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0화 (120/303)

여학생은 그렇게 말하곤 박종필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박종필은 그렇게 두들겨 맞았음에도 자신을 겁내지 않는 여학생을 보며 큰 호기심을 느꼈다. 이런 타입의 인간은 난생처음이었다.

“야. 다 들었지?”

“.....”

“다 들었잖아. 이름이 박종필이랬나?”

박종필은 침묵으로 일관한 채 여학생을 쳐다보았다.

왜 자신을 겁내지 않는지, 왜 자신을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보지 않는지 의아했다.

도대체 얘는 뭐 하는 애일까.

“치료비는 네가 마련해. 네가 한 짓. 네가 책임져.”

“.....”

“대답해. 치료비만 네가 마련하면, 나랑 사장님. 너 그냥 용서해줄게. 훈방조치 정도로만 끝내줄게. 대신 치료비는 네가 마련해.”

들끓던 증오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대신, 이 아이에 대한 호기심이 조금 생겨났다.

박종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어.”

“...그래. 약속 꼭 지켜.”

“.....”

박종필은 답하지 않았으나, 여학생은 박종필을 믿기로 한 모양인지 사건을 일단락하기 시작했다.

사장님과 함께 박종필을 용서해주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뒤, 유유히 경찰서를 빠져나왔다. 홀로 남겨진 박종필은 몇 가지 간단한 절차만 끝마치고 경찰서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

박종필을 바깥바람을 들이마시며 생각했다.

왜 그 여학생은 자신을 용서해주기로 했을까.

진짜 자신이 앙금을 가지고 보복할까 봐?

그렇다기엔 여학생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 알게 뭐야.”

하지만 호기심은 잠시뿐.

다시 모든 게 귀찮아졌다.

결국 인간이란 것들은 다 거기서 거기다.

저년 또한 조금 특이할 뿐, 결국 남들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스스로 좋을 일 했다고 자부심 느끼며 자위하는, 그런 위선자 같은 부류겠지.

-끼이이익...

그렇게 여학생에 대한 호기심을 접은 박종필을 밤늦게까지 방황하다가 결국 집으로 돌아왔다.

다시는 집에 돌아오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였지만, 밖에서 살아가려면 생필품 몇 가지를 챙겨야 했다. 집에 몰래 숨겨놓은 비상금도 찾아와야 하고.

“.....”

하지만 몰래 숨겨놓은 비상금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이쯤이면 술 퍼마시고 처자고 있어야 할 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자신이 챙겨 입으려 했던 옷도, 두벌밖에 없던 외투도 보이지 않았다.

“킥킥킥킥... 또 도박 처하러 갔구나.”

뻔했다.

6개월에 한 번 한 달 동안 실시하는 원정도박.

그 도박판에 간 게 뻔했다.

“하-아. 씨발.”

비상금은 모두 털렸지만, 마음은 편했다.

적어도 그 인간이 없으니 두 다리 쭉 뻗고 편히 잘 수 있지 않은가.

박종필은 오랜만에 자유를 만끽하며 두 다리를 쭉 뻗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에 만났던 그 여학생을 잠깐 떠올리다, 이내 잠들었다.

***

-쾅! 쾅! 쾅! 쾅! 쾅!

일주일이 지났다.

박종필은 현관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하품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씨발, 어떤 새끼야...”

그는 사타구니를 벅벅 긁으며 현관문 쪽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그리고 아침부터 문을 두드리는 씨발놈의 낯짝을 확인하려 문을 여는 순간-.

“야. 치료비는?”

다짜고짜 손을 내밀며 돈을 요구하는 여학생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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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단발에 흰 피부.

오똑한 코. 앙다문 입술.

자신을 노려보는 크고 예쁜 두 눈.

“치료비. 아직 마련 못 한 거야?”

향긋한 샴푸 냄새.

단정한 교복.

가슴에 달린 명찰.

명찰 안에 적힌, ‘백하윤’이라는 세 글자.

그녀의 이름, 백하윤.

“야. 귀먹었어? 치료비 달라니까.”

일주일 만에 보는 백하윤.

박종필은 그녀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녀를 두들겨 팼지만, 선처를 받고 풀려났던 일주일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다만, 그에겐 돈이 없었다.

“없어. 도둑맞았어.”

“도둑맞아? 그걸 믿으라고?”

“믿든지 말든지.”

“... 어디서 잃어버렸는데? 찾아봤어?”

“집에서. 아빠가 훔쳐갔는데.”

자신의 말에 말문이 막힌 듯한 백하윤의 표정.

이윽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곤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언제 다시 구할 수 있는데. ”

“몰라. 그냥 안 주면 안 되나?”

“뭐...?”

“어차피 그 사장 돈 많잖아. 너도 있는 집 자식이고. 난 알바 할 데 없어. 이 주변에서 깽판 쳤다가 소문 다 났거든. 사장이 안 뽑아줘.”

“... 그건 네 사정이고. 책임은 끝까지 져야지.”

“아, 몰라. 돈 없으니까 알아서 해.”

-쾅!

박종필은 문을 닫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밖에선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러다 지쳐서 나가떨어지겠지-, 그런 생각으로 무시했다.

“.....”

이윽고 고요해진 집안.

박종필은 피식 웃으며 자리에 누웠다.

그러게 호구 같이 굴면 손해만 볼 뿐이다.

아마 지금쯤 저 백하윤이라는 년도 욕을 짓씹으며 후회하고 있을 것이다.

그깟 치료비 따위, 안 갚으면 그만이다.

-쾅! 쾅! 쾅! 쾅! 쾅!

그러나 다음 날 아침, 백하윤은 다시 찾아왔다.

돌연 잠에서 깬 박종필은 짜증을 내며 현관문을 벌컥 열었다.

백하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갚아. 네가 벌인 일. 네가 책임져.”

“하- 씨발... 야, 돈 없다고. 알바도 못 구한다고. 어제 얘기했잖아?”

“핑계 대지 마. 구하려면 구할 수 있어.”

“씨-발. 사장이 안 뽑아준다니까? 이 도시에 소문 다 났다고! 안 갚을 거니까 찾아오지 마.”

박종필은 다시 문을 쾅 닫고 방으로 들어갔다.

이번에도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계속 들렸지만, 무시했다.

확실히 안 갚는다고 못 박아뒀으니 저러다가 포기할 것이다.

-쾅! 쾅! 쾅! 쾅! 쾅!

하지만 다음날 아침.

어김없이 들리는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

박종필은 무시했다. 반응조차 해주지 않았다.

-쾅! 쾅! 쾅! 쾅! 쾅!

다시 다음날.

박종필은 이번에도 무시했다.

내일쯤엔 포기하겠지.

-쾅! 쾅! 쾅! 쾅! 쾅!

씨발년.

아침마다 짜증 나게 한다.

자신에게 이렇게 개기는 년은 저년이 처음이다.

한 학년 선배도 나를 함부로 하지 못 하는데, 저 썅년은 겁이 없다.

내일도 여길 찾아온다면, 제대로 조질 것이다.

-쾅! 쾅! 쾅! 쾅! 쾅!

역시나 다음 날 아침.

이번에도 울려 퍼지는 소음.

아무래도 제대로 겁을 줘야 할 듯하다.

확실하게 겁을 줘서, 다시는 찾아오지 못하게 해야 한다.

박종필은 주먹을 움켜쥐며 문을 확 밀쳤다.

-벌컥!

허나 박종필은 계획을 실행할 수 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보자마자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있는 멍자국 때문이었다.

“..... 너.”

“잠수탈 생각하지 마. 나 매일 찾아올 거니까. 지금은 바빠서 그냥 가는데, 내일은 더 귀찮게 굴 거야. 그러니까 치료비 구해.”

백하윤을 자기 할 말만 속사포처럼 내뱉고 등을 돌려 사라졌다.

박종필은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그녀의 얼굴 곳곳에 있던 멍자국을 떠올렸다.

‘누구한테 처맞은 자국인데.’

잘 알고 있다.

걸핏하면 아버지에게 두들겨 맞은 박종필은 잘 알고 있다.

그녀의 얼굴에 있는 상처와 멍은 누군가에게 두들겨 맞은 흔적이다.

많이 때려봤고, 많이 맞아봤으니 확신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학교에서 왕따 같은 걸 당하고 있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른다.

저런 좆같은 성격이면 그럴 만도 하다.

눈치 없이 나대다가 자신 같은 일진에게 찍힌 것이다.

또 같잖은 위선을 떨다가, 자기만 손해 보는 짓거리를 한 것이다.

병신 같은 년.

“지 몸도 못 챙기면서 참견질은. 병신호구년이”

박종필은 다시 방으로 들어가 이부자리에 누웠다.

그 날은 이상하게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이상하게 고요하다.

현관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내심 일찌감치 일어나 그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내 포기한 건가.

“처맞고 정신 차린 건가. 병신년”

박종필은 ‘별거 없는 년이네’라고 중얼거린 뒤 방으로 들어갔다.

그날도 박종필은 한동안 몸을 뒤척인 뒤에야 잠이 들 수 있었다.

“.....”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이번에도 현관문은 조용했다.

아무래도 정말 포기한 모양이다.

‘처맞은 거 때문에 그런가? 존나 끈질기게 굴 것처럼 하더니’

매일 아침 찾아올 거라고 선포했던 그녀.

허나 말한 것과는 다르게, 그녀는 벌써 이틀째 이곳을 찾아오지 않았다.

... 혹시 괴롭힘을 심하게 당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알 게 뭐야.”

허나 언제나 그렇듯, 남에겐 철저히 무심한 박종필이었다.

박종필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상념을 흐트러트렸다.

그리고 다시 방에 들어가 이부자리에 누웠다.

하지만 오늘도 쉽게 눈이 감기지 않았다.

멍자국이 가득한 백하윤의 얼굴이 자꾸만 아른거렸다.

“에-이! 씨발!”

결국 박종필은 늦은 오후 집을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백하윤이 다니는 성신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년을 괴롭히는 놈들을 조지면, 치료비도 퉁 칠 수 있겠지.’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

누군가를 곤죽이 되도록 두들겨 패는 일.

박종필은 오랜만에 재능기부를 하기로 했다.

백하윤을 그 꼴로 만든 자식을 조진 다음, 선처에 대한 빚도 갚고 치료비도 퉁 치는 것이다.

“야.”

그리고 때마침 정문에서 나오는 그녀.

박종필은 그녀를 불렀고, 친구들 틈에 섞여 있던 백하윤은 고개를 돌려 박종필을 보았다.

“어? 치료비?”

박종필을 알아본 백하윤.

그녀가 같이 있는 친구들에게 어떤 말을 지껄여댔다.

그러자 친구들이 박종필을 힐끔거리고는, 걱정되는 듯한 눈빛으로 백하윤을 보았다.

허나 괜찮다는 백하윤의 말에 반대 방향으로 걸어가는 그들이었다.

“네가 여길 찾아오고, 웬일이야? 치료비는 구한 거야?”

자신에게 걸어오며 치료비의 행방부터 찾는 백하윤.

박종필은 구타의 흔적이 남아있는 그녀의 얼굴을 살펴보다 입을 뗐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 너 혹시 괴롭힘당하냐?”

“뭐?”

“그 얼굴. 누구한테 처맞은 거잖아. 너 때리는 새끼 있으면 말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으니까.”

“푸흡.”

진지하게 꺼낸 얘기인데, 돌연 웃음을 터트리는 그녀.

박종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내가 좆밥으로 보이나?

“..... 네가 날 모르나 본데, 이 일대에 나한테 개길 새끼 한 놈도 없어. 누가 네 얼굴 그렇게 만들었는지 말만 꺼내면-”

“아빤데”

“뭐?

“내 얼굴. 아빠가 그랬다고.”

턱 막히는 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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