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0/13)

“따르라.”

그들은 마르코마니의 왕성으로 향했다. 포스투무스가 이끄는 호위대가 게르마니쿠스를 지켰다. 그들이 바짝 긴장한 모습을 게르마니쿠스는 마르코마니족을 믿지 못하는 까닭이라 생각했다. 군나르를 믿지 못하는 게다. 그의 눈에는 군나르의 명예가 아닌 야만족의 혈통이 보이는 것이다.

‘어쩔 수 없지.’

그리 생각을 하면서도 게르마니쿠스는 포스투무스를 이해했다. 그가 감히 저를 거스를 것이란 생각을 하지 못했다. 포스투무스가 이끄는 호위대가 그의 클리엔테스로 구성된 이들임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스스로를 과신하였다.

로마인 사내들은 모두가 바루스의 재앙을 잊지 않고 있다. 게르만의 부족들을 잔인한 야만인으로 알고 있다. 그런 그들이 임페라토르를 걱정하여 나서는 것을 말릴 수 없다.

‘이 일이 감정의 골을 좁힐 수 있다면 좋겠군.’

그렇다면 차라리 포스투무스가 연회에 참석하여 술에 취하게 하자. 그렇게 마르코마니족들과 어우러지게 하자.

라인 강과 엘베 강 사이의 지역을 완충지대로 만들려면 로마군과 게르마니쿠스의 클리엔테스인 마르코마니족들의 사이가 좋아야 한다. 그런 까닭에 걱정을 하고 있던 게르마니쿠스는 그의 제안에 내심 두 세력의 사이를 개선할 생각을 하며 마르코마니족의 왕성으로 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생각은 헛된 모래성이 되어 스러지고야 말았다.

“군나르.”

“벗이여.”

서로를 환대하며 부둥켜안는 양군의 지도자들.

그를 노려보는 차가운 하늘색 눈이 있었다.

환한 얼굴로 군나르를 부둥켜안던 게르마니쿠스가 몰랐던 그 눈은 연회장에서도 변함없이 깊은 차분함을 유지했다.

그 눈의 주인은 술에 취하지 않았다.

그리고 연회가 무르익은 날, 웅장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쏴라!”

아, 그날의 기억!

“암습! 암습이다!”

“왕이시여! 헉! 워, 원로!”

“체루스키족의 습격입니다. 왕이시여! 로, 로마군이 안에서 성문을 열었습니다.”

갑작스럽게 화살비가 쏟아졌다.

연회에 초대된 로마군들이 술을 깨는 약을 미리 먹고 있었다. 그들은 왕성을 지키던 마르코마니의 병사들의 목을 베고 문을 열었다. 친로마파이자 왕을 칭한 마르코마니와 한때 패권을 다투던 체루스키족의 군대가 야밤을 타고 왕성을 들이닥쳤다.

살육이 있었다.

술에 취한 게르마니쿠스는 울부짖는 목소리에 서서히 정신을 차렸다.

“배신! 배신이다!”

헝클어진 다갈색 머리카락, 차갑게 불타오르는 두 눈. 창백한 살결을 분노로 달군 채 사내는 부관의 이름을 매섭게 불렀다.

“포스투무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로마군과 마르코마니군 사이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다!

게르마니쿠스를 빙 둘러 호위하는 그들은 술에 취하지 않고 형형한 눈빛을 빛냈다. 계략을 눈치챈 게르마니쿠스가 노성을 터뜨리고.

“이게 뭐 하는 짓이냐!”

포스투무스가 장검을 움켜쥔 채 비장하게 답했다.

“나는 불명예를 막겠다고 했습니다.”

이글거리는 눈이 게르마니쿠스를 노려보았다.

“늦지 않았습니다, 장군.”

불타오르는 왕성!

비명이 되어간 웃음소리.

피로 물드는 연회장 한가운데 게르마니쿠스가 잘게 몸을 떨며 그를 바라보았다. 격렬한 외침이 흘렀다.

“당신의 죄를 속죄하십시오! 불명예를 씻으십시오.”

“아니, 아니야….”

눈에 불꽃을 튀기며 말을 하는 그를 바라보며 게르마니쿠스가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뒷걸음질 쳤다. 얼굴을 손으로 감싸며 그가 당혹감이 서린 얼굴을 했다. 감정이 물결치는 얼굴을 포스투무스가 노려보았다. 게르마니쿠스가 혼란이 물든 얼굴로, 넋을 잃어 말을 내뱉었다.

“그건 불명예가 아니라….”

시체가 되어 버린 이들을 바라본다.

함께 먹고 웃으며 떠들던 이들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이게 불명예다.”

그때 비로소 정신을 차리곤 그는 번뜩거리는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너희는 협정을 깼다.”

스릉. 칼이 뽑혀져 나갔다.

포스투무스의 입술 밖으로 노성이 울렸다.

“조국을 배신할 생각입니까!”

그를 향해 검을 들이밀며 게르마니쿠스가 소리쳤다.

“닥쳐라! 조국의 명예를 더럽힌 건 너다. 로마의 이름으로 한 약속을 깼다!”

“짐승과 한 약속을 지키는 이들은 없습니다.”

“짐승? 짐승이라고?”

“그래, 짐승!”

활활 타오르는 눈으로 그가 소리쳤다.

“나 또한 죽어가는 이들을 안타까워합니다! 나 또한 인간의 형상을 띤 이들을 동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짐승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을 도축해야 합니다.”

헐떡거리는 숨.

“그게 군인의 임무입니다! 조국의 영광을 우선시해야만 하는….”

그때 나직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럼 난 이제부터 군인이 아니다.”

크게 떠진 포스투무스의 눈.

게르마니쿠스가 냉소를 지으며 어깨에 매달린 팔루다멘툼을 뜯어냈다.

빠르게 연회장을 벗어나가는 그의 등 뒤로 분노에 찬 사내의 절규가 울렸다.

“임페라토르!”

그러나 게르마니쿠스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불명예로부터 도망쳤다.

‘군나르, 아! 로마, 국가의 영광이!’

“아아악!”

절규가 하늘을 울렸다.

“살려 줘, 살려 줘!”

비탄이 궁정을 덮었다.

“배신자들…! 이 비열한!”

왕성을 가득 채운 비명을 들었다!

피비린내를 맡았다.

‘아니야!’

게르마니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푸른 두 눈은 절망에 물들어 있었다.

‘이게 아니야!’

들끓는 눈은 무너져 내리는 조국을 마주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영광과 불명예를 마주했다.

‘아니, 이건…… 이건 돌이킬 수가…!’

공황에 차 숨을 헐떡거리던 사내가 문득 누군가의 생각에 이르러 눈을 반짝 빛냈다. 그의 머릿속에 자리한 이는 이 상황을 수습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를 믿어 줄 거야.’

사내의 이름은… 군나르!

그 순간 폐부에 가득 찬 숨이 고함과 함께 흘러나왔다.

“군나르!”

그는 게르마니쿠스 일생의 적수이자 가장 깊은 이해자였다. 게르마니쿠스의 곪은 마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강박과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알고 있었다. 주입받은 신념과 내면의 모순을 이해했다.

“군나르! 벗이여!”

그런 그는 암습에 피를 흘리며 연회장 밖을 빠져나갔다. 체루스키의 습격을 막고 아군을 지휘하러 빠져나갔다.

아케론은 그 사내를 찾았다.

“내가 벌인 일이 아니야! 이건 로마의 뜻이 아니다. 임페리움의 주인은 이걸 의도하고 너희와의 협상을 한 게 아니야.”

토해내듯 쏟아 낸 절규!

“나는 너희의 몰락을 준비하지 않았다. 거짓말을 한 게 아니야. 이건 내부의 반란이다. 내가 아닌 역도들이 몰래 꾸민 암습이다.”

게르마니쿠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나의 조국은 이렇지 않아! 비열하지 않아!”

무너져 내리는 조국을 마주했다!

“로마는 너희를 배신하지 않았어! 전쟁을 원하는 게 아닌….”

그리고 그 순간의 일.

코너를 돌던 게르마니쿠스가 몸을 우뚝 세웠다.

“군나… 아.”

벌어진 입술이 다시 다물리고, 침묵은 이어져 나갔다.

“군나르.”

화염이 타올랐다.

불씨가 타오르는 소리가 들렸다.

게르마니쿠스가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음성이 흘렀다.

“괜찮아.”

피에 젖은 음성을 들으며 게르마니쿠스가 검을 든 손을 떨구었다.

“그대의 결백을 믿어.”

사내가 눈물을 흘렸다.

“미, 미안해.”

게르마니쿠스의 입술에서 짐승과도 같은 신음이 흘렀다.

“아… 아아!”

20년 전 마르스 신상 앞에서 무릎 꿇은 이후로 한 번도 무너져 내린 적이 없었던 다리가 꺾인다. 털썩 주저앉은 퀸투스 발레리우스가 쓰러진 몸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몸을 무너트렸다.

“미, 미안해… 미안!”

그곳에는 쓰러진 왕이 있었다.

회복하지 못할 상흔을 입은 자가 한때 함께 영광을 누렸던 자의 시체와 함께 널브러져 있었다.

군나르!

야만족의 왕의 입술에는 봄날의 훈풍과도 같은 미소가 흐르고, 미소를 마주한 게르마니쿠스가 절규했다.

“이게 국가의 영광이라고? 이게 로마라고!”

끄윽, 끅 짐승의 소리를 흘리며 그가 난도질을 당한 사내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아, 벗이여!”

그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포스투무스의 말들.

‘더 이상 불명예를 저지르지 마시오.’

‘군인은 국가의 영광을 위해 헌신하는 법.’

‘로마를 배신하지 마십시오.’

게르마니쿠스가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이게 로마냐? 이게 너의 로마야?’

그가 고개를 꺾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주홍빛으로 물든 하늘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꺄아악!”

비탄과 절망으로 물든 마르코마니의 왕성을 바라보았다.

“살려 줘, 살려….”

웃고 떠들던 이들이 그곳이 있다.

평화와 번영의 씨앗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남은 것은 오로지 파멸!

게르마니쿠스가 피눈물을 흘렸다.

불길한 미래를 마주하고 있었다.

“배신자들….”

게르마니쿠스가 흐느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어. 이제 전쟁밖에 없어. 이제는,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어.’

이건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반복이다.

로마군이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일을 보복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죽였던 것처럼, 이제 그들 또한 마르코마니의 참사를 보복하기 위해 기를 쓸 거다.

엘베 강 이서 지역을 사수하기 위해 로마는 피를 흘릴 거다.

그리고 그 피는 마땅한 대가를 얻지 못할 거다. 엘베 강 이서 지역은 쏟아져 내리는 게르만족의 공습을 감당하지 못하리라.

막강한 군비를 감당하지 못한 로마는 그곳을 포기하겠지.

그의 조국은 명예도, 신의도, 이익도 잃은 것이다.

결국에는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부드득, 소리가 흘렀다.

충혈된 눈이 부릅떠지고, 사내의 얼굴에 살기가 감돌았다.

“아니야! 이게 아니야!”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이가 절규를 터뜨렸다.

“나는 이걸 위해 싸운 게 아니야! 이걸 위해서 그간의 살육을 두고 본 게….”

이런 결말이 될 줄 알았으면 이곳에 오지도 않았어! 군인이 되지도 않았다고!

핏발 선 눈으로 게르마니쿠스가 소리쳤다.

“이게 네가 원한 로마냐? 포스투무스!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말을 해 봐.”

그러나 답은 포스투무스가 아닌 다른 이에게서 흘러나왔다.

“가라.”

아케론이 숨을 헐떡거렸다.

‘뭐라고?’

그가 고개를 들었다.

머리를 움켜쥐고 미친 듯이 울부짖는 퀸투스 발레리우스를 군나르가 부드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은 따뜻했다.

“가라.”

얼이 나간 사내의 귓가로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나를 버리고 도망가.”

게르마니쿠스가 턱을 떨었다.

“뭐라고?”

군나르가 그의 손을 움켜쥐었다.

“살아라.”

강렬한 의지가 두 눈에 불타올랐다.

게르마니쿠스가 숨을 헐떡거렸다

“너는 왜 내게 그리 말하는 거지?”

그리고 이어진 대담.

“그대, 살아라! 살아서 피 흘리고 죽어간 나를 지켜본 불명예를 씻어라.”

“나는,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어.”

“그럼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어째서?”

군나르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살아라 게르마니쿠스.”

게르마니쿠스가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왁자지껄한 소란 속에서 오로지 한 사람의 숨결이 들렸다.

숨결이 끊기고 손이 떨구어졌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던 게르마니쿠스는 이윽고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

“허억, 허억!”

사내는 도망친다!

새하얀 달이 숲 위에 떴다.

숲의 이름은 토이토부르크.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처절한 기억이 남은 숲.

죽고 죽은 원한이 그곳에 심어져 있다.

게르마니쿠스가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그 순간 귓가에 스치는 말들이 있었다.

‘사람들은 이제 그대를 게르마니쿠스라 부를 것이오.’

죽어가는 사내가 슬픔과 경외의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조국을 위해 헌신해라.’

존경하는 아버지가 매를 들곤 그에게 말을 내뱉었다.

‘로마 사내로서 임무를 다해.’

병아리를 쥐어 비트는 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흐르는 핏물이 눈앞에 선연했다.

게르마니쿠스가 소리쳤다.

“닥쳐! 다 닥쳐!”

상처받은 짐승이 울부짖었다.

“다 닥치라고!”

모든 것이 쓸모없다!

그의 세상은 거짓된 것이었다.

조국의 영예를 지킨다는 이름으로 그는 헛짓거리를 하고 있었다.

잘못된 것을 지켰다.

그의 수하들은 그가 틀렸다 말을 했다.

“닥쳐!”

지금까지 지켜온 가치는, 그의 조국은, 사람들의 로마가 아니었다.

“아, 아아!”

그날 게르마니쿠스의 이름이 사라졌다.

퀸투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원로원의 만장일치로 영광의 이름을 빼앗겼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가문은 폐족을 당했다.

국가의 반역자, 퀸투스 발레리우스가 라인 강에서 엘베 강 사이의 유역을 넘겨주려 했다는 말을 들은 로마인들은 흥분하여 그의 저택에 쳐들어갔다. 그의 나이 많은 아버지가 폭도들의 손에 맞아 죽었다.

퀸투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는 노예 아케론이 되었다.

그의 자리를 물려받아 17, 18, 19군단의 임페리움을 물려받은 것은 그의 부관 포스투무스였다.

포스투무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그리고 8년 후.

“루크가 이스카리아 섬에 있다고? 그 외진 곳에 그 애가 왜 있어?”

외딴 섬에서 들려온 셈프로니우스 달마티카의 소식에 경악한 사내가 이스카리아로 향한다.

“루크, 미안해.”

8년간의 지극한 노력으로 황제에 버금가는 영예를 얻었으나 포스투무스는 개선식을 올리지 못했다.

“널 그 자리에서 다시 보기를 바랐는데.”

결국 포기한 채 그늘진 얼굴로 배에 오른 포스투무스는 그리고 그곳에서 8년간의 악몽의 주인공을 만나게 된다.

“포스투무스.”

“당장 그 애에게서 떨어져!”

격분하여 검을 들어 올린 포스투무스가 맨몸의 사내의 허리에 검을 찔러 넣으려 했다. 스친 환부에서 피가 튀겼다. 이글거리는 눈으로 게르마니쿠스가 그를 노려보았다.

‘놓치지 않아!’

지울 수 없는 굴욕감, 패배감을 안겨 준 사내를 제거하려던 포스투무스는 그러나 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비명을 내지르고야 말았다.

“루크!”

게르마니쿠스가 경악하여 제 몸 위에 떨어지는 루키우스를 받아 들었다.

“루키우스!”

두 사내의 비명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루키우스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루키우스의 새하얀 튜니카의 찢어진 등 부분이 피로 물들고 있었다.

“장군….”

물기 어린 눈을 깜빡거리며 루키우스가 아스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포기하지 마.”

얼어붙은 사내의 품에서 그가 정신을 잃고 쓰러져 내렸다.

“루키우스….”

게르마니쿠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절규했다.

“나보고, 나보고 어쩌라는 거야! 대체 뭘!”

답을 해 줄 이는 없었다.

그것은 스스로 찾아야 할 답변이기 때문이었다.

*

아케론은 예정과 달리 이스카리아 섬을 떠나는 배에 올라타지 않았다.

그 대신 그는 피를 흘리는 루키우스를 안고 파도가 몰아치는 로마식 저택으로 향했다.

“주인님!”

저택을 발칵 뒤집어 놓은 일이었다.

포스투무스의 검에 맞은 루키우스는 그날로부터 사흘이 지나도록 깨어나지 않았다.

“라티움에 실력이 좋은 의사들이 많다.”

사흘의 마지막 날, 창백한 얼굴로 상황을 관조하던 포스투무스가 무거운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

“로마로. 일단 로마로 가지.”

그날, 배 한 척이 로마로 향했다.

<검은 부러질 때 영광을 되찾고>

어느 날 우티스15)라는 신상이 알려지지 않은 작가가 지식의 보고라 불리는 알렉산드리아16)에서 책을 내었다.

책의 제목은 <네체시타스>.

일명 숙명 영웅전이었다.

필명으로 보아서만은 그리스인인 것만 같은 이 작가는 라틴어로 로마인의 숙명에 대해 논한 책을 썼던 것이다.

그것은 위대한 운명을 살다 간 로마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였다.

유려한 문체와 사료의 높은 신뢰도가 주목을 받아 <네체시타스>는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본토에서도 주목을 받게 된다. ડχ

실용성이 강한 학문들이 주로 주목을 받던 로마에서 뛰어난 로마인 문인의 탄생은 주목받을 만한 일었다.

게르마니쿠스가 로마를 배반한 이후로 국경의 혼란이 계속되고 있다.

위태로움을 느끼던 로마인들이 자긍심을 갈망하던 와중에 뛰어난 문인이 등장했던 것이다.

마치 그들의 갈망을 채워 주듯이 우티스는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로마의 숙명적 영웅들을 거론했다.

『1편, 로물루스와 레물루스.

2편, 푸블리쿨라.

3편, 마르켈루스.

4편, ….

(중략)

18편, 게르마니쿠스 율리우스 카이사르.17)

(중략)

23편, 섹스투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24편, 퀸투스 발레리우스 막시무스 게르마니쿠스.』

마지막 편이 발표될 때 로마 전역이 술렁거렸다.

오랫동안 로마의 배반자라 알려졌던 이가 영웅들의 반열에 이름을 올렸다.

그에 놀란 사람들은 또 그 내용에 경악을 했다.

그것은 마르코마니의 왕성에서 일어난 반란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었다.

엘베 강 이서 지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의 판단, 마르코마니의 왕 군나르가 그의 클리엔테스가 되기를 다짐했던 것, 그러나 그에 반발한 포스투무스가 반역한 내용까지 서술을 했다.

로마의 배반자로 알려졌던 게르마니쿠스가 사실 전략적인 목적에 의해 협정을 체결하고,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클리엔테스 관계를 이용하여 엘베 강 이서 지역을 완충지대로 설정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던 것이다.

로마 일대가 혼란에 빠진 일이었다.

사람들은 처음에 반신반의했다.

우티스의 숙명 영웅전이 앞선 23편의 전기의 문학적 사료적인 훌륭함을 인증받고 지중해에서 권위를 얻긴 했다. 자긍심에 목말라하던 로마인들은 우티스를 호메로스와 비견되는 자랑스러운 영웅으로 띄웠다. 숙명 영웅전을 서사시환에 비견되는 것으로 여겼다.

그런데 그런 이가 게르마니쿠스에 대한 다른 역사적 사실을 말했다.

포스투무스의 말이 왜곡이라 평했다.

그럼 누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인가?

포스투무스는 게르마니쿠스가 몰락한 이후로 라인 강 전선의 혼란을 수습한 명장이자 권신이다. 그런 그를 공격하는 것을 꺼린 사람들은 우티스가 사실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글을 썼다 판단하고 비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거짓으로 드러났다.

당시 마르코마니 왕성의 변란에 가담했던 사병들의 증언이 속속들이 이어진 것이다.

그들은 우티스의 말이 사실이라 말했고 포스투무스가 그의 클리엔테스인 장교들을 이끌고 게르마니쿠스를 축출했다 증언했다.

로마를 충격에 몰아넣은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마 본토는 두 편으로 나뉘었다.

하나는 게르마니쿠스의 편, 하나는 포스투무스의 편이었다.

일부는 영토를 포기한 게르마니쿠스를 비방했다.

일부는 그가 지나친 죗값을 받았다며 동정했다.

그러는 한편 게르마니쿠스가 임페리움의 권한 이상의 독단을 저질렀다 생각하는 이도 있었고, 그것이 전시의 임페라토르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의 의견은 하나였다.

포스투무스가 반란을 일으키고 게르마니쿠스를 축출한 과정은 문제가 많다.

설령 게르마니쿠스의 결단이 잘못되었다 한들 그렇게 처리할 사안이 아니라 여겼던 것이다.

그것은 황제, 혹은 원로원이 처분을 결정해야 하는 일이었지 반란으로 해결할 과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당장에 포스투무스의 저택과 황궁으로 달려가 항의했다.

원로원 의원들 또한 대경하여 회의를 소집했다.

로마 전역이 게르마니쿠스와 관련된 화제로 들끓었던 것이다.

또한 그들은 궁금해했다.

누가 도대체 이런 책을 썼는가?

마치 키클롭스가 제 눈을 찌른 오디세우스의 정체를 궁금해한 것처럼, 그들은 우티스라는 문인의 정체를 궁금해했던 것이다.

“누구야? 우티스가 도대체 누구야!”18)

해답은 이스카리아 섬에 있었다.

*

이것은 로마인의 숙명에 관한 이야기다.

<네체시타스> 1편 서두 中.

*

짹짹짹.

새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으음.”

꿀빛 금발의 청년이 침대에 얼굴을 비비며 미간을 찌푸렸다. 눈썹을 간지럽히는 햇살에 그가 짜증이 어린 얼굴로 이불을 푹 뒤집어쓰다가 흐응 콧소리를 내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침상 옆을 지나던 금발 사내의 입술 밖으로 헛웃음이 흘렀다.

‘이렇게 볼 때는 그냥 철없는 것인데.’

그가 조용히 말했다.

“더 자지 그래?”

그는 정말로 걱정이 되어 한 말이었다. 루키우스가 입은 상처는 가벼운 것이 아니었으므로. 그러나 그의 의도는 역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끔뻑거리던 눈이 스르륵 떠져 멍한 자색 눈동자를 보인 것이다

금발 사내가 아차 하여 어색한 얼굴로 그를 보았다.

루키우스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실로 믿기 힘들다는 듯한 눈으로 금발 사내를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실로 그럴 만한 일이었다. 금발 사내의 정체를 안다면 누구라도 루키우스의 반응을 이해할 것이다.

흔들리는 시선이 부드러워 보이는 중년 사내의 얼굴을 쓸었다.

그러곤 그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카, 카이사르?”

얼이 나간 음성에 금발 사내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루키우스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진 순간이었다.

“여기는…?”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나려는 루키우스의 가슴을 사내의 손이 막았다. 주춤거리는 루키우스의 어깨를 누르며 그가 담담히 말했다.

“누워 있어라.”

루키우스는 드물게 공황에 빠져 있었다.

“하, 하지만.”

“로마 본토.”

“예?”

황제는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네가 묻지 않았느냐. 여기가 어딘지.”

마치 봄의 꽃이 피는 듯한 미소가 그의 심기가 그다지 나쁘지 않음을 드러냈다. 아니, 사실 그는 몹시 기분이 유쾌했다.

꽤나 오랜만에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마치 마음에 박힌 못이 빠진 듯한 시원함을 느꼈다.

그건 모두 눈앞에 있는 저 어린 청년 덕이었다.

“오랜만이구나, 루키우스.”

그에 평소에 강퍅한 성격으로 유명한 황제는 드물게 부드럽고 다정다감한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루키우스는 얼떨떨한 목소리로 답을 했다.

“오랜만입니다.”

그러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루키우스가 정신을 차리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황제는 빠르게 정돈이 되는 그의 얼굴에 속으로 감탄을 하며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무모한 짓을 저질렀더구나.”

루키우스가 물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 줄 아십니까?”

그 말에 황제는 여유로운 웃음과 함께 답변을 했다.

“나는 카이사르다.”

그 말은 최고의 답이었다.

루키우스는 바로 수긍하여 고개를 끄덕거렸고 황제는 그런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자식을 바라보는 듯한 다정다감한 시선이었다. 황제는 시선으로도 모자라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 무지막지한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면 어떻게 하느냐. 네가 그들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네 그 조그마한 몸으로?”

루키우스의 몸을 멈칫하게 한 말이었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루키우스의 가슴팍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붕대가 휘어 감겨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건 루키우스의 등에 둘러진 붕대였다.

“아, 읏….”

루키우스가 신음을 흘렸다. 뒤늦게 등에서 전해지는 통증을 깨달은 것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루키우스가 까마득한 기억을 더듬어 깨어나기 전의 일을 떠올렸다.

포스투무스의 일그러진 얼굴.

분노한 두 사내의 부딪치는 시선.

햇살에 반짝거리는 검.

멍하던 루키우스의 얼굴에 이윽고 빛이 서서히 돌아왔다.

“으음.”

루키우스가 옅은 신음과 함께 한숨을 내뱉었다.

“제가 할 수 있는 방법이 그것밖에 없었습니다.”

그래, 실로 그러했다.

분노한 두 사내 사이에 얽힌 인연의 끝이 너무나도 끈끈하여, 너무나도 지독하여 루키우스는 몸으로 그들 사이를 가로막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아케론이 그 검을 피할 수 있단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루키우스는 그를 향해 쏟아지는 검에 몸을 들이댔다.

“게다가 결국 저는 막았지요, 카이사르.”

그리고 그들은 결국 결투를 멈추었다.

루키우스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띠었다.

“그들은 날 사랑하고 있으니까요.”

담담한 말이 흐르고, 황제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가 그들을 사랑하는 것처럼.”

황제는 그 말에 이르러 불퉁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너는 몸을 조금 더 아낄 필요가 있구나, 우티스! 네가 로마의 진주라는 걸 몰라서 말을 하느냐?”

멈칫한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익살스러운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 루키우스가 웃음을 띤 얼굴을 절레 내저었다.

황제는 그런 루키우스의 행동에 잔웃음을 흘리다가 문득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이윽고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럼 이제 내가 우티스와 이야기해도 되겠느냐?”

루키우스가 몸을 움찔거렸다.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가 곧 평소의 담담함을 되찾았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황제는 한참을 입술을 열지 않았다. 그는 지그시 루키우스를 바라볼 뿐이었다.

영롱한 보석같이 반짝거리는 눈을 바라보며 황제가 속으로 생각했다.

‘꼭 일흔 살이 넘은 노인을 상대하는 것만 같군.’

조용한 웃음에는 의미심장한 기운이 엿보였다.

‘그래, 이 정도는 되어야 지중해 전역을 들썩이게 만든 기인답지.’

우티스.

아무것도 아닌 자.

그러나 우티스의 진짜 정체는 무궁한 지혜와 신의 총애를 등에 업고 무수히 많은 고난을 뛰어넘은 영웅, 오디세우스였다.

‘어울리는 이름을 붙였구나.’

황제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네가 이런 그림을 그릴 줄은 몰랐다.”

그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적절한 시기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글이 나왔지. 나는 네가 네 어미를 통해 내게 우티스를 선전에 이용해라 전달할 때 반신반의했었어. 신분을 모르는 자를 무얼 믿고 믿느냐. 그러나 너는 기꺼이 보증을 섰지. 그럴 수밖에 없었어. 네가 우티스였으니까.”

황제는 그 대목에 이르러 잠시간 말을 멈추었다.

진지한 시선이 밝은 눈의 청년을 향했다.

황제가 조용히 속삭였다.

“너는 처음부터 이런 생각으로 내게 너를 선전하라 한 것이구나.”

루키우스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예, 그렇습니다.”

그러곤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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