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하게도 아케론은 전혀 반성하지 않았다.
아케론의 두꺼운 손이 루키우스의 하늘하늘한 잠옷 사이를 파고들었다. 루키우스는 살아 있는 뱀처럼 꿈틀거리는 그의 손길에 가느스름하게 눈을 떴다. 저녁을 과하게 먹어 볼록해진 루키우스의 아랫배를 아케론의 손이 살살 쓰다듬었다. 아케론은 밥을 먹은 후 통통해진 루키우스의 아랫배를 만지는 걸 좋아했고, 당연히 루키우스는 그 행위를 싫어했다.
“너… 으응.”
아니, 완전히 싫다는 건 아니다.
사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이 손이 몸에 닿을 때 짜릿함을 느꼈다. 그의 손이 톡톡 아랫배를 건들 때 미소가 절로 흘렀다.
“…자꾸 이럴 거야?”
하지만 조금 굴욕스럽기도 하다.
루키우스도 연인에게 예쁜 모습을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다. 아케론이 저를 보며 넋을 잃을 때 은은한 기쁨을 느끼지, 통통한 배를 만지며 웃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루키우스의 눈이 가느스름하게 떠졌다.
배를 주무르는 아케론의 손을 꼭 잡고 루키우스가 칭얼거렸다. 어느새 그는 아케론의 품에 갇혀 옴짝달싹 못 하는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끙끙거리며 아케론의 손을 떼어 내려 들었다. 그러나 강철 같은 손은 루키우스의 아랫배에서 꿈쩍도 하지 않았다.
“퀸투스.”
결국 화가 난 루키우스가 언성을 높이고 그를 바라보았을 때 아케론은 조용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에게 무어라 말을 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케론이 루키우스의 관자놀이에 키스를 한 것이었다.
잠을 자던 포르투나가 야옹거리며 깨어났다. 고양이는 유리알처럼 빤한 눈으로 거구의 사내의 몸에 깔려 버둥거리는 주인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포르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때였다.
루키우스가 색색거리는 숨을 내뱉으며 침대의 시트를 손으로 더듬었다. 허벅지에 둔탁한 무기가 느껴지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뜬 루키우스가 제 몸을 깔아뭉갠 사내를 흘끗거렸다. 그의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 위에 키스하며 루키우스가 손을 뻗었다.
루키우스의 향기로운 냄새를 맡는 것에 집중을 했던 아케론은 문득 제 가슴팍 사이에 넣어진 손을 깨닫고 멈칫해야만 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이깁토스 특유의 하늘거리는 옷이 흘러내려 아케론의 각진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얼이 나간 아케론이 아래를 바라보았다가 장난스레 웃는 루키우스와 시선을 마주하고 몸을 멈칫했다.
루키우스의 손이 우락부락한 몸의 근육 사이의 홈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아케론은 돌연 든 충동에 손을 움켜쥐곤 고개를 숙였다.
“이럴 거야?”
쉬어빠진 목소리가 흐르고 열정적인 키스가 이어졌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입술을 빨며 그가 벗긴 옷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강인함의 극치에 도달한 몸이 드러났다.
아케론이 상체를 완전히 드러내고 조용한 숨을 내뱉었다. 루키우스는 기대와 기쁨이 번진 얼굴로 아케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좋아.”
아케론의 손에 하늘거리는 잠옷이 벗겨지며 루키우스가 조용히 속삭였다.
“네가 날 사랑하는 게 좋아.”
반투명한 천이 벗겨지고 드러난 것은 다른 의미로 극치에 도달한 몸이었다. 곡선이 유려한 몸에서 아케론은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 몸은 어둠 아래서 달빛처럼 빛나고 햇볕 아래서는 황금빛으로 빛나는 것이었다.
루키우스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며 손을 뻗었다. 시원한 팔이 굵은 목을 휘감고 가는 다리가 아케론의 허리를 넝쿨처럼 휘감았다. 아케론은 익숙하게 루키우스의 도톰한 둔부에 손을 댔다.
루키우스의 얼굴에 얼굴을 비비며 그는 조용히 속삭였다.
“네 몸을 조심해야 해.”
그러나 아케론은 제가 한 말을 정말로 지키지 못했다. 루키우스의 얼굴과 목을 핥아대던 그는 기름을 묻혀서도 빠듯한 루키우스의 안에 억눌린 한숨을 내뱉으며 루키우스를 엎드리게 했다.
갓난아기처럼 부드럽고 포동포동한 엉덩이는 가는 몸에서 유일하게 살집 있는 부위였다. 그곳을 벌리며 아케론은 자그마한 구멍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혓바닥이 기름이 번진 구멍을 핥는 순간 루키우스는 푸르르 몸을 떨었다.
“아….”
신음이 흘렀다.
“아케론.”
시트를 손에 거머쥔 채 루키우스가 어깨를 동글게 말았다. 축축한 혓바닥이 은밀한 부위를 핥았다. 그 행위는 루키우스가 가장 견디기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요즘 들어 서서히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행위였다.
안절부절못하는 루키우스의 구멍을 아케론은 느릿하게 핥았다.
축축한 소리가 이어졌다.
루키우스는 신음을 흘렸다. 혓바닥은 연한 색의 구명을 축축하게 젖게 만들었고, 살을 연하게 만들었다. 살집 있는 새하얀 살 둔덕에 얼굴을 파묻은 채 아케론은 턱을 움직여 그곳의 부위를 빨아들였다. 침대에 엎드린 루키우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관절 부위만이 분홍색이던 그의 몸이 서서히 발그스레 달아오르고 있었다.
흐물흐물해지는 구멍이 자그마한 틈을 보일 때 아케론은 살봉우리에 묻었던 얼굴을 떼고 느릿한 숨을 내뱉었다. 한 손으로 흐벅진 살을 벌린 채 아케론은 살짝 벌려진 구멍에 타액을 묻힌 검지를 밀어 넣었다.
풀린 구멍이 오물오물 아케론의 검지를 씹었다.
루키우스는 신음을 흘렸고, 아케론은 그의 얼굴을 흘끗대며 상태를 확인하려 들었다. 루키우스는 뺨을 발그스레 빛냈으나 버거워하지는 않는 듯 보였다. 시선을 돌린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고집 센 구멍을 길들이는 데 다시 열성을 다했다.
“흐윽….”
그 부위는 뜨겁고 또 끈적거린다. 검지가 맛있는 설탕이라도 되는 양 달라붙어 녹이려 드는 입 안 같은 살점을 느끼며 아케론은 천천히 그의 안의 깊은 곳에 향유를 밀어 넣는 데 열중을 했다.
루키우스가 가쁜 숨을 흘렸을 때, 그의 빠듯한 구멍에는 두 개의 손가락이 들어갔다 빠져나가길 반복하고 있었다.
“나 뜨거워….”
“조금만 참아.”
“이상해…….”
칭얼거리는 루키우스의 목소리는 살랑거리고 달콤했다. 미간을 찡그린 아케론이 아랫배에 번지는 불과 같은 열기를 느끼며 욕지거리를 흘렸다.
“야-옹.”
길게 울음을 터뜨린 포르투나가 루키우스의 잇자국이 가득한 얼굴을 핥았다. 루키우스가 새하얗고 복슬복슬한 고양이를 쓰다듬으며 웅얼거렸다.
“안 돼…….”
“…….”
“…너 저리 가.”
아케론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루키우스의 얼굴은 정반대로 술에 취한 사람처럼 풀려 있었다.
손가락이 유액이 떨어지는 비좁은 구멍을 파고들 때였다.
“그만.”
분홍색 손톱이 근육이 도드라진 팔뚝을 긁었다. 살갗에는 붉은 흔적이 생기지 않았다. 군인이자 검투사였던 사내의 살가죽이 질기고 루키우스의 손톱이 부드럽기 때문이었다.
“나 정말 안 되겠어.”
루키우스는 신음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이 비좁은 구멍을 빠져나가고 루키우스가 몸을 완전히 일으켜 침대 위에 주저앉았다. 그의 새하얀 몸은 완전히 복숭앗빛으로 물들어져 있었다.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굳은 얼굴로 마주하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의 앞에서 다시 몸을 엎드렸다. 길고 가는 손가락이 부드러운 살점을 벌렸다. 아케론은 숨을 죽이고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을 보인 채 몸을 웅크린 루키우스가 하체를 위로 빼고 있었다. 새하얀 달과 같은 살 둔덕 사이로는 맑은 액이 흐르고 있었다.
뺨을 시트에 댄 채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넣어줘, 퀸투스.”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갈색으로 그을린 건강한 육체가 이윽고 여린 몸을 덮었다.
“아….”
루키우스가 신음을 흘렸다. 위로 올려진 둔부를 잡아당기곤 아케론은 그 위에 성기를 비볐다.
“너도…… 달아 있었니?”
유액을 흘리는 밀문에 성기의 끝이 걸릴 때마다 루키우스는 몸을 움찔거렸다. 고개를 살짝 돌려 등 뒤를 바라본 루키우스가 싱긋 웃었다. 아케론은 그 얼굴을 마주하곤 욕지거리를 중얼거리고야 말았다.
흉흉하게 굳어진 얼굴로 그는 손을 뻗었다. 루키우스의 가늘고 풍성한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아케론은 숨을 헐떡거렸다. 땀에 젖어 얼굴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이 치워지고 루키우스는 한결 상쾌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미간을 찡그렸다.
“으… 음…….”
길고 고통스러운 신음이 나직하게 흘렀다.
“후우…….”
삽입은 길게 이어졌다.
아케론은 어지러움을 느끼며 루키우스의 가는 허리를 잡아당겼다. 근육질의 몸에 부드러운 몸이 달라붙었다. 루키우스는 침대에 무릎 꿇은 다리를 후들후들 덜며 몸을 지탱하길 어려워했다. 그런 그의 땀에 젖은 목덜미에 코를 비비며 아케론은 그의 냄새를 맡았다.
달큼한 체향에 슬쩍 묻어 나오는 살짝 시큼한 그 냄새가 좋았다.
“퀸투스…… 아.”
평상시에는 아케론.
강조해서 부를 때 퀸투스.
그 특별한 이름은 아케론의 마음을 울렸다.
“내가.”
제 허리를 끌어안은 손을 더듬으며 루키우스가 느린 숨을 내뱉었다. 금발이 흐드러지게 떨어져 내렸다. 루키우스의 눈처럼 새하얀 엉덩이에 꺼슬한 음모가 닿아 있었다. 루키우스의 가는 허리만큼 굵은 허벅지에 보드라운 살이 눌리고 있었다.
신음이 흘렀다. 고개를 돌려 등 뒤를 바라본 루키우스가 나른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아름다워?”
사내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턱이 도드라지고, 두 눈은 불꽃으로 들끓어 있다. 타인이 본다면 오금이 저릴 만한 무서운 얼굴을 그러나 루키우스는 몹시나 귀여워했다.
청량한 웃음이 흘렀다.
루키우스가 손을 뻗어 아케론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나 허리를 비튼 자세가 힘이 들어 그는 결국 다시 몸을 돌려야만 했다. 루키우스의 몸이 떨어져 내렸다. 아케론은 커다란 손으로 그의 턱을 부여잡아 고정시켰다.
신음이 흐르던 그 순간 아케론은 느릿하게 몸을 움직였다.
아케론의 손등을 노닐던 손이 루키우스의 배로 향했다. 배꼽의 윤곽을 어루만지며 루키우스가 반쯤 뜬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물기를 머금은 눈과 눈을 마주한 채 아케론은 몸을 움직였다.
루키우스는 고통에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난 네 거야.”
손가락이 빠져나가는 성기의 윤곽을 따랐다. 아케론의 턱이 잘게 떨렸다. 흉흉히 일그러진 사내와 시선을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금색 속눈썹을 가냘프게 떨었다.
“이건…… 모두… 네 거야.”
신음과 함께 말이 흘렀다. 루키우스의 보송한 뺨에 한 줄기 눈물길이 생겨났다. 뚜둑 눈물을 흘리며 루키우스는 보랏빛 눈을 깜빡거렸다.
“그리고 넌 내 거야…….”
아케론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그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케론의 손에 고정되어 있던 턱이 흘러내리고, 루키우스가 침대 위에 상체를 무너트렸다. 엎드린 루키우스의 둔부를 부여잡아 벌리며 아케론은 허리를 움직였다. 핏줄이 불거진 흉기가 봉긋한 살 봉우리를 파고들었다.
“아, 윽!”
루키우스는 시트를 거머쥔 채 눈을 질끈 감았다.
“퀸…… 아, 퀸투스….”
삽입은 서서히 빨라진다.
정사는 더욱 농밀해진다.
벌어진 루키우스의 입술 사이로 타액과 함께 밭은 숨이 흘렀다.
둔덕을 벌린 손에는 거미줄과 같은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고, 아케론의 관자놀이는 불룩 튀어나와 있었다.
삽입이 빨라질 무렵 아케론은 몸을 숙여 루키우스의 몸 위에 몸을 겹쳤다. 체중을 실어 제 물건을 파묻은 아케론에 루키우스는 몸을 퍼득 떨다가 눈물을 흘렸다. 꾹 눈을 감으며 루키우스가 시트에 뺨을 비볐다. 그의 다른 뺨 위에 뺨을 댄 채 아케론은 온몸이 밀착된 자세에서 허리를 놀렸다.
깊게, 또 깊게.
“흐윽…….”
부드럽게, 물살같이.
“……퀸투스.”
아스라이 흐르는 말에 머리가 어지러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퀸투스 발레리우스는 주체할 수 없는 성욕을 느꼈고, 그것을 가냘픈 몸에 풀었다.
씨를 터뜨리고 나서도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몸 위에서 육중한 몸을 일으키려 하지 않았다. 숨이 헐떡거리는 소리가 흘렀다. 아케론은 땀에 젖어 축 늘어진 루키우스의 몸을 뜨거운 입술로 비비다가 그의 온몸을 개처럼 핥았다.
루키우스는 마치 개에게 고기를 주는 주인처럼 관대하게 굴었다. 힘이 없어서 제 몸을 죽죽 빠는 아케론을 말릴 수 없는 건지. 아니면 그걸 즐기는 건지. 루키우스는 나른히 침대에 누워 그에게 몸을 맡긴 것이었다.
그런 루키우스의 방관하에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뺨을 빨고, 목을 물고, 가슴을 핥아댔다. 팔을 들어 땀에 젖은 겨드랑이를 빨고 관절의 마디에 타액을 덧칠했다.
그러던 와중 루키우스가 문득 손을 뻗어 제 앞에 있던 아케론의 육중한 몸을 어루만졌다. 땀에 젖은 몸을 살살 만지던 루키우스가 고개를 숙여 그의 갈비뼈 어림을 혓바닥으로 핥았다.
한참을 두 사람은 서로를 핥아 주다가 사이좋게 욕탕으로 향했다. 넓은 대리석 욕조에서 루키우스는 입욕제로 가득 찬 물에서 수영을 했고 아케론은 욕조의 난간에 기대어 몸을 축 늘어트렸다.
루키우스는 목욕이 끝나고 벌거벗은 몸을 리넨으로 만든 수건으로 덮었다. 아케론은 돌돌 말린 루키우스를 품에 안고 방으로 향했고, 그를 침대 위에 살포시 내려놓고 어깨에 올려놓은 수건으로 머리를 말려 주었다.
어깨에 살짝 닿는 루키우스의 머리를 말리고 아케론은 제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털었다. 군인처럼 짧은 머리는 그것만으로도 말리기에 충분했다. 수건을 의자 위에 대충 걸고 아케론이 침대 위롤 돌아보았을 때 그곳에는 보송해진 루키우스가 침대 위에 포르투나처럼 웅크린 채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왜 웃어?”
아케론이 문득 입술 끝을 일그러트리며 말을 내뱉었다. 웃음을 참는 건지 화를 참는 건지 모르는 얼굴에 루키우스가 눈을 휘었다. 아케론의 몸은 알몸이었다. 루키우스는 흐음 소리를 내며 구릿빛 강건한 몸을 훑어보다가 하품을 했다.
툭, 침대 위로 쓰러지는 머리에 아케론이 고개를 절레 저으며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옆으로 가.”
“졸려.”
칭얼대는 루키우스를 억지로 옆으로 밀며 아케론이 이불 아래로 들어갔다. 이불 위에 알몸을 드러낸 채 대 자로 누운 루키우스를 끌어당기며 아케론이 중얼거렸다.
“추워.”
루키우스는 순순히 그의 품에 꼭 안겼다. 풍성한 금발이 살갗에 닿았다. 아케론은 몸을 고양이처럼 말고 제 가슴에 이마를 댄 루키우스에 만족감을 느낀 채 서서히 잠이 들었다.
루키우스는 두 눈을 깜빡이며 그런 아케론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눈을 붙였다.
다음 날 아침, 아케론이 눈을 떴을 때 그의 옆에는 루키우스가 없었다. 햇살이 눈 위를 간지럽히고, 사내는 미간을 좁히며 신음을 흘리다가 서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부스스한 얼굴로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그는 사각거리는 갈잎펜 소리에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고개를 돌린 아케론이 몸을 우뚝 세웠다. 방 한편에 있는 서재였다. 큐피드를 닮은 사랑스러운 청년이 금발을 느슨하게 묶곤 펜을 사각사각 움직이고 있었다. 정교하게 깎은 보라색 눈이 파피루스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케론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루키우스가 무언가에 열중하는 모습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일을 하는 루키우스의 모습은 경건했다. 그건 그의 마음가짐에서 묻어 나오는 것이었다. 루키우스에게 펜은 그의 길이었다. 존재를 증명하기 위한 수단이었고 동시에 목표였다.
그리하여 그걸 손에 쥘 때에 루키우스는 전장에 나온 전사와 같았다.
그 숭고함, 그 열정.
그것이 마음에 울려 퍼졌던 것이다.
그래서 아케론은 그때 루키우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노예 시절. ડχ
그때.
아트리움의 방 안을 몰래 훔쳐보았을 때….
아케론의 군청색 눈이 가라앉고, 숨이 가늘게 흘렀다. 지중해 연안, 이스카리아 섬의 기억에 잠겨 있었다. 그곳에서 보냈던 1년의 시간을 회고했다.
지나고 보니 보석처럼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사내의 입술이 희미하게 휘어진다. 그의 얼굴은 온난한 지중해의 기후와 비슷해졌고, 숨결은 부드러워졌다.
그때였다.
“잘 잤어?”
아케론의 몸이 멈칫했다. 멍하니 정면을 바라보던 아케론이 저를 바라보는 보석 같은 두 눈을 마주하고 숨을 느릿하게 내뱉었다. 창문을 가린 주홍색 베일이 하늘거리고 있었다. 그 사이로 쏟아진 황금색 햇볕을 맞으며 루키우스는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케론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응.”
말을 들은 루키우스가 고개를 까딱거리며 다시 문서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그런 루키우스에게서 아케론은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침대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루키우스에게 다가가 보드라운 뺨에 쪽쪽 키스를 퍼부었다.
“나 일해야 해.”
“상관없어.”
“뭐? 그게 지금 총독이 할 말이야….”
*
아침 일찍 일어난 두 사람이 긴 의자에 누워 게으른 식사를 했다. 식당 내부에는 인공 연못이 있었고 그곳에는 작은 금붕어들이 노닐고 있었다. 연못은 공교롭게도 아케론의 의자 옆에 있었는데 그는 식사를 하면서 금붕어에게 빵을 뜯어 주어 루키우스에게 지적받았다.
크랜베리를 박은 신선한 치즈를 바삭한 빵에 곁들여 와그작 씹어 먹으며, 루키우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수면 위로 팔딱거리며 달려드는 금붕어에게 빵을 주던 아케론이 입맛을 다시며 손을 거두었다.
그 손은 오물거리는 루키우스의 입으로 향했다. 블루베리 치즈가 묻어 있는 입술을 닦은 후 아케론은 견과류를 조금 먹고 식사를 마쳤다.
식사를 마치고 아케론은 지역 유지들을 설득하러 총독부 관저를 나섰다. 거리의 배수관 시설도 살필 필요가 있어 아케론은 제게 따라붙는 수행원을 물리며 비밀리에 거리로 나섰다.
아케론이 거리에 나설 때 루키우스는 총독부 관저에 남아 문서를 정리했다. 재무관이 총독보다는 업무가 적다지만 그 양이 만만한 건 아니다. 아이깁토스는 로마의 최대 곡창지이자 아프리카와 지중해 세계를 잇는 중요한 곳이다. 아무리 쉬운 일이라도 그곳을 통치하는 것을 허투루 여겨서는 안 되었다.
아케론이 유지들의 집에서 점심을 먹고, 루키우스는 그들이 아침을 먹었던 식당에서 식사를 했다. 아케론이 곁에 없을 때는 소식을 하는 루키우스는 꿀을 뿌린 요거트를 먹으며 인공 연못 옆에 쭈그려 앉았다. 냠, 요거트를 큰 술로 뜨며 루키우스가 뻘뻘거리며 돌아다니는 금붕어를 바라보았다.
‘보고 싶다.’
그러다가 그리 속으로 생각하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케론이 저택에 돌아왔을 때는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 있었다. 요란하게 기지개를 켠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맞이했다.
“하암. 다녀왔어?”
휘어진 몸에 아랫배가 앞으로 나왔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아랫배를 흘끗 바라보다가 문득 그것을 만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고 손을 뻗고야 말았다.
“뭐 하는 짓이야.”
그러나 그 손길은 이제는 제법 노련해진 루키우스의 손에 의해 와해가 되고야 말았다. 찰싹, 매서운 손길로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손등을 때리고 그를 가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아케론은 아무렇지 않은 듯 태연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루키우스는 벙쪄서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그의 뒤를 따랐다.
“너는 뻔뻔해졌어.”
아케론은 나직한 목소리로 답했다.
“난 원래 이랬지.”
루키우스는 그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하긴 너는 원래도 뻔뻔했지.”
이어진 말에 아케론은 미간을 살짝 찡그리고야 말았다.
“내가 음란하고 천박하다 말을 하면서도, 막상 나를….”
“그만해.”
도대체 뭐 하는 거야?
두꺼운 손이 루키우스의 말랑한 분홍색 입술을 막았다. 읍, 소리를 내는 루키우스가 토끼처럼 동그랗게 눈을 뜨고 그를 말똥히 바라보았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낮이잖아.”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케론은 그를 완전히 믿지는 못했으나 너무 그의 얼굴이 자그마하여 덜컥 겁이 나 손을 떼고야 말았다. 루키우스는 그의 옷자락을 슬그머니 잡아당기며 종종걸음으로 그를 뒤따랐다.
“나는 뱃놀이가 좋아.”
“뭐?”
“한 번도 해 본 적은 없는데. 나일강은 예쁘더구나.”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화법에 적응해 가는 중이었다. 뒤늦게 그의 말의 의미를 깨닫고 아케론이 루키우스의 작은 머리통을 손으로 쓰다듬었다. 그건 아케론의 손안에 한 줌이었다.
“저녁노을이 질 때 나가지.”
루키우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서류를 가지고 갈 거야?”
아케론은 와락 얼굴을 구겼다.
“아니!”
두 사람은 그리하여 뱃놀이를 준비한 것이었다. 아이깁토스 전역을 다스리는 총독의 뱃놀이라, 소식을 들은 수행원들이 찾아와 호들갑을 떨었으나 아케론은 그들을 물렸다. 그들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수행원들은 아기 머리통만 한 알통이 도드라진 총독의 팔뚝과 마주하곤 순한 어린 양 같은 얼굴로 물러났다.
뜻하지 않게 무력시위를 한 격이 된 아케론이 그들의 그늘진 얼굴 뒤 속사정을 알지 못해 의아한 표정을 짓고, 루키우스는 웃음을 참으려 입술을 우물거려야만 했다.
“음식을 싸가자, 퀸투스.”
검지를 입술에 대고 루키우스가 중얼거렸다.
“시원한 과일을 싸가서 먹는 게 좋아. 오렌지를 좀 싸가자.”
“저녁은?”
“돌아와서 먹지. 그래도 운치를 즐기면서 먹을 간식은 넉넉하게 싸가자고.”
느릿느릿 답변을 하던 루키우스가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뻗어 아케론의 굵은 목을 끌어안았다. 아케론은 대롱거리는 루키우스를 매달고 뱃놀이를 할 준비를 했다.
알렉산드리아 도시 내부에서는 딱히 뱃놀이를 즐길 만한 곳이 없었다. 도시 밖으로 빠져나가 조금 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운치가 좋은 곳이 나온다.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품에 안고 말을 타 그곳을 향했다.
전 아이깁토스 장관, 카이킬리우스가 기증(이라고 쓰고 도주하면서 버리고 간이라 읽는) 놀잇배가 그곳에 묶여 있었다.
아케론이 총독임을 알리고 놀잇배와 노예들을 데려왔을 때 루키우스는 나일강 둔치에서 쪼그려 앉아 갈대를 만지작거리며 놀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 모습에서 잠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건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뱃놀이를 즐기던 다른 귀족들과, 아케론이 데려온 노예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넋을 잃고 살랑거리는 갈대를 만지작거리는 루키우스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밋빛 뺨을 갈대의 수염이 간지럽히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호기심 어린 얼굴에 미소가 잠시간 감돌았다가 사라졌다. 그 순간 아케론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는 술렁거리는 주변을 깨닫고 더 이상 참지 못해 걸음을 나섰다.
“아케… 으응?”
“이리 와.”
아케론이 그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번쩍 하늘 위로 들린 루키우스가 얼이 나간 얼굴로 두 눈을 깜빡거렸다. 사람의 손을 잘 탄 고양이처럼 구는 그가 사랑스러웠으나 아케론은 울상을 지은 얼굴을 그만 바로 하지 못했다.
“왜 그래?”
그걸 몰라서 묻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으나 아케론은 어린 연인에게 소유욕과 질투심, 불안함을 드러내는 추한 사내가 되지 않으려 애를 썼다.
“갈대에는 벌레가 많아.”
그러곤 그는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작은 몸을 끌어안고 배 위에 올랐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팔을 뻗어 아케론의 두꺼운 몸을 꽁꽁 끌어안았다.
카이킬리우스 장관이 태업으로 쫓겨나면서 버리고, 아니 상황을 무마하기 위해 총독부에 기증하고 간 배는 카이킬리우스의 명성다웠다.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크기는 그다지 크지 않았으나, 그건 몹시 화려했다.
배는 그다지 크지 않아 연회석은 기껏해야 서너 사람이 앉을 크기였으나, 그럼에도 꾸민 모양새가 아름다웠다. 반투명하고 새하얀 베일이 하늘거리며 연회석을 가렸는데, 길이순으로 늘어서 있어서 바람에 흔들릴 때 모습이 장관이었다. 주홍색 햇볕은 새하얀 베일을 꿰뚫고 산란하여 연회석 안 구석구석을 비췄다.
사락, 노가 강의 수면을 휘저었다. 루키우스는 폭신한 거위 베개가 있는 연회석에 기대어 늘어져 있었다. 노을이 지는 주홍빛 하늘을 바라보는 그의 모습은 몹시 게으른 한량 같아 보였다.
총독의 배가 여유롭게 물살을 탔다.
루키우스는 하품을 하며 알이 커다란 청포도를 가지에서 비틀어 따먹었다. 청포도를 비롯한 여러 가지 과일들이 대나무 바구니에 있었고, 루키우스는 그것들로 든든하게 배를 채웠다.
“그만 먹어.”
“싫어.”
시원한 오렌지를 까먹으며 루키우스가 느긋하게 중얼거렸다.
“난 더 먹을 거야.”
야금야금 오렌지를 까먹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이 빤히 바라보았다. 쿠션이 대어진 의자의 팔걸이를 팔꿈치로 누른 채 아케론은 손바닥에 뺨을 얹고 있었다. 유심히 루키우스를 바라보는 군청색 눈이 나일강의 강물처럼 투명했다.
“그래, 먹어.”
아케론이 중얼거렸다.
루키우스가 생글 웃는 것이 좋았다. 정확히 말하면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는 그가 좋았다.
아케론의 허락하에 루키우스의 자그마한 입술이 벌어졌다. 과즙이 묻은 분홍색 입술이 오렌지를 야금 물었다. 루키우스의 얼굴은 붉게 상기가 되어 있었다.
저게 그렇게 맛있을까.
아케론은 너무나도 맛있게 오렌지를 먹는 루키우스에게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오렌지의 과육이 터지는 소리가 시원했다. 달콤함을 즐기는 루키우스의 얼굴은 행복으로 가득했고.
아케론은 나일강의 운치 있고 이국적인 전경보다 그 모습에 더욱 눈길이 갔다. 루키우스는 그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의아해했다.
“왜 그렇게 보지?”
“음.”
“내가 사랑스러워?”
아케론은 굳이 답변을 하지 않았다.
팔걸이에 기댄 몸을 바로 세우고 그가 중얼거렸다.
“나도 하나 줘.”
루키우스가 달칵 대나무 바구니를 열어 칼집이 난 오렌지를 꺼내 들었다. 끙끙거리며 오렌지를 벌리려는 루키우스에게서 아케론은 오렌지를 넘겨받아 그것을 간단히 쪼갰다.
반쪽은 오렌지를 다 먹어가는 루키우스의 손아귀에 안겨 주고, 아케론이 손에 쥔 오렌지의 껍질을 깠다. 시켈리아에서 공수해 온 빨간 오렌지가 상큼해 보였다. 아케론이 껍질을 훌훌 까 내렸을 때 루키우스는 또다시 오렌지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손톱에 하얀 속껍질이 낀 루키우스에 아케론이 말없이 제가 깔끔히 깐 오렌지를 건네고 루키우스 손에 든 오렌지를 받아갔다.
멈칫하던 루키우스가 눈을 휘었다.
“고마워.”
아케론은 목이 막히는 느낌을 애써 무시하고 말없이 오렌지를 깠다. 새빨간 과육이 드러나자 입 안이 자연 시큼해졌다. 군침이 도는 색의 오렌지를 입 안에 넣고 아케론은 으적으적 그것을 씹었다.
“시원하지?”
문득 그의 귓가로 청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아케론은 달콤한 오렌지의 맛을 느끼며 뜸 들여 답변했다.
“그래.”
루키우스는 그의 말에 만족한 듯 조용히 웃었다.
“좋아.”
아케론은 속으로 ‘저녁을 이곳에서 먹었어도 좋았겠군’이라는 생각을 하며 새콤달콤한 시켈리아산 빨간 오렌지를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선선한 바람이 이마에 송골 맺힌 땀을 식혔다.
잠시간 여유로운 시간이 흘렀다.
루키우스는 분홍색 발을 허공에 까딱까딱하며 거위털 담요 위를 뒹굴었다. 개구쟁이처럼 천진난만한 재무관을 아케론은 관자놀이를 손으로 꾹 누르며 바라보고 있었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루키우스가 배의 난간에 쿡 뺨을 들이댔다. 황금빛으로 가득한 나일 강의 평야가 보였다. 주홍색 노을이 물들고 밀빛 이삭이 바람에 물결치는 풍요롭고 기름진 땅을 보는 루키우스의 눈이 순간 반짝 빛났다.
그는 이 땅의 역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수천 년이 넘게 이어지는 길고 긴 역사를, 두근거리고 설레는 마음으로 회고했다.
이 땅에서 람세스 2세의 카데시 전투가 일어났겠지?
투트모트 3세가 시리아를 정복하고?
아케나톤이 아마르나 개혁을 일으켰을 거야.
머릿속에 전차 부대가 스쳐 지나간다. 웅장한 아부심벨 신전이 세워진다. 소아시아의 패권을 좌지우지했던 군주가 숨을 거둔다.
‘여긴 아이깁토스였어.’
인류의 역사가 움튼 곳.
가슴이 두근거렸다.
루키우스에게 역사란 삶의 이정표였다. 로마인으로서의 의무를 다할 수 없다고, 정상적인 사내로서 살아갈 수 없다고 판단된 루키우스는 게르마니쿠스의 말을 듣고 삶의 목표를 생각했다. 저를 둘러싼 말들과 맞서기로 다짐했다.
그리고 떠올린 것이 병약한 소년을 전사로, 군주로, 영웅으로 만들어 주던 한 폭의 파피루스였다.
역사란 인류의 서사였다. 루키우스는 그것을 사랑했고, 또 그곳에 제 운명을 걸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 왔지.
‘아이깁토스, 알렉산드리아에.’
루키우스가 문득 입술을 열었다.
“아이깁토스는 마음에 들어.”
아케론이 몸을 멈칫했다. 그가 고개를 돌려 루키우스를 바라보았을 때, 루키우스는 자그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이깁토스의 전통 의상인 새하얀 숄을 입은 그의 모습에선 신성함이 느껴졌다. 평소에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은 세속에 묻지 않은 순수함과 같아 보인다. 헝클어진 금발이 장밋빛 뺨을 가리고 루키우스는 분홍색 입술 끝을 아주 살짝 끌어 올려 조용한 웃음을 흘렸다.
아케론은 달빛 같은 웃음을 띤 루키우스의 얼굴과 마주하고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성스러운 아름다움이 그에게 있었다.
“지식인과 학자가 알렉산드리아를 싫어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이깁토스도 마찬가지야.”
조용한 말이 이어진다.
루키우스는 두 뺨에 생기를 불그스름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여긴 수천 년 역사의 도시다. 역사가들의 제2의 고향과도 같은 곳이지.”
아케론은 당황에 잠시간 말을 하지 못했다. 루키우스는 아랑곳하지 않고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여기서 시간의 베일에 가려졌던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지 않을까?”
그의 눈에는 생기가 반짝 감돌고 있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삶에 대한 애정이 묻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이 알지 못했던 세상의 비밀이 이곳에 숨겨 있을지도 몰라.”
아, 이걸 무어라 평해야 할까?
생기가 넘치는 청년의 눈부신 얼굴과 마주하고 아케론은 목이 막히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아케론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입술을 열 수 있었다.
“그래.”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속삭였다.
“그러든가.”
그러곤 침묵이 이어졌다.
흘긋 고개를 돌린 루키우스는 아케론과 눈을 마주하고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제비꽃색 눈과 마주하고 아케론은 서서히 수면 아래로 함몰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루키우스의 황금빛 머리카락 위에 주홍빛 햇살이 물결치고 있었다. 따스한 햇볕이 금발 위에 내려앉아 루키우스는 마치 황금색 관을 쓰고 있는 것과 같았다.
아이깁토스의 땅에 저무는 해를 등지곤 금발의 청년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나 사실 일찍 죽을 줄 알았어.”
아케론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루키우스는 속삭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스카리아 섬에서. 나 사실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듣기만 해도 아찔한 말이다. 그러나 아케론은 두려움을 드러내지 않았다. 감정의 동요를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그저 묵묵히 말을 들을 뿐이었다. 루키우스가 스스로의 속마음을 말하기 편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단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아케론의 배려 때문인지 루키우스는 마치 오늘 아침에 먹은 음식들을 나열하는 것처럼 평온하고 나른하게 말했다.
“수술을 할 생각이 없었어. 로도스 섬의 아스클레피오스 밀교 사람들은 아시클레피오스 본교에서도 이단으로 칭해지는 이들. 그들의 급진적인 외과 의술에 의존했으나 완벽히 믿지는 못했다. 게다가 그들은 수술이 성공해도 내가 후유증을 앓을 수 있다고 했어.”
아케론의 두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루키우스는 그 순간 눈을 감고 조용히 읊조렸다.
“나는 내 모든 것을 불사르고 떠나려 했다.”
선선한 바람이 땀을 식혔다. 루키우스는 살갗을 간지럽히는 바람의 감촉을 즐기며,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속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네게 손을 댄 거야.”
삶이란 아름다워.
스륵 눈이 뜨였다.
경이로울 만치 빛나는 찬란한 자수정색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며 청년은 담담히 말을 이었다.
“참을 수 없었어, 내 불꽃. 널 우연히 만났지. 이스카리아 섬의 그 대검투장에서. 그곳에서 마주한 너는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있었다. 네 영혼은 꺾이지 않고 있었어.”
8월의 햇볕이 내리쬐는 경기장에서 그 사내는 꺾이지 않은 혼을 불태우며,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그를 보고 무슨 생각을 한 줄 아느냐.”
그때의 마음.
루키우스가 고요한 눈을 반짝거렸다.
홀로 세상과 싸워 왔고 그 싸움의 과정은 외롭고 막막했다. 가끔 그는 절망을 느꼈다. 가끔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욕망을 느꼈다.
“내가 얼마나 안도했는지 알아?”
그러던 와중에 또 너를 만났지.
“내가 위안받았는지.”
그러니까 요점은 이거다.
항상 아케론은 루키우스가 그를 필요로 할 때 찾아온다.
마치 운명이라도 되는 것처럼.
신의 선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찾아와 마음을 바로 세운다.
고개를 들어 올린 루키우스가 주홍빛 햇볕을 받아 더욱 찬란히 빛나는 그의 불꽃을 바라보았다. 아케론은 무표정한 얼굴로 루키우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그 사내의 얼굴을 따스한 시선으로 바라보며 청년은 속삭였다.
“네게 가까이 가고 싶었어. 이기적인 마음인 걸 알면서도 그리하고 싶었지. 원수의 혈육,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자가 네게 닿으려 했다. 이 자리를 빌려서 그 마음을 사과하지.”
숨을 들이켜고, 루키우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퀸투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끝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그때 나는 충동을 느꼈어.”
그리고 그 순간 아케론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그 충동이 날 살렸어.”
루키우스는 처음에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뭐라고?”
반문하던 그가 몸을 멈칫했다.
아케론의 얼굴과 마주한 것이었다. 순간 루키우스의 몸이 굳어지고, 그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는 숨을 내뱉으며 아무런 말도 내뱉지 못했다.
침음이 흘렀다.
“너….”
세상에서 가장 순수한 눈물이 뺨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아케론이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을 흘리며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러곤 말을 내뱉었다.
“그 충동이 날 살렸다.”
느릿한 목소리.
귀가 아닌 마음에 닿는 말.
루키우스의 숨이 죽었다. 시간이 흘러 그는 잠긴 목소리로나마 간신히 말을 할 수 있었다.
“너는 마음이 여려서 탈이구나.”
루키우스는 애써 여유로운 말투를 가장하려 했다.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는 그를 아케론은 무뚝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시선에 루키우스의 숨이 가늘게 떨렸다.
견디려고 했으나 루키우스는 평정심을 오래 유지할 수 없었다.
“그만.”
“…….”
“그만 울어.”
금파가 물결치는 아름다운 나일 강의 배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만.”
루키우스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러곤 소리 없이 눈물을 흘리는 사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손이 단단한 바위 같은, 서늘한 대리석 같은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루키우스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케론은 가쁜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뒤로 꺾었다. 악물린 턱에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그만 울어.”
벅차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겠다. 항상 제 감정을 다스리는 데 익숙했던 루키우스는 그 순간 돌연 가슴에 몰아치는 격정을 참지 못해 얼굴을 일그러트리고야 말았다.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가는 숨이 흐르고 그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그때였다.
“잘했어.”
아케론이 손을 뻗어 루키우스의 가는 허리를 부여잡았다. 루키우스가 헉 숨을 몰아쉬었다. 간절히 것을 갈구하듯이 그가 아케론을 억세게 끌어안고 눈을 감았다. 제가 가지지 못했던 강인함을 지닌 사내의 몸에 얼굴을 비볐다.
“잘 해냈어.”
아케론은 품 안의 것을 으스러트릴 것처럼 억세게 끌어안고 있었다. 푹신한 담요 위를 뒹굴며 루키우스의 뺨에 뺨을 비비며, 아케론은 그의 허리를 감싼 팔에 더욱 힘을 주며 숨을 헐떡거렸다. 이 악문 목소리로, 떨리는 말을 내뱉었다.
“잘 견뎠어.”
그의 입가에 귀를 댄 채 입술을 달싹였다.
“잘….”
결국 흐느끼고야 마는 루키우스를 품에 안은 채 아케론이 속삭였다.
“잘 살았어, 루키우스.”
따스한 주홍빛 노을이 반짝거리는 나일 강 위에 내려앉고 있었다.
아이깁토스의 평화로운 날이었다.
-공금&갠소—
주석
1) 아카이아: 그리스.
2) 아퀼라: 독수리 모양의 군기. 로마인들은 아퀼라를 이민족에게 빼앗기는 것을 극도의 치욕으로 여겼다.
3) 아퀼리페르: 아퀼라를 드는 기수. 특별히 용감한 사람을 뽑아 아퀼리페르로 삼았다.
4) 바루스여, 내 군단을 돌려다오!: 바루스가 토이토부르크 전투에서 패배하고 나서 경악한 아우구스투스가 기둥에 머리를 박으며 울부짖었던 말.
5) 마르스, 레아 실비아, 베누스의 자손: 로마의 건국 시조는 베누스 여신의 아들인 아이네이아스. 중시조는 베스타 신녀 레아 실비아와 마르스 신이다.
6) 바루스의 치욕: 바루스의 재앙, 클라데스 바리아나 등등 모두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뜻한다. 이 전투에서 로마는 엘베 강을 국경으로 삼겠다는 포부를 포기해야만 했다. 17, 18, 19군단이 전멸하고 독수리 깃발을 빼앗긴다.
7) 바루스의 재앙: 클라데스 바리아나. 토이토부르크 전투를 의미한다.
8) 팔루다멘툼: 갑옷 위에 걸치는 망토.
9) 막시무스: ‘가장 위대한’이라는 뜻. ‘막시무스’는 게르마니쿠스처럼 정식 호칭일 때도 있고 성씨인 경우도 있는데 아케론의 경우 성씨이다.
10) 벡실라리움: 군단기를 뜻한다.
11) 임페라토르: 행정권을 포함한 군 통수권을 지닌 자를 뜻한다. 공화정 시대에는 임페라토르가 특별한 장군을 뜻했지만 제정 시대에는 황제만이 겸임할 수 있는 직위로 바뀌었다. 옥타비아누스(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로 군림하면서 전체 군단의 임페라토르가 되고, 그 직위를 후손들에게 물려준 것이다. 다만 본작에서 황제가 아닌 자도 임페라토르가 될 수 있다.
12) 파트로누스와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결코 주인과 노예가 아니오: 후원자와 피후원자의 관계는 쌍무적이었다. 차라리 양자제도와 엇비슷할 만치 서로 간의 의무가 확실하다.
13) 임페리움의 주인: 임페라토르를 뜻한다.
14) 임페리움: 군 통수권자가 소지한 전권을 의미한다.
15) 우티스: 오디세우스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무스를 만날 때 댄 가명. ‘아무것도 아닌 자’라는 뜻이다.
16) 알렉산드리아: 고대 최대의 도서관이었던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이 자리한 이집트의 대도시. 로마의 뒤를 이은 제2의 도시였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건축을 명했다.
17)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토이토부르크 전투의 복수를 이행한 명장. 본작의 아케론과는 다른 인물이다.
18) 누구야? 우티스가 도대체 누구야!: 오디세우스가 폴리페무스의 눈을 찌르고 달아나고, 화가 난 폴리페무스는 ‘아무것도 아닌 자’가 나를 찔렀다, 라 말을 한다. 그에 폴리페무스의 동료들은 ‘아무것도 아닌 자’가 너를 찔렀다면 신벌이라 말을 하고 그의 말을 심드렁히 흘려넘긴다. 위의 대사는 어리둥절해하는 키클롭스가 내뱉었던 말이다.
19) 섹스투스는 황제였지만, 가이우스는 다음 대 황위 계승자가 아니었다: 초기 제정 로마의 황위 계승법은 초대 황제가 친척 중 한 명을 후계자로 지목하는 방식이었는데 대개 혈통을 따졌으나 능력도 고려하기 했다. 즉 장자상속제가 아니었다. 이에 황제 중 몇몇은 제 미성년자인 직계 혈손을 차차기 황제로 유언장에 지목하고 차기 황제로 능력 있는 친인척을 세우기도 했다.
20) 네로와 브리타니쿠스의 사례: 브리타니쿠스는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아들이었는데, 유언장으로 황제의 양아들인 네로와 함께 제국의 상속인으로 지목이 되었다. 네로 황제는 로쿠스타를 이용하여 정통성이 확실한 브리타니쿠스를 암살을 했다.
21)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술을 받을 겁니다: 로마에서는 수술이 일상적으로 행해졌다. 기록상으로 백내장 수술, 개복 수술, 암 수술, 흉터 제거 수술 등등이 행해졌다.
22) 제1시민: 프린켑스, 황제를 뜻함.
23) 발레리우스라 불러: 로마인의 이름은 프라이노멘(이름)/노멘(씨족명)/코그노멘(분파)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들은 보통 노멘과 코그노멘으로 불리지만 가정 내에서는 프라이노멘에서 따온 별명으로 불린다.
24) 아이깁토스: 이집트.
25) 눈 가리고 아웅 격으로 장관을 보냈는데: 이집트는 황제 직할령이라 장관을 보내고, 속주는 총독을 보낸다. 본작에서 이집트는 황제 직할령에서 속주로 변경이 된 상태라 총독을 보낸다.
26) 그렇게는 한 번도 불린 적 없었지: 보통 가정 내에서는 프라이노멘으로 불려야 하지만 아케론의 아버지는 엄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아케론을 군인처럼 대하며 ‘발레리우스’라는 노멘으로 불렀다.
27) 명예로운 경력: 로마 시민이 공직에 진출하기 위해 밟아야만 하는 코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