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열정>
“게르마니쿠스 막시무스 장군이 반역을 저질렀다!”
거리가 불타오르고 시장과 광장에 폭동이 일어나던 날을 기억한다.
광기가 로마를 태우던 날을.
“개선장군이 바바리안8)의 수괴 군디카리우스와 내통했다! 그가 감히 로마를 배신하고 군디카리우스의 손을 잡았다!”
나발 부는 소리가 울리고 이윽고 도착한 전령이 고래고래 소리쳐 내뱉은 충격적인 소식. 게르마니아 전선을 책임지던 오랜 로마의 영웅의 배반에 사람들은 경악하여 하나둘씩 거리로 뛰쳐나왔다. 방 안에 얌전히 틀어박혀 있던 금발의 소년 또한 당황에 물든 얼굴로 현관을 밟았다.
‘뭐라고?’
급격한 뜀박질에 숨이 가빠와 그는 저택을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해 기둥을 부여잡고 가쁜 숨을 내뱉어야만 했다. 가까스로 작은 폐에 공기를 담고 소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럼, 그럼 상게르마니아는 어떻게 된 거지? 안 돼! 17군단은 무조건 클라데스 바리아나의 치욕9)을 갚아야 한다! 그곳마저 완전히 뺏기면 로마는 라인강 동쪽으로 나갈 기회를 잃어버려!”
공직자가 입는 새하얀 토가 칸디다를 입은 사내를 향해 전령이 땀이 얼룩진 얼굴로 소리쳤다.
“다행히 그의 부관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장군이 반역 행위를 알아채고 게르마니쿠스를 추격 중입니다. 여기, 풀케르 장군께서 제게 반역 행위를 로마에 알리라며 내어주신 내통 협약서입니다! 당장 카이사르를 뵙게 해 주십시오!”
소년의 다리를 무너트린 말이었다.
‘반역자라고?’
7년 후 이스카리아섬의 로마식 저택.
“이, 이러지 마…! 아!”
페리스타일 바닥을 구르며 몸을 유린당했다. 거친 사내의 손이 가는 손목을 억누르고, 튜니카는 갈기갈기 찢겨 풀숲 위에 던져진 후였다. 거칠고 억센 풀이 구름 같은 팔 위에 분홍색 상처를 긋고 있었다.
“제발, 제발…… 그만해!”
폭력에 노출되어 고통을 겪는 그 순간.
문득 고개를 들어 올린 루키우스가 불타오르는 벽안과 마주하고 숨을 멈췄다. 몸을 유린당하는 상황에서 그는 상황에 맞지 않는 생각을 품고야 말았다.
“아, 아케론…….”
‘별과 같아…….’
몸을 밀치던 손을 더러운 흙바닥 위에 늘어트리며 루키우스가 저항을 포기했다.
페리스타일이 정적을 다시 되찾은 것은 새벽 별이 뜰 때의 일이었다.
*
“반드시, 반드시 살려야…!”
‘으음.’
신음이 흘렀다.
“누가 이런 짓을 했습니까? 이건, 이건…….”
“나, 나는….”
“너 이 죽일 놈 같으니라고! 은혜도 모르는 수치스러운 것!”
졸음과 피로에 휩싸여 루키우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시끄러.’
도대체 누가 내 잠을 방해하는가? 그 누구보다 편안한 잠을 잘 권리가 내게 있건만….
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억눌린 숨이 흐른다. 미약한 움직임에 누군가가 그의 뺨을 때리고 몸을 흔들었으나, 루키우스는 그들의 무례를 꾸짖지 못했다.
“주인님! 주인님, 정신이 드십니까?”
‘졸려, 너무 졸려.’
그저 원하는 것은 영원한 안식이다.
‘나, 열심히 살았는걸. 이제는 좀 쉬어도 되잖아.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살았는데…….’
그러나 점멸되는 시야 속 들려오는 떨리는 목소리에 루키우스는 안식에서 깨어나고야 말았다.
“루키우스.”
호소력 깊은 굵은 목소리에 살아야 할 이유를 깨닫고야 만 것이다.
‘……아직 세상에 남아야 할 이유가 있긴 하지.’
두 눈을 뜨고 루키우스가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곳에 흉흉히 일그러진 얼굴로 저를 노려보고 있는 사내가 있었다. 얼굴을 적시는 뜨거운 액체에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폭발하는 별과 같은 푸른 눈과 마주한 루키우스가 가쁜 숨을 내뱉으며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널 용서한다.”
그 순간 무너져 내리는 얼굴을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또다시 정신을 잃고야 말았다.
*
저택의 주인이 다시 정신을 차린 건 햇볕이 속눈썹을 어지럽히던 오후였다.
짹짹.
새소리가 울렸다. 숱이 많은 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하체에서 퍼져 나가는 격통에 미간을 좁히며 금발의 청년이 가쁜 숨을 내뱉는다. 영문 모를 고통에 루키우스는 앓는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멍한 눈을 깜빡거리며 그가 어리둥절해했다.
‘무슨 상황이지?’
루키우스가 조각난 기억을 맞추지 못한 채 헤맬 때의 일이었다.
“정신이 드십니까?”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루키우스는 굳은 얼굴의 중년 집사와 마주하고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솔론.”
느릿하게 달싹거리는 입술에 이윽고 얄팍한 신음이 흘렀다. 깊게 굳어진 솔론의 얼굴과 마주한 순간 루키우스는 뒤늦게 상황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는 침대 위에 엎드려 있고, 얇은 천으로 하체가 뒤집어 씌워져 있었다. 천 사이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뒤를 슬쩍 돌아본 루키우스가 노년의 의사를 발견하고 몸을 움찔거렸다.
“누워 계십시오.”
“…….”
“많이 상했습니다. 움직이다가 상처가 쓸리면 큰일 납니다. 움직이지 마십시오.”
루키우스는 순순히 일으켰던 상체를 침대 위에 푹 넘어트렸다.
치료는 섬세했다.
의사의 손길은 충분히 조심스러웠고, 몸에는 감각이 없었으므로. 허나 루키우스는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신음을 참지 못했다. 온몸의 뼈가 으스러진 것 같다. 정신을 차리는 것과 반비례하여 고통은 심해졌다. 술과 분노에 취한 사내가 저지른 돌발적인 행동의 결과다. 루키우스는 어젯밤 로마의 사내의 강인함을 충분히 경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루키우스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그가, 이럴 줄은….’
새파란 입술이 잘게 떨리고야 만다.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어.’
루키우스가 심란해할 때의 일이었다.
“허, 주먹이라도 쑤셔 넣은 겝니까?”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돌연 들려온 말에 루키우스가 나른하게 숨을 내뱉으며 고개를 돌렸다. 달콤한 금발이 창백한 뺨을 어지럽히고, 루키우스는 빠르게 굳은 얼굴을 부드럽고 여유로운 것으로 바꾸어 나갔다.
침상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두드리곤 루키우스가 느릿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비슷하지.”
의사의 얼굴을 와락 구기게 한 답변이었다.
“당신의 에라스테스10)는 제정신이 아니군요. 섬세히 가르치고 보호해야 할 에로메노스11)를 이리 짐승보다 못하게 대하다니. 그자는 수치스러운 자입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이를 향한 비난을 퍼붓곤 의사는 흰 천 사이로 손을 빼냈다. 물이 담긴 대야에 손을 넣어 씻는 의사를 루키우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의사의 비난을 루키우스는 작은 웃음으로 흘려 넘기곤,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농담이다.”
손을 씻고 있던 의사의 얼굴에 불쾌감이 스쳤다.
“그건 넣지 않았으니, 그만 화를 풀고 황금을 받아가.”
그 말을 내뱉곤 루키우스는 솔론에게 눈짓을 했다. 집사가 몸을 움직였다. 심드렁한 말에 화가 난 듯한 의사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짓을 받은 집사가 그에게 황금 니케 신상을 쥐여 준 것이다. 번쩍번쩍 휘황찬란한 니케 상을 손에 쥔 의사는 눈을 휘둥그레 떴고, 루키우스는 뜻대로 평화로운 정적을 다시 찾을 수 있었다.
의사가 빠져나간 자리에 정적이 감돌았다.
고요한 적막 속 루키우스가 침상에 금발을 어지러이 흐트러트린 채 몸을 축 늘어트렸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마음 또한 지쳐 있었고.
“솔론.”
침묵 끝에 루키우스가 힘겹게 입술을 열었다.
“그는 어디에 있지? 별채에서 쉬고 있나. 은근히 마음이 여린 자야.”
“마음이 여린 자가 이런 끔찍한 짓을 합니까. 마음이 독했다가는 아주 나라를 팔아먹겠군요.”
“설마 그를 벌한 거나?”
“아무 짓도 안 했습니다. 미리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설령 당신이 해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몸을 일으키려던 루키우스가 그의 말에 안도한 얼굴로 다시 침상에 폭 엎어졌다. 집사의 얼굴에는 짙은 피로감이 물들고 있었다. 어둑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집사는 루키우스를 내려다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몸. 끔찍한 일을 당한 주인의 울긋불긋 상흔이 남은 몸을 노려보며 솔론은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단지 피 흘리는 주인님을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길래 니코를 시켜 빼앗은 것뿐입니다.”
루키우스의 얼굴을 일그러트린 말이었다. 그는 번개처럼 몸을 일으키곤 고개를 돌려 집사를 노려보았다. 그러곤 굳은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그를 해치지 않았다고 신의 이름으로 맹세해라!”
솔론이 몸을 멈칫했다. 입술을 깨문 그를 루키우스가 사나운 사자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시선을 견디려던 그는 결국 굴복하여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그는 순순히 당신을 내놨습니다. 허나…….”
솔론은 말을 머뭇거렸다.
루키우스는 그를 노려본 채 말을 내뱉었다.
“거짓말을 한 거라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솔론.”
솔론은 한숨을 내뱉었고, 그의 얼굴에서 루키우스는 무언의 확신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 손을 대지는 않았나 보군.’
안도에 찬 루키우스가 몸에 힘을 풀고 중얼거렸다.
“일단 ‘그걸’ 줘. 지나치게 아프군.”
솔론의 몸을 멈칫하게 만든 말이었다. 그가 불만 어린 얼굴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말없이 술잔을 가리킬 뿐이었고, 솔론은 결국 그의 명령을 따라야만 했다. 집사는 그늘진 얼굴로 술잔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루키우스의 생명수가 든 잔이었다.
루키우스는 뜨겁게 달군 술잔을 건네받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그건 남용하시면 안 됩니다. 사실상 독과 다를 바 없는 약이란 걸 아시잖습니까.”
“그럼 어떡하지? 코끼리에게 밟혀 으스러진 것처럼 아픈데?”
“그래서 순순히 드리는 겁니다. 아니면 채찍질을 당할 걸 불사하고 집 안의 약이란 약은 다 부숴 버렸을 겁니다.”
“주인에게 아주 충성을 하는구나. 훌륭한 노예야.”
“은혜를 갚는 거지요.”
빈정대는 말에 돌아온 답변에 루키우스가 침묵을 택했다.
시간이 흘러 그가 잠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자존심에 많이 상처를 입었을 거다. 술에 취해서 극단적인 짓을 저질렀지만, 그는 원래 모질지 못한 성격이다.”
희석되지 않는 와인을 홀짝 마시며 루키우스가 되뇌었다.
“하물며 어린아이나 다를 바 없는 약자를 짓밟았으니 어련할까. 자결이라도 하지 않게 잘 막아야 한다.”
제비꽃을 닮은 자안이 승냥이처럼 빛난다. 어둑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루키우스의 얼굴에 조소가 희미하게 서려 있었다. 그는 로마인들의 머저리 같은 풍습을 수백 수천 가지는 알고 있었다. 개중에서도 가장 병신 같은 문화를 꼽을 수 있었고.
자살. 불명예를 씻기 위해 목숨을 끊어 책임에서 도피하는 그 행위를 루키우스는 가장 증오하고 있었다.
사회에도 개인에도 하나 득 될 것 없는 겁쟁이의 행동을 로마인들을 맹종한다. 운명을 회피하는 비겁함을 명예롭다 칭송한다. 루키우스는 로마의 자살에 대한 관념을 혐오했고, 또 조롱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루키우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와 맞닿은 것이었으므로.
“그가 죄에서 도피하지 않길 바란다. 나는 그 겁 많은 사내가 운명에 맞서길 원한….”
그리고 그 순간 대수롭지 않게 말을 잇던 루키우스가 얼어붙었다.
“주인님…?”
루키우스의 말을 묵묵히 듣던 솔론이 고개를 들어 루키우스를 응시했다. 루키우스는 창백한 얼굴에 불안을 희미하게 드러내며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긴장이 뒤덮은 얼굴, 새파랗게 떨리는 입술에 집사가 당황하던 그 순간 무거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지금 그에게 가야겠다.”
시들어가는 화초와 같이 힘이 없던 루키우스의 얼굴에 순간 강철로 만든 칼날 같은 예기가 감돌았다. 루키우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고 솔론이 그 순간 경악하여 소리를 내질렀다.
“아직은 움직이면!”
그의 비명을 뒤로한 채 루키우스가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
‘안 돼!’
사내의 고결함을 알았다!
본래라면 모든 영광을 누려야 할 로마인 중의 로마인이 신의 심판대 위에 수백 번도 넘게 목숨을 맡기게 된 이유가 바로 그것이므로. 그는 제 비겁함을 용납하지 못해 스스로의 발목에 족쇄를 채우고 겪지 않아도 될 수모를 자처했다.
하늘 꼭대기 올림푸스 산 위에서 지상 저 아래 타르타로스로 떨어져서. 로마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권과 자유를 박탈당하고는.
그렇기에 루키우스는 달릴 수밖에 없었다.
‘안 돼! 안 돼!’
귓가에 스치는 비명을 무시하며, 한순간 몸을 잠식했던 고통을 완전히 잊은 채 그는 질주할 뿐이었다. 말을 할수록 깊어지는 불안. 그 어느 불길한 생각에 이르러 루키우스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네 고결함을 이까짓 일에 내보이지 마라!’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은 아케론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고통과 자멸감이 깊게 뿌리를 내린 그 얼굴에 루키우스는 숨을 헐떡거리며 뜀박질을 이어나갔다.
‘네가 드러내지 않아도 될 장소에 네 영혼을 드러내지 마!’
질주하다시피 페리스타일을 가로지른 루키우스가 마침내 별채에 이르러 가쁘게 숨을 내뱉었다. 약한 폐가 몸을 무너트려 그는 결국 벽을 짚고 헐떡거릴 수밖에 없었다. 숨을 온전히 다 갈무리하기도 전에 루키우스는 타액이 묻은 입술을 손등으로 닦고 별채의 문을 부수듯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리고 그 순간 루키우스는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
피비린내….
그것은 전조였다.
고혹적인 색의 자안이 크게 홉떠져 흔들거린다. 아, 신음이 흐르고 잠시간 적막이 흘렀다.
세상이 멈춘 듯했다.
엉망이 된 몸을 이끌고 별채까지 달려온 루키우스는 방 안을 들여다본 순간 마치 신전의 동상이 된 것처럼 굴었다.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루키우스는 숨을 죽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숨을 달아오른 입술 사이로 내뱉으며 루키우스가 멍하니 바닥에 무릎을 꿇은 사내를 응시했다.
루키우스의 어깨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아…….”
침상 위에 얼굴을 묻고 숨을 헐떡거리는 사내가 뚝뚝 팔뚝을 타고 흐르는 피로 새하얀 대리석을 물들이고 있었다. 눈처럼 새하얀 침구가 선홍색 피로 물들어져 서서히 색이 입혀져 가고, 피비린내는 진해져 간다. 신선한 피는 손을 관통하여 침대 위에 꽂힌 검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파르르 손가락이 움찔거리고, 사내가 침상에 파묻힌 고개를 들어 올린 그 순간 루키우스는 완전히 얼어붙어 숨을 멈추고야 말았다.
“……케론.”
침대를 피로 물들인 사내의 눈은 초점이 흐릿해져 있었으나, 그 한가운데엔 차가운 불꽃을 품고 있었다. 마치 베스타의 신녀가 모시는 것처럼, 꺼지지 않는 신성하고도 뜨거운 불꽃이 눈 안에 타오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루키우스의 영혼을 이미 오래전에 불살랐던 것이다.
바로 루키우스라는 하루살이를 여기까지 이끈 불꽃.
그 눈에 홀린 루키우스가 정신을 차린 그 순간이었다,
“아, 아…!”
우짖는 짐승 같은 비명이 방 안을 울렸다.
“아케론!!”
얼어붙은 공기를 산산조각 내는 절규가 저택을 울리고, 항상 여유롭던 루키우스의 얼굴이 마치 토산처럼 무너져 내렸다. 절규하며 제게 손을 뻗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땀에 범벅이 된 얼굴로 고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아랫도리를 점거한 고통도, 당장에 쓰러질 것만 같은 피곤한 몸도 그 순간 모두 잊은 채 루키우스는 먹먹한 청각을 느끼며 자리를 뛰쳐나갔다.
“아, 아케론!”
사내의 육중한 몸이 루키우스의 손이 닿는 순간 무기력하게 쓰러져 내린다.
그에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아득함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온몸을 휘감는 끈적한 피. 코의 점막을 날카롭게 찌르는 피비린내.
순간 눈앞이 새까매지고, 정신은 까무러치고야 만다.
그리고 그때 루키우스는 이를 악물었다. 새하얘지는 시야를 가까스로 다잡으며 충혈된 눈을 부릅떴다.
‘안 돼!’
정신을 잃어서는 안 된다.
‘절망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다!’
두려움에 굴복해서는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지 않나?
‘정신을 무너트려선 안 돼, 순간을 놓아서는…….’
너덜거리는 몸을 부여잡으며 그가 속으로 되뇌었다.
‘이게 네 최선인가? 정말 이게 네 최선이야? 눈앞의 불행에 충격을 느끼고 쓰러지는 게 네 최선이라고?’
아니, 지금껏 운명에 패배하지 않기 위해 살아왔다!
사람은 패배하기 위해 창조된 게 아니라는 말을 신조로 삼고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나약한 몸뚱이를 이끌고 여기까지 왔다. 그리하여 피투성이가 된 사내를 부둥켜안은 지금 이 순간 루키우스는 스스로를 향해 냉철한 질문을 던질 수 있었다.
‘너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
루키우스가 숨을 헐떡거렸다.
“의사를 불러라…… 당장…!”
피투성이가 된 손을 움직여 루키우스가 제 무릎 위에 몸을 누인 사내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군데군데 엿보이는 얼굴이 피에 물들어 있었다. 늘어진 몸에서 전해지는 맥박에 거칠어진 숨결을 느끼며 루키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피로 물든 사내의 얼굴을 쓸어 그의 표정을 확인한 루키우스는 그 순간 앓는 듯한 작은 탄식을 내뱉었다.
“아…….”
그는 마치 거위 깃털로 만든 침대에 누워 잠에 취한 사람처럼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전에 본 적이 없었던 온화한 얼굴을 바라보며, 루키우스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해 눈을 질끈 감고야 말았다.
‘너는 쉬고 싶은 건가.’
떨리는 숨결을 내뱉으며 루키우스가 끈적한 액체로 젖은 사내의 온화한 얼굴을 쓰다듬었다. 침묵 끝에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 놔두지 않아.”
그가 안식을 찾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모든 책임에서 도피하고 홀로 평화를 되찾게 놔두지 않을 것이다. 그가 홀로 이 모든 투쟁에서 도망치고 영원한 패배자로 남는 꼴을 보지 않을 것이다.
그를 고난의 길로, 비난의 한가운데로, 죄업과 맞서 싸우도록 루키우스는 몰아세울 작정이었다. 그에게 견디지 못할 만큼의 험난한 운명을 부과할 생각이었다.
그가 스스로를 포기해도, 루키우스는 그를 포기할 생각이 결코 없었다! 그것은 그의 숙명과 이어진 길이었으므로.
‘너를 비참하게 만들리라.’
품에 안긴 사내의 얼굴 위에 경건히 입을 맞추며 루키우스가 떠올렸다.
그가 처음으로 무릎을 폈던 그 순간을.
*
[CIVIS ROMANUS SUM]
나는 로마 시민이다.
그것은 좌절하여 고개를 들어 올린 순간 보았던 기둥에 새겨진 문구였다.
바로 무릎 꿇은 소년을 일으킨 말.
*
커억!
바닷바람이 제법 거칠게 부는 날이었다.
밤이 깊은 날 저택에서 유일하게 빛이 흘러나오는 방이 있었다. 자정이 넘도록 불빛이 꺼지지 않은 그 방 안에선 고개를 숙인 금발의 청년이 목을 긁고 있었다. 사랑스러운 얼굴을 눈물범벅으로 물들인 채, 입술에는 핏방울이 스며든 침을 떨어트리면서.
그것은 자해가 아니었다. 오히려 숨통을 트기 위한 괴로운 몸짓에 가까웠지.
조여지는 숨통에 컥컥대던 루키우스가 침대를 구르며 목이 졸린 자 특유의 가래 끓는 소리를 흘렸다. 핏줄이 불거져 시뻘겋게 변한 눈으로 눈물을 흘리며 루키우스는 허공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허공이 아닌 다른 곳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더 찾아봐라….’
폭발하는 별과도 같은 두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죽음을 느낄 때마다 본능적으로 그 길을 밝히는 불꽃같은 두 눈을 생각했다. 지금 이 순간 또한 그는 괴로운 환영에 휩싸여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생존에 대한 의지가 솟구칠 때 루키우스는 항상 그 사내의 눈을 생각했던 것이다.
‘신이 너를 세상에 내린 이유가 한 가지는 있겠지.’
동시에 교차하는 기억을 함께 떠올리고 있었다.
‘아, 제기랄…!’
오늘따라 유독 고통이 심하다. 칼기침을 하며 루키우스가 숨을 헐떡거렸다. 피가 섞인 타액이 턱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본디 깔끔한 성격의 루키우스는 더러움보다 강렬한 고통을 느끼며 눈밭처럼 새하얘진 얼굴 위에 푸른 핏줄을 드러내는 중이었다. 한참을 고통스러워하던 루키우스가 문득 허공을 노려보고 입술 끝을 비틀고야 만다. 감정이 폭발하는 두 눈이 응시하는 건 피를 흘리는 사내의 기억이었다.
‘…네가 없어서야.’
입술 안에 맴도는 원망의 말을 삼키며 루키우스가 호흡을 길게 들이마신다. 루키우스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가 저택에 온 이후로 줄어들었던 발작은 그를 보지 못하는 기간 동안 눈덩이처럼 몸집을 불려 나갔으므로.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지 않는다는 걸 요즘 루키우스는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아케론을 보지 못하는 기간 동안 루키우스의 ‘고독’은 뿌리를 깊게 내렸다. 공허함이 깊어질수록 나약함은 빛을 발했고, 부수적으로 육신의 고통이 따랐다. 그를 다스리려 루키우스는 요즈음 약을 과다 복용하고 있었고.
지옥 같은 나날들을 어찌어찌 참아 왔건만…… 오늘이 한계인 모양이었다.
“컥, 커헉!”
몸을 고꾸라트리며 루키우스는 타액을 주륵 흘린다. 피비린내를 맡으며 그는 허탈하게 웃고 있었다.
‘미쳤군.’
차라리 배 속의 장기를 도려내고 싶다. 개미나 쥐 같은 게 몸 깊은 곳에서 제 몸을 야금야금 뜯어먹는 느낌이었다. 인내심이 강하던 루키우스는 결국 참지 못해 죽이지 못한 신음을 흘리고야 말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코마티스가 방 안으로 황급히 박차고 들어왔다.
“주인님!”
이런 상황을 대비하여 니코마티스는 항상 그의 옆방에서 대기하고 있다. 한동안 아케론에게 일감을 뺏겼던 그는 아케론이 손을 치료받는 동안 다시금 제가 할 일을 하고 있었다.
할 일이란 간호, 약 관리, 그리고 가장 중요한 루키우스의 혀가 숨통을 막을 때 그를 꺼내는 것을 의미했다.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방문을 밟은 니코마티스는 그리고 방 안에 들어선 순간 경악하고야 말았다. 황급히 방을 들어오던 청년의 몸이 그 자리에서 우뚝 선다.
“주, 주인…… 아…!”
멍한 눈으로 그는 한동안 대리석 바닥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식은땀을 흘리는 루키우스가 그곳에서 바닥을 기고 있었다.
“아, 아…….”
니코마티스는 한동안 반응할 수가 없었다. 아케론이 온 이후로 루키우스가 이리 심한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기에. 또 이전에도 이렇게 고통스러워한 적이 없었기에.
“힉, 히익!”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척추가 도드라지게 몸을 웅크린 루키우스는 체면을 완전히 잃고 지극한 고통을 드러내고 있었다. 바닥에 무릎 꿇고 이불보를 손으로 그러쥔 루키우스가 어깨를 잘게 떨며 욱욱 소리를 흘린다. 새파랗게 질린 입술에는 타액이 줄줄 흘렀고, 그곳에는 신선한 피비린내가 흐르고 있었다.
헛구역질을 하다가 기침을 콜록거리길 반복하던 루키우스가 문득 침상을 짚은 손을 미끄러트렸다.
그의 몸이 바닥에 무너진 순간, 제 할 일을 방관하던 니코마티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주인님!”
날카로운 비명!
혼비백산한 사내가 바닥에 엎어진 처량한 몸을 움켜쥐고 그의 이름을 부른다.
“주인님! 주인님!”
루키우스의 팔뚝을 부여 잡아채며 니코마티스는 그의 몸 상태를 살피려 들었다.
황금색 머리카락이 창백한 뺨 위를 어지러이 흘러내렸다. 루키우스는 마치 팔랑거리는 종이쪼가리처럼 흔들거렸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꾸만 늘어지는 팔에 니코마티스의 얼굴이 굳어져 가고. 그는 결국 루키우스의 뺨을 움켜쥐고 입 안에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니코마티스가 혀뿌리를 누를 때까지 루키우스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노예가 어쩔 줄 몰라 할 무렵의 일이었다.
“그만.”
스르륵 눈을 뜬 루키우스가 니코마티스의 어깨를 떨리는 손으로 부여잡는다. 애써 침착한 얼굴을 한 루키우스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키곤, 기어들어가는 숨을 내뱉었다. 깨문 혀에서 흐른 피를 내뱉으며 그는 고통에 신음하는 몸을 다잡고 있었다.
이까짓 고통 따위에…….
분홍색 선혈이 흐르는 입술을 닦으며 루키우스가 웅얼거렸다.
“마취약.”
“안 됩니다!”
평소에 우유부단하던 노예가 격양하여 반대했다.
“그건, 그건……. 사실 마취약이 아니잖습니까.”
고통에 몸부림치는 루키우스를 노려보며 니코마티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린다. 흔들리는 시선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아름다운 얼굴을 쓸고, 이윽고 잇새에서 짓씹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의사가 습관적으로 복용하지 말라,”
“가져와.”
그러나 니코마티스의 반항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서느런 목소리로 니코마티스의 입을 닥치게 하곤 루키우스는 감정이 거세된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주춤거리는 니코마티스를 향해 루키우스는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가져 와라, 니코마티스.”
니코마티스는 결국 그 말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참담한 얼굴로 선반을 열고 술잔에 황금색 약을 따랐다. 루키우스에게 술잔을 내밀 때 그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져 있었으나, 그가 바친 술잔을 루키우스는 망설임 없이 뺏어 들었다.
술잔의 내용물을 단숨에 비워 낸 루키우스는 직후에 조금 나아진 모습을 보였다. 고통이 물들던 그의 얼굴은 서서히 몽혼해져 갔고, 나른해져 갔다. 웅크린 몸 또한 이완되고 얼굴은 평온해진다. 다시금 평소의 나른한 모습을 되찾은 루키우스를 묵묵히 바라보던 니코마티스의 얼굴은, 그러나 그 순간 정반대 급부로 서서히 일그러져가고 있었다. 안도하지 못했다.
루키우스가 불로 불을 몰아내는 위험한 짓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았던 것이다.
‘저러면 안 되는데.’
약의 증세를 아는 니코마티스는 얼굴을 뒤틀며 손을 달싹거릴 수밖에 없었다. 루키우스가 요즘 저 약을 지나치게 복용하는 사실을 알았으므로. 그는 무모한 주인을 말리고 싶은 마음에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ડχ
‘안 되겠다.’
결국 그는 크게 마음을 먹고 입술을 열었으나, 그의 시도는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
“주인님, 전갈….”
“들어오지 마라!”
다급히 들려온 목소리에 루키우스의 몸이 뻣뻣이 굳어졌다. 충직한 노예, 니코마티스는 황급히 루키우스의 앞을 막아서며 그의 몸을 가렸다. 두꺼운 천막 사이를 노려보는 눈이 평소 그답지 않게 날카로웠다. 방 안에 들어오려다가 멈추어 선 인형이 그곳에 있었다. 루키우스의 몸을 보이면 안 된다. 천막의 그림자를 경계하며 니코마티스는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거기서 말해라.”
침묵 끝에 답변이 울렸다.
“전, 전령입니다. 그, 본가에서 보내 온 서신이….”
고함에 놀란 듯 돌아온 목소리는 끝이 희미하게 떨려 있었다.
“가져 와.”
루키우스는 ‘본가’라는 말을 듣는 순간 차갑게 정색하며 명령했다. 니코마티스가 창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고, 노예에게서 서신을 받아 내어 루키우스에게로 돌아왔다.
“여기….”
그 순간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시퍼런 예기가 물결치고 있었다. 니코마티스의 손에서 빠르게 서신을 낚아챈 루키우스가 빠르게 파피루스를 펼치고, 그리고 서신의 첫 문장에 시선이 닿는 순간 루키우스는 하! 천장 위로 치솟는 높고 예민한 웃음을 흘렸다. 보라색 두 눈에 안광이 튀긴 순간이었다.
그때였다.
쾅!
니코마티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주인님!”
새하얀 벽에 피가 비산한 순간 니코마티스가 경악하여 그에게 달려갔다.
“주, 주인님!”
단단한 벽에 이마를 들이받은 루키우스가 피를 흘리며 헐떡거리고 있었다!
입술 끝을 비틀어 헛웃음을 흘리면서. 기둥에 이마를 비비며 피를 흘리는 금발의 청년을 니코마티스는 경악에 휩싸여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이, 이게 무슨 짓입니까!”
그는 정말 미쳐 버린 건가?
니코마티스는 경악하여 손을 움직였다.
“도대체 이게 무슨?”
허둥지둥 제 이마를 닦아 내는 니코마티스에게 루키우스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피를 흘리는 새하얀 이마를 기둥의 거친 면에 비빌 뿐이었으니.
새하얀 얼굴, 관자놀이 어름에 새파란 핏줄이 꿈틀대고, 청년의 입가에는 호선이 그려진다. 차가운 웃음이 흐르고,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열린 순간 무섭도록 불타오르는 눈이 허공에 드러났다.
그것은 보는 이의 영혼마저 불에 태우는 증오에 찬 눈이었다.
과거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가문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아직도 모르느냐?’
지리멸렬한 것들!
입술 밖으로 흐르는 한 줄기의 액체를 손등으로 문지르며 루키우스가 실성한 자의 웃음을 흘렸다.
‘자결? 내가 그따위 것을 할 것 같아!’
그리 쉬이 모든 것을 끝내려 했다면 여기까지 오지 않았겠지! 이 같은 고통을 견디며 살아오지 않았으리라.
안식은 가깝고 쉬운 길이었으나, 그를 택하지 않고 있었다.
그에게는 어깨를 짓누른 사명이 있기에!
느릿하게 한숨을 내뱉은 루키우스의 얼굴에 서늘한 조소가 흘렀다.
루키우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케론은 호들갑을 떨었으나 루키우스는 그와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살아가는 사유를 모르는 자와는 말할 가치가 없다. 의자에 걸쳐진 팔리움을 주워 드는 루키우스를 마주하곤, 니코마티스는 비명을 내질렀다.
“아, 안 됩니다!”
순간 무언가를 짐작한 니코마티스의 얼굴이 새하얗게 물들고야 만다. 루키우스는 그를 뒤로한 채 묵묵히 제가 할 일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미친 짓입니까! 지금 당신은, 당신은….”
루키우스는 그를 돌아보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났고, 그동안 충분히 인내했다.
아케론의 상세는 좋다고 했고 루키우스는 그의 두 눈을 보길 원했다. 아니, 견딜 수가 없었다. 그 푸른 눈이 영혼을 불태운 지 오랜데 어찌 참을 수 있겠나? 그 열정에 이끌려 이 이스카리아섬까지 왔는데….
“그분에게, 설마 그분에게 가시려는 건 아니겠지요.”
“아니, 맞아.”
“그, 그는 손이….”
“그럼 내가 위에서 하면 된다. 뭐가 문제지?”
루키우스는 빠른 발걸음으로 방을 나서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처절한 목소리가 발을 부여잡았던 것이다. 우뚝 멈추어 선 루키우스가 문틀을 손으로 부여잡은 채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어둠을 응시하는 자안이 차분히 가라앉고, 이윽고 루키우스의 얼굴에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어째서 그에게 그리 관대하신 겁니까? 그는, 그는 당신에게 모욕을 주었는데.”
이래서 사람과 교류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너무 연약하고, 무르지.’
사람의 마음이란 그가 통제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었다.
씁쓸함이 번져 나가는 얼굴을 애써 가다듬으며 루키우스가 입술을 뗐다.
“……오직 그만이 두통을 가시게 할 수 있거든.”
그 말을 끝으로 루키우스는 빠르게 방을 빠져나갔다.
*
잊지 못하는 날!
“이 아이는 너무 약해서 로마의 사내가 될 수 없을 겁니다.”
일곱 살 생일날에 어미에게 들은 잔혹한 말로부터 시작된 기억이다.
“의사도 이 아이가 오래 살지 못할 거라 했지요.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죽을 거라고. 그 나이를 넘는다 한들 명예로운 경력12)을 쌓지 못할 거라고. 심지어 군대에 몸을 담지도 못할 열등아를 계속 키우실 겁니까?”
그때 루키우스는 분노나 슬픔 따위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았다. 또래보다 반 뼘은 더 키가 작고 몸이 앙상하게 마른 어린아이는 그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항의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아이를 한 명 제대로 키우는 데 얼마나 많은 금전과 노력이 필요한지 아시잖습니까.13) 식민지의 농장14)에서 벌어들이는 돈도 이제 한계가 있습니다. 아이깁토스15)가 아우구스투스령이 되고16) 날이 갈수록 형편이 안 좋아지고 있다는 걸 알잖아요. 그 풍요로운 지방의 농산물을 질과 가격으로 이길 수 없다는 걸.”
장밋빛 뺨에, 살이 오른 건강한 팔뚝. 모든 것이 루키우스와 다르게 건강한 여인의 옆에, 그녀를 쏙 빼닮은 소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걸 봐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애에게 가문의 이름을 허락할 건가요? 포스투무스 하나를 제대로 키우는 것도 벅찹니다.”
그날의 일은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기억하고 있었다.
“집안의 명예를 빛내지 못한다면, 차라리….”
“관습대로 합시다. 내가 직접 하겠소.”
“아니요. 제가 낳았으니, 제가 끝까지 책임을 질 겁니다.”
그날은 오래전부터 예견한 날이었다. 약한 몸을 지니고 태어난 순간부터 그가 기다렸던 운명의 날.
로마에는 약한 사내란 필요 없다. 루키우스는 언젠가 제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으리란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순순히 어미의 말을 따랐던 것이다.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 어둑한 산을 올라가던 그 당시 루키우스는 체념을 하고 있었다. 반항해도 소용이 없다는 걸 알고 있어. 언젠가 가문의 명예를 위해 해치워질 거란 사실을 안다.
제가 죽을 줄도 모르고 유순히 군다는 어미의 생각과 정반대로 그는 그 모든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를 원망하지 말거라. 루키우스.”
그리하여 벼랑 끝으로 저를 모는 어미의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그의 손길에 순응하며, 병약한 몸으로 타고났을 때 점지되었던 운명을 받아들이려 했다.
더 살아보아서 무엇하겠나? 그를 사랑하는 이는 없었고, 삶은 희망이 없었다.
체념과 수긍은 루키우스가 오랫동안 학습한 것이었다.
그는 또다시 운명의 순응하려 했고 그렇게 눈을 감았던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루키우스는 살아남고야 말았다.
모이라 신17)의 장난인가, 아니면 또 다른 숙명인가?
“아, 세상에! 개선식이야! 아! 개선식을, 개선식이 내 대에서 일어나다니. 저걸 내 두 눈으로 볼 수 있다니!”
감격에 차 눈물을 흘리는 여인이 산 아래로 미친 듯이 뛰쳐 내려가고, 루키우스는 한참 동안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 멍한 눈으로 어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루키우스는 그녀가 점이 되어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에야 몸을 돌렸다.
고개를 돌려 바라본 곳은 산 아래였다.
그곳에는 화려한 행렬이 있었다.
“비바! 비바!”
사람들은 환호성을 내질렀고, 실로 광희했다. 어둑한 산 위에 홀로 자리한 루키우스와는 다른 세계에 있는 것만 같았다. 사람들이 개미 떼처럼 바글바글 모여 있는 곳에서, 루키우스는 월계수로 만든 관을 쓰고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생기 넘치는 황금색 잎사귀를 햇볕 아래 쨍하게 빛나는 고동색 머리카락 위에 올려놓은 사내.
그는 태양 아래 가장 빛나는 사내였다.
“게르마니쿠스! 비바! 게르마니쿠스!”
오만한 푸른 눈을 빛내는 사내는 꽃비를 맞으며 사람들의 환호성을 당연하다는 듯이 흘려 넘기고 있었다. 네 마리의 말이 오는 마차 위에 선 사내의 옆에 앉은 광대가 낄낄대고, 개선장군의 등 뒤에 선 노예가 인세의 최고의 영광을 누리는 사내의 교만을 누르기 위해 경고의 말을 내뱉고 있었다.
Memento mori! Memento mori….18)
개선장군을 찬양하는 로마인의 고함 소리가 이어진다.
결코 잊을 수 없는 날의 기억!
루키우스의 영혼에 화인으로 남은 날의 일. 갈색 머리를 짧게 자른 개선장군의 두 눈이 하늘 아래 푸르게 빛났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끼고, 루키우스는 제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고야 말았다.
‘나는 살았다.’
그리고 7년 후 마주한 대검투장의 비천한 검투 노예….
‘너는 또다시 빛나는구나.’
태양 아래 빛나는 그 사내에게서 루키우스는 또다시 눈을 뗄 수 없었다. 불타오르는 눈과 마주한 순간 배 속에 꿈틀대며 치켜드는 격정이 있었다. 폭발하는 별과 같은 눈과 마주하고 깨닫는 삶에의 의지에 전율한다.
‘너는 꺾이지 않아.’
그 열정에 이끌리고야 말아서 지금까지 와 버렸는데.
‘그런데 어떻게 그만둘 수 있겠어?’
이제는 멈출 수가 없다.
그런 불꽃에 이끌린 부나방 같은 마음으로 루키우스는 문을 열고 있는 것이었다.
*
끼이익.
“아케론.”
문이 열린 순간 루키우스는 모습을 드러낸 사내를 눈에 담고 지친 몸을 무너트렸다. 군청색 눈이 커다랗게 떠지고, 단단한 가슴에 떨어져 내린 루키우스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파.’
“아케론…… 아, 아케론….”
새하얀 손을 뻗어 얼어붙은 사내의 뺨을 더듬으며, 루키우스는 흐릿한 시야 속 사내의 얼굴을 향해 시선을 억지로 고정하곤 처연하게 웃음을 흘렸다.
‘나 너무 아파.’
목소리는 애처로운 떨림을 머금은 채 흘렀다.
“나, 나를 안아 줘. 아케론.”
심장 고동 소리가 세차게 울리고 있었다.
강인한 사내의 품에 안겨 루키우스는 그가 잠옷으로 입고 있던 새하얀 튜니카를 간절히 움켜쥐며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내 눈물을 닦아 줘.
말을 목구멍에 삼키며 루키우스가 튜니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입술 밖으로 흐느낌이 연이어 흘렀다.
“안, 안아 줘.”
나를 달래줘.
“아…… 제, 제발.”
고통은 몸을 잠식했고, 루키우스는 어리광을 멈추지 못했다.
빗방울이 세차게 지면을 때려대던 때, 빗물이 떨어지는 튜니카를 어깨 능선 아래로 떨어트리며 루키우스가 이를 악문다.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나를 아껴 줘, 나를 사랑스럽게 여겨 줘.’
그러나 그 말을 내뱉을 수 없음을 알기에 루키우스는 흐느끼는 울음소리에 진정으로 원하는 말을 뭉뚱그려 흘려보낼 뿐이었다. 아케론이 그에게 가져야 할 감정은 애정이 아닌 연민이요, 친애가 아닌 혐오다. 그리하여 말은 뜨거운 구리공이 되어 목에 눌어붙은 채 입술 밖으로 튀어나오지 못했다.
‘내게 온기를 나눠 줘. 너무 추워, 너무 무서워.’
그 대신 루키우스는 강철처럼 강인한 사내의 몸에 매달려 애원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잘못했어, 흑, 내가, 잘못했어…….”
금빛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손을 미끄러트린다. 강인한 사내의 몸을 쓸며 아슬아슬한 목소리로 속삭이기를.
“내가, 건방졌어요. 주인님…….”
사내를 홀리는 목소리를 흘리며 루키우스는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비에 젖은 제 몸이 어둠 속에 황홀하게 빛날 것을 안다. 루키우스는 손을 뻗어 붕대로 감싼 손을 움켜쥐었고 그곳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단단한 손. 이 손에 목이 꺾여 죽는다면 황홀하겠지. 그런 생각을 품으며 루키우스는 경의를 표하듯 손등 위에 입술을 맞추었다. 진흙탕에 물든 몸이 더러워졌으나, 루키우스는 그를 아랑곳 않고 굳은살이 박인 우둘투둘한 손에 간절히 입술을 맞추고 있었다.
새하얀 뺨 위로 보석 같은 눈물을 떨어트리며 그가 떨리는 목소리를 흘린다.
“잘못했으니까, 그러니까….”
비에 젖은 금색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애원하는 사내의 달콤한 음성이 새벽의 어둠을 꿰뚫는다.
“…제발 날 으스러지듯이 끌어안아 줘.”
소나기가 세차게 흘러내리는 새벽녘에 짙은 어둠 속에서.
젖은 금발을 늘어트린 청년이 제 얼굴을 덮을 만치 크고 강인한 손에 뺨을 댄 채 하염없이 흐느끼고 있었다.
“제발 날 품에 안아 줘….”
그러나 아케론은 제 앞에 무릎 꿇은 그를 묵묵히 내려다볼 뿐이었다.
간절한 애원을 듣는 이는 긴 시간 입술을 열지 않았고, 적막은 길게 이어졌다.
가을의 하늘을 닮은 청명한 군청색 눈이 깊게 가라앉아 루키우스를 응시하고. 뜻 모를 얼굴로 눈물을 흘리는 루키우스를 잠시간 내려다보던 그는 기나긴 침묵 끝에 돌연 손을 뻗었다.
“흑, 제발, 제… 헉!”
물기 어린 자안이 크게 뜨여진 순간, 아케론의 손이 그를 별채 안으로 끌어당겼다.
“……!”
쏴아아, 비가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루키우스가 비틀거리며 아케론의 몸에 떨어져 내렸다. 신형을 무너트린 루키우스의 팔을 부여잡아 몸을 지탱해 주곤, 아케론은 그의 옷을 커다란 손으로 벗겨 내렸다.
손은 거침없이 루키우스의 은빛 나신을 어둠 속에 드러냈다.
“아케론, 아케….”
나신이 드러난 순간 루키우스는 칭얼거리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으나 아케론은 그런 그를 가볍게 손으로 밀어낼 뿐이었다.
“…아케론?”
거절의 손짓에 루키우스는 당혹스러워했다. 항의를 하려 입술을 열던 루키우스는 그러나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을 선택하고야 말았다. 시야에 닿는 아케론의 얼굴을 마주한 탓이었다.
경건한 사제의 것과 같은 평온한 얼굴을 마주하고 루키우스는 무언가의 징조를 읽고 침묵한 것이었다. 평소라면 유혹에 활화산 같은 욕망을 고스란히 드러낼 아케론은 묵상하는 듯한 눈으로 침착하게 루키우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그에 루키우스는 제 몸을 닦아 내리는 손에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
손은 루키우스의 몸에 묻은 빗물을 닦아 내렸다. 수건으로 꼼꼼히 그의 몸을 닦았고 종국에는 루키우스의 피 흐르는 이마를 쓸어내리는 손에 루키우스는 침음을 삼킬 뿐이었다. 뜨거운 손이 살결에 닿는 느낌이 이상해 루키우스는 간헐적으로 몸을 움찔거리고 있었다.
창백한 얼굴에 그 순간 불안이 스친다. 두 눈을 흔들며 시선을 든 루키우스가 목울대를 울렁거리며 아케론을 응시했다.
순간 루키우스가 입술을 짓씹었다.
‘너….’
불안함, 이질감, 징조.
‘그날’ 페리스타일에서 술 취한 그와 대화할 때 느꼈던 감정.
아케론은 그날 밤 끝끝내 루키우스를 안지 않았다.
그는 제 손을 치료하려 내버려 둔 여분의 붕대로 묵묵히 루키우스의 이마에 난 상처를 치료해 주었고, 침묵 속에서 루키우스는 차마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눈을 내리깔 뿐이었으니.
피가 흐르는 이마에서 손을 떼고 아케론은 루키우스가 주었던 부드럽고 두툼한 망토를 그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루키우스의 동근 어깨가 보이지 않도록 그것을 꼼꼼히 싸매 준 아케론은 힘없이 고개를 떨군 청년의 턱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금빛 속눈썹은 파르르 떨리며 자꾸만 아래로 향하였으나, 아케론은 인내심 있게 그의 시선을 기다릴 뿐이었다.
마침내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바라보았을 때, 아케론은 시리도록 푸른 눈으로 그의 영혼을 꿰뚫으며 입술을 열었다.
“……한낱 노예에게도.”
“…….”
“마음이란 있는 겁니다.”
*
비척거리며 아트리움에서 돌아오는 루키우스의 얼굴은 공허했다.
그는 아트리움에 도착한 이후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움직이지 못했다. 빗물을 조금 머금은 팔리움을 손에 움켜쥔 채 묵묵히 서 있던 루키우스가 돌연 몸을 움직여 고개를 숙인다.
그러곤 그는 팔리움에 코를 묻은 채 또다시 시간을 흘려보냈다.
갈망하는 자의 애타는 얼굴. 그를 외투에서 떼지 못하던 루키우스의 몸이 돌연 비틀거리다가 벽에 무너져 내린다. 기둥에 머리를 댄 루키우스가 가쁜 숨을 헐떡거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얼마지나지 않아 루키우스는 깨달을 수 있었다.
아케론이 제 통제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
1개월 후.
이스카리아의 바다를 닮은 눈.
그것은 티끌 하나 없이 고결하게 반짝거렸다.
어둠이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그 눈은 마치 금파(金波)와 같았다. 햇볕이 부서지는 물결과 같이 찬란했다.
상념에 잠긴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웃음이 흘렀다.
‘어이없군.’
펜대가 손에 잡히지 않았고 루키우스는 마음에 무거운 짐이 얹혀진 걸 해소할 수 없었다. 그날도 루키우스는 사내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와중이었다.
“주인님. 마르쿠스 헤르티우스 집정관님이 오늘 저녁에 방문을 하신 답니다.”
천막 너머로 말이 울린 순간 루키우스가 날카롭게 웃었다. 두려워하는 사내를 내팽개치고 그가 얼굴을 감싸고 목을 뒤로 젖혔다.
점입가경이군!
웃음을 뒤로하고 전령이 몸을 움츠렸다.
루키우스는 한참의 시간이 흘러 몸을 일으켰다.
“알겠으니, 꺼져!”
그리 말을 하는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분노가 스며들어 있었다.
‘제기랄….’
어두운 얼굴로 그가 고개를 돌려 창문을 바라보았다.
그날 아케론이 서 있었던 자리를 지그시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고개를 돌려 거친 한숨을 내뱉었다.
*
벌써 한 달이었다.
아케론이 그를 회피한지가 벌써 한 달째였다.
그는 그날 이후 쭉 루키우스를 회피하고 있었다. 그를 만날 때마다 몸을 물리고 말을 하지 않으려 들었다. 그게 끝이 아니라, 뜻 모를 행동을 하는 사내의 눈은 이전처럼 경멸이 서려 있지 않았다.
그게 루키우스는 신경 쓰였다.
맑은 푸른 눈을 마주할 때마다 골육이 해체되는 기분을 느끼며, 루키우스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아케론에게 다가가려 했다.
“아케론.”
그러나 이름을 불러도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둑한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던 아케론은 말없이 몸을 돌려 회랑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이게 무슨?
“어딜 가는 거야!”
당황한 루키우스가 고개를 다급히 돌릴 때였다. 그 순간 아케론이 발걸음을 우뚝 멈추었다.
단단히 굳어진 사내의 등을 루키우스는 창백한 얼굴을 굳히며 잠시간 노려보았다. 언뜻 바라본 아케론의 그림자가 드리운 옆얼굴이 침착했다.
루키우스는 창백한 얼굴로 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나는, 나는……. 괜찮다 그랬잖아.”
마음속에서 머리를 치켜드는 불안감을 애써 외면한 채 말을 잇고 있었다.
“나는 그날 쾌락을 느꼈다, 아케론….”
차라리 아케론이 제 뺨을 거친 손으로 감싸길 바라고 있었다.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케론은 그의 기대를 이뤄 주지 않았다.
“뭐?”
푸른 눈은 대화를 하는 내내 깜빡이지 않았고, 루키우스를 들끓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흔들림 없는 눈은, 그 주인의 영혼과 닮은 것이다.
옛날 라티움에서 보았던 사내와 닮아 있는 것.
“왜?”
침묵 끝에 루키우스가 입술 밖으로 떨리는 목소리를 흘렸다. 아케론은 그 말에 바로 답변하지 않았다.
“……그때처럼.”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아케론은 문득 숨을 멈췄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바위를 내려치는 물벼락처럼 산산조각이 나던 그 순간 아케론은 망설임 없이 멈추었던 발걸음을 떼고 자리를 떠났다.
떠나는 사내의 등을 루키우스는 망연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
하루하루가 지났다.
루키우스는 그를 상대하는 것을 괴로워하며 글을 쓰는 데 집중했다. 이제 얼마 남지 않는 과제를 해결하려 했다. 아케론을 만나지 않았고,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일에 집중을 하려 했다.
그러나 간간이 마주하는 아케론은 그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했고, 그에 결국 루키우스는 제 과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완벽한 계획으로 설계된 극은 어느새 무너진 후였다.
그러던 와중에 실로 반갑지 않은 손님이 방문한 것이었다.
아무리 루키우스라 한들 섬의 집정관인 마르쿠스를 박대할 수 없다.
마르쿠스가 비록 본토의 사람이 아니라한들 정당한 절차로 관직에 오른 로마 귀족을 정체를 숨긴 채 박대할 수 없지 않는가?
“저녁에……. 향연을 준비해라.”
“예, 주인님.”
“동선이 헷갈리지 않게 주의해. 오후에 로도스 섬에서 밀교의 사람들이 온다…….”
루키우스는 마르쿠스의 비위를 어쩔 수 없이 맞출 수밖에 없었고, 그의 방문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여기엔 왜 또 왔지? 공무는 그렇다 쳐도 사업으로 한창 바쁠 터인데. 이 외딴 저택엔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해가 저물녘의 일이었다.
아케론과 불편한 기류에 휩싸여 있는 상황에서 루키우스는 뱀 같은 사내와 얼굴을 마주하고 있었다.
“이권을 쥔 것도 없는 내게 무슨 용건으로 그렇게 뻔질나게 얼굴을 보이는 거냐. 나는 네게 내어 줄 고깃덩어리가 없어. 마르쿠스 헤르티우스 집정관.”
그날 마르쿠스를 대하는 루키우스의 태도는 유독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가시 박힌 목소리에 마르쿠스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청포도 알을 손으로 비틀며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너무하시군요. 손아귀에서 놓아줄 생각이 없었던 제 소중한 이스카리아의 왕을 고객께 팔았는데, 저를 접대할 비용이 아까우신 겁니까?
“그 대가로 너희 집 삼대가 집정권을 해도 먹고 살 만한 돈을 줬지. 이 이스카리아섬을 통째로 살 수 있는 거금을. 내 거래가 네게 불공정했나?”
“예.”
이어진 말에 짜증을 내던 루키우스가 몸을 멈칫하곤 고개를 돌렸다.
“그는 그 이상의 가치가 있는 자였습니다.”
시선이 닿는 곳에 자책이 깊게 묻어나오는 마르쿠스가 자리하고 있었다. 부정할 수 없는 탄식이 드러나는 그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문득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그렇지. 그 돈의 열 배를 주어도, 난 바꾸지 않아. 그건 남는 장사니까.”
루키우스의 입가에는 조롱 어린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허나 내가 굳이 속은 게 잘못이라 말을 해야겠나? 그것도 거래에서 우위를 지고 있던 자가 실책을 저지른 일을?”
계약서에 서명할 때 루키우스는 예견하고 있었다. 그가 언제고 제게 아케론을 돌려 달라 매달리며 제 어리석음을 후회할 것이라고.
마르쿠스는 실로 어리석었다.
아케론은 그깟 천금으로 거래를 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사내였다. 루키우스의 감정을 제쳐놓더라도, 그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었고, 또 마르쿠스는 그를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모든 것은 끝이 난 일이지 않나?
“나보고 뭘 어쩌라고? 어? 계약을 무르자고?”
계약서에 마르쿠스는 서명을 했고, 루키우스는 그의 어리석음에 책임을 질 생각이 없었다! 때마침 정치 자금이 부족했던 마르쿠스의 불운한 상황을 동정하고 또 조롱할 뿐이었다.
“헤르티우스, 오랫동안 명성을 알린 사업 가문의 당주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다만 자비를 원할 뿐입니다. 충분히 사례를 할 테니 그를 며칠만 대여해 주시,”
“안 돼, 내겐 그딴 거 없어. 돌아가.”
루키우스가 손에 든 빵을 접시 위로 풀썩 던지며 몸을 젖힌다.
그 단호한 마음이 고스란히 엿보이는 행동에 마르쿠스의 얼굴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바람이 불면 비틀거릴 것만 같은 나약해 보이는 청년은 한 치의 여지도 없이 싸늘하게 말을 이었다.
“그를 빌려준다 하지 않았어! 그는 이제 검투 경기에 서지 않는다. 그는 내 소유물이고, 내 노예야.”
루키우스는 마치 철벽과도 같은 얼굴로 다시금 못을 박았다.
“더 할 말 있나?”
마르쿠스가 떨떠름한 목소리를 흘렸다.
“그를 많이 아끼시나 보군요.”
“아주 훌륭하지. 그가 없는 밤을 생각 못 하겠으니!”
그 순간 마르쿠스는 몸을 뻣뻣이 굳혔다.
술잔을 쥔 손이 얼어붙고,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 순간이었다.
짤막한 침묵 끝에 고조된 기류에 루키우스가 검지를 까딱거리며 여유롭게 말을 내뱉었다.
“아, 이런 내가 잘못 말했군. 그러니까…… 낮(dies) 말이다. 나날.”
“…….”
“……알아들었어?”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내뱉는 말에는 서늘한 냉기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초승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는 그의 눈매와 달리 그의 두 눈은 전혀 웃지 않고 있었다. 자색 요요한 눈동자는 기저에 냉혹함을 내포하고 있다.
그 순간 마르쿠스는 제 입술을 깨물고야 말았다. 저를 조롱하는 기색이 역력한 아름다운 청년의 얼굴을 마르쿠스는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며 기나긴 침묵을 지켰다.
그러곤 어느 순간 돌연 입술을 열었다.
“아울루스 셈프로니우스 달마티카.”
그건 루키우스의 얼굴에 감돌던 미소를 씻은 듯이 사라지게 만든 것이었다. 굳어졌던 마르쿠스의 얼굴에 다시금 여유가 돌아온 순간. 정반대로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동요가 파도처럼 일렁거렸다. 동시에 장밋빛 뺨은 창백히 질려가고 있었다.
“……지금 뭐라고 했지?”
“12월, 헬리오스 축일에 방문하실 예정입니다. 바로 로마 본토 원로원 의원 말입니다.”
루키우스의 얼굴에 균열이 번져나가고 있었다.
“언뜻 로마식 저택에 대한 이야기를 흘렸더니 흥미로워하시더군요. 그때 아마 저택을 방문하실 것 같은데 당연히 접대가 가능하겠지요? 아, 그분. 참고로 검투 경기도 무척 좋아하십니다. 다른 취미도 여러모로 공유하고 있고….”
마르쿠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군.’
대수롭지 않은 듯한 목소리로 그는 말을 이어 나갔다.
“로마 본토에 갔을 때 인연을 쌓았는데, 이스카리아의 검투 경기가 뛰어나다는 소문을 듣고 흥미가 돋으신 모양입니다. 서신을 통해 자랑했는데, 몸이 다신 모양이더군요……… 명색이 로마 시민인데 존경받아 마땅한 의원께 대접을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마르쿠스의 흥미 어린 시선을 받으며 루키우스는 기나긴 침묵 끝에 짤막한 말을 내뱉었다.
“내 알 바는 아니지.”
마르쿠스가 여유로운 웃음을 흘렸다.
루키우스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네 문제다. 금전에 그를 판 일은 후회해도, 상관없어.”
“매정하시군요, 허나.”
“시위를 떠난 활을 잡으려 왜 쓸모없는 노력을 하는 겁니까, 마르쿠스 헤르티우스 집정관?”
날카로운 목소리가 연회장을 울렸다. 그 순간 루키우스가 손에 쥔 술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무어라 말을 하려던 마르쿠스의 입술이 꾹 다물렸다. 마르쿠스가 시선을 내려 바닥으로 떨어지는 새빨간 술을 바라보았다. 포도알 같은 와인 방울은 대리석 바닥에 닿는 순간 마치 끊어진 진주목걸이가 튀기듯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루비같이 선연한 방울이 새하얀 다리에 매달리는 것을 바라보며 마르쿠스는 그 순간 잘게 눈을 흔들었다.
바닥에 후드득 쏟아진 술이 가는 발목에 매달리고, 부드러운 발을 적셔 바닥의 틈새에 스며들고 있다.
“그대는 술잔에 술을 다시 담을 수 있습니까?”
마르쿠스는 투명한 발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또다시 여유를 잃은 마르쿠스를 루키우스는 비웃음이 서린 눈으로 내려다볼 뿐이었다.
마르쿠스는 꽤나 시간이 흘러서 뒤늦게 반응을 보였다.
“발이.”
홀린 듯 중얼거린 사내가 느릿하게 몸을 숙여 와인이 뚝뚝 떨어지는 동근 발가락 위에 조심스레 손을 댔다.
“발이 더러워지셨습니다.”
제 발을 손으로 움켜쥐는 마르쿠스에 루키우스는 보는 이의 심장이 떨어지게 만드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발을 움직였다.
제 발을 더듬는 손을 매정하게 걷어차곤 루키우스가 경멸 어린 눈으로 마르쿠스를 내려다보았다.
“나가시오, 마르쿠스 헤르티우스.”
연회장 안에 냉랭하게 떨어지는 준엄한 말을 들으며 마르쿠스는 웅크린 몸을 떨고 있었다.
*
루키우스는 이스카리아 섬에 온 후 섬민 중 유일하게 마르쿠스와 교류를 했고, 그의 음흉함을 일찍이 파악하고 있었다.
연회 중 그는 루키우스의 발목을 뚫어져라 바라보았고, 루키우스의 밀려 올라간 튜니카 사이 허벅지를 뱀과 같은 눈으로 응시했다. 젊은 집정관은 마치 먹이를 채기 전의 독수리 같은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이상야릇한 미소를 지었고, 그에 루키우스는 그를 꺼리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를 혐오하고 있었다.
‘더러운 놈.’
정신을 차린 마르쿠스는 낭패한 얼굴로 비틀거리며 연회장 밖으로 나섰다. 파란색 토가를 휘날리며 빠르게 걸음을 걷는 그를 루키우스는 어둑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문득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피로로 가득 찬 몸을 의자 위에 늘어트리곤 루키우스는 황금빛 금발이 이마 위를 흐트러트리게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에 짙은 피로함이 스치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사내의 욕망을 부추기는 것은 몹시 쉬운 일이다.
생존의 위기를 받아 조숙할 수밖에 없던 루키우스는 일찍이 저를 향한 성적인 시선을 인지했었다.
부모의 버림을 받은 원인인 그의 나약한 몸은 뜻밖에도 사내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었다. 아버지의 친구는 루키우스의 뺨을 유독 조심스럽게 어루만졌고, 그의 금발을 길게 쓰다듬었다. 루키우스의 머리에서 손을 떼어 낼 때 그들의 얼굴에는 아쉬움이 서려 있었다. 조금 더 성숙한 후 루키우스는 그들의 얼굴에서 일렁거린 감정이 정욕임을 알 수 있었다.
다행히도 가문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게 소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으나, 루키우스는 인지하고 있던 것이다.
만약 제가 평민이었다면, 일찍이 사내들에게 제 몸을 내어 줘야 했으리라.
그러니까 루키우스는 제가 매력적이란 사실을 잘 알고 있던 것이다.
사내의 마음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이게 흔드는지도.
마르쿠스는 우스울 뿐이다.
루키우스의 얼굴에 순간 냉소가 흘렀다.
‘그는 너무 쉽지.’
젊은 나이에 출세한 음흉한 집정관. 그라 한들 손에 쥐고 흔들기엔 어렵지 않았다. 그 또한 정욕에 휩싸이는 사내였으므로….
루키우스는 마음만 먹는다면 그를 진흙 바닥에 무릎 꿇리고 제게 애걸복걸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를 개돼지처럼 비참하게 만들 수 있었다.
어려운 것은, 오직 한 사내일 뿐이다.
루키우스의 찌푸려진 미간에 순간 피로가 감돈다. 치밀어 오르는 두통. 그에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며 그는 복잡한 마음을 정리하고 있었다.
‘헌데 그는 왜 그러는 거야.’
초봄에 피는 여린 꽃 같은 아랫입술을 잘게 깨물며 그가 창문 밖에 흔들리는 여린 나뭇가지를 흘끗 바라본다.
바야흐로 겨울이었다.
아케론을 거둔 때가 이스카리아 섬의 햇살이 가장 뜨거울 8월 정점이었나? 그리고 지금 아트리움의 빗물 받는 연못에는 가끔 살얼음이 희미하게 서렸고, 창문 밖 사과나무는 차가운 바람에 거세게 흩날렸다. 계절이 바뀌는 시점, 그는 문득 마음을 누르는 짐의 무게를 다시금 되새기곤 입술 끝을 딱딱하게 굳히고야 말았다.
그는 관에 머무르는 시체처럼 별채에 처박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평소에 군인처럼 규칙적인 생활을 하던 그는 제 습관마저 바꾸어 더욱 일찍 아침을 들었고, 더욱 늦게 저녁을 먹었다.
가끔 회랑에서 그를 마주치긴 하였으나, 루키우스는 그의 덤덤한 얼굴과 묘한 기세에 억눌려 쉬이 그에게 말을 걸지 못하고 머뭇거릴 뿐이었다.
군청색 눈이 고요히 저를 담을 때, 루키우스는 이유 모를 압박감을 느끼고 시선을 피하곤 했던 것이다. 어쩐지 그 계곡물 위를 얄팍하게 덮은 얼음장 같은 눈이 마음을 꿰뚫는 것만 같아, 어쩐지 그 투명한 눈 너머로 그의 마음이 엿보이는 것만 같아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곤 매정히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상황 속에서 루키우스는 그 날 이후로 가끔씩 짙은 불안감을 느끼며 떨어야만 했다.
그는 마치 그날 이후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다.
무슨 바람이 불어 그는 그리 침묵을 유지하며 방에 틀어박히곤 제게 다가오지 않는가. 시선을 마주하는 순간 먼저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는 그의 기이할 만치 평온한 얼굴에 루키우스는 미칠 것만 같은 느낌을 받고 있었다.
무언가 크게 잘못되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져….
아케론이 루키우스를 거부하고, 루키우스가 그를 피하는 상황 속에 두 사람의 거리는 그리 어정쩡하게 유지되고 있었다. 마치 살얼음판 위를 걷는 듯한 긴장감을 남기면서 말이다.
루키우스는 요즈음 심란한 마음에 사로잡혀 하루에도 몇 번씩 좋지 않은 얼굴로 묵상하곤 했다.
아니, 사실 그것은 아케론을 만나기 전에 그가 종종 솔론과 니코마티스를 비롯한 노예들 앞에 드러냈던 안 좋은 모습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안한 생각에 사로잡혀, 제가 예견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암울한 미래를 떠올리는 것. 가끔 참을 수 없는 쓸쓸함, 외로움, 절망,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에 휘말려 끝을 모르는 암울함에 휩싸일 때, 바로 루키우스가 습관처럼 행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모두가 아케론을 가지고 난 후에는 사라진 습관이었다. 그가 저택에 들어선 후로부턴 루키우스는 그의 품에 안겨 더러운 기분을 잊곤 했던 것이다. 지극한 고통과 그 이상의 쾌락은 그 진득한 수렁에서 그를 구출해 주었고, 그리하여 루키우스는 아케론과 재회하고 나서는 불안한 미래에 휩싸여 묵상하는 일을 줄이곤 했으니.
그러나 그에게 거부당한 이후로 루키우스는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런 수렁에 휩싸이는 감각에 종종 휘말려야만 했다.
마치 발밑이 꺼져 벼랑 아래로 수직 낙하하는 기분 말이다.
‘힘들어.’
상념 끝에 루키우스가 고된 한숨을 내뱉었다.
영혼의 일부가 상실된 감각을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루키우스가 가끔 품는 생각이었다. 텅 빈 껍데기만이 움직이고 있다는 생각. 특히나 겨울은, 절벽의 기억이 남은 겨울은 견디기 힘들었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한 일이었다. 어미의 손을 잡고 산을 오르던 그때는. 그러나 뒤늦게 맛본 사람의 온기를 깨닫고 루키우스는 겨울을 싫어하게 되었다. 가족에게서 버림받은 계절이면 머리는 깨질 듯이 아파오고 몸은 무너져 내렸다.
이런 몸으로 수년을 홀로 견뎠었다.
오로지 목표 하나만을 위해, 숙명을 위해 살아온 길….
그리고 이제야 겨울을 견딜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너는 지나치게 정이 많아.’
그런데 다 틀리고야 말았다.
그 순간 루키우스의 눈이 어둠 속을 헤매고 안색이 창백해지고야 만다. 암울함에 그가 숨을 멈추던 그때, 귓가에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싫습니다.”
“뭐야?”
루키우스의 몸이 벼락에 맞은 것처럼 요동쳤다.
“아케론?”
건조한 목소리가 이어져 나갔다.
“당신의 세 치 혀에 더 이상 놀아나기 싫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너, 이….”
“나는 이미 당신에게 충분히 화가 나 있습니다. 그 일의 원인을 당신의 그 같잖은 혀로 돌릴 생각은 없지만……. 그간 당신의 목을 비트는 생각을 수도 없이 했지.”
새하얀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이게 무슨?’
포도주에 젖은 발이 대리석 바닥에 닿았다.
“왜 네 주인은 튜니카를 입지 않은 거지? 드디어 그가 내 고통을 알아준 건가?!”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가.
“네 주인에게 전해라. 그는 튜니카가 더 잘 어울린다고! 살랑살랑 엉덩이를 휘둘러 사내를 꾀어내려면 그 튜니카 기장의 반 뼘을 잘라 내는 게 어때?”
새하얀 대리석 기둥에 손을 대고 루키우스가 식당을 빠져나갔다.
“미식은 맛볼 수 있을 때 충분히 맛보는 게 좋아. 배부르다고 늑장을 부리다가는 훗날 후회해도 돌이킬 수가 없거든.”
소란이 벌어지는 자리에 아케론이 마르쿠스와 대치하고 있었다. 새파란 눈을 빛내며 그는 마르쿠스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 고요한 얼굴에 일렁거리는 살기.
그 순간 루키우스의 숨이 멈췄다.
“하하하하하!”
악에 받쳐 소리치는 마르쿠스를 아케론이 음울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가랑이 사이 꿀이 그렇게 맛있나?”
회랑에 자리한 사내에게서 루키우스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는 굳건히 선 채 마르쿠스를 벌레 보듯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관자놀이에는 핏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바로 분노를 삭이는, 살기를 숨긴….
루키우스의 얼굴에 그 순간 감정이 물결쳤다.
“하기야 나만 해도 당장 그 계집보다 통통한 엉덩이를 따먹고 싶어서 혼쭐이 날 뻔했거든. 아까 전에도 그자를 강간할 뻔한 걸 간신히 참아 냈어. 주둥아리에 꿀이 묻은 줄 모르고 입을 놀리는 개새끼 같군.”
“…….”
“넌 이미 글렀어. 육욕에 이끌려 네 자신을 잃어버렸군. 이스카리아의 왕은 어디 간 거냐. 너는 정말 피가 너를 부르는 걸 알지 못….”
사내의 두 눈에 불꽃이 튄 그 순간, 루키우스는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아케론!”
퍼런 핏줄이 도드라진 손이 꿈틀거렸다. 멍하니 아케론을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위기를 감지하고 결국 그들을 향해 뛰쳐나갔다. 그러곤 그는 아케론의 주먹 쥔 손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루키우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보았다.
“그만.”
아케론은 무섭게 가라앉은 얼굴로 마르쿠스를 노려보고 있었다. 숨을 헐떡거리는 루키우스의 금발이 흐트러져 뺨을 가렸다.
마르쿠스는 빠르게 정신을 수습하곤 침착하게 말을 내뱉었다.
“소란을 일으켰군요.”
담담히 말하며 웃는 마르쿠스는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을 미미하게 일그러트릴 수밖에 없었다. 루키우스가 그를 향해 시선의 파편조차 주지 않은 채, 오로지 아케론을 강렬히 응시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러지 마, 아케론.”
누가 보아도 애틋해 보이는 얼굴로.
“그러지 마라.”
그 순간 목울대가 꿈틀거리고, 차가운 벽안이 아래로 향했다.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친 순간 루키우스가 애원하는 얼굴 위에 눈물로 만든 강을 자아냈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간절함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케론이 잠시간 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의 등 뒤를 황급히 따르려던 루키우스가 문득 고개를 돌려 마르쿠스를 노려보았다. 루키우스는 아까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차가운 눈으로 마르쿠스를 바라본 채 말을 이었다.
“그를 건드리지 마시오.”
그 삭막한 말에 마르쿠스는 침묵으로 답변할 뿐이었다.
“아케론!”
언제 마르쿠스를 건조한 눈으로 노려보았냐는 듯 루키우스는 아케론의 곁에서 허둥지둥거렸다.
아케론의 손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고 있던 것이다.
그것은 바로 손톱이 살에 박혀 들어간 흔적이었다.
분노의 흔적.
상처를 입은 사내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무심한 얼굴로 루키우스를 돌아봤다.
뚝뚝 대리석 위로 떨어지는 피에 루키우스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실로 당황한 듯 보였고, 아케론은 그 걱정 어린 얼굴에서 잠시간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당황한 루키우스가 몸을 숙여 아케론의 두꺼운 손을 만졌다.
“아, 이런.”
튜니카를 핏물로 물들이는 손에는 글라디우스로 관통된 상처가 아직 남아 있었다. 우둘투둘한 환부를 더듬 만지던 루키우스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져 간다. 그의 얼굴에는 고통이 스쳤고, 그런 그를 아케론은 묵묵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물기 어린 자안이 아케론의 얼굴을 담고, 흔들리는 목소리가 흘렀다.
“나를 위해 화를 낸 거야?”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입술을 깨물며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얼굴을 원망스러운 얼굴로 응시했다. 철벽같은 사내의 얼굴에 결국 루키우스는 답을 듣길 포기하고 한숨을 내뱉었다.
“그럴 필요 없었다. 나는 괜찮았는….”
“내가 괜찮지 않습니다.”
그것은 루키우스의 어깨를 멈칫하게 한 말이었다.
루키우스가 커다랗게 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었다. 용광로처럼 들끓는 군청색 눈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너는 모욕을 당했지.”
아케론의 얼굴에 퍼져나가는 균열을 애써 무시하고 말을 잇고 있었다.
“검투 경기에 나가고 싶나?”
목소리는 삭막한 겨울바람에 흔들리는 앙상한 나무의 잎처럼 위태로웠다.
“하긴, 내 정부로 남는 것보다, 그게 나을 수도 있겠군. 너는…… 내 정부가 되기 싫어했잖아.”
“…….”
“모욕감을 느끼고 있던 것, 안다. 네가 날 멸시했던 걸.”
애처로운 목소리에 대한 답변은 뜻밖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루키우스가 미간을 찌푸리곤 시선을 들어 올렸다. 무덤덤한 사내의 얼굴과 마주하고 루키우스가 머뭇머뭇 말을 이었다.
“왜 답이 없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마르쿠스와의 논쟁도 루키우스와의 일련의 사건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얼굴로 침묵하는 아케론이 이상했다. 희미하게 굳어져 가는 루키우스의 얼굴을 눈썹뼈의 그림자가 짙은 눈으로 응시하던 아케론이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내게 결정권이 있습니까?”
루키우스는 그 말에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몸을 가늘게 떨던 루키우스는 조금의 시간이 흘러 뒤늦게 여유를 되찾았다. 평온한 얼굴로 몸을 늘어트리며 루키우스가 긴장이 사라져 차분해진 얼굴로 아케론을 나른히 응시했다.
건조할 만치 차분한 눈과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노예도 감정이 있다고 하지 않았어?”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노예는 노예일 뿐이지.”
“…….”
“……그런 것일 뿐이다.”
루키우스의 눈이 순간 깊게 가라앉고 있었다. 그는 제게 그림자를 드리운 사내를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며 답변을 기다렸다. 그러나 뜻밖에도 루키우스가 기대했던 반응은 돌아오지 않았다.
분노도, 노여움도, 모멸감도 보이지 않은 채 아케론은 감정을 알 수 없는 푸른 눈으로 그저 그를 응시했던 것이다. 루키우스의 얼굴을 서서히 굳게 만든 반응이었다.
긴장이 스치던 그 짧은 시간.
가늘게 목울대를 떨며 긴장을 숨기던 루키우스의 얼굴에 문득 핏기가 가셨다.
묵묵히 허공을 바라보던 루키우스는 어느 순간 문득 힘없이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냉랭한 기세는 어디 갔는지 갑작스럽게 쓸쓸한 표정을 짓는 그를 마주하며 아케론이 몸을 멈칫할 때였다.
“나는 홀로 밤을 보내지 못한다.”
처연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네가 천박하다 말을 해도 어쩔 수가 없어. 홀로 견디기엔 나는 너무 나약하니까.”
“…….”
“일곱 살 때, 그 날. 어머니가 내 병약함을 이유로 날 절벽에서 떨어트려 죽이려 한 이후로. 밤이면 밤마다 악몽을 꾸곤 하지. 절벽에 떨어져 몸이 으스러지는 꿈을….”
아케론의 미간이 좁혀진 순간이었다.
“가끔은 그게 현실이 아닌가 고민을 한다. 이건 죽은 내가 꾸는 긴 꿈이 아닌가. 아직도 나는 어머니의 손에 팔목이 이끌려 그 산에 올라가고 있는 건 아닌가.”
“…….”
“…그런 고민을 말이지.”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쓸쓸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속눈썹을 가늘게 떨며 아케론을 올려다보던 그는 손으로 톡 치면 쓰러질 것만 같이 나약해 보였다.
단련된 사내의 그림자에 가두어지는 몸.
루키우스는 연약한 이였다.
사내라면 저절로 눈길이 가고야 마는 그런 애처로움을 지닌….
“이런 내가 널 원한다면, 천박하다 욕을 하겠느냐?”
루키우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아케론을 선명한 자안으로 담은 채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사람을 홀리는 매혹적인 자안을 반짝이며, 루키우스는 선분홍색 작은 입술을 느릿하게 열어 말을 내뱉었다.
“오늘 밤, 내 방으로 와라.”
그러곤 그는 잠시간 말을 우물거리며 말을 내뱉지 않았다.
잠시간 망설이던 루키우스가 우유를 부은 듯한 우아한 손을 들어 아케론의 거친 손을 감쌌다. 거칠고 두툼한 손을 손톱으로 긁으며 그가 나른한 한숨을 내뱉었다.
루키우스는 연이어 간절한 눈으로 아케론을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이려 했다. 내뱉으려 한 말은 바로 그를 유혹하려는 것이었다. 그를 도발하고, 또 이성을 끊게 만드는 말. 그러나 루키우스는 본디 제가 의도했던 말을 내뱉지 못한 채 눈을 크게 떠야 했다.
묵묵히 말을 듣던 아케론이 돌연 그를 향해 성큼거리는 걸음걸이로 다가갔던 것이다.
성이 난 물소처럼 제게 다가오는 사내를 루키우스는 피하지 않고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사나운 기세로 다가온 아케론이 그의 앞에서 고개를 숙여 작은 뺨을 감쌌다. 손길은 루키우스에게 다가올 때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몹시 부드럽게 그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거친 기세를 내뿜는 사내의 얼굴이 활활 타올라 있다.
‘아…… 좋아.’
그것은 그가 지극히 원했던 것이었으므로. 루키우스는 그 순간 그의 마음을 단정 짓고 크게 안도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뺨에 발그스레 장밋빛 홍조를 드러내며, 마치 사탕을 원하는 어린아이처럼 손을 뻗었다.
“내게 이러지 마시오.”
그러나 그는 제 손목을 부여잡는 손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뭐?’
심장이 내려앉는 순간.
루키우스의 자안이 크게 떠져 흔들거렸다.
침착한 푸른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아케론이 제 팔뚝을 향한 손길을 서서히 물렸다. 창백해진 청년의 얼굴을 고요하게 가라앉은 군청색 눈으로 바라보며, 아케론이 짧은 침묵 끝에 늪 바닥 아래에 잠긴 듯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나를 기만하지 마십시오.”
루키우스의 얼굴이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아케론?”
두 눈이 흔들렸다. 흔들리는 시선이 무표정한 사내의 얼굴을 훑었으나 사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두 눈을 깜빡이지 않으며 루키우스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중해 햇살에 그을린 사내의 얼굴이 뜨거웠다. 눈썹뼈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눈으로 그는 루키우스를 노려보며 말을 이어나갔다.
“거짓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는…….”
루키우스의 숨결이 거칠어지던 순간, 아케론의 얼굴에 뜨거운 감정의 물결이 스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루키우스는 도저히 참지 못했다.
짜악!
창백한 얼굴 위에 식은땀이 흐른다. 루키우스가 동공이 수축된 자안을 흔들며 아케론을 노려보았다. 뺨을 맞고도 아케론은 꿈쩍조차 하지 않았다.
시선은 루키우스에게서 떼어지지 않았고, 그에 그는 이를 악물고야 말았다.
처연하던 얼굴을 표독스러운 것으로 바꾸며 루키우스가 짓씹은 말을 내뱉었다.
“내게 건방지지 마라.”
간신히 흘린 악에 받친 목소리.
“노예 주제에!”
매정히 말을 내뱉곤 루키우스는 빠르게 자리를 빠져나갔다. 변고를 당한 듯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로 제게서 도망치는 그를 아케론은 그 자리에서 한참 동안 벗어나지 못한 채 바라보았다.
*
“하…… 악!”
천막이 펄럭이고, 적막이 자리한 방 밖으로 신음이 새어 나온다.
금발의 청년이 잠을 자는 여우처럼 몸을 말고 침상 위에 웅크리고 있었다. 죽은 사람처럼 창백하게 질린 얼굴 위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그는 피가 흐르게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죽이고 있었다.
푹신한 이불을 손에 쥐고 비틀며 고통을 삭였다.
‘싫어….’
발갛게 홍조가 띤 얼굴을 침대에 깊게 묻고 비비는 모습이 심상치 않다. 숨결을 내뱉는 입술에 피가 섞인 타액이 줄줄 흐르고 있다. 이불에 몸을 비비는 루키우스는 그 순간 장기를 수건을 짜듯이 쥐어 비트는 고통에 저항하고 있었다.
그것은 루키우스가 아주 오래전부터 제 안에 품어온 동반자와도 같은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런 고통을 느낄 때마다 루키우스는 한 사람을 생각하곤 했다.
사과처럼 뜨겁게 달아오른 뺨을 이불에 묻으며 루키우스가 몽혼한 자안으로 허공을 응시한다. 아니, 사실 허공이 아닌 다른 것을 응시하고 있었다.
‘싫어, 싫….’
불타오르는 별과 같은 두 눈을 생각했다!
새파랗게 빛나는 두 눈에 제가 담길 때마다 루키우스는 항상 희열을 느끼곤 했다.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것만 같은 느낌을, 불길에 몸이 휩싸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하, 악…!”
그리하여 살아있다는 걸 깨닫곤 했다…….
입술 밖으로 희미하게 흘러나온 신음이 울리고, 루키우스의 눈에서 눈물이 뚜둑 떨어져 내렸다.
‘거짓을 원하지 않습니다.’
오후의 태양을 등진 사내의 얼굴은 강렬했다. 강인하고 굳건한 사내의 얼굴엔 정열이 물결치고 있었다. 뜨거운 햇살과도 같은 그의 시선과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그때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목구멍을 치밀어 오르는 비릿한 핏줄기를 삼키며 루키우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그러는 거야.’
입술 끝을 비틀며, 루키우스가 입 안에 감도는 말을 억지로 목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비릿한 향이 번지고, 루키우스가 충혈된 눈을 부릅뜨며 이를 악물었다.
‘넌 왜 그러는 거야.’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너는, 왜, 내 통제에서 벗어나!’
참지 못한 숨이 터지고, 루키우스의 몸이 새우처럼 굽혀진다.
“컥!”
비명이 목구멍을 빙빙 울리고, 이불보가 피로 물들고야 만다. 루키우스는 결국 비명을 참지 못했다. 육신 안의 고통과 밖의 고통이 그의 몸을 강타하고 있었다. 아악, 소리를 내지르며 루키우스가 바닥에 몸을 미끄러트리고, 간신히 이불보를 움켜쥔 손에 힘을 주고야 만다.
대리석 바닥은 젖어 있었다.
그가 고통을 호소할 때였다.
우당탕, 무언가 부서지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루키우스는 처음에 그 소리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까드득 손톱으로 침상을 긁고 가쁜 숨을 흘리며 그는 제 장기를 갉아 먹는 고통에 저항하려 들 뿐이었지.
적막이 가득 찬 방 안에 루키우스의 것이 아닌 누군가의 헐떡거리는 숨소리가 들렸다. 이를 까득 무는 소리가 이어지고, 방 안을 울리는 거센 발걸음 소리가 뒤를 이었다.
몽혼한 눈이 깜빡이던 그 어느 순간의 일이었다.
“……!”
시야를 가득 채운 것에 루키우스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굵직한 저음이 귓가에 울렸다.
“루키우스.”
억센 손에 부여잡힌 손목에 화상이 남는 듯했다.
루키우스는 한참을 말을 잇지 못했다. 아케론이 바닥에 무릎을 꿇은 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넋을 잃고 그를 마주 보았다.
푸른 눈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나가.”
시간이 흘러 루키우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이불보를 쥔 손에 힘을 주어,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키려 들었다.
“당장 나가!”
루키우스가 아케론의 어깨를 밀쳤다.
“나가! 나가!”
거산같이 단단한 어깨를 손으로 밀치고 때리며 루키우스는 미친 사람처럼 단 한마디 말을 되뇌었다. 그러나 아케론은 몸을 움직이지 않았고, 그에 루키우스는 더욱 흥분하여 소리쳤다.
그러던 와중의 일이었다.
“나는 나가라 했… 하윽!”
아케론이 돌연 손을 뻗어 루키우스의 몸을 부여잡았다. 루키우스의 눈이 크게 떠진 때였다.
‘이건!’
땀에 젖은 몸에 강철같이 단단한 몸이 마주 닿아 있었다. 아케론의 품에 안겨 루키우스는 순간 얼어붙어 멍하니 몸을 떨고야 말았다. 늘어진 작은 몸을 꽉 껴안는 굵은 팔뚝. 가늘고 앙상하고, 또 부드러운 몸과 정반대의 거산같이 거대한 몸이 루키우스의 몸을 짓누르고 있다.
“놔, 놔….”
그의 품에 안겨 몸이 짓눌리고야 만다. 등에 닿는 견고한 철벽같은 몸을 통해 심장 박동이 전해져 내렸다. 그 순간 루키우스의 동공이 점으로 변하고, 그의 새파랗게 질린 입술이 덜덜 떨려왔다.
“이거 놓으라고.”
힘없이 울먹거리는 루키우스의 얼굴에 두려움이 물들었다.
‘안 돼, 안 돼….’
고개를 흔들며 저항하는 루키우스의 얼굴이 땀에 흠뻑 젖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입을 벌리십시오.”
커다란 손이 루키우스의 힘없이 늘어진 턱을 강제로 부여잡아 고정했다. 아케론은 쇳물을 삼킨 듯한 그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입을 벌리십시오…… 당장.”
그러나 루키우스는 입술을 벌리지 않았다. 분홍색으로 달아오른 눈가에는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그는 아케론을 원망의 눈초리를 바라본 채 입술을 꼭 다물 뿐이었다.
“입을, 입을….”
아케론의 목소리가 잠시 헛돌았다.
새파란 입술에 약이 든 잔을 억지로 들이댄 손이 떨리고 있었다.
“……제발.”
정적이 흐른다.
목울대가 떨리고,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흘렀다.
마치 그의 병이 옮은 듯 망자와도 같은 얼굴을 한 아케론이 자꾸만 늘어지는 루키우스의 몸을 꽉 부여잡고 있었다. 그는 선혈이 묻어 나오는 입술에 약을 흘리려 들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고개를 작게 도리질하며 연거푸 그의 손길을 거부했다.
그의 떨리는 손을 알면서도, 아니 알기에 루키우스는 두 눈에 눈물을 흘리며 그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ડχ
균열이 번져 나가는 아케론의 얼굴을 바라보며,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날….”
아케론의 굳은 얼굴은 깨지기 직전의 도자기와 같았다. 흔들리는 벽안에는 격렬한 불꽃이 튀었고, 바늘이 들어가지 않을 것만큼 단단한 몸은 근육이 팽창되어 도드라져 있었다.
“날 놔줘…….”
시선이 마주하는 순간 전해지는 마음.
“이러지 마…….”
루키우스는 그를 견딜 수가 없어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잠긴 목소리로 희미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아케론은 결국 얼굴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다. 잘게 떨리는 턱선. 흰 이마에 핏줄이 꿈틀거린다. 불처럼 뜨거운 그의 가슴을 타고 루키우스의 부드러운 손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싫, 싫.”
가쁜 숨을 내뱉는 루키우스를, 아케론은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몸을 움직였다.
그것은 루키우스가 차마 거부할 틈도 없이 진행된 일이었다.
루키우스의 눈이 커지고 그의 입술에서 으읍 소리가 흘러나왔다. 입술에 댄 잔을 거둔 아케론이 그 안의 약을 제 입술에 머금고 몸을 숙이고 있었다.
‘아…!’
루키우스는 입가에 불에 타오르는 공이 닿은 듯한 뜨거움을 느끼고 두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시야에 푸르른 눈이 있었다. 루키우스는 제 입술 위에 닿는 입술에 아무런 반항도 하지 못한 채 얼어붙고야 말았다.
소소한 반항을 하던 루키우스의 몸이 이내 축 늘어진다. 새하얀 손이 두꺼운 팔 위로 흘러내리곤 앙상히 마른 팔이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체온으로 달아오른 미지근한 액체가 혀를 타고 그의 목구멍에 흘러내리고 있었다.
시간이 멈춘 때였다.
뜨겁게 달아오른 입술이 피를 머금은 입술을 머금고, 침묵 끝에 부르르 떨리던 루키우스의 몸의 떨림이 멈추어졌다. 느릿한 숨결과 함께 입술이 떼진 순간이었다.
아케론은 젖은 입술을 작게 벌리곤 그 사이로 작은 숨을 헐떡거렸다. 그 채로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흔들리는 눈과 마주한 순간 루키우스가 힘없이 웃음을 흘렸다.
그 순간 루키우스는 영광스러운 개선식 한가운데 있던 사내를 마주하고 있었다.
작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루키우스가 속삭였다.
“장군…….”
삭막한 군청색 눈과 초점이 잡히지 않는 유리 같은 눈이 마주하고 있었다.
이 마음을 어찌해야 하지?
이 일을 어찌해야 하지?
자안에는 절망이 묻어 나왔고, 젖은 얼굴에는 슬픔이 묻어 나왔다.
정신을 차리지 못한 채 맑은 눈물로 얼굴을 물들이던 루키우스의 눈이 돌연 크게 떠졌다.
그때였다.
“하악…!”
둘연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흘렀다.
아케론이 몸을 숙이고 있었다.
루키우스의 뺨이 거친 손에 부여 잡히고, 뜨거운 입술이 입술을 덮쳤다. 저절로 벌어지는 입술 사이로 살덩어리가 파고든다. 루키우스의 몸에 경련이 일어나고 동공이 점으로 수축하고야 만다.
아케론이 그의 입술을 덮치고 있었다. 뜨거운 혓바닥이 루키우스의 혀를 얽고 있었다. 목구멍에 정열을 쏟아붓고 있었다.
푸른 눈이 섬전처럼 번뜩였다.
그건 약을 흘려보내는 행위가 아니었다.
살덩어리가 살아 있는 듯 입술 안에 꿈틀거리고 있다.
호흡은 목구멍 안으로 빨려들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커질 군데가 없이 확장된 보라색 눈에 눈물이 소리 없이 흐르는 그 순간 루키우스의 얼굴에 아득한 절망이 번져 나갔다.
‘안 돼….’
넋이 나간 얼굴을 목표물을 노리는 사냥꾼처럼 뜨겁게 바라보며, 아케론은 숨결을 빨아들이는 행위를 길게 이어 나갔다. 마치 영혼까지 빨아들이려는 듯이 뺨을 홀쭉하게 하며, 그는 키스하는 내내 뜨거운 눈으로 루키우스의 젖은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 안 돼….’
추락을 느끼며 루키우스가 눈을 감았다.
동시에 한 줄기 투명한 눈물이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다음 날 아침.
루키우스가 눈을 뜨고 마주한 것은 밀빛 산이었다.
“…….”
금발이 햇볕을 받아 화사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황홀한 색의 머리카락에는 칼처럼 날카로운 코가 묻혀 있었다. 평소에 루키우스가 고귀하다 생각했던 것이었다. 시원한 턱선을 잠시간 바라보던 루키우스가 문득 시선을 돌렸다.
허리에 단단히 감긴 손, 뺨에 닿는 단단한 팔뚝. 그제야 제가 아케론과 부둥켜안은 채 잠을 자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다리는 두 사람의 것이 얽혀 누가 누구의 것인지 구분하기가 힘들었다. 허리에는 굵은 팔이 둘려 있었고 그의 다른 팔은 루키우스의 목 아래에 대어져 있었다.
그 순간 고른 숨소리와 함께 사내의 입술 사이로 흐른 숨결이 그의 반듯한 이마에 스치고 있었다.
태양 볕이 스며든 사내의 얼굴은 황홀했다. 아이홀을 유독 짙게 만드는 도드라진 눈썹뼈, 존재감이 강한 이목구비. 군인다운 강건한 용모의 사내는 평소에 사람들의 두려움을 사는 위압감을 흘렸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루키우스가 그 얼굴에서 시선을 떼기까지는 긴 시간이 흘렀다.
그 광경은 마치 장엄한 신상을 마주하는 것만큼 아름다웠으므로.
가슴께를 가린 이불이 저절로 내려가 강인한 사내의 몸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눈에 보이는 배 위에 자리한 상처들. 접혀진 배의 근육은 숨을 쉴 때마다 오르락내리락했고, 오래된 상흔을 부각시켰다.
루키우스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밤새도록 식은땀이 흐르는 제 몸을 수건으로 닦고 추워하는 제 몸을 쓸어 주던 사내를. 장군, 장군. 저도 모르게 이름을 중얼거릴 때 화를 내지 않았던 그를. 흐느끼던 제 눈가를 닦아주던 아케론을 떠올렸다.
보라색 눈이 뜨여졌다.
기절한 사람처럼 잠에 취해 있는 아케론을 루키우스는 그의 팔뚝을 벤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맑고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케론이 고르게 숨을 내뱉을 때마다 뜨거운 숨결이 이마를 쓸었고, 그에 루키우스는 미묘한 희열을 느꼈다.
흐트러진 고동색 머리카락이 이마를 가렸다.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석상같이 차갑고 날카로운 그의 얼굴을 더듬고야 말았다. 그 순간 그의 몸이 움찔거렸다.
서늘하다.
손바닥 아래 느껴지는 그의 얼굴에 대한 감상이었다. 평온한, 혹은 지친 얼굴로 죽은 듯 잠을 자는 사내의 얼굴을 그렇게 잠시 홀린 얼굴로 더듬던 루키우스는 그의 높은 콧대를 손으로 쓸던 중 문득 몸을 굳히며 얼어붙을 수밖에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떠져 저를 가만히 응시하는 군청색 눈과 마주한 것이었다.
적막이 흘렀다.
수수한 바람이 분 때였다.
한낮의 따뜻한 햇살이 무뚝뚝한 사내의 얼굴에 스며들어 그를 한층 더 온화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아니, 실제로 딱딱했던 사내의 얼굴은 그 순간 밀빛의 햇살을 받으며 조금은 온화하게 풀린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깊은 군청색 눈으로 루키우스를 바라보며 아케론은 뜻 모를 침묵을 깊이 이어 나갈 뿐이다. 그런 정적인 그와 반대로 루키우스는 역동적인 반응을 보였다.
복잡한 감정이 물결치는 루키우스의 얼굴을 아케론은 그저 담담히 바라볼 뿐이었다.
침묵 끝에 루키우스가 갈라진 목소리를 흘렸다.
“비켜.”
그러곤 그는 행동했다.
제 앞을 온전히 가리는 두터운 가슴을 손으로 밀며 루키우스가 빠르게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그는 마치 아케론이 저를 잡기를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빠르게 방을 뛰쳐나갔다.
아트리움에는 솔론이 자리하고 있었다.
“주인님?”
천막 밖으로 빠져나오는 반라의 주인의 모습에 솔론이 얼떨떨해할 무렵이었다.
“그를 가둬.”
공황에 찬 목소리에 솔론이 눈을 크게 떴다.
“예?”
루키우스는 담담히 말을 내뱉었다.
“당장 별채에 유폐해라.”
그날 이후 루키우스는 아케론을 찾지 않았다.
*
“행복한 헬리오스 축일19)!”
이스카리아 섬에도 겨울은 있다.
11월까지도 추위에 강한 사람은 맨다리를 훤히 드러내고 다닐 수 있었던 온화한 지중해의 기후는 눈에 씻고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나 이번 12월은 더욱 칼바람이 세차고 매서워 서늘한 감이 있었다. 그리하여 섬에 활기를 채웠던 섬사람들은 바깥출입을 삼갔고,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거리는 먼지만 날리는 한산한 것이 되어 갔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습을 보이더니 이스카리아 섬은 다시금 여름의 그 활기차고 번영한 도시의 모습을 되찾아갔다.
사람들은 색색의 비단을 휘장처럼 꾸며 자기 집 창문에 걸어 장식했고, 거리는 시장이 크게 들어서 아카이아20)와 로마 본토에서 들어온 상인들이 물건을 팔았다.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노인들은 집안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머리에 천을 뒤집어쓴 채로 언덕 높은 곳에 자리한 신전에 올라 섬을 지켜주는 신께 공양을 했고 집안의 번영을 빌었다.
“올해에도 나와 내 자손에게 헬리오스의 축복이 가득하길.”
사람들은 바로 헬리오스 축일을 준비하고 있던 것이었다.
지중해를 수호하는 신은 포세이돈이었으니 이스카리아 섬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신 또한 그였으나 오래전 이스카리아 섬에 정착한 선조는 헬리오스를 섬기는 이들이었다.
그리하여 이스카리아 섬에서 가장 성대한 축일이 바로 헬리오스 축일이었다.
이날을 기준으로 일주일간 사람들은 제가 가진 것 중에서 가장 화려한 옷을 꺼내 입어 거리를 활보했고 삼 일간은 신전에 몰려들어 신에게 예배를 드렸다. 당일에는 거리에서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며 신년이 오기를 기대했다.
신전의 성스러운 불 앞에서 연인들은 사랑을 맹세했고 밤까지 계속되는 시끌벅적한 축제에서 사람들은 마음 편히 먹고 마시며 헌 해를 흘려보냈다.
추운 겨울을 뜨겁게 달굴 만치 열정적인 날들이었다.
그러나 축제의 바람에 젖어 들뜬 이스카리아 섬과 퍽 다르게 적막만이 감도는 어느 싸늘한 저택이 외딴 절벽 위에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수많은 소문을 몰고 다닌 이스카리아 섬 파도가 몰아치는 절벽 위 로마식 저택이었다.
따뜻한 촛불이 흔들리고 있었다. 사각거리는 소리가 은은한 불빛이 감도는 조용한 방 안을 울리고 있다. 사람의 목소리가 들린 것은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일이었다.
“중동에서 제법 쓸 만한 비단을 들여왔습니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은 중년의 집사가 고요한 눈으로 루키우스의 안색을 살폈다. 우유가 엉긴 듯한 보드라운 뺨 위에 자그마한 홍조를 띤 청년이 잠자코 말을 들으며 펜을 움직이고 있었다. 구불거리는 매끄러운 금발이 스륵 흘러내려 뺨을 가릴 때, 청년의 안색을 살피던 집사의 입에서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 축일도 그냥 보내실 생각입니까?”
“…….”
“노예들이 불안해합니다. 지중해에 살면서 포세이돈을 경외하지 않고, 헬리오스의 축일을 기념하지도 않으니 저주를 받을 것이라 수군거리더군요.”
“…….”
“조촐하게나마 신전에 공양을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이어지는 말들에 루키우스는 답변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며 경건한 자태로 제가 펜을 움직이고 있는 종이 위를 조용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조금의 시간이 흘러, 집사는 덤덤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미신 따위 믿지 않는다.”
“…….”
“나는 내 눈으로 본 것만 믿어.”
사각, 펜이 멈추는 소리가 들린 순간 집사의 몸이 멈칫했다. 그는 고개를 돌린 루키우스의 고요한 빛이 서린 눈을 마주하곤 몸을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신이 내 앞에 나타난다면 나는 그를 경외하겠다.”
루키우스는 마치 사람의 마음을 꿰뚫는 듯한 눈으로 솔론을 응시하고 있었으므로. 집사는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한 채 침묵할 뿐이었고, 그렇게 느릿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하지만 난 그들을 본 적이 없지. 태어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
“내가 그들을 찾을 때도.”
“…….”
“……나는 오직 사람만 보았을 뿐이다.”
사람은 각자의 사연을 품고 있는 법이다.
루키우스가 무슨 뜻으로 그 말을 하는지 정확히 짐작할 수는 없었으나 집사는 더 이상 그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는 어두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당신의 마음을 이해하지만 사람은 모두 이성적인 게 아닙니다.”
루키우스의 몸이 멈칫한 때였다. 손에 든 펜을 내려놓고 잠시간 정면을 바라보던 루키우스는 이윽고 무릎이 집사를 향하게 몸을 완전히 돌리곤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고, 그 끝에 무거운 목소리는 내려앉았다.
“왜 내게 묻는 거지?”
집사의 얼굴을 무표정한 얼굴로 응시하며 하는 말이었다.
“난 항상 축일을 기념하지 않았고, 넌 항상 내게 아무런 말도 묻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자유민에서 노예가 되어 뿔뿔이 흩어질 뻔한 너희 부자를 구매하면서 요구한 조건이었지.”
“…….”
“내가 신을 믿지 않는 불경한 자란 걸 넌 알고 있었고, 그럼에도 넌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어. 왜냐하면 넌 이성적인 인간이고, 네 불운한 운명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어리석은 짓 따위는 하지 않는 사람이니까.”
“…….”
“그런데 너는 오늘 이상하구나.”
그 말을 끝으로 다시금 적막이 흘렀다. 집사는 더 이상 루키우스를 설득하지 않았고, 그는 그저 굳은 얼굴로 루키우스를 바라보다가 저를 끝끝내 바라보지 않는 주인의 굳건한 마음을 깨닫고 묵직한 발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짙은 남색 천막을 걷어 아트리움을 빠져나올 때 솔론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우고 있었다.
그런 그를 루키우스는 날카로운 눈으로 노려보다가 문득 한숨을 내뱉으며 의자에 몸을 늘어트렸다. 그의 얼굴은 이슬이 묻은 싱그러운 장미 같았던 평소와 사뭇 달라 보였다.
일흔 먹은 노인의 권태가 느껴지는 노쇠한 얼굴…….
그리 피로에 찬 모습을 한 채 루키우스는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시간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불타는 두 눈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너는 지금 뭐 하고 있지?’
루키우스가 아케론을 보지 않은 지 보름째였다.
평소에 아케론의 일거수일투족을 솔론에게 보고 받던 루키우스는 그의 소식을 제게 말을 하지 말라 일렀다. 또 아케론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상황을 묻지도 않았다.
루키우스는 그저 묵묵히 집필을 이어 나갈 뿐이었다. 너무나도 늦어지게 된 본디 제가 해야 할 일을, 그는 기한 내에 끝내려 했던 것이다.
그 시간 동안 그는 솔론이 본 적 없는 예민하고 날카로운 모습을 보였다.
평소에 관대했던 주인은 노예들의 실수에 과민 반응을 보였고, 신경을 거스르는 일을 용납하지 않았다. 덤벙대는 니코마티스가 일선에서 물러나고 솔론이 그의 시중을 직접 드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루키우스가 불안해하던 날이 다가왔다.
헬리오스 축일이었다.
마르쿠스가 예고했던 로마 원로원 의원이 이스카리아 섬을 방문하는 날.
검투 경기를 좋아한다는 로마 의원의 방문 소식에 루키우스는 불안을 느꼈고, 불안은 사실이 되었다.
예고한 대로 마르쿠스가 달마티카 의원이 저택을 방문하고 싶어 한다는 서신을 전달했던 것이다. 루키우스는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다가온 헬리오스 축일 당일, 향연이 이뤄지는 날, 루키우스는 신음을 흘리며 고통을 삼키고 있었다.
‘아, 제기랄.’
어두컴컴한 방에서 몸을 웅크린 채 그가 숨을 헐떡거렸다.
‘……아케론.’
답변은 없었다. 아니, 루키우스는 애초에 그것을 기대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그가 음울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연회를 위한 준비를 했다.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겨울에도 따뜻한 팔리움 아래 짧은 튜니카를 입던 루키우스는 고풍스럽고 치렁치렁한 토가로 옷을 갈아입어야만 했다.
로마 원로원의 의원들은 명예로운 경력을 차곡차곡 밟아 마침내 그 정상에 선 이들이다. 로마인이라면 마땅히 그들에게 경의를 표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므로 루키우스는 토가를 입었던 것이다.
얇은 붉은색 끈으로 허리를 조여 맨 토가는 품이 넓고 헐렁하여 치렁한 품이 루키우스의 마른 몸을 감추었고, 그것은 평소에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미지의 위엄과 합쳐져 그 순간 그를 완연한 로마 귀족으로 보이게 했다
성인식을 치른 사내답지 않게 소년 같은 면모를 보였던 루키우스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부정할 수 없는 성인 사내로 보였다.
또 그의 얼굴 또한 완연한 로마의 귀족 가장답게 진중하고, 또 무거웠다.
마차가 마침내 현관 앞에 서고, 루키우스가 고개를 들었다. 니코마티스와의 대담을 떠올리고 있었다.
‘너희는 자유인이었지. 네 지금 삶에 만족하느냐?’
‘예, 만족합니다.’
‘왜?’
‘아버지는 몰라도 제게는 자유인 시절의 이야기는 너무 먼 일입니다. 언제 적 이야기인데요? 만약 주인님이 가혹했다면 제 운명을 비관했겠지만…… 저도 모르지 않습니다. 제가 자유민보다 호화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는 걸. 맛있는 음식을 먹고, 여가 시간에 책을 읽고, 단 한 번도 채찍을 맞지 않았단 걸.’
‘…….’
‘사실 어떨 때면 노예가 되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 물론 정말 다행이란 말은 아닙니다. 그래도 자유는 소중한 것이니까요. 저도 그리 생각 없지는 않아요. 하지만 최악은 면했으니 기뻐할 따름인 게지요. 누구를 원망하겠습니까? 모든 것은 제 운명인데.’
운명이라.
루키우스가 고소했다.
‘그래…… 그렇군.’
그래, 보통 사람들은 운명을 받아들인다.
운명의 물살을 거스르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런 어리석은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사람이 그들을 파괴시키는 운명에 굴복한다는 걸 받아들이지 못했다.
루키우스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고 그의 얼굴에 서느런 기운이 서렸다.
‘그래,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운명을 하러….’
그가 상념에 깊게 빠져들어 가던 때였다.
“루키우스 님.”
문득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차 문이 열리고, 여유로운 웃음을 흘리며 사내가 마차 밖으로 발을 디뎠다. 어둠 속 새파란 눈을 빛내고 있는 남성과 마주하고 루키우스는 무너지는 얼굴을 애써 가다듬었다. 잠긴 목소리가 연이어 흘렀다.
“의원은?”
마르쿠스는 매끄러운 얼굴에 미묘한 웃음을 띤 채 말을 내뱉었다.
“충고하건대, 그분께는 공손히 말을 하셔야 할 겁니다.”
“…….”
“그분은 연원조차 모르는 한낱 어린 청년의 무례한 말을 참아 줄 만큼 관대한 사람이 아니니…… 집정관에게 함부로 말을 지껄이는 무례를 저지르지 마시길 바랍니다.”
말꼬리에 이르러선 새파란 눈이 허공에 반짝이고 있었다.
명백한 경고의 말에 루키우스가 냉소를 흘렸다.
“어린것의 반말이 그렇게 신경이 쓰였어? 응?”
조롱이 가득 담긴 웃음. 입술 끝을 비틀어 웃곤 루키우스가 나른히 말을 내뱉는다. 시선이 교환하는 순간 마르쿠스의 눈이 희미하게 흔들거렸다. 조금만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서 이뤄진 대담. 잠시간 마르쿠스를 노려보던 루키우스는 돌연 정색하곤 고개를 돌려 그를 향한 시선을 뗐다.
여유롭던 사내의 얼굴이 굳어지고, 제 뒤통수를 날카롭게 찌르는 시선을 무시하며 루키우스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곤 저택에 마침 당도한 다른 한 마차를 바라보았다.
때마침 백마가 이끄는 이두 마차가 자리에서 멈추었다.
달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발이 지면이 내려앉는다.
루키우스의 귓전에 연이어 말이 흘렀다.
“무슨 대담을 하고 있었지?”
루키우스의 눈썹을 꿈틀거리게 한 말이었다.
“인사를 하려 했지요.”
마르쿠스가 굳은 얼굴을 부드럽게 풀고 온화한 목소리를 흘렸다. 루키우스는 꼿꼿이 허리를 세운 자세로 마차에서 내리는 사내를 말없이 응시하고 있었다.
공직자만이 입을 수 있는 새하얀 토가가 팔랑거리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흘렀다.
“거짓말을 하는군.”
마차에서 내린 사내를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속으로 말을 삼켰다.
“섭한 소리를 하시는군요. 저를 의심하십니까?”
“집정관이 그런 얼굴을 하는 건 나는 처음 보는데.”
개가 늑대와 어울리는 법은 없고, 승냥이의 친구가 사자일 리는 없지 않는가?
“이리 초대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루키우스 님.”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느릿한 숨결이 흘렀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달마티카 의원.”
그는 마흔은 족히 되어 보이는 사내였다. 그다지 젊은 나이는 아니었으나, 원로원의 일원치고는 많은 나이도 아닌.
마르쿠스의 소개를 받으며 고개를 숙인 흑발의 사내는 어딘가 마르쿠스와 닮아 보이는 자였다. 그보다는 조금 더 호감을 주는, 그보단 조금 더 체구가 크고 듬직한 인상의 사내. 눈가의 주름에서 연륜을 숨길 수 없으나 말끔하게 관리된 듯한 얼굴은 젊었을 때의 외모를 충분히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매력적인 것이다.
전반적으로 사람의 신뢰를 살 법한 번듯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이분이 바로.”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느끼고 입술 끝을 딱딱히 굳힐 수밖에 없었다.
‘승냥이의 눈.’
느릿한 한숨이 흘렀다.
“예, 영예로운 로마 원로원의 일원이신 아울루스 셈프로니우스 달마티카 님이십니…… 달마티카 의원님?”
달마티카가 루키우스를 집요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 이런.”
“…….”
“……생각보다 더 어리고, 아름답군요.”
“…….”
“무례를 사죄드립니다…… 어린 도미누스.”
사람은 유유상종인 법이다.
욕망이 번들거리는 시선이 목덜미에 닿는 순간 루키우스는 입술 밖으로 흘러나오는 욕지거리를 억지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 호기심이 일렁거리는 눈은 분명한 목적을 띠고 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는 시선을 애써 무시하며 루키우스는 입술을 열었다.
“따라오십시오.”
*
시민, 자유, 로마!
루키우스가 로마인에게 가장 중요한 세 가지 것을 읊조렸다.
그리고 그 단어들은 또한 한 사내를 상징하는 말이기도 했다.
‘아케론….’
술을 홀짝거리며 루키우스가 인생에서 두 번째로 인상 깊었던 그 어느 장면에 대해 떠올렸다.
그것은 주홍빛 쨍한 햇살이 내리쬐던 검투장에서의 기억이었다.
그때 아케론은 무수히 많은 시선 속에 있었다.
땀에 젖은 사내의 몸에 근육이 뱀처럼 꿈틀댈 때 사람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상대의 목을 찔러 비정한 죽음을 선사할 때 전율했다. 피를 뒤집어쓴 사내의 눈은 이글거리고 있었다.
그 분노, 그 열정, 그 삶에 대한 의지.
‘……가지고 싶었지.’
몽혼한 얼굴로 붉은 포도주를 홀짝거리며 루키우스가 숱이 많은 속눈썹을 깜빡거렸다. 솜털이 보송한 뺨을 포도주와 비슷한 색으로 붉힌 채 더운 숨을 내뱉었다.
그의 얼굴에는 부정할 수 없는 욕망이 스치고 있었다.
참지 못해 방문했던 이스카리아 섬의 대검투장에서.
라티움에서 닿을 수 없이 높은 위치에 있던 사내는, 이스카리아 섬에서는 그의 손아귀에 넣을 수 있는 비천한 노예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욕망했던 사내는 손아귀 안에 있었다. 그리고 루키우스는 그 순간 뱀처럼 머리를 치켜드는 욕망을 참을 수 없었다.
아, 가지자!
저 사내를 내 품 안에 넣자.
사람은 욕망으로 사는 것이다.
루키우스 또한 그러했고.
그래서 저질러 버렸다.
‘후회하지 않아.’
허나 욕망을 따른 자는 그 책임을 져야 하는 법이다.
‘후회하지 않아.’
핏기가 가신 얼굴로 루키우스가 술잔을 기울였다.
그 순간 입술이 불에 댄 듯 화끈하게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포도주에 젖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루키우스가 예고 받지 못한 키스를 생각했다.
그의 얼굴에 균열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통제에서 벗어난 아케론의 행동.
그리고 탈주를 하는 제 욕망.
그것은 그의 오만의 대가였다.
고고한 사내를 알기에 안심했다. 그가 절대로 저를 사랑하지 않으리라 안심했다. 그에게 모멸감을 주고, 성적인 수치심을 주면서 결코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건만… 그러나 사람의 마음은 루키우스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말로만 들었지만 주인께서는 정말로 어리군요. 싱그러운 젊음이 부럽습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그 일이 후회가 되는지!
술에 취해서 그런 건가?
아니면 저 불쾌한 것들 때문인가.
잘은 모르겠지만 후자의 지분이 제법 큰 것 같았다.
“진실로 아름답군요, 저택의 주인께서는.”
루키우스의 입가에 조소가 얼핏 스쳤다가 사라졌다. 담담한 목소리로 그는 답했다.
“과찬이십니다.”
사실 이건 처음부터 불안한 일이었다. 마르쿠스와 달마티카 의원을 접대하는 일은.
로마의 상류층들은 소년애를 즐기곤 했고, 심지어 마르쿠스는 호색한 자였다. 셈프로니우스 달마티카는 루키우스가 들어본 적이 있는 명문가였으나, 집안의 격이 그 사람의 격을 지정하는 것은 아니란 사실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하물며 마르쿠스와 어울리고, 검투 경기를 좋아하는 전형적인 로마 귀족이라면 말할 것도 없지.
아니나 다를까 향연은 쓰레기 같은 자리였던 것이다.
세상의 온갖 진미를 가져다 바친 자리에서 달마티카 의원은 음식을 즐기는 것보다 저택의 아름답고 어린 주인의 얼굴을 탐닉하는 데 애를 썼고, 튜니카를 즐겨 입던 루키우스는 그날 제가 품이 넓고 치렁한 토가를 입고 나온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만 했다.
“오, 오늘은 왜 튜니카를 입지 않으셨습니까?”
평소에 루키우스에게 무시당하던 한을 풀듯 간간이 마르쿠스는 느물거리는 목소리로 의원의 시선을 한껏 그에게 몰았다. 원로원 의원이란 명목상의 집정관, 그것도 차라리 아카이아(그리스)에 가까운 네오폴리스 앞바다에 자리한 섬의 수장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자리.
“…접대를 하는 자리니.”
그리하여 그 날만큼은 루키우스 또한 냉소적인 말을 내뱉지 못했던 것이다.
“튜니카? 그가 튜니카를 즐겨 입나?”
“이 저택의 도미누스께서는 아직 나이가 어리셔서…… 종종 많이 보았지요.”
심지어 추파에 가까운 시선을 받고서도 말이다.
“성인 사내는 토가를 입지.”
아쉬움이 자리한 눈길이 루키우스의 발목을 쓸고 있었다. 묵묵히 포도주잔을 기울이며 루키우스는 짙은 속눈썹을 내리깔곤 말을 피하려 들 뿐이었다.
적당히, 적당히 이 자리를 넘어가자.
그런 마음으로 향연에 임하였지만.
“발목이 가늘군.”
그렇다고 역겹지가 않은 것은 아니리라.
“도미누스께서는 특히 다리가 아름답지요. 다이아나 여신을 닮았다 칭해도 충분합니다.”
“아, 그래?”
“다음번에는 여름에 한번 들르시지 않겠습니까? 루키우스 님은 부유하시고, 의원님께선 명예로운 경력을 보유하셨으니 서로 몹시 어울리시지 않습니까?”
잘게 떨리는 속눈썹을 깜빡거리며 루키우스가 속으로 생각했다.
‘꼭 포주처럼 이야기하는군.’
착 들러붙어 간사하게 이야기를 하는 꼴이 볼만하다. 루키우스의 냉랭한 시선이 마르쿠스의 얼굴에 닿았을 때, 긴 의자에 비스듬히 누워 있던 그의 입가에선 가는 미소가 스치고 있었다.
“돈과 권력은 진실로 잘 어울리는 것이 아닙니까? 성숙하고 현명한 사내와, 어리고 아름다운 소년처럼 말입니다.”
그 말을 루키우스는 두 눈을 내리깔며 흘려보낼 뿐이었다.
그는 향연에서 아케론과 함께하던 식사 때처럼 나긋나긋 상냥하게 굴지 못했다. 평소처럼 여유를 내보일 수 없었다. 그는 그저 묵묵히 술을 마시며 그 어느 기억에 함몰될 뿐이었다.
그것은 바로 하늘 가장 높은 곳에서 시린 빛을 내뿜는 북극성과 같은 눈과 관련된 기억이었다.
보름 동안, 단 하루도 그 생각을 거른 적이 없다.
루키우스의 입술에서 느릿한 한숨이 비어져 나왔다.
검투장에서의 재회. 그와 몸을 섞던 황홀한 밤. 그가 황홀한 색의 푸른 눈으로 저를 노려보던 순간. 아케론과 함께했던 그 모든 기억을 루키우스는 보름 동안 순서에 상관없이 기억의 서랍에서 꺼내어 늘어놓았다. 시간과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의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는 비탄의 강, 통곡의 이름을 들을 때의 기억이 눈앞에 흐르고 있었다.
‘슬퍼서.’
지닌 이의 얼굴에는 희미한 절망이 물들어 있다.
‘너무 슬퍼서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새파란 눈을 어둠 속에 빛내던 사내.
루키우스가 거친 숨을 내뱉었다.
‘그리워.’
누구에게도 무릎 꿇지 않는, 심지어 운명에도 굴복하지 않는 드높은 영혼의 사내를 마주하고 있다.
담담히 제 이름의 연원을 말하던 얼굴은 다시금 어느 순간으로 바뀌었다. 그것은 아침의 샛노란 햇살을 받으며 고요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던 사내의 기억이었다. 그 얼굴에는 평화가 있었다. 그것은 루키우스가 아케론과 재회한 이후로 보지 못했던 얼굴이었다.
그곳에 비탄과 통곡과 슬픔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마치 영광의 절정을 달리는 챔피언만큼 활력이 넘쳐 보였다.
미래가 그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그가 평화를 되찾은 이유를 루키우스는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심란한 마음에 얼굴을 굳히던 루키우스가 문득 고개를 돌려 흘끗 밤하늘을 바라보았다.
보통 향연은 아침 해가 뜰 때까지 계속된다. 아직도 새까만 밤하늘에 루키우스는 슬쩍 미간을 찌푸리며 얼굴 위로 불쾌함을 희미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검지로 꾸욱 누르며 표정을 가다듬고, 그는 수면 아래로 깊이 가라앉는 듯한 느낌에 애써 저항하며 투명한 색의 포도주를 홀짝이고 있었다.
니코마티스의 말을 냉정히 끊었지만, 몸 상태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늘어지는 몸을 억지로 움직이려니 죽을 맛이고, 독한 포도주로 감각을 일깨우려니 맛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감각이 둔해지는 느낌이지.
‘죽음이라.’
루키우스는 입가에 작은 조소를 흘리며 고개를 조금 숙였다. 뜨거운 손길이 닿았던 목을 쓰다듬으며 그는 저도 모르게 잠시간 감상에 물든 얼굴로 혼을 뺐다.
왁자지껄 떠드는 마르쿠스와 달마티카와 달리 루키우스는 자리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해져. 불꽃을 닮은 눈에 생각이 휘말려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게다가 늘어진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루키우스는 그들에게 평소처럼 단호한 대응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약을 먹어 몸을 늘어트린 채, 그는 지난 보름간의 일을 숙고하며 또 그리움을 깊게 태우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의 일이었다.
문득 느긋한 목소리가 흘렀다.
“저택이 참 아름답군요.”
목을 쓸던 손이 멈칫하고, 루키우스는 짧은 침묵 끝에 느릿하게 고개를 돌려 말을 내뱉은 자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열었다.
“의원님.”
“…….”
“과찬이십니다.”
달마티카는 의미심장하게 웃었고, 루키우스는 시선이 거두어진 순간 희미하게 얼굴을 굳혔다.
향연은 밤이 깊어지도록 계속되었다.
로마에 있을 때 친분을 맺었단 두 사내는 열 살 가까이 되는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마치 함께한 지 10년이 넘은 듯한 지우처럼 굴었고, 술잔을 마주 대며 호쾌하게 웃었다. 처음에 저택의 주인에게 감사를 표하는 형식적인 대화를 주고받던 그들은, 취기가 돌자 그에 대한 질 낮은 농담을 몇 번 나누며 솔론의 얼굴을 일그러트렸으나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화제를 바꾸곤 다른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최근에 로마에서 벌어진 일들-아우구스투스의 스승이 고리대금업을 저질러 원로원에 고발당한 일, 저명한 의원이 이교의 신을 믿고 있다는 방문이 돈 일, 라인강 전선을 책임졌던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장군이 최근에 로마로 귀환한 일-을 논하였다. 그 시간 동안 루키우스는 말없이 물에 희석한 술을 홀짝거렸다.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고, 시야는 어지러이 흐려져 있었다.
오늘따라 몸이 유독 좋지 않았다. 고통을 참는 것에 익숙하지만, 루키우스는 이 순간 숨통을 조이는 압박감을 느끼며 얼굴을 희미하게 일그러트리고 있었다.
그 순간 지중해 바다를 닮은 푸른 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귀는 먹먹해지고 쿵, 쿵.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가 대화를 대신한다. 아슬아슬한 숨을 내뱉으며 루키우스가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그 순간 검투장에서의 기억이 다시금 눈앞을 어른거리고 있었다.
그날따라 루키우스는 그의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우지 못했고, 동요하고 있었다. 마음이 먼저 무너졌는지, 몸이 먼저 무너졌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분명 그의 심신은 함몰되어 가고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들에게 트집을 잡히지 않겠다는 일전의 제 다짐과 달리 사내들의 말을 어영부영 흘려 넘겼고 사내들만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던 것이다.
새벽달이 떠오르고 분위기가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그를 위해 개선식을 올릴 예정이겠군요.”
시기심이 희미하게 묻어 나오는 목소리로 내뱉은 말에 딱딱한 빵을 부드러운 커스터드 크림에 찍던 손이 멈추고야 만다. 달마티카 의원의 얼굴이 잠시간 굳어졌다가 이윽고 풀렸다.
“아니, 원로원은 반대를 했다. 약식이라도 개선식은 올리지 않을 거고, 이제 그건 아우구스투스만이 치를 수 있는 명예로 영원히 남을 거야.”
“게르마니쿠스가 개선식을 치렀는데 그를 넘길 수,”
“그는 반역자다! 게르마니쿠스가 아니야. 명예로운 칭호를 박탈당한 지 몇 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그리 부르지?”
쏟아져 나오는 역정에 마르쿠스가 입술을 다물고 당황한 표정을 짓고야 만다. 순한 인상이었던 달마티카 의원의 얼굴은 그 순간 일그러져 험악한 기운을 흘리고 있었다.
“으음.”
뒤늦게 정신을 차린 사내가 다시금 표정을 가다듬고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실수네.”
마르쿠스가 그에게 공손히 대하고 있지만, 엄연히 그는 한 지역의 대표다.
달마티카가 그리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자가 아니었다. 단지 마르쿠스가 그에게 아쉬운 입장이고, 그들의 교분이 깊어 편하게 대한 것일 뿐이지.
얼어붙은 상황을 뒤늦게 수습하려는 달마티카 의원에, 마르쿠스 또한 순간 당황했던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아닙니다.”
그는 다시 여유를 되찾은 듯한 얼굴로 말을 내뱉었다.
“제가 실수를 했군요.”
그 순간 루키우스는 엄지로 포도주잔 표면을 문지르며 허공을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험악해지는 분위기와 상관없이 그는 마치 이 세계와 별리된 사람 같았다. 그는 다른 감각에 휘말려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하늘 위를 부유하는 것 같기도, 깊은 수면 아래 잠긴 것 같기도 해.
작게 떨리는 손으로 포도주잔을 쥐며 루키우스는 그 순간 니코마티스의 조언을 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이제 그만 약을 먹으라는 말.
평소에는 고압적인 태도로 무시했던 말을 지금 루키우스는 되새길 수밖에 없었다.
‘그의 말을 조금은 들을 걸 그랬나?’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들으며 루키우스가 느릿하게 한숨을 내뱉다가 눈을 감았다. 빨라지는 맥박, 불안정해져 가는 호흡. 불안한 마음을 꾸역꾸역 억누르며 루키우스가 눈을 내리깔고, 숨을 억눌렀다.
그렇게 긴장이 고조되는 루키우스와 달리 연회장 안의 분위기는 차츰 부드럽게 풀려 나가고 있었다.
“포스투무스가 실망할 법한 일이지. 그래, 사람들은 당연히 그대처럼 생각할 거야.”
달마티카 의원은 어느 순간 입술 밖으로 한숨을 흘리며 긴 의자에 깊게 몸을 묻었다. 침묵 끝에 그가 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개선식을 올려야 하는 게 옳다는 걸 누가 모르나? 국가의 반역자가 그것을 치렀으니 불명예를 씻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개선식을 허하는 편이 맞지.”
포도알을 비틀어 떼 내던 손이 멈칫했다.
“포스투무스가 반역자를 처단하고 무너져 내리는 라인강 전선을 사수했으니, 비록 예전보다 손해는 보았지만 로마에 공을 세운 건 맞지. 하지만 황제는 포스투무스를 경계할 수밖에 없어.”
그 대목에 이르러 달마티카 의원은 숨을 멈추고, 잠시간 침묵을 지켰다. 마르쿠스는 묵묵히 그의 말을 기다렸고, 침묵 끝에 무거운 말들은 이어졌다.
“지금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에 몸을 담은 군인을 척결하고 황제 위에 올랐다. 본래 정치에 관심도 없던 그가 권좌에 오른 까닭이 그거라고. 아우구스투스는 형과 아끼는 어린 조카딸을 군인에게 살해당했어. 그런 그가 포스투무스 같은 정치 군인을 두고 볼 수가 있겠나? ‘그’처럼 순수한 군인이라면 모를까. 아르카디우스 풀케르 같은 뿌리 깊은 정계 명문의 자손을?”
흥분에 빠르게 말을 내뱉었던 달마티카는 뒤늦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쁜 숨을 내뱉었다. 마르쿠스의 얼굴은 깊은 곳으로 가라앉아 있었고, 루키우스는 그런 그들을 외면한 채 연거푸 술을 들이켰다.
귓가에는 우웅 소리가 울리고, 빨라져 가는 심장 고동 소리가 이어진다.
창백한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떨리는 손으로 술잔을 거머쥔 그는 허공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페리스타일에서 황량한 바람이 부는 소리가 흐르던 때였다.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이어졌고, 빗물을 받는 항아리에 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정적을 깨는 나직한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식당 안을 울렸다.
“아우구스투스는 포스투무스에게 화의를 청하지 않았습니까?”
묵직한 말이었다.
달마티카 의원은 그 말에 묵묵히 포도알을 뜯을 뿐 답변을 바로 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르쿠스는 어두운 눈으로 그를 보았고, 마치 그 주제에 대해서 별로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하던 달마티카는 결국 시선에 이기지 못해 입술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래.”
빈 물 잔에 씨앗을 뱉어 버리고 달마티카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중얼거렸다.
“아우구스투스는 발톱을 숨긴 맹수야.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 그를 온화한 사람인 줄로만 알고. 아무런 방비를 하지 않았어.”
“…….”
“허나 중요한 것은 그가 선대 아우구스투스, 그의 형을 살해하고 저를 제위에 올린 군인들을 숙청하는 데 성공했다는 거다. 로마의 반역자가 그를 도왔지만, 그건 그의 오롯한 공이었지.”
장년인의 두 눈이 어둠 속 불빛처럼 밝은 빛을 내며 흔들리고 있었다. 침묵이 흐르고, 무거운 얼굴로 그를 바라보던 마르쿠스의 입술이 느릿하게 열렸다.
“저는 그가 몰락하기를 바랍니다.”
달마티카의 입술이 다물린 순간이었다. 그는 굳어진 얼굴을 돌려 도발적인 말을 내뱉은 사내의 얼굴을 보았고 그러곤 미간을 좁히고야 말았다. 마르쿠스는 긴 의자에 몸을 묻은 채 그 시선을 여유로운 웃음으로 흘려 넘기고 있었다. 그를 본 달마티카의 얼굴은 서서히 굳어지고 있었고.
느물느물하게 제 시선을 받는 마르쿠스를 어둑한 눈으로 노려보며 그가 입술을 열었다.
“아직도 야망은 포기하지 않은 건가?”
뜬금없는 말에 마르쿠스는 잔웃음을 흘릴 뿐이었다. 그는 잠시간 침묵을 지켰고, 묵묵히 포도알을 손으로 비틀어 따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네아폴리스와 이스카리아 섬은 전통적으로 속주 취급을 받고 있지요.”
“그건 어쩔 수 없지.”
“예, 알아요. 저도 압니다. 문화가 다른 것을. 하지만 저는 수백 년 동안 로마인이었고,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난 그걸 부정하지는 않아. 자네는 충분히 중앙에 진출한 자격이 있지. 명예로운 자리에 이름을 올릴 자격이 있으니까….”
마르쿠스는 잠시간 말없이 웃음을 흘리다가 입술을 열었다.
“의원님과 저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겁니다.”
달마티카는 피식 잔웃음을 흘리는 것으로 답변했다.
잡담이 뒤를 이었다.
“그나저나 아직도 로마 대검투장은 파울루스의 판돈이 가장 큽니까?”
다시금 분위기는 여흥에 물들었다.
무거운 이야기는 더 이상 없었다. 그들은 로마에서 떠오르는 신인 검투사를 이야기했고, 달마티카가 그의 지지자에게 피부색이 어두운 미소년을 선물 받은 일을 논했다.
“아이깁토스산이라네. 요즘 내가 가장 아끼고 있는 아이야. 나중에 로마에 온다면 소개를 시켜 주지.”
“이런, 너무 늦지 않게 로마에 들러야 하겠군요.”
그들의 대담에 루키우스는 끼어들지 않았다. 그는 묵묵히 포도주를 마시며 그들의 말을 흘려보낼 뿐이었다. 사실은 그럴 정신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어둠에 가려진 창백한 얼굴에는 가까이에서 보아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식은땀이 송골 맺혀 흐르고 있었다.
술잔에 담긴 연노란색 포도주를 보며 루키우스가 문득 입술 끝을 딱딱하게 굳혔다.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고, 포도주의 표면 또한 일렁거리고 있었다. 숨을 느릿하게 내뱉으며 루키우스가 피로에 찬 얼굴을 찌푸렸다. 견디기 힘든 두통을 느끼고 그가 관자놀이를 짚을 때쯤, 그 순간 그의 귓가로 나직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주인께 드릴 청이 있는데, 들어주시겠습니까?”
멈칫한 루키우스의 얼굴이 시간이 흘러 위로 들렸다. 그는 흐릿한 눈으로 말을 내뱉은 사내, 푸른 눈을 빛내는 장년인을 잠시간 응시하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그에 상황을 지켜보던 마르쿠스는 느릿하게 입술을 열었다.
“잠시, 저는 술을 깨러.”
그 말을 내뱉고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당을 빠져나갔다.
의식은 아득한 수면 아래로 헤엄치고 있었다.
‘아케론.’
남들이 보기에 사랑스럽다 생각을 할 만큼 수려한 청년의 얼굴이 회한에 젖어 있다.
‘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어?’
그는 내 생각을 할까?
곰곰이 생각을 하던 루키우스의 얼굴에 냉소가 스쳤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인데 기대하고야 만다. 수려한 얼굴에 피로가 물든 순간이었다.
몹시 지치고 힘들었다.
약에 취해 나른한 몸은 감각이 거의 마비가 된 듯했고, 귀는 먹먹했다.
그때 의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네아폴리스에 좋은 검투사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루키우스의 얼굴에 피로에 젖어 들고 있었다.
어느 정도 대화를 예상하고 있었다. 아니면 제 재산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올 거란 것도.
로마의 콧대 높은 정치인이, 그것도 로마 원로원 의원이 굳이 도시와 멀리 떨어진 제 저택을 방문할 일이 무에 있을까?
다만 루키우스가 이 자리에 나오는 것을 두려워한 까닭은… 그런 단순한 사안 때문이 아니었다. 희롱을 당하거나, 저를 후원하라는 압력을 받거나 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다.
“…예.”
루키우스는 그저 로마 본토인을 꺼릴 뿐이었다.
혹여나 ‘그’를 알고 있는 누군가를 마주할 상황을 두려워하면서.
“제 저택에 검투사 출신의 가노가 있습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흐트러지는 정신을 가다듬으며 루키우스는 의식적으로 차분한 목소리를 흘리려 애를 썼다.
“로마에 왔을 때 마르쿠스가 그를 엄청 자랑했는데, 누군가에게 팔았다는 소문을 들었지요.”
잔잔한 웃음이 흐르고, 미묘한 어조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카프리 섬을 살 돈을 준다 할지라도 ‘이스카리아의 왕’을 팔지 않는다 했는데.”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루키우스는 옅은 미소를 흘리며 벌꿀색 금발이 새하얀 뺨을 가리게 고개를 살짝 숙였다. 달마티카의 숨이 잠시간 멈춘 순간, 그리고 느릿한 목소리가 연회장 안에 내려앉았다.
“카프리 섬을 살 돈을 준 게 아니지요.”
“…….”
“돈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여기는군요.”
작은 웃음이 흐르고, 나직한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이해합니다. 경험해 보지 않는다면, 그렇게 착각하기 쉬운 일이니까.”
“…….”
“물론 어떤 문제는 황금이 소용없지만, 그래 그런 걸로는 해결될 수 없는 복잡하고도 숭고한 일이 있지만…… 이런 일은 그런 게 아니지 않습니까?”
“…….”
“……이건 그런 사안에 비하면 비교하기도 모욕적일 만큼 쉬운 일입니다.”
장년인의 멈추었던 숨이 느릿하게 흘렀다.
긴 의자 밖으로 몸을 기울인 루키우스가 선명한 자안을 섬뜩하게 빛내며 말을 이었다.
“저는 거금을 들였고, 그를 제 저택에 들였습니다. 그러니 혹여라도 그를 원한다는 말을 하신다면…… 제 대답은 한결같습니다. 그는, 오롯이, 나의 것입니다. 아우구스투스가 직접 찾아온다 해도 난 그를 팔지 않는다고.”
그에 대한 답변은 꽤나 시간이 흘러 돌아왔다.
“……꽤 위험한 말을 하는군.”
바닥을 뱀처럼 기는 목소리에는 경고의 뜻이 완연하다.
“저는 아케론을 놓을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루키우스는 그런 그의 마음을 모르는 듯 냉소를 흘릴 뿐이었다.
“원하시는 건 그것뿐입니까?”
달마티카는 그를 어둑한 눈으로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 눈은 마치 탐색을 하는 하이에나의 것이었다. 시선의 대상이 된 이는 차분히 술을 기울일 뿐이다.
루키우스는 술에 취하려 작정을 한 사람처럼 포도주를 들이마셨다. 그는 과음을 하고 있었다. 어느새 목은 발긋하게 달아올랐고 숨은 가빠져 있었다.
옅은 솜털이 난 불그스름한 목덜미에서, 가쁜 숨이 흐르는 발간 입술에서 달마티카는 시선을 떼지 못했다.
목소리가 흐른 것은 꽤나 시간이 흘러서의 일이었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그에게 그리 집착하시는 겁니까.”
“내가 그 이유를 알려줄…”
“이유가 충분하지.”
루키우스가 입술을 부리 닫듯 다물었다. 무거운 눈으로 저를 응시하는 그를 달마티카는 상체를 기울이며 노려본 채 말을 이었다.
“로마 원로원 의원이 가진 권한은 무궁무진합니다. 나는 10년 동안 유다이아에서 군 복무를 했고, 명예로운 경력을 거쳤습니다.”
음습한 목소리.
“나는 당신에게 경의를 받을 자격이 충분합니다.”
루키우스의 입술이 잘게 떨리고, 이내 침묵이 이어졌다. 달마티카는 매와 같은 눈으로 그를 경고하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위세가 서린 시선에 루키우스는 입술에 대었던 잔을 힘겹게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육중한 말이 내려앉았다.
“한낱 아카이아 촌구석에 틀어박힌, 관직도 뭣도 없는 철없는 어린 청년이 무시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지.”
“……이스카리아는 아카이아도, 속주도 아닌 로마의 지역구입니다.”
무거운 얼굴로 말을 하는 그의 금색 속눈썹이 나비처럼 나풀거리고 있다. 그는 제 얼굴을 집요하게 노려보는 이의 시선을 피하려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짙은 속눈썹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루키우스의 수심에 젖은 듯한 얼굴을 집요히 바라보며 달마티카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이스카리아가 정말 라티움과 동격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믿겠습니다.”
말은 마르쿠스와 농지거리를 주고받을 때와 비교할 수 없이 침착해져 있었다.
루키우스는 그에 결국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무얼 원하시는 겁니까?”
루키우스가 이를 악물었다.
달마티카를 어둑한 눈으로 노려보는 루키우스의 얼굴에는 여유란 사라진 후였다. 달마티카는 그에 비로소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돈이 필요하네.”
굽혔던 허리를 다시 펴며 의원은 빙긋 웃음을 흘린다. 루키우스의 얼굴에 핏기가 빠르게 가시고 있었다.
“클리엔테스를 양성하는 덴 돈이 많이 필요하지. 정치가의 지갑에서 흘러나오는 돈이 라티움 내수 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리라 장담하고 있다는 말이야.”
달마티카가 쟁반 위의 청포도 알을 손으로 떼어 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지금 로마 정계는 혼잡해. 아우구스투스는 야욕을 드러내며 원로원의 권한을 줄이고 있지. 감히 옥타비아누스21)도 인정한 탄핵권을 박탈하려고……. 음, 그대가 모를 일이지만, 정치가의 역할이 중요한 때요.”
더 이상 스스로를 숨기려 하지 않는 의원을 루키우스가 일그러진 얼굴로 노려보았다.
“많은 세력을 거느리고자 했고, 지나친 지출을 했소. 부득이하게도 후원자를 찾아야 할 만큼.”
루키우스는 제 얼굴을 샅샅이 쓸어내리는 시선을 느끼고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리라를 켜듯이 움직이고야 말았다.
“…그러려고 했지.”
사막같이 건조하고 뜨거운 시선이 무얼 원하는지 잘 안다. 사내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 왔던 루키우스는 달마티카가 내보이는 탐욕을 잘 알았다.
목구멍에 치미는 욕지거리를 참으며 루키우스가 필사적으로 그의 시선을 피하려 들었다.
“정치 자금을 원하시면,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침묵 끝에 루키우스가 간신히 말했다. 그 순간 달마티카의 시선이 긴 의자 밖으로 늘어트린 눈부시게 새하얀 발을 훑고 있었다.
“원하시는 돈을 드리겠습니다. 허나 저택의 재정이…… 마르쿠스가 언질한 대로 넉넉지 않을 겁니다. 아시다시피 검투사를 구매하느라 상당히 무리한 자금을 썼기 때문에 제 수중에 있는 데나리우스22)는 정치 자금에 쓰일 만큼….”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어나가는 루키우스를 달마티카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러곤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충분하네.”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후원자를 찾으려 했지.”
“…….”
“분명 그러려고 했네. 허나 그건 주된 이유가 아니야……. 당장에 급하지는 않았소.”
루키우스의 새하얀 이마에 봄 녘의 햇볕처럼 밝은 금발이 살랑거렸다. 가냘픈 몸이 떨리고 있었다. 루키우스가 푸르스름한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럼….”
“나는 헬리오스 축일을 그저 즐기러 온 거요. 복잡한 정계의 일에서 멀어져 머리를 식히려고.”
“…….”
“친애하는…… 나의…… 벗, 마르쿠스 헤르티우스 집정관과…… 소문의 검투사의 경기를 관람하고….”
“…….”
“…추억을 쌓으려고.”
목소리는 욕망을 꿀처럼 뚝뚝 흘렸다.
시선은 루키우스의 하얀 몸을 노골적으로 살폈다. 루키우스는 숨을 헐떡거렸다.
부들부들 몸을 떠는 그를 들끓는 욕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달마티카가 돌연 부드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재정이 부족하지만 그렇게 급한 건 아닙니다.”
그리 말을 내뱉곤 달마티카는 의자에 기댄 상반신을 일으켜 루키우스를 향해 손을 뻗었다. 흠칫한 루키우스의 금발을 손가락에 감으며 사내는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루키우스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금발을 손가락으로 휘감는 달마티카가 고개를 숙였다. 루키우스의 심장 소리가 빨라져 있었다.
“이, 이건….”
숨을 헐떡거리며 내뱉은 항의의 말을 달마티카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그 매끄러운 금발에 코를 박을 뿐이었다.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울렸다. 사내의 눈에 동공이 풀리고 황홀한 빛이 얼굴에 스친다.
“제가 말을 하는 바를…… 모르시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는 루키우스의 머리카락의 냄새를 맡는 데 심취한 듯 보였다.
“의원님, 지금….”
“금을 녹인 듯한 머리카락.”
달마티카가 가는 머리카락을 입에 물며 속삭였다.
“얼음처럼 투명한 피부…… 체리를 베어 문 듯한 발긋한 입술…….”
“…….”
“켈타이의 피가 섞였나? 이렇게 선명한 자안이라니, 믿을 수가 없군.”
머리카락에 뺨을 비비던 달마티카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루키우스를 바라보았다. 잘게 몸을 떠는 루키우스의 얼굴에 분노가 일견 스쳤다. 그러나 그는 입술을 깨물 뿐 저를 희롱하는 사내를 완전히 떼어 내지 못했다.
억눌린 숨이 느릿하게 뱉어져 나간다.
“보는 순간, 신이 만들어낸 걸작품인 걸 알았지.”
인형처럼 앉아 있는 루키우스의 모습에 만족한 듯 달마티카는 웃음을 흘리며 손가락에 휘감긴 달콤한 금발에 연신 입술을 맞추었다.
그 행위의 의미를 루키우스가 모를 리가 없다.
“조금, 불편합니다.”
이를 악문 루키우스가 달마티카를 창백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정직한 인상의 로마 의원의 얼굴은 취기로 발그스레 달아올라 있었다. 숨결이 섞이는 거리. 색색 가쁘게 숨을 내뱉는 루키우스의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며 달마티카가 손가락에 휘감은 금발을 내려놓곤 느긋이 말했다.
“허황된 짓은 하지 않아요. 그 정도로 염치없진 않습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는 마치 아이를 달래는 부모와 같다.
“나는 로마법을 지킵니다. 로마 원로원의 일원은….”
그 가증스러움이란. 달마티카는 제 말을 단 한 시간도 지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가 의자에 기댄 루키우스의 몸을 향해 손을 뻗었던 것이다. 루키우스의 얼굴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순간, 그의 입술 밖으로 비명이 흘렀다.
“이거 놔!”
연회장에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가 울렸다.
루키우스의 손에 밀쳐져 탁상 위 포도주를 엎은 달마티카가 비틀거리는 몸을 바로잡고 있었다.
“감히!”
그의 눈에 불꽃이 스쳤다.
“아, 아….”
의원을 밀친 루키우스가 몸을 떨고 있었다. 식탁에 자리했던 포도주가 떨어져 달마티카의 토가를 뚝뚝 적시고. 루키우스는 꽤나 긴 시간이 흘러서야 간신히 목소리를 흘릴 수 있었다.
“시, 실례를….”
“자주색이 부분적으로 허용된 토가는 원로에게 허용된 옷이지!”
달마티카가 빠르게 쏘아붙였다.
“이를 더럽히다니 그 책임을 어떻게 질 생각이십니까?”
“데, 데나리우스를….”
“나는 속이 좁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대!”
달마티카가 문득 유쾌한 웃음을 흘렸다. 속에 살기를 내포한 것이다. 루키우스는 사냥꾼 앞에 선 토끼처럼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웃음이 담은 정염에 전율하고 있었다. 겁에 질린 그를 들끓는 흉포한 눈으로 바라보던 달마티카가 손에 쥔 포도주잔을 바닥에 내던지며 음습하게 웃었다.
“……처음 보는 순간부터 생각했지.”
깡!
데구르르.
포도주잔이 바닥에 부딪혀 찌그러졌다.
“자그마한 입술이 포도주에 젖는 모습이 황홀하다고.”
루키우스의 숨이 거칠어져 가고 있었다.
“이, 이러지 마시….”
달마티카의 눈에 핏줄이 불거져 있었다. 제 미래를 예감한 루키우스의 얼굴이 창백해져 갔다.
“나는, 로마 시민인….”
그건 쓸모없는 발악이었다.
“그 잘난 로마 시민의 자격으로 나를 고발해 보든가!”
흉악함을 드러낸 달마티카가 손을 뻗는다!
루키우스는 무기력하게 그의 손길에 이끌려가 몸을 무너트렸다. 악 소리가 흐르고 쿠당탕 물건이 떨어져 내렸다. 탁상 위로 가냘픈 몸을 던진 달마티카 의원이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새하얀 몸. 불그스름한 뺨에 흐트러지는 금발. 공포에 질린 얼굴.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것이다. 신의 걸작품이다.
달마티카 의원은 홀린 듯 그 걸작품에 손을 뻗었다.
두툼한 손이 그의 허벅지에 닿을 때 루키우스는 사지를 뒤틀며 발악을 했다.
“이거 놔! 악!”
“가만히 있어!”
버둥거리는 루키우스의 사지를 누르고 달마티카가 충혈된 눈을 빛낸다. 흔들거리는 풍성한 금발을 움켜쥔 달마티카가 두 눈을 번뜩 빛내며 손을 들었다. 짜악! 소리가 흐르고, 비명이 비산했다. 붉어진 뺨. 터진 입술. 입가에 피를 흘리며 루키우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그의 저항은 소용이 없었다.
“안 돼, 안…!”
유다이아에서 10년이 넘게 복무한 사내는 루키우스의 몸을 단숨에 깔아뭉개고, 움직이지 않게 제압했던 것이다.
거친 손이 움직이고, 부욱 소리가 흘렀다.
“아아!”
달빛을 머금은 새하얀 육신이 드러난 순간 탄식이 흘러나왔다.
“오오, 이 아름다운….”
루키우스의 얼굴에 절망이 흘렀다.
추잡한 사내에게 육신이 희롱당하기 직전이다. 두꺼운 손이 루키우스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그 순간 루키우스의 눈이 충혈되었다. 이를 까득 악물며, 저를 탐하려는 사내를 핏발이 서린 눈으로 노려보며 루키우스가 마음속에 말을 되새겼다.
‘괜찮아! 그는 내 영혼을 범하지 못한다.’
그는 나를 손상 입힐 수 없다.
저 열등한 자는 평생 혼을 불태우며 살았던 나를 훼손할 수 없다.
절대로 나를….
그러나 스스로를 세뇌하던 루키우스는 결국 무너지고야 말았다.
그 순간 한 사내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아, 아케론!’
어쩔 수 없이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지성과 의지가 폭력에 짓밟히는 상황에서 스스로의 나약함을 느꼈다. 훼손을 예감했다. 파멸을 마주하고 있었다. 아아아! 처절한 절규를 흘리며 루키우스가 목을 뒤로 꺾었다. 그 순간 영혼을 하늘 높게 부유하게 했던 고요한 푸른 눈을 떠올렸다.
그 순간 루키우스의 얼굴에 간절함이 스쳤다.
“아케…….”
그것은 영원한 사랑의 이름이었다.
“아케론.”
그리고 기적의 이름….
“누구냐!”
그러니까 그 이름의 주인은 항상 루키우스가 필요로 할 때 그의 눈앞에 등장했다.
콰앙!
탁자 위에 축 늘어진 몸이 가늘게 떨렸다. 자색 눈동자가 크게 떠진 순간이었다.
귓가에 스치는 웅성거림.
비명과 고함!
그리고 고개를 돌린 루키우스 앞에 자리한 것…….
“이 무례한 놈! 감히 네가 누구 앞에서 이따위 행패를 부리는지 아느냐?”
강인한 사내가 연회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솔론과 마르쿠스의 만류를 뿌리치며 그는 빠르게 대리석 바닥을 밟았다. 추한 꼴을 들킨 달마티카가 부끄러움을 삼킨 채 소리쳤다.
“나는 로마 원로원의 일원이다! 너 같은 비천한 노예 따위는….”
그러나 아케론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다.
‘아….’
폭발하는 별 같은 눈을 루키우스는 홀린 듯 바라보고 있었다. ડχ
아케론이 몸을 움직였다.
‘…케론.’
바닥에 떨어진 고기 자르는 칼을 쥐어 든 아케론이 달마티카의 어깨를 잡아 쥐었다. 아케론의 깊게 가라앉은 눈이 달마티카를 담았다.
그리고.
푹!
선혈이 튀었다….
“끄, 억….”
“안 돼!!”
루키우스는 회피하지 않았다.
아케론의 검이 달마티카의 목을 꿰뚫는 순간에 루키우스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시선을 떼지 않았다.
아케론은 망설이지 않았다.
달마티카의 목을 검으로 꿰뚫는 그 순간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 사내는 오로지 루키우스만을 바라보았다.
“의, 의원!”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냐!”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울컥 치솟고, 비명이 비산하는 순간 눈과 눈이 마주하고 있었다.
“아아, 로마 원로원 의원이… 이스카리아 섬에서…!”
아! 폭발하는 별과 같은 눈.
‘너는.’
물기가 번지는 눈이 피에 젖은 강인한 사내를 담고.
‘너는 항상 내가 필요할 때 내게 나타나.’
기적의 이름을 가진 사내가 불꽃이 타오르는 두 눈으로 루키우스를 내려다보았다.
루키우스의 뺨을 타고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장군!’
*
그때도 그러했다.
“무가치한 삶은 어째서 계속되어야 하는가?”
“뭐?”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사내. 험지를 오고 다녀 사람들 앞에서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 그 사내를 두 번째로 마주할 수 있던 것은 행운이었다.
“삶의 가치를 느끼지 못하겠다면,”
그리고 그날, 카이사르의 결혼식 피로연에서 루키우스는 술에 취한 듯 불그스레한 얼굴로 연회장 밖을 향하는 사내의 등 뒤를 따랐다. 술을 깨려는 듯 잎이 무성한 상수리나무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고 있는 사내의 머리 위로 우수수 낙엽이 흔들거리고 있었다.
“타인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기점에서 열정을 느끼지 못하는 무미건조함으로…… 살아가는 걸 납득하지 못하겠다면.”
그를 바라보던 중 충동을 참지 못해 내뱉은 말이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게르마니쿠스.”
어둠 속에서 사내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밤에 빛나는 사파이어 같은 눈을 마주하며 루키우스는 돌덩이처럼 굳은 심장이 깨어져 가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무심한 눈을 깜빡이며 사내는 어둠 속에서 루키우스를 응시했다. 계단에 걸터앉아, 손으로 턱을 괸 채 팔꿈치를 허벅지 위에 얹은 자세. 다리를 까딱거리는 루키우스의 모습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같았다.
루키우스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것은 그저 충동적으로 던진 말일 뿐이다.
그가 한낱 어린아이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흘린 말에 진지하게 대답하리라 기대하지 않았다. 다만 루키우스는 어둠 속에 빛나는 푸른 불빛이 저를 응시하는 느낌이 좋아 그의 시선을 돌렸을 뿐이다.
이것은 처음으로 그와 대답을 섞는 순간이었다.
침묵 끝에 흐른 담담한 목소리.
“왜 네 삶을 무가치하다 가정하지?”
우수수, 나뭇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뒤를 이었다. 술이 과한 듯 사내의 목소리는 희미한 고통을 머금고, 갈라져 있었다.
“다들 그렇게 말하니까.”
까닥거리던 루키우스의 발이 멈추었다.
“그게 중요해?”
“아닌가요?”
뜻밖에도 전 로마의 영웅은 한낱 어린아이의 말에 웃지 않고 답했다.
“하긴, 그렇군.”
무심하게 중얼거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희미한 유쾌함이 묻어 나왔다. 루키우스는 제가 가볍게 시작되었던 대화에 어느 순간부터 진지하게 집중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타인이 뜨겁게 불타오르는 기점에서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너는 무엇에 열정을 느끼지?”
어둠 속에서 두 눈은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곧은 시선에 겨냥되어 루키우스는 순간 농담을 할 기력을 완전히 잊고 입술을 조개처럼 꼭 다물고야 말았다.
어둠 속 인영은 시선을 거두고 무심한 목소리를 연이어 흘렸다.
“더 찾아봐라. 신이 너를 세상에 내린 이유가 한 가지는 있겠지.”
루키우스는 저도 모르게 울컥한 목소리로 말을 내뱉고야 말았다.
“답을 피하기예요?”
사내는 더 이상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고, 비틀거리며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내가 왜 계속 살아가야 하죠? 게르마니쿠스. 로마의 영웅이면 내게 답변해 주세요.”
부러 저를 피해 쪽 길로 걸어 들어가는 사내를 향해 루키우스는 눈매를 매섭게 뜨며 앙칼지게 말을 걸고 있었다. 그러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고, 루키우스는 점이 되는 인영에 조급해져서 언성을 높이고야 말았다.
“피곤해서 더 이상 살아갈 수가 없을 것 같아요!”
그리고였다. 사내의 걸음이 우뚝 선 것은.
잠시간 정적이 흘렀다.
그리곤 사내는 무덤덤하게 말을 내뱉었다.
“가치가 있어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그를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는 거다.”
느릿하게 흐른 말에 루키우스의 얼굴이 굳어져 갔다.
“적어도 나는 그리 생각하고 있어. 언젠가 나의 길이…… 이 길이 맞는지 눈에 보일 거라고…….”
어둠 속으로 파묻히는 사내의 등 뒤, 말의 여운을 좇으며 소년은 몸을 떨고 있었다. 한참의 시간이 흘러서도 루키우스는 계단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 순간 그가 느낀 것은 바로….
‘그렇다면 내 숙명은…….’
그와 닿아 있겠구나.
*
마르쿠스가 도망갔다.
솔론이 식당 안에 들어오려다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걸음을 우뚝 세웠다.
피에 젖은 아케론이 뜨거운 숨을 헐떡거리며 루키우스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루키우스가 탁자에 늘어진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여기에는 왜 왔지? 이 어리석은 놈! 도대체 여기엔 왜 온 거야.”
실핏줄이 서게 두 눈을 부릅뜨며 내뱉은 말은, 사실은 비탄 섞인 탄식에 가까웠다.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이글거리는 눈에 자리한 감정의 이름을 알기에 루키우스는 더욱이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그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고 거부하려 할 뿐이었다.
“너를, 너를 채찍질할 거다…!”
도대체 너는 왜 그러는 거야!
“너를, 너를……. 너를 채찍질할 거야.”
“…….”
“너를…….”
악에 받쳐 소리치는 루키우스를 말없이 바라보던 아케론은 그리고 그 순간 발걸음을 옮겼다. 루키우스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 손을 뻗었다.
손은 그의 뺨을 움켜쥐었다.
“노예가.”
루키우스의 몸이 우뚝 선 순간이었다.
매의 것과 같은 이글거리는 눈이 그를 노려보았다.
“노예가 된 이후로….”
발작이 멈춘 순간, 루키우스의 입술 밖으로 느릿하게 숨결이 흘렀다.
“자유를 잃고 물건이 되어 시장에 팔리고…….”
아케론은 흥분을 죽이지 못한, 떨리는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을 내뱉고 있었다.
“사람을, 사람을 타인의 유흥을 위해 죽이고.”
그 순간 루키우스는 부유하는 혼을 볼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하늘 높은 곳으로 치솟는 영혼을….
“그런 굴욕을 겪고도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분노를….”
미숙한 어린아이가 잘못을 고해하듯이 말을 잇던 아케론이, 어느 순간 이를 악물었다.
“당신의 앞에서 느낍니다.”
헐떡거리는 숨소리.
“부정하려 했는데.”
그는 힘겹게 말을 잇고 있었다.
“참으려 했는데.”
무너져 내리는 아케론의 얼굴은 루키우스가 원한 것이었으나, 그는 기뻐할 수 없었다.
“그렇게 참고, 참고 또 참으면서….”
아, 이건….
“눈에 어른거리는 그 형체를 못 본 체하려 했으나.”
절망을 느끼며 루키우스가 눈물을 흘렸다.
“이 모든 게 연극임을 알면서도.”
무너져 내리는 극을 마주하고 있었다.
“네가 날 기만하는 것을 알면서도…….”
아케론의 얼굴이 완전히 허물어져나갔다.
뜨거운 쇠공같이 들끓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네가 미칠 듯이 사랑스러워.”
그러곤 그의 손이 빠르게 뻗어져 나갔다. 아케론이 루키우스의 뺨을 부여잡았다. 홉떠진 자안. 겹치는 입술.
아케론은 격렬한 열정을 띤 얼굴로 루키우스의 입술을 탐했다. 루키우스가 눈을 부릅뜬 채 눈물을 흘리며 아케론의 등을 손으로 부여잡았다. 그리고 그는 살갗으로 전해지는 빠른 심장 소리에 헤어날 수 없이 빠져들고야 말았다.
화염은 몸을 타고 번졌다.
루키우스의 보라색 눈이 홉떠져 있었다. 못 볼 것을 보듯이 확장된 눈에는 소리 없는 눈물이 흘렀다.
그 순간 그가 마주한 것은 비상하는 수리였다.
로마, 그 아름답고 자유로운 애증의 조국!
우당탕!
무너지는 화병을 신경 쓰지 못한 채 루키우스는 결국 사내의 열정에 헤어날 수 없이 빠져들었다. 제 몸을 짓누르는 사내의 몸을 거세게 끌어안으며, 몸을 열면서.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함을 느끼면서도, 루키우스는 영혼까지 불태우는 불길에 몸을 내어 주었다.
제 몸을 짓누르는 사내의 몸을 부둥켜안으며 그가 울음을 터뜨렸다.
‘아…… 나의 열정!’