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1화 (7/13)

-공금&갠소-

<펜은 부러지면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아닙니까?>

7년 전, 로마에 큰일이 있었다.

게르마니아의 전선을 안정화시킨 장군, 영광스러운 게르마니쿠스-게르만을 정복한 자-의 호칭을 받은 발레리우스가 로마를 배반한 것이었다.

그는 게르만의 대족장인 군디카리스와 내통하여 로마의 영토를 내어 주었다.

그 사실을 알린 것이 바로 게르마니쿠스의 부관 포스투무스였다.

포스투무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현재 상게르마니아 전선을 총괄하고 있는 사령관의 이름이었다.

*

그날 아케론은 무죄 석방되었다.

“달마티카 의원은 과음을 했습니다. 재판관님. 그 상태에서 제 노예와 대담을 하다가 흥분을 했고요.”

루키우스는 달마티카의 죽음을 사고라 증언했고, 증거를 제시했다. 달마티카가 본디 지병을 앓고 있었다는 의사의 증언이 이어졌고, 셈프로니우스 씨족을 대표해서 온 그나이우스가 그를 확언했다.

“그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은 것은 확실합니다.”

담담히 말을 내뱉은 루키우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마르쿠스를 바라보았다.

“쓰러지는 모습을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집정관.”

마르쿠스는 그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저 또한 그때 과음을 하여 정신이 온전치 않았습니다.”

그의 계획의 패착은, 셈프로니우스라는 명문 씨족의 자긍심이 그의 생각보다 대단하다는 것이었다. 달마티카가 미소년 노예를 탐하는 것은 공직자들 사이에서 셈프로니우스의 이름을 가진 사내들을 욕 먹이게 하는 요소였다.

그 정도, 그 선까지는 용납해 줄 수 있는 탈선이긴 했다.

“감히 원로원의 명함을 달고 로마 시민을 강간하려 하다니…!”

그러나 루키우스와 얽힌 혐의는 다르다.

원로원 의원이 로마 시민을 해하려는 것, 그것도 사내를 강간하려 들었다는 혐의.

그것은 로마의 천 년 역사에 있어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카이사르의 사촌이 아닌가?

셈프로니우스 씨족의 사람들은 달마티카를 역겨워했고, 또 씨족의 몰락을 두려워했다.

루키우스에게 언질을 들은 그나이우스는 일을 수습하기 위해 이스카리아 섬으로 달려왔다. 프로콘술인 그는 재무관으로 지방에서 복무를 하던 중이었고, 루키우스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루키우스는 제 노예를 살리는 조건으로 사건을 묻기로 했고, 그나이우스는 그의 제안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세상에 알려지면 안 될 일이었다. 그나이우스와 씨족에게 달마티카의 죽음은 오히려 다행인 것이었다. 더 큰 사태가 벌어지지 않고 이리 조용히 된 게 천만다행이다.

그런 까닭으로 그나이우스는 씨족의 일원을 죽인 아케론을 증오하지 않았다.

오히려 입을 막아 주었다며 고맙게 여겼지.

“나는 개선식을 한 번 본 적이 있지.”

그렇게 안도하던 그나이우스는, 그러나 소문의 이스카리아의 왕과 마주하고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그 노예.”

“…….”

“익숙한 얼굴이더군.”

담담히 저를 바라보는 루키우스를 향해 그나이우스는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감당할 수 없을 게요.”

루키우스는 잠시간 그를 마주 바라보다가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그 행동의 의미를 그나이우스는 잠시간 해석하다가 이내 그만두고 고개를 돌렸다. 루키우스는 현명한 그나이우스에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에게는 더 중한 과제가 남았으므로. 더 이상 셈프로니우스 씨족과 달마티카 의원에게 힘을 쓸 시간이 없었다.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내가 비틀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석방된 아케론이 루키우스를 감정이 텅 빈 공동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청명한 하늘 아래 부는 바람을 기분 좋게 맞이하며 그가 자그마한 웃음을 흘렸다.

역시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일그러지는 얼굴을 바라보며 루키우스가 속으로 뇌까렸다.

너, 내 몸에 흐르는 피를 혐오하는구나?

루키우스를 웃게 만든 일이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는 아케론의 사랑을 바라지 않았으니까.

‘나를 절대로 사랑하지 마.’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집으로 돌아가자, 아케론.”

아케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석 달의 시간이 흘렀다.

*

“펜은 부러트리면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아닙니까?”

사각, 소리를 내며 종이 위를 유려하게 움직이던 갈잎펜이 멈췄다.

종이 위를 응시하던 눈이 위로 뜨여졌다. 소년은 고요히 말을 내뱉은 이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생각 없이 그 말을 내뱉은 듯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잠시간 그 백치의 얼굴을 응시하던 소년이 다시금 시선을 돌려 종이 위 빈 여백을 바라보았다.

그런 눈으로 볼 것까지는….

매정한 반응에 머쓱한 듯 고개를 돌리며 사내가 웅얼거렸다.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소년은 종이 위에 펜을 움직이는 일에 열중할 뿐이었다. 담담한 얼굴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죽어도 딱히 상관없는 아무 짝에 쓸모없는 자다.

무표정한 얼굴에 스치는 차가운 조소를 모른 채 사내는 그저 멋쩍게 웃을 뿐이었다.

소년은 말없이 갈잎펜을 움직였다.

여백 위, 삭막하기까지 한 단정한 필체로 문장을 써 내려갔다.

[꽃은 오로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날로부터 7년 후.

“으응.”

성인이 된 소년이 사랑스러운 사내의 억센 머리카락을 매만지고 있었다.

꽃이 만발한 정원 가운데에서 루키우스가 조용히 웃고 있었다.

‘꽃은 오로지 그 향기를 맡을 수 있는 자에게 주어져야 한다.’

손에 움켜쥔 억세고 뻣뻣한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가 고개를 숙였다.

부드러운 입술이 이마에 닿고, 나지막한 웃음이 흘렀다.

장미의 이름을 모르는 자에게 그 아름다운 꽃은 어울리지 않지 않는가?

*

휘이잉.

페리스타일에 선선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올리브 나무가 흔들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페리스타일에는 색색의 꽃이 피어나 있었다. 보랏빛 꽃들이 흔들거리고 분홍색 꽃들이 움트는 정원에는 봄의 기운이 물씬 풍겼다. 사랑스러운 온기가 서려 있었다.

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중해의 겨울은 북부 라티움에서의 생활에 익숙한 루키우스에게 그다지 독하지 않았으나, 그래도 봄은 좋은 것이다.

봄은 좋은 것이다.

‘그래.’

속으로 곱씹던 루키우스가 문득 정신을 차리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봄은 역시 좋아.’

사내는 풀밭에 누워 있었다. 루키우스의 새하얀 허벅지에 뺨을 댄 채 잠에 취해 있었다. 봄의 기운이 그의 얼굴을 누볐다. 루키우스는 유독 눈그림자가 짙은 사내의 얼굴에서 한참 동안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속삭였다.

“아케론.”

봄의 향기가 난다.

따사로운 햇살이 무심한 사내의 얼굴을 누빈다.

“일어나.”

루키우스가 애정이 꿀처럼 떨어지는 눈으로 사랑스러운 사내를 바라보았다. 날카롭고 무뚝뚝한 사내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햇살에 달궈진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점심을 먹어야지.”

아케론이 스륵 눈을 떴다.

시리도록 푸른 눈이 드러났다.

루키우스는 살포시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다.

아케론은 잠시간 얼음같이 투명한 눈을 깜빡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꽃이 피어나는 페리스타일에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본 채 서 있다가, 루키우스부터 몸을 움직였다.

튜니카 옷자락을 팔랑거리며 앞서가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잠시간 바라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식당으로 향했다.

“으음, 좋아.”

식사는 언제나 그렇듯이 화려했다.

버터를 바른 병아리 구이가 메인으로 나왔다. 바삭한 빵은 기본으로 있었고, 라즈베리가 박힌 신선한 치즈가 접시 가득히 나왔다. 싱싱한 청포도가 대접에 있었고, 포도주는 종류별로 가득했다.

“코나를 위해서는 점심을 가볍게 하라 하지만 나는 싫어.”

꿀빛 금발을 늘어트린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가슴팍에 누워 칭얼거리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자색 눈동자를 깜빡거리며 아케론의 입술을 톡 건드렸다. 아케론은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았고, 루키우스는 그런 아케론의 거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아케론이 라즈베리가 박힌 치즈를 바른 빵을 베어 물었다. 그런 그를 잠시간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장난기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케론이 먹는 빵의 바삭한 면을 베어 물며 루키우스가 싱긋 웃었다.

“맛있다.”

빵을 우물거리면서 하는 말을 들으며 아케론이 시선을 돌렸다. 의자 밖으로 손을 늘어트린 채 그는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속삭이듯 말을 내뱉었다.

“나는 먹을 수 있을 때 먹어 놔야 해.”

그러곤 그는 손을 뻗어 거위 간 파테를 바른 빵을 움켜쥐었다. 야금야금 빵을 베어 먹는 루키우스가 마치 없는 사람처럼 아케론은 말없이 식사를 했다.

풍족한 점심을 마치고도 그들은 식당을 떠나지 않았다.

굴 껍데기로 양치를 하고도, 손을 씻고도 그들은 트리클리니움 위에서 뒹굴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몸 위에서 올라탄 채 물러날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배가 너무 불러.”

루키우스는 칭얼거리며 아케론의 손을 잡아 이끌었다.

“이것 봐. 완전 통통하다고.”

아케론의 거친 손이 루키우스의 통통한 배를 쓸었다. 아케론의 손이 리라를 치듯 움직이고 루키우스가 그의 손등을 탁 내려쳤다.

“아케론!”

항의하는 듯한 말에 아케론이 예의 그 무심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루키우스는 그의 목에 매달려 칭얼거렸다.

“내 배를 가지고 놀지 마.”

장밋빛 불그스름한 뺨을 생기로 빛내며 루키우스는 속삭였다.

“부끄럽단 말이야.”

눈을 흘기는 그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아케론은 손을 물렸다. 루키우스는 그에 자그마한 웃음을 흘리며 아케론의 단단한 가슴에 몸을 기댔다.

“산책을 하자.”

그러곤 그는 아케론의 입술을 톡톡 건들며 말했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즐겨야 돼.”

눈을 휘며 말을 하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말없이 바라볼 뿐이었다.

“봄을 즐기자.”

의자의 팔걸이에 기댔던 팔꿈치를 떼어내곤 아케론이 상반신을 일으켰다.

그렇게 회랑을 걸었다.

회랑에는 꽃냄새를 그득그득 품은 바람이 불었다. 루키우스는 뒷짐을 진 채 경쾌한 걸음걸이로 아케론에 앞서 걸어갔다. 튜니카가 살랑거리며 새하얀 다리를 드러냈다. 아케론은 꽃이 만발한 페리스타일을 흘끗거렸다.

루키우스가 도토리를 발견한 다람쥐처럼 쪼르르 페리스타일을 향해 달려갔다. 아케론의 걸음이 멈추어 선 순간이었다.

“아케론.”

맑게 울리는 종과 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말이 퍼졌다.

아케론은 그 자리에서 우뚝 선 채 보랏빛 제비꽃을 뺨에 대며 웃는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이것 봐.”

꽃을 닮은 색의 눈이 휘어졌다.

아케론은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페리스타일을 밟았다.

봄을 즐기는 청년을 따라갔다. 아케론의 걸음은 호수 근처에서 멈추어 섰다. 루키우스가 시원한 분수를 등진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케론.”

루키우스의 입가에 안개 같은 미소가 머금어졌다.

햇볕이 사선으로 내려앉은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청량한 웃음이 흐르고 있었다.

아케론은 잠시간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봄날의 분수에 시선을 주었다.

쏴아아, 시원한 소리를 흘리는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루키우스는 그런 그를 따라 고개를 돌려 분수대를 바라보았다.

“시원하구나.”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들으며 아케론이 고개를 다시 돌려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루키우스는 그 순간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나를 사랑하지 마.”

아케론은 잠시간 그런 그를 바라보다가 몸을 돌렸다.

별채로 떠나는 그를 루키우스는 잡지 않았다.

*

“30분 후에 씻겠다.”

별채로 돌아온 아케론은 노예에게 명령을 하여 씻을 준비를 했다. 그것은 하루의 일과였다. 정해진 시간에 씻으려 함은. 아케론의 개인 시중 노예인 안드로게우스는 이제 그를 제법 잘 알고 있었다.

팔팔 끓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아케론은 피로에 물든 몸이 나른해졌을 때 욕탕을 벗어났다.

그는 향유를 쓰지 않았다. 머리를 잘 말리지 않는 편이었다.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발코니에 간 아케론이 아침의 평화로운 모습을 잃어버린 밤의 바다를 응시했다. 그악스럽고 사나운 밤바다는 발톱을 숨긴 맹수와 같다.

아케론이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난간에 기댄 몸을 돌렸다.

말없이 별채에 돌아왔다.

[Ignoramus et Ignorabimus]

우리는 모르고 모를 것이다.

벽에 걸린 나무판을 흘끗 바라보던 아케론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어깨에 걸친 푸른색 팔리움을 의자에 건 그가 책상 앞에 앉았다.

그는 일지를 써 내려갔다.

주홍색 불빛이 흔들리며 사내의 고요한 얼굴을 담았다.

갈잎펜이 멈춘 것은 아스라한 목소리가 들려올 때였다.

“아케론.”

아케론의 손이 멈칫했다. 사각거리던 소리가 끊긴 때였다. 아케론의 푸른 눈이 종이에 쓰인 글자를 응시했다.

[무가치한 삶도 계속되어야만 한다.]

시간이 흘러 그가 손에 쥔 갈잎펜을 내려놓고 문밖으로 향했다.

문이 열린 순간 아케론은 물결치는 금발을 휘날리며 저를 향해 뛰어오는 아름다운 청년을 마주할 수 있었다.

자수정을 깎은 듯한 눈에 환희와 희열이 물들어 있었다.

“아, 아케론….”

신음과도 같은 목소리를 흘리며 그는 아케론의 날카로운 얼굴을 손으로 더듬었다. 온 얼굴을 손으로 누비며 그의 턱선에 키스를 했다.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턱을 깨물었다. 제게로 몸을 기울이는 루키우스의 허리를 껴안고 아케론은 그를 별채 안으로 이끌었다.

침대에 몸이 무너져 내리고, 신음이 흘렀다.

아케론이 체리색 입술을 베어 물었다. 루키우스는 순순히 입술을 벌렸다.

“아, 음.”

손아귀에 쥔 풍성한 금발을 잡아당기며 아케론이 말랑한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을 불어넣었다. 루키우스는 고개를 꺾은 채 그의 숨결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손이 각진 어깨를 움켜쥐고 있었다. 육중한 검투사의 몸이 가는 몸을 억누르고 있었다.

창문 사이로 흰색 달빛이 흐른다.

아케론은 키스를 하는 내내 눈을 감지 않았다.

고요한 푸른 눈이 고통과 쾌락에 젖은 금발 청년의 얼굴을 담았다. 찡그려진 새하얀 얼굴에 식은땀이 서려 있었다. 아케론은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살 둔덕을 파헤쳤다.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희미한 신음이 흘렀다.

“으응….”

아케론은 입술을 입술로 짓눌러 신음을 목구멍에 빨아들였다.

삽입의 순간 루키우스는 신음을 흘렸다.

“아윽!”

남근은 체중이 실린 몸짓에 의해 깊이 삽입되었다. 루키우스는 목젖이 도드라지게 뒤로 목을 꺾고 신음을 흘렸다. 마주 닿은 배에 윤곽이 도드라지고 있었다. 아케론의 육중한 몸이 루키우스를 완전히 짓누르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신음을 흘리며 아케론의 두꺼운 몸을 끌어안았다.

“하…… 악!”

금발이 물결쳤다.

아케론이 코끝을 목덜미에 묻고 허리를 움직였다.

적나라한 소리가 이어지고, 신음이 이어졌다.

삽입의 과정은 파도가 느릿하게 물결치는 것 같았다.

루키우스의 가는 허리를 잡아당기며, 아케론은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루키우스는 숨을 하닥거리며 괴로워했다. 맞지 않는 체격은 성교 때마다 항상 루키우스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불그스름한 남근이 부드러운 살 둔덕을 완전히 꿰뚫고, 여린 고깃덩어리를 둘로 나눌 때였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몸에 포도 넝쿨 같은 팔과 다리를 얽은 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달콤한 신음을 흘리며 눈물을 흘리곤 가여운 표정을 지었다.

“아케론…….”

아스라한 신음이 귓가에 울렸다. 아케론이 고개를 들어 올리곤 그 순간 몸을 멈칫했다.

물기 어린 눈과 마주하곤 그는 한참을 그것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아케론….”

달콤한 목소리를 흘리는 분홍색 입술을 바라보다가 그것을 빨아들였다.

뜨거운 이마에서 땀방울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침대가 끼익거리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것은 평범한 밤이었다.

평소처럼 루키우스가 밤을 찾은 날이었고, 평소처럼 대화 없는 정사였다.

평소처럼 주인과 노예의 밤이었다.

평소처럼….

정사는 루키우스가 기절을 하고 난 후에 끝이 났다.

“으음….”

정사 후, 아케론은 몸이 연결된 채 루키우스를 끌어안았다. 늘어진 몸을 으스러지듯 세게 끌어안으며, 그는 풍성한 금발에 코를 묻고 얼굴을 비볐다. 그곳에서는 향기가 났다.

그윽하고 달콤한 향기가 났다.

루키우스는 물기에 젖은 눈을 깜빡거리며 색색 숨을 내뱉고 있었다.

기진맥진한 몸. 엉망진창이 된 채 축 늘어진 상태에서, 루키우스는 쉬어빠진 목소리로 그리 말을 내뱉었다.

“좋아해.”

아케론의 두꺼운 가슴에 입술을 맞추며, 그는 조곤조곤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이런 걸 원래 좋아해.”

아케론은 사근사근한 목소리를 무시한 채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는 행위를 이어 나갈 뿐이었다. 루키우스는 나긋하게 말했다.

“너와 하는 섹스가 좋아, 아케론….”

아케론은 귓가에 맴맴 감도는 목소리를 끝끝내 무시했다.

잠시간 평화로운 시간이 흘렀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너른 가슴에 이마를 비비며 키득거리며 웃었다. 아케론은 루키우스의 살갗에 코를 묻은 채 숨을 들이켰다.

아케론이 고개를 돌려 루키우스의 발간 얼굴을 바라보았다. 식은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붙어 있었다. 감정을 알 수 없는 무심한 눈이 느릿하게 깜박거린다. 루키우스는 그의 달아오른 가슴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장난을 쳤다.

“아케론.”

그러던 와중에 속삭임이 흘렀다.

“내일 해변에 나갈래?”

땀에 젖은 사내의 두툼한 가슴, 근육 사이에 검지를 미끄러트리며 루키우스가 작게 웃었다.

“날이 따뜻해져서 물이 이제 차갑지 않다더군.”

“…….”

“나, 물놀이를 하고 싶어.”

루키우스는 지중해의 햇살을 받은 파도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아케론을 보았다. 생기 넘치는 눈에서 아케론은 헤어날 수 없었다.

루키우스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나체로 수영을 할 거야.”

아케론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루키우스는 그에 속상해하지 않았다.

그는 자그마한 웃음을 소리 내어 흘리며 사랑스럽게 웃을 뿐이었다.

아케론은 그런 그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숨을 내쉬고 있었다.

*

루키우스는 그가 내뱉었던 말을 지켰다.

“나, 소풍을 갈 거야.”

그는 아침 일찍부터 들떠 솔론을 괴롭혔다. 충직한 집사는 아직 물이 차갑다며 난리를 피웠지만, 루키우스는 그의 말을 가볍게 흘려들었다.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침대에서 뒹굴뒹굴하는 그의 얼굴에는 생기가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케론의 별채였다.

아케론은 그의 얼굴에 잠시간 시선을 주었다가 시선을 돌렸다. 풍성한 나뭇잎이 바람에 흔들거리고 있었다. 페리스타일을 바라보던 그는 루키우스의 재촉을 이기지 못해 결국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제게 다가오는 사내의 목에 자연스레 팔을 두른 루키우스가 그의 뺨에 키스를 하며 속삭였다.

“아케론. 절벽 아래 해변에 가 봤어?”

아케론은 답변을 하지 않고 걸음을 이어 나갔다.

별채를 벗어나 페리스타일을 걸었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품에 안겨 기쁜 듯이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소풍 준비를 끝낸 집사가 아케론에게 다가왔을 때, 루키우스는 그만 잠이 들어 있었다. 너른 사내의 품에 안겨 꾸벅꾸벅 조는 그를 집사는 부드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가, 아케론을 불손한 눈빛으로 노려보았다.

“잘 모시는 게 좋을 겁니다.”

그는 마치 아케론이 제 선량한 주인을 꾀어 낸 것처럼 굴었다. 아케론은 그런 그의 시선을 모르는 듯 굴었다. 무심한 얼굴로 바구니를 잡아 드는 아케론을 집사는 흉흉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긴 한숨을 내뱉었다.

루키우스는 그의 품에 안겨 있다가 하품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눈을 끔뻑거리며 멍청한 표정을 짓는 루키우스가 이윽고 말을 내뱉었다.

“여기가 어디야?”

아케론은 턱 끝을 치켜들어 답을 했다.

고개를 돌린 루키우스가 새하얀 모래사장을 마주하고 눈을 크게 떴다.

그곳은 절벽 아래였다.

로마식 저택, 루키우스의 별장이 있는 장소 아래의 해변.

아케론이 품에 안은 루키우스를 내려놓았다.

루키우스는 비틀거리며 반짝거리는 흰 모래를 밟았다. 시원한 바람에 금사와 같은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루키우스는 홀린 듯이 푸른 물이 펼쳐진 들판을 향해 다가갔다.

은색 물결이 치는 푸르른 바다 앞에 선 채 그는 한참을 움직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아케론은 그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광활한 자연의 앞에서 너무 조그마해 보였다.

당장에라도 물거품이 될 듯 사라질 듯한 위태로운 모습에 아케론은 몸을 멈칫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루키우스가 고개를 돌렸다.

“난 바다가 좋아.”

싱긋 웃으며 내뱉은 말이었다.

파도가 몰아치는 소리가 시원하게 고막을 파고들고 있었다.

푸른 눈을 고요히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이내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 수영할 거야.”

그러곤 그는 긴 팔다리를 자랑하듯 기지개를 켜듯 황금빛 햇살 아래 훌렁 옷을 벗어 던졌다.

순식간에 늘씬한 몸을 햇살 아래 드러낸 루키우스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처럼 기지개를 켰다. 아케론은 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것을 마주하고 있었다.

관절이 옅은 분홍색인 부드러운 몸은 평소처럼 창백해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햇살 아래 역동적으로 반짝거렸다.

시원한 미소는 몰아치는 파도와 같았다.

루키우스의 발이 파도 거품을 밟았다.

천천히 그는 푸른 물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잠수를 하는 듯했던 루키우스가 수면 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물방울이 허공에서 뿌려지고 행복에 젖은 미소가 뇌리에 남았다.

아케론이 몸을 움직였다.

사부작 흰 모래를 밟으며 그는 해변에 들어섰다.

루키우스는 수영을 했고, 그동안 아케론은 절벽 앞 바위에 걸터앉은 채 수영을 하는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그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금발의 청년은 에메랄드빛 물 아래로 몇 번이고 잠수를 했다. 유영하는 물고기 꼬리같이 새하얀 두 다리가 흔들거리다가 사라졌다.

짠 바람을 맞으며 아케론이 물에서 자유자재로 수영하는 금발의 아름다운 청년을 바라보았다.

루키우스는 마치 아케론의 생명력을 흡수한 것처럼 보였다.

역동적인 검투사인 아케론은 더욱 정적이 되었고, 병자와 같던 루키우스는 동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젖은 금발에 물이 떨어져 내린다.

생긋 웃으며 바위를 향해 몸을 돌리는 루키우스와 마주하곤 아케론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파도가 절벽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그가 루키우스의 눈을 응시하던 그때, 루키우스가 웃으며 손짓을 했다.

“이리 와.”

대답 않는 아케론에 루키우스가 손을 나팔처럼 모으곤 소리쳤다.

“시원해! 차갑지는 않고.”

반짝거리는 자수정 같은 눈과 마주하고 아케론이 느릿하게 눈썹을 깜빡거렸다. 루키우스가 헤엄을 치며 아케론을 향해 다가왔다.

“아케론.”

물에 살짝 닿은 검투사의 발을 손에 쥐며 루키우스가 활짝 미소를 지었다.

아케론이 몸을 일으켰다.

옷을 벗어 나신을 드러내고 아케론이 바다로 향했다.

첨벙!

물색이 아름다운 바다에 뛰어들며 아케론이 물살을 손으로 갈랐다.

바닷속을 유영하는 사내의 얼굴이 차분했다. 바다의 청량함에 기대어 마음의 불을 꺼내리고 있었다.

새하얀 모래를 손에 움켜쥐던 아케론이 문득 고개를 들어 올렸다. 햇살이 스며든 푸른 바닷속에서 루키우스가 손을 흔들고 있었다. 해초 같은 금발이 하늘거렸다.

거품 같은 미소가 아케론에게 닿았다.

그 순간 아케론이 입술 밖으로 보글거리는 숨을 내뱉었다.

푸른 세계를 자유롭게 헤엄쳤다.

저를 구속하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평화를 만끽했다.

물놀이는 주홍색 노을이 질 때까지 이어졌다.

“아, 즐거웠다!”

커다란 수건에 돌돌 말린 루키우스가 생기가 반짝거리는 얼굴로 아케론을 응시했다. 주홍색 햇살이 물든 사내의 얼굴은 한결 온화하고 가벼워 보였다. 따스한 햇살이 루키우스의 금발을 주홍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수건에 비비적거리며 루키우스가 싱긋 웃었다.

“너는 어땠어?”

그러곤 속삭이며 말을 내뱉었다.

아케론은 그 말에 답변을 하지 않았다.

루키우스는 잠시간 멈칫한 그의 손을 놓치지 않았다.

침묵 끝에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자.”

길어진 물놀이에 피곤함을 느낀 듯 루키우스의 얼굴이 창백했다. 아케론은 알게 모르게 힘들어하는 루키우스를 수건째 품에 안고 운반했다. 단단한 사내의 가슴에 머리를 대며 루키우스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아케론은 묵묵히 정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을이 진 사내의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문득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혐오스러워?”

답변은 없었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래, 좋아.”

“…….”

“그게 좋은 거야.”

느릿한 한숨을 내뱉으며 루키우스가 몸을 늘어트렸다. 사내의 두툼한 가슴에 달콤한 금발을 비비며 루키우스는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아케론은 턱을 찌르는 따가운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저택에 다다르던 시점에 루키우스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일은 뭘 할까, 우리?”

그 말을 듣고서야 아케론은 고개를 돌려 루키우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사랑스러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

평화로운 한때를 보냈다.

함께 식사를 했고, 오후의 한적한 시간을 함께했다. 해변에 나갔다. 페리스타일을 산책했다. 섹스를 했고, 키스를 했다. 서로를 부둥켜안고 온기를 나눴다.

루키우스는 이전의 동요가 거짓말인 것처럼 아케론에게 태연스럽게 다가갔다.

그리고 아케론은 그런 루키우스를 밀어내지 않았다

그들은 한철의 아름다운 봄을 평화롭게 맞이하고 있었다.

평화롭고 게으르고 풍족한.

이상적인 낙원의 일과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봄이 무르익을 때였다.

봄의 끝자락이 찾아오고 있었다.

“올리브 숲에 가자.”

어느 날 루키우스가 싱긋 웃으면서 말을 내뱉었다.

“그곳에서 소풍을 해. 돗자리를 펴고 놀자.”

생긋 웃으며 말을 하는 루키우스는 대답 없는 아케론에 아랑곳 않고 들떠서 행동했다.

루키우스는 신이 나서 저택 옆 올리브 숲을 방문할 준비를 했다. 돗자리를 싸고, 치즈와 빵과 햄이 든 바구니를 챙기고, 모기향을 준비했다.

“아케… 아…….”

그러나 루키우스는 올리브 숲에 가지 못했다.

돌연 쓰러진 루키우스가 그날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던 것이다.

*

사흘이 흘렀다.

그동안 루키우스는 피를 토하고 사지를 바르작댔다. 아케론은 루키우스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를 옆에서 간호했다. 이를 악물며, 일그러진 얼굴로 피를 닦았다.

“아파.”

루키우스는 흐느꼈다.

“아파, 아파….”

집사가 공황에 빠져 노예들을 윽박질렀다.

“당장! 당장 로도스 섬에 전갈을 넣어… 당장 그들을…!”

피에 젖은 손이 아케론의 손안에서 늘어졌다. 아케론은 창백한 얼굴로 그것을 거세게 움켜쥔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가 아픈 동안에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곁을 묵묵히 지켰다.

일련의 사람들이 찾아왔다 나갔다를 반복하고, 루키우스는 정신을 차릴 때마다 약을 억지로 먹으며 토하길 반복했다.

침상에서 일어난 루키우스는 저를 품에 안고 있는 사내를 목도하곤 눈물을 흘렸다. 소리 없이 우는 그의 손을 부여잡은 채 아케론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끅끅거리던 루키우스가 물기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올리브 숲에 가야 해.”

아케론은 물기에 젖은 목소리를 들으며 멍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숲은… 더 이상 볼 수 없어.”

숨을 헐떡거리며 루키우스가 손을 뻗었다.

“이리 와.”

자그마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케론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루키우스가 그의 품을 파고들었다. 아케론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그를 껴안아 주었다.

피로 물든 청년을 끌어안은 채 같은 침상을 썼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눈을 꾹 감았다. 잘게 떨리는 몸을 아케론은 으스러지듯 껴안으며 떨리는 숨을 흘렸다.

그의 품 안에서 몸을 떨던 루키우스가 문득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동정하지 마.”

“…….”

“나를 동정하지 마라.”

아케론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내 삶을 감히 동정할 수 없다, 너는.”

제비꽃색 눈이 어둠 속에서 형형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차라리 나를 혐오해.”

그 말을 끝으로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어 창백한 얼굴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푸르스름한 달빛이 창문 사이로 스며들고 있다. 그 사이로 보이는 아케론의 얼굴은 핏기가 가셔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다.

경직된 얼굴을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며, 루키우스가 작게 웃었다.

“이미 그러고 있겠지만….”

아케론은 끝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다음 날 루키우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웃으며 말했다.

“미안해, 아케론.”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속삭거리는 말이었다.

“올리브 숲에 가자.”

루키우스는 결국 뜻을 이루었다.

*

집사의 격렬한 반대를 루키우스는 완강하게 꺾었다.

“숲에 가자.”

아케론은 제 팔을 부여잡고 웃는 루키우스를 창백한 얼굴로 노려볼 뿐이었다.

그들은 결국 올리브나무 숲에 갔다.

이스카리아의 왕과 카이사르의 사촌은 흔들리는 올리브나무를 감상했다.

그곳은 저택의 바로 옆에 있는 숲이었다. 바람이 부는 한산한 장소. 테라스에서 잘 보이는 울창한 숲이었다.

푸르른 녹음으로 가득한 숲에서 루키우스는 돗자리를 펴고 앉아 요거트를 먹었다. 아케론은 한쪽 무릎을 세우곤 한쪽 다리를 편 채 앉아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몸이 아파.”

야금야금 요거트를 먹던 루키우스는 문득 입술을 열어 말을 내뱉었다.

“오래 살지 못할 거야.”

아케론은 무얼 어찌 말을 할까 고민하는 듯 입술을 열었으나 결국 아무런 말도 내뱉지 않았다.

소풍은 정적이었다. 아케론은 말을 내뱉지 않았고, 루키우스는 그의 다리에 기대어 재잘거리는 새처럼 말을 내뱉었다.

“죽기 전에 할 일이 있어, 나는.”

얼마 전에 쓰러진 탓인지 그날의 주제는 꽤나 무거웠다.

아케론의 서서히 일그러지는 얼굴을 루키우스는 모르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필사적으로 살려 해, 나는. 아케론.”

“…….”

“내 존재의 의미를 입증해야 하니까.”

나지막한 목소리였다.

“어떤 사람은 살아갈 이유를 증명하기 위해 사투를 벌여야 하지.”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정적이 있었다.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흘렀다.

조금의 시간이 흘러 아케론은 굳게 다물렸던 입술을 열었다.

“왜 내게 온 겁니까?”

그것은 예상치 못했던 말인 듯했다. 아케론의 팔뚝을 감싸 쥐고 있던 루키우스가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자리에 그를 내려다보는 아케론이 있었다.

루키우스가 품에 안은 팔을 스륵 놓으며 중얼거렸다.

“글쎄.”

아케론의 얼굴은 냉랭했다.

“너는 앞으로 어쩌고 싶은데?”

그러자 아케론이 담담히 답했다.

“자유를 박탈당했습니다.”

루키우스는 그 말이 마뜩잖은 듯 미간을 좁혔다.

“뭐라고?”

“노예이지 않습니까.”

루키우스는 푸르스름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할 자유는 있지.”

아케론은 고개를 절레 저었다. 그러곤 속삭였다.

“제게는 그것도 없습니다.”

루키우스의 얼굴을 희미하게 굳게 한 말이었다.

흔들리는 시선 앞에서 아케론은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내게는 생각할 자유도 없습니다.”

그러곤 그는 입술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을 내뱉으려 하지 않았다.

루키우스는 그런 그를 잠시간 노려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그래?”

그리고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올리브나무 숲의 끝을 향해 달려갔다.

절벽을 향해 질주했다.

“뭐 하는 짓이야!”

아케론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생각을 하지 않고 아케론은 움직였다.

절벽을 향해 달려 나가는 루키우스의 얼굴은 냉랭했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던지고 있었다.

아케론은 그를 향해 달려가 절박하게 손을 뻗으려 했다.

“너!”

아케론은 간신히 떨어지려는 루키우스의 팔을 잡아당길 수 있었다. 1초의 차이로 절벽 아래로 무너져 내리는 몸을 부여잡았다.

허억! 숨이 터졌다.

금발이 물결쳤다.

그 순간 아케론의 눈에 불꽃이 피어났다.

“너!”

아케론의 품에서 가벼운 웃음이 흐르고, 달콤한 목소리가 흘렀다.

“잡았네.”

루키우스는 단단한 사내의 가슴에 기대어 몸을 늘어트렸다. 그의 품에서 루키우스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만족스러운 얼굴로 그가 눈을 감았다.

아케론이 숨을 헐떡거리며 손아귀에 쥔 루키우스의 팔을 비틀었다.

루키우스는 신음을 흘리며 말을 내뱉었다.

“이건 네가 생각한 일인가?”

루키우스는 고통을 참고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나는 명령하지 않았는데 어째서 행동했지?”

팔을 움켜쥔 손이 잘게 떨렸다.

아케론의 입술 밖으로 분노가 억눌린 목소리가 흘렀다.

“뭐 하는 짓이야.”

그 순간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날카로운 웃음이 흘렀다. 멈칫한 사내의 몸에서 루키우스가 빠져나왔다. 고개를 돌린 그가 너른 가슴을 밀치며 거칠게 소리쳤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마!”

순간 놀라 몸을 떨어트린 아케론은 마주할 수 있었다.

“네 생각은 네 거다! 아케론!”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은 두 눈을.

“나는 네 생각의 주인이 된 적이 없다.”

노여움이 서린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루키우스는 매섭게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나는 네 감정을 가진 적이 없어.”

루키우스가 상처 입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네 영혼의 주인은 너다, 아케론! 나는 네 주인이 아니야. 나는 네 영혼을 구속하지 않았어.”

헐떡거림.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

“네 마음에 족쇄를 채우지 마라….”

그 말을 끝으로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바람이 흔들리는 소리를 들으며 아케론이 그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이야.”

갈라진 목소리였다.

루키우스는 그를 차갑고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으로 내 곁에 왔어.”

우수수 소리를 흘리는 청량한 올리브나무 사이로 두 사람이 대치를 이어 나갔다. 루키우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아케론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케론이 숨을 헐떡거렸다. 일그러진 사내의 얼굴을 노려보던 루키우스가 이내 날카로운 웃음을 흘리곤 손을 비틀었다.

아케론은 순순히 손을 놓아주었다.

붉은 자국이 난 팔을 주물럭거리던 루키우스가 이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참지 못해서.”

“…….”

“네게 안기고 싶어서.”

루키우스는 담담히 말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한번 닿고…….”

그러나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침묵이 흘렀다.

그 끝에 루키우스는 힘없이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하지만 넌 날 사랑하지 마.”

아케론이 그를 노려보았다.

들끓는 시선 앞에 루키우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힘이 빠진 듯한 얼굴을 바라보며 아케론이 갈라진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의 형이 내게 한 짓을 압니까?”

루키우스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알아.”

조용히 읊조리는 말에 아케론의 얼굴에 균열이 번져 나갔다.

“그가 널 망가트렸지.”

청량한 올리브나무를 등진 채 루키우스가 눈을 감았다.

한참 동안 그들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

아케론이 몸을 웅크렸다. 창틀에 걸터앉아 페리스타일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 심장을 불태울 거다…… 포스투무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옛날의 맹세를 생각하며 아케론이 무심한 눈을 깜빡였다.

‘사랑.’

방 안에서, 침대에 눕기 직전의 시간. 아케론이 상념에 잠겨 있었다. 클리데스 바리아나의 숲을 도주했던 새하얀 달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하늘 위에 높게 뜬 보름달을 마주하며, 그는 그때의 기억을 회상했다.

‘사랑.’

동시에 물결치는 금발의 청년을 떠올렸다.

‘복수.’

피에 젖은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숲에서 한 맹세는 어디 갔는가?

‘사랑….’

아케론의 눈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사랑….’

또 다른 목소리가 선연히 귓가에 울렸다.

“날 사랑하지 마.”

그것은 루키우스가 종종 내뱉는 말이었다.

“나를 사랑하면 안 되는 거야.”

어느 날 아케론이 조용히 물었던 적이 있었다.

“어째서 당신은 내게 그리 말하는 겁니까?”

루키우스는 사랑스러운 얼굴을 그에게 들이대며 웃을 뿐이었다. 아케론은 그 얼굴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말을 내뱉었다.

“왜 당신은 사랑을 이루려 하지 않습니까.”

루키우스는 작게 웃으며 답변했다.

“그야 내 사랑은 이뤄질 수 없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루키우스는 거짓말처럼 웃음을 얼굴에서 지우며.

“그러니까 너는 절대로 나를 사랑하지 마.”

아케론은 그 말에 끝끝내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때의 생각을 하며 현실의 아케론이 눈을 감았다.

눈앞에 금색 물결이 파도치고 있었다.

새하얀 달빛이 아케론의 방에 스며들던 때였다.

그 시각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위 로마식 저택의 어느 방 한편.

생각의 주인이 포도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사랑.’

노곤해지는 몸의 느낌에 휩싸여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증오.’

불타오르는 두 눈을 생각하고 있었다.

‘증오.’

인생의 목표를 되새기고 있었다.

‘증오라.’

그 말을 곱씹으며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세상을 밝히는 새하얀 달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방 안에 들어섰다.

유한한 평화가 이어져 나갔다.

*

“내 사랑은 이뤄질 수 없어.”

페리스타일, 분수의 옆에서, 사랑하는 사내의 무르팍을 베고 누워,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너는 나를 증오해야 하지.”

분수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청량히 울렸다. 따스한 햇볕이 루키우스의 상앗빛 얼굴에 내려앉았다. 안 그래도 순금을 녹인 것처럼 화려하던 루키우스의 금발은 눈이 부시게 빛이 나고 있었다.

요즈음 루키우스의 얼굴에선 생기가 넘쳤다.

“그게 마땅한 일이야. 나는 네 인생을 망친 원수의 동생이고, 내 욕심을 위해 네 자존심을 짓밟았어.”

상쾌하고 발랄하게 말을 내뱉으며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손등을 쓰다듬었다. 그는 부드럽고 나긋한 웃음을 흘리며 속삭였다.

“내가 싫지?”

확언하듯, 마치 세뇌를 하듯 내뱉는 말이었다.

“싫어야 해.”

아케론은 답변을 하지 않았다. 외면하는 사내의 얼굴을 루키우스는 잠시간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그래야 마땅하지.”

달콤한 금발이 하늘거렸다.

기지개를 켜며 루키우스가 하품을 했다.

나른한 말이 흘렀다.

“내일은 시내에 가볼까?”

사근사근한 목소리는 마치 청량한 물소리처럼 아케론의 귀를 어지럽혔다.

“좋은 극단이 왔대. 나 연극을 보고 싶어.”

고개를 숙인 아케론이 말없이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아케론.”

눈이 마주치는 순간 루키우스는 생긋 웃으며 말을 내뱉었다.

“아케론.”

분수대에서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아스라한 목소리를 덮었다.

“…아케론.”

아케론은 그의 말을 듣기 위해서 귀를 기울여야만 했다.

자그마한 침묵이 흘렀다.

그 끝에 루키우스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를 사랑하지 마.”

“…….”

“식사를 하러 가자.”

“…….”

“배가 고프네.”

아케론의 무표정한 얼굴을 루키우스는 손으로 쓰다듬다가, 입술에 쪽 키스를 했다.

*

그들은 풍족한 저녁을 먹었다.

저녁으로는 메추라기 요리가 육질이 부드럽게 조리되어 올라왔다. 루키우스는 향신료를 뿌린 조개찜이 맛있다며 두 접시를 먹었다. 기분이 좋은 듯 과음한 루키우스가 자리에서 뻗어 아케론은 그를 업고 숙소로 데려다줘야만 했다.

“아케로온.”

루키우스는 떠나려는 아케론의 옷자락을 부여잡고 칭얼거렸다. 아케론은 목에 둘러지는 부드러운 팔을 거부하지 않았다. 루키우스의 연한 분홍색 입술을 건조한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린 채 탐했다.

정사가 끝나곤 아케론은 침대에 힘없이 늘어진 루키우스를 돌봤다.

그는 색색 가쁜 숨을 흘린 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아케론은 뒷정리를 마친 후 루키우스의 처소를 빠져나갔다.

“아케론.”

힘없는, 어쩐지 처연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마음을 붙잡았으나 아케론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루키우스는 아케론과 아침을 함께하며 뚱한 얼굴을 했다. 아케론은 그런 그를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했다.

루키우스는 식사가 끝날 때 거짓말처럼 평소의 평화로운 얼굴을 되찾고, 나긋한 목소리로 아케론에게 산책을 권유했다.

분수대를 멍하니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문득 덥다며 옷을 벗어 던지고 호수에 뛰어들었다. 아케론이 미간을 꿈틀거리며 분수대의 물을 맞은 채로 깔깔대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웃음이 뚝 끊겼다.

루키우스는 물 아래로 잠수를 하여 얼굴을 보여 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호수 밖으로 나온 루키우스의 얼굴은 어쩐지 차가웠다.

아케론은 저를 보지 않고 옆을 지나치는 루키우스를 그 자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 한참을 바라보았다.

그날 밤에 아케론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아케론은 얼굴을 손에 묻은 채 한참을 침대 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잘 잤어?”

아침에 루키우스는 어제의 일이 거짓말인 것처럼 다시 나긋한 모습을 보였다. 손바닥을 흔들며 인사하는 금발의 청년이 하품을 하며 느릿느릿 빵을 우물거렸다. 어쩐지 졸음이 가득해 보이는 루키우스는 결국 식사를 하다가 아케론의 팔뚝에 뺨을 대고 잠을 잤다.

아케론은 그를 흘끗 바라보다가 작게 떨리는 금색 속눈썹에 잠시간 시선을 주었다.

그날 점심에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딱히 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재회를 했다.

발코니에서 나간 아케론은 멍하니 푸른 바다를 바라보는 루키우스와 마주할 수 있었다. 쓸쓸함이 사로잡힌 청년의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아케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자색 눈동자와 마주한 것이었다.

루키우스는 희미한 웃음을 흘렸다.

아케론은 무표정한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몸을 돌려 발코니를 떠났다.

저녁에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방에 조르르 기어들어 왔다.

아케론은 침대에 웅크려 있었다. 그에게 애교를 피우려던 루키우스는 투덜거리며 방 안으로 들어오다가 땀범벅이 된 그를 발견하고 몸을 멈칫했다.

그는 헐떡거리는 아케론의 등을 말없이 쓰다듬었다.

아케론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몸을 웅크리다가 이내 충혈된 눈으로 루키우스를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손을 뻗어 루키우스의 목을 와락 움켜쥐었다.

컥, 둔탁한 소리를 흘리는 루키우스를 침대에 짓누르며 두 눈에 불을 밝혔다.

“죽으면 안 돼.”

루키우스는 헐떡거리며 애원했다.

“나는 아직 죽으면 안 돼.”

물기에 젖은 자안을 노려보며 아케론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식은땀이 범벅이 된 얼굴. 사내의 창백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루키우스는 하염없이 울었다.

“나는 죽으면 안 돼…… 아케론.”

흐느끼는 루키우스를 이글거리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아케론은 목을 움켜쥔 손에 힘을 풀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루키우스의 가쁜 숨을 아케론은 빨아들였다.

두툼한 가슴으로 여린 몸을 짓누르고 다리를 잡아당겼다. 루키우스는 순순히 그의 손길에 복종했다. 몸을 열었다.

힘없이 흔들리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입술을 탐하며 끈질기게 노려보았다.

불꽃이 타오르는 눈으로 노려보며 거칠고 격렬하게 허리를 움직였다.

정사 후에 루키우스는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다.

평소보다 격렬한 정사.

그에 망신창이가 된 몸에 그는 평소보다 더욱더 정신을 차리기 힘들어했다.

루키우스는 눈을 뜨고 아케론의 손을 움켜쥔 채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미워?”

아케론은 숨을 헐떡거리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푸른 눈을 질끈 감으며 그는 침대 위에 걸터앉은 채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늘어진 어깨를 침대 위에 힘없이 누워 바라보며, 루키우스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잘하고 있어.”

그런 날들의 연속이었다.

무르익는 봄을 즐기면서도 겨울의 잔여가 남아 그들을 괴롭히는 날들.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동요를 모른 척했고, 아케론은 스스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흘러 여름이 다가올 때였다.

어느 날의 일이었다.

“이게 뭐야?”

그것은 정말 뜻하지 않게 일어난 사건이었다.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방에서 빈둥거리던, 평소와 다를 바 없던 날의 일.

나신이 된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는 탁상에 손을 뻗어 종이 뭉치를 손에 쥐었다. 침대 위, 루키우스의 옆에 마찬가지로 나신을 드러내고 있던 아케론이 탁상 위 일기의 존재를 깨닫고 순간 미간을 좁혔다.

“보지 마십시오.”

저걸 치우지 못했다.

아케론은 루키우스를 말렸으나, 그는 상관하지 않고 키득거리며 파피루스를 움켜쥐었다.

“왜 이래.”

결국 아케론에게 파피루스를 빼앗긴 루키우스가 침대에서 굴러 아케론을 향해 몸을 돌렸다. 인상을 팍 쓴 사내의 얼굴에 부끄러움이 스치고 있었다. 그의 목 부근이 발갛게 된 것을 눈치챈 루키우스가 투덜거리다가 말고 몸을 멈칫했다.

“일기를 쓰는 거야?”

루키우스는 웃음을 참으며 말을 내뱉었다.

“글 쓰는 걸 좋아해?”

아케론은 그 말에 시선을 회피하며 답했다.

“좋아하지 않습니다.”

부러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잠겨 있다.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잠시간 바라보다가,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로 속삭였다.

“글 쓰는 건 좋은 취미야.”

루키우스의 얼굴은 평소보다 한층 온화했으나, 아케론은 그를 알지 못했다.

“글을 쓰는 사람에게도, 읽는 사람에게도 큰 영향력을 주지.”

아케론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루키우스의 귓가로 딱딱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쓸모없습니다.”

루키우스가 멈칫한 순간이었다.

아케론이 손에 쥔 파피루스를 구기며 루키우스를 노려보았다.

“펜은 부러트리면 아무 짝에 쓸모없는 것 아닙니까?”

이글거리는 눈 안에는 분노가 스쳐 있었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아케론이 이상한 점을 깨달은 것은 조금의 시간이 흘러서였다.

루키우스의 이마에 식은땀이 흐르고,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분노가 물든다. 그 얼굴을 뒤늦게 눈치챈 아케론이 몸을 멈칫할 때였다.

루키우스가 흉흉히 일그러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닥쳐!”

높고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친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가슴을 밀치고, 침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아케론을 얼어붙게 한 일이었다.

*

그날 절벽 위 로마식 저택은 발칵 뒤집혔다.

“주인님!”

“주인님! 주인….”

저택의 모든 노예들이 나서 루키우스를 찾았다. 그들의 주인은 돌연 저택 밖으로 빠져나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집사는 그 사실에 상처받은 맹수처럼 울부짖었다.

“도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거냐!”

그는 일을 만든 장본인의 멱살을 움켜쥐고 이글거리는 눈을 빛냈다.

“도대체 그 불쌍한 분께 왜 그렇게 잔인하게 구는 거야….”

아케론은 휘청거리며 그의 손길을 받았다. 떨리는 숨을 내뱉으며 얼이 나간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네가….”

그런 그의 모습에 분노가 치밀어 올라 집사는 언성을 높이려 들었다.

그러나 그는 뜻을 이루지 못했다.

“닥쳐.”

돌연 흘러나온 서슬 퍼런 목소리.

“뭐?”

집사가 고개를 들어 얼어붙은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았다. 흉흉한 눈으로 그는 집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닥치라고.”

집사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들끓는 불꽃이 서린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감정이 꾸역꾸역 억눌린 목소리가 울렸다.

“제발 닥쳐!”

멱살을 움켜쥔 손에 힘이 빠졌다. 두려워하는 사내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아케론이 몸을 돌렸다. 손은 스르륵 멱살을 놓았다. 이를 악물며 사내는 저택 밖을 향해 뛰쳐나갔다.

비명과 분노에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그가 목구멍에 치솟는 비명을 삼켰다.

‘누가 나를 비난하지?’

그가 감히 저를 비난할 수가 있던가?

제 삶을 모르는 이가 감히 이 일을 논할 수가 있던가?

모르는 사람은 그 사안에 대해서 입을 열 수가 없다!

아케론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절망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아케론이 불타오르는 하늘의 환영을 목격했다.

그날, 하늘은 주홍빛으로 물들고 땅에는 매캐한 연기가 가득 찼다.

그때 게르마니쿠스는 절망에 절규했다.

“배신자!”

그러자 들끓는 목소리가 돌아왔다.

“배신자는 당신이겠지요.”

게르마니쿠스가 화살을 맞은 어깨를 감싸며 몸을 비틀거렸다. 피에 젖은 그를 검은 머리의 청년이 혐오하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투구를 벗으며 사내가 속삭였다.

“당신은 로마를 배신했습니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 사이로 타오르는 자색 눈동자가 불타올랐다.

그것은 신념의 눈이었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는 국가의 적을 용서하지 않는다!”

로마에 바치는 신념이 그곳에 있다!

게르마니쿠스가 이를 악물었다. 피가 잇몸에서 새어 나올 때까지 힘을 주었다. 턱에서는 그드득 소리가 흘렀다. 충혈된 눈에 결국 핏줄이 터지고, 손바닥에서 피가 흘렀다.

‘신념? 신념이라고?’

날카로운 자조의 웃음이 흘렀다.

‘맹세를 헌신짝처럼 여기는 신념이라!’

사내의 신념을 인정하지 못하겠다!

그의 분노를 정당하게 여길 수 없었다.

그러나 게르마니쿠스는 결국 도주를 해야만 했다.

‘살아라, 게르마니쿠스.’

그리 말했던 사흘의 벗의 말을 사수하러 게르마니쿠스는 도주를 꾀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을 남겼다.

“너와 네 가문을 로마에서 뿌리 뽑을 거다! 내 조국에서 종양 같은 너희를 도려 낼 거다. 포스투무스!”

그것은 정당한 보복의 외침이었다.

‘이것이 너의 로마라고? 정녕 너의 로마가 이런 비열한 나라라고?’

아케론이 울분을 터뜨렸다.

‘아니야! 이건 나의 로마가 아니다!’

그자의 로마를 부정했다!

그가 더럽힌 조국을 증오했다.

아케론은 증오에 불타오르는 두 눈을 번뜩거리며 맹세했다.

“네 심장을 불태울 거다…… 포스투무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그리고 그날로부터 7년 후 아케론은 또 다른 아르카디우스 풀케르의 자손과 마주했다. 아름다운 자색 눈을 가진 신비로운 금발의 청년과 조우했다.

저를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왜 나를 살렸어.’

아케론이 숨을 헐떡거렸다. 숨이 헐떡거리게 질주를 하며 루키우스를 찾았다.

‘왜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어.’

아르카디우스 풀케르의 자손을 찾았다.

‘차라리 넌 그때 날 죽였어야 했어.’

광인처럼 굴었다.

시장을 헤매며, 어둠이 내려앉은 장소 곳곳을 뒤졌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윤락가를 헤매며 루키우스를 찾았다.

‘넌 날 죽게 내버려 뒀어야 했다고! 네가 아르카디우스 풀케르라는 걸 모르게, 내가 너를 위해 목숨을 던지게 했어야 했다고!’

불꽃에 휩싸여 사내는 마침내 입술 밖으로 죽어가는 신음을 흘렸다. 목이 졸려 죽는 짐승처럼 처절한 소리를 흘리며 아케론은 일그러진 얼굴 위에 절규를 드러냈다.

‘내가 그 순수한 마음을 품고 죽게 내버려 뒀어야지….’

차라리 처형장에서의 죽음을 바란다!

누구보다 순수한 마음을 품고 죽기를 바란다.

미친 듯이 질주하며, 사람들의 욕설을 들으며 그를 찾으며 아케론이 비명과도 같은 말을 내질렀다.

“루키우스! 루키우스!!”

절규하는 사내의 눈에 핏발이 거미줄처럼 서려 있었다.

아케론이 이를 악물었다.

숨을 헐떡거렸다.

절망에 휩싸였다.

‘너는 왜….’

정처 없이 걷고 걸어 어느 순간부터 그는 숲에 이르러 있었다.

‘…나를 살리고.’

올리브나무 숲.

어둡고 한산한 그 장소.

‘고통스럽게 만들어.’

그곳에서 아케론은 간절히 찾던 것과 조우할 수 있었다.

아케론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아.”

작은 소리를 끝으로 침묵이 이어졌다.

쏴아아.

어느새 비가 몰아치고 있었다.

자각을 한 순간 추위와 칼바람이 그를 향해 몰아쳤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루키우스가 있었다.

아케론이 멍하니 올리브나무 숲의 끝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진흙을 밟으며 그가 절벽 끝에 선 루키우스를 향해 다가섰다.

발걸음은 조심스러웠고 또 정처 없었다.

아케론은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루키우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쏴아아.

인기척을 느낀 금발의 청년이 고개를 돌렸다.

아슬하게 절벽 위에 서 있는 그를 향해 아케론은 창백한 얼굴로,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뻗었다가 허공에서 그것을 오므렸다.

어정쩡하게 오므린 손을 주먹 쥐고 아케론이 새파란 입술을 달싹거렸다.

루키우스는 겁에 질린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사내를 잠시간 바라보다가 입술을 열었다.

“괜찮다.”

부드러운 목소리가 빗줄기를 꿰뚫고 아케론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걱정하지 마.”

선명한 목소리였다.

사내의 목울대가 잘게 떨렸다.

“나는 이 정도로 죽지 않는다.”

아케론의 습한 푸른 눈이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흔들거리는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루키우스는 담담히 말을 이었다.

“살 궁리를 찾지 못할 때마다 절벽을 찾지. 아케론.”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찬란한 금발이 흔들거렸다.

“그때마다 나는 강인함을 느낀다.”

루키우스는 팔랑거리며 날아가는 듯한 나비 같은 미소를 지었고, 아케론은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너는 나약하구나, 아케론.”

루키우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망연자실하게 루키우스를, 절벽에 선 청년을 바라보던 아케론이 그 순간 잘게 떨리던 주먹에 힘을 풀었다.

스륵 손이 늘어졌다.

영혼을 꿰뚫는 이슈타르의 눈을 마주하며 아케론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루키우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하늘을 등지며 그 청년은 웃고 있었다.

자유와 신념이 그곳에 있었다.

아케론은 비로소 인정했다.

‘네가 날 불타게 만들었어.’

그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내가 널 사랑하는구나.’

루키우스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내가 널 사랑하는구나.’

원수의 동생을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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