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1/13)

“모든 게 카이사르에게 이득인 방향이었습니다.”

황제에게 웃음을 안긴 답안이었다.

“그래, 네 글은 내게 이득을 안겼지. 실제로 로마의 문인들은 우티스가 어용 문인이라 의심하고 있더구나. 나야말로 그의 정체를 궁금해했는데.”

그러곤 황제는 잠시간 상념에 잠겼다.

그래, 그렇다.

그는 우티스의 정체를 진정으로 궁금해했다.

누가 이 글을 썼는가?

누가 이 혼을 뽑아 잉크에 녹여낸 글을 썼는가?

도대체 누가?

“그래, 네 문체는 실로 아름다웠지……. 아니, 그건 아름다운 게 아니었어. 그냥 아름다운 게 아니라….”

홀린 듯한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었다.

“네 글에는 네 생명이 묻어나 있었다.”

황제가 살짝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청명하게 빛나는 푸른 눈이 루키우스를 담았다.

“그건 모든 것을 쏟아 바쳐야만 나올 수 있는 글이었어.”

루키우스는 묵묵히 말을 들을 뿐이었다.

감탄이 이어져 나갔다.

“네 작품이 로마를 울렸을 때 나를 비롯한 만인이 충격을 받았다. 피를 토해 내는 듯한 음성이 귓가에 울리는 듯했다. 영웅의 혼이 네 글에 있었다. 로마의 천 년 역사가 네 글에서 살아 움직였어. 사람들은 네 글에서 위로를 받았고 동시에 압도를 당했지. 또한 네 정체를 궁금해했다.”

그 순간 황제는 새파란 두 눈을 반짝거리며 조용히 읊조렸다.

“도대체 우티스가 누구야?”

루키우스는 그 대목에 이르러서야 입술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닌 자.”

황제는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나 그의 정체는 오디세우스지.”

루키우스는 장난스럽게 되물었다.

“제가 오디세우스 같은 영웅 같나요?”

황제는 망설임 없이 답변했다.

“그래, 너는 영웅이야.”

루키우스가 몸을 멈칫하던 그 순간이었다.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로마의 반인반신, 지엄한 황제가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부여잡았다.

루키우스의 몸이 흠칫거렸다.

황제는 따스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낮게 울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너를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널 아르카디우스 풀케르의 차자로 보았지. 몸이 약해서 입양조차 가지 못하는 불쌍한 아이. 그리고 두 번째 만났을 때는… 솔직히 말하자면 널 미워했다.”

루키우스는 그 말에 상처를 입지 않았다.

“당신의 미움을 이해합니다.”

조용한 목소리.

그에 황제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정적은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었다. 일그러지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기나긴 침묵을 지켰다. 그는 이것이 쉽사리 입에 담을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이해했다.

기나긴 침묵 끝에 잠긴 목소리가 흘렀다.

“포스투무스.”

그것은 황제가 루키우스를 미워한 원인이었다.

루키우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포스투무스는 좋은 형이었으나 그의 아집은 루키우스에게 있어서 큰 독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황제의 권한인 임페리움을 사령관에게 허하고 개선식을 연 것은 포스투무스를 위한 게 아니었다.”

황제의 눈에는 불꽃이 들끓고 있었다.

“나는 그를 위해서 공직자 임용의 나이 하한선을 푼 게 아니지. 게르마니쿠스를 위해서도 아니야.”

황제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칭호 중 하나는 임페라토르.

로마 제국의 모든 군대의 임페리움은 황제의 것이었다.

모든 사령관들은 황제를 대리해서 전쟁을 나서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령관의 권한은 공화국의 그것만큼 크지 않았다. 임페라토르가 아니기에 개선식을 치를 수도 없었고, 그들의 공은 오로지 황제의 것이 되었다.

“모든 건 내 아들 가이우스를 위한 거였어.”

그러나 황제는 스스로가 가진 임페라토르의 권한을 나누었다.

그것은 그의 장남인 가이우스를 위한 안배였다.

황제가 충혈된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적통이 아니었다. 모계를 통해 피를 물려받은 그는 입양되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와 선대 황제인 그의 형은 징검다리 황제였다. 섹스투스는 황제였지만, 가이우스는 다음 대 황위 계승자가 아니었다.19)

선선선대 황제는 유언장으로 그의 손자인 도미티우스를 다다음대 황위 계승자로 지목을 했다. 원래라면 섹스투스가 아닌 도미티우스가 황제가 되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섹스투스의 형이자 선대 황제가 도미티우스가 성인이 되기 전에 근위대에 시해당했고, 그에 또다시 징검다리 황제가 세워졌던 것이다.

그게 현재의 황제, 섹스투스였다.

이를 악물며 그가 말을 내뱉었다.

“하다못해 가이우스가 멍청하다면…….”

감정이 꾸역꾸역 억눌린 말이었다.

“도미티우스가 뛰어나다면 억울하지는 않겠지. 가이우스는 모든 면에서 그놈에 비해 뛰어나. 허나 그놈은 그 잘난 혈통만으로 내 아들을 제쳤다.”

황제가 형형한 눈을 빛내며 물었다.

“너는 네로와 브리타니쿠스의 사례20)를 알겠지?”

루키우스가 조용히 답변을 했다.

“그건 반대의 경우가 아닙니까?”

황제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단호하게 말을 내뱉었다.

“아니, 서로 정적이란 점에서는 똑같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문을 열었다. 상쾌한 바람이 들어왔다. 루키우스는 그의 등이 떨리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그가 잠시간 상념했다.

황제는 자식인 가이우스가 개선식을 치러 명예와 권위를 얻길 바랐다. 그리하여 그가 후에 도미티우스를 제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렇게 스스로의 출혈을 감수한 결과물은 그러나 별로 좋지 않았다.

루키우스의 눈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황제는 제 아들인 가이우스에게 임페리움을 주었다.

그러나 불운한 것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황제의 재목이었던 가이우스가 군재만은 가지지 못했다는 것이었다.

이윽고 잠긴 목소리가 흘렀다.

“그 일로 게르마니쿠스와 포스투무스가 뜻밖에도 수혜를 입을 줄은 몰랐지. 물론 내 바보 같은 아들의 탓이 크지만….”

가이우스는 라인 강 전선에서 패배하고 전사했다.

그것은 황제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정적을 깨고 그가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당신께서 한번 행동하실 때 그 일이 불러일으킬 파장에 대해서도 생각하셔야 했습니다.”

그 말에 황제는 시간을 두고 답변했다.

“그래, 알고 있어.”

갈라지고 메마른 목소리였다.

“알고 있다.”

황제가 고개를 돌렸다.

깊게 가라앉은 푸른 눈이 루키우스를 담았다. 조용한 말이 흘렀다.

“나는 게르마니쿠스의 득세를 원망하지 않아. 내가 가이우스를 위해 해 놓았던 장치가 그를 젊은 영웅으로 만들었지. 그러나 그것을 보고 나는 슬퍼하였으나 내 행동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를 견제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

냉소와 함께 그가 말했다.

“하지만 포스투무스는 다르지.”

루키우스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황제는 가시 박힌 목소리를 흘렸다.

“그는 정치 군인이야.”

빈정거리는 말이었다.

“지금 그는 뭘 하고 있지?”

루키우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개선식을 받고 싶어 하는 겁니다.”

그건 황제 또한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유명한 일이었다. 황제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루키우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형은 개선식을 이루고자 하는 이유로 저를 들먹이고 있어요. 하지만 그건 진심이 아닙니다. 그는 야망이 넘치는 사내입니다. 저와 다르지요. 어떻게 보면 진정한 로마인이 아니겠습니까?”

황제가 조용히 덧붙였다.

“그는 위험하지.”

루키우스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 말에 부정할 수 없다.

포스투무스는 개선식을 받기 위해 너무나도 깊숙하게 정치에 개입을 했다. 황제를 압박하고 원로원을 움직이려 들었다. 그 움직임은 지나쳤다.

루키우스의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포스투무스의 앞길은 두 가지 중 하나였다.

비상하거나, 혹은 몰락하거나.

‘그리고 그건 포르투나 여신의 영역이지.’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포스투무스가 당신의 최대의 적인 것을 압니다. 정치 군인에게 형과 조카를 시해당한 원한 또한. 당신이 저를 탐탁지 않아 하는 것을 이해합니다. 객관적으로 보았을 때, 포스투무스 형은 임페리움을 지나치게 휘둘렀지요. 제가 생각해도 제 형은 당신에게 증오스러운 존재일 터입니다.”

“…….”

“그런데 그런 자의 동생인 제가 지금 카이사르의 앞에 있군요. 게다가 이곳은 로마의 황궁의 침실이고.”

루키우스의 눈이 황제를 담았다. 차분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마음속에 진정으로 담아 두신 바를 묻습니다.”

황제는 그 시선을 잠시간 마주치다가 이윽고 입술을 열었다.

“루키우스.”

느릿하고, 선명하게 흐른 말이었다.

“내가 네게 묻겠다.”

황제의 푸른 눈이 반짝거렸다.

“네가 원하는 바가 뭐냐?”

루키우스가 침묵했다.

“너는 포스투무스를 공격했다. 네 일족의 자랑이라는 그 사내를 네 손으로 무너트렸어.”

“객관적인 사실을 서술했을 뿐입니다. 제 사료를 보면 아시겠지만, 저는 게르마니쿠스에게도 비판적인 말을 써놓았습니다.”

“그렇지. 하지만 수혜를 입은 건 게르마니쿠스이지.”

“애초에 그는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었으니까요. 균형이 맞춰진 거지요.”

자꾸만 발을 빼는 루키우스에 황제는 미간을 좁히며 불만을 드러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는 1편의 영웅을 로마의 건국 시조로 넣고, 2편의 영웅으로 푸블리쿨라를 넣었더구나.”

루키우스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눈알을 굴리는 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황제는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블리쿨라는 발레리우스 씨족 출신의 오래된 영웅이 아니더냐. 숭고한 영웅의 이름을 일렬로 넣어놓고 고맙게도 내 이름을 마지막에서 두 번째에 넣어주었어. 그리고 마지막을 게르마니쿠스로 장식했지.”

황제는 입술 끝을 비틀며 말을 내뱉었다.

“내 권위를 높이고, 내가 게르마니쿠스를 보호하게끔 조장했지…. 이 맹랑한 것아. 내가 너를 이용하여 선전했으니 나는 우티스의 숙명 영웅전을 보호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때 루키우스가 애처로운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을 내뱉었다.

“보호해 주세요.”

황제의 입술이 딱 다물린 순간이었다.

그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루키우스가 슬픈 눈으로 그를 보았다.

침묵 끝에 황제가 고개를 절레 젓고 무어라 말을 중얼거렸다. 루키우스는 그런 그를 빤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으음, 일단 이 말부터 하자.”

한숨과 함께 말이 흘렀다.

“말을 돌리지 말고. 나는 네 행동의 목적을 물었어. 그를 구하고 싶었나? 왜지?”

날카로운 시선이 그 때 루키우스를 쓸었다.

루키우스가 의연히 시선을 받았다. 그는 게으른 나귀와 같은 목소리로 웅얼 말을 내뱉었다.

“아뇨, 저는….”

뜸을 들이며, 망설이다가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저는 정의가 이루어지길 바란 겁니다.”

숱이 많은 금색 속눈썹이 아래로 내리깔린 채였다

황제는 그런 그의 얼굴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나긋한 말이 이어졌다.

“로마의 영웅이 부당하게 스러지는 걸 원치 않았습니다.”

루키우스는 황제의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잇고 있었다.

“말했지만 저는 포스투무스에게도 그 나름대로의 정의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저는 그보다는 게르마니쿠스에게 동감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들께서도 그리 생각하는지는 미지수이지요. 그들께서 심판을 하시길 바랍니다.”

“…….”

“모든 건 포르투나, 운명의 여신의 뜻대로.”

말을 끝낸 루키우스가 고개를 살짝 들어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루키우스가 불안이 스며든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왜 그러십니까?”

황제는 침묵 끝에 나직이 말을 내뱉었다.

“다시 묻겠어.”

루키우스가 문득 숨을 들이켰다. 그는 반쯤 몸을 일으킨 자세를 다시 정돈해야만 했다. 눈앞에 자리한 이가 카이사르란 것을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그를 향한 짙은 시선이 떨어졌다.

침묵 끝에 짤막한 말이 내려앉았다.

“그게 끝인가?”

황제는 루키우스의 손을 부여잡고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이건 중요한 문제야. 네가 게르마니쿠스를 구하려 함이 정녕 그 이유가 맞나?”

루키우스가 창백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진정 원하는 게 그것뿐이었어?”

고요한 푸른 눈은 마치 영혼을 꿰뚫는 것 같았다.

루키우스는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푸르스름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예, 저는….”

답변을 하려 했다.

‘저는 일족의 불명예를 수치스러워하여, 정의를 바로 세우고자 했습니다.’

‘포스투무스가 저지른 잘못을 수습하려 했습니다.’

‘로마의 영웅이 제 헌신의 대가를 찾을 수 있도록 하려 했습니다.’

무수히 많은 변명들이 있었다.

‘왜지?’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 말들을 입술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왜 입술이 안 떨어지는 거지?’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는 그의 귓가에 그 순간 과거 어느 날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저 애는 세상에 살아가기 위한 그 어느 사유도 없이 태어났습니다.’

황제가 의아한 얼굴로 되물었다.

“루키우스?”

그의 손아귀에 있는 루키우스의 손이 뻣뻣이 굳어져 있었다.

얼어붙어, 입술을 작게 벌린 채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얼굴은 마치 다음 날 숨이 넘어갈 병자처럼 창백했다.

황제가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루키우스.”

루키우스의 입술이 서서히 다물렸다.

‘사람으로 살아가기에는 부적격한 아이예요.’

그의 얼굴이 다시금 차분함으로 물들어갔다.

‘사명이 없는 자는 로마인이 될 수 없다…….’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루키우스가 황제를 바라보았다.

반인반신이라 불리는 자.

로마 그 자체라 불려도 다를 바 없는 조국의 대표.

그를 바라보며, 루키우스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사실 아닙니다.”

지금 그가 로마와 마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리하여 루키우스는 차분히 마음을 정돈했다. 마음속에 담긴 말들을 고르고 골랐다.

‘그렇다면 나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지.’

애증의 조국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까?

반평생을 바쳐 온 인생의 목표가 무엇인지 생각을 해야 했다.

‘나는 그를 위해 살아왔다 생각했어.’

아케론을 위해서.

게르마니쿠스를 위해서 이 일을 벌였다 해야 할까?

루키우스는 그러나 그리 말을 하지 않았다.

차분히 마음을 고르던 와중에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의식이 다다른 것이었다.

‘나는.’

진정한 제 마음을 이 순간 깨닫고 있었다.

‘그를 위해서 살아온 게 아니다.’

그것은 불쑥 모습을 드러낸 깨달음이었다.

‘나는 오로지 나 자신의 증명을 위해 살아왔다.’

루키우스가 빙긋 웃었다.

‘나를 위해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것 같았다.

저는 어느 거룩한 희생정신 때문에 이 길을 걷는 게 아니었다. 진즉 죽을 몸뚱이를 이끌고 그 먼 이스카리아 섬을 방문한 게 아니었다.

그런 거룩한 마음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저는 사투를 벌였습니다.”

황제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뭐라고?”

루키우스는 그때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마치 꿈에 취한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게르마니쿠스를 사랑합니다.”

황제는 그 말에 한참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얘가 뭐라는 거지?’

정으로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그가 얼음이 된 채 한참을 침묵을 했다.

“뭐, 뭐라고?”

그는 결국에 말을 더듬을 수밖에 없었다.

푸르죽죽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키우스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를 사랑하기에, 사랑하는 자를 위해 헌신합니다.”

담담한 목소리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

“그의 운명과 사투를 벌입니다. 그를 위해서 로마를 바꾸었습니다. 역사를 뒤집었습니다.”

얼이 나간 황제의 얼굴이 루키우스의 침착한 목소리에 서서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흔들리는 황제의 두 눈과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준 선명한 말을 또박또박하게 내뱉었다.

“이 투쟁으로 내 존재의 이유를 증명할 겁니다.”

그래, 그것이 이유다.

후련함을 느끼며 루키우스가 싱긋 웃었다.

“나는 오로지 나를 위해서 이 길을 밟아왔습니다. 저는 저를 증명하고 싶었습니다.”

황제는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오로지 나 자신의 증명을 위해.”

그 말을 끝으로 루키우스는 입술을 꼭 다물고 말을 내뱉지 않았다.

황제는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천진난만한 얼굴로 짙은 속눈썹을 깜빡거리는 순진한 어린 양 같은 청년의 얼굴과 마주하고 그가 허탈하게 웃었다.

“그래.”

황제는 한숨을 푹 내뱉으며 중얼거렸다.

“그렇군.”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제기랄, 욕설을 내뱉는 황제를 루키우스가 동그랗게 뜬 눈으로 바라보았다. 황제는 웃음기를 머금은 목소리로 그의 의문을 풀어 주었다.

“이 자리에 오르면 별게 다 걱정이 된다. 이제 네 순수함을 알았어. 더 이상 이 일로 널 추궁하지 않으마. 그렇다면 이젠 다른 일을 해야겠지?”

마지막 말에 이르러 황제는 익살맞은 미소를 짓고 박수를 짝 쳤다.

“자, 루키우스! 너무 분위기가 무거워졌어.”

루키우스가 얼이 나가 그를 바라보았다.

당황해하는 시선을 앞에 두고 황제는 씩 웃음을 터뜨렸다.

“사실 오늘은 이런 우중충한 이야기를 하는 것보다는 술을 마시고 떠드는 게 낫다. 네 말을 들으니 특히나 그렇게 생각되는군.”

그러곤 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말을 이어나갔다.

“따라와라, 루키우스. 원래라면 지금도 몸을 움직이면 안 되는 상태긴 하지만, 내가 너라면 반드시 그 장면을 보고 싶어 할 거야. 놓친다면 두고두고 후회하겠지. 명심하거라. 내가 네게 호의를 베푼 거야. 그래서 네가 한을 남기지 않도록 배려한 거야. 너는 이 사실을 평생토록 고마워해야 해.”

루키우스가 멍한 목소리를 흘렸다.

“저 외람되오만… 무슨 말씀이신지?”

황제가 ‘응?’ 소리를 냈다. 그는 얼떨떨한 루키우스의 얼굴을 마주하고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닫고 아, 탄식했다.

설명하려 입술을 벙긋거린 그는 그러나 이윽고 고개를 홰홰 저었다.

그러곤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런, 내가 가장 중요한 일을 설명을 안 해줬군. 그렇다면 이건 네 두 눈으로 직접 보는 게 나을 게다. 일단 일어나. 우리가 함께 가야 할 곳이 있다, 루키우스.”

루키우스의 눈을 크게 뜨게 한 말이었다.

“네가 살린 사내를 보러 가야지. 게르마니쿠스 말이다.”

그 말을 끝으로 황제는 홱 몸을 돌렸다.

빠르게 방 밖을 향하는 황제를 멍하니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정신을 차리고 비명을 지르며 침상 아래로 쿠당탕 내려갔다.

“카이사르! 카이사르! 잠, 잠시만….”

황제는 몹시 성격이 급했다.

“저, 송구합니다만!”

“그래, 그래. 괜찮아.”

황제는 복도를 성큼성큼 걸었고 루키우스는 그를 따라가기 위해서 발걸음을 바쁘게 놀려야만 했다.

“그래서, 카이사르.”

턱 끝에 치밀어 오른 숨을 다스리며 루키우스가 입술을 열었다.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

가빠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간신히 내뱉은 말을, 카이사르는 너무나도 가볍고 여유로운 태도로 받았다.

“그는 마땅히 있어야 할 곳에 있다.”

“마땅히 있어야 할 곳…?”

“심판대 위에 있지.”

“뭐라고요?”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고 발밑이 꺼지는 느낌을 받은 루키우스가 경악하여 카이사르의 옷깃을 잡아당겼다.

“카이사르!”

그러나 황제는 몹시도 여유로웠다. 부드럽게 제 옷깃을 잡아챈 손을 거머쥐어 떼어낸 황제가 아차 한 루키우스의 어깨를 툭툭 건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들은 너무나도 복잡하게 얽혀 있고. 나는 황제이기 때문에 더욱 신중해야 한다.”

발걸음은 변함없이 빨랐다.

“몹시 고민을 했어.”

복도가 끝나 황궁의 문 앞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두 개의 가마가 비치되어 있었다. 보라색 커튼을 걷으며 카이사르는 가마 위에 올랐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루키우스는 망설이다가 준비된 다른 가마 위에 올랐다.

그는 주춤거리다가 결국 포기하고 쿠션에 몸을 기댔다.

그때였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듯하구나.”

루키우스가 고개를 돌려 제 옆에 선 가마를 바라보았다.

카이사르는 느긋하게 몸을 누인 채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신에게 일을 맡길 차례다.”

두 개의 가마가 도착한 장소에서 루키우스는 카이사르가 발걸음을 바삐 재촉한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콜로세움이었다.

*

쨍한 햇살이 사내의 그을린 이마를 스쳤다. 초가을의 햇살이 제법 따스하다. 무표정한 얼굴로 하늘을 바라보던 고동색 머리의 사내가 고개를 다시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함성이 콜로세움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포스투무스! 포스투무스!”

“게르마니쿠스!!”

그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황제가 얼마나 교활하고 똑똑한지 실감을 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해결을 보려 하다니.

재주를 부리는 건 곰이고 이득을 얻는 건 그 주인이 아닐 수가 없다.

환호성 사이로 담담한 말이 흘렀다.

“어쩌다 보니 기예단의 춤추는 원숭이가 되어 버렸어. 유감이야, 포스투무스.”

흑발의 사내는 진지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직한 말이 흘렀다.

“장군.”

아케론은 그 말에 정색을 했다.

“아니, 너는 그렇게 부르지 마.”

포스투무스는 얼떨떨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요?”

아케론은 그의 말이 몹시 불편했다. 진지한 얼굴로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아케론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넌 징그러워.”

포스투무스는 그 말에 팍 인상을 구기며 불쾌함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미친 소리를.”

아케론은 굳이 그에게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무에 있단 말인가?

사실 그건 포스투무스를 배려한 말이기도 했다.

전투 전에 루키우스가 ‘장군’ 소리로 아케론을 홀린 이야기를 듣는다면 그는 평정심을 잃고 흐트러지리라.

‘굳이 그렇게 승리를 거둘 필요는 없지.’

아케론이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정정당당하게 이 싸움을 이기고 싶었다.

“하기야 우리가 말을 할 사이도 아니지요.”

그들의 꼬인 운명을 해결하고 싶었다.

아케론은 침묵 끝에 입술을 열었다.

담담한 인사가 흘렀다.

“오랜만이구나.”

포스투무스는 그 말에 조용한 목소리로 답했다.

“오랜만입니다.”

두 사람이 검을 뽑았다.

환호성이 진해졌다.

*

루키우스는 콜로세움의 특별석에 앉았다.

바로 카이사르의 옆. 영광스러운 자리였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 사실에 대해 기뻐할 틈이 없었다. 그는 경악하여 카이사르의 보라색 토가를 잡아당기며 소리쳤다.

“이런….”

눈앞이 까마득하다. 아찔함에 시야가 흐릿해지고 입이 콱 막혔다. 입술을 벙긋거리며 잠시간 말을 내뱉지 못하던 루키우스가 억눌린 숨과 함께 말을 토해 냈다.

“이런 방식을 예상하지 않았어요.”

우와아아!

사람들의 함성이 고막을 때렸다.

콜로세움의 한가운데, 무대에는 두 사내가 검을 든 채 서로를 마주하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아, 아…!”

부드러운 뺨을 손으로 거머쥐며 절망하는 루키우스를 카이사르는 지그시 바라보다가 말을 내뱉었다.

“마시거라.”

그가 포도주잔을 거머쥐고 있던 손을 내밀었다. 루키우스가 숨을 헐떡거리며 그것을 받아들였다.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니 조금 몸에 기운이 돌았다. 가쁜 숨을 진정시킨 루키우스가 이내 이를 악물며 말을 내뱉었다.

“저는….”

아스라한 숨결과 함께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저는 이 일을 여론에 따라 해결할 거라 생각했습니다.”

루키우스가 당긴 것은 불씨다.

그 너머의 일은 사람들이 결정할 것이리라.

저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으니 이제는 그의 손에, 운명의 여신의 손에 나머지를 맡겨야지.

그래서 포르투나 여신의 손에 맡긴다고 한 것이다.

아케론이 어떻게 제게 주어진 불명예를 벗어던질지는 그의 몫이었다.

“이, 이런 방법으로?”

그러나 루키우스는 이런 무식한 방법을 생각하지 않았다.

울먹거리며 그가 말을 내뱉었다.

“당신이 투표를 할 것을 예상했습니다. 아니면 원로원에서 이 일을 논의하는 걸. 아니면 법정을 열거나….”

그는 차마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가쁘게 숨을 내뱉은 루키우스가 이윽고 날카로운 목소리를 흘렸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입니까!”

그는 더 이상 떨지 않았다.

루키우스는 강력한 항의의 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던 것이다.

눈매를 매섭게 치켜뜬 그를 향해 황제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는 또다시 느물거리며 말을 흘리려 했으나, 루키우스의 이글거리는 시선에 결국 굴복하고야 말았다.

황제의 얼굴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포스투무스가 죄를 저지른 건 사실이지.”

그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가 절대로 용서받지 못할 대죄를 저질렀느냐. 심정적으로 이해를 하지 못할 정도였냐면… 그건 아니지.”

진지한 얼굴에 울화를 터뜨리던 루키우스가 멈칫하고 귀를 기울였다.

콜로세움의 무대에 선 이들.

원을 그리며 무대를 돌며 서로를 향해 각을 세우는 두 사내를 지그시 바라보며 황제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게다가 나는 포스투무스를 평소에 견제하고 있었으니 더욱 손을 쓰기 애매했다. 우티스가 어용문인이라는 혐의도 있고. 하여간 나는 내 사감과 다르게 한쪽의 편을 들 수 없어. 그렇다면 나는 이 일을 조금 더… 교활하게 처리할 필요가 있었지.”

황제가 조용히 웃었다.

이건 그의 최상의 방법이었다.

검투 경기는 신께 바치는 제의. 에르투리아 때부터 이어진 로마의 전통이다.

사람들이 그것에 열광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치를 따져도, 민심이 반으로 갈라진 일을 신에게 맡긴다는 명분이 타당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황제가 얻은 이득이었다.

루키우스가 가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앉아서 비난은 피하고 이득만을 얻으시겠다는 거군요. 이 어리고 나약한 소년은 모든 것을 바쳤는데. 위대한 아우구스투스다우십니다.”

그가 카이사르를 대하는 방식은 지나치게 무례했으나, 황제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가 말했다.

“뭐 네가 우티스란 것을 밝힐 수도 없잖느냐. 나는 오해받기 싫어.”

루키우스가 답했다.

“밝히십시오.”

그 말에 황제는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조용히 저었다. 울컥한 루키우스가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황제는 입술을 열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야.”

그러곤 사내는 고개를 돌려 콜로세움의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발걸음을 떼는 포스투무스.

그에 진해지는 환호성.

깜짝 놀란 루키우스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금발이 흐드러져 새하얀 병자의 얼굴을 가렸다.

황제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루키우스.”

가라앉은 눈이 무대를 지그시 응시했다.

“나는 네가 우티스라는 것을 캐내면서 너에 대한 다른 많은 것들을 알아냈다.”

이어진 말에 루키우스는 눈을 크게 뜰 수밖에 없었다.

“로도스 섬.”

무대 위를 다급히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았다. 황제가 루키우스를 응시했다.

시선이 교환하고,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떨리는 숨이 흘렀다.

그러곤 그는 눈을 감았다.

황제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넌 지금 안정을 취할 때지 않느냐. 아가.”

카이사르는 정말로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

와아아! 함성이 거세졌다.

포스투무스의 검이 아케론을 향해 뻗어져 갔다.

그의 인내심이 먼저 한계에 다다랐던 것이다.

아케론의 허벅지를 노리고 위에서 아래로 뻗어져 나간 검은 그그극 소리를 내며 쇠의 표면을 긁었다.

아케론의 검이 허리 아래 사선으로 뻗어져 있었다.

포스투무스의 팔뚝이 굵어지고, 검과 검을 마주 댄 대치가 이어졌다.

힘을 겨루는 싸움의 승자는 아케론이었다.

채앵, 소리가 흘렀다.

지진이 난 것처럼 떨리던 포스투무스의 검이 아케론의 검을 훑어 내리며 회전을 했다. 힘겨루기를 끝내고 반동에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 포스투무스가 헛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무식한 힘이군요.”

아케론은 포스투무스가 튕겨낸 검의 반동을 빠르게 다스렸다. 검 끝이 포스투무스로 향했다.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가며 아케론이 언성을 높였다.

“네가 약한 거다!”

*

루키우스가 한숨을 내뱉었다.

“알고 계셨군요.”

“내가 말했지 않느냐? 나는 카이사르라고.”

그는 농담을 하듯 말을 내뱉었다.

“내 저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구나.”

루키우스는 시큰둥하게 답했다.

“7년을 속였으니 더 속일 수 있다 생각을 했지요.”

“이런, 이제는 네 자신만만함이 끝났어.”

황제는 고개를 절레 젓다가 이내 얼굴에 장난기를 거두었다. 진중한 시선이 루키우스에게 향했다. 루키우스는 지긋한 시선을 묵묵히 받았다.

황제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네 몸이 좋지 않은 걸 알지.”

나지막한 목소리를 열었다.

“로도스 섬의 아스클레피오스 밀교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어. 정기적으로 이스카리아 섬을 방문하여 널 진찰하는 게 아니냐.”

루키우스는 눈을 감았다.

조용한 목소리가 흘렀다.

“제 몸에 종양이 자라고 있다 합니다.”

쓴웃음과 함께 흐른 말이었다.

“약물로 죽이고 있으나 더 이상은 그걸로는 손을 쓰기가 힘이 든다 하더군요, 카이사르.”

황제의 얼굴에 희미한 균열이 서렸다. 루키우스는 스륵 눈을 떠 자수정을 닮은 자안으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조용한 말이 흘렀다.

“10년입니다. 남은 제 세월이.”

황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까가강!

검과 검이 부딪쳐 불꽃을 튀겼다.

시선과 시선이 마주했다.

숨결이 섞이는 거리에서 두 사내는 서로 검을 마주 댄 채 서로를 노려보고 있었다.

헐떡거리는 숨과 함께 말이 흘렀다.

“그날의 일을 후회합니다.”

이를 악문 포스투무스가 힘을 주어 검을 왼쪽 허리 아래로 내렸다. 돌아가는 검을 힘으로 부여잡으려던 아케론이 결국 회전하는 검에 이끌려 검로를 틀었다.

“만약 지금 제가 그날로 돌아간다면 저는 어린 제 머리를 후려갈겨서라도 말렸을 겁니다.”

허리 아래로 딸려 나간 아케론의 검이 문득 포스투무스의 허리를 노렸다. 다급히 검을 틀어 날카로운 면으로 아케론의 검을 막은 포스투무스가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언성을 높여 말을 했다.

“아직도 당신의 말을 공감하지는 않지만 당신을 축출해 내는 과정은 비열했고, 저는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끼기긱, 검날의 날카로운 면이 긁혀 소름 끼치는 소리를 흘린다.

“허나 그때의 저는 그 길이 옳다 여겼습니다.”

포스투무스의 다른 한 손이 아케론의 두꺼운 팔을 부여잡고 있었다.

아케론은 시리도록 푸른 눈을 번뜩 빛내며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럼 제가 책임지는 겁니다.”

눈과 눈을 마주하며 포스투무스가 격렬히 소리쳤다.

“오로지 저만이 책임져야 할 일입니다!”

까강!

날카로운 소리가 흐르고 포스투무스의 검이 빠르게 회전했다.

*

우와와!

군중들의 함성을 들으며 루키우스가 무겁게 말했다.

“제가 당신께 세운 공을 인정하십니까?”

황제는 침묵 끝에 잠긴 목소리를 흘렸다.

“그래, 인정한다.”

루키우스는 그 말에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럼 저를 도와주십시오.”

황제의 그림자가 진 얼굴 위에 의아함이 스친 때였다. 루키우스는 황제를 조급함이 스며든 얼굴로 바라보며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제게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긴다면 카이사르께서 수습을 해 주세요.”

황제는 그 말에 바로 답변을 하지 않았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그는 무겁게 가라앉은 얼굴로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잔인하군.”

그러곤 내뱉은 말이었다.

“네가 애늙은이인 줄 알았는데, 아직 어려. 너는 사람의 감정을 모르는구나.”

루키우스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황제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힘을 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하지 않을 거다.”

루키우스는 침묵을 했다.

황제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말한 대로였다. 황제는 저를 도운 루키우스를 총애했기에 그가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는 것을 방관하지 않을 예정이었다.

뻔한 말이 아닌가?

죽음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도망친다.

루키우스는 시한부인 운명을 생각하여 아케론에게서 도망치려는 것이다.

그가 슬픔과 고통을 겪게 하지 않겠다는 핑계로, 연인의 마음에 비수를 꽂으려 한다.

저 호감이 가는 아이가 그런 어리석은 행동을 하도록 방관하지 않으리라.

그리 생각을 하던 황제는 그러나 문득 이상한 점을 깨닫고 몸을 멈칫했다.

얼이 나간 목소리가 흘렀다.

“왜 웃지?”

루키우스는 웃으며 답변했다.

“제가 죽음을 생각하고 있는 걸로 보이십니까.”

황제가 몸을 멈칫했다.

‘그게 아니었다고?’

당황한 그의 앞에서 루키우스는 희미한 미소를 띤 얼굴로 말을 이었다.

“카이사르. 저는 죽음으로써 모든 걸 해결하려는 도피자들을 가장 증오하는 사람입니다. 로마인의 자결 문화를 증오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살아갈 겁니다. 부탁드릴 말은 죽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닙니다, 카이사르.”

그 대목에 이르러 목소리는 선명해졌다.

“정확히 말하면 그 반대이지요.”

루키우스의 눈이 생기 있게 반짝 빛났다.

“로마를 떠날 겁니다.”

*

“저를 원망하고 있습니까?”

회전하는 검을 아케론이 검으로 빠르게 쳐냈다. 포스투무스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무섭게 빛나는 두 눈처럼 검은 빠르게 아케론의 급소를 공격했다.

“그래서 그 애를 더럽힌 겁니까?”

캉! 캉! 캉!

마치 대장간에서 제련을 하는 것만 같은 소리가 연속해서 퍼졌다.

포스투무스가 언성을 높였다.

“아니면 당신이 내가 알던 게르마니쿠스가 아니라 욕망을 이기지 못한 겁니까!”

흉흉한 검날이 햇볕 아래 빛났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습니다!”

휘어지는 검이 아케론의 꺾인 허리 위를 쓴다.

검날의 끝이 아케론의 흰색 튜니카를 자르고 지나간 순간 비명과 야유와 환호성이 함께 울렸다.

이를 악문 목소리가 흘렀다.

“만약에 내가 지더라도 그 애를….”

그때였다.

“너….”

아케론의 얼굴에 짜증이 물든 것은.

“왜 이리 말이 많아?”

포스투무스가 멈칫하던 그 순간에 아케론의 손에 들린 검이 폭발하는 것처럼 빠르게 솟구쳤다.

*

“알렉산드리아에서 수술을 받을 겁니다.”21)

루키우스는 무대 위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위험하다 합니다. 고통스럽다 하여, 또 제 생각이 많아 고민을 했습니다. 고통스러운 10년을 유한하게 보내느냐 희망을 가지고 운명의 여신과 도박을 하느냐.”

담담한 목소리를 얼이 나간 채 듣던 황제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아, 소리를 흘렸다. 루키우스의 눈이 반짝거리고 있었다. 포스투무스를 몰아붙이는 불타는 눈의 사내를 담은 것이었다.

삶도 죽음도 수용하려 한다.

‘다만 포기하진 않아.’

루키우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생각 끝에 마음을 정리했습니다. 살고 싶어요. 저는 최대한 노력을 할 겁니다. 건강해질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과 함께 행복을 즐길 거예요. 따사로운 지중해의 햇살을 맞으면서 바다를 수영할 거예요. 같이 해변을 걸을 겁니다. 같이 포도주를 마시고, 한 의자에서 서로 몸을 기대어 게으른 점심을 먹을 거예요.”

황제는 그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루키우스를 바라보는 얼굴에 복잡한 기색이 스쳤다가 사라졌다. 결국 입술을 다문 그의 귓가로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렇게 저는 살아서 로마로 돌아올 겁니다. 하지만 아케론에게는 제가 요양을 간다 말해 주세요. 카이사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아실 겁니다.”

황제는 그 말에 한숨을 내뱉었다.

“그는 로마를 떠나면 안 되지.”

루키우스가 어두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

“크흑!”

포스투무스가 신음을 흘렸다. 이를 악물며 저를 향해 쏟아지는 검을 간신히 막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는 모양새가 초라하다.

아케론의 눈이 깊게 가라앉아 짐승처럼 시퍼렇게 빛났다.

함성이 거세져 가고 있었다.

연격이 빨라질수록 포스투무스의 귓가에 울리는 굉음이 커져 나갔다. 창백해진 사내의 얼굴. 식은땀이 흐르는 그의 얼굴을 노려보며 아케론이 소리쳤다.

“그건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채앵!

검이 튕겨져 나갔다. 포스투무스가 검을 쳐낸 반동을 이기지 못해 바닥을 무참히 굴렀다. 신음을 흘리는 그가 흙먼지를 뒤집어쓴 채 몸을 일으켰다. 비틀거리는 그의 머리 위에 검이 쏟아졌다. 포스투무스는 재빨리 검을 움직였다.

“그리고 지금은 그걸 거론할 자리가 아니지.”

까가강!

포스투무스가 울부짖었다.

“아니! 당신은 말씀을 하셔야 합니다! 당신은 당장 내 동생을….”

아케론이 쉰 목소리를 흘렸다.

“너, 죽음을 각오한 거냐.”

포스투무스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고 푸르스름한 입술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의 얼굴에는 죽음과도 같은 정적이 흘렀다.

힘겨루기를 하는 두 사람의 검 중 하나가 무참히 떨렸다. 다른 하나는 마치 고정이라도 된 것처럼 움직임이 없었음에도.

떨리는 검은 포스투무스의 것이었다.

고정된 검은 아케론의 것이었다.

그것은 힘의 차이로 비롯된 결과물이었다.

아케론이 조용히 속삭였다.

“내게 상대가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잖나.”

두 사람의 격차는 절대적이었다.

*

“게르마니쿠스는 저를 따라가려 할 겁니다. 하지만 그건 안 돼요.”

루키우스가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로마 민중의 뜻이 반으로 갈라졌다는 소리는 로마의 반이 그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말과 같습니다.”

저녁 하늘 같은 눈이 반짝거리며 콜로세움의 무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곳에는 격렬히 검을 부딪치는 두 사내가 있었다. 땀이 배어드는 손바닥을 주먹 쥐며 루키우스가 빨라지는 숨을 삼켰다.

떨림을 삼킨 채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아케론은 아직 로마를 떠나서는 안 됩니다. 그가 마땅히 차지해야 할 명예를 되찾으려면, 또 카이사르의 입지를 위해선 그는 로마에 남아 싸워야 합니다.”

숙명 영웅전이 황제와 게르마니쿠스와 얽혔으니 게르마니쿠스의 이름 또한 황제의 이름과 얽힌다.

게르마니쿠스는 명예를 회복할 필요가 있었다.

그건 두 사람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었다.

황제가 조용히 물었다.

“그가 모든 명예와 권력을 포기하고 널 따라갈 거라 생각하는 거냐.”

그 말에 루키우스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카이사르. 저는 완벽한 극을 설계했습니다. 그러나 단 하나 사람의 마음을 재단하지 못해 실패한 겁니다. 제 극은 마지막에 무너져 내렸지요. 그리고 저는 지금 이 자리에서 콜로세움의 경기장을 바라보고 있군요.”

숨을 들이켜고 그가 고개를 돌렸다.

“모르시겠습니까, 카이사르?”

명료하게 반짝거리는 눈과 마주하며 황제는 당황을 삼켜야만 했다. 목소리는 부드럽게 사람들의 환호성 사이로 스며들었다.

“저희는 사랑을 하고 있어요.”

*

게르마니쿠스는 죽은 황자 가이우스의 시신을 수습했다.

단독으로 게르만 군에 뛰어들어 갈가리 찢겨져 나간 황자를 품에 안고 유해를 전장에서 빼냈다.

아니, 그런 걸 제외해도. 단적으로 체격만 보아도 포스투무스는 게르마니쿠스의 상대가 되지 않았다.

“나는 너를 안다, 포스투무스.”

포스투무스가 8년간 라인 강 전선에서 활약하여 사람들은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포스투무스가 역전의 용사라고 믿고 있었다.

“너는 긍지 높은 파트리키 귀족이면서 영리하고 교활한 정치가이지.”

허나 아케론은 알고 있다.

그들의 차이는 절대적이라는 것을.

두 눈이 불타올랐다.

“만약 네가 승리를 원한다면 반드시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을 거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를 죽일 수 있었다.

포스투무스가 소나기처럼 검을 연격으로 휘두를 때, 아케론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조급해하는 건 오로지 포스투무스일 뿐이었다.

“내가 아는 너라면 어떻게 여론을 만들어서라도 이 자리를 만들지 않았을 거야.”

채앵!

검에서 불꽃이 튀겼다.

동시에 포스투무스의 하늘색 눈에서도 불꽃이 화르륵 타올랐다.

노성이 흘렀다.

“나는 너를 진즉 죽일 수 있었다. 그리고 너는 그걸 알고 있었어!”

포스투무스는 신음을 흘렸다.

“닥, 닥쳐.”

그는 낭패를 겪고 있었다.

가시적인 승부의 패색 때문이 아닌 다른 부분에서 낭패를 겪고 있었다.

정신적인 부분에서 혼란을 느끼고 있었다.

포스투무스가 숨을 헐떡거렸다. 아케론은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그의 흔들리는 눈이 투영하는 흔들리는 영혼을. 그의 무너져 내리는 의지를.

일그러진 얼굴에는 그간의 고통이 묻어 있었다.

둔중하게, 느릿하지만 막을 수 없이 무거운 검으로 그를 누르며 아케론이 입술을 열었다.

“죄책감을 느끼고 있나?”

포스투무스의 몸이 잘게 떨렸다.

아케론은 그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조용히 되물었다.

“스스로가 틀렸다는 걸 깨닫고 있었던 거냐.”

포스투무스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닥치라고!”

*

“잘 알겠다.”

황제가 루키우스의 볼을 쓰다듬었다. 루키우스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눈물이 뺨을 적시고 있었다.

빙긋 웃으며 우는 루키우스의 눈물을 닦아 주며 황제는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 말을 잘 알겠어, 루키우스. 그러니 그만 울어라, 아가.”

루키우스의 눈이 스륵 뜨였다. 신비로운 자색 눈을 마주하며 황제가 느릿하게 말을 내뱉었다.

“네가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줄 알겠다. 하지만 지금은 경기에 집중을 하는 게 좋겠구나.”

조용히 속삭인 말에 루키우스는 비로소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네 운명의 상대가 승리하고 있잖니?”

그 말에 루키우스가 고개를 돌려 콜로세움의 무대를 바라보았다. 누가 보아도 낭패에 빠진 포스투무스와 무거운 중압감으로 상대를 몰아붙이는 아케론이 있었다. 루키우스의 금색 속눈썹이 잘게 떨렸다.

‘너는 내 동생이다.’

다정하게 얘기하는 포스투무스.

아버지를 대신하여 목마를 태워 주던 형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언젠가 개선식의 영광을 제게 바치겠다 말을 하던 그를 떠올렸다.

그러나 자상한 포스투무스의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들끓는 불꽃 같은 사내의 얼굴로 변했다.

‘괜찮아.’

루키우스가 숨을 헐떡거렸다.

‘난 버틸 수 있어.’

흙먼지를 뒤집어쓴 포스투무스를 바라보며, 루키우스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포르투나의 뜻대로.”

황제가 속삭였다.

“떨고 있구나.”

루키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읊조렸다.

“누구도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

악몽에 사로잡혔던 세월!

고통과 슬픔으로 얼룩졌던 8년.

아케론이 과거를 회상하며 두 눈을 빛냈다.

당장 만나면 목을 비틀어야지, 그리 몇 번이고 다짐했던 증오의 대상이 눈앞에 있다.

원수와 검을 마주 대고 있었다.

“내게 말해!”

아케론이 부르짖었다.

“후회한다고 말해….”

포스투무스의 입술 밖으로 으윽 소리가 흘렀다. 정수리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검을 힘겹게 막으며 포스투무스가 두 눈을 붉게 빛냈다.

“네가 개선식을 치르기 위해 사람을 죽였던 걸 인정해.”

검과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네가 공명심 때문에 로마를 위기로 몰아넣은 걸 인정해!”

야수의 울음과도 같은 목소리로 그는 소리쳤다.

“그렇게 내 모든 것을 앗아가 나 대신 영예를 누렸던 세월을, 네 잘못을 인정해!”

검이 검을 튕겼다.

“아니, 아니 난 후회하지 않아!”

포스투무스의 눈에 핏줄이 불거졌다. 충혈된 눈으로 사내를 노려보며 그가 소리쳤다.

“잘난 척하지 마!”

이 악문 입술 사이로 부드득 소리가 흘렀다.

잉걸불이 벌겋게 타오르는 눈을 부릅뜨며 포스투무스가 소리쳤다.

“나는 후회하지 않아! 죽기 위해 나선 것도 아니다!”

끄그극, 검과 검이 부딪쳐 끔찍한 소리를 흘렸다.

포스투무스는 숨을 헐떡거렸다.

목젖을 떨며, 고개를 들어 사내를 바라보았다.

한 글자 한 글자 억누른 목소리가 흘렀다.

“내 신념으로 널 꺾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다.”

그 말을 내뱉곤 포스투무스는 손에 쥔 검을 비틀어 아케론의 팔뚝을 베었다.

*

“아아악!”

피가 흐르는 그 순간에 경기장이 술렁거렸다.

루키우스가 충혈된 눈으로 무대 위를 바라보았다.

‘제발, 아케론, 제발…!’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유피테르와 마르스와 베누스와 포르투나에게 호소했다.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십시오.’

태양 볕에 빛나는 검날이 번뜩거리고, 눈앞을 어지럽힌다.

루키우스가 눈물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살아줘. 제발 살아서….”

마음을 읽은 듯이 아케론의 커다란 손이 포스투무스의 검날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신음이 흐른 순간 사내의 두 눈이 짐승처럼 빛났다.

“놀이는 이제 그만 하지, 포스투무스!”

*

포스투무스가 부드득 이를 악물었다. 아케론의 손아귀에 붙들린 검을 빼내기 위해 그는 그것을 비틀었으나, 검은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았다.

“으아아!”

괴성이 울리고, 엉망진창이 된 사내가 흉흉히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그렇게 나를 쉬이 죽일 수 있다면 왜 날 지금껏 죽이지 않았지?”

아케론은 들끓는 푸른 눈으로 그를 준엄하게 노려보고 있었다.

“왜 날 지금껏 베지 못했어?!”

아, 그 사람을 내려다보는 눈!

“왜 날 죽이지 못한 거야, 왜!”

그를 참지 못해 포스투무스는 소리쳤다.

그리고 그에 아케론은 격렬한 노성으로 답했다.

“그 애를 아프게 하기 싫으니까!”

그 순간 아케론이 손에 움켜쥔 검을 내던졌다. 포스투무스의 몸이 모래 바닥을 비참하게 굴렀다.

울분에 차오른 사내가 검을 경기장 바닥에 찍으며 소리쳤다.

“그 애가 더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으니까!”

바닥을 기는 포스투무스를 아케론은 충혈된 붉은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곤 말을 내뱉었다.

“망설이고 있다.”

신음과도 같은 말이었다.

“…널 어떻게 해야 하지.”

포스투무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어느새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거짓말처럼 감정을 지운 포스투무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날 죽여라.”

아케론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땅에 검을 늘어트린 채 아케론은 고요한 눈으로 포스투무스를 바라보며, 그가 검을 들기를 기다렸다.

포스투무스가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그게 우리의 꼬인 운명을 푸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가 검을 치켜들어 아케론을 겨냥했다. 아케론이 말없이 포스투무스를 응시했다.

덤덤한 말이 이어졌다.

“그래.”

투명한 푸른 눈이 햇볕 아래 밝게 반짝거렸다.

“그런가.”

*

검이 부딪쳤다.

날이 부러진 검이 바닥을 굴렀다.

포스투무스의 것이었다.

“포스-투- 무스!”

그 순간 금발의 여인이 얼굴을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아아악! 내 아들!”

특별석에서 원로원 의원 여럿이 한데 모여 심각한 얼굴로 상의를 했다.

“아르카디우스 장군이 진다 하면….”

늙은 퇴역병이 눈에 눈물을 매달고 콜로세움의 무대 위를 간절히 응시했다.

“아아, 장군! 제발….”

중년의 황제가 입술 밖으로 나지막한 신음을 흘렸다.

“게르마니쿠스….”

쓰러진 사내 위로, 하늘 위로 높게 검이 치솟고 있었다.

게르마니쿠스의 검이었다.

루키우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가 울먹거리며 웃었다.

“장군.”

눈물이 햇살 아래 반짝거렸다.

“가지세요, 내 사랑.”

차가운 불꽃 같은 눈이 번뜩였다.

포스투무스의 정수리 위로 검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

‘로마 사내가 되어라, 퀸투스 발레리우스.’

아버지는 그리 말했다.

‘모든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숙명을 타고나지.’

분홍색 입술이 달싹거렸다.

‘나약해서는 안 된다.’

돌보던 고양이 새끼를 들키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얻어맞았다.

‘로마인의 숙명은 칼처럼 강건해지는 것이다.’

작고 연약한 것이 품에 매달려 아픈 목소리를 흘렸다.

‘조국을 위해 헌신하거라.’

아케론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로마는 강인한 육신과 명석한 철인을 원한다.’

고함이 콜로세움을 가득 채웠다.

‘나는, 그런 숙명을 안고 사는, 로마인을 증오할 뿐이다!’

따사로운 햇볕 아래 검이 높게 치켜떠진 그 순간 아케론의 무표정한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그리고!

“어, 어어!”

*

챙캉!

바닥에 부딪힌 검이 부러졌다.

그것은 모두가 피를 볼 줄로만 알았던 예리한 검이었다.

“어, 어어?”

콜로세움이 술렁거렸다.

그들은 경악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저, 저게 뭐야!”

눈을 감고 평온한 얼굴로 죽음을 받아들이려던 포스투무스의 두 눈이 스륵 뜨였다.

아케론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를 좌시하는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던 포스투무스의 얼굴이 이내 서서히 일그러졌다.

“죽여.”

짓씹은 말이었다.

“네 동정심 따위 받고 싶지 않아!”

그는 악을 질렀으나 아케론은 무심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아니, 포스투무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날이 부러진 검을 든 손을 늘어트린 채 그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한 하늘이 그곳에 있다.

‘더럽힐 거야. 어머니의 로마를, 아버지의 로마를, 형의 로마를 망가트릴 거다!’

그 순간 귓가에 스치는 말에 그가 조용한 웃음을 터뜨린다.

‘로마인이 가장 혐오하는 존재가 되어. 아버지의 명예로운 씨족과 어머니의 영광스러운 가문을 더럽힐 오명이 되어서 말이지.’

그것은 모두 거짓된 말들이었다.

‘그렇게 나를 증오하는 로마를 증오하며 내 숙명을 벗어던지고, 지극히 명예롭지 않은 방식으로 죽어버리라!’

아케론이 웃으며 절레 저었다.

‘너는 내게 거짓말을 했어.’

고개를 돌린 아케론이 충혈된 눈으로 저를 노려보는 사내를 잠시간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손에 든 부러진 검을 던졌다.

챙캉!

‘너는 추악하지 않아, 루키우스.’

아케론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난 살았다.”

푸른 불꽃과 같은 눈이 밝게 타올랐다.

“그가 나보고 살라 했지.”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는 사내를 포스투무스는 불신과 경악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군나르가, 내게 살라 했어.”

조용한 미소가 흘렀다.

“그 의미를 이제야 알겠군.”

포스투무스가 창백한 얼굴로 되물었다.

“뭐라고?”

아케론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이건 지금 그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그 또한 시간이 걸렸다.

“그는 나를 어쩔 수 없이 미워한 거야. 그러면서도 기회를 준 거였어.”

“너, 너… 지금.”

“그는 현명한 자였다.”

아케론이 무심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네 목숨을 거두지 않아.”

포스투무스가 몸을 떨었다.

“아, 아니야.”

“나는 네 목숨을 거두지 않아.”

공황에 빠진 사내가 발악을 했다.

“아니, 아니… 나는!”

아케론은 차갑게 말을 끊었다.

“살아서 네 운명과 싸워라!”

그러곤 그는 몸을 돌려 성큼거리는 걸음걸이로 경기장을 가로질렀다.

저벅거리는 발걸음으로 빈 무대를 가로질러 태양 아래 섰다.

아케론의 오른팔이 쨍한 하늘 위로 높게 치켜 떠졌다.

정적이 내려앉은 고요한 콜로세움 한가운데서 그 사내가 말을 내뱉었다.

“카이사르.”

영혼을 꿰뚫는 불과 같은 눈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사내를 향했다.

월계관을 쓴 로마의 제1 시민22)이 웃으며 그를 내려다보았다.

주먹 쥔 손이 가슴을 두드리고 강렬한 말이 울렸다.

“로마.”

콜로세움이 술렁거렸다.

그때 사내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쩌렁한 목소리가 경기장을 울렸다.

“로마!”

*

이것은 로마인의 숙명에 관한 이야기다.

*

쩌렁한 고함을 끝으로 정적이 내려앉았다.

깃털이 내려앉는 소리 또한 들릴 법한 죽음 같은 적막이었다.

고요함이 길어지고, 길어질, 또 길어질 무렵이었다.

“…쿠스.”

누군가의 입술에서 흐른 말이었다.

“게르마니쿠스.”

그게 시작이었다.

함성이 울렸다.

“게르마니쿠스! 비바 게르마니쿠스!”

*

그들 중 일부는 의무에 가까운 운명을 타고난다.

*

‘이겼어.’

단상 위 루키우스가 눈물을 흘렸다.

‘네가 이겼어.’

울음을 터뜨리는 얼굴에는 환한 미소가 가득했다.

‘네가 세상에 이겼어! 우리가 이겼어.’

숙명!

그 잔인한 수레바퀴 앞에서 발버둥을 쳤다.

그러자 운명의 여신이 새하얀 손으로 그들을 건져 올렸다.

암흑 속에서 건져냈다.

“우리가 해냈어.”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흐르고 이내 가쁜 숨소리가 흘렀다.

루키우스가 흐릿한 시야를 느끼며 눈을 감았다.

색색거리는 숨이 희미하게 흘렀다.

‘아, 어머니….’

뛸 듯이 기뻐하던 황제가 그 순간 고개를 돌렸다.

“네 애인이 이겼구나.”

얼어붙은 황제의 입술이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귓가에서 웅웅 울리던 박수갈채는 희미해진다. 사내의 가슴을 웅장하게 울리던 감동은 흐려진다.

뻣뻣한 입술이 움직여 어색한 목소리를 흘렸다.

“루키우스?”

자그마한 입술에서 피를 울컥 토하며 루키우스가 몸을 무너트렸다.

비명이 비산했다.

“루키우스!”

*

숙명을 진 채 위대한 삶을 살아간다.

*

검은 부러지는 순간 영광을 되찾고, 죽었던 사내는 부활하여 환호와 갈채를 받는다.

“비바! 비바 게르마니쿠스! 비바 게르마니쿠스!!”

이름을 되찾은 게르마니쿠스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루키우스.”

그것은 어느 사랑스러운 계절에 땀을 식히는 바람을 닮은 목소리였다.

시원하고, 또 청량한 목소리.

뻗어져 나간 손을 가슴에 대며 사내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아케론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에필로그: 개인의 네체시타스>

“루키우스!”

사내가 기쁜 얼굴로 복도를 달렸다. 사랑스러운 청년이 있는 방을 향해 달려갔다.

빠르게 뛰는 심장. 솟구치는 뜨거운 피.

‘이겼어! 내가 이겼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꽃이 피어나는 마음으로 게르마니쿠스가 방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기쁜 목소리가 울렸다.

“루키우스, 내가 승리했어.”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루키우스?”

고통의 시작이었다.

*

1년 후 로마.

“으으.”

비가 추적추적하게 내렸다.

공직자들이 입는 토가 칸디다를 입은 깡마른 중년의 사내가 진흙탕을 밟았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위에 불만을 드러낸 사내의 이름은 아이밀리우스. 명문 파트리키 귀족의 일원이자 영광스러운 원로원의 일원이었다.

‘제기랄….’

그런 그가 왜 비가 오는 날 가마인 렉티카를 타지도 않고 흙탕물을 밟고 있냐 하면, 그 해답은 바로 그가 향하는 곳에 있었다.

‘하필이면 내가 이런 일을 맡았어.’

투덜거리며 향하는 장소는 바로 누군가의 저택이었다.

아이밀리우스가 현관의 문을 두드렸다.

“이보게!”

본디 이런 것은 노예가 할 일이었으나 오늘 아이밀리우스는 노예를 거동하지 않았다. ‘그’의 저택을 방문하게 된 것이 비밀로 유지되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누구십니까?”

현관의 문이 열리고 노예가 나타났다. 아이밀리우스가 조용히 말했다.

“안에 계신가?”

동문서답인 격의 답변에 노예는 딴죽을 걸지 않았다. 진지한 검은 눈을 마주하며 그는 곤란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이 일이 익숙했기 때문이었다. 그의 주인의 상태는 썩 좋지 않았고, 그에 사람들이 저택을 찾아오는 빈도수는 높아져 갔다.

“예에. 그렇긴 한데…. 들어가지 않는 걸 추천합니다.”

아이밀리우스는 한숨을 내뱉었다.

“하아.”

어둑한 그의 얼굴과 마주하고 노예는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무거운 얼굴로 손목을 돌리곤 아이밀리우스가 눈을 감았다.

그는 시간이 흘러 다시 눈을 뜨곤 침중한 목소리를 흘렸다.

“가자.”

노예는 측은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한낱 노예의 건방진 태도를 아이밀리우스는 책망하긴커녕 도리어 고마워했다. 정말로 이 일은 곤혹스러웠고, 싫고, 사실대로 말하자면 무서웠으니까.

노예가 조용히 말했다.

“따라오십시오.”

아이밀리우스는 노예의 등을 따라 도무스 안으로 들어섰다.

저택은 로마의 영웅의 것이었다. 주인이 지닌 명성답게 화려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리라. 저택은 원래 황제의 별장이었다가 그에게 하사된 것이었으니 그 주인의 무뚝뚝한 성품을 닮지 않고 화려함을 지녔던 것이다.

청색 대리석이 바닥에 깔려 있었고 야자수가 넓은 잎을 드리우고 있었다. 코끝에 스치는 이국적인 냄새를 맡으며 아이밀리우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향이 독해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달콤하고 은은하여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것이었으니.

“게르마니쿠스.”

아이밀리우스가 꾸역꾸역 화를 삼키는 까닭은 그것이 아닌 향에 스며든 냄새에 있었다.

“게르마니쿠스!”

그가 노예의 안내를 받아 빗물받이 연못 옆에 자리한 방으로 향했다.

방 가까이에서는 향이 아닌 다른 냄새가 더욱 진하게 났다.

아이밀리우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술 냄새.’

그렇다. 그것이야말로 아이밀리우스를 두렵게 만들고 또 그의 얼굴을 굳게 만들게 한 것이었던 것이다.

‘제기랄… 이거 뭔 일이라도 벌어지면.’

아이밀리우스의 얼굴에 불안이 스며들었다. 그는 남색 장막으로 가려진 방 앞에서 멈춰 서서 잠시간 망설였다.

게르마니쿠스는 요즘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로마 최고의 전사였고. 그런 그가 술에 취해 있을 때 곁에서 얼쩡대는 것은 썩 현명한 일은 아닌 것 같았다.

불길한 미래를 짤막하게 생각하던 아이밀리우스가 심호흡을 했다. 그의 얼굴에는 망설임이 서렸으나 결국 그는 선택을 했다.

‘죽거나 살거나지, 뭐!’

원망을 하려면 연차가 부족하여 잡일을 하게 된 스스로를 탓해야 할 것이다.

천막을 걷으며 아이밀리우스가 조용히 읊조렸다.

“게르마니쿠스.”

묵직한 저음이 들려왔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아이밀리우스의 얼굴을 굳게 한 말이었다.

“발레리우스23)라 불러.”

아이밀리우스가 심호흡을 했다. 심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이게 다 뭐야.”

그러곤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려 묵직한 저음의 주인의 얼굴을 응시했다.

목소리의 주인은 침대에 등을 기댄 채 바닥에 주저앉은 사내였다.

“잠이 오지 않아.”

짧은 고동색 머리. 대다수의 로마 사내처럼 짧게 자른 머리에 굵고 긴 목이 훤히 드러났다. 불에 달군 구리처럼 그을린 피부가 인상적인 사내는 마치 강철처럼 단단해 보이는 인상의 소유자였다. 눈그림자가 짙게 움푹 들어간 눈은 선명한 파란색이었으나 차갑기보다는 도리어 지나치게 뜨거워서 푸르게 보이는 불꽃과 같다.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고, 콧날이 높고 선명한 외모. 이목구비가 선명한 사내는 칼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지 않을 것만 같은, 아니 칼이 들어가지 않을 듯한 거구 장신이었다.

근육질의 두꺼운 팔을 보며 아이밀리우스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냥 돌아갈까?’

잠시간 고민했으나 그는 결국 말을 내뱉었다.

“그렇다고 술을 이따위로 마셔.”

충실하게 원로원의 뜻을 따랐다.

사내가 굵은 눈썹을 꺾었다. 그의 얼굴에 언뜻 스친 불쾌감을 애써 무시하며 아이밀리우스가 그를 향해 다가갔다.

조금의 두려움은 원로원 의원으로서의 의무감과, 결정적으로 바닥에 늘어진 술병을 마주하고 묻혔다. 침대에 다가선 아이밀리우스가 널브러진 술병을 발견하고 경악하여 말했다.

“이게 다 뭐야.”

사내는 말없이 술을 마실 뿐이었다. 꿀꺽꿀꺽 소리가 들으란 듯이 흘렀다.

“그만 마셔!”

아이밀리우스는 더 이상 참지 못해 그의 손목을 부여잡아 억지로 술병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내의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게 한 일이었다.

“완전히 폐인이 다 되었군, 게르마니쿠스!”

게르마니쿠스는 그 말에 무뚝뚝한 목소리로 답했다.

“마약보단 낫지.”

아이밀리우스가 할 말을 잃게 한 것이었다.

그래, 그렇긴 하지.

마약에 중독되어 사창가를 벗어나지 못하는 포스투무스보단 적어도 사람 구실을 갖추고 사는 그가 낫긴 하다.

적어도 게르마니쿠스는 근 1년간은 멀쩡한 듯 살았으니까. 아니, 멀쩡하다 못해 원로원 의원으로서 ‘명예로운 경력’을 충실히 다지고 있었지.

“너 정말 이럴 거냐?”

그런데 왜 갑자기 이러는 거야?

아이밀리우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요즘 들어 태만하기 그지없는, 아니 그를 넘어서서 거의 폐인에 가까운 삶을 사는 사내에게 그는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1년 전 그날, 콜로세움에 있던 로마 민중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너를 응원하지 않았을 거다. 나를 포함해서 말이지.”

빈정거리는 말에 게르마니쿠스가 들끓는 목소리를 흘렸다. ડχ

“아가리…… 닥쳐.”

아이밀리우스는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았다.

입술을 꾹 다문 사내를 게르마니쿠스가 위험하게 번뜩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낮게 깔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여긴 왜 온 거냐.”

아이밀리우스가 막혔던 숨을 터뜨렸다. 침대에 몸을 기댄 사내가 이어진 말을 묵묵히 들었다.

“공공 의료법안의 처리가 늦어지고 있다 들었어.”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러나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고 차갑게 말했다.

“네 사생활은 알지 못한다. 개인적인 고민도 알지 못하지. 하지만 이건 확실히 알아. 원로원 의원으로서 의무를 다해! 그게 적어도 그날에 너를 믿어 주고 응원한 사람들에 대한 예의다! 게르마니쿠스.”

매서운 비난의 말에 아랑곳 않고 게르마니쿠스는 묵묵히 술을 들이켤 뿐이었다.

벌컥벌컥 술을 위장에 쏟아붓는 사내의 눈이 번뜩거렸다.

허공을 노려보며 그는 끝끝내 입술을 열지 않았다.

*

1년.

1년을 참아 왔다.

*

“게르마니쿠스.”

원로원 회의장.

공직자들의 복식, 표백한 새하얀 토가를 입은 게르마니쿠스를 향해 발레리우스, 그의 사촌 동생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말했다.

“괜찮은 겁니까?”

게르마니쿠스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아이밀리우스와 달리 발레리우스는 그의 차가운 얼굴에 두려워하지 않았다.

“안색이 썩 좋지 않습니다.”

그는 그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염려의 말을 내뱉을 뿐이었다.

“좋지 않은 소문도 들고.”

잠시간 발레리우스를 바라보던 게르마니쿠스가 고개를 절레 젓고 그의 옆을 지나쳤다. 말없이 걸음을 걷는 그의 등을 발레리우스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으나 그를 잡지는 않았다.

아니, 사실 게르마니쿠스는 사람들의 앞에서는 예전과 다른 티를 별로 내지 않았다. 그는 로마 민중들 앞에서 자신이 태만 상태라는 것을 들키지 않았다. 술에 취하지 않으면 잠을 자지 못하는 폐인 상태라는 사실도, 로마의 영웅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숨기려는 원로원 의원과 황제의 눈물겨운 노력 탓에 잘 숨겨지고 있었다.

애초에 게르마니쿠스가 스스로의 변화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내였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 한 달을 제외하면 그는 모범적이고 청렴한 공직자라 신뢰를 받고 있었다.

한두 번 회의에 빠지거나 발표가 늦는다고 질책을 받을 만큼 허투루 살아오지 않은 것이다.

“다음은 우리의 친애하는 게르마니쿠스가 발표한 공공 의료법안에 대해서 논하겠….”

적어도 게르마니쿠스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원로원 의원이라는 공직자로서 빠짐이 없는 모습을 보였다.

“친애하는 원로원 의원들께 말씀을 드립니다.”

술을 마시고 밤을 새운 것도 비서관들과 법안의 기초를 짜놓은 다음에 한 일이다. 적어도 게르마니쿠스는 루키우스가 황제를 통해 남긴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반드시 돌아오겠다.

그러니 그때까지 모든 것을 되찾아라.

그 말을 따르며 1년의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오늘도 게르마니쿠스는 루키우스의 말에 따르고 있었다.

“이와 관련된 비용은 저번에 발표되었던 관세법에서 얻은 이익으로 충당할 예정입니다.”

“으음… 하기야 그때 돈을 많이 뜯기는 했지.”

원로원 회의장에서 석 달을 들여 만들어 낸 공공 의료법을 발표하고 그들을 설득시켰다. 딱히 그들의 이득과는 상관없는 법안인지라, 저번에 올렸던 관세법에서 파트리키 귀족들이 분열된 것과 다르겐 법은 쉬이 통과가 되었다.

“게르마니쿠스! 그럼 중도에 부상으로 은퇴한 퇴역병의 경우에는 공공 의료법을 적용을 받는 겁니까?”

오후에 게르마니쿠스는 사람들의 앞에서 공공 의료법안을 발표하고 질의를 받았다. 차분하게 설명을 해 주었으나 사람들의 호기심이 깊어 그의 비서관들이 게르마니쿠스를 도와 그를 보조해야만 했다.

저녁에는 점복관을 찾았다.

법안을 만들고 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점복관이 운수를 확인하고 신의 뜻을 물어야 했다. 물론 점복관들은 다 좋은 말만 했다. 그들이 황제가 임명하는 황제의 친족이라는 것을 고려했을 때 그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법안의 운수는 아주 좋습니다.”

이 모든 작업을 끝내고 나니 노을이 지는 시각이었다.

“게르마니쿠스! 아니 이게 누구야.”

돌아오던 와중에는 거리에서 그나이우스 셈프로니우스를 만났다. 이스카리아 섬에서 인연이 있던 프로콘술, 전 집정관은 기뻐하며 게르마니쿠스를 부여잡고 말을 나눴다. 걷는 것을 좋아하는 게르마니쿠스가 가마를 타지 않고 있어 심지어 그나이우스는 가마 아래에 내려와 그와 걸음을 함께 걷기까지 했다.

“자네, 저녁에 아헤노바르부스의 향연에 올 텐가?”

게르마니쿠스는 그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었으나 연회에 초대하는 말은 거절을 했다. 몇 번 아쉬운 얼굴로 제안을 했던 그나이우스는 한사코 거절하는 게르마니쿠스에 입맛을 다시고 그를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힘겹게 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온 게르마니쿠스는 하늘이 보랏빛이 될 즈음에서야 저택에 도착했다.

“저녁을 다시 차릴까요?

“아니, 됐다.”

로마인의 저녁은 일과 중에 가장 근사하게 치러지는 법. 그러나 게르마니쿠스는 미리 노예들에게 명령하여 저녁을 일정한 시간에 요리하게 했다. 가끔 늦어질 때 식은 음식을 먹었으나 상관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보리로 만든 죽으로 몸을 연명한 적이 있었다.

먹는 즐거움은 그에게 가까운 것이 아니었다.

식사를 마치고 난 후에 게르마니쿠스는 뜨거운 물에 목욕을 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해방 노예 출신의 비서들이 넘겨준 자료들을 정리하며 지역구 별로 새로 입안된 공공 의료법을 적용하는 방식을 정리했다. 이제는 익숙해진 서류 작업이었다. 그날 밤 게르마니쿠스의 방은 늦은 밤까지 불이 꺼지지 않았다.

새벽에 게르마니쿠스는 결국 또 술을 마셨다.

그러니까 그런 날들의 반복이었다.

게르마니쿠스는 누구보다 모범적인 원로원의 의원이었다.

그러나 그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냐면 그의 주변에 있는 모두가 고개를 도리질을 칠 것이다. 게르마니쿠스는 루키우스의 말에 따라 잃었던 명예와 권위를 하나둘씩 되찾았으나, 그건 의무적인 것이었다.

게르마니쿠스가 그 일에 즐거움을 느끼지 않고 있다는 건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일이리라. 로마 원로원 의원들은 무표정한 얼굴의 게르마니쿠스가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다. 향연을 즐기지 않고, 대중의 인기를 즐기지 않으며, 집과 회의장을 왔다 갔다 하기를 반복하는 삶을 사는 게르마니쿠스를 보았다.

그에 사람들은 게르마니쿠스에게 조언을 했다.

그렇게 살면 한계가 올 것이라고.

8년의 세월을 버려 조급해하는 건 알지만, 조금 더 여유를 가지자고.

“그렇게 살다간 언젠가 견디지 못할 날이 올 거야.”

게르마니쿠스는 그나이우스 전집정관의 충고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었다. 그 말을 믿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게르마니쿠스는 실제로 몹시 힘들어했다. 서서히 부침을 느끼고 견딜 수 없어 했다.

‘왜지?’

그저 그는 어쩔 수 없던 것이다.

‘왜 너는 내 앞에서 사라진 거지?’

감정이 너무 커서 그냥 눈을 돌리려 했다.

‘날 위한 거라 하지는 마. 그러면 내가 널 어떻게 할지 모르겠어.’

그리하여 일에 몰두하였음에도 아케론은 하루에도 몇 번씩이고 그의 생각을 했다.

까드득.

갈잎펜이 부러졌다.

숨을 들이켜며 게르마니쿠스가 그 자세 그대로 몸을 굳힌 채 한참을 움직이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가 다시 갈잎펜을 부여잡았다.

눈앞에 물결치는 사랑스러운 금발의 환영을 애써 무시하고 갈잎펜을 놀렸다.

‘아니, 모두 거짓말이야, 루키우스. 이건 투정이지.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네가 필요해. 나는 네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어. 너를 기다리면서 이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어. 널 원망하지 않아. 단지 네가 기댈 수 없었던 나를 탓할 뿐이야.’

감정의 편린은 억누를 수 없이 빠져나왔다.

1년의 고통스러운 시간이 빨리 흘렀다.

황제에게 말을 남기고 사라진 루키우스는 연락 하나 없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결국 게르마니쿠스는 미친 듯이 루키우스를 찾았다. 그러나 그는 마치 땅 아래로 꺼진 사람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정보를 차단하는 사람이 황제란 걸 알았을 때 게르마니쿠스는 분노를 참지 못해 황궁을 쳐들어가기까지 했다.

“네 연인이 간절히 호소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그 한마디에 아케론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야 말았다.

‘연인이라고?’

게르마니쿠스는 멍하니 황제를 바라보았다. 연인이라는 간질거리는 말이 주는 느낌이 마음을 울렸다. 감정의 물결이 가시고 나니 아케론은 황제가 그들의 관계를 알고 있는 것에서 그가 진실을 말하고 있음을 확신했다.

정말로 루키우스는 황제에게 부탁을 한 것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고 떠나게 해 달라 말을 한 것이다.

제 곁을 떠났다.

저를 살린 당돌한 어린 연인은 게르마니쿠스가 기쁨을 표하기도 전에, 아무런 말도 없이 도주를 꾀했다.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던 걸까?’

아케론은 그에 지금껏 스스로를 탓해 오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아픈 몸을 지탱하기에 저는 모자란 듯했나 보다. 너무 믿음직스럽지 못해서, 루키우스는 제 마음을 너무 걱정하여 이런 일을 벌였나 보다. 아픈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부러 정을 떼려고….

‘하지만 넌 잘못 생각했어.’

게르마니쿠스, 아니 아케론이 눈을 감았다.

그는 다시 슬픔에 잠기고야 말았다.

그나이우스의 뜻대로 되었다.

아케론은 망가졌다.

그의 일상은 파괴되었다. 루틴은 깨졌고 영혼은 녹슬었다.

손쓸 수도 없이 무너져 내려가고 있다.

그는 이제 루키우스가 남긴 말대로 살아갈 수 없었다.

다시 쟁취하는 것?

웃기는 소리다. 아케론이 쟁취하고 싶은 건 오로지 하나였다.

사랑.

연인.

루키우스.

다르지만 모두가 같은 의미를 지닌 말.

그러나 그는 쟁취할 수 없었다.

오로지 단 하나의 것을.

그럼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렇게 그는 어느 순간부터 술에 빠졌던 것이다. 잠을 자지 못해 술을 마셨고 꿈을 꾸지 않기 위해 술을 마셨다. 늘어난 술이 일상의 루틴을 부수고 아케론의 낮 또한 침범했다.

아케론이 회의장에 늦을 때가 번번이 있었다. 심지어 결석할 때도 많았고, 오늘처럼 아슬하게 법안 제출하기 전 준비를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할 때도 있었다. 민중 사이에서도 아케론이 이상하다는 말이 돌았다. 그가 포스투무스처럼 망가졌다는 말이 포스투무스의 옛 지지자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녔다.

어느 순간부터 아케론은 아슬아슬하게 외줄을 타고 있었다.

공적인 면에서 완벽한 모습을 보이려 노력하면서도 사생활이 망가져 서서히 분란이 일어났다. 술이 아케론을 휘둘렀고, 아케론은 서서히 자포자기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의 일이었다.

“언제까지 그렇게 살 거냐.”

그의 위태로움이 깊어질 당시에 섹스투스 황제가 그를 불러 꾸짖은 것이다. 황제의 장남인 가이우스의 유해를 수습한 이후로 그는 내심 아케론에게서 가이우스를 투영하고 있었다.

“너 결혼은 하지 않느냐?”

저를 노려보며 내뱉은 말에 아케론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변했다.

“아시잖습니까.”

황제의 언성을 높이게 한 말이었다.

“그렇다고 결혼도 하지 않을 생각인가? 결혼은 정치적 결합이다!”

그는 굳은 얼굴로 아케론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네가 신부를 사랑하라 말을 하지 않아.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하는 거다. 너와 그 애가 나중에 훗날 다시 만난다더라도, 그때 너희 사이에 감정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결혼은 해라. 사랑과 결혼은 다른 거지 않느냐? 게다가 너희의 관계는 들키면….”

“안 합니다.”

“…….”

“안 합니다, 카이사르.”

황제가 입술을 다물었다. 그는 흔들리는 눈으로 무뚝뚝한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정적이 흐르고 그 끝에 한숨과 함께 말이 흘렀다.

“네 사랑은 결실을 이룰 수 없다.”

아케론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얼굴로 묵묵히 말을 들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위해 네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느냐? 어리석게 인생을 걸 거냐!”

아케론은 망설이지 않았다.

“기꺼이.”

그러곤 몸을 돌렸다.

“잠깐!”

밖을 향하려는 아케론에 당황하여 황제가 언성을 높였다.

“아니, 들어와! 용건은 시작도 안 했어.”

아케론은 노골적인 짜증을 얼굴 위로 드러냈다.

“이 빌어먹을 자식, 사람 말 좀 들어라!”

황제를 분노케 한 행동이었다.

“또 뭡니까.”

잠시간 망설이던 아케론은 그러나 결국 몸을 돌렸다. 어찌 되었건 황제다. 게다가 그에겐 개인적으로 받은 은이 많았다. 그리하여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른 이에게는 베풀지 않았을 선의를 베풀어 아케론은 다시 몸을 돌려 그의 앞에 얌전히 앉았던 것이다.

“너 이제 내가 아주 만만하지.”

그러나 그런 그의 행동이 황제는 여전히 마뜩잖은 듯했다.

으르렁거리는 그의 앞에서 아케론은 무심히 말을 내뱉었다.

“만만하지 않아서 말을 듣습니다.”

“웃기지 마라, 이 자식아. 너는 나를 완전히 물로 여기고 있어.”

“아닙니다.”

“자꾸 말대답을 할 거냐?”

아케론은 짜증을 부렸다.

“용건이 뭡니까?”

그때였다.

“받아라! 이 미련한 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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