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8/13)

<사랑>

“널 사랑해.”

거짓말처럼 루키우스는 그 한 마디에 무너져 내렸다. 웃음이 얼굴에서 지워진 순간 아케론은 다시 한번 말을 내뱉었다.

“널 사랑해.”

그는 으슬으슬한 몸을 화로에 녹이는 중이었다. 거위 깃털로 만든 이불이 상아를 깎은 듯 매끄러운 몸 위를 흘러내렸다. 밤새 내리는 비를 맞고 루키우스는 고열에 시달렸다.

“널 사랑해.”

그런 그의 곁을 밤새 지키곤 아케론은 지금 이 순간 입술을 열고 있었다.

“내가 널 사랑해.”

불타오르는 별과 같은 눈을 빛내며, 그가 조용히, 뜨거운 말을 내뱉었다.

“너를, 루키우스.”

부들부들 떨리던 루키우스의 몸이 우뚝 굳는다. 그 순간 그의 입술 밖으로 노성이 터져 나왔다.

“닥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분노에 들끓는 눈으로 아케론을 노려보았다. 울부짖는 짐승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닥치라고!”

아케론은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푸른 눈이 자색 눈과 마주했다.

루키우스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노예 주제에!”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치며 그는 아케론의 어깨를 밀쳤다. 가슴을 손바닥으로 밀었다.

“노예, 노예 주제에….”

횡설수설하는 것처럼 한마디 말을 반복하는 그를 아케론은 묵묵히 바라볼 뿐이었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희게 질려 있었다. 식은땀이 흐르는 창백한 얼굴과 홉뜬 두 눈을 바라보며 아케론은 말없이 그의 손아귀에서 흔들렸다.

“감히!”

루키우스는 무너져 내렸다. 아케론의 가슴을 할퀴던 중 그의 몸이 풀썩 쓰러졌다. 아케론이 그의 어깨를 부여잡아 비틀거리는 몸을 지탱했다. 그러곤 얼굴을 들이밀며, 시선을 마주했다.

숨이 멈춘 순간 말이 흘렀다.

“네가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얼어붙은 루키우스를 고요한 푸른 눈이 담았다.

아케론은 한 글자 한 글자 선명하게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널 사랑한다.”

루키우스의 입술이 벌어졌다. 그 사이로 가늘게 떨리는 숨이 흘러나왔다. 그의 두 눈에서는 소리 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케론이 속삭였다.

“이건 기만이 아닙니다.”

그때처럼 너를 떠보려는 게 아니다.

그것은 루키우스를 벼랑 끝으로 몰고 간 말이었다.

루키우스는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케론은 그의 팔뚝을 부여잡아 그를 말리려 들었으나, 결국 루키우스는 몸을 거세게 비틀어 아케론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다. 팔이 비틀리려는 순간 아케론은 그의 손을 놓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루키우스는 미친 듯이 달려 도주를 꾀했다.

커튼이 펄럭거렸다.

루키우스가 아트리움을 벗어나 페리스타일로 향했다. 아케론은 그를 향해 달려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청년의 허리를 껴안았다. 그러곤 그의 가는 목에 얼굴을 묻고, 그의 몸을 체중을 실어 눌렀다.

“놔….”

루키우스는 흐느꼈다.

“이거 놔.”

습윤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케론이 거친 숨을 내뱉었다. 몸 아래 짓눌린 청년의 몸을 으스러트릴 듯이 끌어안았다.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향기를 찾았다.

“이러지 마.”

그의 아래에선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이러지 마…. 이러지….”

그 애처로운 목소리를 들으며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목에 얼굴을 비비고 있었다.

“내게 왜 이러는 거야.”

흐느낌은 한참 동안 멈추지 않고 페리스타일에 흘렀다.

*

“나는 카이사르의 사촌이다.”

정신을 차린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어깨를 밀치고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켰다. 아케론은 풀 위에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말을 들었다.

“한낱 노예 따위와 어우러질 수 없어.”

따사로운 햇살 아래 루키우스의 얼굴이 차분했다.

“지금 나는 네가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지.”

담담히 말을 내뱉는 청년의 얼굴을 아케론은 그저 고요한 푸른 눈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어, 아케론?”

루키우스가 쓰게 웃었다.

“내 사랑은 실패해야만 한다.”

그의 얼굴에 쓸쓸한 바람이 불었다. 아케론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의 말에 항의하지 않았다.

그의 방관 속 루키우스는 아스라이 흐트러지는 바람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 사랑도….”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윽고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러니 나는 네게 이럴 수밖에 없다.”

루키우스가 창백한 얼굴에 쓸쓸함을 물들인 채 속삭였다.

“내 경솔함을 후회해.”

잠시간 시간이 흘렀다. 루키우스의 얼굴은 서서히 차갑게 변해 갔다. 아케론은 그의 얼굴에 비정함이 물드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분홍색 입술이 달싹거렸다.

“마지막으로 말한다.”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에 아케론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가 무언가 결심을 하였음을. 그리고 그 결심이 제게 결코 이로운 방향이 아님을.

그리고 루키우스는 그의 마음을 확언시켜 주었다.

“네 말을 물려.”

나직이 말한 목소리에는 경고의 마음이 고스란히 묻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아케론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러곤 조용한 목소리로 답을 했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나입니다.”

산뜻한 바람이 부는 페리스타일에서 이어진 대담이었다.

“그걸 알려 주신 건 당신이십니다.”

아케론은 흔들림 없는 두 눈으로 루키우스를 올려다보며,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흘렀다.

“그래?”

루키우스는 그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건조한 목소리로 되뇌었다.

“그렇군.”

입술을 우물거리던 루키우스가 문득 언성을 높였다.

“솔론!”

매정하게 몸을 돌려 페리스타일 밖으로 향하는 그의 등을 아케론은 그저 바라볼 뿐이었다. 달려온 집사를 향해 쌀쌀맞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케론을 노예들의 처소로 옮겨!”

놀란 집사를 향해 루키우스는 냉랭히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이제 그를 특별취급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루키우스의 말대로 이뤄졌다.

*

아케론은 그날 처소를 옮겼다. 저택의 노예들은 이스카리아의 왕의 몰락에 놀라 말을 수군거렸다. 그날 이후로 아케론은 저택의 다른 노예와 다를 바 없는 대접을 받았고, 노동에 시달렸다. 아니, 그는 다른 이들보다 오히려 더 험한 일을 맡았다.

장작을 패고, 물을 긷고, 무거운 청동 솥의 기름을 닦는 등 힘이 들고 고된 일을 솔론이 맡겼던 것이다.

식사는 더 이상 식당에서 하지 못했다. 본디 상류층이 먹는 빵은 와인과 스프에 적셔 먹는 것이라 딱딱한 것이었는데, 아케론은 검투사 시절에도 즐겨 먹었던 술을 마시지 못했다. 하물며 욕탕은 사용하지도 못하고, 루키우스에게서 받았던 팔리움은 빼앗기지는 않았으나 추운 겨울에 걸치고 돌아다니지 못했다.

검투사 시절에도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이 없었다. 하물며 노예 시장에서도. 그들의 주인은 건장한 아케론의 몸에 상품 가치를 느끼며 밀과 보리나마 그를 잘 먹이고 살을 찌웠으니까.

그러나 아케론은 그에 항의하거나 불만을 드러내지 않았다.

저택의 노예 중 하나로 전락한 사내는 제 처지를 원망하긴커녕 묵묵히 일을 했던 것이다. 그는 주인을 향한 배신감을 드러내지 않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저택의 노예들 또한 궂은일을 하는 그에 익숙해졌다.

그렇게 뻔한 하루하루가 흐르고 있었다.

집사의 천대가 심해지고, 저택의 노예들이 어느 순간부터 아케론에게 제 할 일을 넘기는 데 익숙해졌다. 루키우스는 그런 풍조를 방관했고,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아케론은 과업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보내야만 했다.

시간의 흐름을 깨달을 틈도 없었다. 그는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입천장을 찢는 딱딱한 빵을 먹고 밤늦게까지 저택 이곳저곳에 불려 갔으니.

차가운 물로 몸을 씻고 숙소로 돌아오면 벌써 달이 하늘 위에 떠 새하얀 빛을 흘리고 있었다. 일기를 쓰고 나면 바로 잠을 자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아케론은 지난날과 비교할 수 없이 고된 일과를 보냈으나, 피로를 풀 길이 없었다. 그가 애용했던 욕탕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다. 그는 목욕을 할 때 숙소 뒤편에 자리한 노예 전용의 욕탕을 썼다.

주인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열악한 그곳에서 아케론은 샤워를 했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지 않고, 차가운 물을 머리 위에 뿌렸다. 그렇게 몸의 열기를 식히려 들었다.

화상이 남은 듯 욱신거리는 뺨에 얼음장 같은 물이 타고내리면 조금 마음이 진정되곤 한다. 아케론은 그렇게 뜨겁게 달아오른 숨을 내뱉으며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시간을 흘려보내곤 했다.

불꽃을 다스렸다.

아케론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금발의 청년을 생각하고 있었다.

‘루키우스.’

아케론을 매정하게 버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루키우스. 그를 생각했다. 그 마음은 간절했으나, 아케론은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루키우스의 두려움에 젖은 얼굴을 떠올리며, 또 꺼지지 않는 아르카디우스 풀케르에 대한 증오의 불꽃에 휩싸여 그는 망설였다.

다만 그를 마주하는 일이 잦기를 바랄 뿐이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을 마주하길 바랄 뿐이었다.

그의 바람대로, 그가 루키우스를 마주할 때가 간혹 있었다.

페리스타일은 구조상 저택에서 가장 따뜻한 곳이었고, 루키우스는 종종 그 한가운데 자리한 분수대에 앉아 따뜻한 와인을 홀짝이며 책을 읽었던 것이다. 도톰한 팔리움에 푹 파묻히며 몽실한 치즈케이크를 뜯어 먹는 그는 아케론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처럼 평온했다. 발을 팔락거리며 파피루스를 넘기는 그는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눈을 떼지 못했다.

아케론은 그를 말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러나 막상 루키우스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루키우스가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든 순간 눈이 마주했다. 그리고 아케론은 무심코 몸을 움츠리고야 말았다.

자수정을 깎은 눈을 마주하고 스스로의 상태를 깨달았던 것이다.

잘 차려입었을 때 오만한 귀족과도 같은 품위를 드러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아케론은 새하얀 튜니카 위에 기름때를 덕지덕지 묻힌 채 초라하게 자리에 서 있었다. 향유를 바르지 못해 냉수로만 감은 머리카락이 뻣뻣한 빗자루 같고, 두꺼운 손은 부르터 있었다.

장밋빛 뺨에, 금사를 뽑은 듯한 아름다운 금발을 휘날리는, 무른 대리석을 조각한 듯 흠집 없는 매끄럽고 부드러운 살갗. 가는 팔다리는 기름진 살이 붙어 있었다. 보는 것만으로도 향기가 느껴지는 달콤한 청년에게서는 실제로 향유와 우유의 냄새가 났다.

아케론은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을 느끼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격차를 느끼고 있었다.

‘노예 주제에, 감히!’

루키우스의 비명이 그 순간 귓가에 감돌았다. 아케론의 얼굴이 서서히 굳어져 가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시선을 떼고 다시 파피루스를 바라보았다. 야옹야옹 우는 고양이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그는 독서를 이어 나갔다. 그런 그를 아케론은 망연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노예 주제에.’

한참의 시간이 흘러 그가 멈추었던 발걸음을 뗐다.

‘노예 주제에….’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그는 처소를 향해 나아갔다.

‘노예 주제에.’

그 심장에 비수를 꽂는 말.

‘노예 주제에.’

아케론은 그 말의 의미를 한참을 되새겼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있다. 루키우스는 그리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 말의 뜻을 아케론은 잘 알고 있었다.

로마인의 사랑.

몰락한 자에게, 노예에게 허락되지 않는 것.

루키우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카이사르의 사촌은 절대로 사내를 사랑하지 않는다.

카이사르의 사촌은 절대로 노예를 사랑하지 않는다.

카이사르의 사촌은 절대로 반역자를 사랑하지 않는다.

발걸음이 멈췄다.

처소에 도착한 순간이었다.

아케론이 문득 고개를 돌려 등 너머를 응시했다. 아무것도 자리하지 않는 빈 공간을 그는 지그시 바라보며 한참을 시간을 흘려보냈다가 몸을 돌렸다.

*

시간이 흘렀다.

여름의 중순이었다.

아케론은 고된 일상을 보냈고, 루키우스는 그런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조금 반성은 했어?”

그러던 어느 날 루키우스는 그날 이후 처음으로 아케론에게 말을 걸었다.

“힘들어?”

그는 마치 아케론의 마음을 읽은 듯 말했다.

“다시 별채에서 편하게 살아. 기름때가 몸에 배서 냄새가 지워지지 않으면 어쩌려고.”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루키우스는 게으른 나귀처럼 느릿느릿 말을 내뱉었다.

“그럼 나도 네게 흥이 식을 거야.”

아케론은 기름때가 묻은 손을 늘어트린 채 그를 지그시 바라볼 뿐이었다.

“다른 잠자리 노예를 찾아야지.”

그는 페리스타일. 화려한 정원의 의자에 앉아 팔자 좋게 늘어진 채 말을 내뱉고 있었다.

아케론은 검댕이 묻은 더러운 차림으로 그의 앞에 있었다.

신분의 차이는 뚜렷하다.

루키우스는 그의 답변을 기다리는 듯 나풀거리는 눈썹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으나, 아케론은 입술을 열지 않았다. 묵묵히 저를 바라보는 사내에 루키우스의 미간이 좁혀졌다.

“내가 다른 사람을 찾아도 괜찮아?”

심기가 불편한 듯 으르렁거리는 어조로 말을 캐물었다. 아케론은 입술을 열었다.

“제게 무슨 대답을 원하십니까?”

그의 얼굴은 기름때가 묻어 더러웠으나, 그곳에는 저택의 노예들이 두려워했던 위세와 기품이 남아 있었다. 반짝이는 여름의 태양 볕이 자리한 청년의 얼굴이 희게 빛나고, 나무의 그늘 아래 가려진 사내의 얼굴은 그와 반대로 그림자에 물들었다.

“네가 노예임을 순순히 인정한다면 널 그 숙소에서 다시 빼내어 줄 거다. 네가 네 위치를 인정하고 내 침소에 든다면…… 다시 너를 예뻐해 주겠어.”

아케론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네가 노예로서 불손했던 것. 네 과거를 반성하고, 충실한 노예로 돌아와서 내게 충성 맹세를 하라.”

루키우스는 속삭이듯 덧붙였다.

“내 노예로 돌아와.”

마치 달콤한 과자로 어린아이를 유혹하는 것 같은 말.

“그럼 다시 너를 받아주겠다.”

루키우스는 햇살에 몸을 쬐는 고양이같이 그리 의자에 나른히 누워 아케론의 말을 기다렸다.

때마침 해를 가린 구름이 사라져 회랑에 비스듬히 햇살이 스며들어, 사내의 얼굴의 일부가 마침내 드러나 있었다. 그리고 루키우스는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사내는 간절히 열망하는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과 같은 눈에 루키우스의 숨이 굳었다.

몸이 얼어붙고 정적이 이어졌다.

아케론의 눈에는 희미한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열정이 있었다.

그 순간 루키우스의 얼굴에 돌연 감정이 사라졌다. 작게 벌린 입술 사이로 가는 숨이 흘렀다. 새하얗게 질린 이마에 송골 식은땀이 맺혀 있다. 벌어진 입술이 다물렸다. 잘근 입술을 깨문 루키우스가 땅에 굴러떨어진 파피루스를 손으로 주우며 냉랭히 말을 내뱉었다.

“너는 고생을 더 해 봐야지 정신을 차릴 것 같군.”

그러곤 그는 싸늘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아케론은 팔리움을 팔랑거리며 제 앞에서 사라지는 그를 점이 될 때까지 바라보았다. 그는 꽤나 시간이 흘러서야 땅에 뿌리를 뻗은 오동나무 침대처럼 굳건했던 발을 움직였다.

처소로 향했다.

*

그날 밤 아케론은 깊은 밤이 될 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탁자 앞에 걸터앉은 채 그는 창문 밖에 스며드는 달빛을 맞으며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탁자 위에 쌓인 종이들에 눈길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지금껏 써 내려왔던 일지들이었다.

아케론이 손을 뻗어 그것들을 손에 쥐었다.

달빛이 일렁거리는 얼굴에는 감정이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일지를 읽어 내리는 아케론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어 아케론의 얼굴에 드리운 불빛이 일렁거릴 때면 그의 얼굴은 그대로 무표정했으나 마치 감정이 동요하여 일렁거리는 듯했다.

그리고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착각이 아니게 되었다. 긴 시간 침묵하며 글자에 집중하던 아케론의 얼굴에는 어느 순간부터 희미한 균열이 잡히고야 말았으니, 그것은 문장이 말하는 스스로의 마음을 읽어 내린 까닭이었다.

[남색에 미친 끔찍한 소년의 손아귀에 떨어지고야 말았다.]

이건 처음에 그를 만나고 난 직후에 썼던 말.

[정액에 머리가 절어 사고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그 멍청한 자의 미래를 생각해 볼 때 그가 이스카리아 섬에 은둔하는 것은 어찌 보면 괜찮은 선택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 때문에 내가 그의 역겨운 엽색 행위에 얽혀 버리고야 말았으니, 그건 유감일 뿐이다.]

이건 한창 그를 혐오할 때 썼던 말.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 지나치게 관능적인 생김새.]

[어딜 보아도 사내다운 구석이 없다. 나신을 보아도 믿기지가 않는다.]

[사람을 꾀어내는 눈이 인상적인.]

일지 곳곳에는 루키우스를 관찰한 구절이 엿보였다.

[그래도 검투 경기에 서는 것보다는 낫긴 하다.]

그 구절에 이르러서는 아케론은 자그마한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그래, 사람을 죽이는 것보단 그게 낫긴 하지.

아케론이 뻣뻣이 세운 허리에 긴장을 풀고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느슨한 자세로 일지를 읽는 그의 얼굴에 감정이 물결치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내가 그에게 육체적으로 끌린다는 사실이다. 그가 가끔 새벽을 닮은 자안으로 날 볼 때마다 흔들리고야 만다. 불운하게도 그는 지나치게 아름답고 또 연약하다.]

그다음 문장에 이르러 그는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거부할 수가 없다.]

무엇을?

[그가 나를 향해 몸을 기울이며 재잘거릴 때마다 시끄러워 견딜 수가 없다. 입술을 뜯어버려서 말을 막고 싶어.]

편지는 사춘기 소년 같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내가 왜 이렇게 유치하게 굴고야 마는 거지?]

이유를 몹시 알고 싶었지.

[다만 피하고 싶은 것은 마음마저 그에게 얽히고야 마는 것이다.]

마침내 진실 된 마음을 드러낸 짤막한 문장에 이르러 아케론은 조용히 미소를 짓고야 말았다.

[두려워.]

흔들리는 필체에 말이 담겨 있다.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는 굳이 물을 필요가 없었다. 이어진 편지에 시선이 닿고 느릿하고 깊은 숨이 흘렀다.

[사과를 하는 방법은 어떤 거지?]

그 순간 아케론이 눈을 감았다.

기나긴 시간이 흘렀다.

다시 눈을 뜬 순간 그곳에는 꺼지지 않는 불꽃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아케론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향했다.

그가 달려간 곳은 아트리움이었다.

*

“루키우스!”

사내는 이름을 토해냈다.

부른 것이 아니었다. 마음속에 각인된 것을 토해 낸 것이었다.

벼락같은 음성이 아트리움을 울리고, 주인의 처소를 지키던 노예가 깜짝 놀라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누구… 헉!”

주인의 옆방에서 뛰쳐나온 니코마티스가 그를 바라보며 경악하여 눈을 크게 떴다. 아케론은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으앗?”

제게 다가오는 그들을 무시하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방으로 향했다. 그를 말리는 노예들은 굳건한 몸에 튕겨 나가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아케론이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고, 남색 천막을 걷어 젖혔다.

“허억…….”

그곳은 평화가 내려앉아 있었다.

“헉….”

사각사각 갈잎펜이 움직이는 소리가 흐르고.

“…후욱.”

아케론이 석상처럼 굳어져 우두커니 그의 등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입구를 등진 채 필기를 이어 나가는 청년이 있었다. 그는 달콤한 금발을 어깨까지 기른 자그마한 체구의,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있는 자였다. 사각사각 평온한 소리가 방을 채웠다.

은은한 주홍색 불빛이 금발 위를 어지럽히고 있었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울렸다.

“그만.”

아케론의 등 뒤를 따라붙었던 노예들이 달려오던 와중 몸을 멈칫했다. 분수대의 물소리와 같은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너희는 가.”

노예들이 주춤거리며 아케론의 몸을 움켜쥐었던 손을 내려놓았다. 주인의 말을 복종하여 사라지는 노예들에게 아케론은 한 톨의 시선도 내던지지 않았다.

“무슨 일이지?”

그는 그저 저를 바라보지 않는 매정한 주인을 응시할 뿐이었다.

헐떡거리는 숨결이 흘렀다.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어둠 속 사내가 형형한 두 눈을 밝히며 말을 이어나갔다.

“당신께 다가가지 않은 거. 노동이 힘들어서가 아닙니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매정한 주인을 향해 그는 이 악문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를 시험해 봤습니다.”

루키우스는 묵묵부답이었다. 아케론은 아랑곳 않고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런데 답은 하나뿐이었습니다.”

갈잎펜이 우뚝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잠긴 목소리가 힘겹게 흘러나왔다.

“그 사랑을 버리지 마십시오.”

아케론의 눈이 충혈되어 있었다.

핏발이 선 눈이 한 사람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다. 아케론이 거친 숨결을 토하며, 절규하듯 말을 내뱉었다.

“내 사랑을 버리지 마십시오!”

아케론이 방 안에 들어섰다. 루키우스가 손에 든 갈잎펜을 내려 둔 때였다.

“책임을 지십시오.”

팔을 돌연 붙잡아 하는 말에 루키우스는 격렬한 반응을 보였다.

“이거 놔!”

그는 매서운 눈으로 아케론을 노려보았다. 시선은 송곳이 되어 사내에게 박혔다. 아케론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나를 봐!”

아케론의 손이 루키우스의 뺨을 움켜쥐었다. 떨어지는 턱을 그는 방관하지 않았다. 억지로 그의 얼굴을 고정시켜 눈을 마주했다. 그 상태에서 아케론은 절규하듯 말을 내뱉었다.

“내 눈을 봐! 나를 봐!”

불꽃이 이글거리는 눈으로 사내는 말을 이어 나갔다.

“날 사랑하잖아!”

루키우스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나를 가지고 싶잖아!!”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이를 노려보며 아케론은 뜨거운 말을 쏟아 냈다.

“그럼 소유하십시오.”

자꾸만 아래로 떨어지는 얼굴을 손바닥 안에 비비며 아케론은 무릎을 꿇었다. 그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속삭였다.

“당신의 마땅한 노예를 가지십시오.”

애타는 눈으로 바라보며 원했다.

“당신의 소유물을, 그 마음까지….”

떨리는 목소리에 간절한 마음이 담겼다. 그 순간 루키우스는 두 눈에 불꽃을 밝히며 소리쳤다.

“닥쳐!”

그가 아케론의 가슴을 밀었다. 이를 악문 그의 몸이 격렬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케론은 노여움에 물든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흔들리는 눈에 절망이 물들어 있다.

루키우스는 그를 원수를 바라보듯 노려보며 굳게 다물린 입술을 열었다.

“이룰 수 없는 관계라는 걸 알잖아.”

갈라지고 파인 목소리로 절규했다.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걸 알고 있지 않으냐…!”

목소리는 넘어갈 듯했다.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분노와 절망이 있었다. 병자의 얼굴이 격정에 물들었다. 아케론은 묵묵히 그의 비난을 들었다.

“그를 용서할 수도 없으면서! 내게, 내게….”

희게 질린 얼굴로 말을 쏟아붓던 루키우스의 귓가로 문득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알아.”

고개를 든 순간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알고 있어.”

그 절박한 얼굴.

“그런데 어쩔 수가 없습니다.”

가늘게 속눈썹이 떨렸다. 사내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 고통을 드러냈다.

“자꾸만 무너져 내려….”

손을 뻗어 루키우스의 뺨을 감싼다. 아케론이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그러곤 그는 루키우스를 향해 다가갔다. 그의 뺨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발긋한 입술에 입술을 맞췄다.

신음이 흐른 순간이었다.

“그만….”

아케론은 눈을 감지 않았다.

폭발하는 별과도 같은 눈과 마주하며 루키우스가 눈물을 흘렸다. 흔들리는 눈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며 아케론은 입술을 비틀고 비볐다. 살덩어리는 뜨거웠다.

숨을 헐떡거리던 루키우스는 입술이 떼어지는 순간 멍하니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다시금 다가오는 입술에 루키우스는 새하얗게 질려 그의 가슴을 밀쳤다.

“그만해!”

그때 벌어진 사고였다.

루키우스의 팔꿈치가 촛대를 친 것은.

루키우스를 향해 다가가려던 아케론은 순간 화악 번져 오르는 불길을 깨닫고 다급하게 루키우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비명이 솟구친 순간이었다.

“아악!”

거의 동시에 아케론이 루키우스의 몸을 끌어안았다. 덮치는 화마에서 그는 루키우스의 몸을 지키려 들었다. 너른 품에 루키우스를 가두고 아케론이 그를 끌어안은 채 움직였다.

화재에 약한 파피루스에 닿은 불길이 높게 치솟고 있었다.

찰나의 순간 아케론은 본능적으로 행동하여, 버둥거리는 루키우스를 품에 안고 빠르게 방에서 빠져나왔다.

“니코마티스!”

그러곤 그는 불을 끄기 위해 다급히 집사를 대리하는 노예의 이름을 불렀다.

“무슨 일입… 헉, 이게 무슨?”

“불이 번졌… 루키우스!”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설명을 이어 나가던 아케론은 그러나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경악하며 주인의 이름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루키우스!”

금발의 청년이 그의 품에서 뛰쳐나가 불이 번져나가는 방에 뛰쳐 들어간 것이었다.

“이런 제기랄…!”

식겁한 아케론이 그를 향해 따라 들어갔다.

루키우스의 금발이 물결쳤다.

졀규가 이어졌다.

“안 돼…! 안…!!”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는 미친 건가. 루키우스의 돌발 행동이 머리를 어지럽혀 아케론은 도무지 정신을 찾을 수 없었다. 이성을 잃고 아케론은 미친 듯이 몸부림치는 루키우스의 팔뚝을 잡아 그를 강제로 방에서 끌어내려 들었다.

“안 돼!!”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두꺼운 팔에 허리가 끌어안긴 채로 그는 사지를 버둥거리며 울부짖었다.

“안 돼, 안…!”

아케론이 윽박을 질렀다.

“멈춰!”

남색 커튼 밖으로 루키우스를 던지고 아케론이 그를 이글거리는 두 눈으로 노려보았다. 바닥을 처량하게 뒹군 루키우스가 엉금거리며 방을 향하려 하고 있었다. 울부짖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이 몸으로 막았다. 그의 등이 뜨거운 열기에 익어 있었다.

루키우스의 여린 몸은 새빨갛게 달궈져 있었다.

아케론이 눈에 불을 켜며 그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너 미쳤어?”

루키우스가 흐느꼈다.

“안 돼, 안 돼…!”

그는 아케론의 어깨를 내리쳤다. 아악! 절규에 가까운 소리가 울렸다. 아케론의 팔뚝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긁으며 루키우스는 핏줄이 불거진 눈을 치켜떴다.

그러곤 악을 질렀다.

“구해야 해. 구해야 한다….”

그것은 불구덩이를 토해 내는 것처럼 처참하게 내뱉은 절규였다.

“내 숙명이…!”

핏발 선 눈이 부릅떠져 저를 가로막는 사내를 노려보았다. 아케론은 눈을 마주하는 순간 몸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집념을 느꼈다.

아케론이 이글거리는 루키우스의 눈을 마주하고 문득 무언가를 깨닫고 홀린 듯이 말을 내뱉었다.

“기다려.”

미친 듯이 몸을 뒤틀며 방을 향하려는 루키우스의 뺨을 단단히 틀어쥐곤 아케론이 낮게 깔린 목소리를 흘렸다.

“이곳에서 기다려.”

그러곤 그는 불타오르는 방 안에 들어섰다.

연기를 헤치며 아케론이 나아갔다.

타액을 묻힌 옷자락으로 입을 막고 탁상에 다가갔다. 파피루스가 타오르고 있었다. 그곳에는 타다만 파피루스 더미가 있었다.

아케론의 눈앞에 그 순간 여름날의 기억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경건한 얼굴로 갈잎펜을 움직이던 루키우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펜은 부러트리면 그만이 아니냔 말에 커다란 분노를 터뜨리던 그를 떠올렸다.

아케론의 입술 밖으로 느릿한 숨이 흘렀다.

깊고 뜨거운 숨결을 내뱉으며 아케론이 불타오르는 파피루스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 순간 행거가 쓰러져 내렸다. 아케론이 황급히 몸을 움직여 방을 벗어났다.

남색 커튼이 젖혀지는 순간 그의 등 뒤에서 불꽃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비틀거리며 아케론이 대리석 바닥에 꿇어앉았다.

쿵 소리와 함께 무너져 내리는 커다란 몸.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루키우스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무릎 꿇은 사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케론이 더운 숨을 헐떡거렸다.

눈과 눈이 마주하는 순간 루키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

그의 입술 밖으로 습기를 머금은 먹먹한 목소리. 아케론은 물기가 번져 나가는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무너져 내리고 습윤한 울음소리가 흘렀다.

끅끅 소리가 이어졌다.

울음은 통곡이 되어갔다.

검은 재가 묻은 사내와 눈을 마주한 채 루키우스는 바닥에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말을 내뱉었다.

“할 일이 있어.”

노예들이 비명을 지르며 방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물동이의 물을 끼얹는 사람들이 아우성을 피우는 소란스러운 자리에 루키우스의 목소리가 선명하게 울렸다.

“나는 해야 할 일이 있어.”

루키우스가 손을 뻗어 아케론의 손을 움켜쥐었다.

“내게 숙명이 있어….”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가 손에 쥔 종이를 움켜쥐었다.

“너를 사랑할 수 없다.”

서글픈 말을 들으며 아케론은 파피루스를 움켜쥔 손에 힘을 풀었다. 까맣게 타오른 자국이 가득한 파피루스 더미가 루키우스의 품에 묻혔다. 그 상태 그대로 루키우스는 몸을 웅크린 채 석상처럼 굳었다.

잘게 떨리는 몸을 바라보았다.

아케론이 어지러움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아, 제길….’

물기를 머금은 제비꽃색 눈이 크게 떠졌다.

커다란 몸이 대리석 위에 풀썩 떨어져 내리고 비명과 고함이 아트리움 안을 쩌렁하게 울렸다.

아케론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루키우스는 저택에 없었다.

“그는 어디에 있지?”

나직한 말에 집사는 답하지 않았다. 아케론은 무심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집사를 향해 손을 뻗었다.

멱살이 쥐어지고 얼굴이 들이밀어졌다. 시퍼런 살기가 번뜩거리는 눈과 마주하고 솔론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담담한 말이 흘렀다.

“그분은 오시고 싶을 때 돌아오실 겁니다.”

“어디에 갔어.”

“그것이 로마의 자유 시민에게 허용된 자유입니다.”

그 말에 아케론은 얼굴을 들이밀던 와중 멈칫하고 몸을 굳혔다.

솔론의 푸른 눈이 깊은 심해처럼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며 집사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우리에게 없는 자유.”

자유.

그래, 자유!

그가 그날에 영원히 소실하게 된 것.

아케론은 그 말에 집사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을 풀고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집사는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옷자락의 먼지를 털었다.

아케론이 침상에 몸을 늘어트렸다.

그날부로 루키우스는 쭉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

여름이 찾아왔다.

아케론과 루키우스가 만난 계절이었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루키우스가 없었다.

루키우스는 도피를 했다.

아케론을 불꽃에 타오르게 만들고 무책임하게 도망쳤다.

아케론은 홀로 남겨졌다.

잿더미였던 사내는 열정을 품에 안고, 그러나 그것을 쏟아 낼 상대는 잃었다. 속이 타올랐다. 내면이 잿더미를 품에 안은 화마에 휩싸였다.

저택의 집사는 주인의 언질을 받은 듯 다시 그의 처소를 별채로 옮기고 노동에서 해방시켜 주었으나 그것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의 주인이었다.

녹음이 가득한 페리스타일, 창밖의 흩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아케론이 눈을 감았다.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아케론의 마음이 절벽 끝에 걸렸을 때가 되어서야 루키우스는 돌연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

그것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재회였다.

발코니에 선 채 지중해의 푸른 물살을 바라보고 있었다. 새하얀 돛을 펼치고 오고 가는 배들을 텅 빈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케론은 마치 껍데기만 남은 인형 같았고 그저 일정한 루틴만을 반복했다.

살아 있는 사람 같지 않게 굴던 그를 현실 세계로 돌아오게 만든 목소리는 너무나도 가볍고 또 쾌활했다.

사내의 등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얼굴 좀 보여 줘.”

아케론은 한참의 시간이 흘러 몸을 돌렸다.

그곳에는 기둥을 등지고 쭈그려 앉은 금발의 청년이 자리하고 있었다.

“날 기다렸어?”

무릎에 팔꿈치를 대곤 손바닥으로 얼굴을 받친 채였다. 생글 웃는 그는 마치 메리골드 꽃과 같았다. 아케론은 우두커니 선 채 그를 멍하니 응시했다.

충격을 받은 것처럼, 혹은 영혼을 잃은 것처럼 넋을 잃은 채 저를 바라보는 아케론을 향해 루키우스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잘 지냈니?”

아케론의 입술이 열린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져.”

갈라진 목소리였다.

깜빡거리지 않는 눈에 눈물 한 줄기가 흘렀다. 루키우스는 쪼그려 앉은 자세 그대로 아케론을 빤히 바라보았다.

잔상처가 남은 뺨에 얇은 눈물의 강이 조성되었다.

눈을 감지 않은 채 사내는 조용히 읊조렸다.

“책임을 져.”

그 말을 끝으로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루키우스를 노려보며,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새파란 눈을 마주하며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시간이 흘러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그럴 거야.”

하늘이 유독 새파란 날이었다.

흰 구름이 뭉게뭉게 뜨고 그 주변을 새하얀 갈매기가 자유롭게 날아다니던 어느 아름다운 여름날의 상쾌함을 즐기며, 루키우스가 조용히 입술을 열었다.

“아케론, 너는 자유다.”

아케론의 숨이 멈춘 그 순간,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튜니카가 팔랑거렸다.

루키우스가 몸을 돌려 주랑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아케론은 마치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사람처럼 굴었다.

사라지는 그의 등을 넋을 잃고 바라보았다. 루키우스가 저 멀리 아트리움에 들어서고 있었다.

아케론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고, 호흡이 빨라졌다.

루키우스가 시야에서 사라지는 그 순간 아케론이 몸을 움직였다. 미친 듯이 달려 현관으로 나아가는 루키우스를 향해 다가갔다.

*

“주인님.”

루키우스가 현관에 들어설 때였다. 마부석의 마부가 꾸벅 고개를 숙여 루키우스에게 인사를 했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마차에 올랐다. 갈 곳이 있었다. 오늘의 방문은 욕망을 이기지 못한 까닭이었다.

“가자.”

그 사내를 보았으니 족하다. 그런 후련한 마음으로 루키우스는 마차에 올랐던 것이다.

“멈춰!”

그러나 그는 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아트리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황급히 뛰어오는 사내를 깨달은 루키우스가 얼굴을 굳히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가.”

마부가 채찍을 휘둘렀다.

“이랴!”

푸르릉 소리를 내며 말이 말발굽으로 지면을 닥닥 두드렸다.

“빨리 가!”

루키우스는 예열을 하는 시간을 기다리지 못했다. 주인의 으르렁거림에 깜짝 놀란 마부가 예예, 말을 내뱉고 말의 엉덩이를 후려갈겼다.

말이 빠르게 움직였다.

루키우스는 창백한 얼굴로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지 마…!”

아케론이 현관을 밟았다.

머리를 헝클어트린 사내가 뛰기 시작하는 마차를 향해 달려 나갔다. 루키우스는 뒤를, 옆을 돌아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그는 결국 시선을 돌리고야 말았다.

“제발, 제발….”

흐느낌이 발목을 잡았다.

“나를 버리지 마!!”

절규가 흘렀다.

다그닥, 다그닥 소리가 빨라졌다.

루키우스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마차의 옆을 바라보았다. 손이 뻗어지고 있었다. 광인처럼 달려 나온 아케론이 속도를 높이려던 와중에 마차의 틀을 움켜쥐었다. 마차가 비틀거린 순간이었다.

그때 절규가 울렸다.

“나를 떠나지 마!”

아케론이 루키우스를 올려다보았다. 일그러진 얼굴이 눈물로 물들어 있었다.

“제발…… 제발…….”

마부가 당황하여 말의 고삐를 잡아당겼다. 서서히 멈추는 마차. 사내의 발이 피로 물들어 있었다.

루키우스의 창백한 입술이 달싹거렸다.

“아케론.”

사내는 흐느끼며 머리를 쥐어뜯었다.

“죽을 테니까.”

피로 물든 몸.

그것을 아랑곳 않고 사내는 흙투성이 위에 무릎을 꿇었다. 마차의 틀을 부여잡고 고통스러워했다. 무너져 내리는 혼이 그곳에 있었다.

루키우스가 얼어붙을 그 순간에 아케론의 입술 밖으로 헐떡거리는 숨이 흘렀다. ડχ

“죽을 거야.”

충혈된 눈.

흐르는 눈물.

“죽을 테니까….”

고통에 쩍쩍 갈라진 목소리를 사내는 힘겹게 토해 냈다.

“내가 죽을 테니까.”

고꾸라진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척추가 도드라지게 몸을 웅크린 사내가 이마를 땅바닥에 깊게 박고 흐느꼈다. 그는 절규를 했다.

“……가지 마.”

루키우스의 푸르스름한 입술이 달싹인 순간, 마차를 움켜쥔 손이 흘러내렸다.

“책임져…….”

거구의 몸이 애처롭게 떨렸다. 가늘게 떨리는 어깨가 늘어져 있었다. 사내는 더 이상 말을 내뱉지 못했다. 처참한 모습을 루키우스는 멍하니 바라보다가 숨을 멈추었다.

그러곤 조용히 읊조려 말했다.

“로마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다.”

담담한 얼굴로 그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진정으로 책임지겠다 말을 하는 거야.”

아케론의 떨리는 어깨에 손이 살포시 얹어졌다. 자상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이어졌다.

“버리려는 게 아니야.”

아케론이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 그곳에는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머금은 이가 자리하고 있었다. 금발의 청년이 손을 뻗어 아케론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전해지는 온기를 느꼈다. 느릿하게 입술이 열리고 속삭이는 목소리가 흘렀다.

“아케론.”

두 눈이 여행자를 인도하는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었다.

“나는 네게 가장 큰 선물을 주는 거야.”

악문 턱이 잘게 떨렸다. 툭 튀어나온 뺨을 쓰다듬으며 루키우스가 말을 이어 나갔다.

“너를 해방해 주겠다.”

숨이 헐떡거리고, 이 악문 소리가 이어졌다.

“이제 네 운명의 주인은 너야.”

충혈된 사내의 두 눈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루키우스는 아스라이 흐트러지는 연기와도 같은 말을 내뱉었다.

“그걸 원했잖아?”

아케론은 숨을 헐떡거렸다. 마치 금방이라도 생명이 다할 듯한 환자처럼 그는 목을 움켜쥔 채 힘겹게 숨을 토하다가,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아니.”

핏발이 선 눈에 붉은 핏물이 들어갔다.

“나는 그걸 원하지 않았습니다.”

피가 흐르는 사내의 눈을 마주하며 루키우스가 신음을 흘렸다.

“이러지 마라, 아케론.”

탄식과도 같은 말이 흐르고, 힘겨운 웃음이 흘렀다. 아케론이 절박하게 그를 응시했다. 모래투성이의 사내를 노려보며 루키우스가 이를 부득 악물었다.

그리고 노성이 터져 나왔다.

“네 영혼의 주인은 너다!”

아케론의 몸이 멈칫한 순간이었다.

루키우스가 그의 어깨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이글거리는 눈이 그를 향하고, 뜨거운 숨결이 흘렀다.

“네게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있다.”

눈과 눈을 마주한 채 루키우스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 영혼은 육신을 따라가.”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사실 이 저택의 모든 노예들은 내게 영혼까지 굴종한 것이었어.”

아케론의 입술 밖으로 가는 숨이 흘렀다.

루키우스는 그의 눈을 명확한 눈으로 노려보며 입술을 움직였다.

“오로지 너를 제외한 모두가 그랬지.”

그러곤 웃음을 흘렸다.

가볍게 날아가는 웃음을 마주하고 아케론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초점이 흐릿한 사내의 눈을 바라보며 루키우스가 손을 뻗었다. 웃으면서 사랑하는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그는 속삭였다.

“너는 네 영혼을 사수했어.”

살갗에 온기가 닿았다.

그걸 위해 루키우스는 지금껏 달려온 것이었다.

웃음기를 머금어 휘어진 눈에 회고의 감정이 감돌았다. 그간의 지난한 여정을 떠올리던 루키우스가 이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육신의 주인이 될 자격 또한 충분하지.”

사랑이 듬뿍 담긴 눈을 아케론은 흔들리는 눈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얼이 나간 사내를 향해 루키우스는 고개를 숙였다.

핏줄이 솟은 이마에 경건히 입맞춤을 하며 루키우스가 스륵 눈을 감았다.

그러곤 눈을 떴다.

이윽고 담담한 말이 흘렀다.

“7년간 고생했습니다, 장군.”

평화가 루키우스의 내면에 있었다.

“잘 견뎠어요.”

아케론이 멍하니 그 눈을 바라보았다. 자유롭게 하늘 위로 치솟는 눈을 마음의 창 너머로 응시했다.

루키우스는 부드럽게 웃으며 속삭였다.

“자유는 고통의 대가입니다.”

거친 뺨을 쓰다듬으며 그가 속삭였다.

“누리십시오.”

아케론은 얼어붙어 한참을 반응을 하지 못했다.

“당신의 것을 누리십시오.”

그가 입술을 연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나를….”

떨어져 내리는, 제 뺨에서 거두어지는 손을 무심코 움켜쥐었다. 루키우스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아케론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푸른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었다.

“나를 노예로 삼아….”

그렇게 혼이 없는 말을 이었다.

“나를 노예로 삼아서…….”

“…….”

“내 육신과….”

확장된 동공.

흐르는 한 줄기 눈물.

“…영혼을 가져.”

루키우스가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 저었다.

“네가 원했던….”

“내가 원했던 사내는 자유를 택했을 겁니다.”

담담한 목소리가 말을 끊었다.

적막이 내려앉고, 그 끝에 고요한 목소리가 울렸다.

“게르마니쿠스.”

아케론의 목울대가 떨렸다.

루키우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시 한번 선택하십시오.”

이슈타르의 눈이 영혼을 꿰뚫어보았다.

낭패에 처한 사내가 초라한 몰골로 그를 마주했다.

“당신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루키우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당신의 영혼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침묵이 흘렀다.

아케론은 한참을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는 많은 것을 생각하며 숨을 죽였다. 얼어붙어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회고에 잠겼다.

시간이 흘러 버석버석한 입술이 달싹거렸다.

“내 영혼의 주인은….”

눈물이 흐른다.

두 눈에는 눈물이 흘렀다.

그는 과거를 마주하고 있었다.

무너져 내리는 로마를, 무너져 내리는 게르마니쿠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로마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박탈당했다.

자유를 잃고 노예의 삶을 살았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인생의 가치를 잃었다.

삶의 목적을 잃었다.

존엄을 잃었다.

나를 잃었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나….”

아케론이 눈물을 흘렸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나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을 겪으면서도, 노예의 삶을 살면서도 아케론이 잃지 않은 마음이 있었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나다.”

영혼의 고삐는 넘겨주지 않았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나다.”

육신의 부자유를 영혼에 한정하지 않았다.

“내 영혼의 주인은….”

사내가 고개를 떨어트렸다. 뚝뚝 눈물이 떨어져 흙바닥을 갈색으로 물들였다. 갈라진 목소리가 침묵 끝에 흘렀다.

“내 영혼의 주인은 나다.”

사실은 자유를 갈망하는 마음을 놓지 않고 있었다.

그를 인정한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폭포수처럼 흘렀다.

루키우스는 그 말에 함박웃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제가 아는 당신이 돌아왔군요.”

아케론의 뺨을 움켜쥐며 루키우스는 속삭였다.

“나를 살린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아스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기억하시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날 연회에서 당신과 마주했어요.”

꿈에 젖은 달콤한 두 눈이 과거의 기억을 헤맸다.

루키우스는 진실로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손에 쥔 사내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보물을 만지듯 어루만지며 루키우스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당신이 내게 숙명을 안겼지요. 그렇게 내 길이 생겼습니다. 나는 지금껏 그 길을 밟아 왔어요.”

눈은 우아하게 휘어졌다.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을 아케론은 느릿한 숨을 내뱉으며 바라보았다.

담담한 말이 이어졌다.

“결실을 맺고 돌아오겠습니다.”

아케론의 뺨을 어루만지던 손을 멈추고 힘을 주었다. 그 상태에서 루키우스는 강인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놓아주십시오.”

고요한 저녁 하늘과도 같은 눈에 아케론이 있었다.

루키우스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게는 아직 할 일이 남았습니다. 지금은 당신을 너무 보고 싶어서 온 것뿐입니다.”

숨결이 섞이는 거리, 루키우스의 속삭거림이 이어져 나갔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이 아니야, 아케론.”

아케론은 침묵을 했고, 루키우스는 그런 그와 이마를 마주 댄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일주일만 내게 시간을 더 줘.”

아케론이 흐릿한 눈을 깜빡거리다가 감았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그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당신에게도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군요.”

아케론은 더 이상 말을 내뱉지 않았다. 평화가 내려앉은 얼굴에서 무엇을 읽은 것인지 루키우스는 자그마한 미소를 짓다가 손에 쥔 그의 얼굴을 스륵 놓아주었다. 담담한 목소리가 흘렀다.

“당신은 이제 자유민입니다, 게르마니쿠스.”

루키우스가 굽혔던 몸을 일으키고, 마부가 흘끗 등 너머의 분위기를 살핀다.

아케론은 잠시간 그를 바라보았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아케론.”

루키우스가 눈을 깜빡거렸다.

아케론은 그를 차가운 불과 같은 눈으로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불러.”

“…….”

“돌아온다고 약속해.”

루키우스는 그 말에 작게 웃다가 이내 미소를 지운 채 입술을 달싹거렸다.

“반드시.”

그러곤 그는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았다.

아케론이 마차의 틀을 쥔 손에 힘을 뺐다. 손은 마차의 매끄러운 표면 위를 미끄러졌다.

“가자.”

담담한 말이 흐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그닥다그닥 소리가 울렸다.

떠나는 마차를 아케론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 바라보았다.

일주일 후 루키우스는 약속대로 저택에 귀환했다.

*

현관에 앉아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밤.

그러나 자정은 되지 않은 시간.

새하얀 달빛을 맞으며 멍하니 눈을 깜빡거리던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마주하고 환한 웃음을 흘렸다.

그러곤 속삭였다.

“끝냈어요.”

희열과 환희가 물결치는 얼굴을 아케론은 잠자코 바라보았다가 조용히 입술을 움직였다.

“네 숙명은 뭐지?”

루키우스가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당신.”

“…….”

“그리고 나.”

루키우스가 마차 아래로 내려갔다. 현관에 걸터앉아 아케론은 그런 그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비틀거리며, 진실로 아름다운 미소를 지은 채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위에 쓰러지듯 몸을 무너트렸다.

아케론의 목을 팔로 껴안고 웃었다.

귓가에 스치는 나비처럼 나풀거리는 웃음을 들으며 아케론은 눈을 감았다. 가는 허리를 껴안고 그는 잠시간 시간을 흘려보냈다.

루키우스가 너른 사내의 품에서 놀던 중 문득 입술을 열었다.

“우리에겐 조금의 시간이 남았지요.”

사근사근 다정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 아케론은 물결치는 금발에서 흘러나온 깊은 몰약의 냄새를 맡고 있었다. 우윳빛 살결에 코를 들이밀고 비비던 와중 아케론이 숨을 헐떡거리며, 짤막한 말을 흘렸다.

“아케론.”

사내의 품을 파고들며, 그의 목을 더욱 꽉 팔로 조이며 루키우스가 자그마하게 속삭였다.

“그래, 아케론.”

그러곤 그는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아케론을 올려다보았다.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번졌다.

“우리, 놀러 갈까?”

새하얀 달빛 아래 달콤한 미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루키우스가 그의 너른 가슴에 손을 댄 채 속삭거렸다.

“시내에 놀러 가기로 했잖아.”

손가락은 톡톡 아케론의 가슴을 건드렸다. 마치 리라를 켜는 듯한 다정하고 섬세한 움직임이었다.

“극단을 보기로.”

루키우스가 방긋 웃었다.

“가자.”

아케론은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를 현관에서 걸터앉은 채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새하얀 달을 등진 루키우스는 마치 신화 속에 나오는 님프와 같아 보였다. 화사한 금발은 새하얀 달빛을 받아 그 변두리에 테가 은은히 띠어져 있었다.

아케론은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우아한 용모의 청년이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의 시간을 즐겨, 아케론.”

아케론은 저를 향해 뻗어지는 손을 피하지 않았다.

*

시내로 향했다.

루키우스의 작은 손이 그의 커다란 손을 부여잡고 흔들었다. 아케론은 그의 부드러운 손을 망설이다가 부여잡았다.

달마티카 의원의 죽음과 집정관 마르쿠스의 돌연사로 우중충했던 이스카리아 섬 시내가 여름날의 생기로 가득 차 왁자지껄했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거칠고 두툼한 손을 조몰락거리며 그를 시내로 이끌었다.

사람들이 하나둘 많아졌다.

동시에 루키우스의 얼굴 또한 서서히 들떠가고 있었다.

“극을 좋아해?”

광장으로 향하는 와중이었다. 싱긋 웃으며 고개를 돌리는 루키우스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아케론이 고개를 절레 내저었다. 루키우스는 그의 무뚝뚝한 얼굴 이면의 당황을 읽을 수 있었다. 거친 손을 꼼지락거리며 그가 배시시 웃었다.

“라티움에 머문 적이 별로 없다 들었어.”

나긋한 목소리였다.

“군인인 아버지를 따라 이곳저곳을 다녔다고 했지. 너는 아마 극을 즐길 기회가 없었겠지?”

아케론이 답변을 하기 전에 루키우스는 재잘거리는 참새처럼 말했다.

“예술을 좋아해?”

굵은 팔뚝을 잡아 이끌며 그는 속삭거리고 있었다. 아케론은 여린 그가 혹여 인파에 휩쓸려 다칠까 봐 루키우스에게 바짝 달라붙으려 했다.

“좋아하지 않아도 즐겨 봐, 한번.”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을 내뱉곤 루키우스가 팔뚝에 뺨을 비볐다. 사람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는 그를 아케론은 잠시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무슨 극을 보고 싶은 겁니까.”

루키우스는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아무거나.”

아케론의 미간을 찌푸리게 만든 말이었다.

불만스러운 그의 눈빛에 루키우스가 고양이 같은 혀를 살짝 내밀며 새침하게 말했다.

“사실 너랑 함께 있는 시간이 중요한 거야… 그런데 내게 존댓말을 하는 건가?”

아케론은 어둠 속에서도 푸른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아케론.”

나직한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멈칫한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어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가에 어스름한 미소가 서렸다. 안개와 같은 미소를 띤 채 그가 작게 속삭였다.

“그래, 아케론.”

그러곤 그는 팔을 끌어안은 양손에 힘을 주었다. 못내 사랑스럽다는 듯이 팔뚝에 얼굴을 비비며 은은한 기쁨을 드러냈다. 제게 거의 반쯤 매달려 있는 루키우스의 몸을 가뿐히 지탱한 채 아케론은 걸음을 이어 나갔다.

왁자지껄한 시장을 걸어 나갔다.

소음 속 뚜렷한 말이 울렸다.

“그간 무얼 했습니까?”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옷자락을 꼭 잡은 채 말을 내뱉었다.

“글을 썼어.”

사람들의 어깨와 툭툭 부딪쳐 루키우스는 결국 인상을 팍 쓰며 불쾌함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런 루키우스를 깨달은 아케론이 저보다 한 발자국 앞에 선 채 걷는 루키우스의 가는 팔을 조심히 부여잡아 끌어당겼다.

단단한 가슴이 등에 닿는 것을 느끼곤 루키우스는 몸을 움찔했다.

아케론이 그를 품에 끌어안듯이 걷고, 그와 발걸음을 맞추며 루키우스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숙명이 거기에 있어.”

아케론은 그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었다. 자그마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내 가치를 증명하려 했지. 사실 그것 때문에 이스카리아 섬에 온 거야.”

광장에는 극단이 없었다. 아케론은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상영하는 야외 연극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시도는 실패했고, 그의 얼굴은 점차 굳어져 갔다.

“그런데 널 만났지. 아케론.”

초조함이 물드는 사내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루키우스는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작년에 끝났을 일이 그래서 늦춰졌던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루키우스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간 침묵했다. 분홍색 입술을 우물거리며 그는 아케론을 지그시 응시했다. 딱딱하게 굳은 사내의 얼굴. 그에 미소를 지으며 그가 입술을 열었다.

“하지만 후회하지 않아.”

루키우스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됐어, 아케론. 극단이 없으면 시장 구경을 하지.”

아케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내뱉은 말이었다. 아케론이 고개를 돌려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무어라 말을 하려는 사내에 앞서 루키우스가 발걸음을 뗐다.

“잠깐.”

나풀거리는 나비처럼 앞서가는 루키우스에 당황한 아케론이 그의 등 뒤를 따랐다.

누가 봐도 루키우스는 시장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사람이 많은 곳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고상하고 또 생기가 없다.

그러나 그는 지금 이 순간 마치 피어나는 꽃처럼 싱그러웠다.

“아케론.”

생기가 넘쳤다.

“이것 봐.”

꿀빛 금발에 상아로 만든 머리띠를 쓰며 그가 싱긋 웃었다. 달빛이 그의 물결치는 머리 위에 흐드러지다가 상아 머리띠를 경계선으로 흘러가길 멈추었다. 여성용의 머리띠가 그에게 잘 어울렸다. 아케론은 숨이 멎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어때?”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루키우스가 그런 그의 얼굴을 살폈다.

“살 거야? 안 살 거야?”

짜증이 서린 상인의 말에 루키우스가 미간을 찡그리며 머리띠를 내려놓았다. 그러곤 그는 성큼성큼 앞을 향해 나아갔다. 정신을 차린 아케론이 그의 뒤를 따랐다.

“어울립니다.”

너무 늦은 답변이었다.

“안 살 거야.”

루키우스가 말의 끝을 늘이며 말을 이었다.

“나한테 안 어울려.”

그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머리띠를 쓴 루키우스는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의 말이 못마땅한 듯 투덜거렸다.

“네 표정이 나쁘잖아.”

사람들을 향해 사라지는 그를 황급히 따라가며 아케론이 변명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 말에 이르러 그는 입술을 다물고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어둑해진 얼굴의 연원을 묻지 않았다. 대신 그는 가판의 상인에게서 달콤한 꿀에 절인 과자를 구매했다.

입술이 번들거리게 꿀 과자를 베어 문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려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그때 눈이 마주쳤고, 그에 아케론은 굳은 얼굴을 풀고야 말았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는 그 끝에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루키우스는 그 말에 몸을 멈칫했다. 아케론이 숨을 멈추고 이를 악물었다. 그의 턱이 악물려 도드라져 있었다. 루키우스는 입술을 우물거리며 아케론의 눈을 응시했다.

아케론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목울대가 움직이고, 루키우스가 고개를 돌려 과자를 든 손에 눈길을 주었다. 꿀에 절인 밀가루 과자를 손에 움켜쥐며 그는 담담한 말을 흘렸다.

“로마로 가거라.”

아케론은 그 말에 또다시 침묵을 지켰다. 그의 얼굴에 핏기가 가셔 있었다. 아, 입술을 벌리려는 루키우스의 입을 별안간 손바닥으로 가로막고 아케론이 쉬어빠진 목소리를 흘렸다.

“당신은 제게 자유를 줬습니다.”

사람들이 오고 가는 소리가 시끌벅적하게 울렸다.

입술이 틀어 막힌 루키우스가 불만스러운 눈으로 아케론을 보았다. 아케론은 야시장에 집중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떨리는 손과 창백한 얼굴. 그를 바라보며 불안을 느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유는 무어지?

“내가 당신과 함께하는 것을 말릴 수 없습니다.”

그 말의 불길함에 휩싸여 있었다.

짙은 시선이 루키우스에게로 향했다.

혹여 네가 정말로 시간이 남지 않은 거라면.

혹여 네 병이 너를 갉아 먹은 거라면.

혹여….

그때였다.

“그렇지.”

생각의 가지를 뻗어 나가던 아케론이 몸을 멈칫했다. 아케론의 가슴에 몸을 기대어 끙끙대던 루키우스가 결국 입술을 가린 손에서 풀려나 푸하 숨을 내뱉곤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네겐 그것 말고 할 일이 있잖아.”

반짝거리는 별과 같은 눈으로 청년은 아케론을 보았다.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밀치곤 루키우스가 앞으로, 앞으로 향했다.

“더 중요한 일이 남았잖니.”

아스라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곤 루키우스는 사람들 사이로 뛰쳐나갔다.

“루키우스.”

아케론은 놀라 그의 이름을 부르고 그를 따랐다.

루키우스는 사람들 사이를 요리조리 헤치고 다녔다.

“난 내 숙명을 지켰어.”

팔리움 자락이 하늘거렸다. 허벅지를 뒤덮은 튜니카가 살랑거리며 살갗을 드러냈다.

“너는?”

몸을 돌린 루키우스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네가 할 일이 있지 않아?”

아케론이 그를 향해 손을 뻗을 때 루키우스는 다시 몸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도망을 쳤다.

“모르겠어.”

아케론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나는 모르겠어.”

화사한 금발이 사람들 사이로 보였다. 아케론은 먹먹한,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끼듯 말을 내뱉었다.

“나는 모르겠어.”

발밑이 까마득하다.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계단에 올라야만 하는데, 그 계단이 없다. 뒤로 물러설 장소도 없다. 그저 허공에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자유.

이게 자유라고?

아케론이 얼굴을 일그러트릴 그 때였다.

“되찾아야지.”

속삭이는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고개를 든 아케론이 제 팔을 움켜쥐는 손을 눈치채고 멍한 눈을 크게 떴다. 홀린 듯 그 손길에 따라갔다. 어느새 그들은 극장에 도착해 있었다. 극단이 열리지 않는, 사람들이 없는 한산한 극장의 옆 숲길로 루키우스는 그를 이끌었다.

“너의 것을 받아와야지.”

아케론은 그를 바라보았다. 달빛이 흐르는 루키우스의 얼굴은 님프와 같았다. 루키우스가 나무 등걸에 이르러 손을 놓고 고개를 들었다.

그곳은 불빛이 가득한 시장이 보이는 한적한 장소였다.

상쾌한, 혹은 뿌듯한 얼굴로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예쁘지?”

그 말에 아케론은 홀린 듯 답을 했다.

“그래.”

그러곤 루키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키스를 할 때, 이번에 루키우스는 눈을 감았다.

헐떡거리는 숨결이 흘렀다. 뜨거운 정열이 살갗으로 전해졌다. 아케론은 두 눈에 푸른 불꽃을 띠며 루키우스를 노려보았다. 살갗에 숨결이 스치며 말이 전해졌다.

“그 길이 네 형을 죽이는 일이라 해도?”

루키우스는 담담히 말했다.

“그것 또한 그의 운명일 뿐.”

고요한 목소리였다.

“너를 원망하지 않아. 나는 최악의 일도, 최고의 일도 예상하고 있다.”

아케론이 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흉흉히 일그러진 얼굴이 서서히 굳어졌다가 돌연 무너져 내렸다. 루키우스의 몸이 움찔할 때 아케론은 그를 향해 달려들었다.

상앗빛 뺨을 움켜쥐고 격렬한 키스를 퍼부었다. 입술을 깨물고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고 정신없이 정열을 나눴다.

“가지 마.”

그러곤 입술을 떼며 속삭였다.

“하악…!”

“내 앞에서…… 사라지지 마.”

불안에 떨리는 목소리를 끝으로 그는 다시금 루키우스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아케론의 얼굴이 괴로움에 젖은 듯 일그러져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의 팔뚝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내뱉다가 문득 평화로운 미소를 지었다.

입술이 떼어지는 순간 하닥거리는 숨소리가 흘렀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입술에 입술을 겹친 채 그것을 달싹거렸다.

“가지 마.”

“…….”

“너는 영원히….”

루키우스는 그의 말을 끊었다.

“우리의 계절을 즐기는 거야.”

두꺼운 팔뚝을 루키우스의 손이 움켜쥐었다. 아케론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사내의 눈동자가 떨렸다.

“8월의 마지막 날에 로마로 떠나라.”

루키우스의 눈은 고요히 가라앉아 있었다. 흔들림이 없는 대양과 같았다. 평화가 있다. 다정함이 있다. 믿음이 있다. 사랑이 있었다.

그것은 이슈타르의 눈이었다. 사람의 영혼을 빼앗는 유혹의 여신. 영웅의 운명을 채근하는 전쟁의 여신. 그는 아케론의 입술을 물며 속삭였다.

“운명에 부딪치거라, 아케론.”

*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두 사람이 수풀을 굴렀다. 깊은 키스를 했다. 서로의 얼굴을 부여잡으며, 다리를 엉키며, 서로의 뜨거움을 입술로 나눴다.

키스가 끝나고 루키우스는 희미한 미소를 얼굴에 띠었다.

그 얼굴에 조급함을 느끼곤 아케론은 그의 입술을 다시 세게 빨았다. 루키우스의 여린 입술이 새빨갛게 부을 때까지.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뺨을 놓아주지 않았다.

“숨이 모자라.”

단단한 가슴을 밀치곤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나가자.”

뜨거운 정염이 물든 얼굴을 쓰다듬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섹스는 언제든지 할 수 있어.”

즐거운 악동처럼 루키우스는 생긋 웃었다. 아케론은 제 손아귀에서 벗어나는 루키우스에 초조함을 얼굴 위로 설핏 드러냈다. 루키우스는 그런 그의 마음을 읽은 듯 아케론의 손목을 부여잡고 그를 이끌었다.

그러면서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이 시간 야시장을 즐기는 건 아니지.”

그러곤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붉고 주홍색인 불빛으로 가득한 거리로 이끌었다. 아케론은 홀린 듯 그를 따라갔다.

달콤한 과자를 우물거리며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잡아 이끌었다. 극단은 없었으나 중간에 그들은 불을 삼키는 길거리 기예단을 목격했다. 루키우스는 그들을 마치 재주 부리는 고양이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연상의 사내를 갸륵하게 바라보는 루키우스에 아케론은 묘한 표정을 지어야만 했다.

“즐거워.”

루키우스가 요거트를 묻은 입술을 오므리며 앙앙 짓는 다갈색 강아지를 구경했다. 아케론은 작은 개의 반짝거리는 눈이 루키우스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너무 즐거워, 아케론.”

호숫가에 다다라서 루키우스는 가쁜 숨을 내뱉었다.

아케론은 그를 업어 준 채 집에 돌아왔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목에 손을 두르곤 그의 목덜미에 코끝을 묻었다. 그건 원래 아케론이 루키우스에게 자주 취하는 자세였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냄새, 뜨거운 모래의 냄새와 쇠 향기를 맡으며 흐음 콧소리를 흘렸다.

그러곤 속삭였다.

“오늘을 잊지 말아야 해?”

아케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등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기며 루키우스는 나지막한 목소리를 흘렸다.

“나를 잊지 마.”

아케론은 시간이 흘러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잊을 수가 없어.”

루키우스는 그에 만족한 듯 웃음을 흘렸다.

아케론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새하얀 별들이 송송 박힌 은하수의 밤.

어둠이 물든 밤하늘에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세상이 있다.

사랑스러운 여름의 시작이었다.

*

맹세하건대, 그것은 아케론이 보낸 최고의 여름이었다.

*

“아케론.”

녹을 듯이 아름다운 금발의 청년이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케론.”

시원한 두 팔을 목에 두르고 활짝 웃었다. 분수대의 옆에서 그것보다 더 시원한 웃음을 터뜨리며 웃었다.

“아케론…. 아.”

그런 그를 향해 치솟는 마음을 참지 못해 분홍색 말랑한 입술을 물었다. 그러면 루키우스는 단 샘 같은 입술을 벌리며 촉촉하게 젖은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그러곤 짓궂은 아이처럼 웃었다.

그 천진난만한 웃음.

그는 안아 들면 허리에 다리를 휘감고 허리를 뒤로 젖히고 웃는다. 사랑스러운 금발을 흩날리며 무게조차 느껴지지 않는 몸으로 매달린다.

반짝 빛나는 보라색 눈동자에 키스를 했다.

경이로운 그 눈에 담겨 여름을 보냈다.

그리고 그 끝이 보였다.

“…게르마니쿠스.”

유수와 같은 시간.

사랑스러운 여름은 뜀박질을 했다.

그 계절의 발걸음은 너무나도 빨랐다.

어느덧 8월의 마지막이었다.

*

“내일이구나.”

너른 가슴의 품에 앉아 루키우스가 아득한 한숨을 흘렸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빛이 나는 새하얀 몸이 짙게 그을린 사내의 몸 위에 얹어져 있었다. 살갗과 살갗을 맞댄 자세로 루키우스가 몸을 비틀었다.

화려한 금발이 흐드러지게 목을 뒤로 꺾은 루키우스가 입술을 찾았다. 아케론은 입술을 찾는 아기 새와 같은 루키우스의 입술을 달게 탐했다.

“으응.”

푸른 불꽃 같은 눈이 루키우스를 노려보았다.

그건 그 사내의 버릇이었다.

아케론은 키스를 하던 중에도 눈을 감지 않았다. 마치 상대를 잡아먹고 싶어 하는 듯 들끓는 눈으로 루키우스를 응시했다.

짐승과 같은 눈을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마치 오르가슴에 오른 사람처럼 몸을 부르르 떨었다.

“흐, 읏.”

목구멍 깊이, 헛구역질을 자아내게 깊은 곳으로 들어온 혀를 받아들이며 루키우스가 입술을 더욱 양껏 벌렸다. 고개가 뒤로 꺾인 몸을 지탱하지 못해 루키우스는 결국 침대 위로 풀썩 무너져 내리고야 말았다. 그의 몸을 아케론은 한 손으로 받아들였다.

그의 팔에 떨어지기가 무섭게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품으로 기어들어 갔다. 그의 겨드랑이 사이를 파고들고 가슴에 뺨을 비볐다.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같이 구는 루키우스의 몸을 아케론은 가슴으로 깔아뭉갰다.

그러곤 뺨에 뺨을 비비며, 부드러운 몸에 살갗을 문질렀다.

숨을 헐떡거리며 아케론이 그의 향기를 맡았다.

신음이 흘렀다.

“게르마니쿠스.”

아케론이 되뇌었다.

“싫어….”

루키우스가 신음을 흘리며 도리질을 쳤다. 화려한 금발이 장밋빛 뺨을 가렸다.

그리고 흐른 말.

“게르마니쿠스.”

속삭이며 그가 눈을 떴다. 물기 어린 눈이 아케론을 담는다. 아케론이 신음을 흘리며 뜨거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루키우스는 애처롭게 속삭였다.

“게르마니…. 으응.”

아케론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해 그의 입술을 물었다.

신음이 흐르고, 침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다시 울렸다.

정사의 끝 루키우스는 그의 뺨을 쓰다듬으며 가는 숨과 함께 속삭였다.

“이제 그대는 자유입니다.”

*

다음 날 아침.

해가 떴다.

여름의 마지막 날이었다.

“솔론.”

그날 루키우스는 아케론보다 일찍 일어나 방을 나섰다. 저택의 집사를 찾고 그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배는 언제 온다고 했지?”

“오후 세 시라 했습니다. 네오폴리스에서 오는 배라 시간이 많이 차이가 나지 않을 겁니다.”

루키우스는 그 말에 작게 웃었다.

“날씨가 좋군.”

그러곤 고개를 들어 올려 새파란 하늘을 바라보았다.

후련히 웃었다.

*

푸른 눈이 번쩍 뜨였다.

가슴께를 눌러야 할 것이 부재함을 깨달았을 때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미친 듯이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루키우스!’

*

“잘 잤어?”

아케론이 우당탕 소리를 내며 아트리움에 들어섰다. 일그러진 얼굴은 빗물받이 연못 앞 석상 아래 앉아 있는 금발의 청년을 보는 순간 펴졌다. 놀란 듯 크게 떠진 눈을 장난기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루키우스가 툭 말을 던졌다.

“눈곱을 떼.”

아케론은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루키우스가 꼰 다리의 발을 까딱거리며 키득거렸다.

“뭐야? 그 시선은.”

톡 쏘는 듯한 말투가 귓가에 박혔다.

“아직은 내 노예잖아.”

루키우스는 웃으며 턱짓을 했다.

“씻어.”

두 사람은 이른 아침을 함께했다.

평소보다 호화스러운 아침이었다.

“마지막이잖아.”

루키우스는 통통한 배를 문지르며 미간을 찡그렸다.

“하지만 너무 많이 먹었나 봐.”

미련하게 과식을 한 루키우스가 힝 소리를 내며 아케론의 두꺼운 팔뚝에 몸을 기댔다. 아케론은 마시던 포도주를 그의 입술에 대주었다. 루키우스는 반쯤 누운 채로 꼴깍꼴깍 술을 마시다가 트림을 하고 깜짝 놀라 몸을 움츠렸다.

아케론은 그런 루키우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민망한 듯 웃는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얼굴을 밀며 칭얼거렸다.

“그만 봐.”

아침을 먹자마자 짐을 챙겼다.

아케론 개인의 짐은 많지 않았다. 그나마 있는 옷가지나 개인용품들도 미리미리 챙겨 놓아 부산을 떨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짐을 꼼꼼히 다시 한번 챙겼다.

마치 제가 로마로 떠나는 것처럼 꼼지락거리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싸놓은 짐 더미에 기대어 바라보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문득 말했다.

“일지가 있던데….”

아케론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보았다. 무심한 얼굴을 흘끗 돌아보며 루키우스가 말했다.

“그건 안 챙겨?”

아케론은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태워 주십시오.”

“응? 일지잖아?”

“그건 쓰는 행위에 의미가 있는 겁니다.”

그 말에 루키우스는 잠시간 망설였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내가 가져도 돼?”

아케론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팔짱을 풀며 그가 몸을 서서히 일으켰다. 차분한 눈이 루키우스를 담았다. 루키우스는 뜸을 들이다가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널 기억하려고.”

아케론은 그의 얼굴에서 한참을 시선을 떼지 못했다.

*

정오의 태양이 하늘 위에 높게 떴다.

아케론이 떠날 시간이었다.

루키우스는 세 번의 검토를 마치고 짐들을 마차 위에 올렸다. 그러곤 아케론을 배웅했다.

“마지막으로 선물을 줄게요.”

현관 앞에서 이별의 말을 나누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평소처럼 허벅지가 드러나는 짧은 튜니카를 입고 아케론을 배웅했다.

뒷짐을 진 채 싱긋 웃는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흘끗 바라보았다. 장난기 젖은 목소리가 이어졌다.

“선물이 뭔지 안 물어봐요?”

아케론은 지그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사실 오늘 아침부터 루키우스는 들떠 있었고, 그와 반대로 아케론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로마에 가면, 내가 보낸 선물이 있을 겁니다.”

그건 평소와 같은 모습이었으나 오늘의 그들은 조금 더, 조금 더 평소의 특색이 강했다.

“건강하시길, 게르마니쿠스.”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곤 루키우스가 뒷짐을 풀었다. 그러곤 두 손을 뻗어 아케론의 목에 시원한 두 팔을 둘렀다.

키스는 짧았다.

행복 또한.

그러나 만족을 해야 한다.

루키우스의 눈에 아쉬움이 짧게 스쳤다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때였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팔을 물리려던 루키우스가 몸을 멈칫했다. 고개를 든 그가 햇살에 그을린 사내의 얼굴과 마주하며 얼굴을 희미하게 굳혔다.

주홍색 햇살이 누비는 그의 얼굴은 단단했다.

아케론은 무심한 푸른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말을 내뱉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을 생각입니까?”

루키우스는 침묵 끝에 잠긴 목소리를 흘렸다.

“그래.”

깊게 가라앉은, 어둑한 보랏빛 눈이 아케론을 담았다.

아케론은 마치 왕좌의 앉은 군주처럼 오연한 얼굴로 그를 좌시하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입술을 깨물며 힘주어 다시 말을 내뱉었다.

“……그래요.”

떨림이 가신 목소리가 차갑고 매서웠다.

“네, 그래요.”

그러곤 그는 몸을 돌려 빠르게 도무스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아케론은 그런 그의 팔을 부여잡아 거세게 당겼다.

“뭐 하는 짓이야!”

날카롭게 울린 비명 소리는 이윽고 헉, 숨이 몰아쉬는 소리로 바뀌었다.

아케론이 그의 팔뚝을 부여잡은 손을 높이 들고 루키우스의 뺨을 움켜쥔 것이다. 무표정한 얼굴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식은땀이 흐르고,

비로소 루키우스의 얼굴에 진실 된 감정이 물결쳤다.

서서히 일그러져가는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이 속삭였다.

“너는 어떻게 버틸 거야?”

루키우스는 그 말을 버티지 못했다.

“놔….”

아케론은 묵묵히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몸을 비틀어 허공에 들린 팔을 빼내려 했다. 흐느끼며 그는 말을 되뇌었다.

“이거 놔…!”

아케론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집요한 눈으로 발버둥을 치는 루키우스를 노려볼 뿐이었다. 발악하는 목소리가 흘렀다. 루키우스는 목숨이 경각에 다다른 사람처럼 자지러지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게….”

물기 젖은 눈과 깊게 가라앉은 눈이 마주했다.

그 순간 흐른 흐느낌.

울먹거리는 말.

“내게 이러지 마세요.”

무너져 내린 루키우스가 울음을 터뜨리며 속삭인 그 순간,

“루키우스.”

사내는 더 이상 참지 못했다.

“도저히 안 되겠어.”

그 순간 아케론은 고요함 속 숨겼던 불타는 열정을 비로소 드러냈다. 건조한 것만 같았던 두 눈이 폭발했다. 안광이 튀고 얼굴에 감정이 물결쳤다. 아케론이 손을 뻗어 비명을 내지르는 루키우스의 허리를 낚아채고, 그를 품에 안았다.

“주, 주인님!”

발버둥을 치는 그를 품에 안고 아케론이 조급한 발걸음을 뗐다.

*

어떻게 버티냐니…….

어떻게 버티냐니!

루키우스가 울음을 터뜨렸다. 감정의 둑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냥, 그냥 버티는 거야!’

몸의 병이 그를 갉아먹었을 때처럼.

마음의 고통이 몸을 으스러트릴 때처럼.

운명이 해일처럼 덮쳐 왔을 때처럼.

그냥.

그냥 버티는 거야.

‘그 수밖에 없잖아. 그럴 수밖에 없잖아…!’

거센 운명의 물살 앞에서 인간이 무얼 할 수 있는가?

한낱 인간 따위는 흐르고 흐를 뿐이지.

영혼이 마모하는 것을 감수하고, 나는 네가 네 운명의 길을 밟도록 놓아주려 했다.

그런데 왜?

“이거, 이거 놔!”

아케론의 품에서 루키우스가 몸부림을 쳤다. 눈물을 흘리며 그가 울먹거렸다.

“이거 놓으란 말이야!”

아케론이 그의 품을 끌어안고 걸었다.

어느 순간 루키우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따가운 햇볕이 눈을 찌르던 그때에 깨달았다.

‘아.’

그들의 해변이었다.

아케론이 그때 루키우스의 몸을 놓아주었다.

“아….”

루키우스가 비틀거리며 해변의 모래를 사박 밟았다. 새하얀 모래는 여름의 마지막 햇살을 받으며 황금색으로 빛났다. 바위와 절벽을 치는 파도가 거품을 이루며 흐드러졌다.

눈물을 흘리며 루키우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금파가 물결치는 지중해의 푸른 물. 절벽에 휘감긴 그 아름다운 바다를 바라보았다. 자연이 병이 되어 가둔 바다 위에 투명한 물결이 치고 있었다.

절벽 아래 바다는 그들의 사랑스러운 추억이 담긴 곳이었다.

루키우스가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앞을 나섰다. 그는 시원한 물에 발을 담글 때가 되어서 몸을 멈칫했다. 아니, 그는 엉덩방아를 찧었다.

뜨겁게 달궈진 모래.

그곳에 몸을 무너트리며 루키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래.’

눈물을 흘렸다.

‘넌 왜 그래….’

뜨거운 모래에 몸을 웅크린 채 서럽게 울었다.

그때였다.

“사랑해.”

숨을 헐떡거리며, 모래에 두 발을 밟고 선 채, 그 장면을 바라보던 아케론이 몸을 움직여 루키우스를 향해 다가갔다. 엉엉 우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모래에 털썩 무릎을 꿇고 몸을 무너트려 껴안았다.

“이거 놔….”

무거운 사내의 체중에 짓눌려 루키우스가 몸을 바르작댔다. 뜨거운 모래가 발뒤꿈치에 밀려 나가고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갔다. 아케론은 그의 물결치는 뜨거운 금발에 키스를 하며 불에 달군 쇠공을 토해 내듯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사랑해.”

뜨거운 말.

“아, 아아.”

루키우스의 홉뜬 눈에 눈물이 맺혔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비비며 아케론이 헐떡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너를 사랑해.”

루키우스가 흐느꼈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여린 몸을 으스러트릴 듯이 그를 거칠게, 거세게 끌어안았다.

“루키우스…….”

루키우스가 눈물을 떨어트렸다. 거친 모래에 생채기가 나게 뺨을 그곳에 비비며 그는 숨을 헐떡거렸다. 공황에 빠져 잠긴 목소리를 흘렸다.

“안 돼….”

“사랑해.”

“안 돼…. 안 돼…….”

“사랑해.”

가는 허리를 팔로 잡아당기곤 사내는 속삭인다.

“사랑합니다.”

루키우스의 몸을 품에 끌어안은 채 그는 뜨거운 모래투성이가 되어 모래사장을 굴렀다. 루키우스의 몸을 으스러트릴 듯이 껴안고, 체취를 묻혔다. 옷 밖으로 드러난 모든 몸의 부위에 그의 살갗이 닿도록 하며, 간절히 말을 내뱉었다.

“내 자유를 네게 줄 수 있어.”

루키우스가 울음을 터뜨리게 만든 말이었다.

“왜….”

결국 그는 반항을 포기하고 모래사장에 몸을 축 늘어트렸다. 그런 그에 아케론 또한 구르던 몸을 우뚝 세웠다. 그의 등에 파도 거품이 묻어 있었다. 튜니카의 등 부분이 물에 젖어 있다. 어느새 젖은 모래까지 내려온 사내는 루키우스와 부둥켜안은 자세 그대로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그를 으스러트릴 듯이 끌어안은 채, 체온을 전했다.

“왜…… 왜…!”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다!

정열을 듣고 있다….

그 순간 루키우스는 참지 못해 울부짖었다.

그러나 저를 끌어안은 사내를 밀어내지 않았다.

흐느끼며 몸을 모래사장 위에 무너트렸다.

축 늘어진 청년의 몸을 검투사의 강인한 몸으로 누르며, 그는 속삭였다.

“사랑해.”

흐르는 눈물.

쉬어빠진 목소리.

“아카이아1)로 가자.”

말의 끝은 떨리고 있었다. 갈라져 있었다. 루키우스의 몸에 경련이 일었다. 축축한 어깨가 알리는 바가 있었다.

아케론은 말을 잠시간 내뱉지 않았다. 숨을 헐떡거리다가 이를 악물며, 뜨거운 목소리를 토해내듯 말을 했다.

“운명에서 도망쳐.”

루키우스가 고개를 도리질했다.

그는 울먹거리며 말을 내뱉었다.

“그럴 수 없어.”

무얼 위해 살아왔는데.

여태껏 무얼 위해 달려왔는데.

“그럴 수 없어…!”

그런데 너는 지금 내게 이리 말하는 건가.

“그럴 수 없어. 그럴 수….”

루키우스가 엉엉 눈물을 터뜨렸다.

산의 정상까지 마지막 한 발자국이 남았다.

7년의 조용한 사투가 결실을 보기 직전이었다.

“그럴 수…… 없어.”

이것은 아케론의 운명인 동시에 루키우스의 운명이었다.

“…넌 가야 해.”

그런데 어째서 너는 이래…….

“넌….”

공황에 빠진 루키우스는 그저 한마디 말을 되뇔 뿐이었다.

“넌 로마로 가야 해.”

루키우스가 모래사장 위에 얼굴을 떨구었다. 그곳에 푹 얼굴을 묻고 그는 몸을 움직이지 못했다. 가늘게 떨리는 몸. 새어 나오는 흐느낌.

가녀린 몸을 두꺼운 몸으로 누른 채 아케론이 속삭였다.

“그럼 너는?”

루키우스가 물기에 젖은 속눈썹을 떨었다.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너는 어떻게 할 건데.”

그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야.

그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지….

루키우스가 희미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를 본 순간 아케론은 그의 허리에 두른 팔에 힘을 주곤 몸을 돌렸다.

위에 있던 아케론이 모래사장에 등을 댔다. 쏴아아, 파도가 몰아치는 소리를 들으며 그는 젖은 모래 위에 몸을 뉘었다. 거품이 그의 고동색 머리에 스며들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의 가슴 위에 있었다.

아케론은 그의 작은 머리통을 손으로 눌러 가슴에 닿게 한 채 속삭였다.

“나를 보내고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눈물이 튜니카에 배어 나왔다.

아케론은 이를 악물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이내 속삭였다.

“나랑 함께해, 루키우스.”

루키우스가 습기에 젖은 눈을 떴다. 고개를 들어 올려 그는 눈물이 흐르는 자안으로 아케론을 응시했다.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에 물기가 묻어나왔다. 루키우스는 밀물처럼 마음을 휩쓰는 감정의 물살을 견디지 못했다.

‘아, 나의 열정!’

벌어진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가는 숨이 흘러오고. 헐떡거리는 숨을 내뱉는 입술에 아케론은 키스를 했다. 모래사장 위에 몸이 다시 굴렀다. 루키우스의 등이 다시금 흰 모래 위에 닿았다. 체중을 실어 그의 몸을 누르며 아케론은 입술을 탐하곤, 입술을 떼었다.

그러곤 속삭였다.

“아카이아로 떠나.”

루키우스가 울며 말했다.

“이러지 마.”

그는 간절한 얼굴로 절박하게 말을 했다.

“아테네로 가자. 아니면 로도스 섬으로….”

로도스 섬.

그 말을 듣는 순간 루키우스는 울음을 터뜨리며 웃었다.

“알고 있었어?”

아케론은 말 대신에 그의 입술을 머금는 것으로 답했다. 가벼운 키스가 끝나고 아케론은 조용히 속삭였다.

“떠나.”

루키우스의 두 눈이 흔들린 순간이었다.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준 말이 이어진다.

“로마를 떠나.”

불타오르는 눈과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갈등하고 있었다.

“그 지긋지긋한 곳에서 벗어나서 나랑 함께해.”

가빠지는 호흡. 흔들거리는 눈.

무너져 내리는 얼굴을 노려보며 아케론이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입술에 입을 맞추며 그는 고요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널 사랑해.”

그게 마지막이었다.

루키우스의 부드러운 뺨에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

“나는….”

더듬거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나, 나는….”

이를 악물며, 울먹거림을 참으며 루키우스가 턱을 덜덜 떨었다.

“나는…. 나는…….”

시야를 가득 채운 푸른 불꽃!

폭발하는 별과 같은 눈.

아케론.

그의 게르마니쿠스가 뜨거운 열정을 품고 뜨거운 고백을 하고 있었다.

“나는…….”

인생의 지침이 되었던 등대가, 사랑을 말한다.

영혼을 불태우는 불꽃이 눈앞에 있었다.

“그대와…….”

거부할 수 없다.

“그대와… 함께…….”

그리하여 멍한 얼굴로 말을 하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이 갈망 어린 얼굴로 바라보았다. 역광을 받은 사내의 얼굴에 희열이 물결쳤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케론의 호흡이 가빠 오고, 얼굴에 환한 미소가 감돈다.

그때였다.

“나는 그대와 함… 아케론!”

역광을 진 사내의 등 너머로 검이 날아왔다.

경악한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어깨를 밀치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뒤늦게 인기척을 느낀 아케론이 몸을 돌렸을 때 날카로운 검은 그의 목을 노리고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아악!”

찢어지는 비명을 들으며 아케론이 다급히 몸을 움직였다. 꺾이는 허리에 검은 튜니카 상의의 일부만을 베고 살갗을 베지 못했다. 몸이 물려지는 순간, 시선을 습격자로 향한 아케론이 그의 정체를 확인하고 눈을 크게 떴다.

“포스투무스.”

그곳에는 태양을 등진 사내가 흉흉한 얼굴로 검을 치켜들고 있었다.

“그 애한테서 당장 물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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