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은 수저를 들고 눈앞에 있는 음식을 하나, 하나 맛보기 시작했다.
그간 딱딱한 빵에 맛대가리 없는 스프만 먹어온 탓에, 일류 쉐프가 준비한 이 테이블 위의 음식은 그야말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극상의 맛이었다.
“우걱 우걱 우걱 우걱... 후루룹....”
눈앞에 있는 파스타도, 그 옆에 있는 스프도, 저 뒤에 있는 스테이크도, 또 여기 있는 김치도, 잡채도, 치킨도, 우육탕도, 케비아도, 회도, 초밥도.
모든 게 다 최고였다.
별점을 매긴다면 무조건 10점 만점에 10점짜리 음식이었다.
“우물...우물...우물...”
허나 너무 급하게 음식을 먹어치운 탓에, 금세 목이 막히며 갑갑해졌다.
하영은 자신의 가슴을 툭툭 치며 물을 찾아보려 했지만, 물이 들어있는 물병은 테이블의 끄트머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따악!
그때, 아버지가 손을 튕기며 주위를 집중시켰다.
아버지는 대기하고 있던 하인에게 호통치듯 말했다.
“지금 뭐 하고 있나? 물 갖다 주지 않고.”
“죄, 죄송합니다. 바로 가져오겠습니다.”
아버지의 불호령에 분주한 발걸음으로 물병을 가져오는 하인.
그는 곧 앞에 놓여 있는 유리잔에 물을 따라주었다.
하지만 방금 아버지의 호통을 들은 탓인지, 그의 손은 심하다 싶을 정도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러다가 금방 실수라도 할-.
-주르르륵!
..... 어째 불안하다 싶었는데, 하인은 결국 일을 저지르고 말았다.
손을 너무 심하게 떠는 탓에 물병으로 유리잔을 쓰러트리고 말았고, 유리잔 안에 가득 들어있던 물이 자신의 드레스를 적시기 시작했다.
하인은 잔뜩 겁먹은 얼굴로 자신과 구원자를 번갈아 보기 시작했다.
“쯧. 쓸모없는 놈.”
아버지의 모멸적인 어투.
하인은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로 아버지를 응시했다.
아버지는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거칠게 썰며 무겁게 가라앉은 톤으로 말했다.
“교육을 어떻게 받은 것이냐. 감히 내 딸아이가 될 영애에게 무례를 범해놓고, 아무런 사죄도 하지 않다니.”
“...! 죄,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납작 엎드려 고개를 바닥에 처박는 하인.
하영은 갑작스레 벌어진 이 상황이 당황스러웠다.
이 하인이 자신의 노예도 아니고, 물 좀 쏟았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용서를 빌 일은 아니지 않은가.
“잘못했으면 벌을 줘야겠지. 이하영. 그 녀석의 머리를 짓밟아라.”
하지만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는 실수를 저지른 하인을 철저하게 응징하길 원하셨다.
하영은 하는 수없이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했다.
-꾸우우욱...
처음 보는 이의 머리를 짓밟는 미친 행위.
문득 실좆민에 했던 학대했던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자신의 가장 소중했던 남자친구를 매도하고 짓밟으며 느꼈던 배덕의 쾌락이 불쑥 찾아왔다.
그녀의 발에 더욱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꾸우욱...꾸우우욱....
신음을 흘리며 덜덜 떨고 있는 하인의 초라한 모습.
이하영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번졌다.
하인의 초라한 몰골에 실좆민의 모습이 오버랩되며, 그의 괴로운 얼굴이 눈앞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만하면 됐다.”
하지만 아버지의 냉랭한 음성이 울려 퍼지며, 그러한 환상도 순식간에 흩어진다.
하영은 황급히 발을 치운 다음 아버지의 눈치를 살폈다.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분하게 스테이크를 썰고 있었다.
“바, 바로 치워드리겠습니다!”
체벌이 끝나자, 하인은 허겁지겁 몸을 일으켜 어질러진 자리를 치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그런 하인을 경멸 어린 눈으로 바라보다, 돌연 입가를 닦고 있던 냅킨을 그에게 집어 던졌다.
“.....?”
자기 발밑으로 떨어지는 냅킨.
하인이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아버지가 말했다.
“흥. 모자란 놈. 네놈 때문에 입맛이 떨어지는구나.”
“..... 죄송합니다.”
“...쯧. 어떻게 너 같이 모자란 놈이 저택 일을 맡고있는 거지? 응?”
“더, 더욱 분발하겠습니다.”
“됐다. 그럴 필요 없어. 네놈은 강등이다.”
“...! 그, 그건-!”
“넌 내 딸이 될 영애 후보에 무례를 범했어. 제대로 보필하지도 못했고.”
“죄송합니다! 한 번 만 더 기회를 주신다면! 그때는-!”
“아니. 이미 결정되었다. 넌 강등이야.”
“주인님! 제발!”
“내 말에 불복할 셈이냐.”
“.... 아닙니다.”
“알아들었으면 꺼져라. 앞으로 현장반에 투입하고, 숙소를 C동으로 옮겨라.”
“..... 예. 따르겠습니다.”
망연자실한 얼굴로 자리에서 물러나는 하인.
하영은 방금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머릿속에 각인했다.
‘강등’과, ‘C동’, ‘현장반’이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며, 이곳이 계급사회처럼 운영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럼 우린 이동하지. 소화할 겸 가볍게 산책해볼 테냐?”
그때, 아버지의 부름에 하영은 생각을 갈무리했다.
그녀는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아버지. 이곳을 둘러보고 싶어요.”
“그래. 따라오거라.”
지이잉- 소리를 내며 이동하는 아버지의 이동 의자.
하영은 서둘러 아버지 옆에 따라붙어 걸었다.
아버지는 광활한 대저택의 주요시설을 돌아다니며, 이곳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이곳은 하인을 훈련시키는 곳이다. 주로 저택 내부를 유지관리하는 하인들을 양성하는 곳이지.”
투명한 유리벽 너머로 보이는 수십 명의 남녀.
그들은 모두 책상에 앉아 누군가의 수업을 열심히 듣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에서 왠지 모르게 위화감이 들었다.
분명 몇몇 인원이 자신과 아버지를 본 거 같은데, 그냥 모른 척 수업만 듣고 있으니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다.
하여 하영은 이런 의아한 점을 교묘하게 물어보기로 했다.
“..... 그런데 저들은 무례하네요. 아버지께서 이곳에 있는데, 아무도 나와 보질 않다니.”
자신의 지적에 끌끌 웃기 시작하는 아버지.
아버지께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큭큭. 관찰력이 좋구나. 하지만 저들이 무례한 건 아니란다. 얼핏 보기에 평범한 유리벽 같아도, 안에서는 밖을 볼 수 없거든.”
.... 이해했다.
밖에서 안을 볼 수 있다는 말은, 곧 감시하기 좋은 구조란 뜻이었다.
하영은 이 저택이 범상치 않을 곳이란 걸 자각하며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자-. 이동하자꾸나.”
이후 아버지는 저택의 여러 시설을 소개해주었다.
도서관, 수영장, 헬스장, 식당, 사격장, 축구장, 스크린 골프장, 야구장, 수련장 등등. 저택 내에 있는 부대시설을 모조리 다 알려주었다.
“이곳이 마지막이 되겠군. 향락소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개해준 곳이 이 ‘향락소’.
직역하자면 쾌락을 누리는 장소란 뜻이었다.
이곳은 그 이름에 걸맞게 입구부터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
어두컴컴한 동굴 같이 개방된 입구.
그 안에서부터 끈적한 재즈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또 입구를 비추고 있는 빨간색 조명은, 퇴폐적인 분위기를 연상케 했다.
“큭큭. 표정이 재밌구나.”
그때, 아버지의 말에 하영은 화들짝 놀라 표정관리에 신경을 썼다.
아버지는 손을 휘휘 저으며 낮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것 없다. 혼내려는 게 아니야. 오히려 네가 이곳을 마음에 들어하는 것 같으니, 나로선 반가워서 말이야.”
자신이 이곳을 마음에 들어했다.
방금 내가 웃기라도 했던 것일까.
뭐, 조금 두근거리는 감정이 들기는 했다.
..... 아니, 솔직히 말하면 엄청 기대되는 곳이었다.
“흐음. 사실 이곳의 관리를 맡아줄 사람이 필요해서 말이야. 너를 점찍어두고 있긴 한데...”
“.... 제, 제가 향락소를요?”
“그래. 물론 넌 아직 정식으로 내 딸이 되지 않았지만, 차차 완전한 내 사람이 되면, 이곳을 너에게 주려고 한다.”
“.....”
“큭큭. 그러면 어째, 구경 한번 해보겠느냐?”
“... 예.”
“좋다. 나의 가장 핵심 사업을, 오늘 네게 보여주마. 따라오거라.”
아버지의 의자가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갔다.
하영은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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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락소의 입구.
이곳은 마치 블랙홀 같았다.
입구의 내부는 온통 어두컴컴했으며, 방금까지 흘러나왔던 재즈 음악 소리도 갑자기 들리지 않았다.
마치 세상과 단절된 블랙홀 내부를 걷는 기분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토록 칠흑 같은 어둠 속을 계속 걷다 보니, 마치 광활하게 펼쳐진 독방 내부를 헤매는 기분이 들었다.
그나마 저- 멀리에 일렁이는 붉은 빛의 출구가 있기 때문에, 하영은 저곳에 도달하기만을 고대하며 앞으로, 또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꾸준히 발걸음을 옮겨 저 출구로 빠져나갈 수만 있다면, 자신을 압박하는 이 어두컴컴한 터널도 곧 빠져나갈 수 있으리라.
-후웅!
하지만 일순간, 유일한 희망이었던 붉은 빛의 출구가 흐물흐물하게 녹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검은색 물감에 잡아먹혀 빛이 완전히 차단되고 말았다.
하영은 갑자기 녹아 사라진 출구에 당황하여, 옆에 있는 아버지를 붙잡았다.
“아, 아버지! 출구가! 출구가 녹아내렸어요!! 추, 출구가.....?”
그러나 그녀는, 돌연 하던 말을 멈추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아버지인 줄만 알았던 의자에 앉아있는 있는 사람이, 끔찍한 시체의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시체는 다름 아닌 썩어 문드러진 자기 자신의 모습이었다.
【이제꿈에서깨이제꿈에서깨이제꿈에서깨이제꿈에서깨이제꿈에서깨】
【사실여긴독방이야사실여긴독방이야사실여긴독방이야사실여긴독방이야】
【너는죽어가고있어너는죽어가고있어너는죽어가고있어너는죽어가고있어】
“으...으으으...으으으으으....”
이제 꿈에서 깨어나.
사실 여긴 독방이야.
너는 죽어가고 있어.
반복적으로 내뱉는 망령의 말에, 하영의 정신이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사실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게 가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사실 나는 구원자에게 구해진 적이 없다.
몸을 깨끗이 씻고, 맛있는 음식을 먹은 적도 없고, 사실 이 모든 게 내가 만들어낸 망상에 불과하다.
나는 아직도 독방에 갇혀 죽어가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곳에 갇혀 죽어가고 있다.
나는 아직도 그곳에 갇혀 있다.
나는 아직도...
나는,
나는,
나는,
나는,
“정신 차려라.”
그때, 거룩한 아버지의 음성이 그녀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
그녀는 어둠 속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음성을 좇으며, 머리를 두리번거렸다.
아버지의 음성이 다시 한번 들렸다.
“약에 취하지 마라. 전부 네가 만들어낸 환상이다. 일어나라!”
자신을 일깨우는 아버지의 강한 음성.
하영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눈에 힘을 잔뜩 주고, 아버지의 목소리에 의식을 더욱 집중을 해보았다.
그러자 흐물흐물 녹아 사라졌던 출구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래. 정신을 집중해라. 출구는 분명히 있다. 따라와라.”
-지이이잉.
아버지의 의자가 가동하는 소리.
또렷이 들리는 저 소리가 분명한 현실.
하영은 빠른 걸음으로 소리의 근원을 뒤쫓았다.
지이이잉- 움직이는 아버지의 의자 소리를 쫓고 쫓아, 앞으로, 또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하영은 기나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하아...하아...하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
터널을 빠져나온 이곳엔 끈적한 재즈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벅. 저벅. 저벅. 저벅.
분주한 발소리.
웨이터 복을 입은 직원 여럿이 자신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그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들어 자신을 의자에 앉힌 뒤, 몸 곳곳을 마사지해주기 시작했다.
“으음...흐응...”
절로 터져 나오는 신음.
그들의 손이 닿는 곳마다 시원한 쾌락이 퍼져나갔다.
어깨, 발바닥, 종아리, 허벅지, 목 등등.
하영은 온몸이 주물러지는 쾌락에 빠져 비실비실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망상이 아니었어. 이곳은 현실이야....♥’
온몸을 마사지하는 웨이터들의 손길.
전신에 퍼져나가는 쾌락의 파동.
이곳이 현실이라는 것을 알려주는 명백한 증거.
하영은 이처럼 안정의 쾌락 속에서 모든 긴장을 내려놓고 미소지었다.
좀전의 지옥과 같은 망상에서 벗어난 이곳은, 가히 천재지변 속에서 발견한 벙커와도 같았다.
“크흐흐. 기분 좋은가 보구나.”
물속에서 듣는 듯, 흐릿하게 들리는 아버지의 음성.
하영은 비실비실 웃으며 아버지를 불러보았다.
“아버지이이....♥”
“그래. 여기 있다.”
“헤헤. 아버지...♥”
참 다행이었다.
아버지가 옆에 있어 준 덕분에, 어둠 속에서 미치지 않고 이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의 인도 덕분에 이 안락한 천국에 머무를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