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8화 (38/303)

왠지 짜증이 난다 싶었더니, 아까 길거리 헌팅에서 번호를 요구하던 남자였다.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멍청한 대사를 잇고 있었다.

“번호를... 줄....수....”

“푸학학학하하하하-!”

뒤에서 폭소를 터트리고 있는 헌팅남의 친구들.

정성아는 인상을 팍 구겼다.

안 그래도 오디션에 떨어져서 기분 더러운데, 이딴 별 볼 일 없는 것들의 웃음거리가 되는 게 짜증스러웠다.

“아. 저, 죄송합니다. 옷이, 달라서...”

오디션용으로 갈아입은 옷.

아무래도 옷이 달라서 못 알아본 모양이다.

하지만 변명이 어떻든 간에, 정성아는 기분이 더러웠다.

“알면 그냥 가요. 기분 더럽게 하지 말고.”

정성아는 그렇게 헌팅남을 쏘아붙이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삐리리- 울리는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를 받았다.

아빠였다.

“응... 아빠. 아니. 떨어졌어. 응.... 괜찮아. 다른 데도 보면 되니까. 응. 알았어. 응...”

-달칵.

전화를 끊은 그녀는 멍하니 창밖을 바라봤다.

황량한 나뭇가지와, 옷을 껴입고 돌아다니는 사람들.

회색 건물과, 경적이 울리는 거리.

세상은 추웠다.

그래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저기, 담요 좀 있어요?”

카페 직원에게 그렇게 물었다.

하지만 카페 직원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죄송해요 손님. 다른 손님들이 다 빌려가서...”

정성아는 카페 내부를 둘러보았다.

하하호호 무리를 이루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무릎에 덮여있는 담요.

정성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에 돌아와 커피를 홀짝였다.

-스윽.

그때였다.

누군가의 손과, 그 손에 들려있는 담요가 눈에 들어왔다.

정성아는 싱긋 웃으며 손의 주인을 돌아보았다.

“아. 담요 남는 게 있....”

말을 하다 멈추는 그녀.

그녀는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손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아까 낮에 찝쩍거리던 헌팅남이 아닌가.

“.....”

그녀는 다시 담요를 바라보았다.

카페에서 나눠주는 담요가 아니었다.

문득, 카페 근처에 있는 다아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헌팅남은, 숨을 조금 헐떡거리고 있었다.

“이건 왜...?”

“하아...하아... 사과하고 싶어서요. 받으세요.”

“.....”

정성아는 담요를 조심스레 받았다.

그 과정에서 헌팅남과 손이 맞닿았는데, 남자의 손은 너무도 차가웠다.

이 추운 거리를 뛰어갔다 온 것일까.

“아까는 죄송했습니다. 그럼-.”

다시 몸을 돌려 나가려는 남자.

순간, 그를 벌레 보듯 쏘아붙였던 자신이 떠올랐다.

“저, 저기요!”

다시 뒤를 돌아보는 그.

정성아는 머그컵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조, 좀 있다 가요. 밖에, 추우니까.”

“.....”

고민하는 듯한 남자.

하지만 이내, 뚜벅뚜벅 걸어와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정성아는 머그컵을 슥- 내밀며 말했다.

“그거 잡고 있어요. 따뜻해요.”

“.....”

-툭.

머그컵을 감싸 쥐는 남자.

놀란 표정을 짓는 그.

따뜻해서 좋은가 보다.

괜히 쿡-하고 웃음이 나왔다.

“친구들은요?”

“아. 걔들은 그냥 보냈어요.”

“그러면 사과하려고 여태 기다린 거예요?”

“네. 전화를 받으셔서 바로 하진 못 하고... 음. 사과할 타이팅을 기다리다 보니...”

“아... 그랬구나.”

정성아는 그렇게 말하며 커피를 홀짝이려 했다.

하지만 커피가 담긴 머그컵은 남자가 쥐고 있는 상황.

“저, 커피 시키고 올게요. 공짜로 앉아있는 건 민폐라.”

그때, 남자가 머그컵을 돌려주며 커피를 주문하러 갔다.

정성아는 싱긋 웃으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과는 다르게 호감이 가는 그였다.

“시키고 왔어요.”

이윽고, 남자는 자리로 돌아오며 진동벨을 흔들거리며 보여주었다.

그는 조금 긴장한 듯한 표정으로 정성아의 맞은 편에 착석했다.

그 모습조차도 호감이 갔다.

“저기, 궁금한 거 있어요.”

“네, 네? 저한테요?”

“네.”

“크흠. 말씀하세요.”

“진짜 제가 그쪽 스타일이라서 번호 달라 했던 거예요?”

당황한 표정의 남자.

그가 횡설수설 대며 말했다.

“...아! 그건 그러니까... 친구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뭐야, 그럼 제가 그쪽 스타일이 아니란 말이에요?”

“아니, 그! 이쁘신데!”

“이쁜데 내 눈에 찰 만큼은 아니다?”

“아니! 충분히 예쁘세요! 예쁜데...!”

“이쁜데 매력이 별로 없다?”

“아뇨! 그게 그러니까...!”

“푸흐흐흡”

“.....?”

“장난 좀 쳐봤어요. 빈말은 잘못하시는 타입이구나.”

정성아는 커피를 호로롭 마시며 배시시 웃었다.

왠지 이 남자, 아빠와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한 말 말이에요. 취소할게요.”

“무슨 말...이요?”

“그쪽 제 스타일 아니라고 했던 거요.”

“.....”

얼굴을 붉히고 있는 남자.

표정에서 감정이 다 드러나는 그.

이 남자 은근 기대하고 있구나.

“아무튼 그거 취소할게요. 그쪽, 조~금은? 내 스타일이라서.”

“아... 하하.”

뒷머리를 긁적이며 웃고 있는 남자.

그때, 징~ 하고 진동벨에 벨이 울렸다.

남자는 서둘러 일어나며 자리를 피했다.

“그, 커피가 다. 저, 갔다 올게요.”

부끄러운 듯 서둘러 커피를 받으러 가는 남자.

정성아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지금 보니 옷도 괜찮게 입고, 얼굴도 준수하고, 행동도 귀엽다.

완전, 내 스타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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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아는 커피를 받으러 가는 헌팅남의 뒷모습을 보며 싱긋 웃었다.

그녀의 두 눈엔 어느새 그윽한 감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처음에는 진짜 별로인 남자라고 생각했는데, 무릎담요를 계기로 그에게 관심이 생겼고, 관심이 생기다 보니 그의 외모와 성격이 보이기 시작했다.

‘깔끔하게 입고 다니네. 성격도 진솔하고.’

그의 외모는 깔끔했고, 좋은 향기까지 났다.

성격은 좀 쑥맥인 거 같지만, 센스가 아예 없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저런 스타일이 알고 보면 진국인 성격이라, 가식 없이 편하게 대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한마디로, 딱 그녀 스타일의 남자였다.

“커피 받아왔어요.”

어느새 커피를 가지고 자리에 돌아온 헌팅남.

둘은 본격적으로 얘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여긴 무슨 일로 왔는지, 뭐 하는 사람인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그렇게 이야기는 흘러 흘러, 정성아의 오디션 결과까지 오게 되었다.

정성아는 커피를 홀짝이며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솔직히 좀 자만했었나 봐요. 연습이랑 실전은 엄연히 다른 건데, 연습 때의 실력이 그대로 나올 줄 알았어요. 그래도 뭐...이제 첫 시작이니 힘 내려구요. 비록 1지망 하는 기획사에선 떨어졌지만...하하.”

말을 마치고 다시 커피를 홀짝이는 정성아.

그녀는 남자의 반응을 보기 위해 살짝 곁눈질해 보았다.

남자는 재킷에 손을 찔러넣은 채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였다.

정성아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에이. 그렇게 막 심각하게 받아들일 건 없어요. 어차피 다음-.”

“떨어진 이유요.”

그때, 돌연 자신의 말을 끊으며 입을 여는 남자.

남자가 다음 말을 이었다.

“떨어진 이유, 알 거 같습니다.”

떨어진 이유를 알 거 같다는 남자의 말.

.....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다.

보통 이때쯤 ‘다음엔 잘 할 수 있을 거다’, ‘힘내라’ 이러고 마는 게 보통인데.

정성아는 계속해 보라는 듯한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오디션을 본 곳이 RTM 엔터테인먼트라고 했죠?”

“네.”

“거기서 뭐를 주특기로 보여줬나요? 춤? 노래?”

“음... 노, 노래죠.”

“그러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이어지는 그의 말에 정성아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머그컵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걸 그쪽이 어떻게 아는 데요? 제가 노래하는 거 보지도 않았으면서.”

“아... 실력을 깎아내리려는 게 아닙니다. 다만, 회사가 원하는 것을 성아씨가 제공해주지 못했을 거라는 말입니다.”

회사가 원하는 것을 제공해주지 못했다.

수수께끼 같은 그의 말에 정성아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일까 싶었다.

“제가 좀 어렵게 얘기했네요. 이를테면 전략이 잘 못 됐다는 겁니다. 이번 RTM 엔터테인먼트 오디션에선 ‘실력’이 아니라 ‘캐릭터성’을 보여주는 게 더 잘 먹힐 겁니다. 한 마디로 상품성이 있는 신인을 원하고 있는 거죠.”

상품성이 있는 신인.

꽤 그럴듯한 그의 말에 정성아의 호기심이 동했다.

그녀는 반신반의한 표정으로 그에게 질문했다.

“저기, 잠시만요.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예요?”

“아, 그게 사실... 제가 그쪽 회사 사람이거든요.”

“네...?”

“크흠. 이거-”

스윽- 명함을 내미는 남자.

정성아가 멍한 눈으로 남자의 손을 쫓았다.

그가 손을 뗀 곳엔, [RTM 엔터테인먼트 총괄 프로듀서 남준혁] 이라는 문구가 적혀있는 명함이 있었다.

“어... 어...?”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요. 저도 엔터 쪽 일하고 있어서 오디션 선발 기준 같은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아. 아아... 그러셨구나...”

“네-. 뭐. 그렇게 됐습니다... 크흠, 어쨌든 이것도 인연인데, 궁금한 거 있으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

멋쩍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이는 남자.

이날, 정성아는 그런 그를 바라보며 느꼈다.

오늘의 이 만남이 자신의 운명을 뒤바꿀, 그런 만남이 될 것이라는 것을.

***

“커흐허억...크헥...”

같은 시각.

이신아는 미스터 최의 밑에 깔려 목이 졸리고 있었다.

적당히 오르가즘만 느낄 정도로 힘이 들어간 미스터 최의 손아귀이지만, 그럼 에도 그 모습은 사뭇 기괴하고 가학적이었다.

“커헉! 하아...하아....하아....”

이윽고, 이신아의 목을 놓아주는 미스터 최.

이신아는 콧물범벅이에 눈물범벅이가 된 채 몸을 부르르 떨어댔다.

목을 졸리는 쾌감에 눈을 떠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이었다.

“아주 훌륭합니다. 아름다워요.”

엉망인 몰골을 하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아름답다며 자신을 안아주는 미스터 최.

이신아는 그런 그의 허리를 감싸며 질내에 꽉 찬 자지를 느꼈다.

이렇게 그에게 학대를 받고 나면 그는 항상 달콤한 말을 속삭여준다.

“제가 사모님을 쾌락의 세계로 이끌어드리겠습니다. 저만 믿고 따라오면 돼요.”

“하아...하아... 네에 전 선생님뿐이에요.”

“예. 남편 같은 건 잊어버리게 해주겠습니다.”

남편 같은 것.

이신아는 이제 그 말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처음에는 그 말이 무척이나 가슴 아프게 다가왔으나, 이제는 상관없었다.

애초에 남편은 자신의 운명 같은 게 아니었다.

평생을 사랑한다고 맹세해놓고, 젊은 여자에 한 눈이 팔려 자신을 저버린 배신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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