 데리고 가는데.”

“도와줘야지?”

“내가? 왜?”

“집안 구경시켜줬잖아. 그거 아무나 보여주는 거 아닌데?”

“뭐?”

“내 친구 중에 우리 집 본 거 네가 처음이야. 영광으로 알아”

“아니, 친구 중에? 내가 왜 네 친구냐?”

“서로 이름 알지. 어디 사는지 알지. 둘 다 애비한테 처맞고 살아서 공감대 형성됐지. 이럼 된 거 아냐?”

“어?”

그게 그렇게 되나.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은데.

“네가 적응해. 내가 좀 인싸 기질이라, 아무나 쉽게 친해져.”

백하윤은 그렇게 말하며 앞장서서 걸어갔다.

박종필은 어떨떨한 얼굴로 그녀를 따라가다, 어느새 시내 한복판에서 전단지를 나눠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대왕숯불갈비입니다. 오픈 이벤트하고 있으니 한 번 들러주세요-.”

내가 여기서 뭘 하고있는 걸까.

문득 현자타임을 느끼고 있을 때, 누군가 등을 툭- 쳤다.

백하윤이었다.

“생각보다 잘 하네? 거봐. 계속하니까 별로 안 어렵지?”

“.....”

박종필은 백하윤의 텅 빈 손을 본 다음, 다시 자신이 들고 있는 전단지를 보았다.

백하윤이 모든 전단지를 나눠줄 동안 그는 300장 중 50장도 채 나눠주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 놀리는 거냐?”

“푸흐흐. 인상 좀 펴. 그렇게 인상을 쓰고 있으니 잘 안 받으려 하지. 너 잘생긴 얼굴이라, 웃으면서 나눠주면 괜찮을걸?”

내가 잘 생겼다.

그 말에 흠칫 굳는 박종필.

그는 환하게 웃는 백하윤을 보며, 가슴이 아리는 느낌을 받았다.

“인심 썼다. 넌 앞으로 50장만 더 나눠줘. 내가 나머지 200장 나눠줄 테니까.”

백하윤은 그렇게 말하며 자신의 손에 있는 전단지 뭉탱이를 뺏어갔다.

그리고 무언가 생각난 듯 한마디를 덧붙였다.

“아. 우리 내기할래? 내가 먼저 다 나눠주면 너 치료비 갚는 거고. 네가 먼저 나눠주면 치료비 안 갚는 거로. 콜?”

“..... 그래.”

이윽고 박종필은 멍한 얼굴로 전단지를 나눠주기 시작했다.

넋이 나간 얼굴로, 흐느적- 흐느적-.

왜일까.

그토록 귀찮아하던 치료비가 걸린 내기지만, 왜인지 그런 것 따위 아무 상관 없는 기분이 드는 그였다.

그깟 내기보다는 자꾸만 가슴을 아리게 하는 이상한 감각이 더 신경 쓰이는 그였다.

“꿀꿀~ 둘이 먹다 하나 돼지 돼도 아무도 모른다는 대왕숯불갈비 1호점~ 지금 오픈 이벤트 중이니 한번 들러주세요~”

저런 오글거리는 멘트를 아무렇지도 않게 소화해내는 그녀.

미소녀와 교복. 그리고 ‘꿀꿀~’의 조합은 너무나 막강해서, 순식간에 전단지를 해치우는 그녀였다.

박종필은 그녀의 주위가 환하게 빛나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너는...’

백하윤.

그녀의 이름은 백하윤.

박종필은 전단지를 든 손을 밑으로 떨군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까만 밤, 도시의 불빛을 받은 그녀의 얼굴이 유독 환하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백하윤’

그녀의 이름을 속으로 되뇌자, 다시 한번 느껴지는 아릿한 느낌.

박종필은 이 날밤 자신의 운명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이윽고 열여덟 인생, 처음으로 느끼는 이 감각이, 첫사랑의 감정임을 스스로 받아들이는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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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하윤과 박종필은 전단지 알바를 끝낸 뒤 다시 동네로 돌아왔다.

백하윤은 슈퍼에 들러 맥주 두 캔을 산 뒤 박종필을 데리고 놀이터로 갔다.

“마셔. 수고했으니까 사주는 거야.”

그네에 앉으며 맥주캔을 휙 던지는 백하윤.

박종필은 날아오는 맥주캔을 받은 뒤, 의아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넌, 술 마시는 거 싫지 않냐?”

“음? 왜?”

맥주를 한 모금 홀짝이며 답하는 그녀.

박종필은 손에 들린 맥주캔을 보며 말했다.

“알잖아. 너희 아빠나 내 아빠. 둘 다 술 처마시고 개지랄하는 거.”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

다시 한번 맥주를 홀짝인 그녀가 말했다.

“근데 그건 술이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문제인 거지. 술은 그냥 뭐. 그 사람의 나약한 본성이 드러나게 만드는 장치? 그 정도인 거지.”

그 사람의 나약한 본성이 나왔을 뿐이다.

그 말에 박종필은 가슴 한구석이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뭐, 그런가...”

박종필은 백하윤 옆에 흔들거리는 그네를 붙잡은 다음 그곳에 앉았다.

그리고 맥주캔을 따며 다음 말을 덧붙였다.

“맞는 말이네. 술이 문제는 아니지.”

박종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결국 따지고 보면 아빠가 술을 마셔서 문제가 생긴 게 아니라, 내면의 상처를 이겨내지 못해서 그 지경까지 추락한 것이었다.

그저 아빠란 인간은 아내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극복하지 못해서, 책임져야 할 자식을 외면한 채 술에 의지하며 분노를 쏟아낸 나약한 인간일 뿐이었던 것이다.

결국 문제는 자신이었다.

‘나도 다를 바 없어.’

세상에 대한 분노로 무차별적으로 분노를 쏟아냈던 자신.

결국 그로 인해 관계는 더욱 틀어지고, 사회로부터 추방당해버리고 말았다.

이는 세상 탓이 아니라 자신의 업보인 것이다.

“하아-. 시원하네.”

술을 극도로 혐오했던 자신.

허나 처음 마셔본 맥주 한 모금은, 톡 쏘면서도 시원한 특유의 맛이 있었다.

아마 좆같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던 세상도 이런 특별한 맛이 있겠지.

지금 내 옆에 있는 백하윤이라는 아이처럼.

“그래서, 치료비는 줄 거지? 알바 해보니까 별거 없잖아? 내기도 내가 이겼고.”

아직도 치료비 운운하고 있는 그녀.

박종필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진짜 못 당해내겠네. 줄게. 아침마다 쾅쾅거리는 것도 존나 짜증나니까.”

“또 나중에 모른 척하지 마? 이번엔 진짜 약속한 거다?”

“알았어. 진짜 줄게. 됐냐.”

“뭐, 일단은 믿어 볼게”

둘은 한동안 흔들리는 그네에 앉아 맥주를 홀짝이며 이야기를 나눴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맥주를 거의 다 마셨을 땐 알딸딸한 취기가 올라왔고, 어느새 둘의 대화 주제는 진지해지기 시작했다.

“넌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사냐. 집안일도, 학교생활도, 아르바이트도. 왜 그렇게 열심히냐.”

“아빠같이 비참해지긴 싫으니까. 이루고 싶은 꿈도 있고.”

“꿈?”

“응. 나 가수하려고.”

“크흐흐, 가수? 노래 잘 부르냐?”

“그럼. 축제 같은 거 나가면 항상 1등 하는데? 댄스동아리도 하고 있고”

“나중에 돈 많이 벌겠네”

“당연하지. 내년엔 이 좆같은 동네도 뜨려고.”

좆같은 동네라

다소 과격한 그녀의 표현에 박종필은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봤다.

하지만 굳이 그걸 언급하지는 않았다.

“뭐, 그렇냐. 내년이면 고3인데 어떻게 뜨려고.”

“서울로 상경해서 기획사 들어갈 거야. 기획사 붙으면 숙식 모두 제공되니까.”

“학교는?”

“기획사 붙으면 관두려고. 나 공부엔 별로 재능이 없어서~”

“아-. 그래도 서울 가서 생활하려면 돈 좀 있어야 하지 않냐?”

“당연히 필요하지. 혹시라도 대형기획사 안 붙으면, 중소 기획사라도 들어가야 하거든. 거기는 무료로 다 지원해주는 게 아니라 처음에 돈을 좀 내야 된대.”

“얼마나 필요한데?”

“최소...500? 나도 자세히는 몰라.”

500.

학생에겐 절대 작은 돈이 아니다.

그것도 부모의 지원을 받지 못한 백하윤이라면 더욱.

“쉽지는 않네. 지금 얼마 모았는데.”

“지금 300 정도? 근데 생활비 좀 더 빠듯하게 쓰고, 방학 때 알바 뛰면 돼.”

“그렇냐. 얼마 안 남았네.”

“응. 근데 너는 나중에 뭐 하고 싶어? 네 얘기 좀 해봐. 꿈 같은 거 없어?”

“나?”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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