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0화 (100/303)

“후우-. 질질 짜려고 만나자고 한 건 아닐 텐데.”

하여 난 더욱 모질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최대한 감정을 배제한 채 이성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자 그녀를 잠시 내 마음속에서 도려내기로 결심했다.

“끄흐으....미, 미안해....흐으윽....내가, 내가 정말...”

“됐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야. 용건만 간단하게 말해. 감성팔이 하지 말고.”

내 말에 울음을 참으려 코를 훌쩍이는 이하영.

허나 그녀는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또다시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잠시 두 눈을 감고 이하영이 진정될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저 모습을 계속 봤다간 나도 감정에 동화되어 판단력을 잃을 것만 같았다.

“흐으...흐으읍.”

이윽고 조금 더 시간이 지나, 이하영이 호흡을 가다듬는 소리가 들렸다.

난 다시 눈을 뜨고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었다.

“..... 이제 설명해. 날 만나자고 한 이유가 뭐야.”

이하영은 눈물범벅이가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사죄를 하고 싶었어. 보고 싶기도 했고.”

“사죄를 하고 싶었다고. 어떻게?”

“내가, 내가 어떻게든 다시 원래대로 되돌려줄 게... 네가 수락만 하면 아버지한테 말해서, 네 가족도 원래 생활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고, 너도 다시-.”

“큭큭큭큭큭....”

돌연 웃음이 터져 나왔다.

기껏 생각하고 온 게 구원자에게 빌붙는 거라니.

저게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건가.

“..... 이하영. 돼지새끼랑 붙어 있다 보니 감이 떨어졌나 본데, 주인님이 개좆으로 보여?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해?”

“..... 아버지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그분이 이 나라에 끼치는 영향력은-.”

“그건 주인님도 마찬가지야. 잘 모르나 본데, 네가 모시는 돼지 새끼랑 주인님은 뒷세계의 양대산맥이야. 네가 부탁해봤자 주인님의 여자는 어떻게 할 수 없다고.”

“..... 미안... 몰랐어. 주인님이 그런 분...인줄은.”

“... 똑똑한 년이 왜 이래? 다른 꿍꿍이 있는 거 아니야?”

“..... 생각이 짧았어. 아버지가 날 특별히 아끼셔서, 내가 부탁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해서 그냥...”

뒷말을 흐리며 또다시 고개를 숙이는 이하영.

난 눈을 빛내며 그녀를 노려보았다.

그리고 준비해두었던 노림수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무슨 방법으로 사죄할 거냐고.”

난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뒤에 있는 이희연에게 작전 실행 사인을 보냈다.

분주하게 움직이는 발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이하영은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침묵하고 있었다.

“.....”

“그거 말곤 더 생각해온 거 없어? 사죄하는 방법으로 그게 끝이야?”

“..... 좀 더. 좀 더 시간을 주면, 내가 어떻게든 방법을-.”

“됐고.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거 하나. 그거 하나만 해주면 널 용서해줄게. 할 수 있겠어?”

난 그렇게 말하며 이하영의 두 눈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만약 여기서 이하영이 내 제안을 거절하면, 난 이하영이 다른 마음을 품었다는 것으로 간주하고 준비해두었던 계획을 실행할 것이다.

“... 응. 뭐든지.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할게.”

내가 시키는 건 무엇이든지 하겠다는 이하영의 대답.

난 다시 수화를 보내 작전 중지 신호를 보냈다.

이제 다음 계획은 그녀에게 계속 무리한 요구를 던져 어디까지 나를 위해 희생할 수 있는지 그녀의 마음을 알아보는 것이다.

“그럼 따라와. 여기서 할 만한 일은 아니니까.”

***

난 이하영을 데리고 사람이 뜸한 어느 모텔에 왔다.

이 모텔은 내가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 미리 알아두었던 모텔로, 지금 내 옆방엔 미리 매수한 건달들 다섯과 이희연과 박하린이 대기하고 있었다.

“.....”

이하영은 의자에 다소곳이 앉아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한결같이 대역죄인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난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은 채 무덤덤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하영.”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는 이하영.

이제 첫 번째 제안을 던질 차례다.

난 이하영에게 계속 무리한 요구를 던져 나에 대한 마음을 시험할 것이고, 나에 대한 마음이 거짓인 것으로 판명되면 계획했던 복수를 시행할 것이다.

“너 때문에 내 인생은 망가졌어.”

“.....”

“최고의 쉐프가 되겠다는 꿈도 박살났고, 내 가족은 완전히 파멸했어. 이제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어. 나 또한 어딘가 뒤틀린 인간이 되어버렸지. 주인님을 닮아 내가 가장 혐오하던 부류의 인간이 되어버렸어.”

담담하게 내뱉는 나의 말에 멍하니 눈물을 쏟아내고 있는 이하영.

만약 저 눈물이 진실이라면 어느 정도 선에서 내 요구를 들어주겠지.

난 반쯤 진심이 담긴 마음으로 그녀에게 내 요구사항을 전했다.

“내가 원하는 건 하나야. 내가 이렇게 불행하니, 너도 불행해졌으면 좋겠어. 너 혼자 주인님의 손을 벗어나 호의호식하는 건 너무 배 아프잖아? 그렇지?”

이하영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 다음 대사를 내뱉었다.

“그러니까 네가 죽었으면 좋겠어. 오늘 여기서, 내가 보는 앞에서. 죽어줬으면 좋겠어.”

“.....”

표정에 미동도 없는 이하영의 얼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난 바로 다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나도 따라서 죽을 거야. 가평 여행 갔을 때 기억하지? 영원히 함께하자고 했던 거. 그 약속은 지켜줄게.”

“.....”

생각에 잠긴 듯 침묵하고 있는 이하영.

원래 예상대로라면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거절할 줄 알았는데,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보는 모양이다.

이윽고 그녀는 싱긋 웃으며 예상 밖의 대답을 했다.

“응. 내가 네가 한 짓은, 살인이나 다름없어. 네 말대로 할 게.”

... 첫 번째 요구에서 막힐 줄은 몰랐는데.

이건 예상 밖의 전개였다.

“다만, 남은 가족이 걱정되어서. 너도 남은 가족들이 걱정될 테고.”

... 하. 그럼 그렇지.

가족 핑계로 빠져나가 보시겠다.

“그러니까 내가 죽고 나면, 네 가족은 보살 피고와. 우리 가족에게 아무 짓도 안 하겠다는 약속도 해줘.”

“..... 그래.”

대답은 덤덤하게 했지만, 내 안엔 혼돈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가족을 핑계로 빠져나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 천천히 간을 보며 다른 말로 꼬드길 생각인가?

일단은 지켜보기로 했다.

“그럼 나 이제 어떻게 하면 돼? 이런 건 전혀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탁한 눈빛을 한 채 다크서클이 퀭하게 내려앉은 이하영의 얼굴.

난 침을 꿀꺽 삼키며 창가에 붙은 커튼을 찢었다.

그리고 커튼을 돌돌 말아 팽팽한 줄로 만든 뒤, 의자를 밟고 올라서 목을 매달 수 있게끔 올가미 형태로 묶었다.

“..... 저기 매달려.”

이하영은 고개를 끄덕이곤 의자 위에 올라섰다.

난 애써 태연한 표정을 연기하며 이하영을 올려다보았고, 그녀는 눈물을 머금은 얼굴로 내게 다음 말을 남겼다.

“근데, 뒤돌아주면 안 될까. 네가 안 봤으면 좋겠어....”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흐느껴 울었다.

난 눈물이 올라오려는 걸 꾹 참으며 주먹을 꽉 쥐었다.

만약 여기서 내가 먼저 물러서 버리면, 두 번째 세 번째 제안을 던질 명분을 잃어버리게 된다.

이하영 이 영악한 년이 그걸 계산하고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 알았어.”

난 그대로 뒤돌아섰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쥔 채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는 이하영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내 귀에 흘러들어온 것은 예상 밖의 소리였다.

-쿵.

의자가 쓰러지는 소리.

그 뒤엔 끄억-끄억 목이 졸리는 기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또한 공중에서 발을 버둥거리는 고통의 몸부림도 내 귀로 전해져왔다.

‘이 씨발년이, 도대체 뭘 꾸민 거야. 부하들이 구해주러 오는 건가?’

난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건달 다섯을 매수해놨었다.

만약 구원자의 부하들이 이하영을 구하러 온다면 입구를 막아선 건달 다섯이 시간을 벌어줄 것이다.

“끄으으으...으으으....”

점점 커지는 발버둥 소리.

식은땀으로 등이 축축하게 젖어왔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드는 생각은, 이하영 이 년이 배짱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내가 자기를 진짜 죽이진 못할 거라 생각해서, 그래서 이런 무모한 짓을 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끄으으....으으.....”

다시 마음을 독하게 먹은 난 더 기다리기로 했다.

이하영 이 씨발년이 진짜 본성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 순간은 찾아오지 않았다.

“읍................”

다만 들린 것은, 숨이 멎는 소리와 함께 액체가 줄줄 새어 나오는 소리였다.

당황한 나는 곧바로 뒤돌아서 이하영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몸을 축 늘어뜨린 채 밧줄에 대롱대롱 목이 매달려 침과 오줌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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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배신하고 기만한 사람.

내 인생을 밑바닥으로 끄집어내 구렁텅이에 처박은 사람.

함께 쌓아왔던 연대를 짓밟고, 내 가족이 망가지는 것을 보며 기뻐했던 사람.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도 사랑했었던, 끝끝내 미련을 떨쳐내지 못했던 그 사람이, 목을 매단 채 축 늘어져 있었다.

난 비명을 지르듯 그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이, 이하영-!”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게 아니었다.

난 단지 나를 기만하려는 그녀의 속내를 파헤치려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목숨을 다해 내게 진심을 보였다.

이 진심이 기만일 거라 생각했던 난, 끝끝내 뒤돌아보지 않았고.

그 결과가 이것이다.

“젠장!!”

허나 넋 놓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난 곧바로 쓰러진 의자를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한 손으로 감싸 올려 줄을 느슨하게 하였다.

그녀의 목을 조이고 있던 빌어먹을 끈도 잽싸게 풀었다.

난 그대로 그녀의 목을 빼내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전화기를 들어 119에 전화를 하려는 찰나-.

“커-읍! 콜록...콜록...”

돌연 침대 쪽에서 크게 호흡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콜록콜록대며 침을 질질 흘리고 있는 이하영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곧바로 그녀에게 다가가 상태를 확인했다.

“.....”

이하영은 실눈을 뜬 채 호흡을 고르고 있었다.

거의 죽은 줄로만 알았던 충격적인 비주얼에 비해 굉장히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분명, 좀 전까지만 해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있었는데.

단순한 착각이었던 걸까.

“...!”

그렇게 찬찬히 이하영을 살피던 도중, 난 그녀의 목에 물든 빨간 자국을 봄으로써 현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목 전체적으로 길게 퍼져나간 빨간 자국은, 커튼으로 돌돌 만 줄이 생각보다 느슨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었다.

줄이 단단하게 엮이지 않고 펑퍼짐하게 퍼지는 바람에 빨간 자국이 광범위하게 나 있는 것이다.

난 곧바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커튼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대로 돌돌 말려진 커튼의 장력은 거의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 후우.”

일단 한숨을 돌렸다.

목을 조른 줄이 푹신하고 넓었기 때문에, 목숨은 부지할 수 있었다.

다만 경동맥을 오랫동안 압박받아 졸도까지 했었기 때문에, 건강상 문제가 없는 체크해 볼 필요는 있었다.

난 이하영에게 시선을 돌린 뒤 그녀를 유심히 관찰하며 이상 반응은 없는지 확인한 다음, 수화기를 들어 119를 눌렀다.

허나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순간.

-툭.

돌연 이하영의 손을 내밀어 나를 저지했다.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힘겹게 말을 이었다.

“괘, 괜찮아....”

반쯤 감긴 눈으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이하영.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장력이 약한 줄이라 한들, 그녀는 목이 매달려 경동맥을 오랫동안 압박받았었다.

지금은 괜찮아 보일지 몰라도, 어떤 이상 반응을 일으킬지 알 수 없다.

“괜찮긴 뭐가 괜찮아. 너 치료받아야 돼.”

난 그렇게 말하며 통화버튼을 눌렀다.

허나 그녀는 다시 필사적으로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숨을 헐떡이며 힘겹게 다음 말을 뱉었다.

“아, 아버지가...알면, 안돼.”

“.....”

구원자.

모진 정신 고문을 통해 공포를 주입시켜, 사람을 자기 뜻대로 망가뜨리는 뒷세계의 거목.

난 통화 종료를 누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이하영의 상태가 양호한 거 같으니, 조금만 더 상태를 지켜보자는 쪽으로 생각을 바꿨다.

만약 이하영과 나의 만남을 주인님이나 구원자가 알게 된다면, 일이 골치 아파질지도 모른다.

“하아... 하아....”

그렇게 하영이의 상태를 지켜본 지 5분쯤 지났을까.

그녀는 안정적인 호흡을 찾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벌인 일에 비해 그 결과가 굉장히 양호하다고 볼 수 있었다.

다시 생각해봐도 줄이 팽팽하게 묶이지 않은 게 참 다행이었다.

“후우-. 죽으란다고 해서 진짜 죽냐.”

한숨 돌린 난 마른세수를 하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하영은 넋이 나간 얼굴로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었다.

“몸은 어때? 어디 이상 있는 데는 없어?”

“..... 그런 거 같아.”

“조금씩 움직여봐. 팔, 다리, 손, 발, 손가락, 발가락. 전부.”

지금은 멀쩡해 보이지만 이하영은 졸도까지 했었다.

그렇다는 말은 뇌에 공급되는 산소가 결핍되어 기절했다는 말인데, 이 때문에 뇌손상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만약 이하영의 몸에 문제가 있다면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병원에 데려갈 작정이다.

-꼼지락. 꼼지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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